Commentary No. 277, Mar. 15, 2010

 

좌파의 오랜 딜레마: 브라질의 경우

("Ancient Dilemma of the Left: The Case of Brazil")

 

 

 

 

노동자당(PT) 창당 30주년 경축일에, 브라질의 주요 독립좌파 언론 <브라질 드 빠토>에서는 네 명의 주요 좌파 지식인들과 나눈 인터뷰를 실었다. 넷 모두 노동자당 창당 멤버로, 과거에 적극적 활동을 펼친 이들이었다. 이들 중 셋이 노동자당을 나왔다. 브라질공산주의당(PCB) 창당에 참여한 역사가 마우로 아이아씨, 사회주의자유당(PSOL) 당원인 사회학자 프란시스코 드 올리베이라, 독립좌파 역사가 루다 리씨가 그들이다. 네 번째 인터뷰 상대였던 역사가 발터 포너는 노동자당 내 좌익분파의 주요인물로 남아 있다.

 

이들 네 사람은, 리씨가 언급한 바, “어떻게 하면 대중적이면서도 좌파적일 수 있느냐 하는 브라질 좌파의 오랜 딜레마”를 놓고 놀라울 정도로 상이한 분석들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 딜레마는 물론 전세계 좌파에 공통된 것이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브라질은 그같은 딜레마를,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분석하기에 흥미로운 장소다. 브라질은 오래 되고 활력에 찬 정치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오늘날 많은 당들이 경합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근래 들어, 특히 10년 정도 사이에 국내 경제 상황이 크게 나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권역에서 정치적으로 큰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다. 한 정당의 “대중성”과 그 당이 좌파로서 지녀야 할 신뢰성을 우린 각각 어떻게 재어보고 평가해야 할까?

 

<브라질 드 빠토>의 인터뷰어는 말문을 열며 다음의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통칭 “룰라”라고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브라질의 재민주화 이후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노동자당이 창당 후 줄곧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에 위치한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불려왔다는 점이다. 인터뷰가 역설한 바, 노동자당은 좀더 대중적이 되고자 “실용 노선/실용주의에 양보를 해야 했다”.

 

이같은 전제에 대해, 인터뷰에 응한 네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리씨가 판단컨대, “룰라주의”는 노동자당이 창설된 애초 취지를 주변화시키는 가운데, 당보다 더 중요해졌다. 노동자당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화”된 셈이었다. 노동자당은 오늘날 그저 선거기계에 불과하다. 좌파는 대중적이게 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는데, 좌파가 이에 관한 “이론화의 뿌리를 유럽에다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대중(혹은 민중) 문화는 “복합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 룰라는 이같은 문화를 매개로 말걸기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당은 국가주의적이고 발전주의적이며, 따라서 보수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문제는 노동자당이 애초에 내건 바,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않는, 민주적 좌파의 이상향”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아이아씨가 보기에, 노동자당은 브라질의 두 주요 정당 중 하나, 즉 “쁘띠 부르주아” 프로그램을 가진 중도좌파 정당이 됐다. 지지 규모(가 커진) 대신 노동자당이 치렀던 댓가란, “애초에 세웠던 원리와 정치적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룰라주의” 또는 “포퓰리즘/대중추수주의”는 다수대중을, 자신들의 이해와는 무관한 정책들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양식이다.

 

올리베이라한테, 노농자들과 해방신학, 민주화운동들에 기반을 두고 출범했던 노동자당은 그저 브라질 정당체계에서 “일반적으로 뿌려놓는 마말레이드(달달한 맛을 내는 양념)”의 일부가 됐다. 사회주의적인 전망은 “가난한 이들”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열악한 처지를 드러내주는) 계급 분석에 기반하는 것이다. 노동자당의 국민통합(estatizaçao) 프로그램으로 말하자면, 이는 한 1백년은 시효가 지난 것으로, “국가주의라는 유아적 증상”의 일부다. 그것은 브라질소재 산업들을 강화하려는 프로그램이며, 좌파(적 가치)나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포너는 같은 상황을 아주 다르게 본다. 그는 룰라 정부가 처음에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을 지향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2005년 이후, 집권당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 그가 말하길, 노동자당은 발전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주의도 두 가지 변주된 형태가 있으니, 보수적 노선과 대중적 민주 노선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논쟁(의 대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들 네 사람 중 셋이 밝힌 분석에서 놀라운 것은 “포퓰리즘”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하나 놀라운 건, 네 사람 모두 (브라질의) 지정학에 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질 드 파토>에서 인터뷰기사를 실은 지 며칠 후, 피델 카스트로가 (중도좌파 성향의 멕시코 일간지) <라 조르나다>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글 “성찰” 중 일부를 책으로 묶어 펴냈다. 룰라는 마침 카스트로와 함께 멕시코에 체류중이었다. 카스트로는 룰라를 30년 동안, 그러니까 노동자당 창당 이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쿠바가 겪어온 역사와 어려움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최근 칸쿤에서 열린 회의에서 쿠바를 포함하고 미국·캐나다는 배제한 라틴아메리카-캐러비안 권역 공동체 창설에 합의한 일이라고 했다. 이 회의(의 성과)는 대부분 룰라가 일궈낸 것이었다.

 

카스트로는 이어서 룰라가 대통령직 퇴임을 앞두고 그의 책 출간을 축하하러 멕시코에 들른 일이 지닌 “중요성과 상징적 효과”에 무게를 실었다. 카스트로는 1980년대 “소박하게 살고 있던 룰라와 그의 아내,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감동”을 회고했고 “나무랄 데 없는 겸허함으로 벌여온 투쟁 속에서 그가 보인 낙천성”을 높이 샀다. 여기선 룰라주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찾아볼 수 없다.

 

브라질의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던 모든 것을, 카스트로는 칭찬했다. 브라질의 기술적 발전이라든가, GDP의 성장, 세계 10대 경제권 중 하나가 된 데 대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 자신은 반대 입장을 밝혔던 (옥수수)에탄올 생산 문제에 대해서조차, 그는 룰라를 욕하지 않았다. “미합중국 및 유럽의 부정의한 경쟁과 보조금지원에 직면한 가운데, 브라질에겐 에탄올 생산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을 난 충분히 이해한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거 하나만큼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금속 노동자가 온 국가를 망라한 회의에서 존중받는 목소리를 내는 두드러지고 뛰어난 정치가로 스스로 탈바꿈했다는 사실 말이다.”

 

어떻게, 브라질 좌파 지식인들과 카스트로가 이끌어낸 룰라에 관한 그림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그들이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브라질의 좌파 지식인들은 주로 브라질 내부의 삶에 주목하고 있고, 룰라가 잘 해봐야 중도좌파 실용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주로 브라질과 룰라의 지정학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같은 위상은 그가 보기에 주적인 미합중국 제국주의를 부식시키는 변수 중 하나다.

 

좌파 정치인들은 그러면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까? 이게 그저 브라질만의 문제인 건 아니다.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근대 세계체제의) 거의 모든 곳에서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물론, 해당 국가의 역사와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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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애편지 2010/03/22 0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들사람님의 번역 감사합니다.^^
    음... 최근에 레디앙에서 브라질에 관한 글을 읽었는데 윌러스틴과는 사뭇다른 관점이네요. 레디앙에서 연재했던 글은 한국의 사회상황에 적용하기 위해서 그런지 몰라도...

    저는 왠지 룰라의 모습이 지난 한국의 민주화 정부보다 왼편에 있는 정도(?)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최근에 브라질의 발전과 관련하여 브라질 정부가 취하고 있는 약간 국가발전주의적인 정책에 대해서도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지만, 음 과연 어떤 결과를 이루게 될지 사뭇 궁금해지네요.

    • 들사람 2010/03/22 0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랬군요.. 전, 못 보고 지나쳤던 모양인데..

      암튼 한국 같은 장소에선, 계급분석과 지정학을 어떻게 좀더 효과적인 하나의 인식틀로 지양해낼 거냐가 중요할 거 같슴다.

      특히 한국판 제노사이드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1980년 5.18 광주학살 이후 한국의 운동 진영에선, 아마도 이런 구도가 상대적으로 비주류였던 피디와 주류였던 엔엘로 양분돼 왔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엔엘식 정세인식이 북조선노동당조차 비공식적으론 기각했을지 모를 반식민지-반봉건사회론 따위를 여즉 견지하거나 고작해야 수선만 하고 있는 만큼, 그 허섭스러움이라든가 전혀 역사유물론적이지도 않은 이론적 물화 상태야 뭐 별 상론을 요하지 않는다 쳐도, 중요한 건 그나마 계급분석의 중요성을 견지한 피디 쪽에서 어떤 내적인 갱신과 확장을 이뤄낼 거냐일 듯합니다. '분단현실'이란 조건을, 계급 분석의 명료성을 흐리는 외재적 변수 따위가 아니라 엄연한 내적 성분으로 재인식할 좌파적 이론화가 이뤄져야겠다고 할까요. 그래야, 이를테면, 김대중 정부의 확실히 주요한 업적이라할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김대중씨가 민족화해 무드와 남북간 평화엔 일정하게 기여했지만 사회적 양극화에도 기여했다 식으로 마치 그 둘을 따로 떼놓을 수 있는 양 단편화하진 못 하게 되지 않겠나.. 일테면 삼성연 같은 지배적 자본의 두뇌가 짜낸 동북아물류국가 전략 같은 구상은 김대중 정부의 민족상생의 시장경제 노선과 이미 별개가 아녔던 셈인데, 그렇다면 이같은 기조로 쥐어짜이게 될 남과 북의 주민들을 처지를 잘 드러내줄 계급분석틀 속에 이같은 민족화해 기조가 이미 녹아들어 갔었어야 했다는 거겠죠. 적어도 앞으론 이런 걸 경제 분야야 통일 분야로 나눠, 경제는 미나 양, 통일은 수 식으로 평가하는 식이어선 곤란하겠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엄연히 줄곧 염두에 둬야 할 정세의 일부인, 통일 쪽 논의를 끌어오는 데 아예 인색해서도 안 되겠고요.

      제가 보기엔 이를테면, 구갑우 선생이 스스로는 입론이라고 보는 '국제정치학 비판' 논의가 이같은 분단 현실이란 지정학적 조건을 기존의 계급론에 내화시킨 새로운 계급 분석틀을 발전시키는 데 꽤 유효하겠다는 생각입니다만.. 이를테면 민족통일이 아니라 탈분단이라는 문제틀에 적합한 계급 주체형성의 (국제)정치를 모색하는 데 적합하겠다고 할까요. 이런 점에 비춰 보면 엔엘계의 국제정세 인식은 그저 북한이 불리할 테만, 좌파적 색채를 띨 뿐 국가간 체제 전반의 동학 속에서 나타나는 지구적 계급적대 구도 얘기로 넘어가면 애당초 보수적인 조국사랑 마인드의 해악을 드러내고 말져. 실천적인 전투성과는 무관하게 이론적으로 그만큼 주류화돼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요,. 이론(화)의 필요성 얘기만 하면 대중을 우습게 여기네 엘리트주의네 뭐네 하는데, 정작 그런 얘길 하는 자신들의 그 통일조국 건설론들이 한때 엘리트들의 머릿속서 제련됐다는 건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 참..;

      적어도 이론적으론 이미 '해소'됐거나 실천적으로도 자유주의 진영으로의 흡수밖엔 별 달리 돌파구가 없겠다 싶은 엔엘식 정세인식법하고는 달리, 피디식 정세인식법은 그나마 계급분석에 바탕하려는 기본지향상, 해소는커녕 발전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면 무진했지 견적이 아예 안 나오는 건 결코 아니지 싶네요(거꾸로 말함 제가 느끼기론, 피디쪽 상황도 척박하기로 치면 만만치 않아 보인단 얘기겠습니다만..). 분단현실에 계급분석적으로 개입한다는 게 과연 어떤 것일 수 있을지 하는 질문은, 물론 그간 엔엘계가 이런 개입을 하고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제가 보기엔 이게 그쪽의 장기인 자기만족적이고 심하게 말해 자기기만적 진단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지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정치적 '프론티어'에 가깝잖나 싶어요. ^^

      분단현실을 거론되면, 은근히 골치 아프고 정치적으로도 해악적인 "민족" 주체화 양식의 문제가 불거지니, 아예 피하거나 선언적으로 무찌르고 마는 식의 접근방식은 실상 엔엘계의 '허약한 주도권'을 본의 아니게 지속시켰던 건 아닌지 자문해 봐야겠다 싶더라구요.. 이른바 민족(주의) 담론의 문제설정이 인터내셔날해지지 않을 경우 정치적으로 해악적이기 십상임을 분석하는 것과, 그런 담론이 거의 일상화돼 있는 현실에 좌파적으로 개입해 실천 지형을 좌파적 계급형성의 정치에 유리하게 바꿔가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란 얘기기도 하죠. 제가 보기에, 전자는 중요할지라도 어디까지나 후자에 이론적 나침반 역할을 하는 거지, 어떤 정세개입적 실천 그 자체인 양 간주돼선 곤란하단 얘기기도 할 검다.

  2. 马圣恩 2010/03/22 00: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을 매끄럽게 번역하여 주신 데 감사 드립니다. 특히 마지막 문단이 무척 인상적이로군요.

    • 들사람 2010/03/22 07: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매끄러웠다니 다행이네요.ㅋ

      네.. 월옹 같은 이야, 이른바 보편/특수라는 이분법이 지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해악적라고 보니까요. 특수를 보편의 결여나 부족으로, 보편을 특수가 (빼)닮아야 할 어떤 지향이나 목표로 간주하는 식의 접근법들. 이 구분을 허물고, 특수한(유럽중심적) 보편 담론의 지구적 헤게모니가 어떻게 국지적인 맥락 속에서 진정으로 보편적인 모순과 갈등을 만들어내는가로 분석 초점을 옮기려 했던 셈이니까요. 지구상 어디서나 통할 진정한 해방의 가치가 지역별/국지적으로 각이한 빛깔을 띠며 보편화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알아가면서라고 주장하는 걸 테고요..ㅎ

      이를테면 한국의 현실이 엄혹한 건 제대로된 '근대적 시민혁명'을 안 겪어서 그렇다느니 자본주의 발전이 시민적이지 않고 천민적이라 그렇다느니 하는 식의 논의에 대해, 실질적인 변화에 필요한 주체 내지 사회적 힘의 형성을 억압, 유예시키는 근대적인 이윤-권력기계의 식민성과 헤게모니는 한국 내지 동아시아란 특정 장소에서는 어떻게 재편, 지속돼왔는지 다시 질문하는 식이랄까요.

      사실 특정 장소 내지 시공간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천하지 않았던 자본축적 과정을 찾아보기가 무척이나 어렵기도 하거니와ㅋ; 사실상 궁극의 척도로 (잘못)지정된 유럽적 보편과 늘 그 보편에 미달된 것으로 알고 있는 민족주의적 특수의 범주가 실은 관계적으로 서로 되먹임하며 그래야만 굴러가는 하나의 세계로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요. '도래할 우리'가 극복해야 할 건, 이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인 걸 테고요.ㅎ

  3. neoscrum 2010/03/22 21: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4. 홍석만 2010/03/24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글 좀 늦게 봤네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번에 인도 포스코 번역글도 참세상에 잘 올렸습니다. 이번 글도 올리고 싶은데, 출처 밝혀서 올려도 되겠죠? 이번에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참세상과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 들사람 2010/03/24 2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냥 올리겠다는 말씀만 남겨주세여.ㅋ
      네, 말씀하신 '밀접한 관계'에 대해선 차차 얘기 나누시도록 하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