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잘 지내나? 연초에 보낸 편지는 잘 받아봤는지. 편지 쓰고선 면회도 한 번 더 가야지 했는데, 결국 못 가고 이제야 이렇게 또 글로 소식을 전해. 미안햐. 너도 익히 알다시피, 내가 워낙에 게으르잖여. 게다가 이래저래 경황도 좀 없었네그랴. 경황 없음의 알리바이야 그럴 듯한 게 어디 한둘이겠냐마는, 그 중 하나만 대볼게. 그럴 듯한 데다 아마도 꽤나 솔깃해할지 모를 걸로다 말야.
 

얼마 전 『법정에 선 과학』이란 책을 맡아서 진행했거든. 법정에 선 과학이라 하니까, 어떤가. 과학을 이성의 법정에 세워놓고는 과학이 ‘얼마나 과학다운지’ 따져묻는 책 같아 보일라나? 아니면 법조계를 겨냥해 니들이 한껏 폼만 잡았지 도대체 과학을 아느냐며 과학의 정석을 말하는 책 같다거나. 아, 그래, <CSI: 과학수사대> 같은 미드를 막바로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과학’수사만 어떻든 되면 사건이 아무리 오리무중이더라도 그 진실과 전후맥락은 사실상 따논 당상이라는 분위기를 연신 풍겨주시는 미국산 드라마 있잖어. 그러니까, 과학이 빠진 정의와 진실은 설사 차고 넘친들 김 빠진 사이다 같다고 말하는 책?
 

아니, 이 책은 그런 책들이 아냐. 이 책은 근대 법과 과학(기술)에 관한 상식 내지 통념들이 ‘실제로 굴러가는’ 관련 제도들, 뭣보다 이들 제도가 크고 작게 깃들어 있는 우리네 삶과 얼마나 겉돌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거든. 가령 과학계는 진리탐구에만, 법조계는 정의추구에만 제각기 열성이다 보면, 이 둘의 행복한 만남은 우연이 아닐 줄로들 알잖아.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가다간, 정의와 진리 같은 말은 자칫 법률·과학전문가 공동체의 고객유치용 악세사리로나 쓰이기 십상이라는 거지. 과학(기술)계의 ‘주류 지식’은 법조계가 일단 따르고 볼 일이라거나, 사법 제도를 마치 과학(기술)계의 꽁무니만 쫓는 둔탱이로 취급하는 발상법도 이 책에선 기각 대상이야. 이런 가짜이분법에 매여 있어선, 법과 과학이 일종의 ‘내외하는 커플’ 사이처럼 어떻게 서로 스텝을 맞추거나 곧잘 몸까지 섞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테니까.
 

과학(기술)과 법이라는 열쇳말을 책쓴이가 굳이 이렇게 다룬 이유? 이런 질문이 책 전반에 스며 있어서다 싶어. 우린 어떻게 해야 과학(기술)과 사법 제도를 사람 잡는 물신 내지는 괴물로 방치하지 않고, 기왕이면 저마다의 삶을 널리 이롭게 하는 지렛대로 바꾸고 써먹을 수 있을까? 여러 민주적 공론화 장치들을 통해 법과 과학을 “일단 썼다가 쫙, 지우는”(=탈구축하는) 과정이 얼마나 필요하고 또 중요한지 책쓴이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건 아마 그래서겠지. 이런 의미에서 법이나 과학 영역을 근대화된 신줏단지 모시듯 해온 지적 사제들(특히나 이런 법/과학 특유의 전문성)한테 유달리 치이고 놀아나기 일쑤였던 한국산 대중에게,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은 더없이 반가운 소식일지 모르겠어. 
 

어때, 이 정도면 솔깃해졌을라나? 한 번 읽어보고 싶어졌을 만큼 말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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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0 16:24 2011/06/1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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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곰탱이 2011/06/13 14: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귀가 솔깃한 걸 넘어서 정말로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법대 교양 수업 교재로도 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드네요.^^

    • 들사람 2011/06/14 0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오, 그런 생각이 드셨다니 저야 반갑고 감사하져.ㅋ 그쵸, 그러니 주변에 널리 입소문 내주시고 교재로 쓰자고 제안도 해주시고.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