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al Wallerstein)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1990년대 중반께다.

이른바 ‘사회주의’ 진영이라고들 하던 동구권지역 국가들이 사회주의적이라 하기엔 꽤나 숭악한 속사정들을 맘껏 뽐내며 허물어진 지 채 얼마 아니 되던 때다.

드디어 냉전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짜릿한 압승으로 쫑났다는 진단과 함께, 여러 버전의 자본주의 찬가들이 국내외적으로 한껏 탄력을 받던 때이기도 하다. 이제 믿을 건 천상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뿐이라는 ‘역사의 종말’ 테제는, ‘세계화’ 담론과 함께 이 찬가들에 빠져선 안될 필수코드였다.

이같은 찬가가 찬연히 울려퍼지는 광경에 그만 매혹된 나머지, 신지호 씨나 김문수․이재오 씨 같은 이들이 ‘반성-전향’을 테마로 한 모노드라마를 연이어 선보인 것도 얼추 이 무렵이다.

헌데 이들 드라마를 그저 ‘변절의 알리바이’로 폄훼하고 말긴 사실 좀 찜찜했던 것이, 그 형편없는 완성도와는 별개로 어느 정도는 기존 운동들이 맞딱뜨려야 할 ‘내적 쇄신’의 징후로도 읽힐 만했던 터라 그렇다. 워낙이 이 무렵, 거개의 운동들이 위기로도 모자라 운동 자체의 위기 상황에까지 내몰렸으니 말이다. 여러 반체제적 운동들을 생성케 하는 사회적 조건은 의구하건만, 왜 그것들은 갈수록 활력을 잃거나 갈피마저 못잡느냔 건데.

이데올로기국가장치들의 공세나 압박 탓으로 모든 걸 돌리기엔, 뭔가 미진한 감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찝찝함에 붙들렸던 내게,‘세계체제(또는 역사적 체제) 분석’이라 알려진 월러스틴의 일관된 시각과 설명틀은 더할 나위 없이 유용한 길라잡이였다. 이를테면 <이행의 시대>라는 방대한 집단연구작업이 보여줬던 바, 1990년을 전후해 세계를 휩쓴 달뜬 미래 전망은 그야말로, 너무나 아름다워 슬프도록 허망한 신기루에 가까웠다.

외려 자본주의 문명은 이제, 시작과 끝을 갖기 마련인 여느 역사적 체제들처럼, 찬가는커녕 만가를 불러도 시원찮을 내적 위기들로 삐걱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논의가 무엇보다 값진 건, 그같은 위기가 심각한 수준의 구조적 불평등 및 광범한 궁핍화를 ‘생산’하는 자본축적 매커니즘에 기인하고 있음을 새삼 환기한다는 데 있었다.

이렇게 굴러가는 사회체제의 ‘바깥’을 내다볼 반체제 운동들의 조직화가 절박하고도 중차대한 과제로 다가오는 건, 따라서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다. 결국 “현 역사적 체제가 지속되는 한, 운동은 죽지 않는다. 다만 새로이 거듭날 뿐”임을 좀더 분명히 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2.

내게 이런 인연을 맺으며 여러 자극을 줬던 그 월러스틴이, 지난 9일 한국을 찾았다.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열리는 문과대학 창설 60주년 기념 해외석학 강연에 초청을 받아서였다.

“포스트-미국 세계에서 살아가기: 지정학적 긴장과 사회적 투쟁들”이라는 주제가 암시하듯, 이 날 강연내용은 세 마디로 나뉠 수 있었다. 첫째,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가 한층 완연해졌다는 것, 둘째, 그 결과 불거져나오는 지정학적 긴장들은 이같은 쇠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 셋째, 이같은 혼돈기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서, 현 역사적 체제를 유지/거부하려는 사회적 투쟁들이 한층 더 첨예화하리라는 것이다.

월러스틴에 따르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외면할 순 있어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건, 부시 행정부의 마초스런 정책적 행보로 초래된 것도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세계경제의 장기침체 속에서 유럽/일본이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획득한 1970년대 이후부터, 쇠퇴는 꾸준히 진행돼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미국 헤게모니는 쇠퇴의 ‘속도조절’에 몹시 서툰 부시 행정부 탓에 다소 흉물스런 모습을 띌 순 있어도, 쇠퇴 경향 자체를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설사 그런 시도가 이뤄진다 해도, 이는 외려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할 공산이 크다. ‘군사적 근육’의 과시는 물론, FTA 등 ‘좋았던 옛시절’로 회귀하고자 취하는 적극적 조치들이 되려 미국 헤게모니의 정당성 위기만 불러일으키고 있는 요 근래 상황을 보라.

이마저 실은 헤게모니 보일러에 불이 한창 타올랐을 때의 여열(餘熱) 덕에 가능한 것이다. ‘쌍둥이 적자’라 불리는 만성적 재정 및 무역수지 적자도 대략난감이지만 더더욱 난감한 건, 이 상황을 지탱해줬던 기축통화, 즉 달러의 위상이 중국․일본․한국 정부의 국채매입 등으로 보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이 세계 캡짱이지, 고분고분한 꼬붕들과 은근 거슬리는 차세대 라이벌의 ‘선처’ 없인 세계 캡짱 노릇도 적이 껄쩍지근한 상황인 게다. 요컨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는 근육만 잔뜩 키운 미국의 우람한 허우대와, 헤게모니 국가라 하기엔 크게 취약해진 경제적 위상 사이의‘어긋남’이 불가피하게 빚어낸 결과다.

이어지는 지정학적 긴장은 그간 잠복해 있던 역사적 체제의 고유한 내적 모순들을 자연스레 표면화한다. ‘남북문제’를 기본구도로 세계 곳곳서 잦아들 줄 모르는 종교 및 인종갈등 등은 역사적 체제하에서 거듭돼온 헤게모니 질서가 얼마나 억압적이고, 자기모순에 가득찬 것인지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지난 9일 있었던 북한의 ‘핵실험’도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그다지 놀랄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라는 국면에서 충분히 일어날 만한, 국가이성의 합리적 선택에 가깝다. 물론 이같은 개별국가 차원의 합리성들은 정작 역사적 체제의 모순을 파국적 위기 수준으로 고착화하고 마는 역설적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 때 ‘사회적 투쟁들’이라 부르는 흐름은, 미국 헤게모니 이후의 지정학적 긴장을 둘러싼 일련의 대응을 총칭한다. 그것은 크게, 이 불평등한 체제를 어떤 식으로든 온존-지속시키려는 일련의 투쟁들, 그리고 이같은 투쟁들에 맞서는 반체제적 투쟁들로 나뉠 수 있다.

월러스틴은 이 사회적 투쟁의 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 두 가지를 거론한다. 1994년 1월 1일 발효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그리고 같은 날 멕시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에 맞서 일어난 사파티스타들의 조직적인 반정부 (무장)봉기가 바로 그것이다. 향후 역사적 체제 하에서 격렬하게 벌어질 체제수호적/반체제적 투쟁들은, 일단 이들 두 가지 유형에 기초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리라는 게 월러스틴의 전망이다.

역사적 체제의 바깥을 향한 투쟁들은 물론 그리 쉽지도 않고, 그 결과 또한 반드시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지레 비관할 것도 없다. 이런 불확실성은 ‘다른 세계’를 조직해낼 진정 자유로운 (집합적) 주체형성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우리가 알고, 또 살고 있는 이 역사적 체제의 종언을 말하면서 월러스틴이 (사회현실을 제대로 이해할 온당한 분석단위의 중요성만큼이나) ‘도덕적 판단’을 유달리 강조했던 것도 필시 이래서일 게다.


3.

매체에서 이 강연을 다룬 관련기사들을 훑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 강연의 세 마디 중 첫째와 둘째 마디만 다뤘지, 셋째 마디에 대해선 하나 같이 언급이 없다. 마침 북한의 핵실험이 이뤄졌으니, 그와 관련한 대목에 초점을 맞춘 건가보다 할 수도 있다.

근데 이른바 ‘경제지’라 불리는 매체조차, 셋째 마디에 관해 비판적 코멘트 한 마디가 없는 건 대체 어찌된 일일까. 월러스틴이 뭐라 했건, 한미FTA는 곧죽어도 “선택이 아닌 필수”여서일까.

또 하나. 예일대-월러스틴이라는 기표의 위력이 참 대단하긴 하구나 싶었다. 월러스틴의 메시지가 전혀 달가울 리 없는 조선/동아이건만, 이 사람 얘길 군소리 없이 꼬박꼬박 다뤄줬던지라 그렇다. 어쩌면 이리도 착한지 원.

문득, 국내 연구자 중에 월러스틴처럼 전지구적 계급투쟁들의 전면적 부상 운운 했으면 어찌 됐을까 궁금해졌다. 뭐, 어떻게 되긴. 낡은 좌파적 시각에 연연하는 시대착오적 환상은 그만 걷어치우라며 걸쭉하게 치도곤 당했겠지.

조선/동아 같은 매체서 보여줄‘계급적 감수성’이자, 사회적 투쟁의 방식이 바로 그런 거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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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2 22:01 2008/03/12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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