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벽두,

식품자원경제학과(군대 간 사이, "농업경제학과"란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학생들한테 따로 묻지도 않고 교수(들) 멋대로 고쳐논 이름이 고작 이거였다ㅋ;)가

경제학과로 통폐합될 거란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졸속성과 '철학의 빈곤'을 문제 삼고자 작성했던 성명서 초안.

 

합치는 것 자체야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다 쳐도,

문제는 "왜, 어떻게"라는 게 결국 "쪽수",

그니까 학진 등 연구지원금을 '수주'하기에 수월하다는 덩치 불리기였어서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경쟁" 논리가 주요동력원이었던 셈이다.

 

그럼 "존치"가 해결책이었느냐? 당근 결코 그렇지 않았다.

내용적으로 도대체 존치의의가 있느냔 얘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던 상황였으니까.

 

이른바 "식민지적 무의식"이 교수를 위시하야 학생들의 신체,

그러니까 농업경제학과란 제도화된 공간의 일상을 잠식한 진 이미 오래였던 거다.

그것도 아주 흥건하게.

 

농업-농촌-먹거리를 둘러싼 문제들은 갈수록 꼬이고 절박해진 지 오래건만,

이런 상황을 지적으로 다룬다는 "농업경제학과"라는 데는

그런 현실과 계속 헛돌며 외려 '문제의 일부'가 돼 있었달까.

 

 

암튼 연서명을 받던 중,

'급조된' 학과 교우회라는 데서 어찌 대응할지를 놓고 나서면서

그냥 초안으로 남게 됐지만 ;;

 

여기서 다룬 내용은 확실히,

농업경제학뿐만이 아니라 대학 내의 "주변부" 학문 일반이 처한 현실을

관류하는 내용이지 싶다.

 

 

***

 

 

이른바 ‘식품자원경제학과 통폐합(안)’을 둘러싼 현 상황에 부쳐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 전공 졸업생 및 재학생들의 입장

 

 

 

 

 

I

 

세계적인 명문대 인프라 구축이라는 기치 아래 줄기차게 진행돼온 고려대학교의 ‘글로벌 프라이드 프로젝트’(이하 프로젝트)가 모교 안팎으로 크고 작은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화라 불리는 전지구적 추세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워낙이 달라진 시대와 현실상황에 걸맞은 ‘거듭남’의 중요성이야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더욱이 이른바 ‘명문사학’이라는 타성에 안주, 물적 기반은 물론 지적 면모마저 침체에 빠진 듯 보였던 지난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현재 모교서 추진중인 거듭남의 시도 자체는 일단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 거교적 차원서 이뤄지는 거듭남의 ‘내실’을 곧바로 보장하진 않는다. 프로젝트의 매혹적 광휘(光輝)는 외려, 학내외 성원들로 하여금 정작 그 거듭남의 심각한 부실에 눈 멀게 하는 퇴행의 징후일 수 있기 때문이다.

 

 

 

II

 

그런데 불행히도, 우리는 현 프로젝트를 주목할 만한 지적 퇴행의 징후로 읽을 수밖에 없는 정황 앞에 서 있다. 이른바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 전공 통폐합’(이하 통폐합)(안)을 놓고 전공교수들과 학교당국 간에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진 줄다리기가 바로 그것. 그 복판엔 생환대 존속(안)을 지지하는 전공교수들과, 정경대 통합(안)을 종용하는 학교당국 간의 대치선이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전공교수진 간, 전공교수진과 학생들 간, 그리고 학생들 간의 대치선들이 중첩되면서, 통폐합(안)의 향배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한층 복잡한 양상마저 띠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물론, 대치선이 형성됐다는 사실 자체일 수 없다. 달라진 현실상황에 조응하는 학과/전공의 적절한 운용형식에 대한 학내외 구성원간 이견차는 불가피하고, 또 자연스런 것이다. 통폐합을 놓고 발생하는 성원간의 입장차를 생산적으로 조율해 낼 ‘문제설정’ 및 민주적 소통의 역량이 정작 중요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세계화 시대, 학과/전공의 적절한 운용형식과 방법에 관한 깊이 있는 지적 성찰 및 소통합리성의 흔적을 현 통폐합(안) 담론에서 찾아내기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일보다도 더 생뚱맞아 보인다. 우리가 보기에, 이같은 생뚱맞음엔 크게 다음의 세 가지 차원이 뒤얽혀 있다.

 

첫째, 프로젝트의 대의 아래 특정 전공/학과의 존폐 여부를 고작 모교의 ‘브랜드 밸류’ 제고 차원에서 다뤄질 사안으로 환원할 뿐인 학교당국의 행정편의주의.

 

둘째, 학교당국의 압박에 대해 당위적 원론의 재확인 및 수세적인 지키기만이 능사인 줄 아는 전공교수들의 분과적 타성 및 지적 매너리즘/귀챠니즘.

 

셋째, 주류/비주류를 가르는 위계서열적 전공체제의 폐해에 대한 성찰은커녕, 이같은 구도를 외려 부추길 뿐인 관련전공 학부생들의 몰지성적 이전투구 경향.

 

 

III

 

프로젝트의 취지, 구미중심적 주류질서를 내면화할 ‘유창한 앵무새’의 양성이 고작은 아닐 것이다. 이 곳의 현실을 전지구적 추세와 접맥시켜 담론화하는 지적 풍토와 제도적 기반조성이야말로, 모교를 세계적인 ‘비판지성’의 메카로 거듭나게 하는 충분조건임은 자명하다. 이는, 비판이 우리가 살고, 또 알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얼개와 지속조건을 오롯이 드러내는 일이란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통폐합(안)이 이같은 충분조건의 구현을 염두에 둔 것인지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다. 거듭 확인할 수 있는 거라곤, 학교당국에게 농업/식량문제 따위 이제, 고려대학교란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낫 ‘촌스러운’ 애물단지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교당국의 역량은 그저 새끈한 브랜드이미지 구축을 위한 행정적 효율합리성으로 충만할 뿐, 통폐합의 지성적 근거는 도무지 찾아낼 수가 없다. 이런 판에, 모교가 ‘비판지성’의 전당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지. 당국은 이런 의문을 터무니없는 침소봉대라 일축할 수 있는가?

 

전공교수들의 분과적 타성 및 지적 귀챠니즘을 거론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농업/식량문제를 어떻게 현대세계의 이해에 유용한 인문-사회과학적 텍스트로 담론화할지에 대한 성찰은, 일차적으로 전공교수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농업/식량문제는 이른바 ‘시장경쟁력 강화’ 담론 따위로 환원불가능한, 발상의 전환 및 지적 혁신 없인 제대로 풀리기 힘든 조건에 있다. 농업-농촌-식량문제 해결에 전통적 경제학 담론이 복음일지 재앙일지, 그도 아니면 불가피한 이론적 우회로일지, 나아가 ‘탈농화(deruralization)’가 전지구적 추세가 된 지금, 식량/농업문제를 우리 ‘삶의 문제’로 전환할 분석적 논리와 방법은 무엇일지 등은, 우리가 보기에 이른바 ‘전공’교수라면 결코 에둘러가선 안될 절박한 지적 요청이다.

 

무엇보다, 이 요청은 분과 및 세부전공이라는 격자 안에 머물러선 결코 풀리지 않는 물음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를 포괄적으로 다룰 전공 커리큘럼의 혁신은 물론, 전공교수들 스스로의 ‘내적 쇄신’은 그동안 얼마나 이뤄져왔던가? 이 물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당국에서 종용중인 것으로 알려진 통폐합(안)의 ‘생산적 극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가 보기에, 현재 전공교수들이 내세우는 존치(안), 그저 분과적 타성에 의존해 이뤄지는 당위적인 동어반복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학부생들의 몰지성적 이전투구 경향은 사실, 앞서 지적한 차원들에 종속된 문제다. 더욱이 그것은 식민지-제국 관계에 빗대도 무방할, 오랜 위계적 분과체제하에서 배태된 ‘문화’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학생들의 그같은 경향 자체를 오롯이 학생들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씁쓸한 건, 경제학/농업경제학 전공 여하를 떠나 농업/식량문제라는 토픽이 고려대학교 담론장에서 ‘구조조정’ 내지 ‘아웃소싱’될 참이라는 상황 자체가 광범한 지적․사회과학적 쟁점으로 다뤄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고려대학교가 한국 사회과학의 동량(棟樑)이 되는 데 정작 중요한 건 해외의 저명권위지에서 승인받았다고 하는, ‘사회과학 분야 세계 66위’ 같은 정량적 수치보다도, 이같은 의제로 날선 통찰의 열매를 일궈낼 내부성원들의 집합적 지성 아닐까?

 

 

IV

 

우리는 현재 진행중인 농업경제학(또는 식품자원경제학) 전공/학과 통폐합(안)이 이상의 퇴행적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데 대해 깊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요청하는 바이다.

 

하나. 학교당국은 이번 통폐합(안)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단순한 행정편제 조정/통합 차원의 사안이 아니라 고려대학교의 지적 정향을 중장기적으로 가름할 사안임을 유념, 농업/식량문제를 새로이 담론화할 제반 연구여건의 조성․지원에 주의를 기울일 것.

 

하나. 전공/학과 교수들의 경우, 이같은 여건조성 및 지원의 충분조건이라 할 전공 커리큘럼의 총체적 혁신(안) 및 관련연구 프로젝트 마련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농업/식량담론의 지적 쇄신에 필요한 내-외적 역량 결집과 성원간 소통에 주력함으로써 학과/전공 존치라는 수세적(negative) 대응에서 탈피, 좀더 공세적인(positive) 협상 프로그램을 마련할 것.

 

하나. 학부생들의 경우 이번 통폐합(안)이 특정 학과/전공에 국한된 사안이 아니라 식량-농업-농촌 등 문화적-정치적 소수자관련 토픽들이 고려대학교와 같은 지적 담론장에서 배제, 또는 폐기되고 있음을 명시적으로 웅변하는 사태라는 데 주목, ‘지성 없는 교양’의 창궐을 제어-상쇄할 포괄적인 수강권 구성 프로그램을 거교적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의제화할 것.

 

 

우리는 이상의 내용이 현 프로젝트가 ‘세계화(Globalization)’란 이름의 전지구적 신기루를 좆는 데 급급한, 알맹이 없는 세계주의적 슬로건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고려돼야 할 최소한의 요구라 믿는다. 이에 따라 우리는 현 통폐합(안)이 프로젝트의 명실상부함을 가늠할 지성적 준거라 보고, 향후 이 상황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예의주시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모교는 추억의 언저리 어딘가, 빛바랜 흔적으로나 남을 ‘마음의 고향’일 수 없다. 오늘날과 같은 혼돈의 시대, 모교가 굽힌 것은 피게 하고 억눌린 자는 일어서게 했던 ‘비판지성’의 전통을 올곧게 법고창신(法古創新)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5년 1월 1일

 

고려대학교 농업경제학/식품자원경제학과 졸업생 및 재학생(총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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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3:55 2008/03/2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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