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친구 하나가 지난 2월 내내 캐나다 밴쿠버에 있다가 왔다.

 

이번 동계올림픽 개최지였던 그곳에서 우연찮게 겪은 얘길 들었는데

내가 과문해선진 모르겠으나,

분명 그 어느 매체에서도 못 들었던 값진 내용이었다.

 

행사 기간 내내 '미관상' 사실상의 통행제한,

즉 올림픽 구경을 불허당했더라는 밴쿠버 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이야기.

 

그런 와중에서도 '친정부 성향'이 득이 되리라 (잘못)판단하는 상당수 족장들은

폐회식 행사 때 스스로 들러리를 서주러 나가

밴쿠버 시의 문화적 역량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는 데 일조해주더라는 얘기..

 

사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횡행하는 이분법적 편협함의 사상적 시원이라 할 서방권에서

스스로 자랑하고, 또 그렇게들 알아서 알아주는 다문화주의적 관용의 속내란 게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선 이랬던 거구나, 싶었다고 하겠다.

이런 식으로, 밴쿠버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가 됐던 거다. 흣.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아픈 건 그때마다 늘 아픈 거라는 노희경 작가의 말마따나,

익히 알고 있는 거라곤 해도,

이런 류의 얘길 들을 때마다 씁쓸한 실소가 터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아래 글은, 같이 얘길 듣던 한 선배가 이 내용을 바탕으로 쓴 투고용 원고다.

<인권오름>에 실릴 원고 마감을 앞두고 초조해 하던 그로선,

가뭄 와중의 단비 같았다고나 할까.ㅎ

 

 

근데..

이 또한 새삼스런 얘기겠지만, 대체 언제부터,

도대체 뭐가 좋고 또 뭘 그렇게 영광을 보자고,

(대체로 소수인) 누군가의 감동과 기쁨의 눈물이,

(대체로 다수 내지 대다수인) 다른 누군가의 울분과 슬픔의 눈물을 부르지 않으면,

외려 그게 이상하고, 심지어 희한한 것처럼 돼버렸는지..

 

대체 언제까지,

우리가 누려 마땅한 기쁨의 감각과 욕망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기쁨과 슬픔을 제로섬적으로 옭아매는 제도들 때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내적인 찢어짐'에 시달려야 하는 건지.

 

이런 걸 자유와 번영의 길이라며 권장하는

세계 내지 사회적 제도의 발전이 왜, 누구 좋자고 지속가능해야 하는 건지, 참..ㅜ

 

***

 

 

나는 올림픽을 보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금을 몇 개를 땄는지, 어떤 선수가 어떤 기록을 새웠는지, 금메달을 따면 준다는 아파트나 보상금 따위도 나에겐 관심 밖이다. 아니다. 사실 올림픽에 관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불편함을 비켜가고자 하는 관심이 있다. 우연히 올림픽과 관련한 소식이 나오면 채널을 재빨리 바꾸거나 아예 티브이를 꺼 버리는 정도의 관심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모든 국제경기와 프로스포츠와 담을 쌓고 지낸다.

 

캐나다에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온 친구를 만났다. 동계올림픽을 치루기 위해 캐나다의 원주민(원주민이란 말이 싫은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들이 그렇지 않아도 게토화된 곳 내에서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 들었다. 죽거나 방치되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특히 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이 거리의 노숙자들은 새벽2시~7시까지만 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엔 어떻게 되냐고? 잡혀가게 된단다. 거리에서 잠을 자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게 이유다. 해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경찰은 관심이 없고, 올림픽 때문에 거주지에서 밀려나거나 그나마 단속이 더 심해지다 보니,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분노는 이미 극에 달해 있더라고 했다. 더 심각한 건 이런 주민들의 반발과 분노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는 거다. 시위 중 건물이나 물건을 부수는 일이 있다고 해도 언론에는 한 줄 기사마저 보도가 안 되고, 오히려 간혹 있는 평화적 시위에 대해서만 보도가 된다는 것이다. 참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치워버리고 싶을 때는 언제든 치워두고, 그러면서 착한 척, 세련된 척하려는 그 기만에 어이가 없었다! 얘기를 전한 친구는, 마침 지나가는 길에서 군중들의 시위가 있어 함께 할 수 있었다고.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분노하던 나는 팔팔올림픽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상계동올림픽'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올림픽이 끝난 몇 년 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나는 그 후 다시는 국제 스포츠 경기를, 프로스포츠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더 빛나고 화려한 것에 끌려 있는 동안 버려지고, 방치되고, 치워져버리는 '사람들과 존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나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그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게도 타인의 성공한 인생에 열광하는 광기어린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환멸로 이어졌다. (물론 그렇지 않은 분들께는 양해를 구한다.)

 

아! 내가 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나 프로스포츠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들 나와 같이 느껴야 한다거나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거나 이런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외면하는 것과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혹은 알면서도 무시 가능함이란 얼마나, 혹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마음속을 구획지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뛰어난 선수에 대한 순수한 응원이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스포츠자본에 대한 거부감이니까 구별하고,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일까? 혹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좋은 것일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에겐 어김없이 설명해야 할 의무와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만큼의 절충점을 제시할 과제가 주어진다. 불편한 사람은 자신의 불편함을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와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는 불합리가 남게 된다. 이 경우도 불편한 사람(불편함을 말한 사람은 그 자신이 불편한 존재가 된다)이 무시되지 않는 경우에나 그렇다. 나는 불편한 사람이 되어 방치되거나 치워진다.

 

뭐,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불편한 존재들을 치우게 되면 얼마나 남을까?하는 궁금증은 생긴다. 하긴, 여기는 '대한민국'이니 나 같은 사람이 적어서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 헉! 혹시, 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이란 관심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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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1 18:53 2010/03/11 18:53

 

 

며칠 전, “범고래의 배신 … 조련사 살해”라는 제하의 기사가 <경향신문> 국제면에 실렸더랬다. 미국 올랜도에 위치한 해상공원 ‘시월드’ 소유인 범고래 ‘틸리쿰’이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준 베테랑 조련사 던 브랜초 씨를 “배신”, 살해했다는 내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경험도 제일 많고 틸리쿰과도 가장 오래 지낸 조련사였다는데, 그런 그를 틸리쿰은 물어챈 뒤 “물속에서 헤엄치며 수영장 벽에 내려쳤”다고 했다. 실은 그럴 조짐이 있었다는 듯, 앞서 열린 쇼에서도 틸리쿰이 지시를 잘 안 따르더라는 관람객 목격자의 전언도 기사는 덧붙여 놨다.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는 것처럼 틸리쿰의 ‘어두운 과거’와 난폭함도 언급해놨던데, 워낙에 그런 종자이기라도 한 양 “요주의” 대상였다는 뉘앙스다.


결국 “아홉 살 때 시월드에 와서 고래 쇼를 본 후” 마침내 이룩한 브랜초 씨의 꿈이, “자신이 조련한 고래에 의해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 역설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 그런 ‘돌발’ 상황에, 관람객들은 “놀라”서 공연장을 즉시 빠져나갔단다.



글쎄, 기사에서 드러난 상황(내지 가치)판단의 감각이 (암묵적이긴 해도) 계속 이 모양인 한, 앞으로 조련사가 설사 떼로 죽임을 당하는 ‘폭력’이 발생한다 한들, 뭐 그리 놀랄 일일까 싶다, 나로서는.


사실, 1백여 년쯤 전만 해도 무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인종주의와 (이성애중심적) 성차별주의로 뒤엉킨 (사냥질까지 포함하는) 치떨리는 ‘인간사육’이 자본주의적 ‘문명화 과정’ 내지 노동력 창출의 일환으로 버젓이 제도화됐던 판에, 하물며 범고래 같은 생물 종들을 사육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시피한 거야 오죽할까도 싶다마는.


그래서다. 숭악하기로 치자면 인간사육의 제도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동물원이라는 제도화된 폭력에 대한 반응으로서, 틸리쿰의 “조련사 살해”는 ‘살아 있는’ 생물 종인 이상에야 그리 놀랄 일도, 더군다나 이상한 일도 아니겠다고 한 건. 사육당하는 걸로도 모자라 정기적으로 ‘쇼’까지 해야 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와 짜증이 범고래라고 사람보다 덜할 리 있겠냐는 거지. 범고래나 사람이나 같은 포유류라지만, 포유류 아니라 조류나 양서류, 파충류라 한들 뭐가, 얼마나 다를까.


필시 그렇게 스트레스 내지 짜증만땅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틸리쿰에게, 브랜초는 그냥 브랜초가 아니라 인격화된 시월드, 아니, 시월드를 모델 삼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수중공원 내지 동물원이란 제도였을 터.


헌데 지금 저 범고래를 다루는 방식은 이를테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끝없이 소외된 생명활동으로서의 노동에 진저리를 내며 플랜테이션 소유주를 살해한 걸 놓고서, 이 사건의 본질이 워낙에 “요주의”였던 그 누군가의 남다른 덩치와 타고난 포악함에 있다고 하는 격이랄까. 생겨날 때부터 이런 유형의 노동 없이는 통 굴러갈 줄을 모르는, 자본주의적 생산 내지 권력의 놀랍도록 바보 같은 해괴함이 아니라 말이다. 물론 안타깝게도, 해결의 실마리는 곧잘, 이런 해괴함을 조직적·집단적으로 주저앉히는 쪽보다는 이의 지속에 필요한 유무형의 떡고물 획득과 심리적 진정의 기술에 매혹되는 쪽으로 (잘못)잡혀오곤 했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외려 들어야 할 의문은, 그렇게 사육적 관계가 지속되는데도 범고래들의 조련사 살해가 “고작 그 정도”인 건 왜일까, 여도 무방한 거 아닌가?


그래서 말인데, 시월드 측에선 “사고 조사 및 공연 내용 검토”를 위해 범고래 쇼를 중단했다지만, “중단”해야 할 게 어디 그것만이겠나 싶은 거다. 그저 “쇼 재개”를 위한 조사니 검토는, 범고래 처지에서 보면 마치 좋았던 옛 시절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 하는 식민주의자의 ‘페인트’ 마냥 부질없고, 더 까놓고 말함 추악한 거 아닌가 싶어서. 한편에선 돌고래한테도 자유가 있다는 <프리 윌리>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그런 돌고래를 붙잡아두고 쇼를 시키는 게 적잖은 누군가에겐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간적 자유 본연의 위대한 오지랖으로 보일지 몰라도 말이다.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브랜초 씨가 어린 시절 꿨다는 꿈을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해가며 한껏 깔아뭉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봤을 범고래 쇼 자체야, 정작 ‘타자와 만나는 법’엔 눈멀게 하는 볼거리/스펙터클에 불과했을지라도 말이다. 외려, 그의 죽음을 어쨌거나 애도하면서 던져봄직 한 질문은 이런 게 아니겠냐는 거다.


그가 설레는 맘으로 꿈꿨을 범고래와의 만남은, 어디서부터 꼬여버렸길래, 살아 있는 “유적 존재”에게 결국 폭력을 부르는 악몽이 되고 말았을까. 인간과 다른 생물 종을 막론한 ‘타자와의 만남’은, 기껏해야 폭력의 악순환에 갇힐 뿐인 자족적 “독백”을 넘어, 어떻게 호혜적인 세계로써 형성·확장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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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6 00:00 2010/03/06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