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의 현재성을 폭력과 정체성의 정치가 지닌 유효성과 한계, (확장된) 계급투쟁 개념의 유용성과 관련해 검토한 월러스틴의 비교적 짧은 글.

 

5년도 더 전쯤인가, <진보평론>에서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라는 분이 파농을 재조명한 글을 읽었는데, 기억하기로 대미종속적 분단현실이란 "특수성"으로부터 민족의식의 유효성을 보자면서도, 이러한 가운데 진정한 탈식민화에 필요한 정치-사회의식도 예각화하자는 식으로 독해했던 것 같다. 불가능한 독해는 아니지만 헐거워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고, 이래서야 뭉툭한 절충론 아니냐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던 게 사실.

 

근데 내가 보기에, 아래의 글은 이런 절충론을 해답이 아니라 '딜레마'로, 즉 우리가 (새로운) 반체제 운동들을 통해 넘어서야 할 막다른 골목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것 같다.

 

다른 한편 어느 온라인 독자는, 월러스틴의 텍스트 자체는 별 나무랄 데 없는지 몰라도, 이 텍스트가 <뉴레프트리뷰>에 실린 맥락에 대한 평가가 월러스틴의 글에서도 그렇고, 리뷰 편집진에게서 안 보인다고 꼬집어놨다. 1960년대에 뉴레프트리뷰 편집진에선 파농의 사상(과 파농은 훌륭하다고 했던 사르트르의 서문)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파농이 경계했던 정체성의 정치 논리를 따르는 (그리하야 일테면 분단 현실을 "특수성" 범주에 가둬 인식론적-실천적으로 특권화해버리기 십상인) 제3세계주의에 대해서도 무비판적인 지지를 보냈는데, 이랬던 과거에 대한 자기비판 없이 월러스틴의 글이 그냥 실리는 건 문제라는 거다.

 

이에 관한 토론/논쟁의 장이 필요하다면서도, 자신의 과거를 곧잘 망각하는 뉴레프트리뷰의 속성상 그리 할지는 회의적이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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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과 21세기

 

전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폭력과 정체성, 계급투쟁

 

 

이매뉴얼 월러스틴

 

 

 

 

“난 어쩔수없이 내가 사는 시대에 속해 있다.” 프란츠 파농은 그의 첫 저작인『검은 피부, 하얀 가면에서 이렇게 썼다. 그 시대란 물론, 반反식민지(주의) 투쟁이 벌어지던 때였다. 1925년 당시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마르띠니끄에서 태어난 파농은 에이미 세제르의 제자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소속으로 참전한 뒤 리옹에서 내과의 겸 정신의 수련을 받았다. 1952년 출간된 그의 주목할 만한 저작『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의미심장한 충격을 일으켰다.1

 

그 책은 “백인 세계로 내던져진 어느 흑인의 경험”으로, 심중의 파문 속에서 솟구쳐오른 열정적 외침이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1년 전인 1953년, 파농은 알제리의 블리다 정신병원에 부임했다. 그는 알제리 환자들이 자신한테 털어놓은 (프랑스 식민당국의) 고문관련 이야기들을 접하며 금새 분노에 휩싸였다. 알제리 독립이란 대의에 이미 공감하고 있던 그는, 병원을 그만 둔 뒤 튀니지로 가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 활동에 전력했고, 임시정부 기관지 <엘 무자히드>의 필자로도 참여했다.

 

1960년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는 파농을 그 당시 아프리카 통일운동에서 사실상 중심지 역할을 하던 가나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임시정부에선 그가 가나뿐만이 아니라 (가나 수도인) 아크라에 지도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여전히 독립 투쟁을 전개중이던 다양한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들과의 연계도 굳건히 하기를 원했다. 내가 1960년에 파농을 처음 만난 것도 그곳이었는데, 거기서 우린 세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오랜 시간 토론을 벌였다. 그는 민족해방 운동들이 지구 전역을 휩쓴다는 데 대해 굉장히 고무돼 있었으면서도 이들 운동 다수에서 이미 보았던 바, 리더십의 한계로부터 나타난 징후들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런 불편함에 대해선 자신의 마지막 저작에서 길게 다뤄질 것이었다. 그리고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백혈병에 걸렸다. 치료차 먼저 소련에 갔다가 나중에 미국으로 옮겼지만, 성과는 없었다. 나는 워싱턴에 있던 그에게 병문안을 갈 수 있었는데, 미국에서 갓 생성된 것으로서 그를 매혹했던 블랙파워 운동에 관해 토론을 나눴다. 그는 세계에서 미국이 펼치고 있는 여러 대외정책들에 대해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미국인들은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독백을 읊고 있다”고 했다. 생애 마지막 무렵, 그는 사후 출판된『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집필하는 데 맹렬히 몰두했다.2

 

파농은 죽기 전에 장 폴 사르트르가 쓴 서문을 읽었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훌륭한 것이었다. 책 제목은 물론, 세계 노동운동가인 ‘인터내셔널’의 첫 소절 가사를 딴 것이었다. 1961년, 너무나도 일찍, 그는 세상을 떠났다.

 

 

파농을 세계적으로, 물론 미국까지 포함해 널리 알린 건,『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아니라『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1968년 세계혁명 당시 최고조였던 다수의 다양한 운동들에 관여한 모든 이들에게 성경과도 같았다. 타오르던 68의 불꽃이 꺼지고 난 뒤,『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한층 더 으슥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1980년대 후반, 다양한 정체성 및 포스트식민주의 운동들에서 파농의 첫 책을 (재)발견하면서 이 책에 대한 관심이 한껏 부풀었지만, 그 중 대부분은 파농의 요점을 놓치고 있었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서문에서 밝혔다시피, 흑인이 겪어온 소외를 극복하는 데는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에서 보여준 것 이상이 필요하리라고 파농은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계통발생적인 설명을 넘어서 개체발생적인 설명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파농한테 필요한 것은 사회발생적인 전환이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세상에 선보인 지 30년이 지난 후 포스트모던 계열에서 중심적 지위를 누리는 텍스트로 재조명받았다곤 해도, 이 책은 어느 모로 보나 정체성의 정치를 요청한 게 아니었다. 이 책 결론부에서 파농이 말하고 있듯이, 외려 그 반대다.

 

유색인의 재앙은 그가 한때 노예로 부려졌다는 데 있다.

백인의 재앙과 비인간성은 그가 한때 어디선가 인간을 살육했다는 데 있다.

심지어 오늘날조차 그들은 존속하면서, 이러한 비인간화를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있다. 그러나 유색인으로서 나에겐 권리가 없다. 내 실존을 절대적으로 누릴 수 있는 한, 이토록 반동적으로 수선되고 있는 세계에 나 자신을 가둘 권리가 말이다.

유색인인 내가 원하는 건 이것뿐이다.

도구가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이 인간을 노예화하는 일, 다시 말해 어느 누군가가 또 다른 누군가를 노예화하는 일은 영원히 종식돼야 한다는 것,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내가 그를 발견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흑인은 그렇지가 못하다. 백인이 그렇지 못한 것 이상으로 말이다.3

 

 

 

파농은, 그가 뭐였든 간에,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일정 부분 맑스풍의 프로이트주의자로, 일정 부분은 프로이트풍의 맑스주의자로, 대부분은 혁명적 해방 운동들에 헌신했다고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 속했다 하더라도, 그의 작업은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업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검은 피부, 하얀 가면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노니. 오,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바로 이처럼 물음표를 던지는 정신이야말로, 파농의 생각이 21세기에 지니는 유용성에 대해 내가 성찰하고자 하는 바다.

 

그가 남긴 저작들을 다시 읽다가 놀라웠던 건 첫째, 그의 책들이 특히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적일 때일수록, 스스로 확신에 가득 찬 듯한 강도 높은 선언들로 구성돼 있더라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놀랐던 건 이같은 선언들이 구성된 방식인데, 상황을 어떻게 진척시키고 완수해야 할 바는 어떻게 이룰지에 관한 불확실성을 상세히 설명하는 작업이 선언들을 뒤따르는 식이다. 사르트르가 그랬듯, 또 하나 놀랐던 건, 유작들에 담긴 그의 목소리가 결코 지구상의 권력자들이 아니라 외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이다. 파농으로선 “유색인들”과 크게 겹치는 범주가 되겠다. 파농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 다시 말해 잔인하면서도 시혜적인 태도로 오만을 떠는 자들에 대해 언제나 분노를 표한다. 그런 그지만, 불평등과 (인종주의적·성차별주의적) 모욕으로 굴러가는 세계가 존속하는 데 보탬이 될 행동과 태도를 보이고, 기껏해야 떡고물을 챙겨먹겠다고 그런 행태를 보이는 유색인들에 대해선 그 강도가 훨씬 더하다. 이후에 다룰 내용에서 나는, 내 생각에 파농이 씨름했던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딜레마를 놓고서 스스로 성찰해온 바를 펼쳐보일 참이다. 그 세 가지 딜레마란 각각 폭력의 쓸모와 정체성에 대한 호소, 그리고 계급투쟁에 관한 것이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아주 많이 두들겨 맞고, 존경어린 쪽이든 비난어린 쪽이든 아주 많은 관심을 끈 대목은 이 책 1장인 <폭력에 대하여>의 첫 문장이었다.

 

민족해방, 민족 부흥, 인민에의 국가 반환, 연방 등등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아니면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 붙이든, 탈식민화는 언제나 폭력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4

 

이 진술은 분석적 관찰일까, 아니면 정책적 제언일까? 둘 다를 뜻한다는 게 답일 수 있겠다. 아마 파농 자신은 둘 중 어느 쪽에 우선성이 있는지 확언하지 못했을 텐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회적으로 근본적인 변화란 힘/완력을 쓰지 않고선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발상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19세기의 모든 급진적 해방(사상/운동)의 전통에선, 특권화된 세력이 실질적인 권력을 자발적으로 물리는 일은 결코 없다고 믿었다. 권력의 양도란 언제나 특권세력의 손모가지를 비틀어야 하는 셈이다. 이같은 믿음은 사회적 변화를 둘러싼 ‘혁명적’인 경로와 ‘개혁적’인 경로라는, 선험적으로 가정된 경로상의 차이를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러나 1945년 이후 시기를 거치면서 ‘혁명’과 ‘개혁’이란 구분의 유효성은 차츰 옅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은 (현존하는 체제에 대해) 가장 못견뎌하고 분노에 차 있으며 비타협적인 운동들 중 매우 전투적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사회학적 분석이 아닌 정책적 제언으로서 폭력이 가진 쓸모는 의문에 부쳐지고 있었다.

 

일단 권력을 잡은 ‘혁명적’ 운동들이 이룬 건 당초 내걸었던 약속에 훨씬 못 미쳤지만, ‘개혁주의’ 운동들로서도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나을 게 없었다. 폭력에 대한 방침을 놓고 양가적인 태도가 나타나는 건 바로 그래서다.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은 자신의 생애 경험 속에서 (폭력에 대한 지지와 반대를 오가는) 이같은 주기를 이미 겪은 바 있다.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가 창설된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정부 수반을 지낸 페르하 압바스는 정치에 발을 들인 이후 30년 동안 개혁주의자로 살면서, 자신과 자기가 속한 운동이 결국 표류하게 됐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는 알제리가 언제까지고 식민지로, “노예화된” 상태에 머물고 싶지 않다면 오로지 폭력적 봉기만이 의미 있는 전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정치적 전술로서 폭력이 지닌 유용성에 대해 파농이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논점은 세 가지다. 무엇보다도 “마니교적인” (이원론적 분할이 제도화·일상화한) 식민주의 세계에서, 폭력의 시원始原은 식민주의자(내지 식민화 기제)의 계속되는 폭력 행위들에 있다.

 

그들은 늘 원주민이 알아듣는 유일한 언어는 무력의 언어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가 무력을 통해 발언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실 이주민은 원주민이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원주민이 택한 논거는 이주민이 제공한 것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식민주의자가 오로지 무력만 알아듣는다고 말하는 측은 원주민이다.5 

 

 

 

두 번째 논점은 이와 같은 폭력이 식민화된 사람들의 사회심리적 상태와 정치적 문화를 공히 변형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식민지 민중으로서는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이 거대한 폭력의 유기체는 이주민이 처음에 행사한 폭력이 클수록 덩치가 커진다. 집단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미래의 통합된 민족이 싹을 드러낸다. 무장투쟁은 민중을 동원시키며, 한쪽 방향을 취하도록 몰아간다.6

 

그러나 세 번째 논점은 낙관적 색조를 띠었던 두 번째 논점, 그러니까 1장에서 환기했던 민족적·인간적 해방을 향한 돌이킬 수 없는 경로와 상충하는 듯하다. 알제리 민족해방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시기에 씌어진 이 책의 2장과 3장은, 1장인 <폭력에 관하여>에 빛나는 통찰을 던지고 있어서 특히나 매혹적이다. 둘째 장인 <자발성의 강점과 약점>은 민족해방 운동들에 대한 일반화된 비판이다. 이들 운동의 “내재적인 결함”은, 파농에 따르면 “정치적 의식이 가장 강력한 요소들, 즉 도시의 노동계급, 숙련 노동자, 공무원”한테, 다시 말해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는 소수 세력한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데 있다.

 

민족주의 정당의 대다수는 농민에 대해 뿌리깊은 불신을 보인다. … 서구화된 세력은 농민 대중과 관련하여 산업국의 도시 노동자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감정을 경험한다.7

 

이같은 내재적 결함으로 인해 민족주의 정당은 혁명적 운동이 될 수 없는데, 서구화된 프롤레타리아트에 바탕할 순 없지만 도시 중심부의 가장자리에서 가로막힌 채 뿌리가 뽑혀버린 농민들을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중에게서, 이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핵심 중에서 반란의 도시 선봉대가 나오는 것이다. 자기 부족이나 씨족으로부터 배제된 이 굶주린 룸펜 프롤레타리아는 식민지 민중 가운데 가장 자발적이고 가장 급진적인 혁명 세력을 형성한다.8 

 

파농은 이제 탈부족화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가에서, 권력을 잡은 민족주의 운동의 본질에 대한 분석으로 논점을 옮긴다. 그는 분노가 서린 가차없는 태도를 취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이들 운동을 비판한다. “단일 정당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고, 파렴치하고, 냉소적인 부르주아 독재의 근대적 형태다.” 그는 선언하길, 저발전된 국가들의 “민족 부르주아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나라의 총체적이고 조화로운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그들이 아무런 쓸모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파농은 솔직하고 명쾌하게,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수순을 밟는다.

 

민족주의는 정강이나 정책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기 조국이 퇴보하거나 정체되거나 불확실성에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면, 민족의식에서 정치·사회의식으로 신속하게 전진해야 한다. … 대중에게 민족주의만을 메뉴로 제시하는 부르주아지는 실패하여 총체적 난국에 처하게 된다.9  

 

 

파농이 나의 두 번째 주제인 정체성 문제로 방향을 돌리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다. 파농은 자랑스런 고대 문명들이 오늘날 어느 누구도 먹여살리지 못하는 건 물론임을 언급하면서 논의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처럼 고대 문명들의 재조명 작업은 서구 문화와 거리를 둔다는 정당한 목표와 맞아떨어진다. 문화의 인종화는 원래 식민주의자들, 즉 “다른 문화들의 부재로 생겨난 틈을 언제나 백인 문화로 메우려 하는” 유럽인들의 책임이었다. 파농의 주장에 따르면, ‘네그리튀드(흑인정신)’라는 발상은 “백인이 인간성에 가하는 모욕에 대해 보이는 (논리적이진 않더라도) 감정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아프리카의 문화인은 그들의 요구를 인종화 … 해야 하는 역사적 책무 탓에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파농은 민족해방에 필요한 정치적 투쟁 속에 자리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고립된 문화적 정체성에 호소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네 번째 장인 <민족문화에 관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 문화라는 것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검둥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잊은 탓이다. … 흑인 문화 같은 것은 결코 없을 것이다. 흑인 공화국을 탄생시키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 정치인은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국민들에게 주려는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종류의 사회관계를 수립하고자 하는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고, 다른 모든 것은 속임수이거나 무의미하다.10

4장 말미에서 그가 던지는 일갈은 정체성의 정치와는 정반대를 지향하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알려진다면, 오늘날 지식인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수립이 올바르다면, 다시 말해 민중의 의지를 담아내고 아프리카 민족들의 열의를 반영한 것이라면, 국가를 수립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장려하는 일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민족해방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민족이 역사의 무대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이끈다. 국제적 의식이 살아나고 자라나는 곳도 바로 이 민족의식의 한복판에서다. 이 이중의 생성은 궁극적으로 모든 문화의 유일한 원천이다.11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의 결론에서 파농은 그러나, 마치 아프리카가 취해야 할 다른 경로, 즉 비유럽적 경로가 가진 이점을 이해하는 데서 너무 나간 면이 있었다는 듯이, 미국을 사례로 들고 있다. 유럽 따라잡기를 목표로 삼고 이에 크게 성공한 결과 “유럽의 오점, 병, 비인간성을 엄청나게 증폭시킨 괴물이 되”어버린 미합중국을 말이다. 파농으로선, 아프리카는 (북반구의 중심부 국가들에 대한) ‘따라잡기’를 시도해서도, 제3의 유럽이 돼서도 안 된다. 외려 그 반대다.

 

인류는 우리에게서 그와 같은 추잡하고 역겨운 모방 이외의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다.

아프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아메리카를 또 다른 유럽으로 만들고 싶다면, 우리의 운명을 유럽인들에게 맡겨도 좋다. 그들은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보다도 그 일에 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류를 한 걸음 전진하게 하고 싶다면, 인류를 유럽이 보여준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끌고 싶다면, 우리는 새로운 발명과 발견을 이루어야 한다.

… 동지들이여, 유럽을 위해, 우리 자신을 위해, 인류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새로운 발상을 만들고, 새로운 인간을 정립해야 한다.12

 

두 책『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문화적·민족적 정체성 문제를 하나로 엮어내는 파농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은 물론 앞으로도 모든 반체제 사상에 골칫거리를 안겨줄 근본적인 딜레마를 볼 수가 있다. 아니발 뀌하노Aníbal Quijano가 권력의 식민성이라고 부르는 바, 근대 세계체제라는 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범유럽권의 지배와 이 지배 권력의 수사학을 거부하는 데 관건이 되는 건 유럽적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세계를 위한 투쟁이나 역사적으로 구현됐던 사회주의적 열망에 헌신해온 이들은, 파농이 “민족의식의 함정”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아주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파농이 했던 엮어내기 작업을 지속해야 하는데, 그리 하는 게 파농의 표현대로라면 인류가 “한 걸음 전진하는” 미래로 다가가는 유일한 길일 듯 싶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라는 나의 세 번째 주제는 파농의 저작들 어디에서도 위와 같이 다뤄진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세계사적 시각과 분석들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다. 이는 물론 파농이 마르띠니끄와 프랑스, 알제리에서 맑스주의 문화를 접하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었고 자신의 저술 작업에서 구사했던 어법에는 맑스주의적인 가정들과 어휘들이 배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파농과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이들은 동시대 공산주의 운동들이 보여준 경화된 맑스주의에 맞서 힘찬 (분석적·이론적) 반란을 꾀했다. 세제르의『식민주의에 관한 담론은 식민지 세계의 지식인들이 (이들만은 물론 아니었지만) 왜 공산당에 대한 투신을 철회하고 계급투쟁의 수정된 판본에 호소하는가 하는 물음을 다룬 고전으로 남아 있다. 이들 논쟁에서 핵심 쟁점은 ‘투쟁하고 있는 건 어느 쪽 계급인가?’라는 질문에 압축돼 있다. 오랜 동안 토론을 지배했던 건, 독일 사회민주당과 소련 공산당에서 상정한 범주들이었다. 이 범주들에 근거한 기본 논지는 이러했다. 즉,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근본적인 갈등을 이루며 전체적 구도를 지배하는 두 계급은 도시에 근거지를 둔 산업 부르주아지와 도시에 근거지를 둔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집단(적 주체)들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구조들의 잔존물로, 모두가 자신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규정하며 이 두 계급으로 녹아들게 됨에 따라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파농이 원고를 쓰고 있던 당시, 앞서 설명한 논지가 실제 상황에 대한 적절하다거나 신뢰할 만한 요약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어디서 봐도 도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아니었고, 쇠사슬 말고 잃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집단이 아닌 듯했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운동들과 지식인들은 사회(과)학적 분석상 더 적절하고 급진적 정치의 기초로 좀더 유효한 다른 계급투쟁의 틀 짜기에 나섰다. 혁명적 활동의 “선봉”으로 나설 역사적 주체라고 할 만한 후보들이 많이 거론됐다. 파농은 이런 후보들을 탈부족화한 도시화된 룸펜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자발성의 함정”에 관해 다루면서 당초 했던 생각에 의구심이 든다는 점을 인정했다.

 

 

결국, 우리가 파농에게서 얻은 것은 열정과 정치적 행동에 대한 청사진 그 이상이다. 그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겪고 있는 딜레마들의 윤곽을 탁월하게 잡아내고 있다. 폭력 없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은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폭력은, 아무리 치유 효과와 유효성을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그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범유럽적 문화의 지배로부터 빠져나오지 않는 한, 앞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논리적 필연에 따라 특수성에 호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계급투쟁은 우리가 진정으로 투쟁중인 계급들이 어떤 이들인지 알고 있는 한 중심적인 위상을 갖는다. 그러나 룸펜-계급들은 조직화된 구조 없이 그 자체만으론 스스로 소진되기 십상이다.

 

파농이 내다봤던 것처럼, 우리는 현존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 다른 무언가로 이행중인 정세에 있다. 그것은 그 결과가 전적으로 불확정적인 투쟁이다. 파농이 이런 식으로 말하지야 않았겠지만, 그의 유작은 그가 이를 감지했다는 증거다. 우리가 이같은 투쟁으로부터 보다 더 나은 세계체제의 생성에 집단적 창발성을 발휘할지 여부는 대체로 파농이 다뤘던 세 가지 딜레마들과 대결할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이 딜레마들과 대결하는 동시에 분석적으로 명료하며, 도덕적으로는 파농이 열망했던 “탈소외”에 중점을 둔,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들 딜레마를 다룰 우리의 능력 말이다.

 

 

 

 출처: <뉴레프트리뷰> 2권 57호, 117~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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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1998).텍스트로 돌아가기
  2.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8).텍스트로 돌아가기
  3.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석호 옮김, 인간사랑, 1998), 290~291쪽(일부 내용 수정).텍스트로 돌아가기
  4.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2008), 55쪽.텍스트로 돌아가기
  5.    같은 책, 107쪽.텍스트로 돌아가기
  6.    같은 책, 117쪽.텍스트로 돌아가기
  7.    같은 책, 134~136쪽. 텍스트로 돌아가기
  8.    같은 책, 154쪽.텍스트로 돌아가기
  9.    같은 책, 192, 202, 229~230쪽.텍스트로 돌아가기
  10.    같은 책, 243, 265쪽.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같은 책, 278쪽.텍스트로 돌아가기
  12.    같은 책, 357~358쪽.텍스트로 돌아가기
2010/03/01 06:47 2010/03/01 06:47

 

 

 

하비  아프리카 민족해방 투쟁과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투쟁들로부터 얻은 어떤 공통된 교훈 같은 게 있다면?

 

아리기  사실 두 경험 모두, 좀더 광범한 운동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었죠. 민족해방운동/노동(계급)운동가들은 내가 어떤 토대 위에서 자기네들이 벌이는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어요. 제 입장은 이랬죠. ‘당신네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야 내가 앞으로 알게 될 것보다 당신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당신들한테 뭘 해야 하는지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당신네가 처한 상황이 펼쳐질 좀더 폭넓은 맥락을 더 잘 이해할 만한 자리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려는 맞바꾸기란, 당신네들은 내게 당신네들의 상황을 알려주고, 난 당신네들 상황이 당신네들이 볼 수 없거나 당신네들이 선 자리에선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보다 더 광범위한 맥락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알려주는 식이 될 거다.’ 남아프리카 민족해방 운동가들하고가 됐든 이탈리아 노동자들하고가 됐든, 최상의 관계를 가능케 한 토대는 이런 것이었어요.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해 1972년에 쓴 글은 이런 종류의 맞바꾸기 속에서 나왔죠. 당시 노동자들은 이런 소리를 듣던 중이었어요. ‘경제 위기니까 잠자코 있어야 해. 투쟁에 나선다면, 공장의 일자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야.’라고 말이죠. 그래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거예요. ‘우리는 위기 속에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게 함축하는 바는 뭘까? 우리는 위기라는 이유로 그저 잠자코 있어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위기 이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런 특정한 문제틀 아래서 썼던 겁니다. 그 틀거리는 ‘저기 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노동자들 스스로 잡았던 것이고요. 논문의 출발점은 이랬어요. ‘보자, (주기적) 위기들이란 노동자인 당신네들이 투쟁을 벌이든 안 벌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위기들이란 노동자들이 취한 전투성이라든가 경제운용상 벌어지는 이런저런 “실수”의 함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의 진행 자체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게 기본 지향이었습니다. 그 논문을 쓴 건 위기가 막 시작됐을 때, 그러니까 위기가 실존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이전이었어요. 그 논문은 여러 해를 거치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점검하고자 제가 써먹어온 이론적 틀로서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 논문의 문제틀은 꽤나 잘 작동해온 셈이예요.

 

...


하비  여러 면에서 그 당시 지적 교류의 천국이라고 알려져 있던 (탄자니아의 수도인) 다르에스 살람으로 가셨죠. 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존 사울과 함께 연구했던 작업에 대해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리기  다르에스 살람에서 지냈던 시간은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흥미진진했죠. 1966년 다르에스 살람에 도착했을 때 탄자니아는 독립한 지 불과 몇 년 안 된 상황이었어요.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이었던) 나이예레는 자신이 아프리카 사회주의라 여겼던 것을 지지하고 있었죠.  그는 중국과 소련의 반목 속에서 어렵사리 등거리를 유지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고 있었어요. 다르에스 살람이란 곳은 포르투갈 식민지와 로디지아,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하다 추방당한 세력들의 전진기지였죠. 거기 있는 대학에서 지낸 3년 동안, 온갖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매뉴얼 월러스틴, 데이비드 앱터, 월터 로드니, 로저 머레이, 솔 피치오토, 캐서린 호스킨스, 나중에 웨더맨(the Weathermen,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베트남 전쟁과 흑인차별 등 미국 행정부의 제국-인종주의에 대해 직접행동에 기반한 폭력적 저항으로 맞서면서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했던 미국 내 급진좌파조직)의 창설 멤버가 된 짐 멜론,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에 대해 연구중이던 루이자 파세리니와 그밖의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 말고도, 미국 블랙파워 운동 활동가들도요. 물론 존 사울도 그 중 하나였죠.

 

다르에스 살람에서 존과 함께 연구작업을 하면서, 저는 제 연구관심사를 노동공급에서 민족해방 운동과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탈식민화 정권들이란 이슈로 옮기게 됐어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이들 정권이 그 당시 신식민주의라고 불리며 갓 고개를 들고 있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공약으로 내건 경제발전을 실제로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죠. 하지만 차이도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 대해 존보다 제가 훨씬 덜 당혹스러워했다는 점에서였는데, 내 생각에 이 차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할 겁니다. 나로서는, 이들 정권을 세운 운동은 민족해방 운동이었어요. 어느 모로 봐도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거죠. 설사 사회주의적인 레토릭/수사를 포용했을 때조차요. 대중추수적인 정권이었다는 거고, 그런 만큼 민족해방을 넘어선 더 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둘 다 그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보긴 했지만, 민족해방 수준을 넘어선 정치적 발전 가능성이 그 당시에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선 지금도 만날 때마다 설전을 벌이는 부분입니다. 썩 유쾌한 분위기에서요. 그러나 같이 쓴 비판적 에세이들은 의견이 서로 일치된 것들이었죠.

 

 

출처: <뉴레프트리뷰> 56호(2009년 3/4월)

 

***

 

위에 인용한 내용은,

데이비드 하비가 (아마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지오반니 아리기와 했다는 인터뷰를 찾아서 읽다가,

번역을 해 놔야겠다고 맘 먹게 했던 대목이 되겠다.

 

어째서, 왜 그러고 싶었는지에 대해선

읽는 분들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지만..ㅋ;

 

다만, 첫 번째 인용 대목 같은 경우 "현장" 노동자들이 목말라하는 '이론'이 뭔지,

그런 요청을 받고 거기에 손발 맞춰 글을 썼다고 회고하는

고 아리기 옹의 얘기가 무엇보다 와닿았더랬다.

 

 

사실 이 부분 말고도 개인적 관심사와 결부시켜 보면,

얼추 130년 동안 이곳을 포함한 동아시아 권역에서,

대한제국부터 근대일본령 조선을 거쳐 대한민국(과 북조선)으로

통치형태상의 단절과 연속을 거치며 이뤄져온 "농업"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

(특히 1980년을 전후해서부터는 사실상 정책적 안락사 수순을 밟아온) 재편의 경험을

재검토, 재서술할 때 쏠쏠하게 재미 좀 보겠구나 싶은 대목도 있다.

 

그건 아마도 아리기가, 일국/지구 규모를 막론하고 중심부의 경험을 '보편적 준거'점 삼아

주변부에 대한 저의적 상상과 억측, 비약의 채찍질에 맛 들인 서구권의 주류 학자들과 달리,

아프리카처럼 그 중심부 권력의 숙주 내지 기능적 식민지로 결박돼 있는

'주변부'의 경험으로부터 전체를 추적, 조망, 재구성해온 방법의 미덕 때문이지 싶다.

 

뭐, 이곳 대한민국에서 주류 영역은 말할것도 없고 운동 진영에서마저,

그야말로 이중으로 주변화돼 있는 농업/농민/먹거리란 테마의 처치를 가만 따져 보면

확실히 우연은 아니다.

 

 

 

어쨌거나 위에 인용해 놓은 대목들이 지금 여기서 의미가 있다면 그건,

냉정히 말해 지방/일국/지역/지구적 규모로 다 같은 자본주의적 관계하에 있다 해서

노동자들이 다 같거나 하나인 게 아니며, 거꾸로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계급적 하나됨'의 정치가 앞으로 더더욱 중요하겠다는 점을 환기하기 때문이지 싶다.

마치 원래부터 있었는데 자본주의적 오물의 더께 속에 파묻혀 있는 무언가라기보단,

손때 묻혀 가면서 만들어 쓰면 쓸수록 외려 몸에 붙고 광이 나고 윤이 나는 것들 마냥

1등만 기억하려는 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 부단히 형성돼야 할 실천적 진리치로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름은 이중적인 의미로 봐얄 텐데

뭐, 죽어 있는 다름과 살아 있는 다름이 중첩돼 있다고 할까나..;

자본주의가 국민국가간 체제로서 존속하는 한 아마 계속해서 만들어질

국적/민족/인종/성차에 근거한 다름과, 그런 다름 혹은 정체성 때문에

숨막힌 채이거나 적어도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다름 말이다.

 

요컨대 '계급적 하나됨'의 정치란, 전자 같은 유형의 다름은 얄짤없이 죽이고

후자의 다름을 한껏 살리는 주체형성의 실천 기예이자 과정이란 얘기겠다.

 

적어도 나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더더욱 절실해지겠지만,

이런 하나됨의 정치가 역사적인 견지에서 좀더 멋지게 이뤄지는 데 크게 보탬이 돼줄

'사회과학 이론'에 대한 갈증이 특히 요즘 들어 한층 더 커지는 것 같다.

 

그래선지, '인문학'이란 용어도,

요즘 쓰이는 용법 중 아무리 좋은 함축을 담고 있다 해도

사회과학적 논의마저 이 범주로 묶어버리곤 하는 출판계나 지식생산자들의 모습이

솔직히 별로 탐탁치가 않고. 언제부터인진 몰겠으나,

웬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도피'에 대한 눈부신 알리바이 같아 보인달까.

일부러 오바 좀 하자면, 눈이 부시다 보니 그 속내를 들여다보기가

좀체 쉽지 않달까..ㅎ;

 

에뭐,, 얼마 전 사회체제 논쟁이 있었지마는,

'기껏해야' 조준선을 이명박정권 타도/교체에 정렬해논 체제 논쟁 말고, 앞서 말했다시피

한 100년 정도의 시간대 속에서 체제의 지속과 변동을 다룰 사회과학에 대한 이론화 작업이

전략적으로, 근까 좀 조직적으로 이뤄져야 하지 않겠냐는 얘긴데.

그래야 단기적인 타도/교체의 정치까지 아우르는 정치적 구상도 외려 더 수월해지잖을라나.

 

넋두리에 그치지 말았으면 좋겠다만

음, 그게 뭐 솔직히 생각대로, 간절히 바란대서 될 일은 아니겠고...;;

 

 

 

 

[지오반니 아리기는 2009년 6월 18일 오전 11시 볼티모어 자택에서 평화롭게 영면했다. 아리기는 2008년 7월 암 진단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동료 비벌리 실버와 아들 안드레아가 있다.]



하비  집안 내력과 배움의 이력에 대해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리기  1937년 이탈리아 밀란에서 태어났죠. 어머니 쪽으로 말하자면, 부르주아 집안이었어요. 외할아버지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온 이민자의 아들로, 노동 귀족에서 출발해 20세기 초반에는 손수 공장을 차릴 정도로 입지를 이룬 분이었죠. 처음엔 섬유기계류를 다루다가 나중에는 냉난방 설비를 만들었어요. 아버지는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투스카니에서 태어났어요. 밀란에 와서 외할아버지의 공장에서 일하게 됐는데, 달리 말하면 사장 딸하고 결혼한 셈이었죠. 그에 따른 이런저런 긴장이 생겼고, 결국 아버지는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장인과 경쟁하게 됐어요.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파시즘에 대한 반감을 공유했고 이런 분위기는 전쟁이 휩쓴 가운데서도 제 유년기 동안 커다란 영향을 끼쳤어요. 1943년 로마가 항복하면서 독일 나치가 이탈리아 북부를 점령한 일이라든가, 레지스탕스 활동, 연합군의 상륙처럼 말이죠.

 

아버지는 제가 18살 때 차동차 사고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어요. 전 할아버지의 충고와는 달리 아버지의 회사를 이어받기로 결심하고서 회사 경영에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보초니 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갔죠. 경제학과는 케인즈주의와는 일면식도 없는 신고전파의 진지였고, 아버지 사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됐어요. 결국 경제학은 그만둬야겠다는 걸 깨달았죠. 그때 전 외할아버지 회사 현장 중 한 곳에서 2년을 지내면서, 생산과정 조직화 관련 자료를 수집했어요. 이 과정에서 저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우아한 일반균형 모델이 여러 형태로 발생하는 수입의 생산과 분배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확신하게 됐죠. 이런 확신은 제 박사 학위 논문의 바탕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위논문 지도교수의 무급조교가 됐는데, 그 당시에는 이게 이탈리아 대학에 자리잡는 첫 관문이었죠. 생계비는 유니레버에서 연수생 관리 담당으로 일하면서 벌었고요.


 

하비  1963년에 로디지아-나이아잘랜드 대학에서 연구하러 아프리카로 간 건 어떻게 된 거였나요?


아리기  그곳에 갔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어요. 영국계 대학에서는, 유급 교원으로 임용될 희망이 생기기까지 4~5년 정도는 무급 조교로 지내야 하는 이탈리아 대학하곤 달리 교육·연구종사자들한테 돈을 실제로 준다는 걸 알았거든요. 1960년대 초반에 영국계 대학들에서는 옛 영국령 식민지였던 곳에다가 모국의 단과대학 격인 대학들을 세우고 있었죠. 로디지아-나이아잘랜드 대학은 런던대학의 단과대학 중 하나였어요. 전 두 곳에다 지원서를 넣었는데, 한 곳이 로디지아였고, 다른 한 곳은 싱가포르였죠. 런던에서 인터뷰하자는 연락이 왔고, 로디지아-나이아잘랜드 대학이 저한테 관심을 보이더군요. 경제학 강사직을 제안받게 됐어요. 그래서 거기로 갔던 거죠.

 

로디지아에서는 정말이지 지적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그간 훈련받아온 수학적 모델링에 입각한 신고전파 경제학적 전통은 로디지아에 가서 본 과정이나 아프리카인들의 실제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었죠. 로디지아-나이아잘랜드 대학에서 저는 사회인류학자들 중에서도 특히 그 당시에 이미 연결망 분석을 하고 있었던 클라이드 미첼과, 나중에 사례연구로 확장되면서 재개념화된 상황분석 방법을 도입중이던 자압 반 벨센하고 함께 어울려 연구를 했어요. 저는 사회인류학자들의 세미나에 정기적으로 참여했고, 이 둘한테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죠. 저는 차츰 추상적 모델링 작업과는 결별하고 구체적이고 경험적이며 역사에 기반한 사회인류학 이론으로 기울게 됐어요.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비교역사사회학으로 향하는 오랜 행보가 시작됐던 셈이죠.

 

하비  지금까지 한 얘기가, 로디지아에서 진행중이던 자본가 계급의 발전 형태와 그 형태에 특유한 모순을 분석하면서 1962년 이주정착민이 주축이던 로디지아전선당의 승리와 1965년 스미스(행정부)의 일방적 독립 선언을 이끌어낸 동인을 설명한 1966년의 에세이 “로디지아의 정치경제”가 씌여진 맥락이었던 거군요. 애초 무엇에 자극받아 이 에세이를 쓰게 됐던 거죠? 돌이켜봤을 때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구요.


아리기  “로디지아의 정치경제”는 내가 수학적 모델링을 사용하는 데 대해 가차없는 비판을 가했던 반 벨센이 적극 권유하면서 쓰게 됐어요. 그 이전에 콜린 레이즈의 책 <남로디지아 유럽인의 정치학>을 논평했더니, 반 벨센은 내게 더 긴 글 형태로 논평한 내용을 발전시켜보라고 제안하더라구요. 이 에세이와 다른 글 “역사적 시각에서 본 노동(력) 공급”에서, 저는 로디지아 농민들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자본 축적상의 모순을 만들어내는 여러 방식들에 대해 분석을 했죠. 그러니까 실제로는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자본주의 영역에 이점보다는 결국 문제를 더 많이 일으키게 된다는 거였어요.[1] 프롤레타리아화가 부분적으로 진행되는 한 아프리카 농민들은 자본 축적에 보탬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했는데, 생계기반의 일부를 스스로 충당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농민들의 프롤레타리아화가 더 심해질수록, (임금상승 압력을 상쇄하는) 이같은 메커니즘들은 삐걱대기 시작했어요. 노동력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했을 경우 착취는 완전한 생계임금이 지급되지 않으면 이뤄질 수가 없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화 때문에 착취는 더 쉬워지는 게 아니라 더 어려워지고, 정권은 곧잘 더 억압적이게 되는 셈입니다. 예컨대 마틴 레가식과 해롤드 울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주의적 차별정책(도입)이 아프리카 노동력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됐고 그래서 더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자본 축적에 보탬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억압적이어야 했던 탓이라고 주장했죠.

 

아프리카 남부 전체, 그러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보츠와나에서 옛 로디지아였던 곳들과 모잠비크, 그 당시엔 나이잘랜드였던 말라위를 거쳐 지정학적으로 북동부의 전진기지였던 케냐 지역에 이르는 지역은 광물자원에 기반한 부와 정착민 농업, 원주농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토지강탈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었어요. 이런 특징은 북부를 포함해 아프리카의 나머지 지역하고는 아주 다른 것이었죠. 서아프리카 경제는 기본적으로 (소)농민에 바탕한 것이었거든요. 하지만 사미르 아민이 “잉여노동의 아프리카”라고 했던 남부 지역에서는 여러 모로 봤을 때 농민들에 대한 극단적 토지강탈, 그러니까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가 하나의 패러다임을 이루고 있었어요. 우리 중 몇몇은 이런 극단적 강탈 과정이 모순을 띤다고 지적하고 있었죠. 그 과정은 처음에는 농민들이 자본주의적인 농업과 광업, 제조업 등등에 (정착민 자본가들 입장에서는 원주농민들을 상대로 아무 비용도 안 치르고 토지를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공양을 바쳐야 하는 조건들을 창출해요. 그러나 이런 과정은 갈수록 그렇게 창출된 프롤레타리아트를 착취, 동원, 통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가중시키죠. 제가 쓴 “역사적 시각에서 본 노동(력) 공급”하고 레가식과 울프의 관련 저술들은 이 당시에 우리가 하고 있던 작업인데요, 이 작업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화와 토지강탈의 한계와 관련한 남부 아프리카 패러다임이라는 게 알려지게 된 겁니다.

 

예컨대 로버트 브레너처럼 자본주의 발전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화와 동일시하는 이들의 생각과는 모순되게도, 남부 아프리카의 경험적인 상황은 프롤레타리아화가 그 자체도 그렇고 그것만으로는 자본주의 발전, 즉 프롤레타리아화 외에 필요한 다른 모든 여건을 조성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보여줬어요. 로디지아의 경우, 제가 거기서 벌어지는 프롤레타리아화의 세 단계를 실증했습니다만, 이 중 자본주의적 축적에 도움이 됐던 건 하나뿐이었죠. 첫 단계에서 농민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의 발전에 상품화된 농산물 공급으로 대응했는데, 나중에는 오로지 높은 임금을 받겠다는 기대로만 노동력 투하에 나서게 되요. 이에 따라 전 지역에서 노동(력) 부족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났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인 농업이나 광업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마다 아프리카계 농민들이 재빠르게 공급하던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생겼기 때문이예요. 농민들은 노동력보다는 차라리 농산물을 팔아 화폐 경제에 참여할 수 있었던 셈이죠. (백인)정착민 농업에 대한 국가지원이 목표로 삼았던 것 하나는 아프리카계 토착농민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죠. 토착농민들이 기왕이면 농산물보다는 노동력을 어쩔 도리 없이 내다팔도록요. 부분적인 프롤레타리아화에서 전면 프롤레타리아화로 나아가는 오랜 추방 과정은 이렇게 이뤄졌던 거죠. 하지만, 이미 언급했다시피 이 과정은 모순적이기도 했어요. ‘자본주의 발전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화’라는 단순 모델이 안고 있는 문제는, 그 모델로는 남부 아프리카에서 형성된 정착민 (농업 및 광업)자본주의의 현실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례들, 당장 노예제 노동과 인디언학살, 유럽의 잉여노동으로 건너오게 된 이주민들의 조합으로 패턴상 특징이 전혀 다른 (브레너가 살고 있는) 미국 같은 곳에서의 역사적 경험치를 놓치고 만다는 데 있거든요.

 

 

하비  그러면 1966년 7월 스미스 정부에서 벌인 탄압 와중에, 정치적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로디지아 대학 강사 9명 중에 한 명이었던 건가요?


아리기  그렇죠. 우리는 일주일간 구속돼 있다가 강제추방됐습니다.

 

 

하비  여러 면에서 그 당시 지적 교류의 천국이라고 알려져 있던 (탄자니아의 수도인) 다르에스 살람으로 가셨죠. 그 시절에 대해, 그리고 거기서 존 사울과 함께 연구했던 작업에 대해 얘기해주시겠어요.

 

아리기  다르에스 살람에서 지냈던 시간은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흥미진진했죠. 1966년 다르에스 살람에 도착했을 때 탄자니아는 독립한 지 불과 몇 년 안 된 상황이었어요. (탄자니아 초대 대통령이었던) 나이예레는 자신이 아프리카 사회주의라 여겼던 것을 지지하고 있었죠.  그는 중국과 소련의 반목 속에서 어렵사리 등거리를 유지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고 있었어요. 다르에스 살람이란 곳은 포르투갈 식민지와 로디지아,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 민족해방 운동을 하다 추방당한 세력들의 전진기지였죠. 거기 있는 대학에서 지낸 3년 동안, 온갖 사람들을 만났어요. 이매뉴얼 월러스틴, 데이비드 앱터, 월터 로드니, 로저 머레이, 솔 피치오토, 캐서린 호스킨스, 나중에 웨더맨(the Weathermen,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베트남 전쟁과 흑인차별 등 미국 행정부의 제국-인종주의에 대해 직접행동에 기반한 폭력적 저항으로 맞서면서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노선을 추구했던 미국 내 급진좌파조직)의 창설 멤버가 된 짐 멜론, 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에 대해 연구중이던 루이자 파세리니와 그밖의 많은 학자와 지식인들 말고도, 미국 블랙파워 운동 활동가들도요. 물론 존 사울도 그 중 하나였죠.

 

다르에스 살람에서 존과 함께 연구작업을 하면서, 저는 제 연구관심사를 노동공급에서 민족해방 운동과 새롭게 등장하고 있던 탈식민화 정권들이란 이슈로 옮기게 됐어요.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이들 정권이 그 당시 신식민주의라고 불리며 갓 고개를 들고 있던 상황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고 공약으로 내건 경제발전을 실제로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죠. 하지만 차이도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 대해 존보다 제가 훨씬 덜 당혹스러워했다는 점에서였는데, 내 생각에 이 차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할 겁니다. 나로서는, 이들 정권을 세운 운동은 민족해방 운동이었어요. 어느 모로 봐도 사회주의 운동이 아니었다는 거죠. 설사 사회주의적인 레토릭/수사를 수용했을 때조차요. 대중추수적인 정권이었다는 거고, 그런 만큼 민족해방을 넘어선 더 큰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둘 다 그것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보긴 했지만, 민족해방 수준을 넘어선 정치적 발전 가능성이 그 당시에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선 지금도 만날 때마다 설전을 벌이는 부분입니다. 썩 유쾌한 분위기에서요. 그러나 같이 쓴 비판적 에세이들은 의견이 서로 일치된 것들이었죠.

 

 

하비  유럽으로 돌아왔을 때, 6년 전하고는 상황이 아주 다르던가요?

 

아리기  그랬죠. 1969년 이탈리아로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두 가지 상황에 빠져들게 됐죠. 하나는 강사임용 제의를 받았던 트렌토 대학에서였어요. 트렌토 대학은 그 당시 전투적 학생운동의 중심 거점이었고, 이탈리아에서 유일하게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이 가능한 곳였죠. 제 임용을 밀어준 건 트렌토대학 조직위원회였는데, 기독교민주주의자였던 니노 안드레아따, 사회민주주의자 노베르토 보비오, 그리고 프란세스코 알베로니가 위원으로 있었죠. 제 임용은 급진 성향인 학자 채용으로 학생운동을 길들이려는 시도의 일환이었어요. 첫 강의 때는 수강생이 너댓 명에 불과했죠. 하지만 여름 무렵에 아프리카에 대한 책을 내고 난 후 가을 학기가 되자, 거의 1천 명쯤 되는 수강생이 강의실을 메웠어요. [2] 제 강의는 트렌토 대학에서 큰 화젯거리가 됐죠. 그래서 (1969년 결성된 급진좌파-자율주의 계열의 당조직으로, ‘지속투쟁’이란 뜻인) ‘로따 꼰띠누아’가 둘로 쪼개지기조차 했어요. (조직결성 멤버인 마르꼬 보아또가 중심인) 보아또파는 학생들이 내 강의에 와서 발전 이론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접하길 원했던 반면, (또다른 멤버 모로 로스타뇨가 중심인) 로스타뇨파는 교정에서 강의실에 돌을 던지면서 강의를 저지하려 했죠.

 

두 번째로 달라진 상황은 뚜린에서 있었는데, 루이자 빠세리니를 통해서였어요. 상황주의 관련 저술을 앞장서 선보이면서 상황주의에 빠져 있었던 로따 꼰띠누아의 다수 간부들한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죠. 저는 그 당시 트렌토에서 밀란을 경유해 뚜린까지 통근을 했는데, 학생운동의 중심지에서 노동운동의 중심지를 오가는 셈이었죠. 이 운동의 여러 측면들은 절 매혹했던 동시에 골치를 안겨줬어요. 특히나 이 운동이 ‘정치’를 거부하는 데서 그런 양가 감정을 느꼈죠. 상당수 집회에서 아주 전투적인 노동자들은 일어나선 이렇게 말하곤 했어요. ‘정치는 이제 그만! 정치는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우리에게 없는 건 단결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공산당 계열의 노동조합들이 반동적이고 억압적인 조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여기엔 중요한 진실의 일단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저로선 이게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국제공산당 계열 노조에 대한 반발은 노동조합 전체에 대한 하나의 반발이 됐죠. ‘뽀떼레 오뻬라이오(노동자의힘)’과 ‘로따 꼰띠누아’ 같은 그룹들은 자기 조직을 모두 기존 노조와 대중 정당의 대안으로 스스로 자리매김했어요. 당시 학생이었지만 정치조직의 간부이자 반의회주의 좌파 중에선 보기 드문 그람시주의자이기도 했던 로마노 마데라와 함께, 우리는 운동과 연계시킬 그람시적인 전략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죠.

 

‘아우또노미아’라는, 노동계급의 지적 자율성이라는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왔어요. 이같은 착상은 오늘날 통상 안또니오 네그리에게 빚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아우또노미아는 사실 마데라와 빠세리니, 제가 함께 결성한 ‘그람시그룹’에서 1970년대 발전시킨 그람시의 재해석에 연원을 뒀던 거예요. 이 그룹이 운동에 기여하는 바를 우리는 노조나 정당을 대체한다는 데 두지 않았어요. 전위적인 노동자들을 돕는 데 관여한 학생과 지식인들이, 노동자들 스스로 자신들의 투쟁이 벌어지는 좀더 폭넓은 일국적·지구적 과정을 앎으로써 노동자로서의 자율성을 고양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봤죠. 그람시가 했던 말로 바꿔 말하자면, 투쟁하는 노동계급이 유기적 지식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죠. 이런 목표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나중에 the Area dell'Autonomia라고 알려지게 됩니다만, ‘노동자정치행동(cpos)’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어요. 이 단체가 독자적인 실천을 진전시킴에 따라, 그람시그룹은 기능을 멈추고 해산하게 되죠. 1973년 가을에 그람시그룹이 실제로 해산하던 무렵, 네그리가 부각하게 되면서 애초 의도와는 동떨어진 모험적인 방향으로 노동자정치행동과 the Area dell'Autonomia를 이끌었어요.

 

 

하비  아프리카 민족해방 투쟁과 이탈리아 노동계급의 투쟁들로부터 얻은 어떤 공통된 교훈 같은 게 있다면?

 

아리기  사실 두 경험 모두, 좀더 광범한 운동들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었죠. 민족해방운동/노동(계급)운동가들은 내가 어떤 토대 위에서 자기네들이 벌이는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했어요. 제 입장은 이랬죠. ‘당신네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야 내가 앞으로 알게 될 것보다 당신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당신들한테 뭘 해야 하는지 말하진 않겠다. 하지만 나는 당신네가 처한 상황이 펼쳐질 좀더 폭넓은 맥락을 더 잘 이해할 만한 자리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려는 맞바꾸기란, 당신네들은 내게 당신네들의 상황을 알려주고, 난 당신네들 상황이 당신네들이 볼 수 없거나 당신네들이 선 자리에선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는 보다 더 광범위한 맥락과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알려주는 식이 될 거다.’ 남아프리카 민족해방 운동가들하고가 됐든 이탈리아 노동자들하고가 됐든, 최상의 관계를 가능케 한 토대는 이런 것이었어요.

 

자본주의 위기와 관련해 1972년에 쓴 글은 이런 종류의 맞바꾸기 속에서 나왔죠. 당시 노동자들은 이런 소리를 듣던 중이었어요. ‘경제 위기니까 잠자코 있어야 해. 투쟁에 나선다면, 공장의 일자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거야.’라고 말이죠. 그래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던 거예요. ‘우리는 위기 속에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그게 함축하는 바는 뭘까? 우리는 위기라는 이유로 그저 잠자코 있어야 하는 걸까?’ “자본주의 위기 이론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은 이런 특정한 문제틀 아래서 썼던 겁니다. 그 틀거리는 ‘저기 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이야기해달라’고 하는 노동자들 스스로 잡았던 것이고요. 논문의 출발점은 이랬어요. ‘보자, (주기적) 위기들이란 노동자인 당신네들이 투쟁을 벌이든 안 벌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위기들이란 노동자들이 취한 전투성이라든가 경제운용상 벌어지는 이런저런 “실수”의 함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축적의 진행 자체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게 기본 지향이었습니다. 그 논문을 쓴 건 위기가 막 시작됐을 때, 그러니까 위기가 실존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기 이전이었어요. 그 논문은 여러 해를 거치며,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점검하고자 제가 써먹어온 이론적 틀로서 중요해졌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그 논문의 문제틀은 꽤나 잘 작동해온 셈이예요.



하비  자본주의 위기 이론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다룰 텐데요, 그보다 먼저 칼라브리아(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했던 작업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1973년, 운동이 이내 잦아들기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에, 코센자 대학 교수가 됐죠?


아리기  저한테 칼라브리아 행이 매력적이었던 이유 중 하나는, 노동 공급을 테마로 한 연구를 새로운 장소에서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저로선 로디지아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했을 때(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했음을 그들 스스로 의식하게 됐을 때), 그 결과 도심권역에서 생활임금을 획득하려는 투쟁들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미 본 터였죠. 달리 말해, ‘우리는 독신 남성이며, 가족들은 농촌에서 계속 농사를 짓고 산다’는 허구는 그들이 실제로 일단 도시에 살아야 하자마자 지탱할 수 없게 되더라는 겁니다. 이 점을 전 “역사적 시각에서 본 노동 공급”에서 지적했어요. 이 점은 이탈리아에서 좀더 명료해졌는데, 왜 그랬냐면 1950~60년대 (이탈리아) 남부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북부 공업 지역에 노조와해세력(scab)으로 흘러들어왔었거든요. 하지만 1960년대부터, 특히 60년대 후반부터 남부 출신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으레히 그렇듯이, 계급투쟁의 선봉대로 탈바꿈했죠. 전 칼라브리아에서 연구작업 집단을 꾸릴 때 동료들이 아프리카, 그 중에서도 특히 이주와 관련한 사회인류학 분야 문헌들을 읽도록 했고, 그리고 나서 칼라브리아로부터 (이주)노동 공급은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관한 분석에 착수했어요. 분석에 앞서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죠. 이같은 이주의 조건을 창출했던 건 무엇이며, 이주노동자들이 특정 시점에서 이탈리아 북부 노동계급의 교섭능력을 갉아먹는 데 활용가능한 유순한 노동력이길 그치고 스스로 전투적인 전위가 됐을 때 이주노동 공급이 갖는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연구작업을 통해 두 가지가 드러났어요. 먼저, 자본주의적 발전이 반드시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에 의존하는 건 아니라는 거였죠. 반면 노동(력) 이주는 장기적으로 (이를테면 엔클로저 같은) 강탈/축출이 전혀 일어나지 않은 곳들에서, 심지어 지주한테서 토지를 매입할 가능성조차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뤄지고 있었어요. 그것은 장남이 땅을 물려받게 돼 있는 장자상속제가 해당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상황과 관계가 있었죠. 전통적으로, 차남들은 장기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이농이 고향에서 다시 땅을 사들여 스스로 농장을 차리는 데 필요한 돈을 벌 중요한 대안적 경로를 제시하기 전까지는 성직자나 직업 군인이 됐어요. 반면에 정말로 가난한 지역들, 즉 노동자들이 완전히 프롤레타리아화한 곳에서 그들은 어딘가로 이주할 수 있는 여유마저 없는 경우가 보통이었죠. 이들이 어딘가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예컨대 1888년 브라질에서 노예제 폐지 후 저렴한 대체 노동력이 필요했던 시기뿐이었어요. 브라질에선 해방된 노예들을 대신해 몹시 궁핍화한 이탈리아 남부 출신들로 노동력을 충원하고 이들을 브라질에 재정착시켰죠. 이주의 패턴이 아주 다른 경웁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주하는 건 극빈층이 아니예요. 이주하려면 그에 필요한 상당한 수단과 연결망이 있어야 했으니까요.

 

칼라브리아 지역 연구에서 두 번째로 밝혀낸 것은 아프리카 연구에서 나온 결과와 여러 모로 닮은 꼴이었죠. 로디지아 사례와 마찬가지로 칼라브리아에서도 이주해 간 곳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계급투쟁에 관여하는 정도는, 이주한 장소의 조건들이 자기네가 당면한 삶의 기회를 영구히 결정짓는 것이라 스스로 여기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었어요. 그들이 떠나온 여러 지역의 상황이 그들의 노동조건과 받게 될 급여 수준을 결정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죠. 이주자들 스스로 어느 지점에서 생계 전체가 임금 고용에서 비롯된다는 걸 알게 되는지 말해야 했던 셈이예요. 이건 일종의 전환점 같은 건데, 현장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죠. 하지만 요는, 프롤레타리아화를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전형으로 간주하는 발상법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비판을 가했다는 것이었어요.

 

 

하비  그 연구에 관한 초고를 로마에서 도난당하고서, 최종 원고가 선을 보인 건 여러 해가 지나 세계체제(들) 분석이 진행중이던 빙햄턴 대학으로 옮긴 1979년 미국에서였죠. 이때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화와 자본주의 발전 간의 관계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월러스틴과 브레너의 입장과 뚜렷이 대비시켰죠?


아리기  그렇죠. 충분히 명시적이었다고 할 순 없고, 두 사람에 대해선 심지어 지나가듯 언급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 원고 자체는 사실 두 사람 모두를 겨냥한 비판이었어요. [4] 월러스틴은 이론적으로 생산관계들을 중심-주변부 구조상의 위치가 결정한다고 주장했죠. 그에 따르면, 주변부에서 경향상 나타나는 건 (노예제·농노제 형태를 띤) 강압적인 생산관계로,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는 주변부에선 나타나지 않으며 중심부에서 볼 수 있다는 거예요. 브레너는 여러 측면에서 월러스틴과 반대로 생산관계가 중심부-주변부 구조상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지만, 다르게 보면 둘은 대단히 비슷합니다. 둘 다, 중심부-주변부상의 위치와 생산관계들 사이에 하나의 특정한 관계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죠. 칼라브리안 사례 연구가 보여줬다시피, 이는 맞지 않아요. 동일한 주변부 안에서도 세 가지 상이한 경로가 동시에, 그리고 서로를 강화하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게 밝혀졌으니까요. 더군다나, 그 세 경로들은 역사적으로 다른 핵심부 지역에서 특징적이었던 발전 양상과 굉장히 비슷했어요. 이 중 한 경로는 레닌이 ‘융커’의 길이라 했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가 이뤄진 (노예제에 바탕한) 대농장 형태와 아주 비슷했고, 또 다른 경로는 역시 레닌이 말했던 아메리카적인 길로, 시장에 묻어들어간 중소농 형태와 비슷했죠. 레닌은 세 번째 경로에 대해 언급이 없었는데, 우리가 스위스적인 경로라고 부르는 거예요. 즉, 원거리 이주(노동) 후에 다시 출신지 쪽으로 재산을 투자·보유하는 형태죠. 스위스에는 농민들의 (토지)강탈은 전혀 없고, 외려 소농 형태를 강화하는 이주(노동)의 전통이 있습니다. 칼라브리아 사례에서 흥미로웠던 건, 다른 곳에서는 중심부상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이들 세 가지 경로 모두를 칼라브리아라는 주변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거예요. 이건 프롤레타리아화를 단일한 과정으로 보는 브레너식 접근과, 생산관계를 [중심-(반)주변부라는 지정학적] 위치의 함수로 보는 월러스틴식 접근 둘 다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하비  <제국주의의 기하학>이 나온 건 당신이 미국에 가기 전인 1978년이었죠.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홉슨의 제국주의론을 이해하고자 기하학이란 수학적 은유를 사용하고 그게 기능적으로 아주 유용하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 하지만 지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의문 하나가 읽다 보니 생기더군요. 홉슨과 자본주의를 함께 끄집어낼 때, 헤게모니라는 발상이 갑작스레 등장하더라는 거죠. 진행중이던 논의 속에서 기하학에서 지리학으로 변환이 일어났다고 할까요. 처음에 <제국주의의 기하학>을 쓰게 된 동기는 뭐였고, 당신한테 그 책이 지닌 중요성은 뭐였나요.


아리기  그 당시에 저는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던 용어법상의 혼란이 갑갑했어요. 제가 겨냥했던 건 이런 혼란을 상당 정도 걷어내는 것이었죠. 온통 혼란스럽게 ‘제국주의’라고 곧잘 명명되곤 하던 서로 다른 개념들을 각기 구별해줄 위상학적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말이죠. 하지만 또한 기하학이란 개념 덕에 제 논의는 제국주의에 관한 하나의 실행 형태로서, 그래요, 헤게모니 개념으로 이행할 수 있었죠. 1983년 개정판 후기에서 저는 이 점을 명시적으로 따졌는데요, 거기서 주장했던 건 오늘날 국가간체제의 동학을 분석하는 덴 ‘제국주의’라는 말보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더 유용하겠다는 점이었어요. 이런 관점에서 저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했던 건, 그람시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국가간 관계에 다시 응용하는 것 뿐이었죠. 국가간 관계에서 헤게모니라는 건 원래 그람시가 그 개념을 일국 수준의 정치적 관할권 내에서 나타나는 계급관계 분석에 적용하기 전부터 있었던 거였고요. 물론, 그람시가 그렇게 한 덕분에 헤게모니 개념이 예전엔 몰랐던 많은 방식으로 풍부해졌던 거지만요. 우리가 헤게모니 개념을 국가간 관계의 영역으로 재수출했던 일은 그람시로부터 엄청난 혜택을 받았던 셈이죠.

 

 

하비  1994년 출간된 책제목이기도 한 ‘장기 20세기’ 개념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건 브로델이죠. 브로델을 섭렵하고 난 뒤, 그에 대해 특별히 비판할 게 있다면?


아리기  비판하는 거야 무척 쉽죠. 브로델의 저술은 시장들과 자본주의 관련 정보원으로서 믿기지 않을 만큼 풍부하지만, 그 어떤 이론적 틀도 가지고 있지를 않아요.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찰스 틸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절충적이어서 셀수없는 이론의 단편들로 가득하지만, 그래서 결국 아무 이론도 없는 셈이랄까요. (이렇다 보니) 브로델한테 무작정 기댈 수는 없죠. 그에게서 무얼 찾을 건지, 그리고 무얼 추려낼 건지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갖고서 접근해야 해요. 맑시스트든 아니든 좀더 전통적인 경제사가는 물론이고 월러스틴과 다른 모든 세계체제 분석가들하고는 달리 제가 브로델한테 주안점을 둔 것 하나는, 16~17세기에 국민/민족국가간 체계가 등장했지만 제 생각으론 이보다 앞서 도시-국가간 체계가 있었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자본주의의 기원들은 바로 이 도시-국가간 체계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고요. 이 점은 세계의 여타 지역과 비교해 서구 내지 유럽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하지만 브로델을 무작정 따라가다가는 길을 잃기 쉽죠. 독자들을 서로 다른 수많은 길로 이끌기 때문이예요. 예를 들어, 저는 이 관점을 추려서 이걸 윌리엄 맥닐이 쓴 <전쟁의 세계사>와 접맥시켰단 말이죠. 이 책에서 맥닐은 다른 시각으로 도시-국가간 체계가 영토국가간 체계보다 앞서 있었고 이 체계를 예비했다는 주장을 펼치거든요.


 

하비  그보다 훨씬 더 큰 이론적 깊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브로델한테서 가져온 생각 또 하나가, 금융영역의 팽창은 어느 특정한 헤게모니 체제의 가을을 알리고 새로운 헤게몬(헤게모니를 장악한 국가)으로의 변환에 앞서 일어난다는 개념이죠. 이게 <장기 20세기>를 관통하는 중심적인 통찰인 거죠?

 

아리기  그렇죠. 특정 시대의 주도적인 자본주의 조직들이 또한 금융 팽창을 주도하게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언제나 생산 영역의 힘관계가 물적으로 팽창하는 일이 한계에 봉착할 때라는 겁니다. 이 과정의 논리, 다시 말하지만 브로델한테서는 볼 수 없는 이 과정의 논리라고 하는 것은 경쟁이 강화될 때 실물 경제에서 이뤄지는 투자는 차츰 위험도가 커지고, 이에 따라 자본축적자들의 유동성 선호는 악화된다는 것이죠. 바꿔 말하면 이같은 과정이 금융적 팽창의 공급측 조건을 창출한다는 얘깁니다. 물론 따라오는 질문은 이런 거겠죠. 금융적 팽창의 수요측 조건은 그럼 어떻게 창출되느냐? 이 질문에 대해 저는 베버의 아이디어에 기댔는데요, 베버는 유동자본을 위해 벌어지는 국가간 경쟁이 근대라고 하는 시기가 세계사적으로 지닌 종별성이라고 했죠. 제가 주장하기로는, 이 경쟁이 금융적 팽창의 수요측 조건을 창출한다는 것이었고요. 브로델이 ‘가을’이라는 발상을 선보인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축적과정상 형성됐던 특정한 리더십이 끝맺음의 국면에 들어섰음을, 다시 말해 실물 영역에서 금융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마침내 또다른 리더십의 대체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말이죠. 하지만 맑스의 생각도 그랬는데, 금융적 팽창을 겪는 특정 국가가 맞이한 가을은 다른 곳에선 새순이 돋는 봄이기도 하다고 했으니까요. 베니스에서 축적된 잉여들이 네덜란드로, 네덜란드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했다시피 말예요. 이렇듯 우리는 맑스 덕분에 브로델에게서 얻은 영감을 보완할 수가 있습니다. 상호연계된 일련의 발전들 속에서, 가을은 다른 장소에서 도래하는 봄이 되는 거라고 말이죠.



하비  <장기 20세기>에서 한 작업이 바로 르네상스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연속적으로 진행돼온 자본주의적 팽창과 헤게모니 권력상의 주기를 추적하는 것이었죠. 당신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본의 실물적 팽창 국면은 과잉경쟁의 압력 아래 결국 지리멸렬해지면서 금융적 팽창 국면에 길을 내주고, 이 국면이 다하고 나면 국가간 카오스의 시기가 닥치는데, 이 카오스는 지구적 질서를 복원하고 실물적 팽창의 주기를 재차 이끄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적 블록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권력의 등장으로 해결을 보지요. 그런 (헤게모니를 발휘한 국가인) 역사적 헤게몬들로 제노아, 네덜란드, 대영제국, 미합중국이 있었다는 거고요. 이들 역사적 헤게몬이 어김없이 등장했던 사실을, 우리는 어느 정도로까지 우발적인 맥락들의 집합으로서 파악할 수 있을까요?


아리기  좋으면서도 어려운 질문이네요! 우발적 맥락이란 요소는 늘 있게 마련이죠. 동시에 앞서 이야기한 (헤게모니)이행이 그토록 오래 이뤄지고 요동과 카오스의 시기를 맞이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체제를 조직하는 행위자들 자체가 그런 조직화 와중에 학습 과정을 거치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 사례인 미국의 경우를 보면 이는 명백해지죠. 19세기 후반 무렵, 미국은 그 당시 헤게몬이던 영국의 계승자라고 할 만한 특징들이 이미 상당 정도 있었어요.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진정한 헤게모니 권력에 어울리는 구조와 사상들을 발전시키기까지는, 양차 세계대전과 파국적 공황이라는 사건을 포함해 50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렸죠. 19세기 무렵 미국이 잠재적 헤게몬으로 발전하게 된 건 엄밀히 말해 우발적 맥락의 산물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분명히, 지리적인 측면에서 그런 우발적 맥락은 있죠. 가령 북미 권역이 유럽 권역에 비해 다른 공간적 지형을 가졌다는 점, 다시 말해 영토적 확장을 거듭하던 러시아를 예외로 하면 유럽에선 그 자체 불가능한 국가 형성이 북미에선 가능했다는 점에서 말예요. 하지만 거기엔 체제적인 요소도 있었죠. 이를테면 대영제국 주도로 창출됐던 국제 신용체계가 어느 시점 이후부터 미합중국이 만들어지는 데 특정한 방식으로 유리하게 굴러갔던 것처럼요.

 

확실히, 19세기 후반에 미합중국처럼 특정한 역사-지리적 지형 아래 놓인 국가가 아예 생기지 않았다면 역사는 아주 다르게 진행됐겠죠. 어느 나라가 헤게몬으로 등극했까요? 우린 그저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실제론 여러 방면에서 네덜란드와 대영제국의 전통에 서서 형성중이던 미합중국이 있었던 겁니다. 제노아 같은 경우는 좀 달라요. 제가 제노아를 헤게몬이라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죠. 제노아는 그 당시 화교까지 아우르는 이산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초국적 금융조직 유형에 더 가까웠어요. 제노아는 네덜란드와 대영제국, 미국이 그랬던 것과 같은, 그람시적 의미의 헤게모니 국가가 아녔던 거죠. 지리적 요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들 역사적 헤게몬은 공간적으로 아주 다르다 하더라도, 각각은 앞선 헤게몬에게서 습득한 조직상의 특징들에 바탕해 형성이 됐죠. 대영제국은 네덜란드에게 빚진 게 상당하고, 미국은 영국에 대해서 그렇고요. 이들 국가는 상호연계돼 있는 하나의 국가간 집합인 셈이죠. 거기엔 (기본 형태와 규모 면에서 자꾸만 불어나는) 일종의 눈덩이 효과 같은 게 있고요. 그러니까, 그래요, 우발적인 맥락은 있지만 체제적인 연계 또한 있는 겁니다.


 

하비  <장기 20세기>에선 노동운동의 운명을 다루지 않죠. 노동운동을 뺀 게, 그때로선 노동운동이 가진 중요성이 덜하다고 여겨서였나요, 아니면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이란 부제가 그랬듯 책의 구성 자체가 이미 포괄적이고 복잡하다 보니 노동까지 포함하는 건 과하다고 느껴서였나요?

 

아리기  후자 쪽에 더 가까웠죠. <장기 20세기>는 원래, 빙햄턴에서 처음 만났(고 나중에 제 아내가 됐)던 비벌리 실버와 함께 집필하기로 기획했던 거였어요. 1부는, 실제로 나온 책의 첫장 내용이기도 한데, 헤게모니(들)에 관한 것이었죠. 2부는 자본에 관한 부분으로, 자본의 조직화를 담당한 기업,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경쟁을 다루려 했고요. 3부가 노동였죠. 노동과 자본의 여러 관계와 노동운동들을 다루는. 하지만 금융화가 역사적 자본주의의 반복적 패턴이란 걸 알게 되면서 당초 잡았던 기획의 전체가 크게 흔들려버렸죠. 저는 불가피하게 시간적으로 거슬러올가는 작업을 해야 했고, 처음엔 결코 이러고 싶었던 게 아녔어요. 왜냐하면 기획된 책은 그야말로 ‘장기 20세기’, 그러니까 1870년대의 대공황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제가 금융화 패러다임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당초 기획상으로 잡았던 균형에서 벗어난 상태였고, <장기 20세기>에서는 기본적으로 14세기 무렵부터 등장한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속에서 했던 금융 자본의 역할(만)을 다뤘던 겁니다. 그래서 실버는 2003년에 출간된 <노동의 힘>에서 노동 관련 작업을 맡았던 거구요.[5]

 

 

하비  두 사람을 공저자로 해 1999년에 나온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Chaos and Governance in the Modern World System>를 보면, <장기 20세기>로 애초에 구상했던 구조를 따르고 있는 것 같던데요?


아리기  그렇죠, 그 책엔 지정학, 기업, 사회적 갈등 같은 주제들에 관한 장이 따로 있죠.[6] 그러니까 당초의 프로젝트는 결코 중단된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장기 20세기>에서 그랬다시피 확실히 여기에 붙들리지 않았던 건, 금융과 실물 영역의 팽창에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에 노동을 다룰 순 없었기 때문이었죠. 자본주의를 정의할 때 초점을 실물과 금융이 번갈아 팽창하는 데 일단 맞추게 되면 여기에 노동을 다시 끌어들이기는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다룰 게 너무 많아서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 간에 맺어진 관계가 시공간적으로 상당한 변이를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하나 예를 들면,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에서 지적했던 것으로, 사회사적인 가속화란 게 있어요. 어떤 축적체제에서 또다른 체제로의 이행과정들을 비교하다 보면, 네덜란드에서 대영제국으로 헤게모니가 이행하는 와중에 일어난 사회적 갈등은 금융적 팽창과 전쟁에 견줘 상대적으로 더디다는 걸 깨닫게 되거든요. 20세기 초반 대영제국에서 미국으로 이뤄진 이행 과정에선 대체로 금융적 팽창 및 전쟁과 동시에 사회적 갈등의 폭발이 일어났고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향방이 불확실한 이행 과정에서,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 나타났던 사회적 갈등의 폭발은 금융적 팽창에 앞서서, 주요 국가들 간의 전쟁 없이 일어났죠.

 

달리 말해, 20세기 전반부 동안 제일 컸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세계 전쟁 직전과 직후에 일어났던 거예요. 레닌의 혁명 이론은 바로 여기에 기초해 있었죠. 즉, 자본주의 국가들간의 경쟁 구도가 전쟁으로 바뀌면 이는 혁명에 우호적인 조건을 창출하리라는 건데, 이는 경험적으로 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확인할 수가 있어요. 어던 의미에서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죠. 그러니까, 현재 진행중인 이행 과정에서 자본주의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건 사회사적 가속화 때문이라고 말이죠. 하비 당신이 처음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면, 그래서 저는 <장기 20세기>에서 금융적 팽창, 자본축적의 체제적 주기들과 세계 헤게모니들에 대한 제 주장을 정교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지만,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에선 사회적 갈등과 금융적 팽창, 헤게모니 이행 사이의 상호관계라는 쟁점으로 되돌아갔던 거고요.



하비  본원적 축적에 관해 논의하면서, 맑스는 국가채무와 신용체계, 은행에 의한 지배, 그러니까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일어났던 금융과 국가 간의 통합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진화 방식 면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지닌다고 썼죠. 하지만 <자본>에서 신용체계에 관한 분석은 3권에서 가서야 이뤄지는데요, 맑스가 이자를 다루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본의 집중화와 고정 자본의 조직화 등과 관련해 금융체계가 중요하게 부상중이었는데도 말이죠. 이는 이런 의문을 불러일으켜요. 당신이 지적하길 숨통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금융-국가 간 연계 속에서, 계급투쟁은 실제로 어떻게 이뤄지느냐 거죠. 맑스의 분석에는 간극이 있는 것 같아요. 중요한 동학이 자본과 노동 간 관계에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이야기한 과정들, 이를테면 헤게모니의 이전이라든가 (축적에 필요한 지리적) 규모의 팽창에서 노동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간극이 있다 보니 <장기 20세기>가 노동이란 주제를 내적으로 통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건 이해가 되요. 어떤 의미에서 노-자 관계는 (<장기 20세기>가 중점적으로 다룬) 자본주의적 동학에선 중심적이지 않으니까요. 동의하십니까?


아리기  네, 동의합니다만, 한 가지, 제가 언급했던 사회사적 가속화 현상이 그 단서임을 전제로요. 1960~70년대 노동자 투쟁은 1970~80년대에 걸쳐 이뤄진 금융화와 그 진화 과정에서 주된 변수가 됐어요. 노동자/서발턴들의 투쟁과 금융화 간의 관계는 시간 속에서 달라지는 것으로, 최근 들어선 예전에 볼 수 없었던 특성들이 발전해왔죠. 하지만 금융적 팽창이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 설명하려 한다면 노동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출 순 없을 텐데요, 그렇게 되면 가장 최근의 (축적)주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앞서 노동자나 서발턴들의 투쟁들 없이 일어났던 금융 팽창에 대해서도 노동이 금융 팽창의 원인이었던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는 것이죠.



하비  그럼 노동 문제에 관해 계속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1990년에 세계 노동운동의 재형성을 주제로 쓴 “맑스주의의 세기, 미국의 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죠.[7] 거기서 주장하길, <공산주의 선언>에서 맑스가 노동계급에 대해 한 설명은 굉장히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노동의 집합적 힘이 점차 커지는 만큼 비참함도 차츰 더 심해지리라는 점을 동시에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했죠. 전자(노동의 점증하는 집합적 힘)와 후자(비참함의 악화)는 각각 능동적인 산업노동자들과 노동자예비군에 상응할 텐데요. 당신의 지적했듯이, 맑스는 이 두 경향이 동일한 인간 대중으로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당신은 이어서 20세기 초반에 이들 경향이 공간적으로 양극화됐다고 주장했어요. 스칸디나비아와 앵글로권역에서는 첫 번째 경향이 널리 퍼지고 러시아와 좀더 동쪽인 권역에선 두 번째 경향이 광범하게 확산되면서, 노동운동은 개혁주의 진영과 혁명주의 진영으로 균열이 일어났다는 거죠.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같은 중유럽권에서는 고용된 산업노동자와 실업상태인 예비군 간 균형이 여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널을 뛰었기 때문에 개혁과 혁명 중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는 카우츠키 식의 애매함을 불렀고, 이는 결국 파시즘이 승리하는 데 기여하고 말았다고 했고요. 이 글 말미에 당신은 노동운동의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하죠. 서구권에서는 광범한 실업의 귀환이 이뤄지는 가운데 비참함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동구권에서는 노동자들의 집합적 힘이 연대 원리의 부상과 더불어 공간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분할돼 있던 것을 다시 하나로 묶어내면서요. 지금은 그런 전망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아리기  글쎄, 그 에세이에서 가장 중점을 뒀던 건 노동계급이 처한 조건들이 전지구적으로 동조화한다는 관점이 깔린 낙관적 시나리오와 나란히, 주어진 상황을 좀더 비관적으로 숙고하는 일이었죠. 맑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에서 아주 심각한 하자라고 늘상 여겨왔던 걸 지적하면서요. <공산주의 선언>에는 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정말이지 지속불가능한 논리적 비약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자본에게 오늘날 우리가 성차/젠더, 종족성, 국적이라고 부를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죠. 자본에게 오로지 중요한 건 착취의 가능성이며, 따라서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착취당하기 쉬운 신분집단을 자본가들은 인종, 성차, 종족성에 기초한 그 어떤 차별 없이도 고용하게 되리라는 겁니다. 확실히 맞는 말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계급 내의 다양한 신분집단들이 이를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건 아니죠. 사실, 노동자들이 자본가/자본주의자들로부터 특권적 대우를 받고자 스스로 동일화하거나 구축했던 신분적 차이를 그게 뭐든 끌어들이게 되는 건 바로, 프롤레타리아화가 일반적인 게 되고 그들이 자본의 이러한(=무차별한 노동력 투하) 경향에 복속되는 시점이예요. 노동자들은 자본한테서 특권적인 대우를 획득하고자 성차/젠더의 분할선, 국적별/민족적 분할선, 종족성이나 그 외 온갖 것들에 바탕한 분할선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거죠.

 

이렇듯 이윤을 짜낼 수 있는 정도로만 고용될 무차별화한 대중으로 노동을 취급하려는 자본의 경향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노동계급 내적으로 신분적 차이들을 강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리라는 점을 지적했기 때문에, “맑스주의 세기, 미국의 세기”는 겉보기만큼이나 그렇게 낙관적이질 않아요. 그래서 글을 낙관이 깔린 어조로 끝맺음했던 거죠. 노동계급의 조건은 평준화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이 신분집단적인 귀속성이나 바로 그 평준화 경향에 맞선 자폐적 결속의 강화에 근거해 자신을 보호할 거라는 점도 놓쳐선 안 된다고 말예요.


 

하비  달리 말하면, 고용된 노동자 부류와 노동예비군인 부류로의 분화가 다른 한편으로 신분적 분할을 낳고 인종화하는 경향을 띄기도 한다는 뜻인가요?


아리기  그건 상황맥락에 따라 다르죠. 지구적인 수준에서, 달리 말해 노동예비군이 명목상 실업상태라고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 배제된 자들이기도 한 곳에서 그 과정을 보면 고용된 노동자 부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 사이에는 신분적 분할이 명확히 그어져 있어요. 국적/민족성은 노동계급 분파들, 그 중에서도 고용된 산업노동자 부류가 자신들을 지구적 수준의 산업예비군과 차별화하기 위해 줄곧 써왔던 거죠. 일국 수준에서는 이 점이 비교적 덜 뚜렷해요. 미국이나 유럽을 예로 들자면, 고용층과 실업층 간의 신분적 차이는 훨씬 덜 뚜렷하고요. 하지만 상대적으로 훨씬 더 가난한 국가산 노동자들이 (부유한 북반구로) 이민을 오면서, 반이민 정서가 노동계급 내의 신분적 구획화 경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가운데 성장해왔죠. 이렇다 보니 전체적인 구도는 아주 복잡한데요, 특히나 국가간 경계를 가로지르는 이주의 흐름, 그리고 산업예비군이 북반구보다는 외려 남반구에 집중돼 있는 상황을 놓고 봤을 때 그렇습니다.

 


하비  “세계적 규모의 소득불평등과 사회주의의 미래”라는 1991년 논문에서 당신은 20세기에 걸쳐 부의 지역적 위계관계가 그 어느 시기보다도 안정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줬죠. 근대세계 핵심부인 북반구/서구권역과 반주변부 및 주변부인 남반구/동구권역 간 1인당 소득 격차가 발전주의를 반세기 동안 겪고 난 뒤에도 바뀐 것 없이 그대로거나, 더 악화됐을 정도로 말이죠.[8] 당신의 지적대로, 공산주의가 러시아와 동유럽, 중국에서 이 격차를 줄이는 덴 실패했어요. 비록 소득 격차 면에서 라틴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의 자본주의보다 더 나쁠 게 전혀 없고 다른 여러 측면들, 이를테면 해당 사회 내부에서 이뤄진 평등주의적 분배 정도라든가 북반구/서구권에 대해 보인 커다란 독립성을 놓고 봐도 괄목할 만큼 상황이 크게 나았다곤 해도 말이죠.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은 그 당시 당신이 묘파했던 패턴을 뚜렷하게 벗어나왔어요. 이게 당신에겐 놀라운 일이던가요, 아니면 그렇진 않던가요?


아리기  무엇보다 먼저, 중국이 패턴을 깨뜨렸다고 하는 정도를 과장해선 안 됩니다. (지금도 부유한 국가들에 비하면 낮지만) 중국의 1인당 소득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주요한 진전들이라고 할만 한 것조차 제한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중국이 부유한 세계에 비해 자국 위상을 2배로 올렸다고 하지만, 그건 부유한 국가군 1인당 평균소득 대비 2%였던 것이 4%로 올랐다는 뜻일 뿐이예요. 중국이 세계 규모의 국가간 소득 불평등을 줄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건 사실이죠. 중국을 제쳐 놓고 보면, 남반구의 위상은 1980년대 이후로 더 악화돼왔어요. 중국을 포함했을 경우에는 어느 정도 향상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중국의 진전이 유별났기 때문인 거구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의 불평등이 크게 악화돼서, 최근 몇십 년 사이 세계적 규모로 일어난 국가들 내부의 불평등 증대에 기여했지만 말이죠. 두 측정수단, 즉 국가간 불평등도와 국가내 불평등도를 종합하면, 전체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지구적인 불평등을 줄여왔던 셈입니다. 이 점을 과장해선 안 돼요. 세계적인 패턴상으로 엄청난 격차는 여전하고, 줄어들고 있다 해도 격차 자체에 비하면 사소한 방식을 통해서인 거거든요. 그렇지만 이 움직임이 중요한 건, 그런 움직임으로 인해 국가간의 힘관계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움직임이 계속되면, 지구적인 분배상의 변화까지 바라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근대세계)처럼 극히 양극화된 상태에 벗어나 좀더 정상적이고,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 최적에 가까운 그런 상태로 말이죠.

 

이런 상황에 대해 놀라워했냐고요? 상당 정도 그랬죠. 지난 15년 간 제 관심사가 동아시아 연구에 쏠려 있던 것도 사실 그래선데요. 일본을 확실한 예외로 하면, 동아시아는 남반구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안정된 불평등이 특징인 남반구 지역의 일반적 패턴으로는 들어맞지 않는 발전 유형을 가능케 한 독특성이 상당 정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다른 한편으로, 지구적 규모의 (불평등한) 소득 분배 상황이 그렇게 안정적이라는 게 특정 국가나 지역권역이 (근대 자본주의세계 특유의 지리적 위계구조상) 옴짝달싹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분명 저만 해도 그렇고, 아무도 없었죠. 굉장히 안정적인 불평등 구조는 상당수 국가들이 위계구조상의 상승을 겪고 다른 국가들은 하강을 겪는 가운데서도 지속될 수 있거든요. 그리고 이는 지금까지 상당 정도 진행되왔던 일이기도 하죠. 특히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좀더 중요한 발전 양상이 나타났는데요, 동아시아는 매우 역동적으로 상향 이동하는 한편 아프리카는 ‘잉여노동력의 아프리카’로서 특히 남아프리카가 다시금 침체와 하향화를 겪는 분기가 이뤄져왔다는 겁니다. 저로선 이같은 분기가, 다시 말해 남아프리카와 동아시아가 어째서 이토록 상반된 길로 나아갔는지가 아주 흥미롭거든요. 그건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아주 중요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성공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근간은 뭐며, 이런 발전은 얼마 만큼이나 남아프리카에서 그랬던 것과 같은 강탈(즉, 농민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에 기대지 않거나, 아니면 동아시아권에서와 같이 아주 부분적인 프롤레타리아화에 기대서 이뤄지는 건지에 관한 우리의 (잘못된) 이해를 수정할 수 있을 테니까요. 따라서 아프리카와 동아시아 권역에서 일어난 분기는 이론적으로 아주 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자본주의 발전을 노동력의 완전한 프롤레타리아화와 동일시해온 로버트 브레너식 입론에 대한 도전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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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2 04:54 2010/02/22 0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