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ary No. 277, Mar. 15, 2010

 

좌파의 오랜 딜레마: 브라질의 경우

("Ancient Dilemma of the Left: The Case of Brazil")

 

 

 

 

노동자당(PT) 창당 30주년 경축일에, 브라질의 주요 독립좌파 언론 <브라질 드 빠토>에서는 네 명의 주요 좌파 지식인들과 나눈 인터뷰를 실었다. 넷 모두 노동자당 창당 멤버로, 과거에 적극적 활동을 펼친 이들이었다. 이들 중 셋이 노동자당을 나왔다. 브라질공산주의당(PCB) 창당에 참여한 역사가 마우로 아이아씨, 사회주의자유당(PSOL) 당원인 사회학자 프란시스코 드 올리베이라, 독립좌파 역사가 루다 리씨가 그들이다. 네 번째 인터뷰 상대였던 역사가 발터 포너는 노동자당 내 좌익분파의 주요인물로 남아 있다.

 

이들 네 사람은, 리씨가 언급한 바, “어떻게 하면 대중적이면서도 좌파적일 수 있느냐 하는 브라질 좌파의 오랜 딜레마”를 놓고 놀라울 정도로 상이한 분석들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 딜레마는 물론 전세계 좌파에 공통된 것이고,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브라질은 그같은 딜레마를,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분석하기에 흥미로운 장소다. 브라질은 오래 되고 활력에 찬 정치적 전통을 가진 나라로, 오늘날 많은 당들이 경합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근래 들어, 특히 10년 정도 사이에 국내 경제 상황이 크게 나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권역에서 정치적으로 큰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다. 한 정당의 “대중성”과 그 당이 좌파로서 지녀야 할 신뢰성을 우린 각각 어떻게 재어보고 평가해야 할까?

 

<브라질 드 빠토>의 인터뷰어는 말문을 열며 다음의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통칭 “룰라”라고 불리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대통령이 브라질의 재민주화 이후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노동자당이 창당 후 줄곧 브라질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에 위치한 주민들 사이에서 지지를 불려왔다는 점이다. 인터뷰가 역설한 바, 노동자당은 좀더 대중적이 되고자 “실용 노선/실용주의에 양보를 해야 했다”.

 

이같은 전제에 대해, 인터뷰에 응한 네 사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리씨가 판단컨대, “룰라주의”는 노동자당이 창설된 애초 취지를 주변화시키는 가운데, 당보다 더 중요해졌다. 노동자당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미국화”된 셈이었다. 노동자당은 오늘날 그저 선거기계에 불과하다. 좌파는 대중적이게 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는데, 좌파가 이에 관한 “이론화의 뿌리를 유럽에다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대중(혹은 민중) 문화는 “복합적이고 보수적”인 것으로, 룰라는 이같은 문화를 매개로 말걸기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당은 국가주의적이고 발전주의적이며, 따라서 보수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문제는 노동자당이 애초에 내건 바,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않는, 민주적 좌파의 이상향”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아이아씨가 보기에, 노동자당은 브라질의 두 주요 정당 중 하나, 즉 “쁘띠 부르주아” 프로그램을 가진 중도좌파 정당이 됐다. 지지 규모(가 커진) 대신 노동자당이 치렀던 댓가란, “애초에 세웠던 원리와 정치적 목표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룰라주의” 또는 “포퓰리즘/대중추수주의”는 다수대중을, 자신들의 이해와는 무관한 정책들에 동의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양식이다.

 

올리베이라한테, 노농자들과 해방신학, 민주화운동들에 기반을 두고 출범했던 노동자당은 그저 브라질 정당체계에서 “일반적으로 뿌려놓는 마말레이드(달달한 맛을 내는 양념)”의 일부가 됐다. 사회주의적인 전망은 “가난한 이들”에 기반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열악한 처지를 드러내주는) 계급 분석에 기반하는 것이다. 노동자당의 국민통합(estatizaçao) 프로그램으로 말하자면, 이는 한 1백년은 시효가 지난 것으로, “국가주의라는 유아적 증상”의 일부다. 그것은 브라질소재 산업들을 강화하려는 프로그램이며, 좌파(적 가치)나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포너는 같은 상황을 아주 다르게 본다. 그는 룰라 정부가 처음에 사회적 자유주의 노선을 지향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2005년 이후, 집권당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다, 그가 말하길, 노동자당은 발전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전주의도 두 가지 변주된 형태가 있으니, 보수적 노선과 대중적 민주 노선이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사회주의가 논쟁(의 대상)으로 되돌아왔다.”

 

이들 네 사람 중 셋이 밝힌 분석에서 놀라운 것은 “포퓰리즘”에 대한 두려움이다. 또 하나 놀라운 건, 네 사람 모두 (브라질의) 지정학에 관해선 일절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질 드 파토>에서 인터뷰기사를 실은 지 며칠 후, 피델 카스트로가 (중도좌파 성향의 멕시코 일간지) <라 조르나다>에 정기적으로 기고했던 글 “성찰” 중 일부를 책으로 묶어 펴냈다. 룰라는 마침 카스트로와 함께 멕시코에 체류중이었다. 카스트로는 룰라를 30년 동안, 그러니까 노동자당 창당 이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쿠바가 겪어온 역사와 어려움을 감안할 때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최근 칸쿤에서 열린 회의에서 쿠바를 포함하고 미국·캐나다는 배제한 라틴아메리카-캐러비안 권역 공동체 창설에 합의한 일이라고 했다. 이 회의(의 성과)는 대부분 룰라가 일궈낸 것이었다.

 

카스트로는 이어서 룰라가 대통령직 퇴임을 앞두고 그의 책 출간을 축하하러 멕시코에 들른 일이 지닌 “중요성과 상징적 효과”에 무게를 실었다. 카스트로는 1980년대 “소박하게 살고 있던 룰라와 그의 아내, 아이들과 만났을 때의 감동”을 회고했고 “나무랄 데 없는 겸허함으로 벌여온 투쟁 속에서 그가 보인 낙천성”을 높이 샀다. 여기선 룰라주의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찾아볼 수 없다.

 

브라질의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던 모든 것을, 카스트로는 칭찬했다. 브라질의 기술적 발전이라든가, GDP의 성장, 세계 10대 경제권 중 하나가 된 데 대해서 말이다. 심지어 그 자신은 반대 입장을 밝혔던 (옥수수)에탄올 생산 문제에 대해서조차, 그는 룰라를 욕하지 않았다. “미합중국 및 유럽의 부정의한 경쟁과 보조금지원에 직면한 가운데, 브라질에겐 에탄올 생산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을 난 충분히 이해한다.”

 

카스트로는 이렇게 이야기를 끝맺는다. “이거 하나만큼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금속 노동자가 온 국가를 망라한 회의에서 존중받는 목소리를 내는 두드러지고 뛰어난 정치가로 스스로 탈바꿈했다는 사실 말이다.”

 

어떻게, 브라질 좌파 지식인들과 카스트로가 이끌어낸 룰라에 관한 그림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그들이 전혀 다른 것들을 보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브라질의 좌파 지식인들은 주로 브라질 내부의 삶에 주목하고 있고, 룰라가 잘 해봐야 중도좌파 실용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 카스트로는 주로 브라질과 룰라의 지정학적 역할에 주목하고 있는데, 그같은 위상은 그가 보기에 주적인 미합중국 제국주의를 부식시키는 변수 중 하나다.

 

좌파 정치인들은 그러면 어느 쪽에 우선순위를 둬야 할까? 이게 그저 브라질만의 문제인 건 아니다. (역사적 자본주의 문명=근대 세계체제의) 거의 모든 곳에서 마주해야 할 질문이다. 물론, 해당 국가의 역사와 지정학적 위상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본문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3/21 23:45 2010/03/21 23:45

 

프레시안에서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한 의견을 받는대서

예전에 '삼성 X파일' 터졌을 때 쓴 메모격으로 썼던 글 좀 불려서 투고해 봤는데..

아무래도 채택은 안 될 모양이다.ㅋ;;

 

***

 

녹슬어버린 '상식'의 감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

 

 

 

 

 

0.

 

 

 

2월 초쯤 지인한테서 『삼성을 생각한다』를 생일선물로 받았다. 선물로 뭐 받고 싶냐길래, 그 책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 책 내용쯤 되면 웬만큼 각을 세워도 되겠건만, 소위 진보 매체라는 데마저 삼성그룹한테 알아서 기고 있더라는 정황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것도, 삼성그룹 측의 압력이나 사주 따위와는 일절 무관하게 말이다. 마침, 나 같은 대한민국 원주민들한테다 “정신 좀 차려야 한다”며 정작 그 뜻은 알아서 파악하라는, 정신 나간 이건희씨 발 대국민 연두교시 소식이 미국 라스베이거스로부터 들리던 무렵이기도 했다.

 

이때만 해도 책 내용이 궁금해 죽겠던 건 아녔다. 이런 이건희씨를 한국판 위대하신 수령으로 불철주야 보위하는 글로벌대기업집단 삼성의 조직운용 방식이 사실상 실성 수준이더라는 얘기야, 2005년 ‘삼성 X파일’ 공개 이후 애써 모른 체 했을 뿐 이미 공공연해졌던 거 아녔나 싶어서다. 적어도 이 책의 세세한 내용만큼은 굳이 ‘안 봐도 X파일’이었던 셈.

 

해서, 웬만하면 그냥 있으려구 했다. 굳이 안 그래도 다른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사태의 본질’을 짚어주실까, 싶었다. 뭣보다, 밥벌이와 관련한 생계 압력이 만만치 않은 탓도 컸지만(뷁!). 그러다, 밥벌이 할 땐 하더라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으니. 어쩌다? 고 노무현씨의 웹사이트 ‘민주주의2.0’ 전 개발팀원 권순욱씨가, 황광우씨의 앞선 글에 대해 썼다는 반박글을 <프레시안>에서 보고 나서였다. 권씨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뭐였든, 권씨처럼 소위 ‘노통’의 정치적 아바타를 자처하는 이들이 막상 그의 죽음을 성찰할 수나 있을까 싶은 의문에 새삼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권씨는 사실에 바탕한 진실이, 마치 수백 년 묵은 산삼 캐듯, ‘심봤다!’ 한 번이면 더는 돌아볼 것도 없는 줄 아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사실’은,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진실에 가깝다. 기억의 (재)구성 방식을 둘러싼 해석의 전투가 부단히 벌어지는 싸움터라고 말이다. 이 글은 ‘노통’의 죽음이, 아니, 지난 민주정부 10년의 궤적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돼야 할지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자 제언이다.

<프레시안>

 

 

1.

 

본론에 앞서, 이 책 주변에 잔뜩 껴 있는 ‘악성먼지’들부터 일단 털고 가자. 제 한 몸 홀대해 가며 이 나라의 앞날부터 챙기시는 온갖 애국지사들의 아우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김용철씨는 삼성은 물론이고 삼성이란 원님 덕에 나팔 불게 된 우리 대한민국까지 말아먹을 희대의 ‘배신자’다. 확실히, 피 토하듯 김용철씨를 겨냥하는 이들의 ‘혈변’에도 미덕은 있다. 그놈의 ‘애국’에 제대로 꽂혔다간 자기학대와 자기환대를 끊임없이 혼동하는 정치적 좀비 상태는 그야말로 처치곤란이겠다는, 무척 소중한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자칭 진짜국민들에게, 그 조국이 막상 한 번도 실재한 적 없는 ‘상상된 기억’이나 마찬가지라는 건 핵심이 아니다. 설사 실재하는 조국은 자기를 한때 쓰다 버릴 소모품 취급이나 했지 딱히 해준 게 없으며, 그 조국이 존속하는 한 필시 계속 그럴 거라 해도 말이다.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런 조국 따위 굳이 없어도 그만인 자신에 대해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신적 헐벗음, 또는 누가 됐든 그런 상상마저 죄악이라 간주하는 감각의 도착이다.

 

바로 그래서다. 당장 이들한테 필요한 건 논쟁이 아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조국근대화 와중에 소외돼버린 자신의 삶을 되살리면서, 자기긍정의 근거를 새로 북돋워낼 ‘돌봄의 관계’다. 조국? 그나마 괜찮았던 크고 작은 돌봄의 관계망마저 허물어뜨리거나 과시용 껍데기(즉, ‘상품화된 서비스’)로 재편하기 바쁜 대한민국 정부 말인가? 차라리 그루터기에서 모듬횟거리를 찾아보는 쪽이 훨씬 더 빠르겠다. 도무지 믿을 데라곤 그런 대한민국밖에 없는 양, 대한민국 정부 비판을 곧바로 자기 부정과 동일시해야 하는 ‘애국지사’ 양반들. 시비를 따지기에 앞서, 그 양반들이 참 처연해 보이는 이유다. 논란을 무릅쓰고 주장하자면, 이 양반들이 고 김대중씨 묘역에다 ‘개념 없이’ 불을 지르고, 삼성이씨 문중에서 각종 장학금이다 미술관이다 해가며 대한민국 주민들한테다 가끔씩, 그것도 마지못해 병 주고 약 주듯, 그마저 결국 길들이기 용도로 철저히 경로관리해 가며 흩뿌리곤 했던 떡값 부스러기들을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의 근거로 부풀려가며 반색하는 것도, 그나마 나오는 것 없는 조국의 젖꼭지마저 행여 떼일까 겁에 질린 ‘아이같음’의 발로 아니겠냐는 거다. 그네들의 공격성은,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긴 커녕 어떻든 감추도록 훈육돼온 대한민국 국민이자 우리 ‘어버이’들의 초라한 풍경과 맞물려 있다.

 

그래서 단언컨대, 김용철이 삼성과 대한민국을 배신한 건지, 아니면 삼성그룹 같은 대기업집단과 대한민국 정부야말로 그간 ‘세계화’란 매혹의 댄스스텝으로 대한민국 주민들을 참혹한 배신의 골로 체계적으로 내몬 건지는 거짓 쟁점이다. 이 참에 명확히 하자. 김용철씨마저 배신한 건 도리어, 새끈해 보이는 대외 이미지를 미끼로 김씨한테 온갖 ‘더러운 비밀’을 관리케 했던 삼성그룹 측이다. 물론 『나쁜 기업』 같은 책에서 소개됐다시피, 이런 더러운 비밀들은 주류 대중매체 지면에서 걸러졌다 뿐이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동유럽 등지를 넘나들며 여느 기업들 못잖게 실로 글로벌한 스케일로 관리돼왔지만 말이다. 이걸 왜 쟁점이네 논란이랍시고 쓸데없이 진을 빼야 할까?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가?

 

김씨만이 아니라 사실 다수 주민들한테는 이미 일상이 돼버렸던 절망과, 삼성이씨 문중과 같은 특권화된 소수가 그 귀족적 특권을 유지하려 곧잘 부추기는 선망이란, 이렇듯 단지 가깝고 먼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그룹처럼, 세계화를 신판 ‘문명화 사명’처럼 여기며 지구적 규모의 자본축적 경쟁을 벌여온 모든 글로벌기업조직 관행 속에서 그 둘은 마치, 동전의 표리와도 같이 나란히 가고 있었던 셈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외려 진짜로 씨름해야 할 쟁점은 두 가지겠다. 1) “옛날 같으면 혼내야 할 사람을 상사라고” 모시느라 김씨를 시름시름 앓게 해, 기어이 '고발자'로 만든 대기업집단 엘리트임직원들의 감각적 도착은 대체 왜, 누구 좋자고 지속가능하려 드는 건지, 2) 이런 절망적 감각을 선망으로 포장해 일상화·제도화하는 사회적 조직관행과는 그럼 어떻게 싸워가야 할지다. 이들 쟁점을 다루면서, 기존의 큰 틀은 유지하되 ‘부수적 손실’만 엄정조치하겠다는 접근으로 실질적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해법에 덧씌운 그 어떤 희망의 웅변도 현상유지를 희망하는 궤변에 그칠 수밖에 없다. 본의야 뭐가 됐든 말이다.

 

 

2.

 

2005년 여름 무렵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졌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삼성을 생각한다』를 놓고서 보이는 ‘두드러진’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한편에선 똥을 된장이라 우기길 주저치 않는 분들이 아우성인데, 그런 이들과의 논쟁이 애초 거짓 논쟁이자 실속 없는 드잡이질이겠다는 건 이미 앞서 밝힌 대로다.

 

오히려 문제는, 스스로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따라서 자신을 대체로 진보적 중도 내지 중도적 진보라 여기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김영삼식 세계화 노선의 김대중식 개정판이라 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 노선을 일종의 ‘시대적 대세’로 간주하는 사람들이겠다. 참여정부 시기의 ‘동북아물류-금융허브국가’론 같은 경우, (경우에 따라선 FTA시리즈까지) 국민의 정부 노선의 확장증보판으로 여기는 사람들이기도 할 게다. 김용철씨의 증언에 대한 이들의 반응? 한마디로 대략난감이지 싶다. 미우나 고우나 한국의 자랑이자 한국산 글로벌기업의 대표주자인 줄만 알았던 삼성그룹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도덕적 해이’에 빠졌냐며 탄식한다고 할까. 걔중엔 삼성의 글로벌화 전략 자체는 옳았는데, 어디까지나 심각한 ‘부수적 하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려는 이들도 상당수다.

 

그러나 어느 쪽 반응이 됐든, 우리 눈 앞에 그 몰골을 버젓이 드러낸 이 대략난감한 사태를 좀체 납득하기 어려워한다는 점에선 사실상 차이가 없지 싶다. 똑같다는 게 아니다. 한쪽이 독백성 악다구니에 기댄다면, 다른 한쪽은 짐짓 상식과 합리성에 기대려 한다는 차이야 누가 봐도 명백하다. 외려 문제는, 이들이 기댄 상식과 합리성으로 사태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안타깝게도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지금 진행중인 사태를 납득하기 힘든 건, ‘합리적인 상식’의 결여가 아니라 과잉 탓이겠다는 거다. 상당 부분 국민/초등학교 시절부터 공식 제도교육 내지 ‘사회화’ 과정을 통해 꾸준히 익혔고, 그 와중에 알게 모르게 내면화한 바로 그 ‘건전한’ 상식들 말이다. 건전가요의 건전성은 맘껏 비웃어도 저 건전한 상식들의 건전성만큼은 하여간 그래선 안 된다는, 실로 의아한 차별이 버젓이 자행돼왔던 셈이기도 하다.

 

이 상식들을 관통하는 상황인식법은 기본적으로 이렇다. 예컨대 근대적인 성장과 분배란, 이를테면 자유와 평등이 그렇듯, 전자를 살려 ‘자연히’ 후자까지 살아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반민주-독재든 민주-반독재든, 이같은 상황인식법은 섣불리 건드려선 안 될 정언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외견상으론 사뭇 용쟁호투를 방불케 했던 ‘민주화’ 투쟁도, 이처럼 교조화된 상식의 유구함에 초점을 맞춰 보면 고작해야 엎어치냐 메치냐 식 차이만 드러냈을 뿐이다.

 

내 생각에, 김대중 정부가 국정노선으로 천명했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발전 노선은, 우리가 아는 의구하고도 익숙한 상식들로 정제해낸 사회경제적 비전의 최대치였다. 물론 이런 비전 자체야, 이 곳의 현실을 다르게 재편·조직하려는 여러 실천 노선들 중 무척이나 ‘헐렁한’ 쪽이었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는지야 주지의 사실일 게다. 이런 논리회로만 일단 벗어나도 당장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빨갱이 세력으로 치도곤당하기 일쑤였으니까. 때론 ‘녹화’ 대상으로 취급받거나 때론 ‘합법적으로’ 이 세상에서 제거당하거나. 그걸로도 모자라, 문화적으론 ‘과격’하고 ‘편협’하며 ‘시대착오적’이라느니,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적 몽상에 빠졌다느니 하는 냉소와 비아냥에도 시달려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럼,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며 이런 비아냥을 불식시킬 활동과 실천의 입지는 과연 넓어졌을까? 별로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혹자는 빨갱이들이 그나마 설칠 수 있었던 것도 다 민주정부 덕분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대로 하면 되고 싶다 해도, 착각하진 말자. 그게 민주정부 덕분인가? 병영형 독재체제에 맞써 싸운 대한민국 주민들이 일정하게 이뤄낸 ‘민주화 효과’ 덕분이지. 단적으로, 이들 민주정부 집권시기 동안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한다는 민주주의 원칙에 최대한 충실하려다 되려 ‘법치의 폭력’을 겪어야 했던 대한민국 주민들, 다시 말해 구속노동자수만 살펴봐도, 그런 주장이 먹힐 구석은 거의 없다. 일례로, 2007년 고용불안정을 가중시킨 이랜드그룹의 경영전략에 맞서 점거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의 구속 사태와 함께, 집권 후반기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슬로건이 등장한 건 과연 우연이었을까? 외려 국정기조 면에서 국민의 정부와 대동소이했던 참여정부의 이런저런 비전이야말로, 굉장히 편협했던 것으로서, 사실상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였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사람사는 세상’을 꿈꿨다는 그 노무현이, 삼성연 같은 대기업부설 연구기관의 발전기조를 주도하진 않아도 선선히 따랐다는 것만도 벌써 치명적 자충수였던 마당에, 캐나다·멕시코에선 이미 ‘사람잡는 세상’을 열었다고 평가받던 FTA시리즈에 급 올인해버린 건 가히 막장드라마급 악수였다 할 만하다. 게다가 그런 FTA는 안 된다던 시위대를 향해 그는, 그 정도면 미국 측을 충분히 압박했을 테니 이젠 그만 하라고까지 했다. 이게 다, ‘미국은 한국의 미래다’라고 착각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한덕수 전 국무총리 같은 글로벌엘리트들한테 에워싸인 탓이었을까? 당사자야 그저 ‘죽음’으로써 답할 뿐이라 해도, 이에 대한 변변한 성찰 하나 없이 그의 죽음을 기억하잡시고 ‘권토중래’하겠다는 분들이 요즘 곧잘 눈에 띄더라. 이 분들을 볼 때면, 그네들처럼 조국을 도무지 사랑하지 않는데도 자꾸 노여움과 슬픔이 인다. 이미 죽은 그를 되살리진 못할 망정 두 번 죽일 셈인가 싶어서다.

 

돌이켜 보건대, 고 노무현씨가 대통령 재임 당시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제안한 것도 사실 ‘돌발사고’가 아니라, 소위 ‘중도적 국민통합’을 꿈꾸는 사고회로 안에선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 아니었을까? 이는 조·중·동처럼 지배적 자본의 기관지이자 그 일부이기도 한 주류 언론들의 ‘빨갱이’ 타령에 대해 이들 민주정부의 주요인사들이 왜 발끈했는가만 살펴봐도 감지할 수 있다. 빨갱이에 대한 악의적 오해와 편견을 조장해서였을까? 가만히 보면, 일견 심하게 물고 뜯는 듯한 와중에도, 빨갱이가 되는 건 ‘일단 나쁜 것’이라는 데 대해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빨갱이가 된다는 건 대체로, 삼성 같은 대기업들과 대한민국 행정조직이 지구적 자본축적을 둘러싼 경쟁 압력을 이유로 서로 번갈아가며 이곳 주민들의 삶을 속절없이 교란하는 데 대한 응당한 자기방어적 움직임이었는데도? 그렇다면 빨갱이 되기란 되려 ‘일단 좋은 것’으로, 널리 권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합리적 해법’과 ‘상식’들은, 이런 가치판단을 선뜻, 나아가 적극적으로 내리는 데 과연 얼마나 보탬이 될까. 글쎄, 아무래도 회의적이다. 지구적·국내적으로 갈수록 또렷해지는 양극화와 가공할 궁핍화 상황에 대한 자족적 알리바이로나 쓸모가 있으면 또 모르겠다.

 

 

3.

 

비교체험 극과극 따위는 명함도 못 내밀 만큼 판이해 보이는 삼성그룹의 샤방한 허우대와 썩어가는 속살은 난해한 수수께끼 같다. 익숙한 상식들의 매트릭스에 우리 스스로 갇혀 사는 한에서는, 확실히 그렇다. 이 ‘풀리지 않는 신비’가 그저 괴롭고 골치 아픈 이들로선, 절망은 솎아내고 선망은 따로 살리자는 ‘어설픈 절충’의 유혹에 충분히 끌릴 만도 하다. 그런 만큼 당연히, 사실인 양 실제론 의심이 금지된 당위로서 행세해온 기존 상식들을 그저 부정하는 걸로는 불충분하다. 핵심은 결국, 나를 포함한 대다수 대한민국 주민들한테 진정으로 필요한 ‘갱신된 상식(내지 이론)’은 무엇이며, 이런 새로운 앎들이 통하는 문화적 토대와 입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에 있다.

 

매혹의 삼성그룹 같은 지배적 자본의 체계화·제도화된 독재와 쥐어짜기가 심지어 ‘자발적 동의’ 아래 공공연해지는 엄혹한 상황 자체는 그래서 딱히 난해할 게 없다. 현실에 대한 무지를 조장하는 상식들로 흐려진 우리의 시야를 청명하게 확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런 시야로 보면, 한국에서 자랑찬 글로벌기업 반열에 올랐다고 각광받는 삼성의 오늘은 ‘어떻게 이 지경이었는데도’가 아니라 ‘바로 그 지경이었던 덕에’ 가능했던 게 된다.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주욱 그렇게 될 테고. 이같은 양상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영미권에서 부상한 (지금은 사실상 난파 상태인) 세계화 노선이, 한국산 대기업 및 주민들의 대내외적 경쟁 압력을 1990년대 후반 이후 한층 더 치솟게 했다는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1980년대 후반부터 소득분배상의 쏠림 현상을 살짝이나마 반전시킨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 추세를 무력화하려 했던 지배적 자본가그룹의 반격 움직임과도 맞물려 있지만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삼성그룹의 빛나는 오늘은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보여준 바, ‘그 지경이었기에’ 가능했다. 빈정거리는 게 절대 아니다. 외려, 지구적 구도에서 이뤄져온 역사적 자본축적의 정치경제를 그야말로 ‘리얼하게’ 바라보자는 얘기다. 다시 말해, 한국 같은 반주변부 준독점 기업법인들의 휘황함은 중심부 독점자본과의 글로벌한 경쟁 압력 속에서 내적으론 그만큼 과두제스러운 추잡함으로 뒤엉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글로벌경쟁 구도 속에서 이뤄지는 축적 압력이 중심부 자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만큼, 삼성그룹 같은 (반)주변부 자본권력은 합법-탈법을 넘나드는 각종 국가장치와의 사회적 커넥션들을 통해 이런 압력을 ‘합리적으로’ 낮춰왔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한국 기업의 ‘더러움’과 구미권 기업의 ‘깨끗함’을 대비해가며, 구미권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충실히 따르라고 했던 통상의 접근법도 이젠 강하게 의문에 부쳐야 할 때라는 얘기기도 하다.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지만, 삼성그룹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여온 커넥션의 스케일과 추잡함의 농도로 봤을 때, 대한민국 대기업집단의 패악질을 ‘정상적인 시장경제’의 부재나 결핍 탓으로 돌렸던 신고전파-자유주의 경제학적 인식도 (그 제도적 기반의 탄탄함과는 별개로) 거의 파산에 가까우리만치 운신의 폭이 좁아질 듯싶다. 신고전파 계열 경제학회의 진성회원들 사이에서나, 아니면 경제학원론 시간에 좋든 싫든 이수해야 하는 전공필수용 지식으로나 그나마 먹힐까.

 

물론 보다 적극적으로는 이런 전반적 상황을 진정 ‘좌파적인 시각’에서 재인식케 해줄 지적 작업이 본격화해야겠다. 퉁쳐 말해, 삼성그룹 같은 반주변부 지역 기업법인들의 흉악한 축적 양상은, 중심부 독점자본과의 지구적 경쟁 관계 속에서 국가기구가 적극 개입·지원하는 가운데 ‘정상적’이거나 적어도 불가피한 것으로 장려받았고, 심지어 적법하게 제도화돼왔음을 놓쳐선 안 되겠다고 할까.

 

사실, 이번 2008년 금융위기 사태로 까발려졌다시피, 구미권 (금융)기업법인들이라고 삼성그룹보다 더 낫느냐 하면 딱히 갈라칠 만큼 그렇다고 하기가 영 껄끄럽긴 하다. 나오미 클라인과 그렉 팔라스트가 각각『노 로고』와『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민주주의』에서 집요하게 밝혔듯, 구미권산 기업들의 자기이미지 관리가 수월한 건 내적 통합을 위해 자본축적 본연의 게걸스러움을 국외로 전이할 수단과 관리역량이 더 크기 때문이지, 삼성보다 더 ‘클린’해서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이 유발하는 갈등과 모순을 국외로 전이할 식민주의적 ‘외부’(20세기 중반 경까지는 구미권 국가와 일본의 근대식민지였고, 그 이후엔 따라잡기식 근대화 노선을 좇았던 탈식민지 주권국가들)가 거의 없다시피한 한국산 기업법인들로선, 그 때문에 ‘내부 식민주의’가 훨씬 더 도드라진 양상을 띄기도 했던 셈이다. 이 와중에 불거졌던 각종 대형부패와 비리도 한국식 축적 메커니즘의 ‘합리적 선택지’로서 봐야잖나 싶고. 유독 부자들만, 그리고 서울 언저리만 살기 좋은 나라라는 대한민국의 평판이 어떻게 형성·유지되고 있는지에 관한 이해의 실마리도 아마 여기서 찾아볼 수 있겠다.

 

 

4.

 

그렇다면 필요한 건 무엇일까? 물론, 이런 숭악한 축적을 장려하고 정상화하는 경제를 살리는 게 아니라 차차, 그러나 단호히 죽여가는 일일 것이다. 

이러자면, 사방이 늑대라 어려워죽겠다는 지루한 겁주기에, 갈 길도 노상 아직 멀었다고만 하지 언제면 가까워질는지, 종착지 같은 게 과연 있는 길인지마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양치기 경제를 폐지할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사회전환’ 구상이 필요하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 위주의 익숙하고도 ‘어설픈 절충’이 아니라, 평범한 대한민국 주민들의 중지衆智를 꾸준히 모아감으로써 말이다. 더 중요한 건, 이 과정이 실질적 변화에 불가결한 응집력 있는 집단적 주체형성의 정치로 조직·확장되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반공-자유주의-근대화 세력들이야 흔히들 지정학적 조건상 우리가 자본주의 안 했으면 어쨌을 거냐고들 한다. 하지만 휘황함과 숭악함의 공존이 예외가 아니라 정상인, 삼성그룹을 위시한 한국산 대기업집단의 본질적 속성을 고려한다면, 똑같은 이유로 이렇게 결론내릴 수도 있다. 바로 그 한반도 인근 지역 주민들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상, 근대자본주의라는 제도는 결코 이 곳에서 지속돼야 할 경제원리이자 사회조직의 근간일 수가 없겠다고 말이다.

 

물론, 이 점을 유념한 합리적 사회전환이라는 게 ‘한 방’에 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리 되는 게 바람직한 것도 아님은 두 말하면 잔소리겠다. 달랑 5년이니, 10년이니 하는 정도의 ‘짧은’ 호흡으로는 누가 봐도 어림없는 일이다. 일단 가랑비에 옷 적시듯, 합리적 사회전환에 대한 공감대를 대중적으로 전염시킬 매력적인 ‘다른 사회(내지 정치공동체)’의 밑그림(들)을 잡아가는 일이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삼성그룹과 이건희를 분리해서 보자는 이들이 김용철씨부터 해서 꽤 적지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지배적 자본의 소유로 돼 있는 유무형의 자산과 성원들이 지닌 능력들은 합리적 사회전환 여하에 따라 그 성격이 무척 판이해질지도 모른다. 작금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야 이윤을 쥐어짜내는 데 적합한 거대 권력기계의 부속품이겠지만, 동일한 자산과 능력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배치·재조직하느냐에 따라 그렇게 창출된 사회적 제도는 절망을 양산하는 특권화된 선망 따위에 휘둘리지 않을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있다. 거창한 얘기까진 아니어도 최소한, 태안 기름유출 사태 여파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주민들이나 용산 남일당에서 불에 타 숨진 6명의 세입자들, 사실상 반도체 공정상의 산업재해로 사망한 황유미씨 같은 삼성노동자들, 얼마 전 자살한 삼성전자 부사장의 경우에서와 같은 황망한 죽음들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안 그래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초래한 생태적 재앙으로다 역사적 체제의 수명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에, 이같은 전환 움직임의 필요성만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게 없다고 본다. ‘오바’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째 갈수록 예전보다 더 후줄근해지는 듯한 현존 체제에서 애꿎게 삥만 뜯기고 결국엔 팽당할 게 아니라, 최대한 과감하면서도 안전하게 빠져나올 방략은 뭘지, 지금부터라도 중지를 안 모으면 이미 늦겠다는 얘기기도 하고.

 

왕 노릇은 결국 한 사람이 하는 건데도 모두가 그런 왕 놀음을 선망하며 서로가 외톨이가 돼야 하고, 급기야 서로에게 지옥이 되고 마는 이상한 시장, 이상한 경제의 룰. 이런 룰이 만들어내는 살풍경을 대체 언제까지, (국민경제의) 발전과 번영, 자산증식이란 이름 아래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수수방관해야 할까. 식민주의-반공-근대화 세력이 주춧돌을 놓고, ‘민주화세력’이라 스스로 불렀던 부류들의 알량한 허영으로 한층 더 강화돼버린 현대판 벌거벗은 임금님 놀음에, 이제는 좀 그만 놀아나야 하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3/18 14:47 2010/03/18 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