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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살아가겠다> 발췌독.

나는 '철학'을 묻는 질문을 접할 때마다 그것을 '철학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곤 한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이다. (15)


우리는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사는 데 서툴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 딴에는 잘 살아보겠다고 한 일이 삶을 망치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삶을 망치는' 현실 사이의 간극ㅇ서, 철학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특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기술, 서로의 경험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17)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는 법을 아는 자'이고, 사는 법에 맞지 않을 때 법을 고치라고 용기내서 말하며, 기꺼이 감옥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21)


어떻든 '철학하는 왕'의 현실적 실패 이후 플라톤이 동시대인과 미래의 학생들을 위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기가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 책을 쓰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두었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28-9)


디오게네스의 철학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연대는 이런 이해관계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사회계약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나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가 타인들로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언젠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전태일이 신문팔이, 여공 철거민들과 연대하기 이전에, 그런 존재들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그의 존재 안에서 그들이 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유서에서 우리에게 동일한 존재가 되어주기를 요청했다. '나를 아는 모든 나'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부친 그의 유서는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한다. 그를 이루는 어던 부분이 우리 안에 그렇게 자리함으로써,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안에 그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와 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우리 안에 품는 것이다.(37)

 

디오게네스에게 있어서 '길'의 두가지 의미. (38-41)
1) '모든 것을 모두에게 내보이는' 공적인 장소. (칸트적 의미에서 '계몽'을 실천하는 공간)
2) 길은 법으로는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도록 하는 공간

 

대학인의 고백과 약속 professor의 진정한 의미 (55-57)

 

생각해보면 '앎을 매개로 한 삶의 공동체'였던 '우니베르시타스'역시 가르친 것은 '진리'(어떤 불변의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이 키워낸 것은 진리의 생산 조건으로서의 능력과 용기였을 것이다. 대학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질문들을, 어떤 선험적 권위나 제약을 진정하지 앟는, 무조건성 속에서 던질 용기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앎이 구원해야 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 삶의 혁신을 위한 대담한 실험의 장. 그 배움의 공동체가 '우리베르시타스', 즉 대학이라는 이름의 합당한 상속자일 것이다. (65)


"포기에 맞서야 한다" - 랑시에르 말 인용.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 (79)

 

<교육 이전의 교육, 운동 이전의 운동> = 감히 알려고 하라 (칸트의 계몽)  지식이 아니라 욕망이 생기게 하라 ("밤에 열린 어느 장애인 학교")


우리에게 지금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대안이 없으며 낭예 말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계속해서 늦추는 것. 바로 이것들이 체제의 근간, 이 시대의 비전, 이 시대의 지배 정신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타파하련느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대안 없이 두물머리를 지키고 있는 농부들, 대안이 없어 무작정 대한문을 차지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 (131-2)

 

단기투쟁은 '투쟁'이 곧발 '일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장기 투쟁의 경우에는 '일상의 삶'과 '투쟁'이 구별되지 않는다. 즉, 살아가는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고, 싸우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그 '장기'라는 말과 달리, 시간의 길이를 넘어선 문제, 즉 운동이 어떻게 시간적 '무한정성'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느낀다. 우리는 그런 운동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147)
우리는 '살아가는 일'과 '착취당하는 일'이 수렴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사회이기에 '살아가기'와 '투쟁하기' 또한 수렴해가는지도 모르겠다. (149)

<생정치 시대, 지킴이의 개입과 실천> (152~ )

 

<밀양식 보수주의>
밀야의 노인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그 '보상 불가능한 것'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나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한 할머니의 말에서 그것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 이것들 다 베어내고 나면 너희는 어디 기대고 살래?" (173)

 

<죽은자와의 약속>
"우리 시어른이 돌아가실 때 내게 그랬어. 고향을 지켜줄 거냐고. 그 양반이 돌아가실 때 시누이가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언니 찾아요.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럴까 하고 갔는데 나한테 그러는 거야. 모두들 ...고향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 떠날 궁리만 하고. 가만 보니 니가 고향을 지켜줘야겠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고향 지키는 기 뭐 어렵습니꺼. 이것저것 심고 무덤에 풀이나 베어주고 하면 되지. 그러다 자식들한테 물려주면 되고.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키겠심니더' 그랬지. 지금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내가 왜 그때 그리 쉽게 답해버렸을까, 왜 그렇게 말해버렸을까 후회도 되고.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아버님, 너무 힘듭니더' 그리고 나서 한참 울었어. 내가 일흔에만 죽었어도 자식들한테 소임 넘겼으니 제 세상 아버님한테 편히 갔을 텐데. 인제는 별수가 없다. 나는 철탑이 세워지든 안 세워지든 싸우다가 그 아래 묻여야 해. 그래야 그 어른한테 할 말이 있지. 나는 하는 데까지 했다고 말야. 난 어디 안 가. 저기 묻혀야 해." (177)

 


나는 김주영 씨가 걸어온 저 삶의 모든 시도에서 그녀의 용익와 자유를 본다. 우리 사회가 부여한 '자애인'의 자리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안지 않았다. '장애인'이라는 자리는 그녀가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물었던 장소이고, 삶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을 쉬지 않고 증명해왔더 장소였을 뿐이다. 그녀는 장애인을 장애인 안에 가두는 문턱들 중 가장 악랄한 감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역사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은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협박 아래서, 그 두려움 아래서 노예적 삶을 강요받아왔다.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호나이 계속됩니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김주영) (198-9)

 


(최정은) 병에 대해서 이수영 선생이 책에 쓴 부분, 특히 거기를 다룰 때 반응이 컸죠. 많이 아파 본 사람은 그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아도 심오해질 수 있다는 구절, 나만 제일 아프고 제일 불행했다고 아픈 것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아픔이 그냥 아픈게 아니고 더 깊어지는 거고.... 아픔이란 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올 거라는 것. 하지만 과거에 자기가 아팠던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들이 해준 것은 그냥 희망이엇죠.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식이었어요. (248)

 

(최정은) 그동안 우리가 쉼터에서 해왔떤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정리를 해보았죠. 그래서 '가족주의', 가족로망스, 게토, 연민.... 그런 것들을 발견한 거에요. '쉼터체제'라고 할까요? 그냥 연민의 주사만 놓는 거죠. 여기는 위안받아야 하고 쉬어야 하고 그런....
(이수영) 사실 제가 본 바로는, 쉼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한쪽에는 아예 눌러앉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뭔가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쉼터에서 뭘 해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눌러앉는 것에 의해서도, 옮기는 것에 의해서도, 쉼터는 모두 무력화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쉼터는 어느 쪽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죠. 여기 있는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봉사,  헌신, 인내밖에 없어요.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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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발췌독

다석은 죽음을 찬란한 육리라고 했지만, 감각적 물질문명에 깊이 빠진 오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죽음을 외면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지쳐서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죽음을 알고 다가오는 죽음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할 경우에 의학적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은 매우 신중하고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이 숨을 쉬는 동안에는 삶의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힘차고 빛나려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사람답고 품위 있게 죽을 권리와 의무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94)

 

 

 

다석이 밥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본 정신으로 본 것은 그의 기독교 이해, 예수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서 밥상 공동체 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앞두고는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알고 먹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사는 것을 다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이해했다. 다석은 날마다 밥 먹고 물 마실 때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고 했으며 이것이 신앙의 근본 행위라고 보았다. 다석이 밥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바 먹는 일을 삶과 신앙의 근본 행위로 본 것은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예수의 살과 피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 신앙의 핵심이고 다석의 삶과 정신의 중심에 속한다. (117)

 

 

 

날마다 먹는 밥은 다른 생명체가 제 생명을 ‘나’에게 바친 것이고, ‘나’를 살리기 위해 드려진 희생 제물이다. 그러나 밥은 ‘나’에게 머물지 않고 ‘나’를 넘어서 ‘나’ 속에 계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먹는 것이다. 따라서 “밥 먹는다는 것은 예배다. .....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인생의 목적은 예수처럼 하느님과 이웃에게 밥과 제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성숙하여 밥이 될 수 있도록 태초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쌀이 익어야 밥이 될 수 있듯이, 인생도 무르익어야 밥이 된다. 성숙해져서 밥이 되려고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밥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다석은 “인생뿐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께 바쳐지지 위한 제물.....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아니라, 말씀을 바치는 밥이다. “인생이란 밥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다. .....밥에는 말씀이 있다. .....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칠 수 있는 밥이다.” 다석은 여기서 밥과 육체와 말씀을 결합한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는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119-120)

 

 

 

생각을 삶의 행위로 본 다석은 삶의 주체인 ‘나’를 ‘생각의 끝머리’, ‘생각의 불꽃’이라고 했다. 생각과 ‘나’를 일치시킨 다석은 생각을 ‘정신의 불꽃’이라 했고, 이 정신의 불꽃에서 ‘내’가 나온다고 하였다. 데카르트에게서 생각이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라면 다석에게는 생각이 존재를 생성하는 행위다. 따라서 다석은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나온다. 생각의 불이 붙어 내가 나온다. 생각에서 내가 나온다.”했다. (...)

다석에게 “내가 생각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식론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삶과 믿음의 원리이고 존재의 원리였다. 생각하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주체적인 행위이고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실현하는 행위, 삶의 행위이다. 다석에 의하면 인간의 속알맹이는 “솟구쳐 올라가는 앞으로 나가는 창조적 지성”이며, 생각은 “생명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164)

 

 

 

다석에게 생각은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의 불꽃”이다. 생각은 정신의 불꽃인데 정신이 불이 붙으려면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정신은 거저 깨나지 않고 (삶 속에서) 간난고초를 겪은 끝에만 깨어난다.” 또한 “(나의) 정신이 통일되어야 (생각의) 불이 붙는다. 분열된 정신은 생각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고 연기만 난다.” 정신은 지성적 계몽보다는 인생의 각난고초를 겪음으로써 깨어나고,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름으로써 통일에 이른다. (169)

 

 

 

윌슨은 유전 공학의 지식과 원리에 기초하여 유전자와 문화의 공동 진화를 말하고,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려 한다. 그는 지식 대통합의 개념으로서 ‘부합, 일치’를 뜻하는 consilience란 개념을 쓰는데 이 말은 ‘함께(con)’, ‘뛰어오르다, 도약하다(salire)’에서 온 말이며, ‘함께 도약함, 도약해서 일치에 이름’을 뜻한다.

윌슨이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 도입한 자연 과학적 환원의 원리는 그가 사용한 대통합의 개념인 consilience와 배치(背馳)된다. consilience는 ‘위로 올라가서 일치에 이름’, 곧 상향 일치(上向一致)를 뜻한다. 그러나 윌슨의 자연 과학적 환원론은 정신과 영의 존재를 물질과 육체의 존재의 지평으로 환원시키는 하향 일치이다. 물질-생명-정신-영은 존재의 위계가 다르다.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생명에 있고, 생명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정신에 있으며, 정신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영에 있다. 큰 존재를 작은 존재의 지평으로 끌어내려서 일치시키려는 것은 존재론적 폭력이다. 큰 존재에서 작은 존재들이 포괄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다석이 말하듯이, 물질에서 영으로, 존재의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만물의 이치가 함께 드러난다. (176-177)

 

 

 

참된 생각, 거룩한 생각은 하느님과 연락된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석은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고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뒤집혀졌다. 생각과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나’ 대신에 신이 존재의 주체로 나온다. 생각하는 주체는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神)이기도 하다. 다석에게서는 생각하는 행위에서 입증되는 것은 인간인 ‘나’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존재이다 .생각하는 데서 신의 존재가 확인되고 입증된다. 생각은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참 뜻 그것이 나의 본체다. ..... 참 뜻이 우주의 뿌리다. 뜻만은 영원이 죽지 않는다. .....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참 뜻을 이루어 가다.” (182)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 “오직 믿고 복종하라.”는 본회퍼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핵심을 드러낸 것인데 한국 선불교의 가르침과 통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선악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 가능성에 머물과 자기 정당화와 이웃에 대한 비판과 정죄, 논쟁과 분열로 이끈다. 이런 지식과 사변을 끊어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써 살림의 행동에 이를 수 있다. 선악에 대한 지식과 바리사이파의 율법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 및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낸다. 바리새파의 율법 행위는 하느님에게서의 분리, 자신과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낼 뿐이다. 선악에 대한 지식은 인간을 지식과 관념의 사변적‧감정적 가능성으로 이끌며,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 현실적인 삶의 행동으로 이끈다. 본회퍼도 오직 행위에서만 삶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가능성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197)

 

 

 

읗로 오름 삶의 오름 올(早‧當年) 사리가 올바른 삶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

거룩다 그리스도록 이에 숨을 쉬는 이

 

이 시의 듯은 다음과 같다. “위로 올라가서 삶이 올라가는 삶, 일찍 주어진 시간을 옹글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 알몸을 맡겨 버리는 날은 결혼하는 날이거나 죽어서 장사 지내는 날인데 이날에는 얼ᄆᆞᆷ이 되어서 얼ᄆᆞᆷ을 보게 해야 한다.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예수를 이어 숨을 쉬는 사람.”

다석은 이 시 가운데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를 풀이하면서 젊은 부부가 알몸만 서로 맡기지 말고 서로 얼과 ᄆᆞᆷ을 새롭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늘 새롭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석이 결혼을 부정하는 듯한 말도 자주 하고,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몸을 비하하고 정신만을 높이는 듯한 말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결혼하는 젊은 부부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 알몸을 맡기면서 얼ᄆᆞᆷ을 드러내 뵈라고 함으로써 알몸과 얼ᄆᆞᆷ을 결합하고 있다. (...)

몸을 ‘영혼의 그릇’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다석은 건강한 몸을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라고 하였다. 다석에 따르면 “4백조의 세포가 하나로 모일 때에 여기 살알(세포)을 넘어서는 인격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이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내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산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 의식, 절대 인격이 있는 것처런 느껴진다.”고 하였다. (201-203)

 

 

 

우주의 캄캄한 허공에 비하면 물질세계와 물질이 타는 빛은 아주 작은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허공을 드러내고 그 허공 속에 잠기는 어두운 저녁은 영원하고, 태양은 우주의 한 작은 화로에 지나지 않으며, 밝은 낮은 하루살이의 빛에 불과하다고 다석은 말한다. 더 나아가 햇빛과 물질은 영적인 세계를 가리고 그 세계와의 소통을 가로 막는다.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들음’은 ‘비뚤어짐’으로 숨길을 막는 요인이 된다. 숨길은 밤중에야 잘 뚫린다.” (215)

 

 

 

다석의 제자 함석헌은 「흰 손」이라는 시에서 미신적 속죄론을 비판하고, 믿는 이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피가 구원의 효력이 있으려면 믿는 사람의 피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피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함석헌에게 예수는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오늘 나의 삶, 나의 몸과 뼈와 살 속에, 나의 피 속에’, ‘나의 얼과 혼’ 속에 살아 있는 예수다. (259-260)

 

 

 

다석에게 신앙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우님의 고디는 우리 때믄 비르샤 우리로 ᄒᆞ야금 늘 삶(그리스도)에 들어가게 합소서.”(1955.12.11.) 그리스도가 곧 늘 삶, 영원한 삶이다. 믿음은 예수의 ‘늘 삶’에 참여함이다. (265)

 

 

 

고난받는 민중을 대속자라고 한 것은 자속과 대속을 통합한 것이다. 오늘 고난받는 민중이 자신들의 고난을 통해 속죄한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준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또한 민중을 오늘의 예수로 본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여기서 다석은 “일체가 대속이다.” 하고 선언한다. 다석에게는 예수의 피만이 속죄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의인의 피가 속죄 능력을 가졌고, 의인의 피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고통당하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애씀이 속죄 능력을 가졌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목숨을 밥으로 내어 주는 자연 만물 일체가 속죄를 하고 있다. 서로 밥이 되는 “일체가 대속이다. ..... 야채, 고기 다 말 못하고 죽는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다. 밥(먹이)이 ‘나의 생존’을 위한 희생 제물이고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대신 바치는 대속물이다. (266-267)

 

 

 

인생은 영속 개혁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일시 개혁으로 부귀영달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삶은 “들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박힌 데서 트고 나감이며 ..... 인간을 크게 열어서 참 살 길을 걷는 것”이다. 일시적‧일회적 개혁으로는 삶이 바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일회적으로 세상을 구속(救贖)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났다. 인간들이 “세상에서 밥을 알맞게 먹고 옷을 알맞게 입고 자미 보며 놀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다. 인생은 “머리카락 발톱 끝까지 개혁(改革)--영속개혁(永續改革)--에 들어가는 길이다.” (273-274)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臨在)를 경험하게 했다.” 성만찬은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의 연장이며,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예수의 살과 피로써 하나로 된 공동체로 이해했다. 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 다석은 밥과 예수를 동일시하면서도 식사를 하늘제사로 보고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다석은 식사를 ‘사랑의 나눔(割愛)’으로 보고, 천지 만물의 조화와 농민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을 말했다는 점에서 밥의 공동체성과 민중성과 생태학적 차원을 주목했다. (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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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교실 (2013.07.19)

최근에 그래도 고발성이 짙은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을 거뒀다. 도가니, 남영동1985, 부러진화살... 그리고 노리개(는 흥행했는지는 잘 모르겠고)까지...

내가 의문인건 여왕의 교실도 나름 고발성 짙은 작품인데 왜 시청율이 바닥이냐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해 나름 감을 잡았다. 도가니를 위시한 영화들은 가해자들을 실컷 욕할 수 있었다. 파렴치, 개만도 못한 새끼들, 독재의 하수인, 더러운 수컷들... 시청자는 전적으로 피해자와 동일시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여왕의 교실은 그게 잘 안된다. 마여진 선생을 욕할 수는 있지만, 선생이 얘들한테 체벌을 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다. 마선생이 행하는 건 우리가 사회와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쟁의 원칙을 다소 강도 높게 적용한 것 뿐이다. 솔직히 나는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선생 쭉정이들 한테 마여진 선생의 발언보다 심한 얘기 더 많이 들어봤다. 니들 부모님들은 대학도 못나와서 니네가 그모양인 거다부터 시작해서... 학교는 사실상 모욕을 체험케 해주는 공간 이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대응이다. 선생이 조별과제를 내고는 조에서 가장 불성실했던 사람 이름을 적어 내라고 한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학생은 최하점이다. 이에 전교 일등 김서현은 반 아이들에게 모두 자기 이름을 써 내서 마녀쌤의 전략에 맞서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마 선생은 모두가 한 표씩 나올 때는 모두 최하점을 줄 거라고 협박한다. 그 말에 학생들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고작 4명 중에 한명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선생도 시원하게 욕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얘들을 욕할 수도 없다. 얘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나 대신 희생할 사람을 만들어야하는 사회, 오히려 그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사회. 근데 그게 또 현실이고...

오늘 마 선생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진심이 통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드라마 초반에 심하나의 진심은 오히려 가식으로 오해받았다. 그게 왕따를 더 심하게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심하나의 진심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에도 꿋꿋하게 친구의 닫힌 마음을 향해 따스한 손을 내밀었다. 진심이 오해받는 세상에서 바보같은 우직함으로 마녀 쌤에게 맞선것이다.

여왕의 교실 같은 캡짱드라마가 외면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엔 두려운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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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부터 행복하고 보기. (2013.05.29)

 

 

수업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박사과정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이 내게 물어보시길, 금철씨는 나중에 뭐하고 싶어?

저, 귀농하고 싶은데요.

자본주의가 이런데 귀농해서 자연 찾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 .... ....

저는 자본주의 망할 때까지 기다리기엔 수명이 너무 짧을 것 같고, 일단 저부터 행복하고 봐야겠네요ㅠ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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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단상 (2013.04.11)

Jung Ha Kim 단상.

아래는 오늘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복지국가 연속세미나에 참석하려고 김정하 옹과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든 생각들. 악의는 전혀 없다는 것은 읽어보면 알 것이고, 훌륭한 대선배님이 살아오면서 쌓아온 귀여운(ㅋㅋ) 버릇을 바라보는 후배의 시선이라고 봐주길 바람.

1. 과잉친절

이 세미나에 참여할 사람은 미리 연락하라길래 김정하 옹에게 연락함. 반가워 하시는 김정하 옹은 지난주 지지난주 세미나도 재밌었는데, 왜 안왔냐고 살짝 핀잔을 줌. 나는 고3수험생도 아니고 매주 하루씩 7시반에 어떻게 가냐고ㅋㅋ 다음주 세미나는 갈꺼랬더니, 오는 길을 한 5분(살짝 뻥 섞어서)가량 설명. 나는 의원회관 어딘지 나도 안다고,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 안해도 된다고 했더니, 거기가 새로 지어진 신관이라... 찾기 어려울거라며 또 한참을 설명.

정하님, 너무 그렇게 모든 일에 열심이지 않으셔도 돼요ㅠ 어차피 입구에서 경비아저씨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난 가끔 누나의 넘치는 성실함과 친절이 무서워요ㅠ

2. 여전한 학생회장 포스

오늘 오전 강의를 듣고 바로 이어서 질의응답시간. 옆에 있던 정하님 왈, "야, 질문해, 질문."
이 말을 할 때 정하님 표정에는, 마치 대학 운동권 선배가 함께 온 후배의 반응을 민감하게 체크하려는 의무감 같은게 느껴졌다. 이런게 총학생회장 출신의 아우라인가. 그런데 순간 밀려드는 이 부담감은 뭐지?ㅋㅋ

어쨌든 결론은 정하느님 존경합니다! 진심이에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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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세미나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 (2013.04.25)

토요일날 야학 교사들과 <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고 세미나 하기로 해서, 아직 집에 안가고 남아서 요러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시민제작 일상학습>이라는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방통대 교육학과 정민승 교수의 기조발제가 있었고, 몇몇 지역의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민승 교수의 발제문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이었고, 발표된 사례들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들이긴 했지만, 뭔가 떫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민승 교수 발제문의 주제는 <교육의 경계를 허무는 시민의 힘>이다. 제도화된 교육이 '경계'를 확정하고 교수자와 학습자의 위계라는 형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 또는 '학습운동'으로서의 교육은 그 경계에 구멍을 내는 것, 그래서 교...수자와 학습자간의 위계를 평등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사회운동에서의 교육도 사실상 (프레이리 식으로 말하면) '변혁'이라는 내용을 예금하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다. 즉, 학습자 또는 민중을 지속적으로 '무지한 자'로 재생산하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며 랑시에르를 인용한 것부터, 그리고 필리핀 민중교육 교본에 나오는 '우물안의 3마리 개구리'이야기까지 너무나 완벽한 논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사례발표들은... 솔직히 너무 훌륭한 사업들을 하셨고 멋지기까지 한데, 나는 도저히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서울로 올라와버렸다. 활발한 주민참여, 지식 공유...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파주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시도했다는 '똑똑도서관'이라는 곳의 사례를 보면, 왜 여기 참여자들은 다 '전업'주부들일까? 남편들은 다 어디갔나? (똑똑도서관의 관장은 30대 중반의 남성) 또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된 수업은, 리본 만들기, 요리수업, 데일리드로잉... 이런 것들이다. 이런 교육이 (여성적 이미지가 부여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뭔가 '학습자의 자율성'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에 갇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 이계삼 선생님이 쓰신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문화학자 엄기호는 언젠가부터 (교육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유행이 되기 시작한 '자기주도학습'의 끝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고 지적했다 한다. 선험적으로 가정된 학습자의 주체성은, 학습자 개인이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며칠이고 인터넷을 붙잡고 있게 만들것이고, 결국 고립된 자신의 지식 자본에 갇혀 히키코모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몇몇 사례에서는 주민 간의 지식 공유 사례들을 보여줬지만, 그 지식이 '공유'되기 이전에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의 발문을 쓴 도날도 마세도의 이런 지적이 눈에 띈다. "(한 자유주의자 백인 교수는) 그 위원회에 지역민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지역사회가 가진 지식 기반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곧 낭만적인 온정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 지역민들이 대학 교수들보다 많이 알고 있으므로, 교수들이 지역민들을 가르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민들이 교수를 가르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 입장은 교수들이 상당한 혜택을 누렸던 문화자본을 지역민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부여에 대학의 문화자본이 꼭 필요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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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은 이렇게 장황하게 했지만... 그래서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건가. 며칠 전 내가 야학에서 맡은 과학수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분들은 수업 시작하자마자 2분도 안되어 하품하고 있고,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교과 보조용으로 보는 만화책으로 수업하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수소는 H고, 산소는 O고, 질소는 N이고... 뭐 이딴 걸 칠판에 적고 있었다. 김상봉 선생이 쓴 <세 학교 이야기>를 보니까 80년대 야학인 까르딘학교에서는 기계적인 교과교육이 되기 쉬운 과학과 지리는 아예 없애버렸다는데, 우리 야학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특수교육법에서 정한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이어서 안되겠지?ㅠ.ㅠ)

나도 자기주도학습으로 수업 진행해 보고 싶다. 그런데, 달랑 두 세 문단 밖에 안되는 짧은 글도 혼자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주도학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랑시에르가 소개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 실험(불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불어로 된 책 읽히기)을 과연 일반화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설명하는 일'을 중지하고 지능의 평등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능의 평등성'이라는 명제 위에서 오로지 교육자의 '의지'에 학습자를 연결시킴으로써 학습자의 지능을 작동케 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뭐 공부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애*누나가 "그냥 선생님 하고 싶은거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일단 그것부터라도...

엉. 이게 다 뭔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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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삶을 위한 국어교육> 발췌독 (2013.03.04)

몇 년 전, 한 결손 가정 아이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 안팎으로 발 디딤 틈도 없이 쓰레기와 옷가지로 가득 찬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로 오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빈곤'을 '풍요'로 바꿔어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아이의 '빈곤'을 '가난'으로, 보살핌과 우정으로 견딜 만한 조건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모든 교육적 상황은 백 가지 문제에 대한 백 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의 그릇 속으로 옮겨 담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혁'이라 부른다.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육체성을 가진 교육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 접촉의 중요한 형식 하나가 사라진다. 오늘날의 교육개혁이란 이 살아 있는 대면 관계의 '황무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락'에 대한 편집증이 낳은 비극이다. 교사에게, 그리고 전교조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닌 '걸음'걸이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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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하여 (2013.02.10)

용서와 사과.

요즘 나는 기독청년아카데미에서 하는 누가복음 강의를 듣는다. 한번도 성경을 접해보지 않은 나이지만, 여인과 사마리아인의 편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하시는 예수의 모습이 경이롭다.

그런데 엊그제 했던 강의 중에 나온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에 남아 날 괴롭히는데, 그것은 바로 용서에 대한 것이다.

강의하시는 김재흥 목사님이 잘 아시는 한 목사님은 평소 개량한복을 즐겨 입으시고 수염을 기르고 다녀서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으로 종종 오해받는다고 한다. 어느날 이 도사님 같은 목사님이 지방에 일정이 있어서 한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역시 이번에도 목사님을 어느 산에서 내려온 도사님이라고 생각한 여관 주인이 방에 쫓아와 묻더란다. "도사님, 제가 정말 잘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찌해야할까요?" ...이 목사님이 순간, 직관적으로 판단키로, 이 작은 시골마을에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것 같은 여관 주인을 하고 있는 여인의 삶에 제일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남자 문제일 것이라 판단하시고 한마디를 던지셨단다.

"그 놈을 용서해"

그랬더니, 갑자기 이 여관주인의 얼굴색이 변하면서 정색을 하고 말하더라는거다.

"절대 그럴 수 없어요!"

이 대답을 듣고 도사님, 아니 목사님은 무엇을 느끼셨을까? 나의 짧은 생각으로는 목사님의 말씀이 다소 경솔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문득 그날 낮에 한겨레 신문에서 봤던 '법륜스님의 쾌도상담' 코너가 생각났다.

http://m.hani.co.kr/arti/society/women/573322.html

상담의뢰자는 어릴적에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고, 이로 인한 가족에 대한 미움이 쌓여 있는 여성이다. 이런 상처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법륜스님의 쾌도상담?은 이런 식이다.

"‘아버지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생각도 사실은 하나의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그 순간에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냥 한 남자였을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어머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낳아주시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매일매일 어머니한테 108배, 아버지한테 108배, 오직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세요."

ㅡㅡㅡㅡㅡㅡㅡ

나는, 화가 난다. 종교인들은 가끔 이렇게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한다. 하도 이상해서 노들야학 학생이시고 토요일마다 내가 활동보조하는 호식이형한테 물어봤다. 형은 형의 형님을 용서할 수 있냐고. 어릴적부터 자신을 병신이라고 무시하고 때리던 형을, 그래서 5분도 안되는 거리에 살면서도 얼굴도 안보고 산다는 형을 용서할 수 있겠냐고. 그런데, 호식이형은 내 질문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엉뚱한 대답만 늘어놨다. 내 질문은, 그냥 우스워졌다.

어느 날 문득, 아버지 집에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하던 ●●●형에게 용서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종교인들은 그렇게 입이 닳도록 용서를 외치면서, 왜 '사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요새 힐링타령 해대는 유명인사들도 상처를 내려놓으라면서 용서를 말하지만, 누구도 '사과'를 말하지 않는다. 용서는 피해자를 향한 요구이지만, 사과는 가해자를 향한 요구이다.

다음 누가복음 강의 때는 이 이야기를 꼭 해야겠다. 용서가 아니라 사과가 먼저라고.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예전에 김상봉선생이 경향신문에 썼던 칼럼의 첫구절이 생각난다.

"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 뒤에 제자들이 행여 오해할까봐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덧붙였다. 우주적 평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과 그 평화를 짓밟는 불의에 대한 깊은 분노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이어져 있는 것이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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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그것은 억눌린 자들이 가진 유일한 권력이다. 함부로 용서하지 말자. <레 미제라블>이 (김재흥 목사님 말대로) 사랑의 혁명일 수 있는 것은 장발장이 자베르를 죽일 수도 있는 위치에 섰기 때문에 (그러나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발장이 부랑인 수용소에서 매번 쫓겨나고 굶주릴 때, 자베르를 용서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했다고 해도 결국 장발장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놨을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자기 아들을 살해한 남자가 태연하게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했을 때, 전도연의 삶을 짖밟은 것처럼.

ㅡ 법륜스님이 던져준 불편한 화두에 대한 나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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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의 'Re: 서른즈음에'에 대해서 (2013.01.02)

요즘 출퇴근 하면서 명인의 'Re: 서른 즈음에'를 자주 들었는데, 이제 진짜 서른이다. 노래 가사대로라면 난 이제 슬픔을 팔아야 장사가 되는 나이이고, 이룬건 하나없고 잃을건 많은 나이이자, 더 이상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않을 나이이다. 한마디로 빌어먹을 서른 즈음이다.

이걸 들을 때면 좀 슬퍼지기도 했지만, 지금 내 기분은 명인씨에게 '메롱'을 날려주고픈 마음이다. 난 이제 오히려 슬픔은 팔아봤자 적자라는걸 깨달았고, 이룬건 하나없지만 잃을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전부를 걸지 않는건 그러기엔 하고 싶은게 너무 많기 때문에 몰빵을 피할 뿐인 거다.

나에겐 서른이라는 나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20대보다 오히러 더 영광스러운 나이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조금 부담이 더해지긴 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위해 다시 학생이 된건, 삼십대를 시작하는 나에겐 더 없이 설레는 일이다.

우리 모든 서른들에게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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