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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준이 돌잔치 - 2011.6.5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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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한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난 우리 조카 돌잔치를 하는 걸 보고 정말 이런거 할게 못되는구나 싶었다. 시간에 맞춰 들어오자마자 10분 쯤 지났을까, 행사진행요원이 마이크를 잡더니 일사천리로 돌잡이와 기념품 추첨 등을 진행하고 대략 20분쯤 지나서 돌잔치를 끝내버렸다. 그 자리에 왔던 손님들은 박수몇번 치다가 2만5천원짜리 뷔페음식을 본전때우겠다고 열심히 먹고 돌아갔다.
좀 늦게 도착한 이종사촌 동생들은 물어봤다. "원준이 뭐 잡았어?" "돈" 사촌 동생 대답한다. "잘했네~" 명주실을 잡길 원했던 매형은 아쉬워했지만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말한다. "요즘엔 과학이 발달해서 아무나 다 오래살아, 돈이 최고야~"
오 이런... 난 이 말이 왜 이제 세상과 만난지 1년된 우리 조카에게 마몬의 저주를 퍼붓는 말로 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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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도법스님, [사람의 길] 중에서 - 2011.8.23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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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동물들에게는 삶이고 죽음이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들에게는 순간이고 운이었다. 주검 위로 사람을 태운 바퀴들은 무수히 굴러갈 뿐이었다. 생명붙이들은 생명의 영원한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위에서 가루가 되고, 끝내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러면 저들의 영혼은 어찌될 것인가. 사람들은 그많은 생명들을 죽이면서도 달려간다. 빨리 가려 아우성이다. 도대체 그리 달려가 사람들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도법은 합장을 했다.
'인간들은 저 무서운 속도로 무엇을 삼기켜 하는가. 결국 그 속도에 인간들이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 도법스님의 생명평화 순례, '사람의 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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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도가니? - 2011.9.30

페이스북에 썼던 글. MBC 뉴스데스크 "지적장애 여성 성폭행 - 서울역 도가니"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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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뉴스에서 '서울역 도가니'라는 단독 보도를 냈다. 한 노숙인이 서울역 앞을 배회하던 지적 장애 여성을 보름 동안 감금해서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런 보도를 하는 걸 뭐라 할 순 없지만...

근데 분명히 처음엔 노숙인이라고 소개했는데, 그 여성을 감금한 곳은 자기 집이란다. 게다가 그 집도 노숙인들이 주로 기거하는 쪽방촌도 아니고 멀쩡한 빌라 주택가였다. 그런데 왜 그는 노숙인이라고 소개되었어야 했던 걸까?

이것이 바로 지금 언론이 도가니 열풍으로 나타난 사람들의 분노를 어디로 돌리려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인화학교 사건은 분명 부패한 사회복지 재벌의 문제이거늘, 이 분노를 노숙인과 같은 또 다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증오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보도는 그 '노숙자'가 전과 50범이었다고 대중에게 일러바친다. 댓글들은 노숙인 인권 어쩌구 하던 놈들도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거품을 문다.
...
정제되지 않은 무차별적 관심이 오히려 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근데 MBC는 정말 왜 집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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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단상 - 2011.10.1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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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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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교육과 학생들 집회 후기 - 2011.11.6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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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특수교육과 학생들 집회에 갔다와서 느낀 점들.

인원수가 이틀 전 있었던 한미FTA집회의 2배는 넘어보였다. 근데 좀 속터지는게, 종횡으로 줄을 딱 맞춰 앉아서 연단에서 시키는대로만 하는 집회라는 거. 심지어 사회자는 질서유지를 위해 화장실에 갈 때는 '질서유지인'의 인도하에 5명씩 짝을 맞춰 가라고 했다.ㅠ.ㅠ 난 정말 집회 대오가 사회자의 말을 이렇게 잘 듣는 집회는 처음 봤다.

그리고 꼭 민중가요에 맞춰서 문선 같은거 해야 하나? 과장 하나도 안 보태고 아마 그 집회에 나온 학생들 99%는 운동권이 아닐테고, '파도앞에서' 같은 노래는 거기서 처음 들어봤을 텐데... 자기 문화가 아닌 걸 그저 집회라는 형식에 맞추기 위해서 꼭 반복해야 하나... 그 공연 보면서 즐거워하는 건 솔직히 무대 옆에 모여 앉아있던 장애인단체 활동가들 뿐이었다. ㅠ.ㅠ

요즘엔 나조차도 그런 문화가 어색하고 조금은(아니, 솔직히 많이) 불편하다. 내가 이러면 변절한거야? 그런건 아니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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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송기호, [한미FTA핸드북], 녹색평론사 - 2011.12. 1

페이스북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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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변호사의 [한미FTA핸드북](녹색평론사 2011)에 실린 글 중, 정말 대박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옮김. 여기서 말하는 비전2030이란 노무현 정부 당시 발표된 사회정책 종합적 플랜. 일각에서는 이것이 우리나라 정부가 발표한 최초의 종합적 사회정책 플랜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 하는데, 송기호는 이 글에서 한미FTA라는 조건 속에서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인식인지를 평가한다. 다들 이 핸드북을 일독하시길 바랍니다. 녹색평론사 홈페이지에 가면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비전 2030>이 한미FTA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전 2030>은 국가 규제로부터의 해방과‘적극적 개방’,‘능동적 세계화’를 갈구합니다. 이‘갈증’이 한미FTA를 원했습니다. 미국은 한국에게 ...억지로 이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비전 2030>이 내민 뜨거운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문제는 <비전 2030>입니다. 한미FTA는 외부의 그 누구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비전 2030>은 이미 퇴보한 국가로 하여금 완전히 뒤로 물러나 앉으라고 합니다. IMF사태 후 10년 동안 형성된 국제금융자본의 기득권과 경제구조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국가는 그 구조의 담 너머에서, 인력에 투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구조에서 탈락한 자와 희생된 자를 위한 구제사업에 전념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비전 2030>의 ‘사회투자’이며, ‘선진적 사회복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연히 돈이 듭니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합니다. <비전 2030>은 2010년까지는 세금 증가 없이 한번 추진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는? ‘증세를 위한’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비전 2030>은 패퇴하는 국가의 자화상입니다. 국가는 국민경제를 유지하는 1차 보호선입니다. <비전 2030>은 국가에게 퇴각을 명령합니다. 국가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탈영합니다. 그리고 시장 주변에서 보초를 서다가, 자신이 버린 1차 보호선이 무너져 생긴 희생자들과 마주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빈곤층의 기나긴 대열에, 국가는 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을 선진국 수준으로 돌보아 주는 것이 나의 새로운 비전이오!” “그러니 세금을 좀더 내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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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대한민국 헌법 - 2011.12.4

페이스북에 썼던 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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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늘 판사가 추천한 동영상 "을사늑약이 쪽팔려서"에 보면 한홍구 교수가 다음과 같이 한미fta를 정리한다. 바로 이것이 체결되었을 때 바뀔 법 체계이다. 상위법부터 나열하면,

1. 미국 헌법
2. 미국 한미fta 이행 법안
3. 한미fta 조약 전문 (영문본)
4. 한미fta 조약 전문 (한글본)
5. 한국 헌법
6. 한국 법률

전두환 노태우 때에는 민주화 진영이 '호헌철폐'를 외쳤다는데, 우리는 마치 보수주의자들처럼 '헌법수호'를 외쳐야 할 판이다. 우리 집 문짝에다 "사랑해요, 대한민국 헌법"이라고 써 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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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와 장애인 - 2011.12.8

페이스 북에서 옮겨 온 글. 이건 고려대 학생이 과제로 하는 영상물 촬영에 인터뷰 하면서 대답한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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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미FTA와 관련해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투자자국가제소권이잖아요. 이것은 투자자가 기대하는 미래이익이 국가의 개입으로 침해되었다고 판단될 때 국가를 국제중재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이죠. 이 문제를 굳이 장애인과 관련해서 비교하자면, UN에서 제정하는 국제장애인권리협약이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협약은 강제력이 없어요. 그래서 이 협약에 강제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선택의정서라는 것을 두는데, 이것을 통해 비로소 국내에서 장애인권리침...해가 일어났을 때, UN의 직권조사를 요구할 수 있죠. 그런데 선택의정서의 작동도 국내법의 절차를 다 거쳤음에도 해결이 안났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죠. 물론 한국은 이런 선택의정서도 비준하지 않았지만요.
반면 ISD는 투자자가 직접적인 손해도 아니고, 미래에 예상하는 기대수익이 침해되었을 때에도 언제든지 국가나 지자체를 국제심판에 제소할 수 있습니다. 투자의 권리가 무슨 역사적으로 인정된 천부인권이라도 됩니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권리 침해와 차별에 대해서 제대로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에 장애인차별금지법 등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정부가 의지가 없으니 이런 법들을 무력화시키기 일쑤죠. 지금도 정부가 복지예산 줄인다고 거동이 힘든 장애인들의 등급을 임의로 낮춰서 하루아침에 활동보조서비스를 못 받게 만드는, 사실상 정부에 의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는 마당인데, 국가 내에서는 이를 구제해주는 체계가 전무해요. 그런데 엄청난 재력을 가진 투자자들은 수 틀리면 바로 국제심판에 국가를 제소할 수 있다는 것, 이것보다 더 심한 차별이 어디있습니까?
사실 ‘투자자’라는 것은 비인격적 실체입니다. 한미FTA는 이것에게 인간의 권리를 넘어선 특권, 인간의 권리가 파괴되어야만 보장될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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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재 장애인, 그 중에서도 중증장애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복지제도는 아무래도 활동보조서비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혼자서는 일상생활이 힘든 장애인들의 가사, 신변처리, 이동지원 등을 돕는 가장 필수적인 제도인데, 이게 기본적으로 국가책임이에요. 파견되는 활동보조인의 급여도 국가에서 주고요. 그런데 이 서비스를 중계해주는 기관은 다양한 민간기관들이 난립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정부는 이런 민간화, 시장화를 더욱 부추기고 있구요. 그러면 분명 장애인의 생존권적 요구와는 별개로 오로지 수익만을 노리고 이 서비스에 진출하려는 이들이 생기게 됩니다. 현재에도 중계 수수료만을 노리고... 이 서비스를 하려는 이들이 많은데, 한미FTA가 체결되면 외국 투자자들까지 개입하겠죠.
사실 이건 그냥하는 소리가 아니라, 한미FTA의 목적과도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한미FTA를 추진하면서 그 이유로 든 것이 바로 ‘서비스 산업의 활성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제조업으로는 앞서간 일본과 추격하는 중국에게 쫓겨 안되겠으니까 서비스 산업으로 돌파구를 찾자는 것이었죠. 문제는 서비스 산업의 활성화라는 것이 다른 말로 ‘서비스 산업의 시장화’라는 것입니다. 의료 서비스, 교육 서비스가 대표적인 것이고, 활동보조, 주간보호 서비스 등도 이 시장화의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 영역에 진출한 해외 투자자들은 이 서비스가 공적으로 제공되는 것이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문제삼을 것이고, 그것이 국제제소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장애인의 생존의 문제가 국제중재심판소의 3명의 심판관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공적 서비스 체계가 무너지면, 유료화된 서비스를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있는 장애인만 살아남는, 장애인 복지에 있어서는 가장 야만적인 체제가 도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상하게도 정치권에서 복지국가 얘기가 부쩍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논의 속에 한미FTA가 별로 쟁점이 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치권의 복지논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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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 세미나 후기 - 2011. 12. 12

페이스북에서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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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랜만에 간 교육학 세미나에서 본 글 중에 이런게 있었다. 우리나라 교육은 일명 '손님 만나 달리기'라는 것이다. 어느 시골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때 '손님 만나 달리기'라는 것을 하는데, 달리기 전에 제비뽑기로 종이를 뽑아 나오는 나오는 사람과 손을 잡고 같이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재수없게 백발의 할아버지가 걸린 학생은 아무리 육상 기대주라도 꼴찌를 하는거고, 운이 좋아 젊은 군인 아저씨가 걸린 학생은 군인 아저씨가 업고 달려서라도 1등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이 사람은 부모 잘만나면 장땡인게 한국 교육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난 이 손님 만나 달리기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어차피 우리 인생이 다 손님 만나 달리기 아닌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완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손님'들을 레이스에서 없애버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에서 손님은 필연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고, 교육을 통해 함께 달리는 법을 배우고, 또 할아버지와 달리는 것이 군인 아저씨와 달리는 것에 비해 뒤쳐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아니, 굳이 알게 하지 않아도 되게끔 최종 결승점을 둔 100미터 레이스 코스를 원형으로 만들어 앞서간 사람이 뒤쳐진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이 그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순간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는 출발점에서의 동행의 순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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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바람] 장애인야학에게 '참교육'은 무엇인가?

 

 

장애인야학에게 ‘참교육’은 무엇인가?

-<장애인야학 참교육실천대회>를 치르고 나서-

 

 

 

이야기 시작부터 샛길로 - ‘참교육이라는 한 단어에 대한 기억

 

‘참교육’. 대뜸 내가 이 단어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 생각해본다. 생각났다. 대학시절 동아리방에서 할 일 없이 노닥대고 있을 땐 항상 민중가요 여러 곡을 반복재생해서 듣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너무 웃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가사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서 검색해보니, 제목은 <못생긴 얼굴>, 작곡가는 그 유명한 ‘개똥벌레’를 작곡했던 한돌씨.

 

열사람 중에서 아홉 사람이 / 내 모습을 보더니 손가락질 해

그놈의 손가락질 받기 싫지만 / 위선은 싫다 거짓은 싫어

못생긴 내 얼굴 맨처음부터 / 못생긴걸 어떡해

 

너네는 큰집에서 네명이 살지 / 우리는 작은집에 일곱이 산다

그것도 모자라서 집을 또 사니 / 너네는 집 많아서 좋겠다

하얀 눈 내리는 겨울이 오면 / 우리집도 하얗지

 

모처럼에 동창회서 여잘만났네 / 말 한번 잘못했다 뺨을 맞았네

뺨 맞은건 괜찮지만 기분 나쁘다 / 말 안하면 그만이지 왜 때려

예쁜 눈 예쁜 코 아름다운 입 / 귀부인이 되었구나

 

몇 일후면 우리집이 헐리어진다 / 쌓아놓은 행복들도 무너지겠지

오늘도 그 사람이 겁주고 갔다 / 가엾은 우리엄마 한 숨만 쉬네

개xx 개xx 나쁜 사람들 / 엄마 울지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서 일터 나갔네 / 처음잡은 삽자루에 손이 아파서

땀 흘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니까 / 나도 몰래 내눈에서 눈물이 난다

하늘에 태양아 잘난척 마라 /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

 

가사만 적어놓으니 조금 밋밋한데, 노래로 들어보면 정말 웃긴다. 얼마나 못 생겼길래 열 사람중에 아홉사람이나... 게다가 ‘난 못 생긴게 아니야!’라고 부인하지도 않고 ‘맨 처음부터 못생긴걸 어떡해’라니! 그러다 ‘혹시 이 노래 내 얘기하는건가?’라는 생각에 웃음이 싹 가셔버리는, 요새 인터넷 용어로 말하자면 ‘웃픈’(웃기고 슬픈)노래.

 

하지만 4절, 5절까지 듣다보면 미묘한 반전이 느껴진다. 가엾은 엄마와 땀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가슴 속에 슬픔과 절규를 쌓아가고 있는 자식의 눈물이 느껴지는 노래. 사실 이 노래에서 말하는 <못생긴 얼굴>은 얼굴에 대한 묘사라기보다는 가난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도시빈민의 자기애환적인 독백의 단어이다. 그러나 이 절망은 절망의 심연에서 무릎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있지 않고, ‘엄마 울지 마세요’, ‘자랑스런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홀로 눈물을 닦는 의연함을 드러낸다. 이 의연함은 간주 부분에 두 아이의 대화를 담은 나레이션으로 더욱 생명력있게 나타난다.

 

다른 꽃은 예쁜데 콩나무는 못생겼어

못생겼지만 쑥쑥자라는 게 보기 좋지 않아?

꽃삽으로 잡초를 뽑아주자 잡초를 뽑아주자

콩나무가 쑥쑥 자라네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나서 참교육!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나서 참교육!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그게 초창기 전교조의 슬로건인지, 그리고 이후 전교조 다수파를 상징하는 이름인지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말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 어쩌다 <장애인야학 참교육실천대회>를 하게 되었지?

 

올해 초,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나는 이 단체의 유일한 상근 활동가다! ^^;)와 함께 사무실을 쓰는 전국장애인교육권연대 활동가들과 장애인야학들이 모여서 무슨 사업을 해 볼 수 있을까 이야기를 하다가 “전교조처럼 참교육실천대회를 해보는게 어떨까”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덜컥 “좋은 생각이네요”해 버렸고, 그 한마디 때문에 생전 처음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이는 행사를 기획해보는 엄청난(-_-;;)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전교조처럼 참교육실천대회 해보자’라고 말은 했지만, 학령기-청소년기를 교육하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모여서 하는 행사랑, 이미 성인이다 못해 노인들도 다니는 장애인야학의 교사들이 모여 하는 행사가 같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사이고 전교조 조합원인 친구의 아이디를 빌려서 전교조 참실(보통 ‘참교육실천’을 줄여서 ‘참실’이라고 한다) 게시판의 이런저런 자료도 찾아봤지만, 솔직히 도움 될 만한 자료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 같지 않아, 내 마음은 ‘너무 많은 고민을 하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장애인야학들이 그 동안 장애성인 교육에 대한 국가적 지원을 위한 투쟁들은 많이 했지만, 자체적으로 축적했던 교육역량들을 공유하는 자리는 없었던 만큼 그런 첫 자리를 만드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쪽으로 말이다. 그래서 활동이 활발한 서울의 노들야학, 대구의 질라라비야학, 인천의 민들레야학에 각각 야심차게 진행해 왔던 교육사례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어쩌다보니 야학의 교사와 학생을 대상으로 장애인야학의 발전방향에 대한 의견을 묻는 설문조사까지 하게 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단체 지원사업으로 선정되기도 해서, 어쨌든 일단 열심히 준비했다.

 

그렇게 별 대책도, 뚜렷한 고민도 없이 준비하던 중에 ‘불편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행사를 한 달 정도 앞두고, 막 홍보에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들이 소식을 나누는 카카오톡 채팅방에 홍보 웹자보를 올리자, 경기지역의 한 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는 동지가 질문을 던져왔다.

 

“참교육이라면 전교조에서 내걸어 왔던 것인데, 그러면 야학협의회에서 생각하는 참교육은 어떤 것인가요?”

 

예상치 못했던 당황스러운 질문이었고, 그래서 답할 길이 없었다. 고민 끝에 성실한 답변을 포기하고 다분히 ‘정치적인 대응’에 들어갔다.

 

“글쎄요. 논의해 본적은 없지만 이번 행사를 통해서 그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해 봐야겠죠.”

 

이런 나의 대답에 상대방도 ‘정치적인 대응’으로 마무리 해 주길 바랬지만, 그 분은 나를 상대로 끝내 공격 포인트 올리고 떠나셨다.

 

“참교육에 대한 개념정리도 없이 이런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좀 당황스럽네요. 어쨌든 의미있는 행사 되시길 바랍니다.”

 

이 분, 두 번째 문장으로 나름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 같긴 하지만, 첫 번째 문장의 지적이 너무 따가웠다. 한편으론 야학교사 경험도 일천하고 야학협의회 상근 활동 한지 이제 1년 조금 넘은 나에게 너무한 질문 아닌가 싶어 억울하기도 했다. 그렇게 억울함과 함께 불편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불편한 고민 장애인야학에서 참교육은 어떤 의미일까?

 

참교육. 이 용어가 한국사회에 자리 잡게 된 것은 90년대 내내 불법단체였던 전교조가 합법화 투쟁을 하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이 단어가 풍기는 순수성과 무관하게, ‘참교육’은 한국 교육운동의 타협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나는 그런 역사를 모르지는 않았지만, 전국장애인야학협의회가 주최하는 첫 번째 전국단위 행사의 이름으로 <참교육실천대회>라는 이름을 선택하는 데에는 별로 주저함이 없었다.

 

그 이유는, 내가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전교조의 이러저러한 역사를 고려하면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못생긴 얼굴>의 간주 나레이션을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계속 곱씹어 생각해보건대,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이 나레이션만큼 잘 표현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콩나무가 싹이 트고 잎이 나서 참교육!”이 한 문장에서 나는 자라나는 한 생명에 대한 찬미를 느낀다. 다른 꽃들보다 못생긴 그 콩나무를 자라게 하기 위해 잡초를 뽑는 손길,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참된 교육의 손길이 아닐까?

 

우리는 생이 끝날 때까지, 자라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신체적 발육이 멈춘 성인기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자라야 한다.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능력에 있어서 끝없이 자라나야 한다. 이 ‘자람’이 멈추면, 사회적 생명으로서의 ‘나’는 죽는다. 우리가 배우는 과정에서 익히는 수많은 지식도 바로 이 ‘자람’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한국교육의 문제점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바로 ‘자람 없는 지식의 쌓음’에 있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가 자란다는 것은 언제나 ‘함께’자람이다. 논에 모든 벼들이 태풍을 맞아 쓰러졌는데, 나 홀로 웃자라 버티는 벼는 없다. 태풍맞아 쓰러질 때 같이 쓰러지고, 일어서며 힘낼 때도 같이 힘 낸다. 내가 얻은 ‘앎’을, ‘지식’을 그런 공감과 함께 힘을 내는 도구로 쓸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나는 그것이 교육이라고, 믿는다.

 

나는 노들에서 1년 반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맴돌면서, 그런 교육의 의미에 대해 어렴풋하게 느끼게 되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노들의 교사들은 항상 두려워한다. 오늘 수업에서 내가 학생들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혹시 잘 알아듣지 못해 학생 분들이 상처받으면 어쩌나 하고... 그래서인지 자신이 가진 지식들로 철옹성을 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왠지 교사로서의 자신감이 없어 보인달까, 그런 느낌도 가끔 받는다. 학생분들 또한 그 흔한 ‘학생다움’이 없다. 수업시간에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아무 때나 하고, 집에 가고 싶을 때 간다. 그런데 학생 분들이 그러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가끔 화를 내도, 비난하지 않는다.

 

그러는 과정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 함께 ‘자라고’있다고 느낀다. 두려움에 맞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학생들은 갖은 차별과, 시설이라는 사회적 감옥 속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 교사들은 십 수년을 오로지 말 잘 듣는 학생으로만 살다가,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던 장애성인 학생을 만났을 때 어쩔 줄 몰라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우리는 ‘삶’을 창조한다. 그래서 노들은 항상 시끄럽고 북적거린다. 그것이 노들야학만이 갖는 생명력이란 생각이 든다.

 

노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6월에 한 인권교육에서 대구 질라라비야학 교장이신 박명애 대표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박명애 대표님은 야학 학생으로 들어와서 교장까지 하신 특출난 이력을 가지신 분이다. 박명애 대표님은 야학 학생으로 다니면서 가장 설레였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 하셨다.

 

“처음으로 전동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 어떻게 운전해야 할지도 몰라 두려웠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나보다 먼저 이용하던 ‘선배님’들을 따라 다니면서 그 두려움을 벗어나게 되었다. 질라라비야학은 나에게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준 존재다.”

 

나는 대표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파울로 프레이리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는 하나의 모험적인 학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학교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체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참여하고 창조하고 말하고 사랑하고 추측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 이 학교입니다.”(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中)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받는 학교교육은 학생들에게 오히려 두려움을 끊임없이 각인시켜 줄 뿐이었다. 너의 부모님이, 선생님이, 미래의 상사와 사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래서 그 두려운 존재들로부터 질책당하지 않고,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규칙을 따를 것을 강요했고, 그들이 정한 조작된 지식을 습득할 것을 강요했다.

 

야학 경험 일천한 내가 ‘참교육’이란 이름 아래, 전국의 야학 교사들을 모아놓고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야학 교사들이 느꼈을 수많은 두려움을, 망설임을, 그리고 용기들을. 듣고 싶었다. 그것이 우리를 자라게하는 유일한 토양이니.

 

 

소감

 

하지만 실제 일이 이런 ‘이상적인’ 목표에 적합하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각 야학별 사례발표에 대한 원고 글을 받았을 때는, 두근거렸다. 인천 민들레야학과 작은자야학이 함께 준비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발표, 대구 질라라비야학에서 진행한 발달장애인 자립지원 사업에 대한 발표, 노들야학의 인문학 교육과 성평등 교육에 대한 발표. 특히 노들의 김유미 선생님이 준비한 인문학 교육에 대한 발표 글에는 유미 쌤이 매 학기 수업이 끝나고 쓴 수업평가서가 실려 있었다. 아, 이런 보물이!!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내가 생각했던 교사의 두려움, 망설임, 그리고 용기들, 그 모두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8월 24~25일, 이틀 간 행사를 진행하면서, 참 뿌듯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좋은 내용들을 많이 공유하게 되었다고 격려도 해 주셨다.

 

하지만 행사를 끝내고 몇몇 야학들로부터 평가를 들으니, 적잖은 분들이 많이 힘드셨던 것 같다. 어떤 분은 ‘상근교사들에게는 적합한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자원봉사로 오는 교사들에게는 지루하기만 했다.’고 했다하고, 또 다른 분은 ‘소수 몇몇 야학에 치중된 내용이어서 모두를 포괄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도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쉼 없이 이어지는 사례발표, 토론, 강의에 지칠 지경이었다는 말들이 가장 많았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나? 그랬다. 처음 하는 행사이고, 그래서 어떤 기획이 적합한 것일지 판단도 제대로 서지 못했는데, 그래도 다른 데 가서 자랑할 만한 행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욕심이 크면 탈도 큰 법이겠지.

 

하지만 이번 <참교육실천대회>와는 또 다른 방식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시도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야학은 움직이는 거니까. 여전히 두려워하고 망설이지만, 그럼에도 용기내어 말하고,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끌어안고 삶을 긍정하니까. 그런 과정들을 쉼없이 나누고 이야기하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전국에 있는 장애인야학들을 괴롭히는 것이, 내 일이다.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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