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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 한형식의 북한 3대세습 문제에 대한 언급에 관해. (2010.10)

요것은 2010년 10월 경 북한 3대세습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경향신문의 논조에 대해 한형식씨의 논평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것. 예전 글들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어서 블로그에 저장용으로 옮겨 옴.

 

아래는 (한형식씨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유창선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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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북한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나. 당신들 이상한 것 아닌가.”

 

<조선일보>가 한 말이 아니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신문>이 민주노동당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이윽고 민주노동당에게는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돌팔매질이 이어진다.

 

이 글은 ‘진보언론’이 만들어낸 이 해괴한 상황에 대한 관찰보고서이다. 먼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몇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자.

 

첫째,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한 바 없다.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경향신문>이 문제삼고 있는 지난 달 29일 대변인 성명에서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부분은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부연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마타도어이다.

둘째,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절독을 선언한 것은 <경향>이 북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권력세습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향>은 이와 관련된 기사의 제목을 “민노당 일각 ‘북 3대세습 비판’ 경향신문 절독 선언”이라고 달아버렸다. 엄청난 오해를 낳을 사실왜곡의 제목이었다. 역시 <조선일보>가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흔히 쓰던 방식이었다.

셋째. 필자에 관한 얘기이다.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 입장표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해도 북한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북한은 내부결속을 위해 다시 대화의 창을 닫아버릴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이런 입장표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을 옹호하려는 당신도 종북주의‘ 아니냐는 비판을 <경향>으로부터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참담함과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다. 명색이 한 지식인이 ’진보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현실. 차라리 상대가 <조선일보>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번 <경향>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진보판 색깔론’이라고 규정한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정당은 주요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밝힐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략적 고려 하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권리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 전략적 고려가 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향>은 그런 민주노동당을 강압하고 나섰다. 표현만 달랐지, 다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안그러느냐, 당신들은 권력세습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식의 얘기였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수많은 독자들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상적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주체만 <조선일보>가 <경향신문>으로 바뀐 것이었을 뿐, 행태의 속성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빚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거국적 비판이 그렇게까지 급선무였다면 차라리 청와대 대변인의 비판성명을 요구하는 것이 빠른 길 아니었을까.

결국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정당의 분열을 낳았던 소모적인 종북주의 논쟁을 재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인터넷과 트위터 상에서는 이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재연되었고, 논쟁의 구도는 진보정당이 분열될 때의 종북주의 논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당시의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해 진보정당도 다시 통합의 길을 찾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이 시기에, 그래서 두 진보정당이 통합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경향>은 왜 이런 문제를 들쑤셔놓았을까. 나는, 당사자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경향>의 생각이 짧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은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의 앞길에 대해 하나는 생각했지만,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향>에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당장 비판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서울광장에서 ‘북한의 3대 세습 규탄 궐기대회’라도 열리고 거기에 진보정당들까지 손잡고 나서는 광경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 있었던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 안에서의 색깔 덧씌우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경향>의 일련의 보도 이후 민주노동당이 그에 동조했다는 오해를 갖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제라도 <경향신문>이 사실왜곡의 기사제목을 단데 대해서는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압한데 대해서는 (사과는 안하더라도)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갖기를 주문한다. 명색이 진보 내부에서 색깔 덧씌우기가 활보하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후기>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밝혀두자. 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그냥 중도개혁론자 정도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다원적 가치과 사고, 그리고 판단을 보장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구차하게 이런 사족을 달아햐 하는 것이 참 싫다. 그래서 색깔 덧씌우기는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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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나의 의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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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재밌게 읽은 독자입니다. 책을 읽고 유익한 점을 많이 느꼈던 독자로서 드리는 의견이라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역사 강의>가 세간에 주목을 받은 주요 요인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 때문인 듯 한데(언론에 소개된 서평들에서 대부분 이 점을 장점이라고 지적하더군요), 저도 일견 필요한 접근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권력' 북한에 대한 '정치적 판단' 지점에 까지 끌어오는 저자분의 입장은 참 거시기 하네요... ㅠ.ㅠ

 

지난번 레디앙에 실린 민경우씨의 서평을 보고 저는 그의 입장이 책의 내용을 악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의 입장이 저자분의 입장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이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런 '내재적 접근법'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그런 접근을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압박, 지정학적 요인 등 현실의 북한을 제약하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옳은 정치적 선택을 했어야 할 책임이 북한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북한에게 요구하는 것도 과도한 것일까요?

 

민노당은 자신들의 '침묵'의 이유로 정보의 제약으로 인해 3대세습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3대세습의 정치적 올바름은 언제쯤에서야 판단내릴 수 있을까요? 북한이 망하고 나서? 사회주의 조국방위, 또는 약소국의 현실적 지위 등을 핑계로 이런 문제들을 덮어두기만 한다면 진보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고를 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오로지 '미국 책임'만을 부르짖는 지적 무능력의 알리바이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어제 책을 다시 보니 저자께서는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소련에 대한 반감을 모티브로 갖는 것은 냉전의식의 유산이라고 하신 부분이 눈에 띄던데, 최근의 북한논쟁을 접하고 나서 이 부분을 보니 참 머리가 띵해 오더군요. 저자의 우려가 뭔지는 알겠으나 좀 심하게 오버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맑스주의 역사 속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회주의 본국' 소련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교조화 아닌가요? 그 교조화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감정적인 반감도 섞여 있을 수 있으나, 이걸 무턱대고 유럽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며, 좌파 이론의 쇄신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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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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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경우씨의 서평과 이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를 보고 제가 얼마전에 메모식으로 적었던 글이 있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이것 또한 독자 한사람의 의견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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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이 사회에서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중에 과연 얼마나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 이런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특권을 포기하고 사십니까'라는, 동일한 방식의 도덕주의적 질문을 돌려주는 것은 일단 제껴두자. 그것보다는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이 <윤리21>의 "비전향 공산당원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글에서 주장한 바를 환기시키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한다.

 

전후 일본에서 공산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집단이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원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비전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식이 생겼다. 하지만 고진은 당시 문학계 논쟁을 인용하며 이런 도식 자체를 부정한다.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사실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은"것이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 따르면 자신을 포함해 "당시 대학생 대부분은 대동아공영권을 믿은 파시스트"였는데, 사실상 공산당의 현실인식은 이런 보편화된 인식을 깰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 속았다 등으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감옥가서 겪는 고통을 감수하는 등의 '도덕적 책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민주화된 한국에서 현실 운동에 크게 개입하지는 않되 관념적으로는 과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몽상적인 교수들을 감옥에 보낼 이유는 별로 없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사회주의를 외치는 교수들은 버젓이 교직을 유지하면서도 범민련이나 한총련 등 자주파와 ‘다함께’가 감옥을 메웠던 이유이다."(민경우씨의 서평 中)

 

민경우씨가 이런 발언을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고, 이들을 지지하던 대중들도 점차 등을 돌리던 시기에, 민경우씨를 포함한 자주파들은 얼마나 자신의 '인식하는 책임'을 다했는가? 여전히 북의 변혁가능성에만 기대어 남한의 사정을 판단하는 비주체적 몰인식을 보여오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공안기관의 가혹성과는 별개로, 그들의 몰인식이 탄압을 자초한 면이 아주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냉전이 사라진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 국가기구는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의 중심축들이 개구리 뒷다리 긁는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국가는 이들을 대중 앞에서 신나게 난타질했고 그게 또 대중에게 먹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사상적 순결성만을 강조하던 자주파를 상종못할 괴물로 보는 것은 그리 정당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혀 이해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좌파들이 강단에서 확보한 시민권에 만족해 안위를 누리는 동안 범민련 한총련등이 감옥을 채웠다는 말도 내가 보기엔 도덕적 자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누군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파들이 전혀 관심갖지 않는 현장에서 싸우다 고통을 받은 좌파들이 숱하게 깔렸다. 하다못해 작년 용산참사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박래군, 이종회는 자주파인가 다함께인가? 요즘 기륭, 재능 등 장투사업장 투쟁에 연대했다는 이유로 세번째 소환장을 받았다는 송경동 시인은?

 

민경우씨는 아무래도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실린 스탈린주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빌어) 민족해방노선에 대한 악마화에 대한 반론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되려 자기 무의식중에 잠재하던 자주파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신비화로 빠져든 것 같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재밌게 읽었던 <맑스주의 역사 강의>의 저자 한형식도 이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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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들바람에 쓴 글 - 용산참사 4주기

 

[용산참사4주기]

 

용산, 그리고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이 나라 곳곳의 상처들을 기억하며.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 마음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좋아서하는밴드, “옥탑방에서”

 

집. 그것이 곧 나다. 나의 역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베개 위에 머리를 눕히고 하루의 고단함도 함께 내려놓을 때, 그 마음을 ‘내 집’만이 안다. 그것이 아무리 누추하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그곳은 결코 쉽사리 지워져서는 안 될, 우리 삶의 마지노선이다. 오직 그 곳에서만 가난한 우리의 고민과 웃음 그리고 눈물의 기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돈’이라는 반질반질하고 네모 각진 권력을 갖지 못한 우리들에겐, 작은 방 한 칸에 새겨진 울퉁불퉁한 기억들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니.

 

철거. 아마도 그것은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올려진 구조물을 허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가 창가에 놓아두며 매일 정성껏 길러왔던 화분이 사라진다는 것, 어느 날 가족들과 여행에서 다정하게 찍어 벽에 걸어둔 사진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또 이와 같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 불가능한 삶의 흔적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 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은 다른 어딘가에서 또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던 이 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때를 추억할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영문 모를 콘크리트 더미만 쌓아올려져 있다면, 나의 과거가 허리가 끊어진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 것이다.

 

얼마 전 사당동 판자촌 지역 주민 연구를 다룬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판자촌이 철거된 이후에 이들이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온 20년이 넘는 세월을 한 권의 책에 빼곡히 담았다. 그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된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속에서 1년 전 또는 10년 전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철거가 반인권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나에게 이 물음이 던져진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삶의 뿌리를, 사정없이 흔들고 결국 끊어놓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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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나는 노들에서 한소리반 사회수업을 맡았다. 어찌어찌 마지막 수업까지 오게 되었을 때, 무슨 내용으로 수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4주기를 맞는 용산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용산 뿐만 아니라 이 나라 곳곳에서 자기 역사와 삶의 뿌리들이 끊어져 신음하고 있는 곳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정부가 국민들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쫓는 아이러니의 현장들. 용산, 두리반, 그리고 강정마을.

 

용산. 그곳은 콘크리트 더미를 쌓아올려 빌딩숲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살던 터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철거 이후 자금 조달이 어려워 재개발은커녕 겨우 주차장으로 쓰일지라도, 네모 각진 화폐의 권력으로 쓰일 일이 없는 낡고 허름하고 삐쭉삐쭉한 가옥들은 대걸레로 복도를 쓸어내듯이 내동댕이 쳐졌다.

두리반. 그곳은 한 가족의 소박한 생존을 위해 파 놓은 작은 우물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우물을, 고작 이 칼국수 가게 하나를, 수천 수만개의 우물을 가진 대형 건설사가 차지하겠다고 벌린 탐욕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강정마을. 물이 귀한 제주 땅에서 유일하게 깨끗하고 풍부한 물을 가진 강정천이 있는 곳. 천혜의 희귀 생물들과 수천 수만년을 이어온 구럼비 바위가 있는 곳. 이 마을을 지켜온 강동균 마을회장은 구럼비 바위를 엄마의 품과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엄마 품과 같은 이 곳에서 정부는 화약을 터뜨리고 있다. 마치 지구와 전쟁이라고 할 듯이.

 

내가 마지막 수업 준비를 위해 돌이켜 본 이 세 곳 중에서, 두리반만이 투쟁에서 승리해서 온전한 자기 터전을 찾았고, 용산과 강정마을은 아직도 아파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구속되었으며, 벌금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수업을 준비하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답답했다. 이 투쟁에 늘 함께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나조차도 마음이 지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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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정도로 유약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투쟁의 기록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니.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용산참사 당시 구속자들이 특별사면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분이 찝찝한 사면이었다. 이명박 측근 비리 인사들의 특별사면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용인 것이다. 치사하고 더러운, 그러나 어쨌든 사면이니 받지 않을 수 없는. 나는 쏟아지는 기사들을 무심하게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특별사면으로 나오신 이충연씨의 인터뷰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들이 권력으로 나를 석방했지만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결국엔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사람. 그 때문에 누구보다 힘들고 신음했을 법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런 사자후와 같은 일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성은 마치, 저들이 여름날 밤을 귀찮게 하는 모기에게 살충제를 뿌리듯 우리 철거민을 모욕하고 모든 것을 빼앗는데도,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용서의 자격.

 

권력자들이 보기에 모기보다 못한 목숨 따위가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감히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들은 이 말이 가소롭게 들렸겠지만, 동료‘모기’의 한 명으로서 나는 큰 위안을 받았다. 저들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짓밟아도 결국엔 우리의 용서를 ‘받아야’하는 자들이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무너져 내리더라도 이와 같은 ‘도덕적 긍지’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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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봄이 다가오지만, 삶의 뿌리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끝내 승리하리라’라고 장담하듯 응원하는 말을 하기엔 용기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한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긍지를 잃지 말자고. 자신을 버리지 말자고. 우리가 몸을 누이는 집이 비록 초라해도, 그 안에서 새긴 당신들의 삶의 역사는 매 순간 남김없이 감동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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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학 세미나 발제문 (2013.01.30) - 장애여성의 성.

주제는 “장애여성의 성”인데, 발제 내용은 막 산으로 가는 이상한 발제문.

발제자 : 금철

 

 

(주 텍스트인 <장애여성공감 10년 활동사> 글은 요약 발제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이미 요약이 잘 되어 있는 글이라, 발제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김원영씨의 글을 함께 읽으며 느낀 생각들을 그냥 주저리 주저리 읊어보겠습니다.)

 

잡설하고

 

며칠 전, 대학 동아리 후배들을 만났습니다. 그 동아리 이름은 ‘노동문제연구회’이긴 한데, 이런저런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데모를 나가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동아리입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장애인 집회, 적어도 420때 만큼은 연대하는 그런 동아리입니다. 그 동아리에 작년에 중증장애인 새내기(S군)가 들어왔더랍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언어장애가 심해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 할 때는 꼭 노트북을 이용해야만 하는 정도인 그런 친구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제 3학년에 올라가는 후배 한 명이 저한테 카톡을 보내서는 “동아리 전체에서 장애인이 같이 동아리 활동하는 것에 대해 고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아서” 책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데 도움받을 만한 책이 뭐 없겠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래서 일단 오늘 이야기하는 김원영씨의 책을 추천해 줬습니다(저는 이 책이 장애인 개인의 욕망의 서사를 이해하고 공동체가 이를 함께 고민하게 만드는데 더 없이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책 몇 권 읽는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닐테고, 또 한편으로는 내가 몇 년간 활동하기도 했던 동아리에서 장애인 학우와 함께하는데 있어서 후배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했습니다. 제가 뭐 대단한 도움이 될거라 생각해서 만난게 아니라, 후배들이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해서, 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만나자고 했지요.

 

후배 두 명과 거의 2시간 반동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야기 중에 제가 흥미롭게 들었던 주제는 술과 귀가와 관련된 것이었는데요. 동아리 활동을 하다보면 밤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고는 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S군이 항상 고민거리가 된답니다. 그런데 S군이 늦게까지 뒷풀이를 하다가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 되어도 집에 갈 생각도 안하고 콜택시도 안부르고 있어서, “너 집에 어떻게 가려고 그러냐?” 그래도 대답을 안하고 술만 마시더라는 겁니다. 한번은 지하철이 끊길 시간이 다 되어서 S군과 급하게 지하철을 탔는데, 이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을 지나는 2호선 막차가 끊겨버린 상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탄 선배가 급한 마음에 S군의 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는데, 부모님의 대답은 “S는 집에 알아서 잘 온다”는 것이었답니다. (S군의 집은 마포구청 쪽입니다) 그리고 S군은 잠깐 절망한 표정을 보이다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 한 시간 넘게 전동을 굴려 집에 갔답니다.

이것 뿐만 아니라 동아리 MT를 가서는 대책 없이 술을 너무 마시고는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인 노트북에 술을 쏟아서 노트북을 고장을 낸다던지, 활동보조인이 오후 쯤이면 퇴근해 버려 그 이후 시간의 활보는 동아리 내의 선배·동기들의 부담이 되어버린다던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만 딱히 뭐라고 답을 해주기 난감한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한테 ‘장애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의 윤리’를 어떻게 세워야 겠냐는, 초 대박 난감한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동아리 내에서 어떤 친구는 ‘여성주의를 고민하기 위해 여성주체를 세우듯이 장애주체를 세워야 하지 않냐’라는 의견도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의견에 대해 ‘그 의견은 의도야 어찌되었건 장애주체한테 활보 전담시키는게 되지 않겠냐’라는 의문을 던졌고, 역으로 차라리 학교에 장애학생 활동보조를 근로장학생으로 쓸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이 온갖 문제들이 활동보조 부족의 문제에서 생기는 일이니, 부족한 활동보조 시간의 문제를 학습권의 차원에서 학교에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거 아니냐는 어찌보면 너무 재미없고 정해진 대답을 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야기를 나누던 한 후배의 표정이 급 실망 모드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는 다른데서도 많이 들어봤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제도의 변화가 문제를 해결해 줄거라는 그런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동아리라는 공동체 내에서 S군과 관계맺는 방식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라는... 그런 고민이었다라면서... 이를테면 S군이 옛날 옛적 어느 산골짜기 마을에서 태어나서 지금과 같은 사회 제도나 조건들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라면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그런 상황에서라면 이 동아리는 어떤 공동체의 윤리를 가져야 할까... 그런 문제였다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활동보조의 확충’이라는 것이 실제 도입되는게 쉽겠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한편으로는 그렇게 외부의 제도적 대안을 바라는 것이 공동체의 책임을 외면하는, 심리적으로 손 쉬운 방안을 찾는 것 아니냐는.... 그런 반론으로 들렸습니다.

 

이 때부터 아, 내가 얘네들을 괜히 만났구나 하는 후회도 들고, 지금부터 말 잘못했다가는 선배로서 이미지만 안 좋아지겠구나 싶어서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막 그랬습니다. 어쨌든 그 상황에서 제가 막 짱구를 굴려서 해 준 대답은 뭐 이런 거였는데 잘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S가 옛날 옛적 어느 산골마을에서 태어났다면, 일찍 죽었거나 살아 남았다면 그 불편한 몸으로 살아갈 그 만의 테크닉을 체득해서 살아갔을 거야. 중요한 것은 지하철에 엘리베이터도 있고 활동보조인도 있는 조건에 있는, 서울에서 살아가고 있는 S의 삶이야. 활동보조인이 퇴근하고 난 뒤에 동아리 뒷풀이에 참석한 S의 속 마음은 어땠을까? 잘은 모르지만 상상해 보자면 이런게 아닐까? ‘지하철 막차 시간이 다가온다. 저걸 놓치면 집에 못 가는데... 근데 내가 그렇게 가고 난 뒤에도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거나 더 늦게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다른 선배‧동기들은 내가 가고 난 뒤에 자기들끼리 더 많이 놀 수 있겠지? 그러면 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만 소외되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여러 차례 멘붕이 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일부러 더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테고... 만약 이런 상상이 어느정도 맞는 것이라면, 이런 소외감을 해소해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동체의 윤리? 좋은 얘기이긴 한데, 그것을 동아리 내의 문제로만 한정해서 풀려고 한다면 동아리의 다른 선배‧동기들끼리 S에 대한 동정을 공유하고 봉사를 분담하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나는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동아리 바깥으로 터뜨려 버렸으면 좋겠어. 비장애인 친구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누리고 있는 그 자유를, 왜 S는 누릴 수 없는 건지, 그 억눌렸던 욕망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로 이야기 하자는 거지. 그래서 실제로 학교에서 근로장학생으로 활동보조인을 고용하는 제도를 도입해 주면 더욱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더 많지 않을까? 이러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S는 자기 삶을 서사화 할, 기존과는 다른 기회를 얻게 될테고, 그러면서 자신과 비슷한 조건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되어 공감과 연대가 형성될 수도 있을거야. 나는 그렇게 S 스스로가 (그리고 주변의 친구들이)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사회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다른 어디도 아니고 우리 동아리(=운동권 동아리) 같은데서만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

 

이런 말을 주저리 주저리 떠들고 나와서, 계속 김원영씨의 책 5장 제목에 실린 단어, ‘야한 장애인’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우리가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지향했던 ‘나쁜 장애인’이라는 모델이, 굳이 비유를 들자면 교장쌤이 쇠사슬 묶고 경찰한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면, ‘야한 장애인’은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야한 장애인’ 하니까 제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처음으로 활보하러 갔던 이음여행에서 “나는 자유인이야!”라고 외치며 소주-맥주-막걸리를 섞어마시던 최○○ 형, 며칠 전 야학에서 뒷풀이 술자리가 갑자기 노래방 분위기로 변했을 때 ‘마지막 한 곡만 더’를 10번 외치며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노래를 부르던 이○○ 형, 어느 날 갑자기 진한 화장을 하고 나타난 김○○ 누나, 그리고 핸드폰으로 야동보던 몇몇 야학 학생들...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제 후배들에게 (그리고 야학에 몸담고 있는 저에게도) 필요한 것은 이런 ‘야한 장애인’들의 ‘야(野)’한 욕망에 더 익숙해지고 (더 나아가 이런 야한 욕망들을 교류하고(!!?잉?!!)), 이것을 사회화시켜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쇠사슬 묶고 투쟁하는 ‘나쁜 장애인’들이 해야 할 일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구요. 그러다 이번에 김원영씨의 책을 다시 읽다가 아래 구절에 눈에 꽂혔습니다.

 

“우리는 손상된 몸의 어디까지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장애’이며, 어디까지가 손쓸 수 없는 ‘하늘의 불운’인지는 완전히 알 수 없고, 또 최악의 경우엔 손상된 몸의 고통과 욕망을 자유롭게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들조차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칸트가 말하는 자유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추하고 소외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의 욕망을 차단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욕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218쪽)

 

 

2. 각설하고

 

‘손상된 몸의 고통과 욕망을 자유롭게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도 ‘그러한 욕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라는 이 말을, 만약 소설책 속에서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잠깐 해 봅니다. 그러면 좀 더 거리감을 두고, 삶에 대한 무궁한 가능성을 꿈꾸는 결의의 문장으로,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나 이것은 그런 픽션 속에서가 아니라, 실제 장애인으로서 살아가며 ‘섹시해’ 보이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한 청년의 고백이니 사실 너무 어렵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애인의 성적 욕망에 가장 솔직하게 직면한 시도가, 어쩌면 <핑크 팰리스>같은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이 다큐의 문제점은 공감의 텍스트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장애인의 섹스를 ‘선택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섹스는 권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김원영이 소개하는 만화 <리얼>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중증장애인 ‘야마’의 대사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지점입니다(“니들 섹스는 했냐? 나는 섹스가 뭔지도 모르고 죽게 생겼다.” /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해보고 싶다. 섹스! 이런 나한테 뭘 어쩌라고! 팔을 들어 올리고 싶어도 들지를 못해. 이건 내 몸뚱이가 아니야!”). 만일 야마에게 섹스가 권리라면,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야마의 권리 실현을 위해서 ‘의무’를 수행해야만 합니다.

실제 장애인 성서비스가 시행되고 있는 노르웨이에서는 이에 대한 다양한 논쟁들이 있고, 북유럽 현지 탐방을 통해 이 문제를 검토한 장애여성공감의 보고서1)에는 이런 논쟁지점들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존중받을 권리는 있지만 사랑받을 권리는 없다”는 말로 성서비스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는 오슬로 대학 잉거마리 교수는, 장애인이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프라이버시나 독립생활과 관련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성적만족을 위한 권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적만족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는 ‘만족’의 내용이 개인마다 다르고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저는 “존중받을 권리는 있지만 사랑받을 권리는 없다”는 말이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사랑이 상호간 육체적, 감정적 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면, 상대방의 만족도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일방향적인 성서비스가 갖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2)

 

“성노동이 성적만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계적이거나 강제된 활동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성구매자에게 당연하게 부여되는 ‘선택’과 ‘만족’이 성판매여성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발상은, 역으로 이제껏 ‘선택’과 ‘성족만족’이라는 것이 누구와 어떤 관계를 중심으로 허용되어 왔는가를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구매력 있는 비장애 남성을 중심으로 섹슈얼리티의 위계와 차별이 작동하는 현실과, 이 속에서 성판매여성, 장애인 등 광범위한 성적 ‘소수자’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데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제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겠다.”

 

말하자면, <핑크 팰리스>와 같은 시도는 결혼과 성매매를 두 축으로 하는 이성애적 가부장제에서 비장애 남성이 갖는 지위를 장애 남성도 갖고자 하는 것인데, 저는 이것이 매우 협소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일방적인 봉사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게 꼭 사람일 필요가 있을까? 인간적인 관계망이 삭제된 이런 섹스봉사라면 고성능 자위 도구로 대체해도 무방한 것 아닌가? 물론 아무리 최첨단 자위 도구가 나와도 장애-비장애 남성의 성적 불만족 상태는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이문열의 <아가>의 경우도 이런 남성의 성적 판타지(성기결합이 사랑의 행위라고 인식하는 것!?)를 집단적으로, 또 장애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왜곡된 성적 판타지의 확장이 장애남성의 성적 욕망 재생산을 포획했다고 할까,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방송, 광고 등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그런 판타지들....)

 

오히려 우리가 요구할(?!!!) 것은 성적 불만족 상태를 해소할 ‘섹스’의 권리(또는 사랑‘받을’ 권리)가 아니라, 관계로서의 ‘사랑’을 나눌, ‘사랑’을 할, 권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지점에 대해 우리 사회가 참 무감각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제작년 쯤에 장애인야학에서 공부하는 장애인들의 현실에 대해 취재하겠다고 KBS <사랑의 가족>에서 여러 야학을 취재하고, 전장야협 실무자인 저의 인터뷰를 따 갔었는데, 제가 인터뷰 하면서 야학의 긍정적 성과의 하나로 ‘야학에서 함께 공부하시다가 결혼하시는 분들도 있다’라고 하니까, 카메라를 들고 있던 방송국 직원이 어이없어 하면서 그런 얘기는 빼라고 했더랍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장애인의 학습권, 뭐 이런 얘기 하고 있는데 웬 결혼 타령이냐는 반응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랑을 통해 가정을 구성할 능력이 없는 장애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깃거리라고 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잉거마리 교수의 말처럼 ‘성적 만족’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르고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구할 것은 획일화된 방식의 성기결합 권리가 아니라, 에로스적 관계를 맺고 만남을 유지할 정당한 ‘사적 공간’(물리적이고 또 사회적인)을 확보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3)

 

 

3.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문제.

 

저는 김원영씨의 책이 인상 깊었던 것이, 한 명의 장애남성으로 살아오면서 자신이 느꼈던 정체성의 불안, 욕망 (특히 섹시해 보이고 싶다는!)을 이야기하면서도, <핑크 팰리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해 나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자신의 장애를 온전히 긍정할 수 없는 매 순간 순간 마다 그가 택했던 ‘쿨’해지기의 방식을 내려놓고, 욕망을 직면하여 ‘핫’해질 수 있었던 과정이 감동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순간에 대한 묘사를 다시 한번 옮겨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물었을 때 H는 내 다리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내 다리가 가진 오랜 투병의 기록, 고통의 경험, 질병의 흔적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면 내 다리는 결코 에로틱할 수 없다. 사랑은 불가능하다. 희생이나 동정은 가능할지라도. 그곳은 우리 둘 이외에는 누구의 시선도 없는, 오로지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장애인과의 에로스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침투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말려 들어갔다. 장애인의 몸에 씌워져 있던 동정, 시혜, 고통, 비극의 시선들이 괄호 안으로 들어갔다. 에로스는 평등한 인간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 누군가가 상대를 지배한다면, 또는 누군가가 상대를 도와야 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내가 다리를 내보인 순간, 그동안 내가 어설프게 시도했던 지적인 동반자인 척, 쿨한 척, 숭고한 관계인 척했던 행위는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무성적 존재가 아니었다. 내 몸은 자유롭게 부유했다. 내 다리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섹시함을 뽐냈다.섬세한 감각들이 날을 세운 채, 그러나 결코 날카롭지 않게 내 자의식을 쓰다듬었다. 우리를 잇는 어떤 감정의 선들이 ‘자연적 질서’를 예리하게 걷어냈다. 상상과 몰입. 2평방미터쯤 되는 목성의 위성을 타고 지구에서 진화한 온갖 질서가 ”병신 육갑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떠올릴 한치의 여지도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나는 그녀의 다리에 키스했다.”

 

‘에로스는 평등한 인간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는 말은, 성적자원봉사와 같은 방식으로 실현할 수 없는 관계맺음의 전혀 다른 경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책을 호식이형과 함께 읽고 나서 책을 덮었을 때, 호식이형은 재밌기는 한데 불편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불편한 감정을 우리는 김원영의 친구 정훈이의 발언과 같은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형 정도의 장애니까 그런 거야.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니고, 서울대도 다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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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애여성공감 북유럽 <장애인 성서비스> 연수 리포트」, 『여/성이론』 통권 24호 (2011년 전장연 활동가대회 자료집에도 실림)

2) 장애여성공감, 위와 같은 글.

3) 그런 면에서 시설 내에서 연애 못하게 하는 게, 이 문제와 관련해 가장 시급히 다뤄져야 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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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1탄. 읽고서 재미난 부분 중심으로 정리해 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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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의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 대한 감상

 

0. 이거 왜 쓰는지 말해 봐.

 

첫 번째 세미나 시간에 어쩌다보니 ‘장애개성론’, ‘장애문화론’ 과 같은 개념에 대한 토론이 오고갔다. 이와 함께 장애의 모든 문제를 사회적 차별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장애인 개인 또는 그 집단만이 갖는 불편함과 삶의 장벽 들은 어쩔 것이냐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왔다.

나는 그 시간에 산재 장애인이신 우리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며, 실제로 사회적 차별로 환원할 수 없는 그런 불편함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걸 (장애인운동의 입장에서) 어쩔 수 있겠냐라는 의문을 던졌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나의 이런 발언이 너무 비겁하게 이 쟁점에 대해 회피하려는 태도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김원영씨의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이 문제와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갈등 지점을 드러나 보이게 해 준다는 측면에서 아주 의미있는 독서 소재였다.

이 책의 내용을 다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고, 이 책에서 누가봐도 가장 센세이션 하게 느낄 법한 5장 “나는 ‘야한’ 장애인이고 싶다”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한다.

 

저자 김원영에 대한 소개 : 골형성부전증으로 지체1급 장애인이 되었고, 열다섯 살까지 병원과 집을 오가는 생활만을 해 옴. 이후 검정고시를 통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재활학교 및 일반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 재활학교에서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려는 노력은 해당학교의 입학 거부로 영영 꿈이 되어버릴 뻔 했지만, 봉사활동을 하러 오던 대학생을 통해 알게 된 장애인자립생활운동가들의 도움으로 일반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 있었음. 대학 진학 후에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 활동을 통해 장애 대학생의 권리 보장을 위한 활동을 해 옴. 현재 서울대학교 로스쿨 재학 중.

 

 

1. ‘장애를 정체성으로 긍정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라는 물음 앞에서.

 

“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 활동을 하면서, 장애를 가진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 독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는 자신을 ‘장애인’이라 당당히 칭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장애인 친구들에게도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알려주고, 우리가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한 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달리 나는 여전히 질병을 가진 몸의 운명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과 싸워야 했다.”

 

“그런 의무의 진원지는 바로 내 몸이었다. (...) 나는 자신이 없었다. 장애인 인권 문제에 대한 거창하고 추상적인 담론을 떠들어대는 동안에도 내 신체는 약하고 볼품없었다. 나는 직립보행에 에로틱한 매력을 느낀다. 어깨의 움직임 그리고 팔과 다리의 교차. 나는 휠체어를 1.8초당 한 번씩 미는 것이 가장 섹시하다고 주장하고는 하지만 사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170센티미터가 넘는 세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데이트,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에는 책을 들고 거니는 캠퍼스. 나는 어느 순간 걷고 싶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의 팀장이었다. 장애는 하나의 정체성이며, 손상된 몸은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말해야만 했다. 그런 내가 ”사실 난 걷고 싶어요“라고 말한다는 것은 구차하고 비굴한 고백처럼 느껴졌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좀 놀랐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예상 가능한 욕망의 표현이지 않은가. 근데 왜 나는 놀랐을까? 어쩌면 ‘장애’라는 개념은 사회구조적 차별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차별을 깨는 것을 통해 불합리한 ‘장애’개념을 깰 수 있다는 발언 구조 속에서 이런 욕망의 발화 자체를 억압해 왔던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런 욕망은 저상버스가 100% 도입되고, 활동보조가 24시간 이상 보장된다고 해도 해결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욕망이 충족되지 않는 문제를 모종의 ‘억압’의 결과라고 부르는 것도 망설여지지만, 그 배경에는 인간 몸의 ‘탁월함’에 대한 서열화가 깔려 있기 때문에 그저 외면하는 것도 올바른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어쩌지? -_-;;

 

저자는 이어서 다른 장애인 친구들의 몸이 그 의문의 진원지임을 밝힌다. 재활원 동기였던 정훈이는 항상 쾌활하고 운동도 공부도 잘했지만, 근육장애가 점차 심해져 결국 휠체어를 혼자 밀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다. 결국 그는 스물 셋의 나이에 죽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저자는 정훈이를 찾아가 자립생활운동을 소개하고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우리에겐 활동보조인을 지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집에만 있을 이유가 없다, 당당하게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네 근육 장애, 그 자체가 너야, 인마. 너 중증인 거 내가 아는데, 그래도 밖으로 나와라. 다 살 길이 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입을 연 정훈이의 대답. “그건 형 정도의 장애니까 그런 거야. 혼자 휠체어도 밀고 다니고, 서울대도 다니잖아.”

 

정말 장애를 온전히 긍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저자는 혼란스럽다. 그렇다. 솔직히 아무리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쳐대서 자기 긍정을 해대려고 해도, 결국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인 것인데, 눈 앞의 친구에게 자신의 한 마디를 알아듣게 하는데 온 몸을 다 써도 1분 이상 소요되는 상황에서 자기 긍정이 말처러 쉬울 수 있을까. 나도 자신이 없어진다.

 

저자가 소개하는 만화 <슬램덩크>의 작가가 썼다는 또 다른 만화 <리얼>의 한 장면도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장애인 농구 국가대표가 된 경증의 장애인(키요하루)이 중증 장애인 친구(야마)에게 찾아가 농구팀의 소식을 전할 때, 친구가 한 말은 이랬다. “나한테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냐?” / “니들 섹스는 했냐? 나는 섹스가 뭔지도 모르고 죽게 생겼다.” /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해보고 싶다. 섹스! 이런 나한테 뭘 어쩌라고! 팔을 들어 올리고 싶어도 들지를 못해. 이건 내 몸뚱이가 아니야!”

 

그리고 저자는 작은 챕터 하나를 마무리 지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키요하루 정도의 장애인이라면 의족을 달고 리프트가 달린 버스를 타고 ‘정상 세계의 거주민’으로 편입될 수 있을지 모른다. 장애인 운동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야마와 정훈이에게 더 길고 건강한 생명을 보장하거나 나와 같은 장애인에게 아름다운 사랑과 활력 있는 대학 생활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져야 할 운명,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하늘의 영역’인 것처럼 보였다.”

 

 

2. 쿨해지는 것을 관두기.

 

이렇게 장애를 온전히 긍정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보이는 것도 싫은 딜레마 앞에서, 저자가 택한 방식은 ‘쿨’해지는 것이었다. 계단 앞에서 누군가에게 들어올려질 때, 자신을 돕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그저 쿨하게 한마디 한다. “야, 이거 완전 왕이 된 기분인데?”

그런 쿨함이 (사실상) ‘강요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바로 sexuality에 있다. 저자는 대학에 입학한 후 자주 만났던 H와 깊은 정서적 교감까지 나누게 되었으나, “난 너에게 속물적인 감정 따위는 없어. 오직 나이에 비해 똑똑하고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너와 지적인 교류를 하고 싶을 뿐이야.”라는 듯 행동해야 했다.

 

그러나 우연히 H와 늦게까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의 방에 함께 들어오게 된 저자는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말을 꺼내 본다.

 

“저... 내 다리를 좀 봐 줄래?”

 

온갖 수술자국이 남아 있어, 어머니 말고는 어떤 여성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다리. 절대 섹시해 보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다리를 드러내 보이는 순간에 대한 그의 묘사는, 솔직히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말로 요약하며 담으려는 이상한 짓은 그만두겠다. 그냥 옮겨 적으련다.

 

“내가 물었을 때 H는 내 다리를 아무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내 다리가 가진 오랜 투병의 기록, 고통의 경험, 질병의 흔적을 바라보는 게 아니었다. 만약 그런 것들이 드러난다면 내 다리는 결코 에로틱할 수 없다. 사랑은 불가능하다. 희생이나 동정은 가능할지라도. 그곳은 우리 둘 이외에는 누구의 시선도 없는, 오로지 우리만의 공간이었다. 장애인과의 에로스적 관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이 침투해 들어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말려 들어갔다. 장애인의 몸에 씌워져 있던 동정, 시혜, 고통, 비극의 시선들이 괄호 안으로 들어갔다. 에로스는 평등한 인간의 관계에서만 출현한다. 누군가가 상대를 지배한다면, 또는 누군가가 상대를 도와야 한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내가 다리를 내보인 순간, 그동안 내가 어설프게 시도했던 지적인 동반자인 척, 쿨한 척, 숭고한 관계인 척했던 행위는 끝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무성적 존재가 아니었다. 내 몸은 자유롭게 부유했다. 내 다리는 타인의 시선 앞에서 섹시함을 뽐냈다. 섬세한 감각들이 날을 세운 채, 그러나 결코 날카롭지 않게 내 자의식을 쓰다듬었다. 우리를 잇는 어떤 감정의 선들이 ‘자연적 질서’를 예리하게 걷어냈다. 상상과 몰입. 2평방미터쯤 되는 목성의 위성을 타고 지구에서 진화한 온갖 질서가 ”병신 육갑한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떠올릴 한치의 여지도 없는 시간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다. 나는 그녀의 다리에 키스했다.”

 

 

3. 그래도 어렵다.

 

그렇게, 김원영이라는 한 장애인은 쿨해지는 것을 관두고, ‘핫’한 장애인이 되었다. 하늘이 내려준 불운에 걸려 장애인으로 살게 된 사람들은 오로지 착하게 살아야한다고,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가로질렀다. 이 횡단은 우리가 접해왔던 (장애인의 사회로의 출현을 촉발한) 장애인운동의 문제의식과 닮았으면서도 조금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고통과 욕망의 흔적들을 직시했다. 그래서 사실은 자신의 몸이 아주 유약하다는 것, 그리고 내 몸이 자유와 함께 사랑을 갈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도 아직까진 어렵다. 그의 삶을 따라, 그의 욕망이 알을 깨고 내 눈 앞에 튀어나온 이 날것의 모습을 보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훈이의 말처럼, 그가 ‘핫’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혼자서 휠체어도 밀고 서울대도 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마도 그가 ‘핫’하고자 시도하기 전에는, 이 조차 불가능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계속 병원에 다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기도원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말한다. 그 때 김원영의 삶은 말 그대로 “하늘이 준 불운”이었다. 그러나 김원영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공동의 노력으로 통제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불운”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우리는 손상된 몸의 어디까지가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장애’이며, 어디까지가 손쓸 수 없는 ‘하늘의 불운’인지는 완전히 알 수 없고, 또 최악의 경우엔 손상된 몸의 고통과 욕망을 자유롭게 하기란 아예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들조차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칸트가 말하는 자유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추하고 소외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의 욕망을 차단하는 것이 ‘자연적 질서’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욕망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하늘의 불운’을 역행하는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자유를 갈망하는 ‘비정상’ 신체들의 삶을 서사화하고 핫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무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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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발췌독.

시인 고은이 소설로 옮겨 쓴, <화엄경>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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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아무데도 없어. 그러나 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있어. 진리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흐르는 물이나 그대와 같은 길손의 마음에 들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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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힌두 아유타의 고대시인 기나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아무리 황량한 곳이 있다 할지라도 서쪽 구도국 광야에 견줄 수 없는도다.

그곳은 모든 신들의 저주로 이루어진 곳

풀이 사나워서 바람을 잘라버리고 바위와 흙이 사나워서

쓰러진 자의 뼈다귀를 없애버리나니

갈지어다, 내 아들아

광야를 알고 싶거든 갈지어다

어찌하여 눈물과 여인의 노래로

세계를 안다 하겠느냐

광야를 알고 세계를 알고 싶거든

말과 낙타를 버리고 혼자 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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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늙고 이름 없는 사문(沙門) 농업에 종사하는 사문이다. 농업은 하루 이틀에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1년 아니 10년이 지나야 한다. 내가 딸과 헤어진 뒤 15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을 이곳에서 나 혼자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왔다. 나에게 진리가 있다면 그것뿐이다.”

선재는 그의 긴 여행을 당분간 멈추기로 했다.

한 평범한 늙은 농부가 된 선현 비구에게는 반드시 깊이 감추어진 지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장다리꽃 한 개거나 무 한 개라 하더라도 그 진리는 온갖 세계의 관념을 떠나서 하나의 생생한 진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루도 쉬는 일이 없는 산속의 외로운 농부야말로 어린 나그네가 함부로 길을 떠나지 않게 하는 힘이 되어 깊은 뿌리처럼 뻗어나고 있었다.

 

(...)

 

선재는 그 산속에서 곡식의 씨를 뿌려서 그것을 해가 짧은 건기(乾期)에 거둬들이는 동안 머물렀다. 그 적막한 농업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늙은 비구로부터 선재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우주의 법칙이 깃들여져 그 사람과 우주가 어린아이와 어린아이 사이의 단순한 말 <나하고 놀자>와 순수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꿈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 박히는 어떤 놀라운 빛의 칼날처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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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를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의 미래를 안다지만

작은 배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작은 배

작은 배는 모든 것을 아는 강물에 떠내려갈 뿐이라네

작은 배여,

아는 것은 강물에 던져주고

나의 작은 배는 오직 강물에 떠내려가네.

 

안다는 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은 강물에 던져버리고 아무것도 몰느는 태초의 공(空)으로 돌아가서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선재에게 새로운 기쁨이 강 위의 여행에 찾아왔다. 강의 어려 물결이 물결 자체를 깨뜨리면서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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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 일부 발췌독


 

 

 

 

「스파이크」

 

1931년 4월 문학잡지 <뉴 아델피>에 게재. 문학적인 에세이로선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글이다.사리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의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민바닥 생활을 하며 작가 수업을 하다지면에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이 글은 나중에 줄이고 고쳐져 그의 첫 책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파이크’는 구빈원에 딸린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인데, 간결한 번역어가 마땅찮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기 위해 본래 발음대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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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산한 방에서 부랑자들 대부분은 연이어 10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따분함이야말로 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자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거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無爲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 15-16pp

 

 

 

우리는 더돌이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부랑자를 하루 14시간씩 스파이크에 있도록 하고, 나머지 10시간은 길을 걸으며 경찰을 피해 다니게 하는 체제를 비판했다. 그는 또 자기 사례, 즉 3파운드어치의 연장 세트가 없어 6개월 동안 생활보호 대상자 생활을 해야 했던 얘기도 해주었다. 말이 되는 일이냐고 그는 말했다.

나는 구빈원 부엌에서 버려지는 음식쓰레기 얘기를 해주고 내 생각이 어떤지를 말해주었다. 내 말에 그는 당장 어조가 바뀌었다. 나는 내가 모든 영국 노동자 속에 잠들어 있는 주인 근성을 자극한 걸 알았다. 비록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굶주려온 처지이지만, 그는 음식을 부랑자에게 주지 않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바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제법 엄하게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요.” 그가 말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떼어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여기 이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려고 안 하지. 다들 그래서 저 골이 된 거라니까. 그런 사람들 격려해줄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며 반대론을 펴려고 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런 부랑자들 동정할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저 사람들을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하고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것도 없고. 다 쓰레기라니까, 쓰레기.”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마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8~19pp

 

 

 

「교수형」

 

1931년 8월 <뉴 아델피>지에 게재. 식민지 버마의 경찰 간부로 있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오웰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스케치가 돋보이는 유명한 에세이 중 하나다. 오웰은 같은 해 가을에 첫 소설 『버마 시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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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교수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간수 둘은 죄수 양쪽에서 총을 어깨에 걸고 행진하고, 다른 둘은 뒤에 바짝 붙어 팔과 어깨를 미는 듯 떠받치는 듯 잡고 걸었다. 치안판사 등 나머지 우리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10야드쯤 갔을까, 아무 명령도 주의도 없이 갑자기 행진이 딱 멈춰버렸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안마당에 떡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우리들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며 연이 세차게 짖어대더니, 많은 인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게 너무 반갑다는 듯 온몸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우리 주위를 펄쩍 펄쩍 뛰어다녔다. 에어데일과 떠돌이 잡종개가 섞인 덩치 크고 털이 긴 개였다. 녀석은 한동안 우리 주변을 껑충껑충 돌다가 누가 제지하디고 전에 잡가지 죄수에게 달려들어 펄쩍 뛰어오르더니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놀라 개를 미처 붙들 생각도 못하고 아연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글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운동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뒷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4~26pp

 

 

 

「코끼리를 쏘다」

 

1936년 가을 <뉴 라이팅>지에 게재. 「교수형」과 더불어 버마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며, 사후에 출간된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1936년은 오웰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해였다. 같은 해 6월에 결혼한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게를 하고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 열중했는데, 1월부터 3월가지는 한 진보단체의 의뢰를 받아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취재했고, 12월에는 이 르포 원고를 완정하자마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떠났다. 이 원고는 오웰이 스페인에서 싸우던 이듬해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발간되어 이전에 출간한 4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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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우회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본질을 (달리 말해 전제적인 지배의 진짜 동기를) 이전보다 더 잘 간파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내 다른 경찰서의 고참 경위가 내게 덜컥 전화를 하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와서 어떻게 좀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 조랑말에 올라타고 그곳을 향했다. 소총도 챙겼는데,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이라 코끼리를 잡기에는 너무 빈약했지만 그 소리는 위협용으로 쓸 만하다 싶었다. 도중에 여러 버마인들이 나를 지체시키며 코끼리의 소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야생 코끼리는 아니었고, ‘발정기’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길든 코끼리가 다 그렇듯 녀석은 ‘발정기’가 닥치지 묶여 있었는데, 전날 밤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었다. 발정난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조련사는 녀석을 잡으러 나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12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고, 아침에 녀석이 갑자기 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무기가 없는 버마인 주민들은 녀석이 나타나자 속수무책이었다. 녀석은 이미 누군가의 대나무 오두막을 부쉈고, 소 한 마리를 죽였으며, 과일 노점 몇 군데를 덮쳐 진열품들을 먹어 치웠다. 뿐만 아니라 시 당국의 쓰레기차와 마주쳤을 때 운전사가 뛰어내려 줄행랑을 치자 차를 뒤집어엎고는 마구 짓밟기도 했다.

(...)

나는 사망자를 보자마자 가까이 잇는 친구의 집으로 전령을 보내 코끼리용 소총을 빌ㄹ오도록 했다. 조랑말은 일찌감치 돌려보냈다. 녀석이 코끼리 냄새를 맡고 두려움에 미쳐 날뛰다 날 내동댕이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령은 몇 분 뒤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왔다. 그 사이 버마인 몇 사람이 우리한테 오더니 코끼리가 불과 몇백 야드 거리의 밭에 있다고 했다. 내가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실상 그 동네 인구 전체가 집에서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마즐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엇던 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 (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 자기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 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미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

나는 이미 길 위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리끼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시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를 손따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할 만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정기’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부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나는 소총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이미 그럴 것이라 알린 셈이었다.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2000명이 졸졸 따라오는 가운데 총을 들고 여기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버린다—그런 건 잇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중들이 날 비웃을 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하지만 난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코끼리가 정신이 팔린 할머니 같은 태도로 풀 다발을 제 무플에 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존재를 쏜다는 건 살인처럼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 나이에 나는 짐승을 죽이는 것에 대해 결벽적이진 않았지만, 코끼리는 쏘아본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아무튼 ‘큰’ 짐승을 죽인다는 건 언제나 더 불쾌한 일이다.)

(...)

나는 코끼리 가까이, 아마도 20야드 거리 이내까지는 다가가서 코끼리의 행동을 확인해야 했다. 코끼리가 덤벼들면 쏴야 할 것이고, 날 본체만체하면 조련사가 올 때까지 내버려둬도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나는 소총 사격 실력이 별로였고, 땅이 너무 질어서 밭에 들어가면 발이 쑥쑥 빠질 터였다. 그러니 코끼리가 덤벼들고 내가 맞히지 못하면, 나는 스팀롤러 밑에 깔린 두꺼비 신세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순간엗 ㅗ나는 내 목숨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뒤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는 노란 얼굴들만 의식하고 있었다. 그 많은 군중이 날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혼자 있었다면 느꼈을 법한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되기에 대개 두려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때 나한테 든 유일한 생각은 일이 잘못되면 2000명의 버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쫓기다 붙들려 짓밟혀서, 비탈 위에 있는 인도인처럼 이를 싱긋 드러낸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대안이 하나 있었다. 나는 탄약통을 탄창에 밀어넣고 길에 바로 엎드려 정조준하는 쪽을 택했다.

(...)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성이 크게 들리지도 않았고 반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명중했다는 뜻이었다). 대신에 군중이 좋아서 날뛰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표적에 닿기까지의 신간보다 짧은 순간이었을 테지만, 코끼리한테 알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코끼리는 움직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몸의 모든 선이 변해 있었다. 당장 쓰러지진 않았어도 총탄의 엄청난 충격에 마비가 된 듯, 느닷없는 일격에 몸이 오그라들고 엄청나게 늘어버린 느낌이었다. 꽤 오래 그 상태로 있더니(아마도 5초쯤 됐을 것이다) 코끼리는 결국 풀썩 무릎을 꿇었다. 입에선 침이 흘렀다. 너무나 노쇠한 기운이 코끼를 압도해버린 것 같았다. 수천 년은 산 존재가 아니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같은 자리에다 다시 총을 발사했다. 두 번째 일격에 코끼리는 쓰러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필사적으로 일어서더니 다리를 떨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거우 몸을 폈다. 나는 세 번째 탄알을 쏘았다. 이게 결정타였다. 코끼리의 온 몸이 흔들이며 마지막 남은 힘이 다리에서 빠져 나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코끼리는 쓰러지면서 잠시 다시 일어서는 듯 보였다. 뒷다리는 무너졌지만 코를 나무처럼 하늘로 뻗는 모습이 거대한 바위가 위로 솟구치는 듯했다. 코끼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트럼펫 소리 같은 울음을 토했다. 그러고는 배를 내 쪽으로 향하며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내가 엎드려 있는 땅까지 흔드는 듯했다.

나는 일어섰다. 버마인들은 이미 나를 지나쳐 진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코끼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분명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길게 그르렁거리며 헐떡일 때마다 거대하고 불룩한 옆구리가 고통스레 오르내렸다. 입은 헤벌려져 있어 옅은 분홍빛인 목구멍 깊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호흡은 더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이 있지 싶은 부분에 발사했다. 빨간 벨벳처럼 진한 패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다. 총을 맞을 때 몸을 꿈틀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호흡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숨소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움직임 힘도 죽을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그 목숨을 어서 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몹시 불쾌한 노릇이었다. 나는 내 작은 소총을 가져오라고 해서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다 한 발씩 쏘아넣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듯했다. 고통스러운 헐떡임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꾸준히 이어졌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버렸다. 죽기까지 반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버마인들은 내가 가기도 전부터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정오 무렵엔 코끼리가 거의 뼈만 남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그 후 코끼리 사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인은 몹시 화를 냈지만 인도인일 뿐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이었다. 미친 코끼리는 주인이 제대로 못 다스릴 경우 미친개처럼 죽어야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내가 옳았다고 했고, 젊은 사람들은 쿨리를 죽였다고 코끼리를 소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그 어떤 드라비다 쿨리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그 쿨리가 코끼리 때문에 죽은 걸 다행으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쏠 핑계가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시와 마이크」

 

1943년 가을에 집필해 1945년 3월 <뉴 색슨 팜플렛>지에 게재한 글. 이 글을 쓰던 무렵인 1943년 11월에 오웰은 2년 남짓한 BBC 라디오 프로듀서 생활을 접고, 좌파 주간지인 <트리뷰>지 문예 부문 편집장 일을 맡는다. 그리고 같은 때에 집필에 들어가 1944년 2월에 완성한 『동물농장』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정당하다 결국 1945년 8월에야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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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문학 방송 프로그램을 인도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주로 당대와 당대에 가장 가까운 영국 작가들의 시를 많이 방송했는데, 그런 작가들이란 예를 들면 엘리엇, 허버트 리드, 오든, 스펜더, 딜런 모머스, 헨리 트리스, 알렉스 컴포트, 로버트 브리지스, 에드먼드 블런든, D.H. 로렌스 같은 이들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나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나와 방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딱히 왜 이런 특정 프로그램을 시작했는지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인도의 특정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구성하는 테크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덧붙이고 싶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문학 방송은 인도의 대학생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소규모의 적대적인 그 청취자들은 영국의 선전운동이라 할 만한 다른 무엇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우리가 기껏해야 수천 명 이상의 청취자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진작부터 알려진 바였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방송에서 가능한 것보다 ‘고상’해도 되는 핑계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써먹은 방법 하나는 음악 속에 시를 앉히는 것이었다. 먼저 잠시 후에 이런저런 시를 방송할 것이라고 예고해준다. 이어서 음악을 1분 정도 틀어준 다음 페이드아웃하면서, 제목이든 뭐든 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시를 낭독한다. 그리고 음악을 다시 페이드인해서 1~2분 정도 계속 틀어준다. 이렇게 해서 5분 정도에 시 한 편을 음악과 함께 소개하는 것이다.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는 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음악을 이용하는 진정한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프로그램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편을 3분 분량의 뉴스 속보 속에 끼워넣으면서도 어쨌든 내 귀에는 크게 어색하지 않돌록 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방송을 하는 게 그저 청취자들에게만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하고서 매료되었다. 시를 방송하는 방법에 관한 한 영국에선 별달리 시도된 바가 거의 없으며,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크게 소리내어 릭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 앞에 앉음으로써(특히 그럴 일이 정기적으로 있을 대) 시인은 우리의 시대와 나라에서는 달리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자기 작품과 맺게 된다. 근대에 와서 시가 음악이나 구어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서정적이거나 수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나라라면 어디서나 일반인들이 시에 거부감을 갖는 게 당연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간극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틈이 계속해서 벌어져가고만 있으니, 시는 주로 인쇄된 형태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관념이 모호하과 ‘교묘함’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공감은 할지언정 방송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방송이 연설이나 강연과 다른 게 바로 이 점이다 .대중 연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 알 듯이, 연단 위에서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청중이 무엇에 반응하고 안 할지는 항상 몇 분 안에 분명해지며, 실제로 연사는 청중 가운데 제일 모자란다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발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도 ‘개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란을 떨어가며 환심을 사야 한다. 안 그러면 결과는 언제나 냉랭하고 당혹스런 분위기로 나타난다. 청중 앞에서 하는 ‘시 낭송’이 끔찍한 건, 청중 가운데 따분하거나 거의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단순히 채널을 돌림으로써 다른 데로 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제대로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어려움 때문이다. 극장의 관객은 선별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선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방송에 익숙해진 시인들이 마이크에 대고 시를 읽으며 청중이 보이는 데서라면 발휘할 수 없는 기량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하는 요소가 개입된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통해,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는 게 당혹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사람 대 사람의 정상적인 교류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시인에게 만들어줄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작품을 종이 위의 패턴보다는 ‘소리’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서 시와 일반인 간의 화해가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 화해는 전파를 수신하는 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발신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

아놀드 베넷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틀 속에서 개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미적인 개선이 사회 전반을 구원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장 미움 받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처지로부터 시를 구제하여 사람들이 음악에 베푸는 만큼의 관용만이라도 받도록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단, 그러자면 시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인기가 없는지를 질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일례로 나는 글을 쓰기 직전, BBC 9시 뉴스 바로 전에 늘 하는 두 코미디언의 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지막 3분을 남겨두고 한 코미디언이 갑자기 “잠시 좀 심각해지고 싶다”더니 국왕 폐하를 찬양하는 「멋쟁이 영국 신사」란 말도 안 되는 애국시를 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최악의 영웅시를 듣게 된 청취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면 BBC에 그런 짓을 즉각 중단하라는 분노의 편지들이 꽤 날아들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다수 대중이 ‘시’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을지언정 ‘운문’에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운율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면 어떤 노래나 익살5행시도 유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것은 시가 불가해성, 지적 허세, 그리고 남들 바쁜데 혼자만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단어 자체가 ‘하느님’이나 목사의 개목걸이(빳빳이 세운 칼라)같은 말처럼 나쁜 인상부터 심어주는 것이다. 시를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후천적인 억제를 완화시켜주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야유를 내뱉는 대신에 듣도록 해주는 문제다. 진정한 시를 다수 대중에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소개할 수 잇다면, 그것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드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화 역시 독점 자본 형성기에 처음 나왔고, 제작부터 소비 단계까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점점 더 관료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있는데, 관료의 목표란 결국 예술가를 망가뜨리는 것, 혹은 최소한 거세라도 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기만 하다면 전망은 암울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진행될 게 분명한 전체주의화는,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예견하기 어렵던 새로운 변화 덕분에 완화되고 있다.

 

 

 

 

 

「당신과 원자탄」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게재. 일본 원폭(8월 6일) 두 달여 뒤에 발표한 글이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글은, 원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1984』를 설정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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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가장 강력한 무기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시대는 폭정의 시대인 경향이 있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

여러 조짐으로 추측건대, 러시아는 아직 원자탄 제조의 비밀을 보유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수년 안에는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게 일치된 견해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몇 초 만에 수백만 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가공할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 가질 전망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은 전쟁이 점점 더 커지고 끔찍해짐에 따라 기계문명이 종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식의 다소 성급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만일 살아남은 강대국들이 서로에겐 절대 원자탄을 쓰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를(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다면?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쓰거나 쓴다는 위협을 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권력이 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들과 피억압 계급들의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는 것뿐이다.

(...)

지난 40~50년 동안 H.G.웰스씨 등은 인간이 무기로 자멸함에 따라 개미처럼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 인간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해왔다. 독일의 파괴된 도시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봄 직하다. 하지만 세계 전반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수십 년 동안의 흐름은 무질서가 아니라 노예제가 부활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만일 원자탄이 자전거나 자명종처럼 싸고 쉽게 만들 수 잇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야만으 ltl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단, 그랬다면 국가 주권과 고도로 집중화된 경찰국가의 시대도 끝났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지금 그래 보이듯 원자탄이 전함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귀하고 값진 물건이라면, ‘평화 아닌 평화’를 무한히 연장하는 대가로 대대적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실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잇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 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뒷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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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중에서 - 2012.2.19

"비문해에 스며 있는 폭력 가운데 하나는 읽고 쓰기를 금지 당한 이들의 의식과 표현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읽기를 한 것을 글로 써봄으로써 처음에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합니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연필, 빈 종이,... 글 쓰는데 필요한 백지를 챙겨서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과정이 사실은 내가 책상 근처에 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행동하거나 실천할 때 혹은 앎의 대상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이미 시작됩니다." (38-40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86쪽)

"실로 두려움은 하나의 권리이지만, 두려움을 교육하고, 두려움에 맞서며, 그것을 극복할 의무가 따릅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분석하고 두려움의 원인과 우리의 대응능력 간의 관계를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두려움을 감추는 것이 아니며, 두려움을 감추지 않는 것이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나는 분명한 어떤 한계선 안에서 내 자신과 내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의 행동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어떤 대화에서 거짓으로 자신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식은 인간적인 것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 당시 느끼는 그대로를 학습자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학습자들에게 말해줄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권리라는 것과 그 권리를 교육자들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두려워할 권리가 있듯이 교사들도 두려워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교육자들은 불사신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인간인 만큼 교육자들도 인간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싸울 능력이 없다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반문해봐야겠지만, 두려움을 겪는다는 사실 때문에 교사의 자질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초임 교사의 불안감까지도 알아채는 노련한 학생들 앞에서, 교실에서 첫날을 보내면서 교사가 겪는 두려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33-134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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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정치 풍자글

 

 

마우스랜드에서 통치자를 뽑았다. 1위는 생쥐가 아니라 검은 고양이었다. 생쥐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은 탓이다.

고양이는 쥐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쥐구멍은 고양이 발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한다.’거나 ‘생쥐는 너무 빨리 달려서는 안 된다.’는 등등.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갔다. 이번엔 흰 고양이가 당선됐다. 그래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흰털에 검은 반점이 있는 고양이로 갈아치웠지만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신세는 똑 같았다. 한 생쥐가 말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고양이들을 뽑는 거야?”

당연한 질문에 다른 생쥐들이 즉각 반응했다. “빨갱이다. 감옥에 잡아넣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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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강의 후기 - 2012.8.2

페이스북에 쓴 글. 수유너머R에서 진행한 함석헌 선생 사상에 대한 강의 (김경재 교수)

 

 

 

어제 함석헌 씨알사상 강의 곱씹기.
강의 막판쯤에 나는 "왜 함석헌에게 주체성의 형성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당함, 또는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왜 기쁨의 계기는 찾을 수 없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김경재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한참 곱씹어보니, 내 질문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질때부터 시작은 고통이었다. 어두운 자궁에서 빛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질 때, 어떤 아기라도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울음이 잦아들고 아기에게 고요한 잠이 찾아올 때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태초의 관계맺음도 수동적으로 당하여지는 고통에 관계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앞에서 성숙해져야만 기쁨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함께 울 수 있어야 공동의 기쁨에 참여 할 수 있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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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중에서 - 2012.9.2

지금 지구촌에는 꿀벌들이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꿀을 따러나간 벌들이 전자파로 인해 길을 잃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구촌에서 꿀벌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4년안에 대재앙이 인류사회에 덮쳐온다고 합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들의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로 인하여 사과, 포도, 쌀 등의 먹거리가 생산될 수 없습니다. 먹거리가 없는 인류의 삶이란 고통과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ᆞᆞᆞᆞ
사람으로 인하여 꿀벌들이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짐으로써 인류의 운명도 위험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현상만으로 보면 꿀벌이 나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그 실상은 꿀벌 자체가 바로 내 생명입니다.

- 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30p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도법
불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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