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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선생님의 "상처의 의미" - 2012.10.5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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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뒤 진행될 인권교육 워크샵에 이계삼 선생님을 강사로 섭외했다. 오늘 보내주신 자료집 글에, 예전에 읽었던 <상처의 의미>라는 글이 있다. 다시 읽더보니 또 새록새록 아름다운 문장들이 다가온다.

"아이들은 무수한 상처를 받으며 성장한다. 누구도 상처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존재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상처를 발생시킬 일체의 가능성을 거세한 무균질의 진공 상자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양육된 존재는 영혼 없는 물질덩어리일 뿐이며, 적당한 자극에 예측 가능한 크기로 반응하는 모르모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그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하여 예측 불가능한 폭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은 상처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교육이란 상처와 뒤엉켜 그것과 함께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난 시절 한국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에 완전히 무심했고, 이제는 이 상처가 폭력으로 분출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로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

이게 힐링이고, 멘토링이다. 상처를 감당할 자신 없으면 빠지는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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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 만드는 운동. - 2012.10.10.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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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쩌면 기적이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양양 하조대에 가서 장애인 숙박시설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그 차가운 시선들을 마주대하고 자정 넘어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돌아와 내일 기자회견 준비를 한다.

그런데 한 시간 쯤 뒤 수연 누님 아버님이 들어오신다. 양양에서 조금 늦게 출발하시고, 체험홈 분들 집까지 바래다 주고 야학으로 돌아오신거다. 내일 또 지방에 가셔야 하는데 일찍 일어나야 해서 집에 안가고 야학에서 주무신단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으니 운동이 만들어지는 거다. 이렇게까지 안한다고 누가 욕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 때문에 운동이 있다. 아무래도 이건 기적이다.

어떤이는 이걸 열정노동, 자기착취라는 말로 표현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나에겐 너무 아름다운 기적으로 보였다. 한 이틀 지나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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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선생님 강의 속기록을 정리하다가. - 2012.11.18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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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들었던 이계삼 선생님 강의 속기록을 정리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아래 문장에 밑줄과 별표 다섯개.

"교육이란 무엇일까? 묻는 다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대화를 하고, 상처를 같이 걸어가는 거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처를 없는거처럼 치부해서도 안되고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치유하는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을 누군가의 손에 떠맡기는 방식, 그러니까 시설, 정신과 의사, 병원, 사법체제, 경찰, 체벌, 전학 등.. 이런 것에 의존하잖아요. 사실 교육은 대화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같이 걸어가는 것, 그 과정이 다 인데... 그게 귀찮고 싫고, 심리학도 모르고 정신과도 모른다고 해서 다른사람에게 맡기는 게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탈이나 상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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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후보 단상 - 2012.11.26.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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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IzOCJRv5vXI

 

 

김소연 후보 동영상을 보고 내가 불편한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망설여졌는데, 대충 느낌이 올것 같다.
그 영상은 마치 노동자가 고통받고 있는 것은 저 먼 옛날부터 끔찍한 악마가 선하고 고결한 우리 민중들을 짓밟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선과 악의 저 분명한 이분법. 악마를 악마라고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영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악마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외침으로 마무리한다. 바로 "자본가 없는 세상". 이 엔딩 멘트를 보고 나는 정말 악악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더 센 표현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데, 그만 둘랜다.

이런 수준의 현실 인식으로 무슨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가 되나.

예전에 변영주 감독이 프레시안 인터뷰 했을 때, 농담 살짝 섞어서 자기는 진보신당이 집권하면 이민 갈 꺼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나는 이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에 마르크스 할애비가 환생해서 대선 출마 하겠다고 해도 안 뽑아 줄꺼다. 그냥 다시 저승으로 가시라고 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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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리반 사회 수업을 준비하며 - 2012.10.21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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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할 한소리반 사회 수업은 참, 떨린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목우경 누님이 앞으로 사회 수업 안들어 오겠다고 할까봐서...ㅠ.ㅠ 지난 시간에 시설 얘기를 한참 했더니, 끝날 때 목우경 누님이 말씀하셨다. 자기는 이렇게 어두운 얘기만 해서 싫다고. 그래서 좀 더 밝은 이야기를 담은 것들 공부해 보자고 했는데... 이걸 어쩐담, 이번에 준비한 이야기는 시설 얘기를 뺨치는 아우슈비츠 유대인 수용소 이야기인데... -_-;;

그러나 프레모 레비가 전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이야기에서 단지 비참함, 절망만을 보지 말아줬으면 하는 소망으로 수업을 준비했다. 지난시간에 시설 이야기 다루면서 보았던 고병권 쌤의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우리는 '포기에 맞서야 한다'. 프리모 레비가 수용소에서 만난 슈타...인라우프는 포기에 맞서는, 근대의 인간 개념에 맞서는 가장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내일, 이 문장을 함께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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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57-58쪽. 슈타인라우프의 말을 떠올리며.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 우리는 나막신을 질질 끌지 말고 몸을 똑바로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규율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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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동지 추모글 - 2012.10.29

페이스북에 썼음. - 201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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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같은 날은 일요일이지만, 정말 맘 놓고 쉬면 안될 것 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냥 그래버렸다. 9시쯤 일어나 밥먹고 다시 자서는 12시에 일어나 대학로에 갔다. 여기저기를 혼자 돌아다녔고, 오랜만에 창경궁에도 갔다.

현관까지 다섯 발짝의 거리를 두고도,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던 장애여성 한 분이 돌아가셨다. 작년 420 농성장에서 처음 뵈었던 분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었던 그 분과 나는 어색하게 앉아있었는데, 세련되...게 차려입은 국회TV 기자라는 사람이 다가왔다. 최근 지하철 승강장과 객차사이의 거리를 좁혀 휠체어 탑승객의 안전문제가 개선되었다고 하는데,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서 개선된 승강장에 탑승하는 모습을 찍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분은 장애인의 현실에 대한 고민도 없이 의도된 장면만 찍으려는 기자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기자는 똥 씹은 얼굴로 돌아갔다.

내가 기억하는 그 분에 대한 기억은 이것 뿐이다. 그래서 사실 상투적인 추모의 말 말고는 할 게 없는, 그런 사이다. 하지만 그 분이 홀로 있던 새벽, 죽음 직전에 맞이해야만 했던 그 공포의 상황은 내가 감히 그 감정들을 예측해보기도 두렵고, 또 감히 상상도 안되는 것이어서 어줍잖은 몇 마디 슬픔을 표하기도 망설여졌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실감하고, 그 실감하는 만큼 온전히 슬퍼한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온전하게 감정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겠냐만은... 그런데, 지난 이틀간 내 감정은, 함께했던 동지의 가슴 아픈 죽음에 이렇게 무덤덤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장례식장에서 있으면서도 나는 지난 몇 주간 나에게 밀려들었던 스트레스들로 여전히 곤두서 있었고, 게다가 함께 왔던 명학형님의 고장난 전동 휠체어와 몇 시간째 잡히지 않는 콜택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발길 가는대로 걷다가 창경궁까지 갔다. 그런데. 창경궁 안의 풍경은 너무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가끔 기분 나쁘지 않게 인상을 쓰게 하는 햇빛이 비치고, 아이들이 뛰어놀고, 연인들이 함께 걷는 이 풍경이... 왜 이렇게 이국적으로 느껴지는지... 아니 이국적이라기보다는 삶으로부터 분리된 채 방송국 촬영을 위해 연출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음소거 상태로 이 장면을 마주했기에 이질감은 더 했다.

사실, 진짜 삶의 현장에서는 며칠씩 곡기를 끊으며 항의하고, 송전탑 위에 몸을 묶은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람이 매달려 있고, 다섯 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면 유지할 수 있던 목숨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어처구니 없이 죽게되는데... 이 어색하고 황당한 생기발랄함이 넘치는 고궁의 풍경은 대체 뭐람... 30분 정도 산책을 하다 카톡으로 쏟아지는 장례식장 '리얼'한 소식과, 마치 픽션인것만 같은 고궁안의 풍경의 이질감을 견디다 못해 나와버렸다.

그리고 짜투리 시간을 떼우러 들어간 대학로 이음책방에서 우연히 김원영씨가 쓴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앉은 자리에서 책의 절반정도로 읽었다. '골형성부전증'을 앓고 있는 그는 재활학교에서 일반 고등학교로,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에 입학하기까지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치료되지는 않았지만, 치유되었다."

책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가 치유된 것은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끌어안고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구원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일반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도 있었던 순간에 만났던 자립생활운동가, 편의시설이 전무했던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마주한 좌절감을 함께 공감해준 장애인권연대사업팀 덕분이었다.

그 분의 삶도 이렇게 치유되었던 것일까.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그녀가 함께했던 장애인운동 속에서 치유되었길 바래본다.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10분에 살아남은 우리 중 어떤 누구도 함께 해 주지 못했지만, 그녀가 바랬던 세상을 위해서, 남은 이들이 그녀의 뜻과 의지를 붙잡고 함께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내일은 일정이 좀 빠듯해지긴 하겠지만, 3시에 한양대병원에서 있을 고 김주영 동지의 추모식에 다녀와야 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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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타령. - 2012.11.4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에 대한 후기에 이어지는 글.
 
페이스북에 썼음. - 201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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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 타령 하나 더.

얼마 전 사당동 판자촌 지역 주민 연구를 다룬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빈곤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속에서 1년전 또는 10년 전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빈곤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자기 역사를 잃어버리면서 자기 주체성도 상실해버리는 데에 있다.

오늘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에게 사줄 동화책을 사러 서점에 갔는데, 들어서는 입구에 진열 되어있는 책들 중에 인문학 어쩌구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정말 신발스럽게도 표지 문구가 "이시대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필요한 스펙은 인문학이...다" 뭐 이 따위 것이었다. 정말 꼴깝스럽지 않은가.

나에게 인문학은 무엇일까? 굳이 갖다 대자면 오장환 시인의 <나의 노래>같은 것이었으면 좋겠다.(사실 이 시인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데, 시와님께서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주셔서 알게 되었다)

"내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내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번 기꺼운 적도 없었다."

'기꺼운'이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느낌 상 '회피하다' 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만나는 인문학, 아니 그냥 공부는 이런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 슬픔, 내 과녁이 가리키는 방향이 단 한발짝도 회피함없이 '님'(이 님은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나 자신 일수도 있다)을 향하게 하는 것, '님'의 삶과 욕망, 그리고 그것들의 역사를 직시하게 하는 것.

그래서 꼭 자서전을 써보고 싶다. 아니, 한 10명정도 같이 모여서 1-2년 동안 함께 자서전 쓰는 모임같은걸 해보면 좋겠다. 그런게 잘 되면 정말 문자 그대로의 '지적 해방'의 순간을 맛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야학에서 이런 자서전 글쓰기 수업 진행해 보면 좋겠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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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후기 -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2.11.4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푸른숲, 2010

 

 

사실, 이 책을 서점에 눌러 앉아서 거의 다 읽긴 했지만 언젠가 다시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을것 같아 사 들고 나왔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나도 언젠가는 나의 자서전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이렇게 출판사에서 편집해주는 깔끔한 형태의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살아온 삶 그대로를 고백하고, 누군가가 나의 고백을 경청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식으로 나의 자서전을 읽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독자가 딱 10명...만 되어도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서전을 쓴다면 이 책에서 처럼 어떠한 얇은 포장마저도 벗겨낸 채로 내 욕망에 대해 기록하고 싶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오직 자기 내면의 욕망에 근거해 자기 삶을 풀어내는 저자의 담대함이 부러웠다. 사실 나는 한번도 그래본적이 없어서.... 사실 나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국민학교 밖에 안나온 산재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굴레에 묶여, 내 자신을 그 규정속에 묶어 놓고 살았다. 그 규정 속에서 한발짝도 못벗어난 채, 그 안에서 희망의 증거가 되어야한다는 강박에 치어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그런 강박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 나는 단 한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고, 우리 부모님도 그런 나를 보며 못가지고 못배운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미안해하는것, 그것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나의 대학 1~2학년 시절은 이런 나의 조건을 주변 친구들과 비교하고, 밤마다 신음소리같던 엄마의 아픈 하소연을 떠올리며 불면증으로 밤을 새우던 나날이었다.

나는 이런 시간들이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고유한 자양분이 될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택도 없는 소리이다. 그것은 희망의 증거는 커녕 절망의 표준이 되었을 뿐이고, 그 속에서 나는 피폐해져 갔다.

나는 나의 운동이 내 욕망의 한 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축제이자 전투이길 원한다. 너무나 멋지게 그러한 시도를 한 김원영씨의 삶을 동경하게 되었다.

다 쓰고 나니 내가 뭔소리를 하는지 모르게 되었지만, 어쨌든 결론은, (좀 밍숭맹숭하긴만) 후회없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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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당신들의 대통령>, 문주 中 (2012.12.8)

아, 내말이.... 대학때 읽던 책들이 어느 순간 내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살짝 감이라도 잡은 듯.
마지막 부분에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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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뭔데요? 세상의 명을 바꾸는 건데 그건 전체를 바꾸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계도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설계도란 것이 기술적으로 조작될 수 있는건 아니니까 문제에요. 천명이 그렇게 쉽게 드러나겠습니까? 민중의 가슴속에 숨어있는 시대의 뜻을 읽어내고 그로부터 우리가 같이 걸어야할 새 길, 말 그대로 새로운 도를 열어 보이는 것, 그게 이념이고 철학입니다.

그런데 그걸 잊어버린 거에요. 그나마 이전에는 갖고 있던 것처럼 믿을 수라도 있었어요. 근데 그게 남의 거였던 거죠. 해보니까 아니거든요. 그래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남아서 김일성주의 붙잡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붙잡고 있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둘 다 이제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누구도 설득 못하는 겁니다. (...) 그나마 김일성주의는 토착이론이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절반은 들어 맞습니다. 그게 남한 사회에서 NL이 PD를 이기는 이유 입니다. 그 철학이 수미일관되게 이 땅에 뿌리내린 부분이 있기 때문에. PD는 그나마도 할수 없다고 할 수 있죠. 순수한 수입 이론이기 때문에 아무런 생산력이 없다는 것이죠."

- 김상봉, "선출된 왕과 민주주의, 그 이후", <당신들의 대통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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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 2011. 5. 28

페이스북에 썼던 글.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을 한댄다. 시민사회진영은 미심쩍지만 일단 환영을 한댄다. 오, 그러나 이게 솜씨 좋은 낚시꾼의 밑밥이면 어쩌려구!? 신문을 봐라. 보수 언론에서 맨날 때려대는 얘기가 뭐냐? 국민세금으로 부실대학에 돈 퍼준다고 난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말 아닌가?

며칠전에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보고 있던 중앙일보를 힐끗 봤다. "이대 757억, 홍대 752억" 대학들이 적립금을 이렇게 남겨먹는데, 세금으로 등록금 대주는게 옳은거냐고 핏대를 올린다. 이거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한 3년 전쯤에는 등록금투쟁하는 학생운동단체 자료집에나 나올법한 내용이다. 근데 이런 내용이 보수언론에 실린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반값 등록금을 말하기 전에 부실대학 구조조정부터 해야 된다"는 거다. 국가가 학벌경쟁을 부추겨서 우후죽순처럼 생긴 부실대학을 반값등록금 때문에 청소해야 한댄다. 이말은 즉슨, 쉽게말하면 일류대학 중심으로 재정지원 해야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런 공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은 얼마나 옹색한가? 프레시안 기사인가를 보니까 한다는 소리가 "대학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으로 시작한다. 이건 완전 놀아나도 제대로, 아주 댄스를 추고 계신다.

반값 등록금, (아니지... 한나라당 표현대로라면 장학금!!!)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지금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4년제 산업대나 전문대 등에서는 산업체랑 계약 맺어서 등록금 50%로 퉁치는 곳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게 완전 노예 계약이라는 거다. 이런 계약학과 다니는 중에 회사에서 짤리거나 사표내면 학교에서도 바로 짤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 교육도 얼마든지 하고 남는다.

반값 등록금, 이게 민생정책이면 히틀러도 휴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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