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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3/08/16
    여왕의 교실 (2013.07.19)
    구르는돌
  2. 2013/01/05
    영화 <은교> 후기 - 2012.8.29
    구르는돌
  3. 2013/01/03
    골든타임 후기 - 2012.9.24.
    구르는돌
  4. 2012/07/18
    도가니
    구르는돌
  5. 2010/03/19
    영화 <밀크>를 보고
    구르는돌
  6. 2010/02/26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독백 & 대사(3)
    구르는돌
  7. 2010/02/18
    <아마존의 눈물>, 그리고 공영방송 MBC를 지켜야 하는 이유
    구르는돌
  8. 2009/07/30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2)
    구르는돌
  9. 2009/07/05
    <반두비>, 한국사회의 뒷통수를 까발리다!(40)
    구르는돌
  10. 2009/05/21
    '살기 위하여',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구르는돌

여왕의 교실 (2013.07.19)

최근에 그래도 고발성이 짙은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을 거뒀다. 도가니, 남영동1985, 부러진화살... 그리고 노리개(는 흥행했는지는 잘 모르겠고)까지...

내가 의문인건 여왕의 교실도 나름 고발성 짙은 작품인데 왜 시청율이 바닥이냐는 것이다. 그 의문에 대해 나름 감을 잡았다. 도가니를 위시한 영화들은 가해자들을 실컷 욕할 수 있었다. 파렴치, 개만도 못한 새끼들, 독재의 하수인, 더러운 수컷들... 시청자는 전적으로 피해자와 동일시 할 수 있으니까.

근데 여왕의 교실은 그게 잘 안된다. 마여진 선생을 욕할 수는 있지만, 선생이 얘들한테 체벌을 하거나 그러는 건 아니다. 마선생이 행하는 건 우리가 사회와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쟁의 원칙을 다소 강도 높게 적용한 것 뿐이다. 솔직히 나는 초중고를 다...니는 동안 선생 쭉정이들 한테 마여진 선생의 발언보다 심한 얘기 더 많이 들어봤다. 니들 부모님들은 대학도 못나와서 니네가 그모양인 거다부터 시작해서... 학교는 사실상 모욕을 체험케 해주는 공간 이상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대응이다. 선생이 조별과제를 내고는 조에서 가장 불성실했던 사람 이름을 적어 내라고 한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학생은 최하점이다. 이에 전교 일등 김서현은 반 아이들에게 모두 자기 이름을 써 내서 마녀쌤의 전략에 맞서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마 선생은 모두가 한 표씩 나올 때는 모두 최하점을 줄 거라고 협박한다. 그 말에 학생들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고작 4명 중에 한명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선생도 시원하게 욕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얘들을 욕할 수도 없다. 얘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나 대신 희생할 사람을 만들어야하는 사회, 오히려 그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사회. 근데 그게 또 현실이고...

오늘 마 선생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진심이 통하는데도 한계가 있을 거라고. 드라마 초반에 심하나의 진심은 오히려 가식으로 오해받았다. 그게 왕따를 더 심하게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심하나의 진심은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릴 때에도 꿋꿋하게 친구의 닫힌 마음을 향해 따스한 손을 내밀었다. 진심이 오해받는 세상에서 바보같은 우직함으로 마녀 쌤에게 맞선것이다.

여왕의 교실 같은 캡짱드라마가 외면받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진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엔 두려운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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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은교> 후기 - 2012.8.29

페이스북에 쓴 글. - 201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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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영화 은교를 보았다. 몇 가지 생각해 볼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 적어본다.

1. 늙은 시인과 패기넘치는 신예 작가의 대결 구도 속에서, 문학적 열정과 출세욕을 투영한 것은 좀 진부하다는 느낌이 든다. 또 스승이 제자의 작품을 대필해주는 이런 식의 사제관계가 현실에서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좀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2. 이적요 시인의 욕망을 그리면서, 단지 그 욕망의 소중함만에 주목하지 않고, '늙어감'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 한 부분이 좋았다. (특히 이적요 시인의 대사 "젊음이 니 인생에 대한 상이 아니듯이, 늙음도 니 인생에 대한 벌이 아니다.")

3. 하지만 다른건 다 접어두고, 나는 이 두 작가의 관계에 돌발적으로 끼어든 '은교'의 출현이 좀 의아스러운 점이 많다. 너...무 동화적이기도 하고... 아니, 마치 요정같다. 사건의 개연성을 따지는 것은 좀 우습긴 하지만, 어쨌든 노 시인과 은교가 가까워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마치 남자가 몽정할 때 눈앞에 그려지는 흐릿하고 몽롱한 장면들을 옮겨놓은 것 같다. 나이 70먹은 할아버지가 자는데 17세 소녀가 그 다리 옆으로 들어와 잠을 자고, 잡자기 할아버지를 자기 무릎에 눕히고 헤나를 그려주겠다거나 하는 건 좀 지나친 남성의 성적 판타지 투사 아닌가?

4. 내가 말하고 싶은건 노 시인의 그런 욕망이 문제라는게 아니라, 이 요정같은 '은교'는 영화 내내 그런 욕망의 객체로 그려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영화에서 은교는 흔들의자에 하얗고 눈부신 허벅지를 드러내고 잠을 자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서, 할아버지가 써 준 소설 속에서 자신이 너무나 아름답게 묘사된 자신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5. 감춰진 은교의 욕망. 난 그게 궁금하다.

6. 어쨌든 '은교'는 근래 내가 본 영화중에 가장 충격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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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 후기 - 2012.9.24.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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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형과 안민희님이 재밌다고 하길래, 주말 내내 집에 처박혀서 골든타임 9회까지 몰아서 봤다. 역시, 이선균....... 이라고 그냥 좋아할라고 했는데, 드라마 전개가 갈수록 맘에 안들어진다.

1. 아무리 중증외상환자(그냥 내가 이해하기 쉽게 '응급환자')를 다루는 의사들에 대한 이야기라지만, 몰려드는 환자가 하나같이 다 "당장 수술 안하면 이 환자 죽어!"라는 말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사람들 뿐이라, 보는 내가 다 숨 넘어가겠다. 너무 한꺼번에 몰아봐서 그런가?

2. 중환자들이 원래 그렇긴 하겠지만, 이 드라마에서 환자는 말이 없다. 그저 수술대 위에 누워 배가 갈린 채, 의사들은 그 환자의 장기를 잘라내고 붙이고 꼬매고... 끊임없이 환자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고 의사들끼리 멱살도 잡고 싸우고 별 짓들을 다 하지만, 그건 의사의 목소리이지 환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역시 이선균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전작 '하얀거탑'에서도 그랬지만, 의사가 환자를 다루는 방식은 기계 수리공의 방식하고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단지 기계 수리공은 기계가 완전히 망가진다고 해서 울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 끊임없이 배를 열고 닫고, 배속에 거즈를 넣어다 뺏다가... 생명이 이런식으로밖에 다뤄질 수 없는 건가. 수술대 위에 올려진 신체는 정말 신체가 맞는건가?

3. 아,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너무 많은 걸 바라나 보다.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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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영화 <도가니>를 보고나서 페이스 북에 쓴 글. 201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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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회의를 통해 '도가니' 이후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활동가들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양자료를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와 선배들이 보내 준 예전 토론회 자료집을 훑어보다 잠이 들었고, 오늘 드디어 그 영화를 보았다.

토론회 자료집은 무미건조했다.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발제를 맡고, 이러저런 전문가가 토론문을 더했고, 실제 시설 생활 경험자의 의견까지 더한 토론회 자료집은 교양자료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하는 막막함만 더 해주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나아지겠지... 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더 답답해 졌다. 영화가 끝나고 일어서자마자 머리가 너무 아팠고, 영화를 보고 난 소감 같은 걸 말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여주인공이 생각보다 연기를 못하...네... 같은 영양가 없는 말이나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 남들 다 그렇게 느끼듯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안보는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 '도가니'가 daum에 연재될 당시 읽었을 땐 이정도 느낌은 아니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끔찍한 장면들을 '영상'으로 접하고 나서야 분노하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다. 도가니가 연재소설 일 때도, 책으로 나왔을 때도, 나름대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는데, 사회적 공분으로 옮겨지는 것은 왜 그 끔찍한 장면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가능하단 말인가?

나는 오히려 이 끔찍한 장면들보다 영화의 말미에서 공유가 죽은 민수의 영정 사진을 들고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하는 마지막 대사, "이 아이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민수라고 합니다."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결핍의 상태인 이 아이를 위해 대신 싸워주기를 호소하는 이 정의의 외침은 그러나, 민수를 여전히 정의의 '수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른들이 물대포 맞아가며 싸우는 동안, 연두와 유리는 그저 울며 물대포 세례를 힘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끔찍한 장면의 자극을 통해 만들어지는 분노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이런 문제를 함께 공유하고 해결해 나갈 노력을 만들어갈 길은 없는 것일까? 장애인의 신체적 '결핍'을 대신해 싸워주겠다는 '가상의 정의감'을 공유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들이 몸으로 내는 목소리에 귀기울여가며 그들의 싸움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공지영의 말처럼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심지어 게으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화를 통해 느낀 폭발하는 감정들이 이 진실의 '게으름'을 앞서 나가려다 보면 분명 진실에 상처를 주고 말 것이다. 진실만큼 느리게 가자. 진실보다 뒤쳐져선 안되겠지만, 단 두시간 동안 느낀 감정으로 진실을 인도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아직 모르는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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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크>를 보고

애쉬님의 [클로즈업이 우리에게 남긴 것] 에 관련된 글.
 

 

 

 

 

한 주 내내 정신이 산만하고 손에 잡히는 일도 딱히 없고 해서, 거의 몇 달 째 미루고 있던 영화관람을 실행에 옮겼다. 사실 내 이번달 주머니 사정상 영화 보는게 쉬운일은 절대 아니었지만, 꿀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조용하고 분위가 좋은 것은 참 매력적이지만, 상영관 안이 너무 추운게 단점이다. 카운터에 있던 직원이 무릎을 덮을 담요를 가져가라고 했을 때 부터 좀 불안하긴 했는데, 담요를 두 개를 가져갔음에도 두 시간 내내 벌벌 떨었다. 근데 상영관 뒷 편에 보니 대형 히터가 있긴 있는데, 나를 포함해 4명의 관람자가 있는 곳 까지는 전혀 열기가 오질 않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난 맨 뒷자리로 옮겨 앉아야 했다.

 

뭐 그건 그렇고... 내가 워낙 영화의 카메라 기법, 장면 구성에 대한 이해능력이 딸려서 스토리 전개가 좀 이상하게 구성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숀 펜 주연의 <밀크>는 확실히 인상깊은 영화다. 하루가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나의 인상깊음은 나름대로 나의 현재 상황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40세의 보험회사 직원 하비 밀크는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동성 애인과 샌프란시스코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게이 인권운동에 몸을 던진다. 그는 8년간의 시간동안 여러 동성 애인을 만났고, 게이를 위한 상점 '카스트로'에서 수많은 동성 친구들을 만든다.

 

무엇이 40세의 보험맨의 삶을 이렇게 바꾼 것일까? 그저 그의 성 정체성이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는 설명은 충분한 것일까? 나이 40이면 사실 사회의 편견과 매너리즘을 인이 박일 정도로 체화시키고도 남을 나이다.

 

내 나이는 27세. 약 7개월 뒤면 나는 행정안전부 소속이 아닌 완벽한 무소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그래서 난 요즘 그 7개월 뒤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로 바쁘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아무리 빡세게 산다 해도 월100만원은 받아야 대충은 먹고 살텐데..."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부모님하고 사는건 힘들텐데, 그럼 어디에 집을 얻어야 방세를 조금이라도 덜 낼까?"

 

뭐 대충 이딴 것들. 나이 스물일곱의 청년도 이런 고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사는데, 저 중년의 남성은 무슨 생각으로....ㅠ.ㅠ

 

음, 그리고 이건 딴 얘긴데, 이 영화를 보면서 최근 선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비 밀크의 출마는 전형적인 현장의 힘을 통한 제도권 진출이다. 그의 공직 진출은 게이 인권운동 그 자체였고, 시의원 활동도 게이 인권운동을 빼고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딴건 둘째치고 진보진영에서 교육감 선거를 준비하신다는 분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좀 황당하다. 특히 서울의 경우, 이미 출마선언을 한 4명의 진보후보들이 있는데, 이들이 소위 '이름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량감'있는 후보를 땡겨오려고 후보 물색을 했단다. 그래서 만났다는 사람들이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이다. 허허~ 참, 그 사람들의 성향은 둘째치고 이런 경력의 사람들이 교육감을 한다는 건 쫌 웃기지 않나? 어쨌든 이번 지방선거, 모두들 '하비 밀크'처럼만 해줬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그냥 잡소리만 늘어놨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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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독백 & 대사

이상하다.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이 말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내게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준영이를 안고 있는 지금은 상당히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린 더 얘기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몸 안에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만 한다.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니구나. 또 하나 배워간다. (정지오)

 

 

 

 

생각해보면 나는 순정을 강요하는 한국 드라마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했던 내가 싫었다. 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상대를 더 사랑하는 것에 그렇게 자존심이 상했을까? 내가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뛰어오는 저 남자를 그냥 믿으면 되는데, 무엇이 두려웠을까?

 

(...)

 

나는 오늘 처음으로 이 남자에게 순정을 다짐했다. 그가 지키지 못해도 내가 지키면 그 뿐 아닌가. (주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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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명대사 와 독백

 

준영: 근데, 우리 엄마 만날 것 같았으면 나한테 정보를 좀 물어보지. 그러면 우리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말해줄... 아니다, 잘했어 잘했어. 집에 가질 말걸. 괜히 가가지고는 싫은 소리만 한 바가지 듣고.. 소화제 있어? 엄마네 집에서 먹은 밥이 체한 것 같애. (냉장고 앞으로 가서 물을 마신다.)

지오: 야, 준영아. 너 그냥 강준기 만나라.

준영 : 뭐?

지오 : 나 너 못만나겠다. 강준기가 그냥 만나잔다며. 그냥 걔 만나.

준영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식탁에 와 앉으며) 장난이 심하다.

지오 : 장난 아니거든.

준영 : 장난이 아니면 뭐야? 아무리 짜증나도 할말이 있고 못할말이 있는거야!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사람 성질 돋구고...

지오 : 그러니까 짜증나게 있지말고 가라고 새끼야!

준영 : 왜 소리를 질러? 소화제나 달라고!

지오 : 없어.

준영 : 우리엄마 원래 그런 사람이야. 이제 알겠지? 내가 왜 그렇게 엄마를 피해 다녔는지.

지오 : 사람 쪼잔하게 만들지 마라. 니네 엄마때문 아니야.

준영 : 장난도 아니고, 엄마 때문도 아니면, 진심이란 거야?

지오 : 너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잘났고, 우리 집은 너가 생각한 것보다 더 형편없다. 그리고 난 그 모든걸 굳이 뛰어넘을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피곤하고 암튼.. 너는 나하고는 그만 보는게 나을 것 같다.

준영 : 또또 심각하게 나온다 또. 지겨워 진짜. 그놈의 심각병. 오늘은 자. 나도 피곤해. (현관을 향해 나감)

지오 : 키 두고가.

준영 : 뭐가 문제야?

지오 : 갑자기 너랑 나랑 무슨 대단한 사랑을 한다고 내가 이렇게 초라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아무리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관둘라고.

준영 : 넌 가끔 정말 정말정말 이상해. 그거 알어? 보름 동안 24시간밖에 못자서 골이 딩딩 거려. 내일 얘기해.


(지오 나레이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가지가지다. 누구는 그것이 초라함의 문제이고, 자격지심의 문제이고, 어쩔수없는 운명의 문제이고, 사랑이 모자라서 문제이고, 너무나 사랑해서 문제이고, 성격과 가치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어떤 것도 헤어지는데 결정적이고 적합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모두 지금의 나처럼 각자의 한계일 뿐.

준영이를 다시 만나면서 대체 내가 왜 예전에 얘랑 헤어졌을까, 이렇게 괜찮은 얘를... 과거에 내가 미쳤었나 싶게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천만번 다짐했다. 다신 얘랑 헤어지지 말아야지. 근데 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저질러 놓고도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한다. 난 내가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다. 그래도 난 준영이를 다신 안 만날 생각이다. 그게 내 한계래도... 이젠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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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의 눈물>, 그리고 공영방송 MBC를 지켜야 하는 이유

 

 

설 연휴 내내 <아마존의 눈물>에 빠져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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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전투>

redbrigade님의 "선거? 그거 이겨 뭐하게?"에 관련된 글

 

 

 

3일 전에 그 동안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던 <칠레 전투>를 보았다.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 편당 거의 90분에 육박하는데,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인터넷에 그걸 다 올려놨더라. 낮 시간 내내 일이 없을 때 짬짬이 봤는데도 결국 2부작까지 밖에 못봤다.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를 탄핵하기 위한 2/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기독교민주당 세력들이 합법적인 방식으로는 이 정부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옌데를 대중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외곽조직을 만들어 낸다. 조직의 이름까지 영화에서 명확히 나오는 것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그들은 반 정부 친위대라 할 수 있을만한 조직이다.

의회에서 다수당인 기독교민주당이 아옌데 정부가 내놓는 개혁법안이나 임명하는 장관들의 대부분을 꼬꾸라뜨리고 있는 동안  이 조직은 맑시스트 정부가 칠레를 망쳐놓았다는 선전을 하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친정부 단체들을 공격한다.

이렇게 의회 내외적으로 파시즘적 기운이 충천해 가고 있는 동안, 기독교민주당은 아옌데 정부 초기에 국유화를 통해 소위 '귀족 노동자'가 된 구리광산 노동자들을 부추겨 파업을 일으키도록 한다. 40%의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이다. 구리광산 노동자들은 아옌데 정부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행동은 민중연합파 노동자들 내부의 갈등을 불러와 보수파의 공세에 직면한 아옌데를 궁지로 몰아넣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어차피 기독교민주당에게는 미국 CIA라는 강력한 백이 존재하고 있었고, 이들 밑에서 강력하게 훈련된 군 조직이 있었으며, 독점 자본과 방송을 비롯한 미디어도 이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대중조직과 노동계급의 분열을 통한 파시즘적 기운을 북돋움으로서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를 아사상태로 몰아갔고, 결국엔 군사 쿠데타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40여년 전에 벌어진 이 광경이 한반도 남녘의 과거이자 미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거라고 한다면, 노무현의 집권 5년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비적으로 아옌데의 민중연합과 기독교민주당의 관계는 노무현과 한나라당의 관계를 빼다 박은 듯 하다. 물론 전자가 합법적인 탄핵은 못시켰어도 무력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후자가 합법적으로 탄핵시켰음에도 헌법재판소라는 최고 법률기관의 판정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영화를 통해서 2004년 3월 12일을 떠올리는 것은 기억에 의존해 살아가는 인간의 매우 자연스러운 두뇌작용일 것이다. 얼마 전에 <시대와 철학> 최근호의 서문으로 실린 김교빈 교수의 글을 보니 영화 <산티아고에 비는 내리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아예 대놓고 노무현은 한국의 아옌데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같은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칠레 전투>를 보고 나니 그런 생각이 완전히 억지는 아니겠다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김교빈 교수가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한국과 칠레는 엄연히 정치적 대립의 선이 다른 지점에 그어져 있다는 것일게다. 아옌데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 민병대, 각종 노동자의 자주적 위원회, 노조 등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노무현은 그런 기반은 물론 경제적 기반까지 무너져 상실감에 빠진 대중들의 '비물질적인' 열망에 기반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건 이 글을 쓰면서 우연히 든 생각일 뿐이니 이런 정의에 대해 딴지걸지 마시길 ㅋㅋㅋㅋ) 그래서 노무현의 이념적 지향은 쉽게 묻어갈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든 과거는 과거인거고,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일텐데... 영화 초반에 등장한 기민당의 친위조직을 보면서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장면이 있다. 바로 얼마전에 거국적으로(!!) 창립하신 '애국기동단' 어르신들!!! 그들이 서울대 교수들 시국선언하는데 쫓아가서 깽판치고 노무현 분향소를 때려부시는 모습들... 게다가 그들은 항상 '군복'을 입고 다닌다. 그들을 보면서 이 나라가 칠레에서와 같은 군사쿠데타의 전주부분을 연주하며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얼마전에 통과된 미디어법. 이걸 보면 그런 징후는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것을 통해 보수세력의 전방위적 선전망이 강력하게 확보된다면, redbrigade님의 말처럼 사실상 다음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당선이 안되도 이들 입장에서는 별 상관없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이들은 대통령 자리보다 더 강력한 것을 가진 것이기에, 정치의 모든 인풋 아웃풋을 자신들 통제하에 검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제일 안좋은 경우의 수는 미디어법과 금융지주회사법 등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다음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낙선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자본권력, 언론권력, 거기다 지방권력까지 보수세력이 독점한 상태에 민주당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정치권력의 일부(분명 위 법들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면 대통령이라는 것은 권력의 '일부'일 뿐인 존재가 될 것이다)를 가지게 된다면? 정세는 지금보다 더 엄혹한 상황이 되겠지만, 지금과 같이 불만스러우나마 반MB전선 따위도 만들지 못할 것이고,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결집을 도모하기는 더욱 요원할 것이다.

 

물론 내 상상력이 만들어낸 그림일 뿐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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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두비>, 한국사회의 뒷통수를 까발리다!

 

작년과 올해, 두편의 이주노동자 문제와 관련된 소설을 읽게 되었다. 하나는 박범신의 <나마스테>, 또 하나는 김려령의 <완득이>. <나마스테>가 한국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이주노동자와 그를 포함한 이주노동자 공동체 모두가 피해갈 수 없는 비극적인 시련을 과연 작가가 표현해 내는 것 이상의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슬프게 표현해 냈다면, <완득이>는 이주노동자 어머니를 둔 한 소년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것이 비극이 아닌 경쾌한 삶의 에너지, 그리고 내 안에 오롯이 박혀있는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임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나마스테>와 <완득이> 모두 훌륭한 작품이지만, 나는 이 구리고 구린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불쌍하고 때론 불결한 이미지로 범벅이 된 이주노동자의 삶을 경쾌한 목소리로 전달해 준 <완득이>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에 나는 <완득이>에 필적할 만한 영화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이 영화는 임금체불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와 거침없는 행동과 말투로 당당한 포스를 자아내는 10대 소녀의 아슬아슬한 러브스토리(??)를 통해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한국사회는 한 일주일은 머리 안 감은 사람처럼 비듬 투성이이다. 아닌척 하고 앞머리에만 대충 왁스를 범벅하고 돌아다니는, 이 비듬으로 떡이 된 한국사회의 뒷통수는 <반두비>에 의해 하나둘씩 경쾌하게 까발려진다.

 

 

"저 사람이 끼어들어서..."

 

카림이 컵라면을 먹고 있던 편의점에서 우연히 술에 취한 중년 남성이 로또를 사러 왔다. 그러나 편의점 직원은 8시가 넘었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그러자 중년 남성은 "너 지금 내가 명박이 믿고 뉴타운 투자했다가 쪽박찬 놈이라고 무시하는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편의점 직원에게 시비를 건다. 이에 편의점 직원 왈 "그걸 왜 시급 3500원짜리한테 따지세요? 명박이 한테 가서 따지지!" 그렇게 시비가 붙은 둘은 결국 멱살잡이를 하는데, 이를 보다 못한 카림은 둘의 싸움을 말린다. 그런데 이 둘은 그 사이에 눈빛이 통했는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갑자기 연대를 형성해 싸움의 책임을 카림에게 덮어씌운다. 

 

뉴타운으로 쪽빡차고 로또에 하룻밤 희망을 걸다가 그게 여의치 않자 시급 3500원짜리한테 분풀이를 하고, 그러다 경찰서까지 끌려가자 엉뚱한 사람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는게 바로 '내국인'들의 모습이다. 여기서 카림을 둘러싼 상황은 애니메이션 영화 <마다가스카>에서 동물원을 뛰쳐나온 동물들이 친구였던 사자가 야생성을 되찾아 점점 자신들을 고깃덩어리로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 해 일종의 '제물'로 바닷고기를 회를 떠서 사자에게 갖다 바치던 상황과 겹쳐진다. <마다가스카>에는 온갖 금수(禽獸)들이 등장하지만 오로지 바닷고기들만이 눈빛이 없고 말할 수 없는 존재로 나온다. 중년 남성과 편의점 직원의 눈에 비친 카림 또한 마찬가지다. 실업자든 시급 3500원 짜리든간에 '한국'이라는 정상국가의 구성원이라는 계급적 지위를 잃고 싶지 않은 이들은 이주노동자라는 무표정의 제물을 경찰이라는 국가기구에 상납한다. 그리곤 중년 남성은 이렇게 내뱉는다. "이딴 새끼 그냥 지네나라로 보내 버려요. 괜히 여기서 우리 일자리나 뺏지 말고." 한번도 카림이 했던 3D업종에서 일하겠단 생각을 한 번도 안해 봤을 법한 양반이. 아마 이 중년 남성도 07년 대선에서 이명박을 찍고,  08년엔 촛불을 들고 시청광장에 나와 "이명박 개새끼"를 외쳤을 것이다. (아마도...) 그리고 지금은 "재수없는 깜댕이"를 읊조리고 있다.

 

 

"자지 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

 

민서의 절친이 된 카림은 민서의 친구들과 영어학원 원어민 강사와의 만남에도 초대된다. 그 만남에서 카림은 내내 굳은 표정인데 반해, 원어민 강사는 김치가 햄버거보다 맛있다느니, 한국사람들 너무 좋다느니 수다를 떨고 있다. 카림의 어두운 표정이 불만이었던 민서는 돌아오는 길에 카림에게 화를 내며 말한다. "후진국에서 와서 그래." 하지만 카림은 그 잘난 선진국에서 온 원어민 강사가 한국 여자들을 두고 뭐라고 했는지 상기시킨다. "한국여자들 다루기 쉽데. 그게 무슨 말이겠어? 한국여자들 창녀같다고 말한거야." 카림과 원어민 강사의 영어대화를 못 알아듣고 내내 웃음만 짓던 민서가 이제서야 그 뜻을 알고 빡돈다. 그리고 학원에서 만난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는 말한다. "너 어제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한국여자들 다루기가 쉽다고?"

 

남성의 상징(??)인 이 '자지'는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코드로 자리잡고 있다. 주유소 알바에서 짤린 민서는 마사지 업소에서 남성의 '자지'를 만져주는 일을 한다. 남자들 세계에선 그것이 '남근의 상징'일지 몰라도 민서에게는 그저 돈벌이에 쓰이는 도구일 뿐이다. 게다가 업소에 출입하는 남성들은 그런 성적 서비스를 받는 것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 이는 곧 그 물건이 그냥 '물건'일 뿐이라는 거다. 원어민 강사의 자지를 휘어잡고 "다시 한번 말해봐"라며 윽박을 지르고, 카림을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한 민서의 '아빠 지망생' 기홍에게 "자지하나 달고 들어와서 빌붙는 주제에..."라는 일격을 가한다. 카림의 1년치 월급을 떼먹은 사장집에 찾아것는 "만수야, 너 언제 인간될래?"라고 말하며 집안을 때려부순다. 자지하나 달고 세상을 호령하는 남성들이 여성, 그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 없어보이는 여고생에게 시종일관 엿을 먹는 거다.

 

이 영화의 핵심은 '여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여고생이 '남성'의 세계에서 최하층인 이주노동자와 '반두비'로서 연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서가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선 늘 공격의 타겟이 되었던 '자지'는 카림과의 관계에서만은 친밀함의 코드로 상징화된다. 이 영화에 '19금' 딱지를 붙이고 '원조교제를 조장한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인간들이 볼 때에는 불순한 장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어떤 사람들은 카림이 순진한 여고생 꼬득여서 성관계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담긴 장면이라고 하지만, 그런 말 하는 인간들은 영화 안보고 지껄이는게 분명하다. 카림은 분명 민서의 손길을 뿌리쳤고, 집에 돌아와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물론 나중엔 둘 사이의 관계가 더 깊어져 바닷가에 가서 키스를 나누기도 한다. 근데 그게 뭐 어때서? 남녀가 사랑한다는데 누가 말릴꺼야? 20살 가까이 나이차이 나는 사람들끼리도 잘 만 결혼하는 세상에 여고생과 29살 청년의 사랑이면 예쁘게 봐줄 수도 있는 거지... 혹여나 무슬림 남자들은 여성들을 명예살인 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인간들이 있다면 난 이영애씨처럼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너나 잘하세요."

 

적어도 이런 말은 그 무슬림 나라에 가서 섹스관광 즐기는 남정내들이 벅지글거리는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아닌거다.

 

 

촛불집회, 그리고 한국사회의 풍경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2008년 한국사회를 집약하는 상징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 시작부터 학교 정문 바로 옆을 비추면서 서울시 교육감 선거 벽보가 보이고, 민서가 던져놓는 가방엔 촛불소녀 뱃지가 달려있다. 신만수 사장집에 쳐들어간 민서는 테이블에 놓인 조선일보를 집어들고 흔들며 "이 따위 신문이나 읽고 있으니까 니가 쓰레기처럼 살지"라고 말한다. 심지어 마사지 업소를 그만둔 민서는 대문짝만한 광우병 소 반대 현수막이 걸린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눈치 챈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 서점은 바로 서울대 앞 고시촌에 있는 사회과학서점 '그날이 오면'이다.)

 

그런 역동적인 2008년의 모습을 담아낸 영화를 보면서 씁쓸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온 국민이 한 목소리로 '광우병 반대'를 외쳤던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이주노동자는 타자로 남아있고, 내국인들이 쳐 놓은 욕망의 울타리에 이주노동자는 '출입금지'를 선고받았다는 점 또한 영화는 확인시켜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의점에서 명박이 탓하던 중년남성과 민서가 하나가 아니듯이 2008년 촛불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아닌것을 하나라고 외치는 사이 우리는 카림을 울타리 밖으로 또 추방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점이야 말로 촛불에 동의했건 안했건 간에 '내국인'들이 가장 보고 싶지 않아했던 한국사회의 지저분한 뒷통수가 아닐까? <반두비>는 그런 내국인들의 얼굴 앞뒤로 거울 하나씩을 갖다놓고 "자, 니 뒷통수좀 봐. 얼마나 더러운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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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하여', 그리고 <에코페미니즘>

 

포스터 사진이 큼직한 것이 마음에 든다.

왜 난 저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윤도현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노래 제목이 생각났을까?

전혀 느낌이 다른 노래는 아니긴 하지만... 뭐 그건 그렇고...

 

지난 16일(벌써 2주나 되었네ㅋㅋㅋㅋ)에 돌돌이와 해장국집딸과 함께 대전아트시네마에서 본 다큐다.

게다가 덤으로 '살짝 부담스러운' 감독과의 대화까지 ㅋㅋㅋㅋㅋ

 

다큐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새만금의 끝물막이 공사를 진행하려는 정부에 맞서 (이제는 육지가 되어버린) 섬마을 사람들은 삶을 건 투쟁을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건'들에 부딪치게 된다.

 

사건1) 새만금을 죽이는 노무현은 개XX라는 선정적인 언술로 매스컴을 탄 도올 김용옥이 주민들의 농성장에 찾아와 3일간 단식투쟁을 한다. 그 3일동안 농성장은 언론들로 북적였고, 새만금의 이야기는 공중파를 타고 좀 알려지나 싶었다. 그러나 도올은 3일 뒤 빠이빠이했고, 그 일 때문에 괜히 지역 유지들과 주민들과의 마찰만 더 심해졌다.

 

사건2) 끝물막이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투쟁 방향을 놓고 주민들 사이의 격론이 벌어진다.

주민대책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분들(대부분 남성)은 보상을 더 받아내는 쪽을 요구사항을

돌리자고 했고, 이에 반대하는 분들(대부분 여성)은 끝까지 해수유통을 고집했다.

여기서 굳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표식을 단 것은 그만큼 이 다큐에서 이 여성어민들의 존재가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 다큐에서 가장 인상적인 명대사를 남기신 이순금 이모님(이모님이라는 표현은 이강길 감독이 쓰는 표현. 이런 표현이 맞나 싶으면서도 딱히 다른걸 못찾겠어서 일단 패스)을 비롯하여 많은 여성농민들은 누구보다 비타협적인 투쟁을 요구한다. 왜냐면 해수유통만이 자연과 함께하며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닌 이상 다른 어떤 곳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뭐 요약도 아니고 정리도 아니고 글이 아주 요상하게 되어버렸는데,

여튼 이순금 이모님의 명대사는 이렇다. "갯벌에서 일할 때 나는 날아다니는 새들 조그만 낙지들 하고 노느라고 남들의 2/3밖에 못잡아, 그래도 난 일하는게 너무 즐거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가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면서 부자는 아니지만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으니..."

 

아, 진짜... 글로 옮겨놓으니 느낌이 팍 죽어버리네... 여튼 궁금하면 다큐를 직접 보시고...

이 분들이야말로 에코페미니즘을 온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들이다.

 

 

 

!@#$%^&*

에잇, 진짜 글이 너무 허접한 걸.... 난 왜 맘먹고 쓰질 않으면 항상 이렇게 막가는 글을 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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