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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살아가겠다> 발췌독.

나는 '철학'을 묻는 질문을 접할 때마다 그것을 '철학한다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바꾸곤 한다. 내게 철학은 '앎의 대상'이라기보다 '행함의 지혜'이고, 결국 '행함으로 드러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앎이지만 또한 행함이다. (15)


우리는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여전히 '사는 데 서툴다'는 느낌을 갖는다. 우리 딴에는 잘 살아보겠다고 한 일이 삶을 망치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과 '삶을 망치는' 현실 사이의 간극ㅇ서, 철학에 대한 욕망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특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서로의 기술, 서로의 경험에 대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17)


철학자는 '법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사는 법을 아는 자'이고, 사는 법에 맞지 않을 때 법을 고치라고 용기내서 말하며, 기꺼이 감옥에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21)


어떻든 '철학하는 왕'의 현실적 실패 이후 플라톤이 동시대인과 미래의 학생들을 위해 던진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기가 고민하는 주제에 대해 책을 쓰려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해두었다. "거기에 대한 내 저술은 있지도, 나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말로 옮길 수 있는게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철학의 지혜, 철학적 앎에 대한 참으로 중요한 비유를 남겼다. '앎'이란 오랜 사귐과 공동생활을 통해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서 생겨나 스스로를 길러낼 것"이라고 (28-9)


디오게네스의 철학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연대는 이런 이해관계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사회계약에 우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이전에 나 자신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존재 자체가 타인들로 이루어졌다는 깨달음이다. 나는 언젠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그런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전태일이 신문팔이, 여공 철거민들과 연대하기 이전에, 그런 존재들을 자기 안에 품고 있다는 느낌 말이다. 그의 존재 안에서 그들이 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유서에서 우리에게 동일한 존재가 되어주기를 요청했다. '나를 아는 모든 나' 그리고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게 부친 그의 유서는 '그대 영역의 일부'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요청한다. 그를 이루는 어던 부분이 우리 안에 그렇게 자리함으로써, 다시 말해 우리가 자기 안에 그의 자리를 내줌으로써, 우리는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그와 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는 것은 그 존재를 우리 안에 품는 것이다.(37)

 

디오게네스에게 있어서 '길'의 두가지 의미. (38-41)
1) '모든 것을 모두에게 내보이는' 공적인 장소. (칸트적 의미에서 '계몽'을 실천하는 공간)
2) 길은 법으로는 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도록 하는 공간

 

대학인의 고백과 약속 professor의 진정한 의미 (55-57)

 

생각해보면 '앎을 매개로 한 삶의 공동체'였던 '우니베르시타스'역시 가르친 것은 '진리'(어떤 불변의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대학이 키워낸 것은 진리의 생산 조건으로서의 능력과 용기였을 것이다. 대학은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질문들을, 어떤 선험적 권위나 제약을 진정하지 앟는, 무조건성 속에서 던질 용기를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앎이 구원해야 하는 것은 자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이다. 우리 삶의 혁신을 위한 대담한 실험의 장. 그 배움의 공동체가 '우리베르시타스', 즉 대학이라는 이름의 합당한 상속자일 것이다. (65)


"포기에 맞서야 한다" - 랑시에르 말 인용. "지능이 열등할 때가 아니라, 의지가 꺾일 때 바보가 생겨난다" (79)

 

<교육 이전의 교육, 운동 이전의 운동> = 감히 알려고 하라 (칸트의 계몽)  지식이 아니라 욕망이 생기게 하라 ("밤에 열린 어느 장애인 학교")


우리에게 지금 '현실적 대안이 없음'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 대안이 없으며 낭예 말을 못하게 하는 것, 혹은 하나의 대안을 다른 대안으로 계속 바꿔치기하며 '대안 없음'에 대한 자각을 계속해서 늦추는 것. 바로 이것들이 체제의 근간, 이 시대의 비전, 이 시대의 지배 정신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그것을 타파하련느 움직임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대안 없이 두물머리를 지키고 있는 농부들, 대안이 없어 무작정 대한문을 차지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 (131-2)

 

단기투쟁은 '투쟁'이 곧발 '일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장기 투쟁의 경우에는 '일상의 삶'과 '투쟁'이 구별되지 않는다. 즉, 살아가는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고, 싸우는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는 '장기투쟁 사업장'에서, 그 '장기'라는 말과 달리, 시간의 길이를 넘어선 문제, 즉 운동이 어떻게 시간적 '무한정성'을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느낀다. 우리는 그런 운동의 형식을 발명해야 한다. (147)
우리는 '살아가는 일'과 '착취당하는 일'이 수렴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사회이기에 '살아가기'와 '투쟁하기' 또한 수렴해가는지도 모르겠다. (149)

<생정치 시대, 지킴이의 개입과 실천> (152~ )

 

<밀양식 보수주의>
밀야의 노인들이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그 '보상 불가능한 것'이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처분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나는 나무를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한 할머니의 말에서 그것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무는 나보다 더 오래 살아왔다. 이것들 다 베어내고 나면 너희는 어디 기대고 살래?" (173)

 

<죽은자와의 약속>
"우리 시어른이 돌아가실 때 내게 그랬어. 고향을 지켜줄 거냐고. 그 양반이 돌아가실 때 시누이가 그러는 거야. 아버지가 언니 찾아요.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럴까 하고 갔는데 나한테 그러는 거야. 모두들 ...고향을 지킬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 떠날 궁리만 하고. 가만 보니 니가 고향을 지켜줘야겠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고향 지키는 기 뭐 어렵습니꺼. 이것저것 심고 무덤에 풀이나 베어주고 하면 되지. 그러다 자식들한테 물려주면 되고.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키겠심니더' 그랬지. 지금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내가 왜 그때 그리 쉽게 답해버렸을까, 왜 그렇게 말해버렸을까 후회도 되고. 어느 날은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 '아버님, 너무 힘듭니더' 그리고 나서 한참 울었어. 내가 일흔에만 죽었어도 자식들한테 소임 넘겼으니 제 세상 아버님한테 편히 갔을 텐데. 인제는 별수가 없다. 나는 철탑이 세워지든 안 세워지든 싸우다가 그 아래 묻여야 해. 그래야 그 어른한테 할 말이 있지. 나는 하는 데까지 했다고 말야. 난 어디 안 가. 저기 묻혀야 해." (177)

 


나는 김주영 씨가 걸어온 저 삶의 모든 시도에서 그녀의 용익와 자유를 본다. 우리 사회가 부여한 '자애인'의 자리에 그녀는 그대로 주저안지 않았다. '장애인'이라는 자리는 그녀가 자유에 대해 끊임없이 시도하고 물었던 장소이고, 삶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열망을 쉬지 않고 증명해왔더 장소였을 뿐이다. 그녀는 장애인을 장애인 안에 가두는 문턱들 중 가장 악랄한 감옥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역사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은 '바깥으로 나가면 죽는다'는 협박 아래서, 그 두려움 아래서 노예적 삶을 강요받아왔다.
"밖에 나가기 두려워  집 안에만 있으면 악순호나이 계속됩니다. 열악해도 용기를 내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김주영) (198-9)

 


(최정은) 병에 대해서 이수영 선생이 책에 쓴 부분, 특히 거기를 다룰 때 반응이 컸죠. 많이 아파 본 사람은 그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아도 심오해질 수 있다는 구절, 나만 제일 아프고 제일 불행했다고 아픈 것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아픔이 그냥 아픈게 아니고 더 깊어지는 거고.... 아픔이란 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올 거라는 것. 하지만 과거에 자기가 아팠던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들이 해준 것은 그냥 희망이엇죠.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식이었어요. (248)

 

(최정은) 그동안 우리가 쉼터에서 해왔떤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정리를 해보았죠. 그래서 '가족주의', 가족로망스, 게토, 연민.... 그런 것들을 발견한 거에요. '쉼터체제'라고 할까요? 그냥 연민의 주사만 놓는 거죠. 여기는 위안받아야 하고 쉬어야 하고 그런....
(이수영) 사실 제가 본 바로는, 쉼터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한쪽에는 아예 눌러앉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뭔가 조금이라도 귀찮게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쉼터에서 뭘 해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눌러앉는 것에 의해서도, 옮기는 것에 의해서도, 쉼터는 모두 무력화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쉼터는 어느 쪽이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죠. 여기 있는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봉사,  헌신, 인내밖에 없어요.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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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발췌독

다석은 죽음을 찬란한 육리라고 했지만, 감각적 물질문명에 깊이 빠진 오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죽음을 외면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지쳐서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인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죽음을 알고 다가오는 죽음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중병에 걸린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 할 경우에 의학적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은 매우 신중하고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람이 숨을 쉬는 동안에는 삶의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삶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이 힘차고 빛나려면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죽을 때는 사람답고 품위 있게 죽을 권리와 의무가 사람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94)

 

 

 

다석이 밥을 ‘나누어 먹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본 정신으로 본 것은 그의 기독교 이해, 예수 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 자신이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서 밥상 공동체 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앞두고는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알고 먹으라고 하였다.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고 예수의 삶과 정신으로 사는 것을 다석은 기독교 신앙으로 이해했다. 다석은 날마다 밥 먹고 물 마실 때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려고 했으며 이것이 신앙의 근본 행위라고 보았다. 다석이 밥에 대해 관심을 집중하고 바 먹는 일을 삶과 신앙의 근본 행위로 본 것은 예수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날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실 때 예수의 살과 피로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은 기독교 정신과 신앙의 핵심이고 다석의 삶과 정신의 중심에 속한다. (117)

 

 

 

날마다 먹는 밥은 다른 생명체가 제 생명을 ‘나’에게 바친 것이고, ‘나’를 살리기 위해 드려진 희생 제물이다. 그러나 밥은 ‘나’에게 머물지 않고 ‘나’를 넘어서 ‘나’ 속에 계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먹는 것이다. 따라서 “밥 먹는다는 것은 예배다. .....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인생의 목적은 예수처럼 하느님과 이웃에게 밥과 제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성숙하여 밥이 될 수 있도록 태초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쌀이 익어야 밥이 될 수 있듯이, 인생도 무르익어야 밥이 된다. 성숙해져서 밥이 되려고 밥을 먹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사람이 밥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다석은 “인생뿐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께 바쳐지지 위한 제물.....밥”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아니라, 말씀을 바치는 밥이다. “인생이란 밥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씀이다. .....밥에는 말씀이 있다. .....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칠 수 있는 밥이다.” 다석은 여기서 밥과 육체와 말씀을 결합한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는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 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 (119-120)

 

 

 

생각을 삶의 행위로 본 다석은 삶의 주체인 ‘나’를 ‘생각의 끝머리’, ‘생각의 불꽃’이라고 했다. 생각과 ‘나’를 일치시킨 다석은 생각을 ‘정신의 불꽃’이라 했고, 이 정신의 불꽃에서 ‘내’가 나온다고 하였다. 데카르트에게서 생각이 존재를 인식하는 행위라면 다석에게는 생각이 존재를 생성하는 행위다. 따라서 다석은 “내가 생각하니까 내가 나온다. 생각의 불이 붙어 내가 나온다. 생각에서 내가 나온다.”했다. (...)

다석에게 “내가 생각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인식론적 원리일 뿐 아니라 삶과 믿음의 원리이고 존재의 원리였다. 생각하는 것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주체적인 행위이고 나의 존재를 형성하고 실현하는 행위, 삶의 행위이다. 다석에 의하면 인간의 속알맹이는 “솟구쳐 올라가는 앞으로 나가는 창조적 지성”이며, 생각은 “생명의 빛을 밝히는 것”이다. (164)

 

 

 

다석에게 생각은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의 불꽃”이다. 생각은 정신의 불꽃인데 정신이 불이 붙으려면 정신이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정신은 거저 깨나지 않고 (삶 속에서) 간난고초를 겪은 끝에만 깨어난다.” 또한 “(나의) 정신이 통일되어야 (생각의) 불이 붙는다. 분열된 정신은 생각의 불꽃이 일어나지 않고 연기만 난다.” 정신은 지성적 계몽보다는 인생의 각난고초를 겪음으로써 깨어나고,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름으로써 통일에 이른다. (169)

 

 

 

윌슨은 유전 공학의 지식과 원리에 기초하여 유전자와 문화의 공동 진화를 말하고, 예술과 종교를 설명하려 한다. 그는 지식 대통합의 개념으로서 ‘부합, 일치’를 뜻하는 consilience란 개념을 쓰는데 이 말은 ‘함께(con)’, ‘뛰어오르다, 도약하다(salire)’에서 온 말이며, ‘함께 도약함, 도약해서 일치에 이름’을 뜻한다.

윌슨이 지식의 대통합을 위해 도입한 자연 과학적 환원의 원리는 그가 사용한 대통합의 개념인 consilience와 배치(背馳)된다. consilience는 ‘위로 올라가서 일치에 이름’, 곧 상향 일치(上向一致)를 뜻한다. 그러나 윌슨의 자연 과학적 환원론은 정신과 영의 존재를 물질과 육체의 존재의 지평으로 환원시키는 하향 일치이다. 물질-생명-정신-영은 존재의 위계가 다르다. 물질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생명에 있고, 생명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정신에 있으며, 정신에 없는 존재의 차원이 영에 있다. 큰 존재를 작은 존재의 지평으로 끌어내려서 일치시키려는 것은 존재론적 폭력이다. 큰 존재에서 작은 존재들이 포괄되고 통합되어야 한다. 다석이 말하듯이, 물질에서 영으로, 존재의 낮은 차원에서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만물의 이치가 함께 드러난다. (176-177)

 

 

 

참된 생각, 거룩한 생각은 하느님과 연락된 것일 뿐 아니라 하느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석은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고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뒤집혀졌다. 생각과 존재의 주체인 인간의 ‘나’ 대신에 신이 존재의 주체로 나온다. 생각하는 주체는 사람만이 아니라 하느님(神)이기도 하다. 다석에게서는 생각하는 행위에서 입증되는 것은 인간인 ‘나’의 존재가 아니라 신의 존재이다 .생각하는 데서 신의 존재가 확인되고 입증된다. 생각은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참 뜻 그것이 나의 본체다. ..... 참 뜻이 우주의 뿌리다. 뜻만은 영원이 죽지 않는다. .....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어 영원한 참 뜻을 이루어 가다.” (182)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성경』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 이해했다. “오직 믿고 복종하라.”는 본회퍼의 신학은 개신교 신학의 핵심을 드러낸 것인데 한국 선불교의 가르침과 통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선악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 가능성에 머물과 자기 정당화와 이웃에 대한 비판과 정죄, 논쟁과 분열로 이끈다. 이런 지식과 사변을 끊어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써 살림의 행동에 이를 수 있다. 선악에 대한 지식과 바리사이파의 율법 지식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게서 분리되는 것을 뜻하며, 자기 자신 및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낸다. 바리새파의 율법 행위는 하느님에게서의 분리, 자신과 이웃과의 분열을 나타낼 뿐이다. 선악에 대한 지식은 인간을 지식과 관념의 사변적‧감정적 가능성으로 이끌며,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뜻에 대한 단순한 복종, 현실적인 삶의 행동으로 이끈다. 본회퍼도 오직 행위에서만 삶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 “가능성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히 붙잡으라.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행위에만 자유가 존재한다.” (197)

 

 

 

읗로 오름 삶의 오름 올(早‧當年) 사리가 올바른 삶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

거룩다 그리스도록 이에 숨을 쉬는 이

 

이 시의 듯은 다음과 같다. “위로 올라가서 삶이 올라가는 삶, 일찍 주어진 시간을 옹글게 사는 삶이 올바른 삶이다. 알몸을 맡겨 버리는 날은 결혼하는 날이거나 죽어서 장사 지내는 날인데 이날에는 얼ᄆᆞᆷ이 되어서 얼ᄆᆞᆷ을 보게 해야 한다. 거룩하다.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서 예수를 이어 숨을 쉬는 사람.”

다석은 이 시 가운데 “알몸 맦여 버리는 날 얼ᄆᆞᆷ 돼서 뵈오리”를 풀이하면서 젊은 부부가 알몸만 서로 맡기지 말고 서로 얼과 ᄆᆞᆷ을 새롭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늘 새롭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석이 결혼을 부정하는 듯한 말도 자주 하고,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몸을 비하하고 정신만을 높이는 듯한 말도 여러 차례 하였지만 여기서는 분명히 결혼하는 젊은 부부를 축복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고 있다. 알몸을 맡기면서 얼ᄆᆞᆷ을 드러내 뵈라고 함으로써 알몸과 얼ᄆᆞᆷ을 결합하고 있다. (...)

몸을 ‘영혼의 그릇’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서서 다석은 건강한 몸을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라고 하였다. 다석에 따르면 “4백조의 세포가 하나로 모일 때에 여기 살알(세포)을 넘어서는 인격이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이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내 육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산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 의식, 절대 인격이 있는 것처런 느껴진다.”고 하였다. (201-203)

 

 

 

우주의 캄캄한 허공에 비하면 물질세계와 물질이 타는 빛은 아주 작은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허공을 드러내고 그 허공 속에 잠기는 어두운 저녁은 영원하고, 태양은 우주의 한 작은 화로에 지나지 않으며, 밝은 낮은 하루살이의 빛에 불과하다고 다석은 말한다. 더 나아가 햇빛과 물질은 영적인 세계를 가리고 그 세계와의 소통을 가로 막는다.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빛들음’은 ‘비뚤어짐’으로 숨길을 막는 요인이 된다. 숨길은 밤중에야 잘 뚫린다.” (215)

 

 

 

다석의 제자 함석헌은 「흰 손」이라는 시에서 미신적 속죄론을 비판하고, 믿는 이가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함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피가 구원의 효력이 있으려면 믿는 사람의 피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

(왜,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피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함석헌에게 예수는 2천년 전에 죽은 예수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오늘 나의 삶, 나의 몸과 뼈와 살 속에, 나의 피 속에’, ‘나의 얼과 혼’ 속에 살아 있는 예수다. (259-260)

 

 

 

다석에게 신앙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한우님의 고디는 우리 때믄 비르샤 우리로 ᄒᆞ야금 늘 삶(그리스도)에 들어가게 합소서.”(1955.12.11.) 그리스도가 곧 늘 삶, 영원한 삶이다. 믿음은 예수의 ‘늘 삶’에 참여함이다. (265)

 

 

 

고난받는 민중을 대속자라고 한 것은 자속과 대속을 통합한 것이다. 오늘 고난받는 민중이 자신들의 고난을 통해 속죄한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우리 모두의 죄를 씻어 준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또한 민중을 오늘의 예수로 본다는 점에서는 자속이고 예수의 십자가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대속이다.

여기서 다석은 “일체가 대속이다.” 하고 선언한다. 다석에게는 예수의 피만이 속죄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의인의 피가 속죄 능력을 가졌고, 의인의 피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 고통당하는 모든 인간의 고통과 애씀이 속죄 능력을 가졌다. 더 나아가서 자기의 목숨을 밥으로 내어 주는 자연 만물 일체가 속죄를 하고 있다. 서로 밥이 되는 “일체가 대속이다. ..... 야채, 고기 다 말 못하고 죽는 대속물(代贖物)”이라고 한다. 밥(먹이)이 ‘나의 생존’을 위한 희생 제물이고 ‘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대신 바치는 대속물이다. (266-267)

 

 

 

인생은 영속 개혁의 길을 가는 존재이다. 일시 개혁으로 부귀영달하리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삶은 “들어박히는 것이 아니라 박힌 데서 트고 나감이며 ..... 인간을 크게 열어서 참 살 길을 걷는 것”이다. 일시적‧일회적 개혁으로는 삶이 바로 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일회적으로 세상을 구속(救贖)했다고 하지만,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났다. 인간들이 “세상에서 밥을 알맞게 먹고 옷을 알맞게 입고 자미 보며 놀게 된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여전히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한다. 인생은 “머리카락 발톱 끝까지 개혁(改革)--영속개혁(永續改革)--에 들어가는 길이다.” (273-274)

 

 

 

“예수는 음식을 나눔으로써 삶을 나누었고, 삶을 나눔으로써 사랑과 평화의 깊은 일치를 이루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임재(臨在)를 경험하게 했다.” 성만찬은 예수를 기념하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예수의 밥상 공동체 운동’의 연장이며,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데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서 교회를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서 예수의 살과 피로써 하나로 된 공동체로 이해했다. 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밥상 공동체적인 의미로 이해된다. 예수의 몸은 함께 나누어 먹는 밥이며, 예수의 피는 함께 나누어 마시는 포도주다. ..... 예수의 존재 자체가 밥상 공동체(운동)로 육화(肉化)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고 하였다. ”부활한 예수는 사상이나 정신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가장 물질적이고 일상적인 밥을 나누어 먹는 자리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 (...) 다석은 밥과 예수를 동일시하면서도 식사를 하늘제사로 보고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다석은 식사를 ‘사랑의 나눔(割愛)’으로 보고, 천지 만물의 조화와 농민의 수고로 이루어진 것을 말했다는 점에서 밥의 공동체성과 민중성과 생태학적 차원을 주목했다. (277-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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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삶을 위한 국어교육> 발췌독 (2013.03.04)

몇 년 전, 한 결손 가정 아이의 집에 가정 방문을 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집, 안팎으로 발 디딤 틈도 없이 쓰레기와 옷가지로 가득 찬 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학교로 오는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그 아이의 '빈곤'을 '풍요'로 바꿔어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아이의 '빈곤'을 '가난'으로, 보살핌과 우정으로 견딜 만한 조건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다.
모든 교육적 상황은 백 가지 문제에 대한 백 가지 답을 가진, 근원적으로 무정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풀려는 노력은 '법과 제도'라는 시스템의 그릇 속으로 옮겨 담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방향으로 흐른다. 이것을 사람들은 '개혁'이라 부른다.
감각적이고, 질감이 있으며, 육체성을 가진 교육이 사라지면 인간적인 상호 접촉의 중요한 형식 하나가 사라진다. 오늘날의 교육개혁이란 이 살아 있는 대면 관계의 '황무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안락'에 대한 편집증이 낳은 비극이다. 교사에게, 그리고 전교조에게 필요한 것은 '자동차'가 아닌 '걸음'걸이의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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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발췌독.

시인 고은이 소설로 옮겨 쓴, <화엄경> 중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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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아무데도 없어. 그러나 진리를 찾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진리와 함께 있어. 진리는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찾아다니는 흐르는 물이나 그대와 같은 길손의 마음에 들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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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힌두 아유타의 고대시인 기나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아무리 황량한 곳이 있다 할지라도 서쪽 구도국 광야에 견줄 수 없는도다.

그곳은 모든 신들의 저주로 이루어진 곳

풀이 사나워서 바람을 잘라버리고 바위와 흙이 사나워서

쓰러진 자의 뼈다귀를 없애버리나니

갈지어다, 내 아들아

광야를 알고 싶거든 갈지어다

어찌하여 눈물과 여인의 노래로

세계를 안다 하겠느냐

광야를 알고 세계를 알고 싶거든

말과 낙타를 버리고 혼자 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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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늙고 이름 없는 사문(沙門) 농업에 종사하는 사문이다. 농업은 하루 이틀에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1년 아니 10년이 지나야 한다. 내가 딸과 헤어진 뒤 15년이 지나갔다. 그 동안을 이곳에서 나 혼자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왔다. 나에게 진리가 있다면 그것뿐이다.”

선재는 그의 긴 여행을 당분간 멈추기로 했다.

한 평범한 늙은 농부가 된 선현 비구에게는 반드시 깊이 감추어진 지리가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장다리꽃 한 개거나 무 한 개라 하더라도 그 진리는 온갖 세계의 관념을 떠나서 하나의 생생한 진리가 될 수 있지 않은가. 하루도 쉬는 일이 없는 산속의 외로운 농부야말로 어린 나그네가 함부로 길을 떠나지 않게 하는 힘이 되어 깊은 뿌리처럼 뻗어나고 있었다.

 

(...)

 

선재는 그 산속에서 곡식의 씨를 뿌려서 그것을 해가 짧은 건기(乾期)에 거둬들이는 동안 머물렀다. 그 적막한 농업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늙은 비구로부터 선재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가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우주의 법칙이 깃들여져 그 사람과 우주가 어린아이와 어린아이 사이의 단순한 말 <나하고 놀자>와 순수한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꿈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 박히는 어떤 놀라운 빛의 칼날처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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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은 모든 것을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를 안다지만

모든 것의 미래의 미래를 안다지만

작은 배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작은 배

작은 배는 모든 것을 아는 강물에 떠내려갈 뿐이라네

작은 배여,

아는 것은 강물에 던져주고

나의 작은 배는 오직 강물에 떠내려가네.

 

안다는 것은 깨닫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은 강물에 던져버리고 아무것도 몰느는 태초의 공(空)으로 돌아가서 강물에 떠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선재에게 새로운 기쁨이 강 위의 여행에 찾아왔다. 강의 어려 물결이 물결 자체를 깨뜨리면서 기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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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 일부 발췌독


 

 

 

 

「스파이크」

 

1931년 4월 문학잡지 <뉴 아델피>에 게재. 문학적인 에세이로선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글이다.사리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의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민바닥 생활을 하며 작가 수업을 하다지면에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이 글은 나중에 줄이고 고쳐져 그의 첫 책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파이크’는 구빈원에 딸린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인데, 간결한 번역어가 마땅찮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기 위해 본래 발음대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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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산한 방에서 부랑자들 대부분은 연이어 10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따분함이야말로 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자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거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無爲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 15-16pp

 

 

 

우리는 더돌이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부랑자를 하루 14시간씩 스파이크에 있도록 하고, 나머지 10시간은 길을 걸으며 경찰을 피해 다니게 하는 체제를 비판했다. 그는 또 자기 사례, 즉 3파운드어치의 연장 세트가 없어 6개월 동안 생활보호 대상자 생활을 해야 했던 얘기도 해주었다. 말이 되는 일이냐고 그는 말했다.

나는 구빈원 부엌에서 버려지는 음식쓰레기 얘기를 해주고 내 생각이 어떤지를 말해주었다. 내 말에 그는 당장 어조가 바뀌었다. 나는 내가 모든 영국 노동자 속에 잠들어 있는 주인 근성을 자극한 걸 알았다. 비록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굶주려온 처지이지만, 그는 음식을 부랑자에게 주지 않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바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제법 엄하게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요.” 그가 말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떼어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여기 이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려고 안 하지. 다들 그래서 저 골이 된 거라니까. 그런 사람들 격려해줄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며 반대론을 펴려고 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런 부랑자들 동정할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저 사람들을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하고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것도 없고. 다 쓰레기라니까, 쓰레기.”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마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8~19pp

 

 

 

「교수형」

 

1931년 8월 <뉴 아델피>지에 게재. 식민지 버마의 경찰 간부로 있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오웰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스케치가 돋보이는 유명한 에세이 중 하나다. 오웰은 같은 해 가을에 첫 소설 『버마 시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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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교수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간수 둘은 죄수 양쪽에서 총을 어깨에 걸고 행진하고, 다른 둘은 뒤에 바짝 붙어 팔과 어깨를 미는 듯 떠받치는 듯 잡고 걸었다. 치안판사 등 나머지 우리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10야드쯤 갔을까, 아무 명령도 주의도 없이 갑자기 행진이 딱 멈춰버렸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안마당에 떡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우리들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며 연이 세차게 짖어대더니, 많은 인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게 너무 반갑다는 듯 온몸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우리 주위를 펄쩍 펄쩍 뛰어다녔다. 에어데일과 떠돌이 잡종개가 섞인 덩치 크고 털이 긴 개였다. 녀석은 한동안 우리 주변을 껑충껑충 돌다가 누가 제지하디고 전에 잡가지 죄수에게 달려들어 펄쩍 뛰어오르더니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놀라 개를 미처 붙들 생각도 못하고 아연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글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운동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뒷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4~26pp

 

 

 

「코끼리를 쏘다」

 

1936년 가을 <뉴 라이팅>지에 게재. 「교수형」과 더불어 버마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며, 사후에 출간된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1936년은 오웰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해였다. 같은 해 6월에 결혼한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게를 하고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 열중했는데, 1월부터 3월가지는 한 진보단체의 의뢰를 받아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취재했고, 12월에는 이 르포 원고를 완정하자마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떠났다. 이 원고는 오웰이 스페인에서 싸우던 이듬해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발간되어 이전에 출간한 4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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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우회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본질을 (달리 말해 전제적인 지배의 진짜 동기를) 이전보다 더 잘 간파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내 다른 경찰서의 고참 경위가 내게 덜컥 전화를 하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와서 어떻게 좀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 조랑말에 올라타고 그곳을 향했다. 소총도 챙겼는데,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이라 코끼리를 잡기에는 너무 빈약했지만 그 소리는 위협용으로 쓸 만하다 싶었다. 도중에 여러 버마인들이 나를 지체시키며 코끼리의 소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야생 코끼리는 아니었고, ‘발정기’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길든 코끼리가 다 그렇듯 녀석은 ‘발정기’가 닥치지 묶여 있었는데, 전날 밤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었다. 발정난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조련사는 녀석을 잡으러 나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12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고, 아침에 녀석이 갑자기 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무기가 없는 버마인 주민들은 녀석이 나타나자 속수무책이었다. 녀석은 이미 누군가의 대나무 오두막을 부쉈고, 소 한 마리를 죽였으며, 과일 노점 몇 군데를 덮쳐 진열품들을 먹어 치웠다. 뿐만 아니라 시 당국의 쓰레기차와 마주쳤을 때 운전사가 뛰어내려 줄행랑을 치자 차를 뒤집어엎고는 마구 짓밟기도 했다.

(...)

나는 사망자를 보자마자 가까이 잇는 친구의 집으로 전령을 보내 코끼리용 소총을 빌ㄹ오도록 했다. 조랑말은 일찌감치 돌려보냈다. 녀석이 코끼리 냄새를 맡고 두려움에 미쳐 날뛰다 날 내동댕이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령은 몇 분 뒤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왔다. 그 사이 버마인 몇 사람이 우리한테 오더니 코끼리가 불과 몇백 야드 거리의 밭에 있다고 했다. 내가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실상 그 동네 인구 전체가 집에서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마즐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엇던 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 (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 자기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 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미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

나는 이미 길 위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리끼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시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를 손따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할 만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정기’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부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나는 소총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이미 그럴 것이라 알린 셈이었다.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2000명이 졸졸 따라오는 가운데 총을 들고 여기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버린다—그런 건 잇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중들이 날 비웃을 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하지만 난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코끼리가 정신이 팔린 할머니 같은 태도로 풀 다발을 제 무플에 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존재를 쏜다는 건 살인처럼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 나이에 나는 짐승을 죽이는 것에 대해 결벽적이진 않았지만, 코끼리는 쏘아본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아무튼 ‘큰’ 짐승을 죽인다는 건 언제나 더 불쾌한 일이다.)

(...)

나는 코끼리 가까이, 아마도 20야드 거리 이내까지는 다가가서 코끼리의 행동을 확인해야 했다. 코끼리가 덤벼들면 쏴야 할 것이고, 날 본체만체하면 조련사가 올 때까지 내버려둬도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나는 소총 사격 실력이 별로였고, 땅이 너무 질어서 밭에 들어가면 발이 쑥쑥 빠질 터였다. 그러니 코끼리가 덤벼들고 내가 맞히지 못하면, 나는 스팀롤러 밑에 깔린 두꺼비 신세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순간엗 ㅗ나는 내 목숨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뒤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는 노란 얼굴들만 의식하고 있었다. 그 많은 군중이 날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혼자 있었다면 느꼈을 법한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되기에 대개 두려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때 나한테 든 유일한 생각은 일이 잘못되면 2000명의 버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쫓기다 붙들려 짓밟혀서, 비탈 위에 있는 인도인처럼 이를 싱긋 드러낸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대안이 하나 있었다. 나는 탄약통을 탄창에 밀어넣고 길에 바로 엎드려 정조준하는 쪽을 택했다.

(...)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성이 크게 들리지도 않았고 반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명중했다는 뜻이었다). 대신에 군중이 좋아서 날뛰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표적에 닿기까지의 신간보다 짧은 순간이었을 테지만, 코끼리한테 알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코끼리는 움직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몸의 모든 선이 변해 있었다. 당장 쓰러지진 않았어도 총탄의 엄청난 충격에 마비가 된 듯, 느닷없는 일격에 몸이 오그라들고 엄청나게 늘어버린 느낌이었다. 꽤 오래 그 상태로 있더니(아마도 5초쯤 됐을 것이다) 코끼리는 결국 풀썩 무릎을 꿇었다. 입에선 침이 흘렀다. 너무나 노쇠한 기운이 코끼를 압도해버린 것 같았다. 수천 년은 산 존재가 아니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같은 자리에다 다시 총을 발사했다. 두 번째 일격에 코끼리는 쓰러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필사적으로 일어서더니 다리를 떨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거우 몸을 폈다. 나는 세 번째 탄알을 쏘았다. 이게 결정타였다. 코끼리의 온 몸이 흔들이며 마지막 남은 힘이 다리에서 빠져 나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코끼리는 쓰러지면서 잠시 다시 일어서는 듯 보였다. 뒷다리는 무너졌지만 코를 나무처럼 하늘로 뻗는 모습이 거대한 바위가 위로 솟구치는 듯했다. 코끼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트럼펫 소리 같은 울음을 토했다. 그러고는 배를 내 쪽으로 향하며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내가 엎드려 있는 땅까지 흔드는 듯했다.

나는 일어섰다. 버마인들은 이미 나를 지나쳐 진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코끼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분명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길게 그르렁거리며 헐떡일 때마다 거대하고 불룩한 옆구리가 고통스레 오르내렸다. 입은 헤벌려져 있어 옅은 분홍빛인 목구멍 깊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호흡은 더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이 있지 싶은 부분에 발사했다. 빨간 벨벳처럼 진한 패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다. 총을 맞을 때 몸을 꿈틀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호흡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숨소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움직임 힘도 죽을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그 목숨을 어서 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몹시 불쾌한 노릇이었다. 나는 내 작은 소총을 가져오라고 해서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다 한 발씩 쏘아넣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듯했다. 고통스러운 헐떡임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꾸준히 이어졌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버렸다. 죽기까지 반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버마인들은 내가 가기도 전부터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정오 무렵엔 코끼리가 거의 뼈만 남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그 후 코끼리 사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인은 몹시 화를 냈지만 인도인일 뿐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이었다. 미친 코끼리는 주인이 제대로 못 다스릴 경우 미친개처럼 죽어야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내가 옳았다고 했고, 젊은 사람들은 쿨리를 죽였다고 코끼리를 소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그 어떤 드라비다 쿨리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그 쿨리가 코끼리 때문에 죽은 걸 다행으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쏠 핑계가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시와 마이크」

 

1943년 가을에 집필해 1945년 3월 <뉴 색슨 팜플렛>지에 게재한 글. 이 글을 쓰던 무렵인 1943년 11월에 오웰은 2년 남짓한 BBC 라디오 프로듀서 생활을 접고, 좌파 주간지인 <트리뷰>지 문예 부문 편집장 일을 맡는다. 그리고 같은 때에 집필에 들어가 1944년 2월에 완성한 『동물농장』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정당하다 결국 1945년 8월에야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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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문학 방송 프로그램을 인도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주로 당대와 당대에 가장 가까운 영국 작가들의 시를 많이 방송했는데, 그런 작가들이란 예를 들면 엘리엇, 허버트 리드, 오든, 스펜더, 딜런 모머스, 헨리 트리스, 알렉스 컴포트, 로버트 브리지스, 에드먼드 블런든, D.H. 로렌스 같은 이들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나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나와 방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딱히 왜 이런 특정 프로그램을 시작했는지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인도의 특정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구성하는 테크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덧붙이고 싶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문학 방송은 인도의 대학생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소규모의 적대적인 그 청취자들은 영국의 선전운동이라 할 만한 다른 무엇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우리가 기껏해야 수천 명 이상의 청취자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진작부터 알려진 바였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방송에서 가능한 것보다 ‘고상’해도 되는 핑계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써먹은 방법 하나는 음악 속에 시를 앉히는 것이었다. 먼저 잠시 후에 이런저런 시를 방송할 것이라고 예고해준다. 이어서 음악을 1분 정도 틀어준 다음 페이드아웃하면서, 제목이든 뭐든 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시를 낭독한다. 그리고 음악을 다시 페이드인해서 1~2분 정도 계속 틀어준다. 이렇게 해서 5분 정도에 시 한 편을 음악과 함께 소개하는 것이다.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는 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음악을 이용하는 진정한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프로그램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편을 3분 분량의 뉴스 속보 속에 끼워넣으면서도 어쨌든 내 귀에는 크게 어색하지 않돌록 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방송을 하는 게 그저 청취자들에게만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하고서 매료되었다. 시를 방송하는 방법에 관한 한 영국에선 별달리 시도된 바가 거의 없으며,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크게 소리내어 릭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 앞에 앉음으로써(특히 그럴 일이 정기적으로 있을 대) 시인은 우리의 시대와 나라에서는 달리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자기 작품과 맺게 된다. 근대에 와서 시가 음악이나 구어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서정적이거나 수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나라라면 어디서나 일반인들이 시에 거부감을 갖는 게 당연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간극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틈이 계속해서 벌어져가고만 있으니, 시는 주로 인쇄된 형태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관념이 모호하과 ‘교묘함’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공감은 할지언정 방송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방송이 연설이나 강연과 다른 게 바로 이 점이다 .대중 연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 알 듯이, 연단 위에서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청중이 무엇에 반응하고 안 할지는 항상 몇 분 안에 분명해지며, 실제로 연사는 청중 가운데 제일 모자란다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발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도 ‘개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란을 떨어가며 환심을 사야 한다. 안 그러면 결과는 언제나 냉랭하고 당혹스런 분위기로 나타난다. 청중 앞에서 하는 ‘시 낭송’이 끔찍한 건, 청중 가운데 따분하거나 거의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단순히 채널을 돌림으로써 다른 데로 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제대로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어려움 때문이다. 극장의 관객은 선별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선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방송에 익숙해진 시인들이 마이크에 대고 시를 읽으며 청중이 보이는 데서라면 발휘할 수 없는 기량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하는 요소가 개입된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통해,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는 게 당혹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사람 대 사람의 정상적인 교류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시인에게 만들어줄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작품을 종이 위의 패턴보다는 ‘소리’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서 시와 일반인 간의 화해가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 화해는 전파를 수신하는 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발신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

아놀드 베넷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틀 속에서 개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미적인 개선이 사회 전반을 구원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장 미움 받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처지로부터 시를 구제하여 사람들이 음악에 베푸는 만큼의 관용만이라도 받도록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단, 그러자면 시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인기가 없는지를 질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

일례로 나는 글을 쓰기 직전, BBC 9시 뉴스 바로 전에 늘 하는 두 코미디언의 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지막 3분을 남겨두고 한 코미디언이 갑자기 “잠시 좀 심각해지고 싶다”더니 국왕 폐하를 찬양하는 「멋쟁이 영국 신사」란 말도 안 되는 애국시를 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최악의 영웅시를 듣게 된 청취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면 BBC에 그런 짓을 즉각 중단하라는 분노의 편지들이 꽤 날아들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다수 대중이 ‘시’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을지언정 ‘운문’에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운율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면 어떤 노래나 익살5행시도 유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것은 시가 불가해성, 지적 허세, 그리고 남들 바쁜데 혼자만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단어 자체가 ‘하느님’이나 목사의 개목걸이(빳빳이 세운 칼라)같은 말처럼 나쁜 인상부터 심어주는 것이다. 시를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후천적인 억제를 완화시켜주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야유를 내뱉는 대신에 듣도록 해주는 문제다. 진정한 시를 다수 대중에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소개할 수 잇다면, 그것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드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화 역시 독점 자본 형성기에 처음 나왔고, 제작부터 소비 단계까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점점 더 관료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있는데, 관료의 목표란 결국 예술가를 망가뜨리는 것, 혹은 최소한 거세라도 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기만 하다면 전망은 암울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진행될 게 분명한 전체주의화는,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예견하기 어렵던 새로운 변화 덕분에 완화되고 있다.

 

 

 

 

 

「당신과 원자탄」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게재. 일본 원폭(8월 6일) 두 달여 뒤에 발표한 글이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글은, 원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1984』를 설정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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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가장 강력한 무기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시대는 폭정의 시대인 경향이 있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

여러 조짐으로 추측건대, 러시아는 아직 원자탄 제조의 비밀을 보유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수년 안에는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게 일치된 견해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몇 초 만에 수백만 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가공할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 가질 전망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은 전쟁이 점점 더 커지고 끔찍해짐에 따라 기계문명이 종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식의 다소 성급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만일 살아남은 강대국들이 서로에겐 절대 원자탄을 쓰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를(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다면?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쓰거나 쓴다는 위협을 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권력이 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들과 피억압 계급들의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는 것뿐이다.

(...)

지난 40~50년 동안 H.G.웰스씨 등은 인간이 무기로 자멸함에 따라 개미처럼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 인간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해왔다. 독일의 파괴된 도시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봄 직하다. 하지만 세계 전반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수십 년 동안의 흐름은 무질서가 아니라 노예제가 부활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만일 원자탄이 자전거나 자명종처럼 싸고 쉽게 만들 수 잇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야만으 ltl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단, 그랬다면 국가 주권과 고도로 집중화된 경찰국가의 시대도 끝났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지금 그래 보이듯 원자탄이 전함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귀하고 값진 물건이라면, ‘평화 아닌 평화’를 무한히 연장하는 대가로 대대적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실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잇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 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뒷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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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프레이리, <프레이리의 교사론> 중에서 - 2012.2.19

"비문해에 스며 있는 폭력 가운데 하나는 읽고 쓰기를 금지 당한 이들의 의식과 표현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읽기를 한 것을 글로 써봄으로써 처음에 읽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능력을 제한합니다.
내 손 때가 묻어있는 연필, 빈 종이,... 글 쓰는데 필요한 백지를 챙겨서 책상머리에 앉아 글을 쓰는 과정이 사실은 내가 책상 근처에 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내가 행동하거나 실천할 때 혹은 앎의 대상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이미 시작됩니다." (38-40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86쪽)

"실로 두려움은 하나의 권리이지만, 두려움을 교육하고, 두려움에 맞서며, 그것을 극복할 의무가 따릅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거기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분석하고 두려움의 원인과 우리의 대응능력 간의 관계를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려움과 맞선다는 것은 두려움을 감추는 것이 아니며, 두려움을 감추지 않는 것이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는 것입니다.
평생을 살면서, 나는 분명한 어떤 한계선 안에서 내 자신과 내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어떤 것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최선의 행동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날 어떤 대화에서 거짓으로 자신감을 표현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최선의 방식은 인간적인 것과 그 한계를 분명히 하면서 당시 느끼는 그대로를 학습자들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학습자들에게 말해줄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권리라는 것과 그 권리를 교육자들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두려워할 권리가 있듯이 교사들도 두려워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교육자들은 불사신이 아닙니다. 학생들이 인간인 만큼 교육자들도 인간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싸울 능력이 없다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있는지 반문해봐야겠지만, 두려움을 겪는다는 사실 때문에 교사의 자질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종종 초임 교사의 불안감까지도 알아채는 노련한 학생들 앞에서, 교실에서 첫날을 보내면서 교사가 겪는 두려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33-134쪽)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게 읽고 쓰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보기도 전에, 물질적인 변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읽기는 그 읽기 안에 들어 있는 진보적인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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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중에서 - 2012.9.2

지금 지구촌에는 꿀벌들이 사라져간다고 합니다. 꿀을 따러나간 벌들이 전자파로 인해 길을 잃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구촌에서 꿀벌들이 완전히 사라지면 4년안에 대재앙이 인류사회에 덮쳐온다고 합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들의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그로 인하여 사과, 포도, 쌀 등의 먹거리가 생산될 수 없습니다. 먹거리가 없는 인류의 삶이란 고통과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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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인하여 꿀벌들이 사라지고 꿀벌이 사라짐으로써 인류의 운명도 위험에 처해지고 있습니다. 드러난 현상만으로 보면 꿀벌이 나와 전혀 무관해 보이지만 그 실상은 꿀벌 자체가 바로 내 생명입니다.

- 도법스님,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30p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도법
불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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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 2012.9.2

페이스북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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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의 주옥같은 말씀 몇 구절 훔쳐오기.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 중에서)

사람들은 푸름을 노래합니다. 푸른 산, 푸른 바다, 푸른 청춘, 푸른 서울, 늘푸름, 늘봄. 물론 푸름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러나 정말 푸름은 푸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푸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생명이 제 즐거움에서 푸름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푸른 것이 생명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겉 푸름이 있고 속 푸름이 있습니다. 속 푸름에서 겉 푸름이 나왔지, 겉 푸름이 속 푸름을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다시 푸름이 되려면 반드시 한 번 죽어 썩어서 근본에 돌아가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푸름이란 없습니다. 없는 늘푸름을 나모하고 숭배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늘푸름은 전체에만, 근본에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푸...름은 푸름이 아닙니다. 늘푸름은 가지는 것은 씨ᄋᆞᆯ뿐입니다. 씨ᄋᆞᆯ 속에는 푸른 잎도 있지만, 또 검은 뿌리도 있고 붉은 꽃도 있고 갈색 나무통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온 계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 27p

흙! 씨ᄋᆞᆯ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의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흑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나옵니다. 씨가 흙 속에 떨어지기 전엔 평안이 없습니다. 그저 불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자아를 열지 않습니다. 아구 트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질 때 거기서는 노래와 춤이 나옵니다.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씨ᄋᆞᆯ도 그렇습니다. 겸손히 역사의 바닥에 내려갈 때 혼의 평안은 오고, 혼이 평안을 얻을 때 거기서 우주의 영(靈)의 부름에 의한 활동이 기쁨과 영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아이들이 서로 치고 받아 그 피와 시체로 더럽혀 놓은 역사의 동산을 다시 푸른 생활로 갱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아! 봄이 왔씁니다. 여러분, 안녕하십시오.
- 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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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선생님의 "상처의 의미" - 2012.10.5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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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뒤 진행될 인권교육 워크샵에 이계삼 선생님을 강사로 섭외했다. 오늘 보내주신 자료집 글에, 예전에 읽었던 <상처의 의미>라는 글이 있다. 다시 읽더보니 또 새록새록 아름다운 문장들이 다가온다.

"아이들은 무수한 상처를 받으며 성장한다. 누구도 상처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존재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상처를 발생시킬 일체의 가능성을 거세한 무균질의 진공 상자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양육된 존재는 영혼 없는 물질덩어리일 뿐이며, 적당한 자극에 예측 가능한 크기로 반응하는 모르모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그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하여 예측 불가능한 폭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은 상처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교육이란 상처와 뒤엉켜 그것과 함께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난 시절 한국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에 완전히 무심했고, 이제는 이 상처가 폭력으로 분출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로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

이게 힐링이고, 멘토링이다. 상처를 감당할 자신 없으면 빠지는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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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선생님 강의 속기록을 정리하다가. - 2012.11.18

페이스북에 썼던 글 - 2012.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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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들었던 이계삼 선생님 강의 속기록을 정리하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아래 문장에 밑줄과 별표 다섯개.

"교육이란 무엇일까? 묻는 다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대화를 하고, 상처를 같이 걸어가는 거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처를 없는거처럼 치부해서도 안되고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치유하는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애인 교육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을 누군가의 손에 떠맡기는 방식, 그러니까 시설, 정신과 의사, 병원, 사법체제, 경찰, 체벌, 전학 등.. 이런 것에 의존하잖아요. 사실 교육은 대화하고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같이 걸어가는 것, 그 과정이 다 인데... 그게 귀찮고 싫고, 심리학도 모르고 정신과도 모른다고 해서 다른사람에게 맡기는 게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탈이나 상처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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