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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모멘토) 中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19쪽)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방식을 현실화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22쪽)

 

 

여하튼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보험설계사의 적이며 부동산 중개사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너를 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네 몫 이상으로 노력하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가.(26쪽)

 

 

니체가 빈정대며 지적했듯이, 초월적인 신(神) 즉 하느님을 전능한 인류로 대체한다 해도 어떤 의미에선 달라지는 게 거의 없다. 여전히 세상에는 고정된 형이상학적 중심이 존재하며, 그 중심이 이제는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우리는 스스로 부과한 제약 외에는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주권자이기 때문에, 새로이 찾아낸 신적 권리를 행사하는 가운데 황홀할 정도로 창조적인 희열을 주는 파괴에 탐닉하기도 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다시 말해 주인처럼 뻐기면서 우쭐대던 유형의 인본주의까지 종언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본주의는 은밀한 신학으로 남고 신은 교외 거주자들의 점잖은 도덕으로 형태만을 바꾸어 새로운 세월을 조용히 보내게 될 것이다. 요즘의 하느님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인간의 무한성이 결국하느님의 영원성을 지탱해주는 셈이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성육신(成肉神, Incarnation)의 교리에서는 육신을 지닌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는 점을 망각한 채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무한함에 어리석게 도취한 인간은 너무나 빨리 앞으로 나아가다 도가 지나쳐 중심을 잃고 결국 무(無)로 떨어지는 위험에 끝없이 빠져든다. ‘인류의 타락’ 신화와 다를 바 없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이른바 비극(悲劇)예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항암화학요법이 그렇듯이 비극이라는 치료법도 질병 자체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극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제한적 투쟁을 지켜보면서 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떨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예술가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요즘 같으면 자기창출(self-origination)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 부를 만한 것을 경계하는 전형이다. 보다 근원적인 의존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숱한 역사적 재앙이 시작됐다. 이 같은 태도는 오늘날 서구의 신제국주의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이기도 하다.(28-30쪽)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자기부정은 금연이나 금주 따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포기하는 일, 전통적으로 '순교'라고 알려진 행위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예수가 만약 죽기를 바랐다면 그는 무수한 자살자 중 하나가 되고, 그의 죽음은 자살폭탄테러범의 흐트러진 종말만큼이나 덧없고 무가치했을 것이다. 자살자와 달리 순교자는 타인들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그들에겐 죽는 것까지도 사랑의 행위다. 그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다. 이는 타인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 예컨대 나치 독일의 가스실 앞에 남을 대신해 줄을 선 사람뿐 아니라 타인에게 생명이나 살아갈 힘을 줄 수 있는 원칙을 지키려고 죽음을 택한 사람에게도 해당되는말이다. '순교자(martyr)'라는 단어는 '증인'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원칙이다. 이런 점에서 순교자의 죽음은 생명의 하찮음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입증한다. 이슬람의 자살폭탄테러범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42쪽)

 

 

모든 증거가 불리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패배자를 경멸하는 나라들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여기겠지만, 실패에 대한 충실성이라 부를 만한 믿음의 태도를 견지할 때만 인간의 힘은 창조적이고 지속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냉정한 현실주의를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이고 다른 모든 것은 감상주의에 사로잡힌 허튼소리거나 이데올로기적 환상, 가짜 유토피아, 거짓된 위안,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이상주의일 뿐임을 알아볼 때, 그제서야 최후의 보루가 결국은 최후의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질 수 있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환상을 잔혹할 정도로 깨뜨린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죽음을 맞지 않는다면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건지 변명의 해야 할 정도다. 인간 조건의 적나라한 시니피앙은 사랑과 정의를 강력하게 옹호하다가 그 때문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엉망으로 훼손된 시신이 인류 역사의 충격적 진실이다. (43-4쪽)

 

 

지금까지 보았듯이 나 같은 사람과 디치킨스는 신학적 관점뿐 아니라 정치적 관점도 판이하다. 리처드 도킨스와 내가 가장 근본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사실 하느님이다 과학, 미신, 진화, 그리고 우주의 기원 등에 대한 생각이 아닌 듯하다. 신학자들은 적어도 직업적으로는, 헨리 제임스처럼 절묘하게 복잡한 작가가 과연 진화라는 조잡하고 실수 많은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조금의 관심도 없다. 내가 알기로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이는 세상을 엄밀하게 조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도자기 꽃병을 아무리 자세히 뜯어보아도 그게 결혼 선물임을 알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디치킨스와 나 같은 급진주의자 간의 차이 역시 인간 조건의 궁극적인 시니피앙이 고문 받고 살해당한 정치범의 몸뚱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는지,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54-5쪽)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New Age)다. 하지만 뉴에이지는 영적인 것의 서툰 모방에 불과한데, 물질주의에 매몰된 문명에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을 터이다. 마음이 냉혹한 사람들이 감상적인 노래를 들으며 훌쩍이곤 하듯이, 진정한 영적 가치가 품안에 굴러들어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들이 유독 영성(靈性)을 뭔가 으스스하고 영묘하여 심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띤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며,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다시 풀이하면,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우스개가 난처할 정도로 노골적인 유머이듯이, 무정한 세계에서 감정 혹은 정(情)의 원천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전통적인 종교뿐이라는 얘기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59쪽)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그것들은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여기서 종교는 인민의아편이라기보다 인민의 크랙 코카인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근대성(modernity)이 내거는 가치들을 거부하지만, 근대의 과학기술과 조직 방식들은 그것이 화학적이건 미디어 기술이건 필요한 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영국에서 이라크 침략을 지지한 좌파 인사들 혹은 이전에 좌파였던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한 성명에서 “우리는 근대성에 대한 두려움을 거부한다.”라고 했는데, 이들의 말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됐다. 하나는 이슬람이 근대성을 덮어놓고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근대성에는 거부할 만한 게 많다는 점이다. 화학전을 불안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복고적인 반동세력이 되는 건 아니다. 화학전이 두렵지 않다면 도대체 뭐를 두려워해야 한단 말인가. (61-2쪽)

 

 

아퀴나스가 『이단논박대전』에서 말하듯이, 각 피조물의 궁극적인 완성은 행함에 있다. 아퀴나스의 생각에 존재란 실체라기보다 행위다. 그에겐 하느님조차 명사보다 동사에 가깝다. 우리의 몸 자체가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성을 해체한다. 나는 안에서 눈구멍을 통해 밖의 세상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에 참여하는 행위자로서 항상 세상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따라서 아퀴나스도 비트겐슈타인처럼 ‘외부 세계(the external world)’라는 일상적인 표현에 대해 곤혹스러워했을 법하다. 저 등나무가 내 옆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저 나무가 내 ‘밖에’ 있다고 본다면, 실재의 나는 마치 크레인을 운전하는 사람처럼 나의 몸 안에 웅크리고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럼 그 실재의 나는 또 누가 움직이는 걸까? (109쪽)

 

 

행위에서의 주체성과 사물에 대한 지배력, 그리고 자율성 등은 바람직한 미덕이지만, 위협적이리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지게 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주권은 고독과 불가분한 것임이 드러난다. 계몽정신으로 무장한 인간은 확신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자신이 이 우주에 홀로 서 있으며 그의 진가를 증명해 줄 것도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그는 세계를 지배한다면서도 거기에 개재된 자의성과 불확실성을 진저리 칠 정도로 의식하게 되며, 이런 상황은 근대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각해진다. 자신이 한 손으로 방금 세상에 끼워 넣은 가치를 다른 손으로 끄집어내어 이것 보라며 제시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 주체가 딛고 선 토대가 자기 자신뿐이라는 점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112-3쪽)

 

 

얄궂게도 진보라는 개념에는 종교적인 여운이 있다. 찰스 테일러는 『세속의 시대』에서 진보의 개념을 ‘신의 섭리의 대체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독교 종말론은 무한한 발전이라는 생각과 거리가 멀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들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 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근대적인 사고에서는 이른바 거대담론을 믿는 반면 포스트모던한 사고에서는 이를 믿지 않는데, 그와는 별도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거대담론이 하나 있으며 그것은 미래뿐 아니라 과거에까지도 소급해 작용하리라고 본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구원된 인류에게 비로소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주어지게 되기” 때문이다.(124-6쪽)

 

 

철저하게 합리적인 미래라는 꿈은 얼만큼이나 천국의 대체물 역할을 하는 걸까? 절대화된 ‘진보’는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 나름의 ‘내세(來世)’인가? 자유주의적 합리주의는 정말 종교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128쪽)

 

 

상상해보건대, 하느님이 갑자기 소설가 토머스 하디의 외양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더라도 하디는 그다지 감격하지 않았을 듯하다. 충실한 진화론자인 하디는 하느님을 순수하게 인간적인 모든 관점들이 수렴되는 가공의 지점으로 보았으며, 그 자리에 어떤 초월적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인정한다 해도 본디 불완전하고 관점에 얽매인 인간의 삶에 그런 존재가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디의 생각에는 하느님이 정말 존재하더라도 우리에게 특별히 흥미로운 말을 해줄 게 없다. 그는 어느 시에서 하느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세상에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구를 약간 바꾸어 말한다면, 하느님이 말을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을 터이다.(150-1쪽)

 

 

바디우에 따르면 믿음의 행위에 관련된 지리는명제적 진리와 전혀 무관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명제적 진리로 환원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디우에게 믿음이란 그가 ‘사건(event)'이라고 부르는 것 -- 역사의 평탄한 흐름에서 훌쩍 벗어나 발생했기에 기존의 맥락에서는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의미를 파악할 수도 없는 지극히 독창적인 일 -- 에 대한 끈질긴 충실성에 있다. 진리는 세상의 결을 거슬러 옛 체제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현실의 토대를 놓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155-8쪽)

 

 

근본주의는 천박한 기술적 합리성 -- 중요한 영적 문제들을 냉소적으로 일체 외면함으로써 편협한 사람들의 그것을 독점하도록 허용하는 합리성 --의 압박에 내몰려 광신에 까지 이른 사람들의 믿음이라 할 수 있다. (193쪽)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보편적인 가치를 특정한 시대, 특정한 공간에서 구현해야 할 문화가 결국은 보편적 가치를 공격하게 된다. 요컨대 문화는 억압된 것의 격렬한 회구라 할 수 있다. 문화는 문명보다 국지적이고 직접적, 자연발생적이며 합리성과 무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둘 중에서 더 미학적인 개념이다. 자기네 고유의 문화를 기리고 지키려는 유형의 민족주의는 언제나 가장 시적(詩的)인 종류의 정치로, 전에 누군가 말했듯이 ‘문학인들의 발명품’이다. 하기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민족주의자이며 시인이었던 파드릭 피어스를 위생위원회에 배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1-2쪽)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며, 오직 사랑에서만 문명의 아름다움이 샘솟을 수 있다고.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한데 얼핏 보기에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지혜에 이르지 못한 듯하다.(210-1쪽)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우리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에 대한 긍정이 궁극적으로 가치 있으려면, 왕정복고 이후 미몽에서 깨어난 밀턴처럼 인간이 애당초 구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조너선 스위프트의 소설에서 거인국의 왕이 무슨 생각으로 인간을 구역질나는 해충이라고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긍정이어야 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변화된 사회가 미래에 반드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교조적 자유주의자, ‘진보’의 광신자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이 변화의 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런 미래가 조금은 떠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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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임금이론』(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주요부분 요약

 

 

 

마르크스의 임금이론

(케네스 라피데스 저,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연구소)

 

 

■ 마르크스의 초기 임금이론

 

1)『1844년 경제학․철학 원고』

-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노동자의 소외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이 드러나 있다는 점 때문에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임금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그다지 주목을 끌지 못함.

- 수요-공급법칙과 노동자의 생계적 필요가 임금수준을 경정하는 일차적 요인으로 이해됨. 반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탄압과 같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가 이러한 시장의 효과가 실현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됨. 하지만 마르크스의 성숙기 분석의 근본적 특징인 생계적 필요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사실과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요소가 빠져 있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생계적 요구와 상대적 임금이라는 측면을 통해 기존의 분석을 넘어서기 시작하고 있음. “모든 사회 계급들의 평균 소득이 증대하였다는 것은 거짓이지만, 이를 사실이라 가정할지라도 소득 격차, 따라서 상대적 소득 격차는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부와 빈곤의 대립은 더욱더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총생산이 증가하고 그와 똑같은 정도로 욕구, 욕망, 요구도 나타나고 증대하는 까닭에, 절대적 빈곤은 줄어든다 할지라도 상대적 빈곤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2) 엥겔스, 「경제학 비판 개요」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 모두를 통틀어 임금 문제를 최초로 다루고 있는 저작.

- 엥겔스는 이 글의 목적을 자본주의 체제와 그 이데올로기, 경제적 불의와 위선을 고발하는데 두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노동자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요소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엥겔스는 당대에 중요했던 다른 주제들, 예를 들어 맬서스의 인구론이라던가 기계의 도입이 고용과 임금에 끼치는 영향 등에 대해서는 면밀히 연구하였다. 특히 후자에 대해서 엥겔스는 “자본과 토지의 노동에 대한 투쟁에서, 자본과 토지라는 두 요소가 노동에 비해 갖는 특별한 이점이 이다. 그것은 바로 과학의 지원을 받는다”라고 말했다. 기계는 공장주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계획도 분쇄하고, 열세를 면치 못하는 노동이 자본에 대해 벌이는 투쟁에서 그나마 노동이 쥐고 있던 힘의 흔적마저도 지워버렸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둘의 공동작업인『신성가족 비판』에 이르러 임금인상을 위한 노동자의 조직된 투쟁을 중요하게 인식하면서 이를 무시하는 견해를 논박하기 시작한다. “임금의 크기도 처음에는 자유로운 노동자와 자유로운 자본가 사이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뒤늦게 노동자는 자본가가 임금을 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수 없으며 자본가도 될 수 있는 대로 임금을 낮추지 않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계약 쌍방의 자유 대신에 강제가 나타나게 된다.

 

3) 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 엥겔스는 최저임금은 노동자들 경쟁으로 인해 결정되지만, 최고임금은 부르주아 자신들 간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상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 자본가는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한다. 수요 증가 때문에 모든 가능한 노동자가 다 흡수된 뒤라면 자본가들은 자신들끼리 노동자를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 결과 임금이 상승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평균 임금률을 결정할 수 있다. 평균적 상황에서 임금은 최저수준 약간 위쪽에서 형성된다. 여기서 평균적 상황이라 함은 노동자나 자본가 모두의 경쟁, 특히 자신들끼리 경쟁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며, 정확히 수요만큼의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수 정도의 노동자만이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임금이 최저수준보다 어느 정도까지 상향할 수 있는 지는 노동자의 평균적 필요와 문명화 정도에 달려 있다. (...)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있으며, 그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아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보다 적게 줄 수는 없다. 반면 자본가 자신들 간에 경쟁이 없는 상황에 특별한 호의를 베풂으로써 노동자를 유인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보다 많이 줄 이유 또한 없다.

- 과잉인구는 어떤 자연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로 인해 발생한다. “노동자들 간의 경쟁에 의해 최고 수준으로 올라간 손노동의 작업속도와 생산성, 분업, 기계의 도입, 자연력의 이용 때문에 노동자 다수는 빵을 빼앗겼다” 여기에 더하여 교역위기의 효과도 고려해야 한다. 공장이 문을 닫거나 기존의 절반만 가동되면 “실업자와 경쟁, 노동시간 감소, 수익 매출의 부재 등으로 인해 임금은 내려간다.”

 

4) 『철학의 빈곤』

- 프루동을 비판하면서 혁명적 입장에서 노동조합주의를 방어함. 그러나 임금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의 분석은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 미달하는 것으로, 이 저작에서도 임금수준 결정에 있어 사회적, 역사적 요소에 대한 언급을 빠뜨리고 있음.

-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순진한 생각을 논박하기 위해 그 이전에 기각한 바 있던 리카도의 분석을 다시 받아들이고 있음. “노동 자체가 상품이라 할 때, 노동의 가치는 노동이라는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통해 측정된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노동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들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 즉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의 종족을 번식시켜 나갈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5) 『임금노동과 자본』

-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임금 문제만을 다룬 최초의 저작.

- “화폐로 환산된 상품의 교환가치를 가격이라고 부른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을 지칭하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동일한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경제학의 상투적 가르침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임금은 ...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상품에서 차지하는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일정한 양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한 기존 상품의 일부분이다.” 노동자는 노예와는 다르게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팔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이 부르주아 혹은 저 부르주아에 속한 것이 아니고,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 속해있다.” ⇒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이론이 발생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음. (자본과 임금노동 사이의 교환을 설명하면서 명시적으로 ‘노동력’이라는 표현을 씀)

- 상대적 부와 상대적 임금에 대해 논하기 시작함. “임금이 현저히 증대되려면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전제 되어야 한다. 생산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마찬가지로 부, 사치, 사회적 욕구 및 사회적 향유의 급속한 성장을 야기한다. 따라서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증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에 비하면, 즉 사회의 발전 상태 일반에 비하면, 감소된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욕구와 향유를 재며, 욕구와 향유를 만족시키는 것들을 기준으로 만족의 정도를 재는 것이 아니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

- 임금은 자본가의 이득과 비율의 문제로 사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 실질임금이 변함없더라도 심지어 오르더라도, 상대적 임금은 하락할 수 있다. 즉 임금은 무엇보다도 자본가의 이득, 즉 이윤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 즉 상대적 임금이라는 것.

- 임금변동이 가지는 이점에 대해 강조. 임금의 변동이 없다면, 노동자는 문명의 발전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 최저점 이상으로 임금의 일시적 상승이 없다면 노동자는 모든 생산의 발전, 사회적 부, 문명, 따라서 해방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

- 맬서스로부터 기원하는 임금기금설을 논박함. 그는 생산적 자본이 성장하고 그 결과 노동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경우에도, 현대 산업과 자본의 특성상 노동자 고용을 위한 수단은 동일한 비율로 증가하지 않는다고 지적. 이것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산업의 본질적 속성과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

 

6) 『공산주의자 선언』

- 『선언』은 임금과 관련하여 “임금노동의 평균 가격은 최저임금이다. 다시 말해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자를 노동자로 겨우 연명케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양고 같다”고 쓰고 있다. 임금은 이러한 최저생계를 “연장하고 재생산”할 수 있을 정도다. 『선언』에서의 이러한 해석은 이후 마르크스의 임금론을 이해하는데 지속적인 영향을 미침.

- (마르크스의 <자유무역 문제에 대한 연설>(1848)에서) 자본의 성장은 사실상 노동자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 그러나 이는 자본의 축적과 집적을 의미. 이러한 집중은 분업과 기계의 사용을 증가시킴. 분업의 심화는 노동자의 특화된 기술을 파괴하며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증대. 자유무역의 교리에 따르면 경쟁은 모든 상품의 가격을 최소 생산가격으로까지 떨어트린다. 따라서 최저임금이 노동의 자연가격. 그렇다면 최저임금이란? 노동자의 생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임 품목의 생산을 위해 필요한 것과 정확히 똑같은 양이며, 개별 노동자도아 노동자 계급의 존속을 위해 필요한 것과 동일한 양. 그는 또한 “노동자들이 오로지 이 최저임금만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항상 이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된다.” “더 값싸고 저질의 음식으로 노동을 유지하는 방법이 끊임없이 발견됨에 따라 최저임금은 끊임없이 하락한다."

- 마르크스는 런던 거주 당시 근대 노동자운동과 접촉하면서 이 사태를 분석. “이러한 파업은 일차 생필품 가격의 전반적 상승에 상응하여 노동-잉여가 상대적으로 하락한 필연적 결과”. 그는 파업 이외에는 노동자들이 자신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실제 시장 가치를 받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경제적으로 정당화 함.

 

 

 

 

■ 『경제학 비판 개요』와 『1861-63년 경제학 원고』

 

1) 경제학 비판 개요

- 『자본』의 최초의 원고로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음. 또한 이 저서의 의의에 대한 논의도 학자에 따라 분분한 상황.

- 마르크스는『개요』의 몇몇 구절에서 임금에 관해 별도의 장 또는 절에서 논하겠다고 하면서 분석을 유예함. 일부 저자들은 이를 근거로 그가 후에 『자본』출간에 후속해서 자신의 임금이론을 완성하는 임금노동을 다루는 별도의 저작을 쓸 계획이었다고 오해. 그러나 있지도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마르크스가 표현한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진실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

- 마르크스의 임금 분석 방법에 있어서의 전제 : “임금은 언제나 최저로 가정된다. 이런 가정 하에서만 하나의 관계를 논하려 할 때 기타 여러 가지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최저’라는 말의 의미는 이전의 저작에서 ‘최저생계’를 의미했던 것과 다름. 여기서는 ‘사회의 특정 상태’에 의해 규정되는 최저임금. 그것은 단지 임금의 상승이나 하락, 또는 토지 소유의 영향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을 때의 이윤 법칙들을 확정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고정된 가정들은 설명이 계속되면서 모두 불필요해진다. 마르크스는『자본』1권에서도 ‘분석상의 목적으로’ 상품이 자신의 가치대로 교환되고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 가치에 따라 임금을 지급 받는다고 가정했을 뿐이라고 말함.

- 『개요』에서의 임금결정 방식 분석 :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임금 수준을 결정한다는 리카도의 주장을 논박하면서 경쟁은 임금 수준의 하락의 원일 수는 있어도 “일반적인 임금 표준”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자본-노동의 기원적 관계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고 말함. 경쟁은 부르주아 경제 법칙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집행자.

- 마르크스는 자본의 성장과 자본의 생산력 성장은 그 가변 요소(산 노동과 교환되는 자본의 부분)의 비율이 체감한다는 것을 함의한다고 말함. 그는 과잉인구에 대한 맬서스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노동 능력의 일정 부분을 과잉인 것으로, 즉 이 부분의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과잉인 것으로 정립하는 것은 필요노동에 비한 잉여노동 증가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말함. 이 경향은 노동수단을 기계로 전환함으로써 실현. 그러난 그는 어떻게 해서 기술 발전이 잉여인구 증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의 원이 되는지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음.

-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내재한 특성.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소비를 자극하고, 자신의 상품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며,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욕구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 자본은 노동을 자연적 필요의 경계 이상으로 내몰고, 그리하여 풍부한 개성의 발전을 위한 물질적 요소들을 창출한다. [풍부한 개성 속에서] 자연적 욕구는 역사적으로 창출된 욕구로 대체되었다.”

- 마르크스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노동의 이중성을 발견한 것.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그 자신의 노동력.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분석은 잉여가치의 비밀을 푸는 열쇠. 마르크스는 186-63년 원고에 이르러서야 노동력 가치를 노조와 명시적으로 연관 지음.

 

2) 『1861-63년 경제학 원고』

- 이 원고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노트 4권-15권은 훗날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됨. 마르크스는 “화폐는 어떻게 자본이 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 그 해답은 노동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에 달려 있음. 다른 모든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자신을 유지하고 한 명의 노동자로 살아가고 아이를 낳기 위해 필요한 생계수단의 가치로 분해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상품이 그렇듯이, “노동력의 시장가격은 어떤 시기에는 제 가치 이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다른 시기에는 제 가치 이하로 하락하기도 하면서” 장기적으로는 평균값을 나타낸다. 여기서 생계수단의 가치를 감소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의 수준을 떨어트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여성과 아동의 부양책임이 그 평균수준을 결정하는 데 포함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도 노동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이 수준을 떨어트릴 수도 있다.

- 통상노동일의 연장은 양적 차이 뿐 아니라 질적 차이도 있으므로 노동력의 일일 가치는 변화된 평가액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초과수당을 요구한다. 13시간 노동일이 12시간 노동일을 대체하면, 노동자의 노동력은 더 빨리 소비될 것이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력 연한이 20년이라면 15년으로 단축되는 셈이다. 이러한 초과수당의 문제는 1860년대를 뜨겁게 달군 이슈로서,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정상적 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시간에 대해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더라도 이는 결코 임금인상이 아니며 초과시간에 해당하는 가치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현실에서 초과수당은 이를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사실 초과근로 시 더욱 늘어나는 노동력 마모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서는 추가된 시간만큼이 아니라 매 노동시간에 대해 더 놓은 임금률이 매겨져야 한다”고 말함.

- 노동력의 정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생계수단의 양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 사용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동일한 양의 생계수단이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인해 더 짧은 노동시간 동안 생산될 수 있다면, 노동력이 계속해서 제 가치대로 판매되더라도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할 것이며, 이로 인해 그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도 짧아질 것이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생계수단의 종류, 따라서 삶의 쾌락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가 영유할 수 있는 사용가치의 양과 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의 결과 중 하나로 노동일 중 더 큰 부분이 자본에 의해 영유된다는 상대적 잉여가치의 법칙을 증명한 뒤, 마르크스는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의 결과 노동자의 물질적 상태가 다방면에서 개선되었다는 통계적 증명을 통해 이 법칙을 반증하려고 하는 본말전도”를 공격한다.)

- 노동자운동이 성장하고 사용자로부터 양보를 쟁취할 능력이 신장되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도 그 영향이 반영되었다. 노동자들은 “(실질)임금의 감소를 막아낼 수 없더라도, 임금이 절대적 최저치로 하락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전반적으로 증가한 부 중에서 일정한 양을 분배 받을 수 있다.” 이는 최저임금 그 자체는 변화하며 항상 하락한다는 1847년 당시 마르크스 자신의 견해를 뒤집은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주장으로 세간에 알려진 소위 ‘궁핍화’ 교리에 대한 반대이다. 확실히, 생산성이 상승하고 상품가격이 하락할 때 노동자가 그 상품을 소비한다면 명목임금이나 노동력 가치가 감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정확히 반대다. 세계시장에서 한 나라의 생산성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을 때, 그 나라의 임금은 다른 나라보다 더 높다. 영국에서 명목임금과 실질임금 모두 다른 나라에 비해 더 높다. 그러나 생산성에 대비해서 측정해보면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높지는 않다.

- 임금기금설에 대한 비판 : 임금기금설은 일정한 자본 기금이 임금 지불에 사용된다는 통념, 즉 이 이금은 노동을 고용하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고 기타 용도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통념이 중심을 이룸. 그래서 임금기금의 출처인 축적된 자본이 확대되어야 임금상승도 가능하다는 논리. 그러나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반박한다. “한편으로 그들은[노동자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 아이를 낳지 않으면 노동 공급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의 가격은 상승한다. 그러나 노동의 가격이 상승하면 축적률이 감소하고, 그 결과 노동 수요가 감소하고 노동의 가격이 떨어진다. 노동의 공급이 줄어드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자본이 줄어든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공급을 늘려 노동의 가격을 떨어뜨리게 된다. 따라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자본축적도 상승한다. 말하자면 노동인구는 정확히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숫자만큼 존재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말이다.”

-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발전할수록 가변자본으로 재전환되는 잉여생산물의비율은 더욱 작아지며 언제나 생산과정에서 잉여화되는 인구도 더욱 늘어난다. 노동자 숫자를 증가시키지 않고서도 소비되는 노동의 양이 커질 수도 있다. 노동의 공급은 ... 노동자의 수가 아니라 노동일의 길이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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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부분 요약 정리

『미-래의 맑스주의』(이진경, 그린비)

 

 

▶ 화폐와 사회 (138-141쪽)

 

- 상품들의 세계는 화폐를 통해 고유한 질서를 획득하며, 이런 의미에서 화폐는 상품들의 세계를 동질적 공간으로 변환시킴으로써 질서를 만들어낸다. ⇒ 상품들이 구성하는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고 통합하는 것은 ‘가치’나 ‘계약’이 아니라 화폐의 초월적 권력

- 상품세계와 화폐의 관계는 근대인과 근대국가의 관계와 정확하게 동형적. 정치경제학은 상품세계에서 개별적 가치형태의 전개로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를 특정한 한 상품의 ‘선출’과 배제를 통해 극복한다는 소설과도 같은 내러티브를 통해 화폐의 탄생을 설명. 이러한 설명의 논리는 개별적인 의지들이 서로간에 대립하고 있는 자연상태 내지 전쟁상태를 피하기 위해 어떤 하나의 대표자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위임하는 홉스나 계약론의 설명방식과 유사.

- 이러한 화폐의 거래망은 공동체와 상응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하지 않음. 교환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화폐조차 공동체 사이에서, 공동체들간의 교역을 위한 공간에서 발생했고, 공동체의 바깥에 있는 외부자들에 의해 취급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평화상태는 양국의 지배자 간에 항상 증여가 행해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곧 상업적 성질을 가진 추장교역이며, 추장상업은 이로부터 발달하였다. 증여가 단절된다는 것은 전쟁을 의미했다.”(막스 베버, 『사회경제사』)

- 자본주의의 발상지로 간주되는 중세도시의 경우에도, 그 도시의 상업과 부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른 도시와의 대외교역. 이러한 도시간 대외교역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광범위한 상업적 교역망과 더불어 화폐의 교역망을 만들게 되는데, 이러한 ‘화폐거래 네트워크’가 나중에 영토국가와 손을 잡거나 그것에 의해 포획되면서 영토국가 차원의 시장과 화폐가 발전.

- 그 경우 화폐는 전쟁자금이나 궁정의 사치 등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리에 사용되었고, 그것의 조달은 국가가 나중에 걷을 조세를 담보로 은행가나 상인에게 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국가는 그 채무를 인민들에게 조세로 떠넘겼다. 그리고 조세를 화폐로 납부하게 함으로써 화폐가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화폐가 한 ‘사회’의 내부에서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화폐, 특히 어떤 사회 내부의 일반화된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는 개별적인 교역 내부에서 교환의 확대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국가적 조세를통해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시장적인 모델의 세계에서 화폐의 지위는 단순한 교환의 매개라는 상인의 위상이아니라 인민들을 지배하고 그들에게 조세를 내라고 요구하는 군주의 지위와 훨씬 더 가깝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5장.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하여

 

1. 산업혁명과 노동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은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 맑스는 노동이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사용가치”라고 주장. 즉 ‘노동의 가치’란 자본가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사용하여 산출한 생산물의 가치라는 것.

- 이러한 정의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함축함. 헤겔식의 ‘노동이란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란 개념에 반하여 노동과정이란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각 노동력을 사용하는 과정이라는 주장. 이는 노동을 자본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사회적인’ 본질로서 재정의 한 것.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노동이 된다. 즉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관계하에서 ‘노동자의 활동’은 ‘노동력 상품의 사용’(=노동)이 된다.

- 이러한 정의는 자본주의에서는 ‘노동’ 자체가 항상-이미 계급적 적대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다시 말해 노동과정 자체가 두 개의 적대적인 의미가 항상-이미 대립하는 계급투쟁 과정임을 의미.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포섭’

 

①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 자본이 노동을 형식적으로 포섭한 조건에서 자본은 노동력의 구체적인 사용 양상을 장악하고 사용할 수 없으며 다만 노동의 결과물만을 자신의 소유로 영유할 수 있을 뿐이다. ⇒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포섭’ / 노동시간을 연장함으로써만 잉여가치를 확대시킬 수 있음. ‘절대적 잉여가치’

- 자본과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처음부터 시간을 둘러싼 투쟁의 양상을 띰. 14-18세기 영국의 노동법규는 노동일을 강제로 연장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함. 톰슨(E.P. Thompson)의 말대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노동생활은 “한바탕 일하고 한바탕 노는 것의 반복”이었기 때문에 자본이 노동자의 노동과정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없었음. 그래서 국가적 법을이용해서라도 노동시간을 확보하려고 함.

 

②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 산업혁명으로 인해 개별 노동에 고유한 기능이 기계로 이전되고, 숙련은 해체되어 기계적인 동작의 집합이 됨. 이제 자본가들은 기계의 운동을 장악함으로써 노동의 리듬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됨. ⇒ 상대적 잉여가치로의 전환, 그러나 노동시간은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확대. 이제 반대로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제한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리게 됨.

-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노동자의 활동을 노동자의 의지로부터, 간단히 말해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려는 경향을 확인하게 됨. 노동 자체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성이 펼쳐지는 중요한 양상.

 

 

2. 기계화의 세 가지 계기

 

① 육체노동의 기계화

-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에서 나타난 ‘과학적 관리’나 그에서 연원하는 인체공학의 발전 등을 ‘육체노동의 기계화’라 부르자. 이는 다양한 육체적 동작을 역학적 수단을 통해 분석하여 표준화된 요소동작으로 분해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을 노동자로부터 분리하기)

- 1870년대경부터 미국의 도살장 등에서 사용되던 것을 포드가 전면적으로 채택하여 공장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어셈블리 라인은 개별적인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다른 차원에서 분할된 노동을 결합시키는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테일러와 길브레스의 ‘과학적 관리’라는 시도와 구별되는 것.

 

②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

 

a. 정신노동의 기계화

- 인공지능 개념의 사용은 컴퓨터의 발전과 결부되어 있음. 튜링은 ‘튜링-기계’ 개념을 창안했던 1930년대에 이미 컴퓨터의 본질이 아주 단순한 이론적 기계를 모델로 한다고 주장했다. 즉 통상 ‘계산’이나 ‘연산’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사고과정을 7가지의 기계적 연산(테이프를 읽어라/테이프를 한 글자 왼쪽으로 옮겨라/테이프를 한 글자 오른쪽으로 옮겨라/테이프에 0을 써라/테이프에 1을 써라/다른 명령으로 넘어가라/멈추어라)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 나아가 그는 컴퓨터의 연산과정과 인간 두뇌의 사고과정이 본질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 ⇒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으로 간주되던 정신활동 내지 정신노동이 기계화될 수 있게 됨. ⇒ 정신노동의 기계화

 

b. 결합노동의 기계화

- 어셈블리 라인이 사물들의 물리적인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을 기계화하는 것이었다면, 전기나 전파를 통해서 수행되는 전자기적 네트워크는 소리나 문자, 정보는 물론 전기적 신호로 변형가능한 모든 비물질적인 것의 흐름을 기계화함으로써 결합노동의 범위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확장.

- 컴퓨터에서 처리하기 위한 탈코드화/재코드화의 형식으로서의 디지털은 이질적인 형태의 정보를 하나로 동질화하여 일괄처리할 수 있는 표현형식을 제공. 이러한 디지털화의 과정은 모든 정신적 프로세스가 빛의 유무로 치환가능한 0과 1 두 숫자의 집합으로 초코드화(overcoding)되는 것을 뜻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정신적인 영역의 모든 이질성이 동질적인 수로 변화되는 탈코드화(decoding)를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디지털화된 정보는 전달된 것 그대로 다른 것들과 혼합되거나 변형되어 일괄처리 될 수 있으며, 따로 입력하거나 형태를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사용될 수 있음. 이로 인해 네트워크로 연결된 모든 지점이 결합된 활동이나 결합노동을 할 수 있게 되며, 분리된 지점에서 수행하는 활동이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조건만으로 직접적으로 결합될 수 있게 됨. ⇒ 결합노동의 기계화

 

 

3. 자동화와 정보화

 

-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식화하여 구별하자면, 자동화가 육체노동의 기계화와 정신노동의 기계화를 졉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면, 정보화는 정신노동의 기계화와 결합노동의 기계화를 접합함으로써 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a. 자동화

- 자동화는 일차적으로는 기계화된 동작에 피드백이나 재귀적 처리를 포함하는 일련의 사이버네틱 프로세스를 결합해 ‘노동자 없는 노동’을 기계로 수행하게 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전통적인 관념에서 노동이나 ‘생산적 노동’이 수행하던 역할이 기계의 작동으로, 기계의 ‘노동력’의 사용으로 이전됨. 이제 노동은 노동자의 활동이라는 정의로부터 거의 벗어나서 자본가의 손에 전적으로 장악되고 포섭됨. ⇒ 산업혁명을 통해서 진행된 육체노동의 기계화가 자본에 의해 노동이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육체적 및 정신적활동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노동 없이도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이러한 양상은 자본에 의해 노동이 기계적으로 포섭되는 과정이라 말 할 수 있음.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b. 정보화

- 자동화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기계적 도식을 통해 노동자의 활동능력 자체를 기계적으로 포섭하는 것이었다면, 정보화는 오히려 노동자는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활동을 그 자체로 포착하여 가공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어 저장하고 일괄처리할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킨다. 정보화를 통해 자본은 디지털화된 네트워크와의 ‘접속’을 수반하는 모든 활동을 가치화한다. 이럼으로써 자본은 굳이 노동력을 구매하지 않고서도 모든 종류의 활동 자체를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 정보화의 예 : 은행 창구 직원들이 하던 노동은 기계 앞에서 우리 자신이 직접 수행해야 하는 ‘비노동’으로 대체. 주문하는 활동 자체가 직접 입력하는 행위를 통해서 주문장을 만들던 이전의 노동을 대체. 이전에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활동의 산물들, 가령 그림이나 디자인, 음악, 지식 등과 같은 것들을 직접 재료로 삼아 가공하여 상품화.

- 자동화가 노동자의 고용없이 인간의 노동능력 자체를 이용/착취하는 것이라면, 정보화는 노동자의 고용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이용/착취하는 것. (‘사회적 활동을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 자동화든 정보화든 모두 노동자의 활동은 더 이상 노동력-상품으로 구매되지 않은 채 기계적으로 포섭되어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짐.

 

 

4. 기계적 포섭의 결과들

 

- ‘기계적 포섭’이란 생산의 중심적인 프로세스를 자동화된 기계가 차지하고 ‘인간’은 그것을 그 기계적 프로세스의 입력과 출력을 담당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를 의미. ‘인간’에 속한다고 생각되던 요소들이 기계의 일부가 되고 ‘인간’의 활동이 기계적 과정의 시작(입력)과 끝(출력)을 차지하게 되는 양상. 네트워크의 발전과 정보화의 진전은 이러한 입력과 출력의 지점들이 ‘공장’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공간에서 탈영토화되어 사회 전체로 확장되며, 생산과 비생산은 물론 대중들의 일상적 삶 전체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

 

 

5. 기계와 잉여가치

 

-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보화된 활동의 결과나 정보화하는 기계와 접속하는 활동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란 점에서 비용의 지출 없이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착취하는 것임을, 그것을 통해 노동자 내지 인간을 착취하는 것임을 표현한다. 즉 사회적 잉여가치는 정신노동 및 결합노동의 기계화에 따른 결과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활동을 수행한, 혹은 수행하는 사람 자신이 생산한 것이다.

- 하지만 자동화는 사회적 잉여가치와 달리 활동이나 활동의 결과를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능력 자체를 착취하는 것이기에, 노동자나 인간에 대한 착취의 형태로 진행되지 않으며, 반대로 노동자나 인간 없는 생산의 형태로 진행된다. 극한적인 형태의 자동화된 공장이란 노동자가 사라진 공장,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고 기계가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표상된다. ‘노동의 종말’이란 관념이 정보화와 무관한 게 아님에도, 일차적으로는 자동화라는 현상의 짝으로 표상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 자동화된 공장에서 자본은 직접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이 ‘인간화된 기계’를 통해서 노동자 내지 인간의 노동능력을 착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계적 잉여가치란 노동자가 아니라 기계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 기계적 잉여가치의 존재는 단지 새로운 기술의 채택에 따른 초과이윤을 뜻하는 특별잉여가치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화된 기계가 생산한 것이고, 기계화된 인간의 능력을 자본이 착취하는 것이다.

- ‘기계적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론 : 비판자들은 가치와 사용가치는 다른 것이고 사용가치가 증가한다 해도 개별 상품의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전체적인 노동시간이 변하지 않았다면 가치량은 증가한 게 아니라고 주장. 즉 기계적 잉여가치란 새로운 기술이 전반적으로 평균화됨에 따라 소멸하게 될 일시적인 특별잉여가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렇다면 자동화된 공장에서 생산하는 상품이나 개개의 자동화된 기계가 생산하는 상품은 가치는 없고 사용가치만 있는 그런 상품일까? 자동화가 전면적으로 진행될 경우 우리는 마치 식물들이 생산하는 산소를 공짜로 사용하듯이, 저 ‘인간화된 기계’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을 (재료값만 지불하고)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일까? (사용가치는 흘러 넘치지만 지불해야 할 가치나 잉여가치는 없는 새로운 천국?)

- 요컨대 노동의 기계적 포섭은 노동자 내지 인간의 능력 자체를 기계화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착취한다. 기계가 생산하는 잉여가치, 그것은 자본이 기계를 이용하는 방식의 한 극한이고, 자본이 노동을 노동자에게서 분리하려는 전략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이는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지만, 그것은 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이 자본의 한계 안에서만 유효하다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그렇다. 그러나 인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인간학적 관념, 근대적인 경제학의 공리는 이러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한다.

 

 

 

 

▶ 6장. 부르주아는 자본주의적 계급인가?

 

1.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길?

 

- 『자본』에 나타난 자본주의 발생에 관한 상이한 두 가지 서술 : I권 마지막에 서술된 자본주의 실질적 출발점이 되었던 ‘본원적 축적’은 국가적 폭력에 의한 끔찍한 횡탈로 진행된 반면, (III권에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과거에 해당하는) 자본에 의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했던 대부자본이나 상인자본은 대체로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기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들을 갖고 있었음.

- 후자의 경우 자본주의로 가지 않는 길이지 자본주의로 가는 길이 아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라리 상인자본처럼 근대적 자본의 직접적 선행형태로 보이는 것조차 자본주의로 이행의 계기를 갖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가로막는 계기로 자곧ㅇ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따라서 그 두가지 길이란 상인자본 같은 자본의 선행형태들이 포함하고 있는 두 가지 길, 두 가지 방향의 벡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적절함.

 

① 돕-스위지 논쟁

- 돕 : 자본주의의 발생을 상인자본에 결부시켰던 당시 역사학의 통념을 비판하면서, 반대로 생산자가 상인이 되는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길’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했는가를 제시하려 함. “상인자본은 대체로 구질서의 기생충으로 그쳐버리고, 청년기가 지나면 상인자본의 의식적 역할은 혁명적이 아니라 보수적으로 된다.”

- 스위지 : 원격직 교역에 따른 영주들의 사치품 수요 증대, 그를 위한 화폐에 대한 욕구 및 과도한 착취가 봉건제 위기를 야기한 원인. 즉 봉건제의 붕괴는 자립적으로 성장한 소생산자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에 속한다고는 할 수 없는 원격지 교역에 기인하는 것.

- 상인자본의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것을 저지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두 가지 길은 역사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이행의 두 가지 유형’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과 자본주의 사이에 손쉬운 화살표를 긋는 통념에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

 

 

2. 도시와 자본주의

 

- 부르주아지는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이 영주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도망쳐 획득한 것이 ‘자치도시(Commune)’였다. 이러한 도시나 도시동맹체들의 발전은 일차적으로 상업의 발전을, 그리고 그에 따른 화폐자본의 축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자본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을 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길드(guild)라는 동업조합으로 표상되는 특권들을 통해서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저지했다. 왜냐하면 “상인자본에게 황금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바로 시장의 미발달” 이었고, 자신들이 교역을 독점함으로써 발생하는 초과이윤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교역 내지 상업이 도시 외부로 확장되는 것을, 도시 외부에서 시장이 발전하는 것을 극력 저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자본주의 발생과 발전에 필요한 상업의 발전, 화폐자본 축적을 야기했지만 결코 자본주의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반대로 자본주의의 발달을 극력 저지하고 시장의 확산을 가로막았던 것.

-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시장이나 생산을 오직 도시라는 특권적 영토 안에만 제한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확산과 발전을 저지하고 방해했다는 점에서, ‘도시적 길’은 자본주의 이행의 길이었다기보다는 그것을 도시 안에 가둠으로써 그것을 저지하고 가로막은 길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 이는 상업적 도시 부르주아지뿐만 아니라 수공업자나 매뉴팩처러 등의 생산자 부르주아지에게도 해당되는 지점. 생산자 부르주아지의 맹아적 성장을 강조하는 돕의 경우에도 수공업자조합이 상업부르주아의 손에 장악되는 식으로, 수공업자가 상인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경우나 아니면 수공업자 자신이 상인귀족화되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준다.

- 결론 : 도시의 시민이란 의미에서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니라고 말해야하며, 자본주의는 도시에서 탄생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3. 자본주의와 영토국가

 

- 질문 : 소생산자는 자본가계급이 될 수 있을까?

- 소생산자의 독립성은 상인들에 대한 독립성일 뿐만 아니라 상품 자체에 대한 독립성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 독립성으로 인해 시장에 크게 의존하지 않으며, 또한 상품시장의 흐름을 형성하는 구매력을 형성하지도 않는다. 또 소생산자가 만들어내는 시장은, 바로 그들의 ‘독립성’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여분을 교환하는 지극히 제한된 시장일 뿐이다. 나아가 상품화된 시장이 소생산자들의 농촌 세계에까지 깊숙이 침투하기 전은 물론 그 후에도 시장에 대해 ‘독립성’을 가지며, 따라서 시장에 잘 편입되지 않는다. 즉 소생산자가 자본가가 되는 것은 ‘이미’ 자본주의의 존재를 전제한다. 요컨대 상인이 자본주의화를 예견하면서 저지한다면, 소생산은 자본주의화를 밀고 나가기에는 너무도 ‘독립적’이다. 그래서 맑스는 자본주의 출발점을 이루는 이른바 ‘본원적 축적’은, 돕의 생각과 반대로 소상품생산의 대대적인파괴를 수반한다고 썼던 것이다.

- 결국 중요한 것은 소생산자가 상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업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도시의 통제를 넘어서 시장이 농촌으로 확장되어야 하고 지방으로, 전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도시의 상인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는 다른 이유에서 소생산자로서도 결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여기서 우리는 도시동맹체나 도시국가와 대비되는 영토적 국가의 존재를,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절대주의(절대왕정)에 주목해야 한다. 도시의 특권과 도시적 교역의 제약을 넘어서 국가적 영토 안에 그것을 통합하고, 봉건적 귀족의 영토와 권력을 넘어서 절대군주의 단일한 권력 아래 그것을 통합하고, 영토 내부의 흩어진 지역들을 잇는 도로망을 건설함으로써 국지적 시장을 지방적인시장으로, 나아가 전국적인 시장으로 통합하는 것. 이는 바로 절대주의 국가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에 속한다.

- 이러한 영토적 내지 영토국가적 통합은 도시의 힘과 권력이 강성한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했다. 절대주의 국가가 유럽에서 도시의 힘이 취약한 지대였던 서유럽,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발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 영토국가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느리게 성장해 옴. 그렇게 느리게 성장한 것은 도시에 비해 훨씬 광대한 영토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인 통합능력을 형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국시장이 완수되려면 농업, 상업, 수송업, 공업 사이에, 또 수요와 공급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영국이 마침내 이런 균형에 도달하자 네덜란드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경쟁자가 되었다.”(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III』)

 

 

4. 자본주의와 절대주의

 

- 절대주의 왕정의 관료들에 의해 시행되었던 중상주의는 정확하게 전국적 시장의 창출과 영토국가적 통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상주의는 “국지적 교역과 자치도시 교역의 케케묵은 텃세를 깨부수어 도시간, 지방간의 구별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구별도 점차 무시하는 전국시장으로의 길을 열었다.”(칼 폴라니, 『거대한 변환』)

- 자본주의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길’이 유효화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이었다면, 그리하여 생산자가 상품생산을 위해 생산하는 ‘상인’이 되기 위한 조건이 전국적 시장의 g여성이었다면, 이는 단일한 중심으로 통합된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고, 바로 그것이 절대주의가 직접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고. 자본주의는 나중에 ‘국민국가’라고 불리는 그런 영토적 국가를 통해서 비로소 사회적인범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따라서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고. 아니, 자본주의는, 그것이 비록 식민지의착취와 수탈, 세계경제의 발전을 실존의 조건으로 하며, 그것을 통해 발전한다고 하더라도, 영토국가를 통해 형성된 국경을 통해 존재할 수 있었고, 국경을 단위로 작동하고 ‘발전’한다고.

 

 

5. 누가 부르주아지가 되었나?

 

- (다시 강조하자면,) 소생산자의 분해를 통해서 한편은자보가로 성장하고 양적으로 대다수인 다른 한편은 노동자가 되었다는 식의 내적 발전의 도식이 순전한 ‘신화’라는 사실. 소생산의 분해는 이미 국내시장의 형성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미 충분히 성장한 자본가계급을 전제로 한다.

- 인클로저나 교회재산의 몰수, 공유지 횡령 등을 비롯하여 이른바 ‘본원적 축적’을 구성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거대한 ‘본원적 자본’을 형성한 사람들은 어떤 계급인가? 그렇게 거대한 재산을 집적한 사람들은 무엇보다 우선 자본가계급이 되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 (책에서 소개된 몇 가지 사례들을 보면) 영국에서 젠틀맨이라고 불리던 귀족 출신의 대지주들이 16세기 미래 소위 ‘본원적 축적’을 통해 자본가계급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그들이 귀족이라는 사실은, 다시 말해 왕의 권한에 속하던 국가적 독점의 특권들에 가장 먼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급이라는 사실은, 이들이 자본가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 정반대로 이들이야말로 가장 쉽게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 반대로 상인이나 무역업자들처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거나 국가의 허가와 원조를 필요로 했던 층은 말할 것도 없고, 제조업자들 또한, 영토국가 자체의 성격과 밀접히 결부된 국가적 독점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이나,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따라서 지주나 귀족과 자본가를 그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본질적으로 다른 계급으로 구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자본가들이 도시 체제 안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면, 지주나 귀족들은 절대왕정의 영토국가 안에서 국가적 독점을 축으로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되어 간다.

 

 

6. 국가와 부르주아지

 

- 우리는 그 탄생기에서나 아니면 ‘정상적인’ 시기에서나 국가야말로 다양한 출신을 갖는 부르주아적 층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묶고 그것에 동질성을 부여하는 장치라고 말해야 한다. 이미 우리는 본원적 축적 과정에서 봉건영주, 지주, 상인, 제조업자, 수공업자, 대규모 차지농 등의 이질적인 층들이 국가권력이라는 축으로 모여들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의 계급이 된다는 것을 충분히 보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국가를 통해서만 부르주아지는 하나의 동질적 계급이 된다고.

 

 

 

 

▶ 7장. 계급과 비-계급의 계급투쟁

 

(...)

 

2. 자본주의 공리계와 계급

 

- 자본주의에 이르면 법은 이제 원칙적으로는 모든 경우에 해당되며 모든 사람들에 대해 동일하게 적용되는 보편적 형식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법이 관련된 사항들 전체에 동등하고 동일하게 적용되는 최소한의보편규칙이고, 개별적인 경우들이 그것에 기초해야 하는 그런 최상위규칙이란 의미에서 ‘공리적’이란 것이다.

- 이러한 자본주의 공리계에는 그 공리들을 따르는 오직하나의 계급만이 존재한다. 즉 가치법칙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계급, 시장의 법칙을 유일한 행동원리로 삼는 계급, 그러한 가치법칙을 자신의 행동 법칙으로 삼고, 그것이 함축하는 경제적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는 하나의 계급. 이를 위리는 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공리계 안에서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피지배계급, 오직 하나의 노예계급만이 존재할 뿐이다. (...) 부르주아지란 일반화된 노예계급이다. 부르주아지는 부를 지배하는 계급이 아니라 증식을 목표로 하는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계급, 자본의 공리에 복종하는 노예계급이다. 공리계의 공리에 복종하는 계급, 자본주의 공리계는 오직 이런 하나의 계급만을 요구하며 그런 하나의 계급만을 생산한다.

- 계급은 오직 하난 존재하며, 그 계급의 보편성은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정의의 보편성이다. 예를 들어 흔히 말하듯이 자본가에게 고용된 관리자는 피고용자이지만 기능상 자본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란 점에서 ‘기능적 자본가’고 부르주아지의 일부다. 소득수준의 차이나 직업의 차이는 이 경우 또 다른 계급을 구성하는 이유가 전혀 되지 않는다.

 

 

3. 부르주아지: 보편적 계급

 

- 부르주아지를 단순하게 지주나 귀족들과 다른 출신의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는 통념, 그리하여 근대적 합리성과 진보성을 표상하는 그런 신화적 통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부르주아지는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부의 증식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이용하여 생산 내지 경영에 참여하는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은 그 출신이나 규모와 무관하게 영지나 토지 혹은 다른 재산을 이용해서 재산을 증식하고 화폐를 이용하여 화폐를 증식시키는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공리적 보편성을 갖게 된 그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부합하는 순간 누구든 부르주아지가 되고, 그의 과거는 눈부신 화폐의 빛 아래 지워지고 사라지며 하나의 동일한 계급으로, 보편적인 계급으로 동질화된다.

- 그런데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제공하는 이권이나 특권에 접근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정치적 신분’이 되거나 거기에 줄을 대야 했다. 17세기 영국 공장들이 주로 귀족적 이권 소유자에게 장악되어 국왕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 그런 예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적 독점권을 할당받아야 했던 상인들이나 무역업자는 물론 제조업자들도 영토국가의 독점적 권력에 접근해야 했다. 이를 위해 자신들의 조합에 젠틀맨층을 끌어들이고 그들의 힘을 빌리고자 했지만, 이는 그들에게 조합 자체의 중요한 이권을 내주는 결과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제조업자나 상인, 자본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귀족의 일부가 되거나 국가권력 안에 들어가려 했고, 이를 위해 자신들이 번 돈을 사용해서 매수하고 매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 이런 점에서 부르주아지의 보편성은 누구에게나 적용가능한 규정이란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개별적 내지 특수적 이해를 국가를 통해 ‘보편적 이익’으로 변환시키는 능력을 요구했던 셈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 비-계급

 

①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

-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 혹은 근대 사회에는 오직 부르주아지만이 존재하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부르주아지라는 하나의 계급만 존재한다는 것이 그 세계에 부르주아만 존재함을 뜻하는 건 아니다. 자본의 공리 혹은 부르주아지를 구성하는 가치법칙의 공리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복속되어야 할 부르주아를 갖지 않는 사람들, 혹은 고용되었지만 그들의 의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 이들 모두는 부르주아지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저 보편적 계급에 속하지 않는다.

-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이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신분적인 규정이나 경제적인 규정을 상실하여 비-신분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공리나 부르주아지를 정의해주는 어떤 규정성도 획득하지 못한 상태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란 이처럼 토지로부터 분리됨으로써 부랑자가 되어 사회를 떠돌거나, 걸식하는 거지가 되거나,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 생계를 잇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적극적 규정에 의해 ‘계급’으로 정의 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 맑스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1843)에서는 이 개념을 정확하게 계급이 아닌 ‘계급’이란 의미에서 ‘비-계급’으로 규정한다.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즉 주어진 규정 안에서 궁핍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 [즉 사회적 규정성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이다.

-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정한 요구, 특정한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도 ‘보편적 계급’이 아니다. 계급 자체의 해소를 제외하곤 어떤 보편적 요구, 보편적 이해관계를 갖는 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물론 이 개념은 이후 ‘임노동자계급’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그 경우에도 분석의 맥락은 노동자계급 내지 임노동자계급이 자본의 운동과 관련된 경제적 관계를 서술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혁명이나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 주로 사용된다. 이런 이유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적 저작인 『자본』에 ‘노동자계급’이란 말은 빈번히 등장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 요컨대 부르주아지가 된다는 것이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어떤 보편적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그 규정성에 동일화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지다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출신이나 방법이 무엇이든 기존의 지위를 유지하던 규정성을 상실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② 프롤레타리아트와 소수자

-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major) 집단이요 다수자(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minority)다. 다수자란 어떤 사회에서 지배적인 척도를 점유한 자들이고, 그것의 지배적인 규정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반면 소수자란 그 척도에서 벗어난 자들, 척도의 규정과 지배에서 배제되거나 벗어난 자들이다. 정확하게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대 사회에서 부르주아지가 산출하는 모든 소수자들의 집합이다.

- 이런 의미에서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는 하나의 거대한 ‘계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이질적인 성분들의 흐름으로서 ‘대중’이라고 해야 한다. 계급적 제한에서 벗어난 다양한 집단들이 모이고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흐름, 정해진 규정이 없기에 미리 흘러갈 정해진 방향도 없으며, 길이 난 대로 흘러가지만 샛길로 빠지거나 패인 둑을 흘러넘치면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흐름.

- 이런 점에서 정말 노동자도, 아니 무엇보다 우선 노동자야말로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devenir-proletariat) 한다. 자본에 포섭되어 노동하는 존재, 가변자본의 형태로 ‘계급’에 포섭된 존재에서, 자본의 척도를 벗어나고 계급적 안정성의 부르주아적 환상에서 벗어나, 자본의 지배, 자본의 포섭에 대항하는 비-계급화 내지 반-계급화의 선을 그려야 한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역시 프롤레타리아-되기를 해야 한다. 단순한 비-계급적 상태에 머문 조재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그리고 그 상태에서 자본의 손길을 기다리며 다시 계급적 자리를 꿈꾸는 ‘열등한 계급’ 내지 ‘버림받은 계급’이 아니라,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길 거부하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길 거부하며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활동방식을 창안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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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에서 노동으로 -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비판적 이해』, 김종일 (일신사, 2001)

 

□ 37-40쪽

 

1) 실업의 원인 : 공급부문(즉, 실업자 자신)에서 실업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함. 그래서 노동유인,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것을 주요 과제로 함. 비판자들은 이를 본질적으로 희생자를 비난하는 격(blaming the victim)이라고 지적. 실업자를 만들어낸 사회경제적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그 피해자의 행태를 교정하는 일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는 태도라는 것. 유럽의 사회운동가들은 고용가능성과 같은 편향적인 개념 자체를 거부하고 대안으로 실업자 개개인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내세운다. 여기서 역량강화란 자신의 상황을 주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실업자의 개인적 그리고 집합적 능력의 제고를 가리킨다.

==> 이러한 분석은 뒤에서 영미식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특징인 ‘노동력 부착 전략’을 비판하고, 덴마크식 ‘인적자본개발 전략’을 높이 평가하는 밑바탕이 되는데, 그러나 과연 이 두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전자가 노동자 개인을 ‘비난’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노동자를 처벌적 성격의 노동시장으로 밀어넣는다는 점에서 후자와는 비교되는 비판의 지점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나, 인적자본개발이 고용가능성 증진이라는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의 본질적 결함과 거리가 멀다 할 수 없다. 노동자의 역량강화, 인적자본개발이라는 논리가 전적으로 노동자 개인의 사회적 욕구를 발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으로의 재투입이라는 관점하에서 추동되는 것이라면,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저자는 두 가지 전략이 근본적인 차이를 갖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그의 분석에서도 (특히 네덜란드의 경우) 두 가지 전략이 혼재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노동력 부착 전략(이를테면 공공근로사업)과 인적자본개발전략(각종 평생교육사업이나 고용보험상의 실업자 교육훈련과정 등)이 병행하여 제도화되어 있다. 그런 한국적 상황을 영미식에 가깝냐, 덴마크식에 가깝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사회적 여론의 분위기, 즉 복지수급자를 비난하는 풍토만 놓고본다면 영미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국내에서 ‘노동중심적 복지국가’적인 제도의 작동 방식을 놓고 본다면 딱히 그렇게 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2) 노동연계의 타당성 : 노동연계정책이 수급자의 도덕성을 논란의 대상으로 삼아 시민의 기본적 복지권을 훼손한다. 수급의 전제조건인 노동의무는 사실상의 강제노동으로, 이러한 시도를 방치할 경우 이 제도는 언젠가 또 하나의 구빈법이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 정녕 복지수급자의 근로경험이 중요하다면, 왜 이들을 정상적인 고용계약을 통해 지역사회 서비스를 담당하도록 하지 못하는가? 또한 수급자들이 의무적으로 행하는 노동에 사회적 낙인이 가해져서,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일반 노동자는 물론 그러한 일 자체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3) 사회정책의 적극성과 소극성 : 복지급여가 수급자의 삶에 이바지하는 ‘적극적’ 기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됨. 거의 모든나라에서 복지급여는 최소한의 생계비를 넘지 않는다. 이 생계비에 의지해서 수급자들은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위한 제반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 이들을 마치 복지급여라는 아편에 중독된 사람으로 간주하는 사회 일각의 태도는 분명 잘못된 것.

 

 

□ 51쪽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필요성이 복지국가 전반에 걸쳐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문제는 어떠한 성격의 ‘적극성’인가에 관한 것이다. 작금의 추세는 국가의 적극성이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에 집중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방 복지국가 전체가 온통 ‘고용가능성’이라는 개념에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개념은 고용주의 입장에서 나온 말이다. 일자리는 넉넉하다는 전제 아래, 고용주가 ‘채용할 만한’ 사람이 못되는 원인을 해당 실업자에게서 찾아내어 그것을 제거하는 제반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로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이다. 바야흐로 노동시장 바깥에서 연명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재상품화가 (시장이 아니라) 국가주도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 59쪽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가장 심각한 모순은 시장기제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보편적 사회복지를 통한 탈상품화 전략과 시장의 효율성을 통한 경제성장은 서로 충돌하는 목표였다. 특히, 경제가 어려워질 때 양자의 모순은 더욱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모순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일부 사민주의 복지국가가 채택한 전략은 노동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하여 성장의 잠재력을 키워나가는 정책이었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대부분의 서구 복지국가가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펼치고 있을 때,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복지국가들은 노동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완전고용의 실현과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이들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복지에서 노동으로’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후자가 공공부조의 개혁이라는 목적 아래 추진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전자는 노동자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프로그램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또한 노동시장의 공급 측면은 물론 수요 측면에도 개입한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된다. 믹국과 영국에서 시행중인 ‘복지에서 노동으로’ 정책의 경우 노동자의 교육, 훈련과 같은 노동공급 측면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활발하지만, 고용창출이나 임금 보조 등의 노동수요 측면은 거의 전적으로 시장논리에 맡기고 있다.

 

 

□ 89쪽 (1996년 미국 복지개혁의 주요 내용)

 

첫째, AFDC를 폐지하고 한시적 구호제도인 TANF로 대체한다. TANF의 수급자에게는 엄격한 근로의무가 주어진다. TANF의 수급기간은 평생 60개월을 초과할 수 없다.

둘째, 공공부조에 관한 모든 권한과 책임을 주 정부에 넘긴다. 과거에 시행하던 JOBS와 연방정부의 대응보조금(matching fund)을 폐지하는 대신에, TANF의 소요예산은 전액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block grant)을 통해 지급한다. 각 주와 지방 정부는 이 돈을 원하는 방식대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연방정부의 포괄적 교부금은 각 주의 1994년 지출 수준을 기준으로 책정되었고 이 액수는 2002년까지 변동이 없다. 이와 같은 방식의 지원은 주 정부지출액의 네 배를 무제한 지급하던 과거에 비해 주 정부의 빈민지원재정을 크게 압박할 것이라는 우려가 많다. 의회는 이러한 우려를 고려해서 1997년에 포괄 교부금과 별도로 주 정부의 노동중심적 복지개혁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예산을 마련하였다. 30억 달러의 이 지원금은 TANF 수급자 가운데 취업능력이 가장 뒤떨어지는 집단을 위해 연방 노동부에 의해 시행되었는데, 이것은 이 돈의 사용 목적이 소득지원이 아니라 노동지원임을 명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TANF에 관한 업무가 각 주로 이관되었다고 해서 연방정부가 감독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연방정부는 몇 가지 원칙과 기준을 통해 주 정부를 규제할 수 있다. 예컨대, 2002년까지 모든 주는 수급자의 50% 이상을 근로활동에 참여시켜야 한다.

 

 

□ 미국, 영국, 덴마크, 네덜란드에서의 노동중심적 복지국가 정책의 비교 분석

 

지금까지 논의된 복지의존에 관한 담론은 다음 세 가지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복지 자체에 대한 부정, 나아가 복지의존의 원인인 빈곤에 대한 개인적/문화적 인식에 입각한 것이다. 요컨대 빈곤은 개인의 결함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이들의 복지의존을 방치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관점이며,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둘째는 사회적 배제, 포함이라는 관점이다. 복지의존이 길어지면 복지수급자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배제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복지의존의 예방에 힘써야 된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덴마크 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복지의존을 주로 경제 현실의 입장에서 다루는 관점이 있다. 이것은 복지의존이 가져올 경제적, 재정적 부담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네덜란드의 활성화 정책에서 이러한 관점이 드러난다. (191쪽)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이 대상은 미국을 제외하면 대체로 청소년에 집중되고 있다. 영국의 뉴딜은 청소년 뉴딜이 핵심이고 네덜란드의 구직자 고용법도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겨냥한 것이다. 덴마크의 활성화 정책 역시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 대체로 유럽 국가들의 활성화 정책이 청소년 실업자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이들의 실업률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장기 실업의 늪에 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EU에서도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청소년 실업을 예방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회원국에 권고하고 있다.

이와 달리 믹구의 노동중심적 복지정책은 사회부조에 의존하는 편부모를 대상을 삼아왔다. 아니, 미국의 복지개혁 자체가 바로 이들의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미국의 복지 개혁 역사가 공공부조 개혁의 역사이고, 공공부조 수급 대상자는 대부분 편부모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공공부조에 의지하는 편부모들이 미국 복지개혁의 핵이라는 사실보다 미국 복지국가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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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中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 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 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 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 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 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 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57쪽)

 


흔히 제창되는 구호 가운데 <전쟁이 먼저고, 혁명은 나중이다>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일반적인 통일사회당 의용군은 그 구호를 진심으로 믿었다. 정말로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에 혁명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구호는 눈속임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좀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스페인 혁명을 미루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다. 노동자들은 점점 권력을 빼앗겼다. 온갖 부류의 혁명가들이 점점 더 많이 투옥되었다. 모든 행동이 군사적 필요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졌다. 손쉽게 써먹을 수 있는 핑계였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우월한 지위로부터 점차 물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났을 때, 자본주의의 재도입에 저항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터였다. 나는 일반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마드리드 주위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무슨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 정책의 방향을 잡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92쪽)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 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 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이런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이 모로코 사건이다. 모로코에서는 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프랑코는 악명 높은 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때문에 전쟁에서 가장 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공산주의 정책의 전쳊덕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 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 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 모른다. (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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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부 발췌독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172-173쪽)

 

 

 

그렇다면 ‘하층민’은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날까? 물론 대체로 그들이 상류층보다 깨끗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들의 생활 여건으로 볼 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처럼 개명한 시절에도 영국 주택 절반 이상에 욕실이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유럽에서 매일같이 온몸을 씻는 풍습은 아주 최근에 생겨난 것이며, 노동 계급은 대체로 부르주아보다 보수적이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눈에 띄게 점점 더 깨끗해지고 있으며, 앞으로 100년 뒷면 일본인만큼 깨끗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동 계급을 너무 이상시하는 사람들이 노동 계급의 특징을 무조건 찬미하여 불결함도 장점인 양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그래서 희한하게도 사회주의자와 체스터턴 같은 감상적인 가톨릭계 민주주의자가 손을 잡는 일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둘 다 불결은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청결은 한 때의 유행 아니면 사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 덕분에 노동 계급 사람들이 안 깨끗한 건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원해서라는 오해가 사실처럼 비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실제로는 욕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쓰려고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중산층 사람들이 노동 계급은 더럽다고 ‘믿는’데 있다. 아울러 더 문제인 것은 아무튼 노동자는 ‘본래부터’ 더러운 존재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175-176쪽)

 

 

 

중산층인 사람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공산당에까지 가입했다고 하자. 그래서 달라지는 게 과연 얼마다 될까?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그는 계속해서 돈벌이를 해야 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그가 부르주아로서의 경제적 지위에 매달리는 것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취향이나 습관, 거동, 상상력의 배경은, 공산주의 용어로 말해 그의 ‘이데올로기’는 변할까?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들의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 (182-183쪽)

 

 

 

골즈워디는 민감하고 눈물 많은 전쟁 전 인도주의자의 훌륭한 표본이다. 그는 결혼한 여자는 전부 사티로스에게 사슬로 묶여 지내는 천사라고 생각될 정도로 병적인 연민 콤플렉스를 보이는 작품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과로하는 사무원이, 저임금에 시달리는 농장 인부가, 타락한 여인이, 범죄자가, 창녀가 동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 언제나 분노로 부르르 떤다. 그의 초기작을 보면 세상은 압제자와 피압제자로 양분되며, 압제자는 이 세상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다 터뜨려도 타도하지 못할 무지막지한 석상처럼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정말 타도를 원할까? 확고부동한 압제에 맞서 싸우는 그를 붙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뜻밖의 일들이 벌어지고 그가 알던 세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의 생각은 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압제와 불의에 맞서 싸우는 패배자들의 옹호자로 출발한 그가 끝에 가서는 경제적 병폐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노동 계급이 가축 무리처럼 식민지에 끌려가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아마 좀 더 품위 있는 형태의 파시즘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모든 견해는 현실을 최초로 맞닥뜨리자마자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안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시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212-215쪽)

 

 

 

노동자는 진정한 노동자로 남는 한, 엄밀한 의미의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거의 혹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다분하며, 기회가 닿으면 공산당에도 표를 던질 수 있겠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인식은 그보다 신분이 높고 책으로 훈련받은 사회주이자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기 마련이다. 평번한 노동자에게, 이를태면 토요일 밤 아무 선술집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유형에게, 사회주의는 더 많은 임금과 더 짧은 노동 시간과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사람이 없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혁명적인 유형에겐, 즉 기아 및 실업에 항의 하는 시위에 참석하고 고용주의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유형에겐, 사회주의란 압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구호일 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진정한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보다 심각한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내가 보기엔 그런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보다 더 진정한 사회주의자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그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달리 사회주의란 곧 정의와 상식적인 양식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가 모르는 것은 사회주의를 경제적 정의로만 축소할 수는 없으며,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면 우리의 문명과 우리 자신의 생활양식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36-237쪽)

 

 

 

나는 사회주의자(자기 글을 소책자로 만들어내는 지식인이며 스웨터 차림의 더벅머리에 마르크스를 수시로 인용하는 타입을 말한다)를 보며 도대체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품곤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특히 자신과는 가장 동떨어진 부류인 노동 계급에 대한 사랑이라 믿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내가 보기에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숨은 동기는 병적으로 심한 질서의식일 뿐이다. 그들이 현 세태를 불쾌히 여기는 것은 그것이 비참한 현실을 초래하기 때문도,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무질서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장기판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평생 사회주의자로 지낸 버나도 쇼의 희곡들을 생각해보자. 노동 계급의 생활에 대한 이해나 자각이 얼마나 많이 드러나는가? 쇼 자신은 노동자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것은 “연민의 대상으로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그는 노동자를 그런 역할로도 무대에 올리지 않으며, W.W.제이콥스의 우스꽝스러운 인물 같은 모습으로만 무대에 올린다. 노동계급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껏해야 <펀치>처럼 키득거리는 태도이며, 그보다 심각한 경우에는 그들에게서 경멸스럽거나 역겨운 점만 발견한다. 그에게 빈곤이란, 더욱이 빈곤에서 비롯되는 정신의 빈곤이란 ’위에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것도 필요하다면, 심지어 가급적이면 폭력으로 없애야 할 무엇이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인간을 숭배하며, 독재자나 파시스트나 공산주의자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다. 또 그래서 스탈린과 무솔리니를 거의 동격으로 보는 듯하다. (240-241쪽)

 

 

 

우리는 유토피아의 시민들이 토마토 통조림 공장에서 하루 두 시간씩 손잡이 돌리는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일부러 더 원시적인 생활방식으로 돌아가 자신의 창조적 충동을 달래기 위해 나무 세공이나 도자기 칠이나 베 짜기 같은 일을 소소하게나마 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하지만 이는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 광경이다. 그것은 항상 작용하지만 항상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은 원리 때문이다. 즉, 기계가 ‘있는 한’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그만인데 굳이 우물물을 길어 쓸 사람은 없다. 여행을 생각해보면 좋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개발 안 된 나라에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다녀 본 사람이라면 그런 여행과 기차나 자동차를 이용하는 근대식 여행의 차이가 생사의 차이만큼 크다는 것을 안다. 낙타 등이나 달구지에 짐을 싣고 걷거나 짐승을 타고서 다니는 유목민은 온갖 불편을 겪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행하는 동안 살아있다. 그에 비해 급행열차나 호화유람선의 승객에게 그 여행은 일종의 공백기 또는 죽음이다. 그렇지만 철길이 존재하는 한 사람은 기차로 여행하게 되어 있으며, 자동차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 모든 걸 기계로 할 수 있는 세상에서는 모든 게 기계로 이루어진다. 일부러 원시적인 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 구식 연장을 쓰는 것, 무슨 일을 할 때 괜히 조금 더 어렵게 하는 것은 전부 일종의 딜레탕트 취미이며 과도한 멋 부리기다. 그것은 엄숙한 표정을 짓고 앉아 돌로 만든 식기로 만찬을 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기계의 시대에 수공의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대충 흉내만 내어 그 옛날의 찻집이나 튜더 양식 주택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기계적 진보의 경향은 노고와 창조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본성을 좌절시킨다고 하겠다. 그것은 눈과 손의 활동을 불필요하게 하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게 한다. ‘진보’의 사도들은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선언하곤 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 있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끔찍하게 긴지를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일 수 있다. 대체 손은 왜 쓴단 말인가? 코를 풀거나 연필을 깎는데도 손을 쓸 필요가 있나? 어깨에 쇠와 고무로 만든 무슨 장치를 달아 쓰면 될 테고, 그러면 팔은 뼈와 가죽만 남은 줄기처럼 시들어버릴 것 아닌가? 그것은 신체의 모든 기관과 모든 기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숨쉬고, 번식하는 것 이상의 활동을 할 이유가 아예 없어진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기계가 대신 해줄 테니 말이다. 그러니 기계적 진보의 논리적 귀결은 인간을 병 속에 든 뇌 비슷한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물론 우리가 뜻하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목표이다. 위스키를 매일 한 병씩 마시는 사람이 딱히 간경화에 걸릴 뜻이 있는 게 아니듯 말이다. (269-271쪽)

 

 

 

파시즘 운동을 어느 정도 지켜본 사람이라면 말단의 파시스트 당원이 반듯한(이를테면 실업자의 운명을 개선하고자 하는 열의가 진지한)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 보수주의의 나쁜 변종뿐 아니라 좋은 변종에서도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전통과 질서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파시즘을 일단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요령 없는 사회주의들의 선전만 잔뜩 듣다 보면 파시즘을 유럽 문명의 장점을 지킬 마지막 방어선으로 보게 되기가 아주 쉽다. 심지어 한손엔 몽둥이를 들고 다른 한손엔 약을 든, 상징적으로 최악인 파시스트 깡패도 자신을 깡패라 생각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독교계를 지키기 위해 롱스보 고개에서 야만족과 맞서 싸운 롤랑이 된 기분일 것이다. (...) 그들은(사회주의자들) 경제적인 면에만 눈이 멀어 있어서, 인간에겐 영혼이란 게 없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해왔으며, 노골적으로건 암시적으로건 물질적 유토피아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말았다. 때문에 파시즘은 쾌락주의와 ‘진보’라는 값싼 관념에 반발하는 모든 충동을 이용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해 파시즘은 유럽 전통의 옹호자 시늉을 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 신앙과 애국주의와 군사적 가치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파시즘을 ‘집단 사디즘’이니 뭐니 하며 간단히 무시해버린다면, 그냥 무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몹시 해로울 수 있다. 파시즘을 머지않아 절로 사라질 예외적인 현상인 듯 여긴다면, 누구에게 몽둥이로 얻어 맞고서 깨어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287-288쪽)

 

 

 

민감한 사람들이 흔히 ‘진보’와 기계문명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정서의 차원으로서만 변호할 수 있다. 그것이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이유로 타당하지 않은 것은,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삼기 때문이다. ‘나는 기계화와 표준화에 반대한다, 고로 나는 사회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한다면 사실상 ‘나는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기계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인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우리는 모두 기계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기에, 기계가 작동을 중지한다면 대부분 다 죽게 될 것이다. 기계문명을 혐오할 수 있고 혐오하는 게 옳을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문제일 수 없다. 기계문명은 이미 ‘여기’ 존재하며 우리는 그 안에서만 비판할 수가 있다. 우리 모두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벗어났다고 자부하는 것은 낭만적인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온수 나오는 욕실 딸린 튜더 양식 오두막에 사는 문단의 신사나 소총과 수레 네 대 분량의 통조림을 챙겨 정글로 들어가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나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 아무리 바람직해 보인다 해도 보다 단순하고 자유롭고 덜 기계화된 생활양식으로 돌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숙명론이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뿐이다. ‘벌집 국가’에 반대한다고 해서 사회주의를 반대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벌집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직은 인간적인 세상이냐 비인간적인 세상이냐를 선택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단지 사회주의냐 파시즘이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아무리 최상의 것이라 해도 미덕을 다 빼버린 사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293-295쪽)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바라는(그냥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라는) 사람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대부분 그런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받아들인다 해도 몹시 못마땅해할 것이다. 이따금 나는 그들이 말하는 걸 들을 때, 그리고 그들의 책을 읽을 때는 더더욱, 사회주의 운동 전체가 그들에겐 일종의 흥미로운 이단 사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장단에 맞춰 이리저리 미친 듯 뛰어다니며 '어험, 어험, 이거 변절자의 피 냄새가 나는구먼!' 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동 계급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사회주의자라 느끼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일이 너무 많은데, 그런것들은 너무나 쉽게 근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문학에 대해 취하는 딱한 태도를 보자. 많은 경우가 기억나지만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에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번 언급되어 있다는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복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297-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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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주커만, <파국을 향해 가는 자동차> 中

 

헨리 포드가 최초로 자동차를 대량생산하여 ‘모든 집에 차 한 대’라는 꿈의 실현을 약속하였다면, 독일민족 구성원 모두가 자동차 소유자가 되는 ‘자동차 민족공동체’를 약속하면서 최초의 자동차 도로를 건설한 것은 히틀러였다. 현재 연방문서보관소와 코펜하겐 영화박물관에 있는 1930년대의 선전영화를 보면, 나치독일의 아스팔트 서정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동차를 찬양하는 시인, 화가들 이외에 자동차 영화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어떻게 고속도로를 장악하는 남자가 언제나 가장 예쁜 처녀를 차지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히틀러도 포드도,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다른 어떤 자동차 예찬론자들도, 정말 모든 집에서 자동차를 가지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사고와 몽상에서 제외된 것은 - 도로와 주차장이 집어삼킬 거대한 공간, 자동차들로 인한 도시의 변질과 붕괴, 자동차를 생산하는 공장과 자동차를 묻을 공동묘지들, 그리고 공기를 가득 채울 독성물질들이었다.

 

 

- [녹색평론선집1] 에서 발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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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출판) 1부 발췌독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쓴ㄴ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석탄을 파고 퍼담는 작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아니면 길어도 몇 주 이상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 히털러가 거위걸음으로 행진하기 위해, 교황이 볼셰비키 사상을 지탄히기 위해, 로즈 경기장에 크리켓 관중이 몰리기 위해, 동성애자 시인들이 서로의 등을 글어주기 위해, 석탄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

탄광의 여건이 지금보다 열악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젊을 때 땅속에서 허리에 마구 같은 띠를 차고 두 다리를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차를 끌며 일하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더러 살아 있다.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전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들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도 <타임스 문예 부록>의 편집인도, 동성애자 시인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아무개 동지도, <유아를 위한 맑시즘>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 (47-50쪽)

 

 

 

‘자산 조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악은 이산가족을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이다. 이 제도 때문에 노인들이, 그중에도 때로는 병석에 누워 있던 노인들이 지에서 쫓겨나다시피 한다. 이를테면 홀아비인 노년의 연금생활자는 대개 자녀들 중 하나의 집에서 혼자 사는 경우가 많으며, 그가 매주 받는 10실링은 가계의 생계비로 쓰이고 그는 그럭저럭 보살핌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런데 ‘자산 조사’라는 제도는 그를 ‘하숙인’으로 보며, 그가 자녀의 집에서 함께 살면 자녀의 실업수당을 삭감해버린다. 때문에 일흔이 넘은 노인이 진짜 하숙집으로 나가 살면서 하숙집 주인에게 연금을 다 넘겨주고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를 여러번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자산 조사’ 덕분에 그런 일이 지금 이 순간 영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07-108쪽)

 

 

 

나는 필력이 정말 뛰어난 실업자를 우연히 만나본 적이 있다. 그리고 만나보진 못했지만 이따금 잡지에서 작품으로 접하게 되는 이들도 있다. 아주 드문드문하긴 해도 그런 사람들은 종종 뛰어난 글 한 편이나 단편소설을 써내곤 하며, 그런 글은 추천사만 요란한 대부분의 작품보다는 확실히 낫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자기 재능을 좀처럼 발휘하지 않는 걸까? 누구보다 시간이 많은 그들이 왜 차분히 앉아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독뿐 아니라(노동계급의 집에선 고독하기도 어렵다) 마음의 평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 해도 책 읽는 게 편한 실업자는 어쨌든 책 읽기로 소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읽는 게 도무지 편치 않은 사람은 어쩌겠는가? 어릴 적부터 갱도 안에서 일해오며 광부 아닌 다른 무엇도 될 수 없도록 길들여져 온 사람을 생각해보자. 허구한 세월을 대체 무엇으로 다 채운단 말인가?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면 얼토당토않는 소리다. 알아볼 일거리도 없거니와 그런 사실을 모두가 아는 까닭이다. 말하자면 7년 내내 매일같이 일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임대 채소밭이 있어 소일도 하고 가족의 먹을거리도 조금 기를 수 있겠다 싶지만 큰 도시에선 그런 채소밭을 임대할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실업자를 도울 목적으로 몇 년 전부터 문을 연 직업센터들이 있긴 하다. 이 운동은 전반적으로 실패였지만 여전히 번창하는 센터들도 있다. 나는 그런 곳들 한두 곳에 가보았다. 춥지 않고 지낼 만한 공간이 있으며, 목공, 제화, 가죽공예, 베 짜기, 바구니 짜기, 짚공예 등의 정기 강좌가 열리는 곳이다. 팔 목적은 아니고 자기 집에 쓸 가구 등을 , 연장은 무료로 쓰고 재료도 싸게 구하여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발상인 것이다. 내가 만나 얘기해본 사회주의자들 대부분은 실업자들에게 농지를 주는 기획을 비난하듯이 이런 운동을 비난한다. 그들은 직업센터는 실업자들을 잠잠히 있게 만들고 실업자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숨은 동기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업자가 구두를 수선하느라 바빠지면 <데일리 워커>(영국 공산당이 1930년에 창간한 일간지)를 잘 읽지 않을 테니 말이다.

(...)

우리는 영국에서 수백만 명이 (또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이승에서는 절대 번듯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게 낫다. 할 수도 있고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 하나는 , 원하는 모든 실업자에게 약간의 땅과 연장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생활보조위원회의 실업수당으로 연명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 채소라도 기를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건 가당찮은 일이다. (111-114쪽)

 

 

 

말하자면 여생을 실업수당에 의존하기로 작정한 듯한 사람들이 잔뜩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감탄스럽고 심지어 희망적이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파탄을 겪지 않으면서 그럭저럭 그렇게 살아간다는 점이다. 노동 계급은 중산층처럼 빈곤의 부담 때문에 망가지지 않는다. 예컨대 노동 계급은 실업수당을 받는 처지이면서도 결혼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남부의 브라이턴에 사는 노부인들에겐 당치도 않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노동계급의 분별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주는 증거다. 즉, 그들은 일자리를 잃는다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빈곤에 시달리는 지역들은 어떤 면에서는 생각만큼 사정이 나쁜게 아니다. 그들의 삶은 그럭저럭 정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생각 이상으로 그렇다. 수많은 가족이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 제도가 깨진 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긴축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운명에 발악하기보다는 생활수준을 낮춤으로써 상황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수준을 낮춘다고 해서 반드시 사치를 끊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사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더 흔한데, 잘 생각해보면 그게 더 자연스럽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례없는 공황기에 온갖 값싼 사치가 늘어나는 현실이 가능한 것이다. 전쟁 이후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 두 가지는 영화와 값싸고 맵시 있는 의류의 대량생산이다. 열네 살에 학교를 떠나 가망 없는 일자리를 얻은 청년이 스무 살 때 실직하여 어쩌면 평생 실업 상태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자. 하지만 그는 할부로 2파운드 10실링을 내는 조건으로, 슬쩍 보면 그리고 약간 떨어져서 보면 ‘새빌 로’(고급 양복점들로 유명한 런던의 거리)에서 맞춘 듯한 양복을 살 수가 있다. 아가씨들은 그보다 싼 값으로 최신 유행복을 입은 이처럼 보일 수가 있다. 주머니엔 반 페니 동전 세 닢뿐이고 이 세상에 아무 전망도 없으며 돌아갈 집이라곤 비가 새는 작은 골방뿐이라 해도, 새 옷 차림으로 길모퉁이에 서서 클라크 게이블이나 그레타 가르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

이 모든 현상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는가? 나느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노동 계급이 겉으로마나 보이고 있는 적응은 그들이 지금 상황에서 할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혁명적으로 변한 것도 자존심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노여움을 참고, ‘피시 앤드 칩스’ 수준에서 그럭저럭 견뎌 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안은 절망의 고통을 이어 가나는, 신만이 아는 무엇일 터이다. 아니면 영국처럼 통치력 강한 나라에서는 헛된 학살과 가혹한 억압의 체제로 이어지기 십상인 반란을 시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118-122쪽)

 

 

 

한편 나는 실업자들이 돈을 보다 경제적으로 쓰는 법을 배운다 해서 궁극적으로 득을 볼지 의심스럽다. 그들이 경제적이지 ‘않은’ 까닭에 그들의 실업수당이 그만큼 높은 것이다. 매주 생활보호위원회의 실업수당이 15실링인 것은, 최소한 그 정도는 돼야 실업자 한 사람이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테면 쌀과 양파만 먹고도 살 수 있는 인도인이나 일본인 쿨리라면 한 주에 15실링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실업수당은 비참한 수준이지만 기준은 아주 높고 경제 관념은 별로 없는 시민들에게 맞춰 설계되어 있다. 실업자들이 씀씀이를 더 야무지게 하는 법을 배운다면 아마도 실림이 눈에 띄게 나아질 텐데, 그렇게 되면 머지않아 실업수당도 그만큼 삭감되고 말 것이다.(135쪽)

 

 

 

그런데 내가 떠올린, 훈제 청어와 진한 차를 먹고 석탄 난로 주변에 둘러 앉은 노동 계급 가정의 정경은 우리 시대에만 속하는 것일 뿐, 미래의 것도 과거의 것도 아니다. 200년 뒤의 유토피아적 미래로 건너뛰어 가본다면풍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가 상상해 온 것들은 거의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육체노동이 전혀 없고 모두가 ‘배운’ 사람인 시대엔 셔츠 차림으로 앉아 구수한 사투리로 한마디씩 할 투박하고 손 큼직한 아버지가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난로는 석탄불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태우는 것이리라. 가구는 고무나 유리나 강철로 만들 것이다. 석간신문 같은 게 아직 남아 있다 해도 경마 뉴스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다. 빈곤이 없어지고 말(馬)이 지상에사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도박은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 말이다. 개도 위생 문제 때문에 키우는 게 금지되고 말 것이다. 산아 제한 주장이 기승을 부린다면 아이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

우리 시대가 살기에 완전히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음을 나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근대 기술의 승리도, 라디오도, 영화도, 매년 5천 종씩 출간되는 소설도, 애스컷 경마장의인파도, 명문교 이튼과 해로의 크리켓 라이벌전도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묘하게도 내 기억에 남은 노동 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이며, 그중에서도 아직 영국의 번영기이던 전쟁 이전의 내 어린 시절에 이따금 보았던 정경들이다.(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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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소비자주의

한국DPI 장애인청년학교 자료 中 <장애인 운동사>


현재의 장애인운동은 우선 서비스의 제도화를 넘어서서 환경의 제도화를 지향한다. 환경 제도화의 전형적인 형태가 이동권 투쟁이다. 장애인운동이 폭발한 계기들 중의 하나가 되는 이 이동권 투쟁에는 이동권연대의 저상버스와 엘리베이터 확보 투쟁, 전동연대의 전동휠체어 건강보험 적용 투쟁이 속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환경의 제도화와 관련해서 주거권 운동에 대한 담론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다. 활동보조서비스(PAS) 논의 또한 환경 제도화의 중심축이다. 다음으로 장애인운동은 사회적 자원의 직접전달체계 구축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애관련 예산의 상당부분이 시설을 통해 집행되는 이런 형태의 자원의 흐름과 쓰임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 즉 간접전달체계를 직접전달체계로 바꾸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한 예가 사회적 수당으로서의 장애인연금 쟁취 투쟁이다. 장애인의 자기선택/결정권과 생활권 확보를 위한 이 투쟁은 장애인운동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물적 토대로 작용하리라 본다.

각주) 직접전달체계 구축은 시설 비리 척결의 열쇠이기도 하다. 조건부신고복지시설생활자인권확보를위한공동대책위원회(준)와 같은 단체의 활동 속에 시설 비리들이 최근 들어 활발히 밝혀지고 있다. 2005년 공대위에 의해 밝혀진 대표적인 시설비리는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 장애아동시설 '솔잎원'의 비리일 것이다. (“특집: 옥탑방에서 벌어진 장애아 학대의 진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함께걸음. 2005.6) 시설비리문제 해소의 요체는 소비자가 구매력을 가지고 시설을 직접 선택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때만이 해소될 수 있다.


__________________

 

펌자의 고민) 시설을 통한 자원의 간접전달체계에 대한 반대로 직접전달체계, 그것도 장애인을 소비자로서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기초생활보장법의 급여액을 현실화시키려는 요구가 정당한 것처럼, 장애인의 사회적 수당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 중요할 수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의 방향을 그쪽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단지 슈퍼마켓에서 입맛에 맞는 과자를 선택하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님에도, 위와 같은 소비자주의는 자기결정권의 문제를 그렇게 축소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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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발췌독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 우리시대의 새로운 지적 대안담론
자크 랑시에르
길, 2008

 

 

 

 

- 「옮긴이의 덧말」中 에서

 

가령 우리는 이런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전체는 몫 없는 자들과의 적대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요청한다. “너희들이 전체에 기여하는, 너희들만이 가진 탁월한 능력을 보여달라”고. 이에 대해 몫 없는 자들은 자신의 집단의 특수성이나 이해관계를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특수성이 거부되든, 관용되든 그것은 이미 전체와 맺는 ‘합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몫 없는 자들은 “우리는 공통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정치는 특정한 능력(competences)가 아니라, 말하는 존재들의 평등을 참조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몫 없는 자들은 그들의 집단을 공동체 전체와 같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전체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을 내세우면서 데모스는 그들을 (방)해했던 것들, 즉 출생과 부의 질서를 공동체의 부분들에 대한 셈 바깥에 둔다. 아르케의 논리와 단절하는 한, 공동체의 셈에서 기존의 공동체를 분리해내는 한, 그러한 틈이 존재하는 한, 정치가 있다. (50-1pp)

 

 

-「정치의 종언 혹은 현실주의 유토피아」 中 에서

 

좋은 참주의 모델은 페이시스트라토스다. 『아테네의 정체(政體)』에서 언급되는 그의 통치수단들은 농촌의 좋은 민주정의 규칙들과 혼동하리만큼 유사하다. 그는 빈자들이 땅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지갑에서 손수 돈을 꺼내 그들에게 주었다. 이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한 것이었는데, 하나는 빈자들이 도시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시골에 흩어져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자들이 자기 수준에 맞는 부를 가지고 자신들의 사적인 사무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함으로써, 그들이 공통된 것들에 종사할 욕망이나 여가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78p)

 

 

사실 평등의 고유함은 자연스럽다고 가정된 질서들을 결합하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흐트러뜨리고, 해체하여, 결국 그것을 분할의 논쟁적 형상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 근대 민주주의 시대에 흐트러뜨리는 분할은 한 가지 특권적인 형태를 취했던바, 그 이름은 이제 완전히 신망을 잃기는 했지만, 우리가 현재 발 딛고 있는 곳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과 직면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특권적인 형태를 계급투쟁이라고 불렀다. (...)

투쟁하는 계급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먼저 더는 열등한 서열의 구성원이 아님을 뜻할 뿐이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명명하는 것은 논쟁적 분할의 한 장소를 구성함으로써 모든 불평등한 배정의 면소(non-lieu)동물 종(種)들의 양상대로 사회적 종들을 고착시키는 모든 방식에 대한 면소를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계급투쟁 선언은 우선 두 가지 분리된, 그렇지만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삶의 양식들 깊숙한 곳에 있는 비밀을 찾거나 노동자층을 의고적이거나 근대적인, 숙련3되었거나 비숙련된 것으로 구분하려는 동물학자들을 당황시키기에 적합한 다음의 두 분리된 형상들로 표현되었다. 첫째 형상의 정식은 계급이 없다는 단언을 투쟁의 깃발로 삼는 노동자 팸플릿의 ‘순진함’ 속에 나타나고, 둘째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의 비-계급으로, 곧 모든 계급의 소멸로 포고하는 이론가의 정교화 속에 나타난다.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들의 힘겨운 마주침은 몹시 위태롭게 다음의역설적인 질문을 다루었다. 이 탈계급화 행위의 작인(作因)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계급이라는 이름이 아니라면 그것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따라서 이 이름은 모순적인 두 가지 것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계급들의 현실태적 소멸, 또한 노동자 계급의 그 자체에 의한 소멸, 다시 말해 조합의 동물성과 무리의 동물성으로부터 동시에 노동자 계급을 뽑아내는 자기에 대한 노동을 가리켰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것은 탈계급화를 작동시키는 계급을 그것의 실사성(substantivité)속에 고정시켰고, 그리하여 사회적 기능들을 잘 배정할 수 있다는 환상, 결국 잘 정렬된 일자에 대한 환상의 새로운 형상을 되살렸다. (95-7pp)

 

 

목적의 실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회의 진보주의에 뒤이어 순수한 진보주의(시간의 힘들에 대한 순수한 믿음)가 온 것과 마찬가지로, 잊혀진 마르크스주의에 뒤이어 온 것은 퇴화한 헤겔주의다. 그것은 곧 소비적이고 합의적인 미디어정치의 바탕 위에서 전문가들이 통치함으로써 이성을 평화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중우정치는 전문가들의 통치 형태로 실현되며, 그것만이 증식된 향락의 온상들의 조화롭지 않은 조화를 관리하기에 적합하다. 포스트민주주의는 아마도 중우정치와 그것의 반대로 가정되는 지식정치(épistémocratie) ― 크고 작은 향락의 무한한 온상들에 대해 정확히 계산된 경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육 제도의 규칙들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출현하는 가장 지적인 자들의 통치 ― 의 정확한 일치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저 향락을 경영하는 자들의 한계는 양화하기 더 어렵고, 지수화하기 더 어려운 연결된 두세 가지 감정들(낙심, 공포, 그리고 증오)을 그들이 쉽사리 경영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무능함은 좋은 왕, 민주주의적 왕이라는 의고적인 형상의 개입을 불러낸다. 그 왕은 두 몸짓을 하나로 실행하는 데 능숙할 뿐 아니라, 무리의 정념들을 진정시키고, 데모스를 이원성의 체류로 보존하는 데 필요한 정의로운 일자의 특질을 표시하는 데 능숙하다. (98p)

 

 

- 「정치, 동일시, 주체화」中에서

 

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겉보기에 정체성을 띤 이름을 그 본보기로 제시할 수 있다. 근대 프랑스에서 그 말이 처음 쓰인 사례 중 하나는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Auguste Blanqui)에 대해 행해진 소송이다. 검사장이 그의 직업을 묻자,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잖아”라고 반박한다. 그러자 블랑키는 그에 이어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다”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 보면, 검사장이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직업이 아니며, 블랑키도 우리가 흔히 노동자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셈-바깥을 가리키는 이름, 내쫓긴 자(outcast)의 이름인 것이다. 라틴어로, proletarii는 단지 다음의 것을 의미한다. 번식하는 자들, 이름 없이 살고, 그 이름을 남기지도 않으며, 도시국가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셈해지지 않는,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나의 이름, 내쫓긴 자들의 이름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는 고유한 이름이었다. 우리는 그 단어를 천민들(parias)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따라서 이 질서의 잠재적인 소멸인 자들(마르크스가 말했던 모든 계급의 소멸인 계급)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 (141-2pp)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곧 타자성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결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동시에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실 치안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일을 배정하는 것을 표시하는 ‘정확한’ 이름들을 원한다. 정치는 하나의 균열을 절합하고 하나의 피해를 현시하는 ‘고유하지 않은/적합하지 않은’ 이름들, 곧 잘못된 명칭들(misnomers)의 문제다.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인바, 이 증명은 언제나 그것의 전달 대상인 하나의 타자를 전제한다. 비록 이 타자가 그 정명 결과를 거부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비록 그것은 하버마스식의 대화 혹은 합의 추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합의는 없으며, 손해 없는 소통이라는 것도 없고, (방)해의 해결이라는 것도 없다. (방)해를 다루고, 평등을 증명하기 위한논쟁적인 공통 장소는 있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143p)

 

 

- 「타자의 입장」 中 에서

 

역사가들의 작업은 최근 우리에게 알제리 전쟁 말기 대규모 시위의 출발점이 1961년 10월 17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날 알제리인들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호소에 따라 파리에서 시위를 벌였다가 야만적인 방식으로 진압되었다. 프랑스는 진압 희생자 수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날은 사실 그것이 현시되고 은폐된 이중적 측면과 함께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그 순간에 나의 것과 타자의 관계에 대한 윤리적 아포리아들은 타자성을 포함하는 관계의 정치적 주체화로 전환되었다. 그렇지만 이날의 효과에서 중요했던 것은 억압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문제들이 문제가 되는 세 관계 ― 알제리 투사들과 프랑스 국가의 관계, 프랑스 국가와 우리의 관계, 알제리 투사들과 우리의 관계 ― 와 뒤얽히게 되었던 방식이다. 프랑스 국가의 관점에서, 이 시위는 투쟁하는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의 공적 공간에 정치적으로 개입하는 자들로서, 모종의 방식으로 프랑스 시민들로서 출현했던 것이다. 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의 결과는 우리가 알다시피 몽둥이질과 야만적인 수사형(水死形)이었다. 한마디로 치안은 공적 공간을 청소했고, 정보에 대해 완전히 입을 닫음으로써 그 작전의 가시성 자체를 제거했다. 우리에게 그것은 무언가가 우리나라에서 우리의 이름으로 일어났으며, 우리로부터 이중으로 제거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때는 실종자 수를 산정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우리는 이 이중의 사라짐이 뜻했던 것을 어떤 의미에서 반대로(a contrario),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서문에 사르트르가 적었던 한 문자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오늘 고문의 눈부신 태양이 절정에 이르러 온 나라를 비춘다.” 하지만 사실 이 눈부신 태양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두드려 맞고 수장당한 몸들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최근 보스니아, 르완다 혹은 그 밖의 곳에서 온 이미지들의 진열 앞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덕적 분개를 일으키기에 가장 알맞게 만들어진 이 전시, 타자에게 도래한 것에 대한 고통, 고문하는 자에 맞선 공허한 증오. 이는 더 비밀스럽게 자주 이 타자으 l입장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을 만들고,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 받는 존재를 조심성 없이 환기하는 자들에 대한 짜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공포와 연민은 정치적 정서들이 아니다. (...)

알제리 전쟁은 공식적으로 전쟁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대규모 치안 작전이었다. 따라서 정치적 답변은 해방 전쟁의 역사적 타당성을 평가하는 것이 아닌, 전쟁의 이 치안적 본성에 대한 답변이었다. (221-3pp)

 

 

- 「민주주의의 용법들」 中 에서

 

1830년 프랑스 혁명 직후, 출판물과 팸플릿, 노동자 신문들이 만개했던바, 거기에서 제기된 공통된 질문은 이것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과연 평등한가 평등하지 않은가? 흔히 파업 운동이나 정치적 갈등과 함께 가던 이 텍스트들은 다소 어떤 삼단논법의 전개로 표현되었다.

삼단논법의 대전제는 간단하다. 1830년에 막 공포된 헌장 전문에는 모든 프랑스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적혀 있다. 이 평등이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된다.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즉각적인 경험에서 끌어 온 것이다. 예를 들어, 1833년에 파리의 재단사들은 양복점 주인들이 급료, 노동 시간, 일부 노동 조건들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업을 시작했다. 따라서 삼단논법의 소전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될 것이다. 그렇지만 양복점 주인 협회장인 슈바르츠씨는 우리의 근거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그에게 급료를 재검토해야 할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근거들을 그는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검증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그와 평등한 자들로 대하고 있지 않다. 그는 헌장에 기입된 평등에 위배된다.

동일한 삼단논법의 다른 형태도 있다. 바로 그 슈바르츠씨는 그의 동료들과 모여서, 노동자들의 요구에 저항하기로 뜻을 모은다. 그래서 그는 사장들 간의 협회를 조직한다. 그렇지만 법에는 주인들 간의 협회는 노동자들의 협회와 같은 이유로 처벌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만 기소되었다. 거기에서 또다시 평등은 위배된다. (...)

삼단논법은 간단하다. 대전제에는 법이 말하는 바가 있다. 소전제에는 다른 관점에서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 즉 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법-정치적 주장에 위배되는 사실이나 문장이 있다. 그렇지만 대전제와 소전제 간의 모순을 사고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법-정치적 문장이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문장이 주장하는 평등은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만 거기에 있을 뿐인 외양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탈신비화의 양식(良識)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추론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코 노동자들의추론이 선택한 길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추론이 끌어낸 결론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대전제와 소전제를 일치시켜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대전제나 소전제를 바꿔야 한다. 만일 페르실 씨나 슈바르츠 씨가 말하는 것을 말할 근거가 있고, 또 그들이 하는 것을 행할 근거가 있다면, 헌장 전문을 삭제해야 한다. 그리고 프랑스인들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반대로 만일 대전제, 즉 헌장 전문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페르실 씨나 슈바르츠 씨가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이 갖는 이점은 그것이 문장을 행적과 대립시키지 않고, 형식을 현실과 대립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을 대립시키고, 행적을 행적과 대립시킨다. 보통 틈 혹은 비-장소로 사고되는 것으로부터, 그것은 정확히 이중적인 의미―근거 체계 그리고 논쟁 공간―에서 하나의 장소를 만들어낸다. 평등을 말하는 문장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문장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이 힘은 우선 평등이 그 자체를 표방할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디엔가 평등이 있다. 이것은 말해졌고, 씌어졌다. 따라서 이것은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실천은 바로 거기에 바탕을 둘 수 있으며, 이 평등을 입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을 수 있다. (109-112pp)

 

 

아렌트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를 첫 번째 권리로 설정한다. 우리는 거기에 다음의 것을 덧붙일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강제를 부과할 수 있는 자가 권리를 가진다고 말이다. 타인이 매우 자주 그것을 인정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은 전혀 근본적으로 문제를 바꾸지 않는다. 원리상 타인이 알아듣지 못할 것이며, 공통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권리를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는 토대마저 잃어버린다. 반대로 마치 타인이 언제나 자신의 담론을 알아들을 수 있는 듯 행동하는 자는 비단 담론의 구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량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115p)

 

 

민주주의적 학교는 사회 비판의 이중의 놀이에 따라 끊임없이 기대에 어긋난 약속, 끊임없이 기대를 저버린 약속의 장소로 생각된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실패를 비판하고 이 실패에 대한 교육학적·심리학적·사회학적 치료법들을 제안한다. 그렇지만 곧바로 증명은 둘로 나뉜다. 실패를 증명하는 것은 또한 그리고 특히 민주주의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그것이 주장하는 평등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이 은밀하게 숨기는 불평등에 완전히 맞춰진 것이며, 불평등이야말로 그것의 근본적인 원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학교에 대한 부르디외와 파세롱의 작업들은 사회학자와 사회 비판가는 매번 이기고 민주주의는 매번 지는 이러한 논리를 예시한다. 그들이 사실 보이고자 하는 것은, 만일 학교가 그 평등의 약속들을 실현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 방식 자체 때문에, 그것을 정초하는 상징적 논리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상속자들』같은 책은 내가 의혹의 삼단논법이라고 부를 것을 완벽하게 실행한다. 그것은 사실 대전제(모두를 위한 평등한 학교)와 소전제(서민 계층 아이들의 학업 실패)를 대립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고발을 끌어내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교가 정확히 대문자 평등을 믿게 만들면서 불평등을 만들고 있음을 보이려고 한다. 빈자들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오로지 재능에 따라서만, 곧 각자의 지능에 따라서만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고, 그들을 분류하며, 선별한다고 믿게 만들면서, 학교는 빈자들의 아이들로 하여금 만일 그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재능이 없거나, 그들이 지적이지 않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다른 곳에 가는 게 낫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한다. 학교는 이렇듯 평등에 대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 근본적인 상징 폭력의 장소로 나타난다. 성공은 오로지 학생의 재능과 관련 된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서, 학교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서는 모든 것, 학생의 인격과 독창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을 특권화 한다. 그러면서 학교는 존재 방식 ― 사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상속자들의 문화 수용 방식과 삶의 방식 ― 을 선별한다. 따라서 학교는 자신의 약속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고, 자신의 숨겨진 본질에 대해서는 충실한 것으로 드러난다. 학교에 그 이름을 부여했던 그리스어 스콜레는 먼저 여가를 가진 자들, 여가를 가진 자들인 한에서 평등한 자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이 사회적 특권을 공부라는 훌륭한 쾌락에 할애하는 사람들의 조건을 뜻한다.

따라서 학교 형태는 완벽한 고리가 될 것이다. 사회-경제적 자본을 문화 자본으로 전환하는 고리, 그리고 이 전환을 현실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이 전환 수단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를 보이지 않는 만큼 효과적으로 분리하는 고리.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형태는 더 넓게는 평등에 대한 화영과 근본적인 불평등 ― 스콜레를 가진 인간들과 필요에 매달린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 상징적인 것의 사치를 지불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의 불평등 ― 에 대한 몰이해를 동시에 유지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빈자들이 사치스러운 투자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하는 기만적 체제일 것이다. 이런 분석은 이처럼 극단적으로 민주주의적 인간을 분할을 은폐하면서 영속하게 하는 형태들에 속아 넘어간 인간으로 만드는 의혹의 사유를 품고 있다.

사실 의혹의 사유의 이런 허무주의적 해석에 대해 ‘불평등의 축소’라고 하는 실증적 해석이 응답한다. 부르디외와 파세롱의 비판에서 교육자들과 개혁 정치가들은 주로 다음의 세 가지 관념을 채택했다. 암묵적인 불평등 요인들을 명시할 필요, 대규모 학생들을 일률적으로 교육하는 형식주의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 사회적인 것의 무게, 곧 빈곤 계급에 고유한 아비투스(habitus), 사회화 방식을 고려할 필요.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이 정책들의 결과에 더는 발론이 제기되지 않았으며, 결국 불평등을 명시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불평등을 견고하게 만들어버린 꼴이 되었다. 한편으로, 사회문화적 차이의 해명은 그 차이를 운명으로 전환하고, 학교 제도를 보조 제도의 의미로 바꾸곤 했다. 특히 그것은 이민자 자녀들을 학업 실패의 위험이 없는 하급 직업 전문 과정 쪽으로 진로 지도하고 그에 맞게 학급을 다시 편성하는 과 함께 간다. 다른 한편, ‘암묵적인’ 기준들의 색출은 가장 명시적인 기준들의 무게를 더했다. 즉 유치원 때부터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내면화된 미친 경쟁, 그것은 좋은 초등학교 가도록 만들고, 또다시 좋은 중학교에 갈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마침내 수도 파리의 좋은 구역에 위치한 좋은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의 좋은 학급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학교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형태로 보는 허무주의적 시각 그리고 학교를 불평등 축소하는 도구로 보는 진보주의적 시각은 그것들의 원리에서난 효과에서나 서로 만난다. 둘 모두 불평등에서 출발해서, 불평등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필요에 맞춰진 학교를 요구하면사, 위 두 시각은 사회주의적 탈신비화에 대한 민주주의의 반혁명적 비판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투박한 전제, 즉 사회정치적 체제를 구성하는 형태들 사이의 불일치는 악 혹은 근본적인 속임수의 징표라는 관념을 재확인한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근대 경제·국가 체계에 대한 민주주의의 표시다. 그것의 형태들의 이질발생성, 특히 교육 논리와 생산 논리의 수렴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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