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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해동,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 발췌독

민족 '말살'은 물질적 폭력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야만적 폭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자원의 수탈을 1차적 목적으로 삼는 원시적 폭력이 폭력적 지배를 당하는 이들에게는 마음 편한 일인지도 모른다. 일차적이고 물리적인폭력에 대해서는 폭력을 수용하는 방법 이외에 달리 선택할 수단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때리는 자에 비해 밪는 자가 오히려 편하기 때문이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욱 가공할 폭력은 동일화라는 폭력이다. 타자를 자신과 동일화화련느 것은 물리적으로 절멸시키는 행위보다 타자에 게 더욱 근원적인 고통을 줄 수 있다. 자신의 정체성이 외부의 강제로 변해야 하는 상황을 사람들은 더욱 참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동일화정책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단계에 이르면, 일정한 수준에서 '국민주의'적 지배 형식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징병, 곧 혈세를 강요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식민지 피지배민에게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에게 의무교육의 조속한 실시를 약속하고, 참정권을 부여하겠다는 의지를표명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인과 조서닌이 동일하다는 점을 두드러지게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인의 내면은 분열하게 된다 .도일화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식민지 동화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식민지 동원 체제는 식민지 주민에게 피지배자의 역할과 타자에 대한 침략을 동시에 요구했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그야말로 '한 몸으로 몇 겹의 삶을 사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듯 식민지 동원 체제는 식민지 지배자로부터 인간적 모멸을 어떤 방식으로든 견딘 식민지 조선인에게 자신이 겪은 모멸감을 또 다른 그 누군가에게 강요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근대의 야만'이었다.  (27-9쪽)

 

 

 

서구에서 생산한 근대관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방식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라는 발상이다. 서구는 항상 식민지를 대상화하고 이를 자신들의 근대관 속에 편입시켜 사고해왔다. 식민지를 제외한 채 서구 근대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식민지는 언제나 서구 근대를 대상화하지 못하고 자신의 외부로서 추종해 따라잡아야할 목표로 간주해왔다. 이런 방식의 서구 근대 이해에서 서구 근대란 식민지 자신 속에 내재화되어야 할 외부이며, 이에 따라 언제나 외부화될 수 없는 내부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는 식민지에서 서구 근대를 대상화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서구 근대는 식민지에 언제나 내부화되어 있지만 항상 외부화될 수밖에 없는 내부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전유하고자 하는 발상을 식민지 근대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식민지 근대'의 발상은 언제나 서구 근대를 사유의 틀 속에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내부화된 서구 근대를 언제나 대상화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비판적으로 서구 근대에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구 근대는 식민지 근대라는 문제의식에 의해서만 그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식민지 근대'를 사유할 때 식민지와 근대를 분리하거나 더욱이 이를 대립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문명-야만의 이항대립적 근대 설정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식민지 근대란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결합한 것일 수는 없다. 언제나 근대는 위계적인 사회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즉 식민지 근대를 포함하여 어떤 맥락 에서의 근대든 모더니티(근대성)의 존재 여부로 근대의 존재나 성격이 결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적 기준이 아닌 새로운 근대의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원적인 근대사을 제시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서구적 근대성으 억압성에 저항하기 위한 시도로서 곧 서구 근대를 비판하기 위해 근대의 다양성을 상정하는 것, 다시 말하면 '비유럽적 근대' 또는 '다원적 근대'를 설정하는 방식으로는 순환 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식민지 근대가 근대 비판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지적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타당한 것이다. 근대 비판으로서의 식민지 근대 설정은 '새로운 근대'를 설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를 서구 근대(제국주의 근대)의 '대항 개념'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모더니티의 배치 문제로서 '식민지 그대'는 성립할 수 있고, 서구 근대와 맞물려서 돌아가는 근대의 한 양상으로서만 '식민지 근대'라는 문제 설정이 가능한 것이다. '식민지 근대'란 '이식된 근대'의 합리화된 체계를 적대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서구 근대의 합리화 과정의 도구성에 맹목적이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69-71쪽)

 

 

 

그렇다면 다시 '식민지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란 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란 일종의 제도이기도 하고 동시대와 연관된 생활양식, 태도, 자세 등 일종의 에토스(ethos)이다. 또한 근대의 에토스란 도구적 합리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월러스틴의 분류에 의하면 양면적 근대의 한쪽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기술의 근대'와 '해방의 근대' 중 '기술의 긘대'가 바로 그것이다. '기술의 근대'는 외부 강제에 의한 산물이지만, 식민지민의 열망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근대성'은 '잡종성'으로 표현되며, '식민지 근대'가 잡종화할 운명은 '제국주의 근대'의 잡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식민지 근대'와 '제국주의 근대'의 잡종성은 근대의 역사적 특성을 구성한다.

이런 상호작용의 관계는 식민지민의 존재가 문화의 교류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당연히 문화변용(acculturation)의 방식을 문제 삼게 한다. '기술적 근대'의 '도구적 합리성'은 일종의 모듈로서 외부로부터 강제되었으나 스스로 학습하고 변용하여 내면화함으로써 식민지 근대의 특성을 이루는 것이다. 비록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지만 이것은 정당한 문화 융합의 한 모습을 이룬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해방운동의 저항성이라는 것도 제국주의적 근대의 모방이나 그 변용과 다르지 않다.

또한 기술의 근대는 해방의 근대의 토대를 이루기도 한다. 식민지하의 전통(비근대)이란 대개의 경우 근대의 입장에서 재단된 변하지 못한 잔여 부분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지만 간직해야 할 어떤 가치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기술의 근대에 의해 재단된 전통은 해방의 근대로 귀속되어야할 그 무엇으로 전용되기도 하지만, 해방의 근대에 귀속된 전통은 역으로 해방의 근대 그 자체의 성격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79-80쪽)

 

 

 

일제의 조선 병합 이후 이런 문명화의 열망, 즉 서구 선망=모방의 경향은 일본의 지배에 대한 저항이 강하면 강할 수록 더욱 정당화될 수 있었다. 문명-개화와 국민화의 논리적 기초는 식민지하에서 문화주의와 '민족'의 논리로 연장, 발전되고 있었고, 이런 기반 위에서 서구 선망=모방은 관념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1920년대 문화주의-문화운동은 이방적인 서구 수용의 열망 위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이런 경향은 좌파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부정된 서구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 구소련은 대안적 서구 문명으로서의 좌파들의 '대안적 근대'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주기에 좋은 관념적 대상물일 뿐이었다.  즉 반일 민족주의와 내면화된 '식민주의'(서구 선망)는 상호 순기능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식민적 분열 증상을 강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식민적 분열 증상은 서구 문명(문화)이나 도구적 합리성의 수용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었고, 한국인들의 독특한 근대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미국에 대한 선망은 이런 분열 증상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82쪽)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적어도 다음의 여섯 가지의 사회적인 것, 하위 사회의 영역이 분리되어 있었다. 행정 관료적 영역, 경제적 영역, 종교적 영역, 문화적 영역, 집합적 운동의 영역, 하위 지역적 영역이 그것이다. 앞의 두 개의 영역은 국가로부터의 분리가 아직은 의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서서히 분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네 개의 영역은 1920년대 이후 명확히 분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어느 영역이나 이념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인 영역의 분리는 명확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처럼 식민지하 대중의 형성은 근대적 사회의 '형성'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한편 여기에서 거론된 사회적인 영역은 일상적으로는 정치적인 성격을 상실한 영역이다. 그러나 어떤 계기로 인해 사적인 특성이 공적인 것으로 부상하는 순간 항상 '정치적인 것' 과 부딪치게 된다. 이런 정치적인 것이 부상하게 될 때 공공연한 저항의 영역과 협력의 영역이 분리되게 마련이다. 저항과 협력은 동전의 양면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런 정치적인 행위가 부상하는 과정은 사회적인 영역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성격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대중화현상은 두 가지의 재주술화를 계기로 역진하게 된다. 개인적 주체를 대중적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현상을 재주술화라고 한다면, 탈주솨의 결과를 매개해서만 재주술화는 진행된다. 이러한 재주술화는 식민지 '계몽'과 연관된 것이기도 했다. 식민지기 계몽은 대중으로 하여금 '합리화된 체계'를 구성하도록 유도했다. 대중의 합리화는 식민지 의제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창출, 확대되는 사회적 합리성과 이를 통해 분리된 사회 속에서 식민지 지식인 엘리트가 수행하는 사회적 계몽의 분리 속에서 진행되었다. 둘 다 위로부터의 계몽의 기획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적 합리성의 확대라는 점은 일치하지만, 서구 근대의 초기 국면에서 양자가 협조한 것과 같은 관련을 맺니는 안핬다. 물론 기본적으로 공존하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지만 양자는 오히려 적대적인 측면을 더욱 강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식민지기 계몽의 역설 위에서 구축된 것이 바로 대중의 재주술화 과정이다. 합리화는 권력의 한 양상을 구서아지만 다른 한편으로 계몽을 둘러싸고 권력과 저항운동은 대립한다. 이처럼 식민 권력의 합리화 과정과 식민지 지식인의 사회적 계몽은 동일한 '합리화된 체계'를 구성하고자 함으로써 가장 강력하게 대중의 재주술화를 위한 연합군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 체계라고 할 수 있다. (89-90쪽)

 

 

 

유신 체제는 일정한 수준의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수준에서 국민적 동의를 얻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준전시적 동원 체제하에서 국민적 동의를 얻고 있다는 점이 유신정권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변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런 국민적 동의가 주권독재, 즉 국가와 민족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국민주권 이념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유신 체제의 가장 중요한 이념적 지지 기반 중 하나로 주장되고 있었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는 동태적 개념으로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이것은 현실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민족국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했던 민주주의가 국민적 동의를 획득하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주권독재를 옹호하고, 준전시적 동원 체제를 기반으로 대중독재를 지지하는 매개자이로 활용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현실성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제약하고자 했던 '한국적 민주주의'가 이념형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필연적이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에 저항하던 시민사회의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 이념적 성향이 강한 민주주의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규정하는 거시 바로 박정희의 유신 체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약한 자유주의와 강한 민주주의로 특징지어진다는 최장집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시민사회는 재산권 최우선의 원리나 시장과 경제적/사적 이익을 옹호하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중앙집중화된 정치권력에 반하여 민주주의와 민주적 공적 영역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그 핵심 내용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약한 자유주의적 내용을 갖지만, 강한 민주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요컨대 한국적 조건에서 시민사회의 형성에는 운동의 맥락과 전통이 매우 중요했으며, 운동으로 표출되는 공적 정신 내지는 공공선의 가치가 압도적인 내용을 갖는 것이었다.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18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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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中

예를 들면 나는 어느 때 눈보라가 치는 밖에서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노동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몸이 너무 얼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열심으로 철로에 자갈을 쳐넣고 있었다. 순간 나는 숨을 돌리기 위해서 일을 멈추고 허리띠를 늦추려고 했다. 그 순간 운 나쁘게 감시병이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위법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나에게 있어서 -- 이미 증대해진 무감동에도 불구하고 -- 고통스러운 것은 무슨 설교도 아니었고 매질도 아니었다. 이 감시병은 간신히 인간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이 말리 빠지고 누더기를 걸친 인간에게 조소의 말조차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시부렁거리며 땅에서 돌멩이 하나 줍더니 나를 향해 던졌다. 마치 무슨 동물에게 던지듯이. 구타를 당할 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구타에 따르는 조롱이다. (48p)

 

 

 

직접 생명 유지에만 집중한다는 심리적인 상태와 필요성의 압력 밑에서는 전 정신생활의 현상이 원시적인 단계에까지 끌어 내려진다는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따라서 죄수 가운데 정신 분석에 흥미를 가진 동료는 때때로 수용소에 있어서의 인간의 퇴행에 대하여 즉 심리적 생활의 보다 원시적인 단계로 돌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런 소망이나 노력의 원시성은 죄인의 전형적인 꿈에 있어 분명했다. 수용소의 죄수가 자주 꾸게 되는 꿈은 어떤 것일까? 죄수는 빵이나 과일이나 담배나 따뜻한 목욕탕 등을 꿈꾸는 것이다. 가장 소박하고 원시적인 욕구 충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원시적인 소망의 꿈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가 잠이 깨어 다시 수용소의 현실에 직면하고 그리고 꿈에서 그리던 화녕오과 수용소의 현실과의 놀라운 콘트라스트를 느꼈을 대 꿈이라는 것이 꿈을 꾼 사람에게 어떤 기분을 안겨 주는 가는 상상 밖이었다. 아뭏든 나는 다음과 같은 일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밤, 나는 내 곁에 자고 있던 동료가 분명히 놀라운 악몽 때문에 큰 소리로 외치면서 딩굴고 있는데 잠이 깨었다. 나는 원래 어떤 불안한 망상 관념이나 어떤 꿈에 나타나난 것으로 해서 괴로와하는 인간에 대하여 특별한 동정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이 가련한 악몽으로 괴로와하는 친구를 막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나의 행동에 깜짝 놀라 흔들어 깨우려고 뻗었던 손을 도로 오무렸다. 왜냐하면 그 순간 어떠한 꿈도 이를테면 가장 무서운 꿈이라 할지라도 수용소에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에 비하면 아직도 낫다는 것이 강렬하게 나의 의식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54-5pp)

 

 

 

영양 부족의 결과 수용소 생활에 적응한 제2단계의 죄수의 원시적충동성은 식욕을 의식의 면전에 드러내 놓았으나 다른 한편 영양 부족은 성욕이 일반적으로 없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무서울 정도로 설명해 줄 것이다. 최초의 자극적인 시기를 제외하면 남성의 집단 학대 속에 있어서의 심리학자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쉽사리 밝혀졌다. 즉 다른 장소(이를테면 군대 생활)에 있어서의 집단생활과는 반대로 이 곳에서는 남자들끼리의 성적 장난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죄수의 꿈에서까지도 성적인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 정신 분석의 의미에 있어서 '목적을 저지당한 노력'이, 곧 사랑에 대한 깊은 동경이나 보다더 자상하고 높은 요구가 꿈 속에서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5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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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발췌독

교육기회를 평등화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바람직한 일이며, 실현 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을 의무취학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구제와 교회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학교는 근대화된 무산계급의 세계적 종교가 되고 있고 과학기술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약속이 결코 실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국가는 학교를 이용하여 전 국민을 각기 등급화된 면허장과 결합된 등급 지어진 교육과정 속에 의무로서 끌어들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지난날의 성인식의 의례나 성직자 계급을 승진시켜 나가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근대국가는 자국의 교육자의 판단을 선의의 결석학생지도관이나 최직조건을 통해 국민에게 강요해 왔으며, 그것은 마치 스페인의 국왕들이 신학자들의판단을 중남미의 정복자나 종교재판을 통해 피정복민족이나 국민에게 강요했던 것과 꼭 같은 것이다.

(27쪽)

 

 

현재 학교는 교육을 위한 재정을 대부분 독점하고 있다. 학교교육에서 받는 데 드는 것보다도 비용이 들지 않는 반복연습에 의한 교수법은 이미 부유하게 되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자(의무교육을 받지 않고 홈스쿨을 할 수 있는 자)나 현지훈련을 받기 위해 나간 군대나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자만을 위한 특권이 되고 있다. 미국이 교육의 탈학교화를 서서히 진행하는 계획을 추진할  경우 처음에는 이와 같은 반복연습에 의한 훈련에 대해 배당되는 인재나 자금이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일생 중 어느 때나 수백을 헤아리는 기능 중 어느 것인가를 선출해서, 그것도 공비에 의해 배우게 된다면 아무런 장애도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조금밖에 되지 않으나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나이든 사람들에게 어느 기능센터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교육구매카드(바우처제도를 말한 듯 함)를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러한 것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출생했을 때 부여하는 교육의 허가증 또는 '교육신용카드'의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매년 주어지고 있는 보조금은 젊었을 때 쓰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교육구입권리증entitlement'을 비축해 놓고 나중에 사용할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대개 학교에서보다 더 잘, 더 빨리, 더 싸게, 그리고 달갑지 않은 부작용을 더 줄이며 자기에게 편리할 때 가장 수요가 많은 기능을 습득할수 있게 될 것이다.

(32-3쪽)

 

 

기능 교수자의 성패는 학습자에게 표준적인 반응을 발전시키게 하는 환경을 정비하는 것에 달려있다. 교육의 지도자, 즉 교육자는 학습을 조성할 수 있기에 알맞은 친구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미해결 문제를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개인들을 만나게 해 준다. 기껏해야 그는 아동들에게 문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해 주는 데 도움이 될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을 확실하게 해주기만 하면 아동들은 그와 같은 동기에서 같은 시간, 같은 문맥 속에서 같은 문제를 탐구하려고 하는 상대방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8쪽)

 

 

가장 근본적으로 학교에 대치될 수 있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현재 자기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해 같은 관심과 그것에 관한 학습 의욕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생각할 기회를 평등하게 주는 서비스망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쪽)

 

 

나는 최근 한 학년 진급하는 것에 반대하는 항의운동을 조직한 일단의 중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걸어 본 일이 있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모방'이 아니고 '참가'였다. 그들은 이러한 일이 오히려 교육을 더 적게 받으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100년 전 칼 마르크스가 아동노동을 금지하려고 했던 고타강령 중의 한 구절에 반대했던 저항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이 제안에 반대한 것은 젊은이를 위한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젊은 사람을 위한 교육은 일을 하고 있을 때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노동의 최대의 성과란 노동에서 얻는 교육이며, 또 일에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타인을 교육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갖는 기회라고 한다면, 교육적 의미에 있어 현대사회의 소외는 경제상의 소외보다도 한층 더 나쁜 것이다.

(47쪽)

 

 

학교에서 습득하여 마침내는 제도화되어 버린 가치는 수량화된 가치를 뜻한다. 학교는 인간의 상상력을 포함해서, 아니 인간 그 자체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측정될 수 잇는 세계로 젊은이들을 인도해 들어간다.

그러나 사실, 사람의 성장은 측정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련된 자기주장의 성장이며, 어떻나 척도나 교육과정을 가지고서도 측정할수 없는 것이며, 타인의 업적과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학습은 상상력이 풍부한 노력에 의해서만 타인과 경쟁할 수 있으며, 또 타인이 도달한 것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걸어간 길에 도달할수 있는 것이다. 내가 존중하는 학습은 측정할수 없는 재창조를 말한다.

(74쪽)

 

 

학교는 학교교육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기대와 학교교육을 생산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결합시킨다. 그 기대는 소비자의 의견으로 나타나고 신념은 의례로 나타난다. 학교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적하물 숭배'(조상의 영혼이 배로 돌아와 백인들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신앙)가 예배의식의 한 여태로 나타난 것이다 .적하물 숭배는 나에게 1940년대의 멜라네시아군도 전체에 걸쳐 행해졌던 하나의 제식을 연상하게 한다. 그것은 열광적인 신자들에게, 만약에 그들이 옷을 입고 있지 않은 맨몸에 검은 넥타이를 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기선을 타고 나타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냉장고, 바지, 재봉틀 등을 운반해 준다고 믿게 했던 제식이었다. (...)

인간은 자신의 구세주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되어버린 것이며, 인류가 번영하고 있는 한 진보하는 공학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과학이 가져다주는 무한한 보상이 약속된다는 것이다.

(82-4쪽)

 

 

만약 우리들이 가치 있는 지시근 특정한 사정 하에서 소비자에게 강제 해도 상관없는 상품이라는 전제에 도전하지 않으면, 사회는 점점 사악하고 그릇된 학교와 정보를 전면적으로 관리하는 자에 의해 지배당할 섯이다. 교육적 치료자는 더 잘 가르치기 위해 그들의 학생에게 더 많은 약을 먹이고, 학생은 교사로부터의 압력이나 증명서를 따내기 위한 경쟁으로부터 구제되기 위해 더 많은 약을 먹게 될 것이다. 더 많은 관료들은 감히 교사로서의 자세를 취하게 될 것이다. 학교교사의 말은 이미 광고 종사자들에 의해 원용되었다. 지금 장군이나 경찰관은 교육자를 가장해서 자신의 직업에 위엄을 주고자 한다. 학교화된 사회에서 쟁을 하는 일이나 국민을 억압하는 일도 자신의 이론적 근거를 교육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이라는 양식의 교육적인 싸움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진보라는 것이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가르치는 유일한 방법으로 더욱 정당화될 것이다.

(90쪽)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처음 봤을 때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는 끊임없이 신임장을 갱신하는 자에 한해서만 방되고 있다. 학교는 근대적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이동하는 데 필요하다면 고속도로를 위해 현재 부담하고 있는 정도의 연간 지출은 필수적이라는 인상을 고속도로에서 받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앞에서 고속도로는 자가용에 의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것이 허울 좋은 공익사업임을 폭로했다 .학교도 마찬가지로 학습은 교과과정을 배운 결과라는 것을 허울 좋게 보이기 위한 가정에 입각하고 있다.

고속도로는 기동성에 대한 욕망과 필요를 자가용차의 수요로 전환시킨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이 성장하고 학습하려고 하는 자연적인 경향을 교수의 수요로 전환하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성장하도록 만들어진다는 것은 제도된 상품을 구하는 일보다도 좀더 많이 자발적인 활동 의욕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이다. 학교는 제도 스펙트럼 상에서 고속도로나 자가용차보다 더 우측에 있다. 뿐만 아니라 학교도 제도 스펙트럼의 우단에 있는 총괄적 보호수용소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학교는 사람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포기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신적 자살을 하게 만든다.

(10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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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루 프레이리, <페다고지> 발췌독

타인(혹은 다른 생물)을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느끼는 쾌감은 사디즘적 충동의 본질이다. 이 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사디즘의 목적은 사람을 사물로, 활력 있는 것을 무기력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통제를 받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자유라는 삶의 한 가지 본질적 요소를 잃어버린다.

- 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中

 

사디즘적 사랑은 왜곡된 사랑이며, 삶의 사랑이 아니라 죽음의 사랑이다. 따라서 사디즘은 억압자 의식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자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 시체에 성적 충동을 느끼는 성 도착증)의 세계관에 해당한다. 억압자의 의식은 생명의 큰 특징인 활력과 창조력을 찾으려는 충동을 포기하고 지배를 추구하므로 결국 생명을 죽이게 된다. 게다가 억압자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과학과 기술을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조작과 억제를 통해 억압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대상이자 '사물'이 된 피억압자는 오로지 억압자가 그들에게 명령한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의도도 가질 수 없다.

(74-5쪽)

 

 

은행 저금식 교육은 인간을 대상으로 보는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프롬이 말하는 '바이오필리'(biophily; 생명체에 대한 사랑)를 촉진하지 못하고 대신 그 대립물인 '네크로필리'를 낳는다.

(97쪽)

 

 

은행 저금식 교육관은 (아울러 모든 것을 이분화하는 이것의 경향도) 교육자의 행위를 두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 단계에서 교육자는 서재나 연구실에서 강의를 준비하면서 인식 대상을 인식한다. 둘째 단계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그 대상에 관해 설명한다. 이때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사가 설명한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암기하는 것이다. 또한 하갱들은 어떤 인식 행위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식 행위의 목적이 되는 그 대상은 교사와 학생들 양측의 비판적 성찰을 야기하는 매개물이 아니라 교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와 지식의 보존'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참된 지식도, 참된 문화도 실현할 수 없는 제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02쪽)

 

 

문제제기식 교육은 억압자의 이익에 기여하지도 않고 또 기여할 수도 없다. 억압적 질서는 피억압자가 "왜?"라는 의문을 품는 것을 허용하지 낳는다. 문제제기식 교육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실행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가 되어야만 가능하지만, 혁명 지도부가 그 교육 방법을 싱행하는 데반드시 완전한 권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혁명 과정에서, 나중에 참된 혁명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도에서 당장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잠정적으로라도 은행 저금식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교육은 처음부터 혁명적 -- 다시 말해 대화적 -- 이어야만 한다.

(110쪽)

 

 

동물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할 수 없으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세계에 '침잠해' 살아가며, 전적으로 현재에 존재하기 때문에 '내일'도 '오늘'도 없다. 그래서 동물은 탈역사적이다. 동물의 탈역사적인 삶은 '세계'속에서 완전한 의미로 나타나지 못한다. 동물에게 세계는 그 자신을 '자아'와 분리시켜 주는 '비아'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세계는, 역사적인 것으로, '즉자존재'에게는 단지 배경일 뿐이다. 동물에게 위험이란 성찰로 인식되는 자극이 아니라 신호로써 인지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동물에게는 의사결정 반응이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동물은 자신을 헌신하지 못한다. 탈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동물은 삶을 '걸고' 행동할 수 없다. 또한 '삶을 걸지' 않기 때문에 동물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없으며, 삶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삶의 구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동물은 자신의 '배경' 세계를 문화와 역사까지 포함하는 유의미하고 상징적인 세계로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삶에 의해 자신이 파괴되리라는 것도 알수 없다. 그 결과 동물은 자신을 '동물화'하기 위해 외부 세계를 동물화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스스로 '탈동물화'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숲에서도 동물은 동물원에서처럼 '즉자존재'에 머문다.

그와 반대로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처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이 설정한 목적에 맞춰 행동하며, 세계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의사결정을 하고, 세계에 변화 작용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독보적 존재를 세계에 투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동물과 달리 그냥 살아가는 게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존재는 역사적이다. 동물은 탈시간적이고 단조롭고 통일적인 '배경' 속에서 삶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시키면서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동물에게 '여기'는 단지 낯익은 서식지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 '여기'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역사적 공간도 의미한다.

(125-6쪽)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 참여하면서 변혁 주체로서의 역할을 점점 자각해 가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절반은 자기 자신이고 절반은 억압자의 성격을 내면화한 모호한 존재로서 혁명에 참여한다면 -- 더구나 억압 상황에서 비롯된 그 모호함을 그대로 유지한 채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면 --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획득했다고 상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의 실존적 이중성은 분파주의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관료제를 정착시킴으로써 혁명을 침해하게 될 수도 있다. 피억압자가 혁명 과정에서 그러한 모호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 그들은 혁명주의가 아니라 보복주의로서 혁명 과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혁명을 해방의 길이 아니라 지배의 수단으로 꿈꾸게 될 것이다.

(164쪽)

 

 

민중과의 대화는 양보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며, 지배를 위해 사용하는책략은 더더욱 아니다. 대화는 세계를 '이름짓기' 위한 사람들 간의 만남이며, 참된 인간화를 위한 근본적인 조건이다. 가조 페트로비치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유로운 행동이란 오직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동만을 가리킨다. ... 자유의 적극적인 조건은 필연성의 한계를 알고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의식하는 것이다. ...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은 개인의 자유가 더 큰 폭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일 수 없다.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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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중에서 발췌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다. 그것은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세주의 도래, 그리스도의 재림, 열반과 같은 이 세상의 온갖 종교적 종말론의 화신이다. 그것은 역사적 전망이 아니라, 현재의 신화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주의는 어느 날엔가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역사적 체제다. 유토피아를 향한 이행과정에서의 하나의 '임시적'기간이라고 주장되는 그같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사회주의, 곧 평등과 형평을 극대화하는 하나의 역사적 체제로서 규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특징들을 갖춘 사회주의, 인간 자신의 삶에 대한 인간의 통제(민주주의)를 증대시키고 또 그 상상력을 해방시키는 그러한 사회주의에 대해서만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역사적 자본주의"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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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담론이론 :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요약)

 

미셸 푸코와 담론 이론 :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 『철학의 탈주』中 5장 (이진경)




1. 맑스주의와 ‘담론’ 개념

- 라클라우/무페 : 담론형성체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담론형성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 라클라우의 담론형성체 논의에서 푸코가 주요하게 거론되는데, 푸코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담론형성체뿐’이라는 라클라우의 주장에 동의할 것 같지는 않음. 푸코는 오히려 담론 외적인 것을 강조하고 담론 개념 자체에 대해 지속적으로 긴장을 유지함.

- 푸코의 담론 개념이 변화해 간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읽어 내는 것이, 차라리 그의 담론 개념을 평면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며 중요하다고 생각함. 이것이 담론 이론의 문제설정을 맑스적인 지반 위에서 다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



2. ‘언어학적 전환’과 표상체계 패러다임

- ‘담론’ 개념이 확산되게 된 계기는 ‘언어학적 전환’에 있음. ⇒ ①기호는 자의적이다. ②기호의 의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에 의해 정의된다. ③의미들을 조직해 내는 언어는 객관적 실체

-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의미는 더 이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기호들간의 관계에 의해, 그것들의 의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객관적인 것. 이제 주체는 담론 속에 존재하며 담론만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더욱 강한 의미에서 제기될 수 있음.

-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 레비스트로스의 관심사 : 문화라는 말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 질서, 혹은 인간의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해 주는 보편적 규칙의 문제.

┕→ ① 의미의 객관화를 넘어서서 개인이 사회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의미의 네트워크를 자신의 것으로 함으로써 가능한 것, 즉 주체는 구조의 효과이다. ② 의미가 객관적이라면 그것은 주체가 갖고 있는 의식의 차원을 넘어서, 무의식의 차원에서 연구되어야 함. ③ 어떤 개별적인 사실이나 현상이 뜻하는 바는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정해지며, 중요한 것은 경험적 사실들을 체계화하는 그 본질적 관계를 연역적으로 찾아내는 것. (보편적 질서는 다양한 문화들 내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수학적 동형성으로 정의됨)

┕→ 사회관계를 형성하는 보편적 질서는 친족관계를 통해 표현됨 ⇒ 여자의 교환을 통해 형성 ⇒ ‘근친상간 금지’

┕→ 이와 같이 보편성을 갖는 무의식적인 표상체계를 레비스트로스는 ‘야성적 사고’라 부름.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함으로써 정신분석학을 구조언어학과 결합하고자 함.



3. 푸코의 담론 이론


(1) 표상체계로서의 담론

- 푸코에 의하면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 즉 ‘말과 사물을 이어 주는 고리’요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 (『임상의학의 탄생』)

- 『임상의학의 탄생』에서 정의되고 있는 담론 개념은 대상은 언어적 의미의 고유한 망 속에서 파악되며, 그것을 통해 보이게 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고 보는 점에서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을 의미. 이는 정확하게 언어학적 전환의 효과 아래 있는 셈.

- 푸코는 다양한 담론들의 불연속과 단절을 규정하는 인식의 틀 자체의 불연속과 단절을 생각함. 이런 점에서 그 시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동일한 형태로’ 방향지우는 보편적인 표상체계의 역사를 말함. (『말과 사물』)

- 에피스테메의 분석을 통한 서구 역사의 세 시기 : ①르네상스 시대(사물을 유사성에 의해 질서지우는 시기.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  ②고전주의 시대(사물을 표상으로 환원하는 사고방식. 동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며,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착각해선 안됨. 호두와 두뇌발달의 연관관계는 용납안됨. 분류표(tableau)가 중요해짐.)  ③근대(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실체가 인식의 중심에 자리 잡음. 표상 외부에 있으며 표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체로서 칸트의 ‘물 자체’, 부의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노동’ 등. 인간중심의 사고)

- 위의 에피스테메들은 각각의 역사적 시기마다 서구인 전체의 사고방식을 기초지우고 있던 일종의 보편적 사고구조, 사고의 심층적 구조.

- 이런 푸코의 작업은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심층구조(‘야성적 사고’)를 찾아내려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작업과 유사. 차이점은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심층구조를 가정하고 그것을 도출하려 한 반면, 푸코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상이한 형태를 취한다는 점을 전제. (역사적 구조주의)


(2) 담론을 벗어난 담론 이론

- 1968년 혁명을 거치면서 담론에 대한 문제설정을 변화시킴. 『지식의 고고학』, 『담론의 질서』등.


① 담론의 새로운 정의

- ‘인식을 제한하는 특정한 표상체계’에서 그것이 포괄하는 개인들의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제약하는 조건을 통해 정의. 담론적인 분석이란 이제 “담론들을 기호들의 집합으로 다루지 않고 그들이 말하고 있는 바의 대상들을 체계적으로 형성하는 실천으로서 다루는 작업.

- 정신병리학, 경제학, 생물학, 사회학 각각을 다른 담론과 구별해 주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어떻나 효과를 지향하는가, 그것이 어떻게 실천을 조직화하는가에 의해 구별.

- 담론은 ‘역사적 아 프리오리’(a priori historique) : 담론적 실천을 특징짓는 규칙의 집합으로서 정의.


②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

- 푸코는 이제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형성해 내는 메커니즘을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의 연관 속에서 파악. 실천을 형성해 내는 이 관계들이 정의되는 것은 그 내적인 구성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나도록 해주며 다른 대상과 병치되고 그것들과 관계 속에서 자리 잡도록 해주는 외재성의 장 속에서.

- 담론의 외부는 없으며 모든 것이 담론을 통해 존재한다는, 언어학적 전환의 그늘 아래 있는 명제는 기각됨.

- 담론적인 형성체와 비담론적인 형성체 간의 관계가 파악되는 방식

┕→ 사건의 차원 :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근대 초기에 유럽 전역에 나타났던 ‘거대한 감금’이란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건의 효과 아래서 성립. 담론들은 우선 담론적 사건의 집합들로 다루어져야 함. 사건을 통해 담론의 현실적인 형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건은 담론적인 것에 대한 비담론적인 것의 효과를 지시.

┕→ 실증성의 차원 : 우리가 참되거나 거짓된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을 대상들의 영역을 구성하는 힘. 정신병동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도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해석되고 그 담론 안에 있는 규칙에 따라 실천이 이루어짐. 그래서 담론적 형성체는 “하나의 담론적 실천을 특성화하는 규칙들의 집합”. 푸코는 이를 그 아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판단이나 실천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 프리오리’.


③ 담론적 형성체의 네 가지 차원

- 대상의 형성 : 정신병의 대상은 정신병리학이란 담론 안에서 정의됨.

- 언표 행위 양태의 형성 혹은 말할 수 있는 주체의 형성 : 주체는 담론 안에 마련된 ‘자리’이고,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만이 주체가 될 수 있음. 주체의 지배력을 보장해 주는 것은 체계화된 제도와 공간.

- 개념의 형성 : 정신병리학에서 정신분열증이나 그 환자에 대한 서술과 판단은 의사의 개인적 사고가 아니라 정신병리학이 제공하는 개념들로 이루어짐.

- 전략의 형성 : 전략은 “담론의 대상, 주제, 언표 행위의 형성체계가 허용해 주는 담론적 공간 안에서 특정한 목적과 이론적 도구를 통해 새로운 계열의 개념을 형성해 내며, 그 위에서 특정한 형태의 실천을 겨냥하는 것”


(3) 계보학적 전환


①진리 의지를 문제 삼는 것.

- 개개 명제나 담론 내부적 과정에 머물러 있는 한, 어떠한 언표도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두고 평가된다. 각각의 담론은 그것이 진리인가 여부를 가리는 개념이나 규칙을 가지며, 이 규칙에 부합하는 한에서만 언표와 발언은 가능하게 됨.

- 실증주의 경제학에서 노동가치나 잉여가치라는 개념은 실증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으며, 그러한 개념을 근거로 한 임금 계산이나 축적 이론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 진리 의지를 통해 억압과 금지, 배제와 강제가 작용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진리 의지는 담론을 통해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인 것.


②담론의 사건적 특성을 복구하는 것.

- 담론마다 고유한 형성 규칙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담론의 형성을 지배한다면, 어떠한 담론 내부에서 그것과 단절한 새로운 담론이 탄생하리라고 기대할 순 없을 것. 새로운 담론적 공간의 출현은 담론 외적인 것을 통해서, 즉 담론 내의 담론 외적인 것인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

- 맑스에게 리카도나 스미스적인 담론을 넘어설 수 있었던 사건은 바로 1848년을 전후해서 전면화된 계급투쟁과 혁명. 이런 사건이 없었다면 맑스의 담론적 혁신도 없었음.

-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담론의 사건성을 복구한다는 것은 담론적인 것 안에서 작용하는 비담론적인 것의 일차성을 복구한다는 것.(ex: 형법학이나 정신병리학 담론에 대해, 감금하고 처벌하며 감시하고 훈육하는 사건의 일차성.)


③시니피앙의 지고성을 제거하는 것.

- 담론을 담론적 사건의 집합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것의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적 의미체계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름. 푸코가 말한 ‘언표의 물질성’은 “언표가 사물 또는 대상의 지위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 이는 라캉에 대한 비판의 효과를 지님. 이 지점에서 그는 ‘표상체계의 패러다임’과 단절. ‘언표의 물질성’ = ‘권력의 물질성’


(4) 표상으로부터의 탈주


- 푸코의 ‘표상으로부터의 탈주’는 담론적인 것과 담론 외적인 것의 복합효과를 사고할 수 있는 계보학적 공간으로 귀착. “우리가 분석의 근거로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언어나 기호라는 빈부한 모델이 아니라 전투나 전쟁 같은 역동적인 모델”



4. 계보학과 담론


▶푸코 담론개념의 네 가지 개념

①불연속성

- 각각의 담론은 서로에 대해 불연속적이며,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언표나 실천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음.

- 반면 라클라우/무페의 경우 “접합적 실천에 의해 구조화된 전체”를 담론으로 정의하면서 불연속성보다는 연속성과 개방성을 강조. 그들은 잠정적인 고정점의 역할을 하는 적대를 통해 담론적 실천들간에 적대적 분할이 발생하고, 그것을 축으로 하여 등가적인 접합이 이루어진다고 말함. 라클라우에게 ‘주체’란 푸코처럼 담론의 형성 구칙에 따라 특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접합의 양상에 따라 가변화되는 ‘주체위치’에 불과할 뿐.

- 나아가 그는 인민주의 이데올로기도 담론형성체가 다른 계급의 담론형성체와 어떻게 교차하는가에 따라 혁명적 또는 파시즘적 인민주의가 될 수 있다고 주장. 이로써 담론의 대상과 주체, 개념 및 전략의 불연속성을 통해 실천을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화하는 담론의 효과에 대해 사고하려는 문제설정은 ‘우연성’과 ‘개방성’의 논리를 위해 제거됨.


②특정성

- 사물을 특정한 형태로 보게 만들고, 실천을 특정한 형태로 생산해 내는 것을 의미.

- 반면 하버마스는 담론 자체의 ‘이상적인’ 소통 가능성을 전제하며, 단지 그것을 왜곡하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그러한 상태가 가능하리라고 봄. 그는 푸코와는 달리 담론은 ‘특정성’이 아닌 ‘보편성’을 갖는 것.

- 푸코는 의사소통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조차도 그것은 담론이 정의한 규칙에 따른 것이며, 합의가 아니라 ‘왜곡’이나 ‘기만’이 담론에 내재적이라고 봄.


③외재성

- 담론이 단지 담론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적 조건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임.

- 이런 관점으로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의 주장을 비판.


④전복

- 이것은 담론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기보다는 위의 특징을 갖는 담론에 대해 연구하고 분석하는 푸코 자신의 문제설정. 즉 기존의 담론을 전복하고 그것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것을 드러내며 그것이 강제하는 실천을 넘어서려는 ‘비판적 문제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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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발췌독

 

 

새로운 역사적 현상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 맑스나 엥겔스는 파시즘을 알지 못했고, 레닌 역시 파시즘에 대한 분석의 시작을 보았을 뿐이었다. 현실에 대한 반동적 파악은 현실의 모순과 실제하는 관계들을 간과했다. 반동적 정치는 발전에 저항하는 사회적 힘을 자동적으로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동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혁명적 힘을 과학이 남김없이 밝혀내지 못할 때에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맑스에 의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여 모순으로 가득 찬 과정을 파악하게 되면, 확실히 반동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개인이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국 기계론적 사고, 경제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빠지게 되고 필연적으로 파멸하게 된다. 따라서 비판은 사회적 실체의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고 실천적 가치를 가질수 있다. 맑스의 혁명성은 그의 주장이나 그가 가리킨 혁명의 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진보시키는 힘으로서 산업 생산력을 인식했다는 점,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실제와 일치하게 묘사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실패는 사회 진보를 방해하는 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 즉 중요한 요인들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37쪽

 

 

 

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속에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욱 중요하게는 이런 구체적인 변화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모순된 방식으로 행위하는 인간에게서는 활동적 힘, 즉 물질적 권력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자신이 발원한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반작용'은 사회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성격구조가 수행하는 기능형식으로서 이해될 수 있을 때, 그 외관상의 형이상학적/심리학주의적 성격을 상실하게 된다. 반작용 자체는 자연과학적인 성격연구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보다 느리게 변혁된다는 확증이 더 분명해진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상응하는 성격구조는 유년기 초기에 근본적으로 형성되며, 기술적 생산력보다 훨씬 더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심리적 구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발원한 사회적 관계의 급속한 발전에 뒤처지게 되며 이후의 삶형태와도 갈등을 빚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전통',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 상황과 새로운 상황 사이의 모순이 가진 본질적 특성이다.

- 53-4쪽

 

 

반동적 심리학은 파업이나 절도가 명목상 비합리적인 동기로 인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이는 언제나 반동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사회심리학은 전혀 반대되는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한다. 즉 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사회경제학은 인간의 행위와 생각이 합리적이고 목표지향적일 경우에, 즉 욕구만족을 향해 움직이고 경제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계속해서 반영할 때 사회적 사실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경제적 상황과 모순될 경우, 다시 말해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

 

따라서 대중심리학의 문제제기는 즉각적인 사회경제학적 설명이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대중심리학이 사회경제학과 대립하고 있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사회경제적 상황과 모순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생각과 행동 자체는 더 오래 전의 사회경제적 상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 55-6쪽

 

 

 

히틀러가 대중심리에 끼친 영향력을 연구하려면 지도자 또는 어떤 이념의 주창자가 지닌 개인적 관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강령은 광범위한 계층에 퍼져 있는 대중들의 평균적 성격구조에 조응해야만(비록 역사적 관점이 아닌 제한된 관점에서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

- 73 쪽

 

 

 

비스마르크는 히틀러의 우상이되었다. 왜냐하면 비스마르크는 독일 민족을 통일시키고 오스트리아 왕조에 대항하여 투쟁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반유태주의자 뤼거와 범게르만주의자 쇠네러가 히틀러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계획은 민족주의적-제국주의적 목표에 맞춰졌으며, 그 목표를 예전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이 사용했던 것과는 다른 좀더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여 달성하려 했다. 그가 선택한 수단은 조직화된 맑스주의의 역량에 대한 인식과 모든 정치운동에서 발견되는 대중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조직화된 맑스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선도된)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적으로 조직화되고 인도된 민족적 세계관과 대결하게 된다면, 투쟁의 에너지가 똑같을지라도 성공은 여원한 진실의 편에 머물 것이다.([나의 투쟁], 422쪽)

 

국제주의적 세계관이 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돌격대로 조직화된 정당이 이 세계관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반대의 세계관이 실패하게 된 것은 그 세계관을 대표할 통일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관점 전반을 해석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가 아니라, 제한되고 통합된 형태의 정치족이 세계관을 싸워 승리하도록 만들어준다. (같은 책, 423쪽)

- 77쪽

 

 

 

따라서 히틀러가 원했던 것은 (그가 공개적으로 시인한 것처럼) 맑스주의와 그것의 대중조직화 기법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제국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대중조직화의 성공은 히틀러가 아니라 대중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의 선동 활동이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 권위주의적이고 자유를 두려워하는 성격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히틀러를 이해할 때 중요한 점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그가 대중들로부터 부여받은 의미인 것이다. 더군다난 문제를 더욱 더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대중들의 도움으로 제국주의를 관철하고 싶어했으면서도 그가 대중들을 철저히 경멸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중명하기 위해서 많은 예를 드느 대신에 다음과 같은 하나의 솔직한 고백만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중들의 정서는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여론이 무엇을 주입하느냐에 따라 늘 좌지우지될 뿐이다. (같은 책, 140쪽)

- 79쪽

 

 

 

소시민계층이 이런 위기 속에서 조직적으로 결합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던 만큼이나 소기업들간의 경제적 경쟁은 산업노동자들에 필적할 만한 (중산계층간의) 연대감 형성을 가로막고 있었다. 소시민들은 자신이 놓인 사회적 상황의 결과로 자신들의 계층과도, 산업노동자들과도 연대하지 못했다. 소시민들은 자신의 계층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고, 무산계급화를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산업노동자들과는 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파시스트 운도은 소시민계층의 결속을 실현했다. 어떤 대중심리적 기초에서 이러한 결속이 가능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하층과 중산계층에 속한 국가 관리와 시적 관리의 사횢거 지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범한 관리의 경제적 지위는 평범한 숙력 산업노동자보다 더 열악했다. 이 열악한 지위는 부분적으로는 출세할 수 있다는 매우 희박한 전망에 의해서 유지되었으며, 국가 관료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종신 연금으로 벌충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정부의 권위에 종속되어 있었고, 동료에 대해 경쟁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연대의 발전을 방해했던 것이다. 관리들의 사회의식을 특징짓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와 공유하는 운명이 아니라 국가 당국과 '민족'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다. 이 태도는 국가권력과의 완전한 동일시로 이루어지며, 사무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그가 고용되어 있는 회사와의 동일시로 이뤄진다. 그는 산업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종속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산업노동자와 달리 연대감을 발전시키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가 당국과 육체노동자들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부에 복종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국의 대리인이 되기 때문에 특권적인 도덕적 (물질적이 아닌)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심리적 유형의 완전한 모습을 우리는 여러 군대의 하사관들에게서 발견한다.

- 88-9쪽

 

 

 

농민들이 왜 '토지에 묶여' 있으며 '전통적'인가, 그리고 정치적 반동의 영향을 받기 쉬운가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와 같은 가족과 경제의 밀접한 얽힘 속에 놓여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토지유착과 전통이 오로지 경제양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라, 농부의 생산방식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포함하는 엄격한 가족적 유대를 필요로 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유대는 광범위한 성의 억제와 억압을 전제로 한 다는 점이다. 이런 이중적인 토대에 기초하여 가부장적인 성도덕을 핵심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민의 사고방식이 생겨난다. 나는 다른 글에서 소련 정부가 농업의 집단화를 시행하면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서술한 적이 있다. 그런 어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농민들의 '땅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을 준 것은 본질적으로 땅에 의해 조건지어진 가족적 유대였던 것이다.

- 91쪽

 

 

(히틀러 정권이 1933년 5월 12일 공표한 <농업소유관계의 새 질서>라는 법안과 관련하여)

이 법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경향은 무엇인가? 이 법안은 중간규모와 소규모의 농업경제를 흡수하고, 토지 소유자와 재산 없는 농촌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차이를 점점 더 크게 하려는 대농장 소유주의 이해관계와는 모순된다. 그러나 대농장 소유주의 또 다른 강력한 이해관계, 즉 자신이 지닌 권력의 대중적 토대를 형성해 주는 것은 농촌 중산계층이기 때문에 이 계층을 계속 존재케 해야 한다는 이해관계는 이런 모순을 덮어두기에 충분했다.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대규모 토지 소유자가 단지 사적 소유라는 점에서만 동일시된 것은 아니다. 소규모/중간 규모 재산 소유자들이 이데올로기적 분위기, 즉 소규모 경제를 꾸리는 가족 안에 존재하는 분위기를 유지시키지 못한다면 그런 동일시는 별다른 비중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최상의 민족주의 전사들을 배출하고 여성들을 변화시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담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분위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 유명한 '도덕을 유지시키는 농민들의 건강한 영향'의 배경이다. 그러나 이 또한 성경제학적인 문제이다.

- 93-4쪽

 

 

 

사회학에 밝지 못한 정신분석학자들이 사회혁명을 '아버지에 대한 유년기적 반항'으로 설명하는 것은 지식인 집단 출신의 혁명가를 염두에 둔 설명이다. 물론 지식인 혁명가의 경우에서는 이런 형편, 즉 아버징 ㅔ대한 유년기적 반항이 실제로 결정적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산업노동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에서 어린이에 대한 아버지의 억압은 소시민계층의 경우만큼이나 심하다. 아니 사실은 때때로 더 잔인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꼐층의 특별한 차이를 그들의 생산양식과 그 생산양식에 따르는 그들의 성에 대한 태도에서 발견한다. 오해를 오하지 않도록 요점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산업노동자의 성 역시 부모에 의해 억압되지만, 산업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 겪는 모순이 소시민 계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시민계층에서 억압되는 것은 단지 성생활뿐이다. 소시민계층에게서 성활동은 오로지 성적 욕국와 성적억압 사이의 모순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산업노동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산업노동자는 자기가 속한 계층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성적 견해을 가지고 있는데, 이 견해는 그들 집단의 도덕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대치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의 생활 조건과 집단적 존재방식도 ㄱ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도덕주의적 성 이데올로기와 대립한다.

- 111쪽

 

 

 

 

(파시스트 이론가 로젠베르크의 말)

인종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이자 영적 시닙주의의 역사이다. 이와는 반대로 혈통 종교의 역사는 민족의 흥망, 민족의 영웅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발명가와 예술가들에 대한 위대한 세계사인 것이다.

 

(...) 이런 신비주의의 정체를 폭로하여 그 근저에 깔려 있는 비합리성을 밝혀내는 대신 그것을 비웃기만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다. 이런 신비주의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것은 생물학적 에너지 과정인데, 이것은 비합리적, 신비주의적으로 파악된 반동적 성이데올로기의 극단적 표현이다. '영혼'과 그것의 '순수성'에 대한 세계관은 바로 성적 무감각의 세계관, 즉 '성적 순수성'의 세계관인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 의해 조건지어진 성의 억압과 성에 대한 수줍음이 외부로 표출된 것이다.

- 135쪽

 

 

 

(성적 존재양식과 성도덕을 둘러싼 모순)

1871년의 독일형법 218조는 '우생학적' 이유로 산모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 여성에게 심기가한 사회적 심리저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판단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임신중절을 금지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공산당은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다"라는 구호 아래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며 이 조항을 폐기시키려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 공산당은 원치 않는 임신을 주로 경제적 궁핍과 연결시켰다. "만약 두번째, 세번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궁핍이 시작될 것이지만 임금은 오르지 않는다. 산모의 몸에는 굶주릴 작은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독일공산당의 이런 주장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으면서도 이듬해 총선에서 '순수한 모성'을 주장하고 있던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줬다. 여성들은 여전히 모성과 성적인 것이 서로 대립한다는 반동적 권위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이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 168쪽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 계급 출신의 젊은 기독교 대중들은 교회에 대한 공격에 저항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젊은 기독교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교회가 '자본주의적 기능'에 봉사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교회의 이런 기능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든 잘 믿도록, 또한 청년 단체에서 교회의 대표자들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으며, 따라서 서로 대립하는 공산주의자와 성직자의 사회적 입장이 청년들에게 쉽사리 납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는 단지 성의 영역에서만 둘 사이의 명확한 구분이 존재하는 듯했다. 즉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와는 반대로 청소년의 성에 긍정적인 태도로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산주의 조직들은 이 결정적인 영역을 그대로 묵혀두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청소년의 성을 비난하고 금지하는 데 있어 교화와 같은 입장이라는 것이 곧 밝혀졌다. 청소년의 성에 관해서 항상 냉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려 한 독일 성정치 조직에 대항하기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조치는 성직 대표자들의 대책 못지 않게 냉혹했다. 공산주의 신념을 지닌 목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잘킨트가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성을 부정하는 부문의 권위자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189쪽

 

 

 

한 청년노동자 단체는 개신교 목사 한 사람을 경제 위기에 관한 토론에 초청했다. 18세부터 25세 사이의 기독교 청년 20여명이 그를 호위하면서 나타났다. 부분적으로 타당한 사실에서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도약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현상이지만, 여하튼 그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현재의 고통이 전쟁과 영 플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타락, 비열함, 부정, 죄악의 표현이며, 자본주의적 착취 역시 중대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그런 반자본주의적 감정이 기독교 청년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그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으 한 형태이며, 자본주의가 어떤 계급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사회주의 역시 다른 계급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길로 걷어차야" 하며, 볼셰비즘의 종교에 대한 투쟁은 범죄행위이며, 종교는 비참함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잘못은 바로 자본주의가 종교를 오용한 데에 있다고(그 목사는 확실히 진보적이었다).

- 193쪽

 

 

 

(라이히가 직접 기독교인과 소시민계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집회에서 한 발언에서 주요 질문)

 

1. 교회는 피임약의 사용이 자연적인 생식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처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이 엄격하고 현명하다면, 왜 자연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만큼만 성교하도록 만들지 않고 일생 동안 평균 2~3천 번 정도의 성교를하도록 성기관을 만들었는가?

2. 여기 참석한 교회 대표자들은 아이를 낳고 싶을 때만 성교한다고 공언할 수 있는가? (이 집회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참석했다.)

3. 신은 왜 하나의 성기관에 두 종류의 선, 즉 성흥분을 위한 선과 생식을 위한 선을 만들었는가?

4. 왜 생식기능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부터 성이 발달하는가?

-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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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발췌독

 

중요한 것은 지역감정의 정치가 서울로의 초집중화 및 그에 따른 지방의 배제라는 갈등구조에 기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의 정치적 분획선은 중앙 대 지방의 차원에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방 대 지방의 대립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초집중화의 문제를 지역간 갈등으로 환치시킨 힘은 다시 한국민주주의의 보수성에 있다. 정치적 대표체제의 이념적 협애성, 계층적․이념적 기반을 갖지 않는 정당조직, 보수독점적 엘리트 과두체제, 냉전 기득 세력의 강한 헤게모니 등과 같은 정치․사회적 조건에서 정치경쟁은 국가권력의 소유권을 둘러싼 단차원적 갈등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이때 경쟁의 편을 가르는 구분선은 지연, 학연과 같은 엘리트 구성의 일차적 특성에 따른 것이 되기 마련이다. 사실 지역감정의 대립은 중앙 엘리트 사이의 권력을 둘러싼 경쟁의 산물일 뿐, 그것이 영남과 호남의 지역민이 갖는 문화적 특성이나 어떤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28쪽)



나는 우리 사회 최대의 사회적 균열은 집권당과 반대당 사이의 이른바 여야균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 사이의 쟁투가 한국사회의 중심적 문제를 둘러싼 이념적․정책적 함의를 갖는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국가권력의 장악 그 자체에 몰두하는, 사회의 근본적 이슈와 괴리된 권력투쟁 이상은 아니다. 그 결과는 현 정당체제를 거부하는 유권자가 계속해서 늘어나 선거마다 매번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갱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0년 16대 총선에서 상위 세 정당이 전체 유권자로부터 얻은 지지의 크기는 41.7%에 불과한 반면, 비투표자는 42.8%에 이르렀다. 이런 조건에서 선거결과에 따라 어느 당이 여당이 되고 어느 당이 야당이 되고, 또 어느 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고 어느 당이 집권당이 되었다 한들, 이를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권위적 결정으로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기는 어렵다. 요컨대 현재 한국정치의 최대 균열은 사회적 기반이 없는 정치적 대표체제와 이에 대표되지 못하는 저항하고 있는 비투표유권자 사이의 균열이다. (34쪽)



최근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나는 해방 이후 국가의 특징을 정의하기 위해 ‘과대성장국가’라는 개념을 사용한 바 있다. 이것은 원래 파키스탄의 정치경제학자 함자 알라비(H. Alavi)가 탈식민사회의 국가를 분석하는 데  사용했던 개념이다. 그것은 식민통치를 위해 제국주의 국가의 잘 발달된 국가기구가 식민지 사회에 이식된 결과, 독립 이후에도 경제적 토대나 사회적 기반보다 과도하게 강한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되엇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해방공간에서 냉전의 전개와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분단국가의 수립 괴정에서 사회가 탈동원화되는 과정은 과거 식민지 국가기구의 역할이 다시 복원되는 과대성장국가의 출현과 맞물리게 된다. (45쪽)



토크빌은 혁명이 귀족제의 질서를 파괴함과 동시에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간적 매개고리를 해체함으로써 개인을 무규범적 존재로 원자화시킨 것이 국가관료체제의 강화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중앙집중화는 정치에 대한 대중 또는 민중참여의 채널들이 협소화되거나 봉쇄된 엘리트 중심 지배체제의 결과물이다. 좌우 이념 갈등이 뒤이은 냉전반공주의의 확립은 이념적 획일주의와 더불어 사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배분하는 국가구료체제를 강화했고, 그것이 보다 강력한 중앙집중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넓은 이념적 지평에서 서로 다른 엘리트간 경쟁이 불가능하게 되고, 앞에서 동심원적 구조라고 말했던 극도로 단순화되고 동질적인 엘리트 구조가 강화된다. 소수의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위로부터 국가건설이 초진된 결과 필연적으로 권력의 집중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요컨대 과대성장국가는 곧 중앙집중화된 관료국가제체의 다른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50쪽)



(...) 결국 한국의 정당체제는 분단국가를 만들었던 두 중심 세력인 이승만 그룹과 한민당(뒤에 민국당, 민주당으로 변화)이 공화국 수립 이후 서로 대립적인 경쟁자가 되는, 즉 정치적 노동분업을 통해 경쟁관계로 들어가는 것에 그 기원을 갖는다. 그리고 이 두 그룹만이 정당체제를 주조하게 됨으로써 한국의 정당체제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첫째, 여야당은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 위에서 경쟁한다. 둘째, 양당은 밑으로부터의 대중적 이익이나 요구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지도자와 그를 둘러싼 엘리트 중심적 성격이 강하다. 셋째, 사회의 계층적․직능적․직업적 이익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를 통한 방식으로는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다. 넷째, 그러면서 여야당을 막론하고 사회 전체, 국가 전체, 민족 전체의 대의와 이익을 내세움으로써 포괄정당적 성격을 갖는다. (52쪽)



사태를 세자리즘으로 발전하도록 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다. (...)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승만 세자리즘의 가장 강력한 형성 요인은 냉전이었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극한 대립과 전쟁의 경험, 그리고 남북한간의 항구적인 준전시상태는 북한의 위협이 결코 허구적이고 상상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에게 많은 권력자원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권위주의화 하기 위한 정당화의 근거로 활용했다. 권력을 갖는 정치 지도자에게 그것은 엄청난 자원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에 있어 갈등과 경쟁은 권위주의 저권에 의해 이내 남북한간의 대결로 치환될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억압되었다. 사실상 국내 정치는 정치적 대안을 둘러싼 정당간 경쟁이 아니라, 북한과의 생사투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만들기 위한 갈등해소와 통합의 과정으로 축소되었다. 야당이 ‘충성스런 야당’의 범위를 벗어날 때 그것은 야당이 아니라 휴전선을 가로질러 친북적인 어떤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채색되었다. 이것이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메커니즘이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과 1958년 ‘진보당 사건’은 가장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으며, 1952년의 이른바 ‘발췌개헌’이나, 1954년 이른바 ‘4사5입개헌’ 등도 모두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담론의 동원을 통해 정당화하려 했다. (55-6쪽)



박정희 정권은 그것이 의도하지 않았던 두 가지 방법으로, 즉 하나는 그것이 만들어 낸 성공의 결과로 다른 하나는 그 실패의 결과로 민주화에 기여했다. 성공의 결과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산업화 없이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1960~70년대를 통하여 발전하고 팽창한 시민사회가 1980년대 들어와 폭발하면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민주주의를 향한 요구가 밑으로부터 분출했다. 사회는 서구사회와 같이 높은 수준의 산업화와 도시화를 이루었고, 그 속에서 사회의 기능적․직능적 분화가 가속화되고 중산층이 엄청나게 팽창하였으며, 노동자, 농민과 같은 사회저변의 대중층이 성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갖는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더 이상 그 존립 기반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이 실패의 결과라는 뜻은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권위주의를 편 결과 1950년대와는 판이하게 강력한 민주화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체제에 반대하는 시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세력의 저항이 없었더라면 유신체제의 붕괴는 훨씬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마침내 민주주의를 가져온 1980년대 강력한 민주화의 힘은 이를 모태로 한 것이다. (88쪽)


==> 완전 개소린데??




이러한 체제가 가져온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은 권위주의 집권당이 야당보다 더 개혁적인 성격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그러한데, 여당과 야당은 다같이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 위치하고 있지 못하고, 대중정당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명사정당과 같은 엘리트 정당적 성격이 크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당은 집권 정부로서 많든 적든 국민의 지지와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국민적 요구에 일정하게 부응해야 할 인센티브를 갖는다. 이것은 집권 엘리트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의 동인이다. 다른 한편 야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제약과 조직구조의 전근대성으로 인하여 사회경제적 요구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지지를 동원하고자 하는 의지도 능력도 인센티브로 갖지 않았다. 이미 분단국가의 건설자들은 스스로 정치적 경쟁의 틀을 협애한 이념적 공간 내에 가두었고, 갈등과 균열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언어와 담론의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했다. 좌우의 극한적 이데올로기 갈등이 가라앉았을 때, 당시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인민’이라든가, ‘계급’이나 ‘노동자’라는 말은 공산주의자들의 언어인 것처럼 인식됨으로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 정당이 사회 갈등을 표출하고 대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결국, 야당은 오로지 권력독점을 비판하는 민주주의의 원칙과 가치를 강조하면서 민주주의 세력임을 자임하는 것으로 임무와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1950년 4월 이승만 정부 시기에 수행된 토지개혁만큼 이러한 현상이 분명히 드러난 예는 없을 것이다. 지주의 이익을 일차적으로 대변했던 한민당․민국당은 최초로 토지개혁을 시도했던 미군정 시기부터 그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들은 미군정 시기에는 개혁저지에 성공했으나 이승만 정부에서는 실패했다. 권위주의하에서 여야당의 역할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여당이 보수적이고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야당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 반대였다. 이러한 1950년대의 양상은 박정희 정부에서도 되풀이 되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중앙집중적인 관료적 정당구조를 갖고 그 조직구조에 있어 근대적이었으며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동안,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계파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명사정당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가장 보수적인 정치 엘리트 그룹이 제도권 내에서 민주주의의 대변자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계기마다 제도권 밖의 강력한 개혁 그룹과 제도권 내의 강력한 보수 그룹이 동맹하는 역설적 블록이 형성되곤 했다. (105-6쪽)


 

나는 일찍이 한국의 지역문제는 지역 대 지역, 예컨대 전라도 대 경상도하는 식의 지역간의 감정적 대립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닌, ‘호남문제’라고 정의한 바 있다. 즉, 지역문제를 지역간 감정의 대립으로 인식하는 것은 허위의식, 곧 이데올로기라고 강조해 왔다. 지역문제의 본질인 호남문제는 그 원인을 이루는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갖는다. 하나는 유신체제에서 국가와 민간부문의 엘리트 충원에 있어서의 호남배제, 둘째는 지역소외를 해소해 줄 지도자로서의 김대중씨와 호남민 사이의 강한 정서적 유대의 형성, 셋째는 광주항쟁으로 인한 억압의 집단적 경험이 그것이다. 선거에서 지역간 경쟁의 구도는, 1987년 민주화와 더불어 선거공간이 개방되었을 때 야당과 민주화운동이 단일 전선으로 통합되는 것을 제어하고 분열시키기 위한 권위주의 세력의 사회적 동원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샤츠슈나이더는 정치적 갈등축이 여러 가지의 대안을 중심으로 선택적으로 형성될 수 있으며, 기존의 정당체제는 여러 대안들 가운데서 다른 것들이 억제되고 특정의 갈등축이 선택된 결과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특정의 정당체제는 두드러진 갈등축이 되도록 선택된 것과 억제된 것이 짝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세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한국의 지역정당체제는 민주적 개방과 더불어 대중동원이 필요했을 때, 다른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정치 갈등의 영역을 전국적으로 최대화하는 계층적․직능적․기능적 이익과 균열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기존 구정당체제의 틀 속에서 지역을 수직적으로 분획함으로써 국지화된 갈등축을 따라 대중을 동원한 결과인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정당체제가 지역정당체제라는 특성을 갖게된 까닭이다. 이러한 정당체제는 샤츠슈나이더가 말한 대로 일반 대중의 이익보다는 엘리트의 이해관계에 크게 유리한 ‘편향성의 동원’(mobilization)을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07쪽)



(222-230쪽)


한국민주주의의 이념적 기반으로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 민주주의의 세 가지 전통 : 직접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 민주주의라는 제도와 원리 자체가 서구적인 것인 한,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원류적 이념이 약한 것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음. 반면 우리사회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적 전통이 약함. ⇒ 민주주의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념이 됨.


① 자유주의

- 냉전반공주의 세력 : 자유민주주의 왜곡

- 사회운동 세력 : 낭만적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 추구. 냉전반공주의의 거울이미지.

  ⇒ 자유주의는 보수세력에 의해 왜곡되고, 민주세력에 의해 버려진 존재.

- 반면 시장자유주의는 우리 사회를 장악해버림.

- 자유주의 일반을 이사야 벌린이 이야기하는 ‘소극적 자유’로만 보는 것은 잘못. 자유주의를 통해 개개인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갖추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한 지점.


②공화주의

- 공화주의는 공송선에 대한 헌신, 공적 결정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와 모든 시민이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지 않고 권리와 혜택을 누리는 시민권의 원리, 시민적 덕에 대한 강조를 핵심으로 함. (논리전개의 방향은 자유주의와 역순)

- 한국적 공화주의의 두 가지 원천 : 1)헌법 제1조(그러나 이는 헌법경시적 정치환경에 의해 주목받지 못함) 2)60년대 이래 민주주의 운동의 경험(민중의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 추구. 로맨티시즘, 집단주의적 충동, 도덕주의 등)

- 민주주의 운동에서 연원하는 한국적 공화주의의 문제점 : 급진적, 도덕적, 폐쇄적인 측면. 강력한 권위주의하에서의 운동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 자유주의의 기반을 갖지 않음으로써 과도한 이념성이 운동권의 지적 분위기 지배.

  ⇒ 자기희생적 변혁에 복무하는 ‘총제적 인간’을 추구. 그것은 민주주의하에서 자율적인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기 쉽지 않음. 오히려 총체적 인간보다 ‘부분적인 인간’, 즉 민주적 정치과정에 적극적이되 자신의 자율적 가치와 내면세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실천하는 민주적 시민이 되는 것이 바람직.


▶▷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단지 민주주의 그 자체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 오히려 권위주의와 접맥되었던 냉전반공주의, 온정주의와 가부장주의, 관료주의 시장근본주의 등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는 여러 형태의 사회적 힘, 조류들과 대면하고 있는 상황. ⇒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에 있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도움을 받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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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자본주의 경제 산책> 1장 간단 요약

20세기 경제 산책

- 정운영, 『자본주의 경제 산책』中 1장.

 


1. 세기 초의 형편

① 20세기를 준비하던 1899년의 몇몇 장면

- 보어전쟁 : 1867년 영국 식민지 케이프에서 한 아이가 가지고 놀던 돌멩이가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케이프에서 독립한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당시 금본위제 하의 영국은 이 곳으로 밀어닥침. 영국은 8만 8000명의 보어(뒷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연합국을 물리치기 위해 50만명을 파병하여 장악.1) 이로 인해 영국 국내의 반전 운동과 노동당 창설 재촉.

- 레닌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출간 : 러시아는 국내의 협소한 수요의 문제로 인해 자본주의 미발전이 예견되었고, 그래서 이를 뛰어넘어 농촌 공동체를 통한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한 인민주의(Narodnism)운동이 탄생. 그러나 레닌은 수요 부족 문제는 점차 해결될 것이므로 러시아는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

- 하이에크의 탄생 : 초기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던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세미나 참여 이후 극단적 시장자유주의자로 변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케인즈 경제학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던 하이에크 경제학은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무대 전면에 다시 등장.

⇒⇒ 20세기는 짧은 안정기를 제외하면 제국주의, 공황, 파시즘, 전쟁으로 점철된 파국의 시대.


2. 파국을 향하여

- 제국주의의 물질적 토대는 독점적 생산력의 증대. 이를 감당할 해외 소비시장과 원료 산지를 위해서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제국주의로 이어짐. (+ 배타적 민족주의 + 사회진화론)

- 미약한 노동의 대응 : 제2인터에 참여했던 각 국 노동당/사회당은 공동의 결의를 저버리고 참전에 동의. 독일 사민당의 경우 집권 가능성 때문에 투표에 참여.

- 1차 대전의 결과 독일의 호엔촐레른 왕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등 많은 제국이 붕괴. 전후 자본주의는 제국 없는 제국주의.

- 전후 비용 처리의 문제 : 전쟁이 끝날 무렵 유럽 연합국의 전쟁 채무는 20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대부분 미국의 대부를 통한 것. 미국은 이에 대해 전액 상환을 고집했고, 연합국은 패전국인 독일에게 배상금과 전쟁 채무를 합친 330억 달러 지급 요구. 이로 인해 독일은 심각한 인플레를 겪고, 이는 나치의 등장 배경. (전쟁 채무는 1933년 히틀러가 지급 거부)

- 최초의 사회주의 실험 무대로서 러시아 혁명 : 자본주의 성숙 후에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기존의 도식이 파괴. ⇒ 제3세계 국가들의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60년대 민족해방 투쟁으로 이어짐.


3. 공상에서 절망으로

-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2차 대전이 터진 1939년까지의 전간기(戰間期)는 베르사유 평화 체제가 허공에 쌓은 전반 10년의 희망이 1929년 대공황을 고비로 후반 10년의 참혹한 절망으로 바뀐 시기. 그로써 전체주의가 득세.

- 1929년 10월 미국 증권시장에 대공황 엄습. 이에 대해 다양한 진단이 나왔지만 정부의 개입이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음. 자유방임 경제학에 대한 중대한 도전.

-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과잉과 정치 실패로 허덕이던 독일에서는 위기를 틈타 나치스가 정권 장악. 전체주의적 권력 개입 없이는 독점 이윤 수취가 어렵다는 대자본의 위기감과 예전의 유복한 생활을 빼앗겼다는 대중의 상실감이 파시스트 정권을 지지하는 원천. 나치의 재무장에 기업과 금융계는 불만을 표했지만, 히틀러는 인종 차별과 국수주의 선동으로 대중을 열광시키고 그 지지를 배경으로 반대 의견 억압.

- 러시아 혁명 이후 : 국가자본주의 → 전시공산주의 → 신경제정책(NEP) 등으로 좌편향, 우편향을 넘나드는 곡예.

- 스페인 내전 : 1936년 등장한 인민전선 정부는 소련의 지지, 정부군에서 변신한 반란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음. 그러나 내부적 각 진영 내부 갈등은 한 층 더 복잡. 결과는 반란군 프랑코의 승리. ⇒ 『카탈루냐 찬가』(조지 오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의 작품.

- ∴ 대공황의 두 결론 : 뉴딜과 파시즘. 그러나 둘 모두 전체주의적 해결책. (ex: 케인즈가 실업이 왜 발생하는지를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히틀러는 그 대책을 발견했다는 존 로빈슨 여사의 탄식) 스탈린의 승리 역시 전체주의적 승리.


4. 열전에서 냉전으로

- 2차 대전은 민주주의 진영과 파시스트 진영의 대결. 물론 제국주의의 갈등이 여전했지만, 파시즘에 가려 1차 대전만큼 부각되지 않음.

- 그러나 코민테른의 변덕으로 파시즘과의 투쟁에 혼란을 자초함. 사회주의의 주적이 파시즘이 되었다가 제국주의가 되었다가 다시 파시즘이 되는 따위의 우왕좌왕 지도 노선은 일국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스탈린 지령에 따른 것.

-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의 가시화. 미국은 마셜플랜으로 소련은 코메콘을 통해 각각 서유럽과 동유럽을 장악함. 그러나 70년대 이후 데탕트의 여파로 소련이 파산했다는 것은 냉전의 기묘한 역설.

- 전후 브레튼우즈 체제 확립. 그러나 70년대 금태환 중지 사태로 고정환율제도 포기.

-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대표의 반둥 회의는 제3세계의 시각으로 역사를 저하는 최초의 기회. 제3세계의 중립을 강조하고 서구와 소련을 다 같이 제국주의 세력으로 비난.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 역설. 그러나 냉전이라는 세계 정치 구도는 이를 용인하지 않음.


(이하 생략... 별로 중요한 내용이 없어서...)






1) 이 당시 영국은 보어와의 게릴라전에서 혼쭐이 나고는 현대 군복의 시초가 되는 카키색 군복을 입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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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비철학적 철학을 위하여> 요약

루이 알튀세르 : 비철학적 철학을 위하여

- 철학의 탈주 中 2장

백승욱



1. 알튀세르 읽기 : 알튀세르의 모순과 그 작동


-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철학자’ 라는 측면에서 살펴 보았을 때, 이단적인 측면에 상당히 존재한다.

- 알튀세르의 궤적은 자기비판, 맑스주의의 위기 선언, 당에 대한 공개비판, 아내 엘렌의 살해 등으로 채워지면서 충격적인 과정으로 보여진다. 그의 삶은 ‘변증법적’이기보다는 ‘불확정적’이다. (요약 불가능한 철학자)


▶ 알튀세르와 ‘철학’

- 초기의 그의 작업은 『자본』속에 등장하는 ‘맑스주의 철학’을 만들어내는 작업. ‘맑스를 위하여’ 헤겔과 다른 맑스의 변증법을 대문자의 이론(Théorie: 즉 이론들의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하는 것.

- 그러나 자기비판 이후 ‘철학의 새로운 실천’, ‘최종심급에서 이론 내의 계급투쟁’이라는 테제로 전환. 맑스주의 철학은 불가능하며, 주어진 과제는 맑스주의를 위한 철학을 가공하는 것이라고 함.


▶ 알튀세르와 ‘과학’

- 라캉에 대한 평가 : 라캉과의 동맹을 통해 이데올로기론을 개척함. 그러나 후기에 가서는 그와 결별하는데 이는 이론적 결론이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에 기인함. 이 대립은 구조주의 철학이 지지하는 과학관과 불확정적 유물론 철학이 지지하는 과학관의 대립.


▶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 과학과 이데올로기 사이에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경계선을 설정. 그러나 자기비판 이후 진리란 ‘정세적 효과’임을 강조하며 이데올로기론으로 강조점을 이동함.

- 이는 레닌의 테제인 외부 주입설(자생성과 목적의식성의 구분)을 후기에 가서는 상대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남.


▶ 알튀세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①『맑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는다』를 특권화 하는 방식 : 대부분의 알튀세르 논의 방식이 이에 벗어나지 않음.

- ② 후기 알튀세르가 초기의 문제점들을 극복 또는 초기 문제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훨씬 완성된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

- 그러나 위의 두 견해는 사물을 일면화하는 문제가 있음. 알튀세르 사상은 변증법적으로 진화하여 자기완성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해 간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음.

- 알튀세르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모순들의 작동과 파괴, 해체의 과정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음.

- 알튀세르에 대한 ‘징후적’ 독해법 : 고전파 정치경제학을 극한으로 밀어붙여 해체하는 독해법(『잉여가치 학설사』를 『자본』의 유기적 구성 부분으로 파악하는 것.)을 맑스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이것을 알튀세르에게 적용하여 알튀세르 자신의 모순이 작동하게 하는 과정. 이는 “극단에 서서 극한적으로 사고하라.”는 말로 요약됨. ⇒ 막대 구부리기 ⇒ 철학을 이론에서의 정치,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 파악한 이후의 견해로 지식자체가 아니라 ‘지식효과’를 중요시 함.

- 알튀세르 철학의 궤적은 끊임없는 ‘개입’의 여정. ‘비철학’으로서의 철학.


▶ 알튀세르의 관심사

- 맑스와 프로이트 : 역사과학과 정신분석을 대표하는 이론가들에 주목. 맑스를 해석하기 위해 프로이트로부터 심급들, 과잉결정, 응축, 전위와 같은 개념을 빌려 왔음. 그러나 이는 일정한 제한 속에서 이루어지며, 맑스주의와 정신분석 양자를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음.

- 과잉결정과 정세의 우위 : 생산양식에서 사회구성체로, 더 나아가 이데올로기론으로 강조점이 이동하는 흐름과 연관됨. 현실 정치에서 레닌과 마오에 준거하려는 이유이기도 함.



2. 알튀세르 사상의 궤적 : 철학과 과학을 중심으로


▶ 1960년대 초반의 이론-정치적 정세

- 당시 맑스주의 운동은 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대한 흐루시초프의 비판이 촉발한 계기 속에 있었음.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단지 스탈린의 반사적 대립물에 머물고 있었음. ‘개인숭배’라는 관념은 스탈린적 편향의 사회․정치적, 이론적 근거들을 참구하는 대신‘ 사회주의적 법치성의 위반’만을 지적하는데 머물고 있었음. 이에 알튀세르는 좌익적 스탈린 비판을 통해 이론적 정세에 개입하기 시작함.

- 스탈린적 편향 : 경제주의 + 인간주의.

└→ 경제주의 : 생산력을 생산관계(계급투쟁)보다 우위에 놓는 관점. 1936년 소련 헌법은 소련 내에서 계급투쟁 소멸을 선언하고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을 주창함.

└→ 인간주의 :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 프롤레타리아 과학과 부르주아 과학을 나누는 기준이 됨.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라는 원리에 따라 존재론과의 상응성에 의해 부여되는 반영 이론으로서의 인식론이 등장함. ⇒ 프롤레타리아 세계관, 보편법칙으로서의 존재론, 반영이론으로서의 인식론이라는 세 축이 맑스주의 철학의 ‘정통’으로 확립됨.

└→ 이러한 대쌍은 데카르트 이후 근대적 철학관의 귀결. 근대 철학의 모든 전통은 대부분 이를 벗어나지 못함.1)


(1) 인식론적 단절과 이론적 실천: 초기 알튀세르

▶ 알튀세르의 첫 시도 : 맑스주의의 지반 위에서 그것을 전화하기

- ① 맑스주의 전통에서 나온 개념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그 내용을 전화하기 ②맑스주의에 없는 개념을 맑스주의 아닌 다른 전통에서 영유․도입하기 ⇒ 실존주의 및 현상학에 반대하여 구조주의와 연대

-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개념 수용(고전파 정치경제학과 맑스 사이의 비가역적 단절 설명) ⇒ but, 바슐라르에게 정신분석적 설명이었던 ‘인식론적 장애’는 ‘이데올로기’로 대체되고, 철학은 이론의 이론으로서 ‘대문자 이론’으로 대체. ⇒ 자크 마르탱과 캉길렘의 '문제설정'개념 수용.

- ‘실천’ 범주의 재구성 : 실천은 노동대상(일반성 I)에 대해 노동수단(일반성 II)을 사용하여 생산물(일반성 III)을 만들어 내는 과정. ex) 이론적 실천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론’이라는 도구를 가지고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 / 이데올로기적 실천은 ‘인간’이라는 노동 대상에 대해 이데올로기라는 노동수단을 통해 주체를 생산하는 과정. ⇒ ‘구조’는 실천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들의 과정 그 자체.

- 맑스 과학의 단절 과정 : 『독일 이데올로기』를 계기로 인간학적 이데올로기(인간의 유적 본질의 투사로서의 역사)와 단절하고 성숙기 저작 『자본』완성. ‘사회적 관계’의 개념에 기초하여 사회는 표출적 총체성이 아니라 과잉결정된 ‘전체’로서 탐구됨.

- 맑스주의 철학의 규명 : 헤겔과 동형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중심축만 바꿔놓는 포이어바흐식 변증법에 반대. 그는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에 기반하고 있는 반영론적 인식론을 스피노자적 입장에서 공격. ⇒ ‘항상 이미 주어진’ 복합성의 변증법으로서 과잉결정의 변증법.

  └→ 헤겔 변증법의 동심원적 총체성 ⇒ 건축학적 토픽(1층의 구조는 2층의 구조를 직접 결정하지 않고 단지 한계만 규정)


▶알튀세르 이론의 모순

- ①알튀세르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상은 인식 주체의 초역사적, 보편적인 형식적 조건을 다루는 이론이 아니라 지식생산의 역사(이론의 이론, 과학들의 과학) ②사회적 실천들 일반의 이론 ⇒ 개념생산의 변증법인 동시에 객관 변증법? 디아마트로부터 불철저한 단절의 결과

- ①과 관련 : 주체의 인식론(인식, 진리, 보증 등)에 대한 거부. ⇒ 복수의 진리가 존재함을 인정. 과학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적인 것 사이의 구분은 새로 형성된 과학에 의해서 사후적, 회고적으로 형성. ⇒ 과학들의 대상의 수만큼의 진리의 기준들이 있고, 이것을 통약할 수 있는 선험적 또는 초월적 기준은 없다. ⇒ 철학에서 인식론적 단절을 생각하는 초기 알튀세르의 견해와 모순.

- 이데올로기적 실천에 대한 이론작업 : 맑스주의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론을 벗어나기 위해 라캉을 매개로 ‘무의식’ 개념을 도입(상상적인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사회적 결합작용의 시멘트로서의 이데올로기론)

- 알튀세르의 과잉결정론은 심급들의 자율성을 설명해 주지만, 심급들간으 l관계, 현실 역사에 대한 설명에서 끊임없이 논쟁거리.


(2) 과잉결정과 최종심급에 대해서

- 과잉결정은 모순들의 축적이나 응축, ‘중층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의 양항의 불균등성, 비대칭성을 뜻함.

-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관계에서 두 계급은 동일한 역사를 가지지 않으며,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 않고, 동일한 수단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계급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과 권력을 박탈당한, 즉 음의 부호가 붙은 자본가 계급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대립한다. 이는 명백히 모순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립관계는 헤겔적인 아름다운 고양과 화해를 통해 대립의 조건들을 초월하기는커녕 그 대립의 조건들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 과잉결정은 한 모순에 대해 사고할 때 동시에 다른 모순들에 미치는 효과성을 사고하게 함. 이를 위해 과소결정을 함께 논의. ex)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이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유산된 경우.

- ‘과잉결정’이라는 용어를 모순에 대해서만 사용하고, ‘토픽’적 사고와 관련된 심급들에 대해서는 ‘최종심급’이라는 용어 사용. 과잉결정은 모순의 복잡성, 불균등성을 논의하며, 최종심급은 차별적 효과를 지칭.

-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 각 심급의 실제적 차별성과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 심급들간의 위계, 지배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유물론적 관점이라고 봄. 여기서 후자의 유물론적 관점이 우위에 섬. 그러나 최종심급은 궁극적 원인, 본질, 실체가 아님.

-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를 심급들로 분할하고, 경제를 지배적 심급으로 생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자체, 그리고 지배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론은 그 효과를 의식함과 동시에 그 위험을 경계해야 함.


(3) 자기비판, 재생산의 관점

▶ 자기비판의 4가지 테제 : ①철학은 과학이 아니다. ②철학은 과학이 대상을 갖는다는 의미에서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 ③철학은 과학이 여갓를 갖는다는 의미에서의 역사를 갖지 않는다. ④철학은 이론 영역에서의 정치다.

  └→ 자신의 이전 주장이 과학과 철학을 모두 이론으로 포괄함으로써 양자의 차이를 경시하게 되었다고 보고 과학적 실천과 철학적 실천을 구분. 과학은 더 이론적(‘진리들’이 문제)이고 철학은 더 실천적(‘입장의 올바름’이 문제).

  └→ 철학은 과학과 같은 의미의 대상을 지지니 않으며, 철학사는 패배한 입장들이 언제든지 새로운 대치점이 형성됨에 따라 다시 부활하고, 낡은 입장들을 새로운 외양으로 치장학 h등장할 수 있는 ‘반복’의 역사이므로 ‘단절’을 말할 수 있는 ‘불귀점’을 갖지 않음.

  └→ 철학은 이론적 명제(테제)들을 합리적으로 구성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이론에 개입하여 이론적 효과(철학효과)를 유발.


▶ 이론의 이론, ‘대문자 이론’에 대한 비판

- 인식론적 단절을 순수하게 이론 내적인 단절로만 파악함으로써 단절의 조건들, 즉 계급투쟁이라는 문제를 경시.

- 자기비판 이후 단절은 이제 우선적으로 정치적/철학적이고 과학적 단절은 그 결과가 됨.

- 우리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과학이 다루는 사유 대상. 정치적 입장의 변화는 철학적 입장의 변화를 매개로 과학의 사유 대상에 개입. 철학은 이론 영역 내에서 정치를 대표.

- 새롭게 정의된 철학은 과학이 대상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대상을 갖지 않는다. 철학은 경계선의 구획을 통해 입장을 정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 철학에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이외의 문제들이 있고, 그렇지만 철학은 중요하게 이론에서 계급적 지위의 표명이라는 것을 지적. 모든 철학은 아무리 사변적이고 순수한 형태를 띠더라도 실천적, 정치적.


▶ 재생산의 관점

- ①인민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 그런데 대중은 엄밀한 의미에서 주체가 아니다. 대중은 무정형적이고, 이미 주어진 구체적 복합성이다. ②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 그런데 계급투쟁은 사물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개념이며, 그 자체에 정세, 우연성 등을 담고 있다.

  └→ ‘생산양식의 과학’이라는 초기 관점: 구조와 이행은 진화론적 관계로서 이행은 안정적인 구조의 재생산 외부에서 삽입되는 계기일 뿐. ⇒ 자기비판 시기의 관점: 재생산은 생산수단의 재생산뿐 아니라 노동력의 생산과 재생산. 구조의 재생산 안에 계급투쟁의 문제를 삽입시킴. 여기서 주체들을 재생산하는 표상매커니즘으로서 이데올로기를 주요하게 사고. ⇒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과 호명 테제.

-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은 오히려 문제의 균열을 심화시킴. 과학의 단절의 계기를 과학 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철학이라는 매개를 둠으로써,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맑스주의적 철학’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증폭.


(4) 맑스주의의 위기, 철학의 전화

- 이론은 이론 그 자체로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인 물질적 힘,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고유한 방식으로 전화, 즉 이데올로기로 전화해야 한다. 이론이 운동과 결합하는 것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 필연적이지 않다.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은 적대적 두 진영의 대립이 아니라, 두 경향들의 대립이며, 이 대립은 항구적이지도 않고 대립선은 계속 바뀐다.


▶맑스주의 위기의 선언 : 두 가지 난점

- 난점① - 잉여가치론 : 『자본』에서 맑스가 잉여가치를 산술적 계산의 문제로 제시함으로써, 착취에 대한 경제주의적, 리카도주의적 해석을 남김. 알튀세르는 『자본』의 역사적 서술에 관한 장들을 부각시켜 계급투쟁의 구체적 조건, 형태, 효과를 다룸.

-  난점② - 변증법 : 전통적 철학은 모순들을 소거할 가능성, 그리고 사회적 실천들과 그 이데올로기를 통일할 가능성의 이론적 조건들을 사고할 것을 제안함으로써 한 지배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데올로기들을 통일하는 데, 그리고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진리임을 보증하는 데 기여. 즉 철학 안에서 국가편에 투항. 알튀세르는 철학의 외부가 있다는 ‘비철학’의 개념을 주장. ⇒ 철학을 구성하는 것은 논증의 담론도 정당화의 담론도 아니고, 새로운 철학적 입장의 옹호, 바로 철학적 전투장이다.

  └→ 모든 지배는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이 비대칭성을 무시하고 지배하는 측과 대등한 대립물을 형성하려는 모든 시도는 지배 측의 거울상을 형성하게는 되는 것.

  └→ 과학에 대한 합리주의적 가정에 대한 공격 :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더불어 맑스주의 역사과학에 대해 갈등적, 분파적 과학이라는 규정 제시. ‘진리’의 반대물은 오류가 아니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유기적 체계’. (레닌의 ‘맑스주의는 과학이므로 전능하다’라는 테제에 대한 명백한 반대.)


(5) 불확정적 유물론을 위하여

- 1980년 아내 엘렌 교살 사건 이후 공식적인 발언권을 박탈당함. 침묵 중에 유일하게 공개 출판된 성과는 『나바로와의 대담』. 이후의 이론적 작업은 유물론/관념론의 이분법적 대당을 넘어서는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인 ‘불확정적 유물론’에 집중.


▶알튀세르의 후기 철학적 작업

①명시적으로 맑스주의 철학의 불가능성을 선언. 우리의 당면 과제는 맑스주의 철학을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맑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을 가공하는 것, 맑스가 사고했던 것과 사고했던 형식을 설명해 주는 요소들을 철학사 속에서 찾는 것을 목표로 함.

②유물론/관념론의 이분법적 대당을 비판. 어떤 철학도 어떤 이론적 정세에서 입장을 채택하는 데 유물론적 효과를 지닐 수 있다. 철학사에서 볼 때 유물론은 플라톤 이후 관념론적 질문들이 자신의 대립물로 불러낸 대쌍일 뿐.

  └→ 유몰론이 결코 벗어나지 못한 관념론의 근본적 질문은 기원과 종말 목적 두 가지로 이중화하는 ‘근거율’. 여기서 절대정신의 자리를 물질로 대체하더라도 유물론은 이 질문을 벗어날 수 없음. 이 질문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철학의 기원, 즉 조재, 주체, 의미 또는 텔로스에 대한 질문들로부터 벗어나야 함. ⇒ 체계가 아닌 경향으로만 존재하는 유물론을 강조.

③불확정적 유물론(또는 마주침의 유물론) : 맑스주의를 위한 철학의 기원을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스피노자-하이데거-데리다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찾기 시작함. 클리나멘의 철학. ⇒ 정세의 절대적 우위를 강조.

  └→  에피쿠로스에게 실재하는 것은 원자들의 우연적 충돌의 결과물일 뿐. 이는 라이프니츠의 고립되어 있는 보편성을 담지한 ‘단자’(monad)와 다름.

④역사과학과 사회과학에 던진 새로운 이론적 함의 : 현전하는 역사는 늘 유일 고유한 불확정적 정세의 역사로 인식. 일반적 상수(레비스트로스)나 경향적 법칙(맑스)의 보편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변종을 통해서 각 사례의 유일고유성을 밝히는 것이 문제.


3. 이데올로기론


▶이데올로기론을 이해하기 위한 두 가지 전제

①이론의 조재 조건으로서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일반이 아니라 구체적 이데올로기들, 대중이 처해 있는 이데올로기적 조건, 지배적 이데올로기, 그 내부 적대의 조절, 균열, 그 속으로 이론 개입의 효과 등을 다루는 것이 중요.

②서양 정치철학의 두 전통

  1>국가에 대한 계약론적 전통 : 국가를 합의/강제의 틀로 규정. 국가는 장치나 기계가 아니라 명목적인 ‘계약 상태’를 지칭.

  2>국가에 대한 ‘공포의 모델’: 국가에 대한 ‘무의식 모델’. 마키아벨리-스피노자-니체-알튀세르적 계보. 국가가 유지되지 위해서는 공포+희망이 필요한데 이는 선/악처럼 상호 보완적.


(1)이데올로기적 실천

- 이데올로기는 허위의식이 아니고, 의식도 아닌 ‘무의식적인 것’. 세계에 대해 상상적 관계를 맺는 주체를 생산하는 것.

- ①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는 없다. ②과학과 비교해 이데올로기적 실천은 이론적 기능보다 실천적, 사회적 기능이 중요하다. ③이데올로기는 의식이 아니라 구조다. 그것은 인간과 그 세계 간의 체험된 관계다. ④이데올로기는 허구가 아니며, 실제 관계와 가상적 관계의 통일이다. ⑤이데올로기는 영역과 경향에 따라 분할된다.


(2)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론이 아니라 현실의 구체적 이데올로기들이 중요함을 강조. 이데올로기 일반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최소한의 일반성.(『자본』에서의 노동과정과 같은 맥락) ⇒ 이데올로기 일반의 역사는 없음. 이데올로기 일반은 구체적 이데올로기로 상향해 가기 위한 추상의 첫 출발점일 뿐.

- 이데올로기의 물질성 :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힘, 즉 ‘국가장치’. 알튀세르의 이 주장은 뒤르켐-라캉적 전통 하의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을 기표의 물질성으로 파악하고, 사회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닌다는 분석과는 다름. 그는 사회에 존재하는 경쟁적, 상호 투쟁적 ‘해석들’ 사이에서 특정한 해석들이 지배하게 되고, 사회적인 물질적 힘을 획득하게 되는 계보학적 분석을 중시(니체적 이데올로기론).

-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 생산


(3) 이론과 이데올로기의 토픽/계급투쟁

- 호명테제에 대한 ‘기능주의’적이라는 비판에 알튀세르의 대응 : 재생산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설명. 맑스주의가 자본주의의 작동양식과 착취, 적대만을 대상으로 삼는 ‘유한한’ 이론이듯이, 이데올로기에서도 구체적 이데올로기들의 문제로 가야함.

  └→ 라캉과의 동맹 파기 : 라캉은 무의식의 과학적 이론 대신에 정신분석의 철학을 제시. 모든 것을 무의식에 따라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것에 따라 인식하는 이론체계. ⇒ 알튀세르의 비판은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여행객”에 집약. 유물론 철학자란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사람으로 기원도, 제1원리도, 어떤 목적도 알지 못하며, 불확정적 만남의 계열들을 기록할 뿐.

  └→  호명속에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다음의 조건 하에서 가능 :

        ①호명이 실패했을 때,

        ②호명에 의해 주체가 구성되더라도 그 이데올로기 자체가 이미 갈등적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 지배 이데올로기는 피지배 이데올로기를 우회할 수 없다는 근본적 비대칭성의 문제. 이데올로기적 표상은 계급투쟁을 온전히 포섭할 수 없다.

        ③호명된 복수의 주체 지위들 사이의 갈등 : 각 개인은 복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호명되어 있는 우연적 통일체. 각 이데올로기가 내적으로 갈등적이며, 동시에 각 개인은 복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주체로 호명됨으로서 호명의 내적 균열 가능성은 항상 주어져 있음.
 

 

 

 

 



 

 

1) 서양철학에서 근원적인 반데카르트 철학의 대표자는 스피노자와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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