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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중에서....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녕, 오늘 하루 쉬고 싶다고 투덜거리는 널 보내고 엄마는 이 글을 쓴다. 엄마는 네게 말하곤 했었지. 다만 네가 최선을 닿 성실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 보면 절대로 취소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부를 잘하라느 압력을 그런 식으로 네게 교묘히 불어넣었는지도 몰라. 이 겨울, 국토대장정을 떠날 돈을 모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찾아다니는 너를 보며 엄마는 실은 네가 시험을 잘 본 것만큼이나 대견했단다. 아직 너는 어리니까 엄마가 조금 도와주어도 좋을 일인데 굳이 네 힘으로 하겠다는 것을 보며 우쭐하기가지 했단다. 그래서 엄마는 오늘 네게 <<내 발의 등불>>이라는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

 

닐 기유메트라는 신부님이 지으신 잛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야. 늘 그렇듯이 별 기대 없이 책장을 열었는데, 뜻밖의 이야기가 있었다. 제목은 <천사 미니멜>이야. 짧은 이야기니까 좀 들어 볼래?

 

'마지막 천사가 창조되었을 때 그에게 '미니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모든 천사들 가운데 가장 완벽하지 못했기 대문이다'라는 구절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천사들은 보통 끝에 '엘'이라는 철자를 가지고 있지. 네 영세명인 미카엘라는 미카엘의 여성형이고 네 동생들 가브리엘, 라파엘이란 대천사들의 이름도 모두 그렇다. 미니멜이란 앞에 붙은 '미니'에서 짐작할 수 잇듯이 작고 보잘것없고 막내라는 그런 뜻일 테지. 당연히 천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인 미니멜은 절망하기 시작했어.(천상에서 보잘것없다 해도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아름답고 또 위대한 존재라고 저자는 토를 달았다.) 그래서 미니멜은 죽기로 ㅈ결심한다. 그런데 천사는 불멸의 존재라, 자살이 불가능해. 방법은 하나. 자기를 만든 신에게 가서 자기를 그냥 없애 달라고 부탁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단다.


신은 곰곰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사람들 세상에 피에타 상이 수백만 개 존재하고. 나이아가라 포포가 수백 개, 에베레스트 산이 수백 개 존재하다고 한 번 가정해 봐라. 그것들은 더 이상 독창적이 아니니 그 절대적 인 매력을 잃지 않겠느냐?
나의 창조물들을 자세히 보아라 어떤 눈송이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다. 나뭇잎이나 모래알도 두 개가 결코 똑같이 않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은 하나의 '원본'이다. 따라서 각자 어떤 것과도 대치될 수 없단 거란다. ... 너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너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랬다면 세계는 내 눈에 영원히 불완전한 거으로 보였을 것이다. 너를 미카엘이나 라파엘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너로서 존재하고 나의 고유한 미니멜이기를 원한다. 태초부터 내가 사랑한 것은 남과 다른 너였기 대문이다. 너는 내가 오랜 세월에 걸쳐 꿈꿔 온 유일한 미니멜이다. 따라서 어느 날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느냐? 만일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슬플 것이다. 영원히 눈물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한참을 이 구절을 붙들고 있었다. 왜냐구? 엄마도 가끔 생각하거든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에게는 왜 저 사람이 가진 저것이 없을까? 시은 왜 나에게 이런 재능을 주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데 생각해 보게 된 거야. 나이아가라 폭포가 동네마다 있다면, 동네 뒤에는 다 에베레스트 산이 있다면, 피에타 상이 온 동네 교회마다 있다면..... 갑자기 말이야, 신기하게도 웃음이 나왔어.


닐 기유메트 신부님은 이 밖에도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신 분이야. 어떤 사람의 책이 좋으면 그 사람이 지은 모든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은 너와 내가 같아서 엄마도 이 분의 책을 다 찾아 읽었단다.


사랑하는 달, 가끔 여성지를 펼쳐들고 있으면 온몸이 오싹해 질 때가 있어. 온갖 성형외가 광고와 다이어트 광고들. 그건 이 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잘라라, 붙여라, 꿰매라, 빼라..... 결국, 지금 너는 추하다!


위녕, 네 코에 대해 불만이라고 했지? 하지만 엄마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 콘는 너의 입술과 세트를 이루는 아름다운 코야. 네 코가 엄마코를 닮았다면 너의 입술은 부자연서러웠을 거야. 성형외과 의사에게 들었는데 인간의 얼굴은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심지어 턱선 어깨선과도 모두 조화를 이루도록 독특한 설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 그래서 얼굴 하나를 잘못 고쳐 놓으면 그 모든 균형이 무너져 내리고 그러면 그 균형을 어떻게든 되찾기 위해서 다시금 다른 이목구비에 손을 대게 되는 악순환이 벌어 진다고 하더구나.

 

위녀, 넌 엄마의 심미안을 전혀 믿지 않지만 너는 예쁜 아잉야. 그리고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위녕 너를 말이야. 만일 네가 없어지면 우준느 균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 치겠니? 어느 시인이던가 그런 말을 했다.


한 송이 수선활르 피우기 위해 온 우주가 협력했으니 지구는 수선화 화분이다.'라고.
엄마는 오늘은 꼭 수영을 가려고 해. 온 우주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의 몸을 튼튼하게 지키려고 말이야.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40-44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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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에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위녕, 좋은 날씨가 계속된다. 하루 종일 공부해야 하는 너는 어쩌면 이런 날씨가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겠다. 하늘은 푸르고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고 꽃들은 화사하고... 오늘도 가끔 창밖을 보고 있니? 그래 가끔 눈을 들어 창밖을 보고 이 날씨를 만끽해라. 왜냐하면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전부의 시간이니까. 오늘만이 네 것이다. 어제에 관해 너는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하나도 고칠 수도 되돌릴 수도 없으니 그것은 이미 너의 것은 아니고, 내일 도한 너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오늘 지금 이 순간만이 네가 사는 삶의 전부, 그러니 온몸으로 그것을 살아라.

너는 어제 어처구니없이 당한 오해와 공격에 대해 엄마에게 오래도록 이야기했었다. 그래, 생각 같아서는 너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에게 좇아가서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항의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일단 엄마는 여기서 한 박자 쉬기로 했어. 대신 네게 이런 편지를 쓰고 싶었단다. 그 순간, 네가 하지도 않은 일로 그가 너를 오해하고 사람들 앞에서 너를 망신당하게 했을 때, 그때 네 마음이 피 흘리며 아팠을 때, '정말, 정말, 너를 상처 입힌 것은 과연 누구였을까?'하는 편지 말이야.


'네 자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네 자신뿐이다.'


이 말은 엄마가 안셀름 그륀이라는 신부님의 책 <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라>에서 읽은 구절이었어. 그 신부님은 성폭력의 상처를 가진 여성들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어떤 위로도 이 여성들을 다 위로하고 치유할 수 없지. 어린 시절의 성폭력은 그 여자들이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초래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역사에 희생당한 사람들,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해 불행을 겪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하기 위해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런데 말이야. 성폭력이나, 광기의 역사나, 테러에 희생당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도저히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와중에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하거나 나는 오직 희생아라고 말하기 전에 조금은, 우리가 무언가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해. 그륀 신부는 이 여성들과 면담을 통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고통 당하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고통과 작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그가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고통을 놓아 버린 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그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녕, 너는 이 이상하고 모순되어 보이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니? 이 무서운 진리를 말이야.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주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난단다. 가끔 엄마는 생각해. 진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그 고통에서 그들이 헤어나올 방법을 함께 모색해 주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들은 정말 여기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나 한 걸까? 하고 말이야. 가끔 그건 엄마에게도 마찬가지였어.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개는 그 고통이 가해지는 틀을 깨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까. 그건 미지(未知)이고 그것은 고통보다 더 두려운 거지.

그리고 다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 거야. 그것은 비단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상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그는 그것을 이렇게 써 놓았단다.


우리 모두는 늘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석에 앉혀놓고, 피고석에 앉아 우리의 행위를 변명하고자 하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를 변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를 늘 비난하는 사람들을 배심원 자리에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피고석에 우리 자신을 앉힌 것은 누구였을까? 엄마가 많이 힘들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과 엄마가 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다르다고 느끼는 날 엄마는 이 구절을 읽었고, 책이 아니라 가슴에 붉은 밑줄이 손톱자국처럼 북북 그어지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엄마의 녹슬어 가던 인생이 끼이익 하고 각도를 트는 소리를 냈다. 엄마는 오래도록 불행한 결혼을 끝내고 싶었지만 두려워서 그러지 못하고 있었어. 왜냐하면 아직 하지도 않은 이혼을 두고 아직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그 비난들이 엄마의 귀에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이 구절을 읽자, 나는 왜 피고석에 앉아 있으며, 나는 대체 누구를 배심원석에 앉히고 있었나 싶었던 거야. 분명 내 자신은 내가 피고석에 앉을 만큼 잘못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엄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엄마를 비난하지 않았고 그럴 리도 없을 텐데, 엄마는 스스로 피고석에 앉아 내 결혼생활의 판결을 엉뚱한 이들에게 맡기려고 하고 있었던 거지. 그토록 중요한 내 인생의 판결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맡기려고 하다니.... 그날은 마침 오랜만에 외출을 하는 날이었는데 엄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지인들과 술을 마신 후,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

"나는 이제 피고석을 떠나겠어! 오늘부터 내 배심원들 다 해고야.... "

있잖아 위녕, 어떻게 그런 말을 술 마시고 반복했는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술 마시고 얼결에 한 말중에 제일 나은 것 같아. 그 순간 엄마의 마음속으로 이루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이 찾아왔단다. 해방감은 공포를 수반했지만, 적어도 나를 비난하기만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변명하고 있는 짓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만은 확실했고, 엄마는 그 어리석음이라는 확실함을 붙들고 일단 확실한 그것을 발길로 뻥 차 버림으로써 거기서 한 발짝 벗어나기 시작했단다. 아직도 그 순간의 감격을 기억해.

그륀 신부님의 이 말은 동방의 성자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사상에 기대고 있지,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344년경에 태어난 사람이었어. 그때나 지금이나 성자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모함과 오해에 시달린다. 사람들이 그를 골탕 먹일 방법을 의논했지. 그러나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어. 만일 그를 주교자리에 앉힌다면 그는 그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너무 훌륭한 주교가 될 것이고, 만일 그를 유배 보낸다면, 그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게 하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굳세어질 것이며, 그를 죽인다면 그는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는 기쁨에 사로잡힐 것이라는 게 뻔했다는 거지. 그 무엇도 그를 삶의 기쁨에서 내몰 수 없었다는 것이야. 소크라테스가 말했던가. "그들은 나를 죽일 수는 있으나 해칠 수는 없다'고.

하는 수 없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주교로 임명되는 구나. 344년이면 기원 후 겨우 4세기인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인데, 우리나라에 아직 삼국시대도 오지 않았던 그때에 말이야. 그때도 돈과 성공만 아는 젊은이들이 넘친 모양인지. (그때도! 와우!) 이 성자는 지금 들어도 이미 진부한 말을 하는구나.


당신이 당신을 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는 그 잣대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의 힘인가? 당신이 틀림없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도 돈이 힘은 아니다. 당신의 노예 생활을 모면케 해 주는 자유도 힘은 아니다. 인간의 힘은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이다.


그래, 여기서 드디어 표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구나. 참된 표상과  함께 갖게 되는 주의 깊음과 생활방식과 관련된 올바름 엄마는 이 구절에서 한참을 멈추었단다.

그륀 신부님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인용한다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자기보다 200년쯤 먼저 살았던 에픽테스토스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며 다시 말한다.


사람들은 사건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사건에 대한 표상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죽음이 끔찍한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이 끔직한 것이고 깨어진 꽃병 자체가 끔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과 꽃병을 동일시하여 꽃병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온 마음으로 꽃병에 집착하는 것이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꼭 필요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상처를 입힌다.


글쎄, 그렇다고 이 위대한 사람들처럼, 엄마가 죽음도, 깨어진 꽃병도, 일어버린 돈도, 나를 상처 입힐 수 없다고 큰소리치며 말할 날이 올까마는, 한 줄기 아주 가느다랗게 희망 같은 것이 엄마를 비추었단다. 내용이 어떻든 사귀던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불행이라고 느끼는 것, 어찌 되었든 결혼을 이어 나가는 것이 행복에 대한 표상이고 이혼은 어쨌든 불행한 일일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 부자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표상들 예쁘고 날신하면 어쨌든 행복할 거라는 그런 표상들.... 표상은, 잘못된 표상들은 이제껏 내가 이름을 아는 사물과 사건만큼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고3 시절을 생각해 봤어. 엄마는 그때 난생처음으로 힘든 시기를 맞았단다. 외할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셔서 하나밖에 없는 집이 차압을 당하고 우리는 그야말로 거리에 나 앉게(말하자면 말이다) 되었던 거지. 엄마의 마음을 다줄 수 있었던 친한 친구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버리고, 엄마가 짝사랑하던 사람은 어느 날 정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 나름대로 이보다 더 불행하긴 힘들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숨죽여서 많이 울었다.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 집안의 사정도 아니고 유학 간 친구도 아니고 짝사랑하던 사람의 부재도 아니었어. 그건 나의 이런 딱한 처지가 알려지게 되어서 반 아이들이 처음으로 엄마에게 가엾다는 눈치를 보내게 되었다는 거지.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마는, 그때는 그것이 그렇게나 엄마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고, 참을 수 가 없었어.

일부러 분식집에서 돈을 내었고 일부러 명랑한 척 떠들었다. 일부러 말이야. 맘속으로는 엄청 죽고 싶었는데(지금 생각하면 죽고 싶기까지? 그런데 그랬단다) 그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일이었던 거야. 그때 생각했지. 죽고 싶다, 도망가 버리고 싶다. 그런데 말이야. 도망칠 곳이 없더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온몸으로 고3을 맞을 수밖에.

그때 생각했어. 이왕 피할 수 없다면 끌려가지 말자고. 내가 끌고 가자, 휘둘리지 말고, 억지로 노예처럼 공부하지말고 내가 이 시간들의 주인이 되자고.

지금까지 생각해도 그때처럼 엄마가 열심히 살았던 적은 거의 없어. 다른 친구들은 고3이라고 빠졌지만 일요일마다 하루종일 가는 성당의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았다. 책도 열심히 일었어. 친구들과 이야기도 많이 했고 새로운 친구와도 친해지게 되었지. 나중에 시간도 많아지고 집안 형편도 회복되었는데 가끔씩 그렇게 고3때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이후로 한 번도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거지. 내가 생각하기 에 끔찍했던 불행들이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바른 자세로 살게  만들어 주었던 거야. 가끔 생각하곤 한단다. 나에게 있어 진정한 불행과 진정한 불운은 무엇일까?

에픽테토스는 노예였고 절름발이였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불구였다는 설도 있고 주인에게 맞아서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아무튼 그는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이 틀림이 없다. 노예로 다시 로마로 보내졌을 때 그는 이미 행방된 노예인 에파프로디토스에게 고용된다. 그런데 해방 노예로서 노예의 비애를 잘 알고 있어야 할 에파프로디토스는 에픽테토스를 학대한단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알게 되었다고 해.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계속 그것을 전가한다고 말이야. 학대받는 며느리였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학대하고, 딸이라고 설움당하던 어머니가 딸을 구박하고, 배고픔을 참으며 고생고생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저임금으로 아이들을 착취하고. 상처가 대물림되는 이유는 그것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이야. 만일 엄마가 너희들에게 어떤 의미이든 상처를 주었다면 엄마 역시 엄마의 엄마에게 받은 이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에픽테토스는 그래서 거기서 자신과 상대방의 상처를 들여다 보고 그것을 극본한 다음, 말하지. 단언한단다.


인간은 자유를 원할 때에메나 자유로워진다. 다른 사람은 우리가 자신을 해치고 상처낼 때에만 우리에게 상처입힐 수 있다. 불행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 믿음 선입견.... 즉 표상이다.


에픽테토스와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그륀 신부님은 각기 아릿아를 부르다가 이제 오페라의 끝 무렵에 와서 삼중창을 부르는 빅3처럼 말한다.


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만들어낸 생각에 일치하게끔 그 사람을 체험한다. 어느 한 사람을 열광적으로 찬탄한다면, 우리는 그가 저지른 가장 정신 나간 일도 황홀하게 바라보고, 유일하며 비범한 것으로 해석한다. 화난 안경이나 실망한 안경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그를 마음에 안 들고 불쾌하고 허약하며 아주 간사하고 부정직한 등등의 사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표상과 표상을 투사하는 배후를 묻고, 사물과 사람들을 하느님의 빛 안에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롭게 사물과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그러면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위녕, 무엇인가에 표상을 투사하는 너의 배후는 무엇이니? 네 속에 없는 것을 네가 남에게 줄 수는 없다. 네 속에 미움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미움을 줄 것이고, 네 속에 사랑이 이있다면 너는 남에게 사랑을 줄 것이다. 네 속에 상처가 있다면 너는 남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네 속에 비꼬임이 있다면 너는 남에게 비꼬임을 줄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의미든 너와 닮은 사람일 것이다.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알아보고 사랑하게 된 것일 테니까. 만일 네가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너와 어떤 의미이든 닮은 사람일 것이다. 네 속에 없는 것을 그에게서 알아볼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네가 남에게 사랑을 주든, 미움을 주든 , 어떤 마음을 주든 사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네 것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면  말 한마디 시선 하나가 두려워진다. 정말 두려워져.

위녕, 우리는 가끔 어처구니 없는 가시덤불에 걸리기도 하고, 모욕의 골짜기에 떨어지기도 하지. 너의 선의와는 아무 상관없이 너는 매를 맞을 수도 있고, 창피를 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설사 그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일을 마음속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있다는 거야. 그건 우리에게 달린 일이거든, 그리고 우리에게 달릴 수밖에 없는 일익도 해.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모욕에 오늘 하루를 내줄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이 오월의 아름다움에 네 마음을 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그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너의 선택이라는 거야.

이 시간의 주인이 되어라. 네가 자신에게 선의와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너를 아프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 성적이 어떻든, 네 성격이 어떻든, 네 체중이 어떻든 너는 이 시간의 주인이고 우주에서 가중 귀한 사람이라는 생명이다.

위녕, 힘들다고 했지? 그래 힘들지. 누구나 그 시절을 다 힘들게 보냈어. 그런데 너의 힘듦은 진정 어디서 오니? 그래 이왕 힘든 거, 힘든 시간을 나를 분발시키고 나를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아 보면 어떨까? 미안하다. 그것이 힘든 걸 알면서도 이렇게 또 지당한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구나, 그러나 위녕, 사실을 말하면 엄마는 네가 이 시기를 좀 잘못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도 돼. 너는 아직 젊고 또 많은 기회가 있을 거야. 이 한 해로 너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도 안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엄마의 미안한 사랑을 보낸다.왠지 오늘은 수영장이 임시 휴일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자, 오늘도 좋은 하루!

 

                                                                                                        - 98-111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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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로스> 발췌

yes24 출판사 리뷰

 

“내 몸과 삶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연애불능시대에 던지는 에로스 처방전!


대한민국 연애발달장애 :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

“미디어는 온통 사랑과 섹스를 쉬임 없이 쏘아 대고 있건만 정작 사랑의 열정을 누려야 할 청춘들은 사랑이 없는 비애를, 사랑할 사람이 없는 비애를 부르짖고 있었다(머리말 중에서).”
왜? 도대체 왜? 왜 그렇게들 사랑타령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싶어 난리면서도 다들 연애를 못하는가?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다름 아닌 ‘연애’책을 쓰게 된 이유는. 마치, 무릇 모든 사람들의 삶이란 것은 사랑과 연애로 수렴되는 게 인생의 법칙이라도 되는 것마냥 모두가 연애를 하지 못해 안달인 이 ‘연애공화국’에서, 정작 제대로 연애하는 사람은 만나서 밥이라도 한 끼 사주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작금의 상황을 통탄하며 고미숙은 마침내 코뮌주의자의 사랑법을 펼쳐놓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총체적 연애발달장애에 대한 고미숙의 분석과 진단은 루쉰에서, 스피노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파블로 네루다에서, 『임꺽정』에서, 『동의보감』에서 나왔다. 고미숙, 그녀는 명색이 고전평론가가 아니던가.

▶인문학적으로 성찰하는 1080 전 세대의 사랑!
이 책에서 인문학과 사랑이라는 이질적인 조합을 만들어 낸 고미숙은 붓다의 수행, 『동의보감』의 양생술, 고전문학을 통해 기존의 실용서에서 주장하는 사랑의 ‘테크닉’, 혹은 ‘매뉴얼’과는 차별된 ‘사랑의 기술’을 설파하고 있다. 이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기술은 비단 20~30대만의 사랑이 아니라 늙어서도 하는 연애, 자식과의 관계, 중년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사랑, 즉 1080, 전 세대의 사랑 모두를 포함한다. 바로, 사랑은 삶을 바꾸고,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까닭인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다른 것도 아닌 ‘사랑’인가 하는 점이다. 고미숙은 사랑을 “대상이 나를 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어 가는 시공간적 인연의 장”으로 정의하고 삶과 사랑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랑만큼 우리의 존재를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 사건은 없다. 그리고 사랑만큼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에너지도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은 기본적으로 ‘탈주선’을 그리고, 본질적으로 창조적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랑의 에너지는 단순히 성(性)적 열망을 넘어서 앎의 열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 된다. 기존의 금지선을 벗어나 전혀 새롭고 낯선 매트릭스로 진입하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인 까닭에 우리 삶을 어떻게 하면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은 자본과 망상으로 도배된 지금의 현실을 돌파할 수 있는 출구가 된다. 삶을 창조하는 에로스! 이 책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는 결국 그 창조적 에로스의 발견을 촉구하고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 혁명을 선동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 사랑에 대한 오만과 편견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별에 대한 항변으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울부짖었지만 고미숙은 이 울부짖음에 오히려 반문한다. “사랑이 어떻게 ‘안’ 변하니?”라고. 사랑은 당연히 변한다. 사랑을 하는 마음과 몸이 변하기 때문이다. 변해 버린 마음과 이별의 순간, 이 모든 게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보편적인 사랑의 전개과정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계절이 바뀌는 모습―찌는 듯한 무더위가 지나면 낙엽이 지고, 또 엄동설한이 찾아온다! ―이 어느 기점을 넘으면 금세 달라져 버리는 것처럼, 우리 삶도 그렇고 사랑도 역시 그렇다. 모든 태어난 것은 자라고 병들고 늙고 죽는다. 마찬가지로, 사랑도 나고 자라고 쇠하고 소멸된다. 즉, 사랑도 생로병사를 겪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불멸의 판타지를 무참히 깨뜨리는 이 ‘무상성’은 지금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는 실로 엄청난 시한부 선고가 될지도 모르지만 사랑이 끝없이 변화하는 흐름이요 운동인 것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의 관계도, 그 흐름과 생성의 장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전제로 한 사랑에서 관건은, 능동적으로 그 흐름을 타는 데에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라고?
사랑을 하다가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보자. 어떤가? 복수심이나 증오, 혹은 분노로 활활 타올라 재가 될 것만 같다. “내가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얼마나 잘해줬는데…! 감히 나를 배신해!?” 화내고 소리지르고 복수를 다짐한다.
참 이상하다. 그 사랑과 헌신은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었던가? 혹은 원하지 않았다 해도 사랑의 시작, 그 사건의 원인은 어쨌거나 ‘내’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분노를 하는 것은, 자신의 사랑이 노동이나 거래였음을 역설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모든 원인을 상대에서 찾는 것은 수동적인, 너무나 수동적인 사랑법, 즉 노예의 사랑법이다.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그 사랑을 선택한 ‘나’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다. 사랑은 나와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발생하는 사건이고, 따라서 사랑과 대상과 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거늘.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늘 잊고 살고, 그래서 사랑에 늘 실패한다.
우리는 늘 나의 반쪽, 나의 이상형을 갈구하면서 ‘님’만 찾으면 나의 사랑이 완성될 거라 믿지만 그것처럼 순진한 착각도 없다. 사랑은, 전적으로 ‘나’의 문제이고, 내가 어떻게 관계를 구성하느냐가 그 사랑의 내용과 형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이라는 흐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므로 그 시작과 끝은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사랑에 대한 지독한 오해와 편견과 착각으로 넘어지고 깨지고 허우적대는 가여운 영혼들을 보다 못한 고미숙이 제시하는 에로스 처방은,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 사랑하는 대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것!

▶실연과 짝사랑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술과 눈물과 수염은 ‘실연’ 내지는 ‘이별’에 따라오는 자동완성기능이다. 이미 황폐해진 마음과 더불어 몸도 함께 망가진다. 실연의 아픔을 ‘불행’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별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이 착각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지만,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이별이라는 상황과 이별을 맞이한 나의 상황에 객관적인 물음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실연은 불행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던 인연의 장을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 다른 장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니 관건은, 그 아픔을 불행으로 변주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고미숙은 말한다.

“병에 걸리면 누구나 아프다. 하지만, 아프다고 해서 다 불행한 건 아니다. 통증과 불행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거다. 병을 치유할 때, 통증의 유무가 유일한 척도가 되면 결국 진통제에 의존하게 된다. 그건 병을 치유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병 역시 절대 위로와 연민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진통제가 몸을 나약하게 만들 듯, 동정과 위안 역시 존재의 능력을 한없이 떨어뜨린다.”(본문 178쪽)

이별이란 두 사람이 만든 인연의 장이 시간적 어긋남 속에서 비틀거림을 낳은 것일 뿐, 분노와 원망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은 권력 게임 혹은 자존심 경쟁이 되어 버리고 만다. ―실연에 대한 전복적 재해석!
뿐만 아니라 고미숙은 실연에 대한 편견과 더불어 ‘짝사랑’에 대한 기존의 편견도 속 시원하게 뒤집어 놓는데, 그녀가 말하는 짝사랑의 미덕은 이런 것이다. 시간 안 들고, 돈 안 들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의 흐름을 살필 수 있고,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낄 수 있고, 그 전율로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느냐는 것. 짝사랑은 행운이라는 이 교묘한 반전은 수많은 연애 소수자들을 절망에서 탈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한다면, 삶을 창조하라!

▶엄마도 아이도, 제대로 좀 살아 보자

한번 빠지면 어지간해서는 헤어나오기 어려운 늪이 있다. 그 늪은 바로 엄마. 엄마와 아빠의 과잉서비스. 그 달콤함에 빠지면 우리의 청춘들은 스무 살이 넘어서까지 이유식을 먹어야 하는 ‘아이’로 남아 있게 된다. 엄마가 아이의 모든 것을 결정해 주고, 모든 것을 사주고, 입혀 주고, 먹여 준다. 이렇게 온실 속에서 자라게 되는 아이들은 이 ‘편안한 불행’이라는 역설적인 삶을 사는 대신 신체의 무능력과 영혼의 잠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결국 엄마의 늪에 빠진 아이들은 자신의 열정을 찾지도 분출하지도 못하고 사그러져 간다. 모성의 탈을 쓴 이 연민과 집착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청춘을 들끓게 하는 폭풍을 삼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늪’이다. 그리고 이것은 동시에 엄마 자신을 가두는 늪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의 동선을 체크하고, 모든 걸 대신 해주려 하면서 엄마들은 자식들의 삶을 기어코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만다. 사랑의 이름을 한 ‘지배욕’의 모습이다. 그런데 가족 내의 조성이 이렇게 꾸려질 때 자식들의 청춘만 잠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잃어버린 엄마의 삶 역시도 함께 잠식된다. 아들의 성적표, 남편의 월급, 넓어지는 아파트 평수밖에 자신의 기쁨이 될 수 없는 현실. 그것은 대한민국 엄마들의 삶과 삶에 대한 열정을 갉아먹는 좀벌레와도 같다. 물론 가족을 사랑하고, 아이가 잘되었으면 하는 모성애는 아름답지만,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아이의 삶을 만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먼저 창조적으로 만드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든다 함은, 새로운 인연의 장과 네트워크를 만든다―봉사활동도 좋고, 시민운동도 좋고, 공부도 좋다!―는 말이고, 외부와 맺는 관계성을 확장시킨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진부하던 일상에도 힘과 탄력이 생기고 몸에서 내뿜는 기운도 당연히 달라질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삶의 서사, 즉 ‘선물’이 생길 것이다.
사랑은, 대상에 집착하고 내면에서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소통하고 그 속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엄마들이여! 아이를 사랑한다면 먼저 자신의 삶을 창조하시라!

▶나를 창조하는 힘, 공부와 연애!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 대상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대상과, 더 넓게는 이 세계와의 공존을 기획하는 일이다. 이 공존에서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이 원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삶의 창조, 그것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영역이다.”(본문 230쪽)
그렇다. 사랑은 둘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와의 공존을 고민하는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관찰하고, 그가 속한 세계를 관찰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세계와의 능동적인 소통을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상생하는 연애의 비법이고, 삶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삶을 창조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를 구성하고 있는 내 몸의 리듬과 강도를 바꾼다는 말이다. 현재 나의 시공간적 장을 바꾸고 리듬을 만들면, 딱 그만큼 나의 미래가 바뀐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역전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인생역전까지도 가능한 우리의 ‘사랑’은 종종 구속으로 변질된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질투와 광기, 변덕과 같은 힘에 끌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 붙들려서는 나를 바꾸는 연애, 삶을 창조하는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이 부정의 중력장을 해체하려면 더 큰 긍정의 힘으로 공부하고 기뻐하고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사랑할 수 있으며 사랑과 대상과 나에 대해 적합한 인식을 하면 수동적이고 부정적 정서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까닭에, 공부와 앎이라는 네트워킹은 ‘나를 창조하는 힘’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명령은? “공부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두려움 없이!”

에로스 처방전

一. 돈 쓰지 말고 몸을 써라!
사랑이란 무엇보다 생명의 활기로 표현된다. 자신의 욕망을 자본의 프레임에 구겨넣지 말고 몸을 써라! 지금 당장 쇼핑몰에서 나오고, 자동차에서 내려라!

二. 실연을 행운으로 받아들여라!
한번 변곡점을 통과할 때마다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어 있다. 그때 케케묵은 인연에 발목이 잡힌다면 참으로 난감할 터. 그러니 그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三. ‘공부’하라!
앎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랑은 존재가 외부와 맺는 모든 관계를 포함한다.
따라서 운명을 건 도약, 운명을 건 사랑을 하고 싶으면 앎의 열정으로 불타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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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4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그 자신을 속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남들을 속임으로써 그것의 종말을 고한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절대 상품을 주고받는 식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마시라. 물론 선물은 중요하다. 하지만, 진짜 소중한 선물에는 '삶의 서사'가 묻어 있어야 한다. 즉, 나의 일상의 리듬과 무관한 선물이란 그야말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쇼"가 되는 순간, 아무리 정성을 다한다 한들 결국 화폐로 환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요즘같이 상품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에는 정성과 화폐가 분리되기 어렵다. 갖은 정성을 다한 선물일수록 가격에 비례한다. 따라서, 그 노선을 취하는 순간, 이미 그 사랑은 화폐권력의 장에 포획되어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일상의 모든 흐름에 상품의 혼이 따라붙게 된다. 처음엔 얼떨결에 따라했던 작업들이 나중엔 자신의 본성인 양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다.(197~8쪽)

 

 

왜 사회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를 꿈꾸면서 사랑과 성적 관계에 있어서는 새로운 실험을 기획하지 않는 것일까?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뇌관임을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왜?(83쪽)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우리시대 모든 연인들이 연애와 쇼핑 사이의 이 은밀한 공모관계만 해체해도 신자유주의 체제는 휘청거릴 것이다, 라는. 세상에, 이렇게 간단하고 기막힌 혁명전략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청춘들이여, 아니 사랑에 빠진 모든 이들이여, 세상이 바뀌기를 정말 원하는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장 먼저, 쇼! 하지 마라! 쇼! 그럼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는가? 그래서 창의성이 필요하다. 나의 사랑이 지닌바 특이성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는 사랑법을 창안하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한 사랑법을.(198쪽)

 

 

 

흔히 연애가 시작되면,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가거나, 하릴없이 유원지를 헤매거나 한다. 한마디로 온통 소비를 통해서만 사랑을 확인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다. 힘으로 일어선 자 힘으로 망한다고, 소비로 맺어진 연애는 반드시 소비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사랑만큼 소중한 감정도 없지만, 사랑만큼 부서지기 쉬운 감정도 없다. 10년 이상을 한 이불 밑에서 알콩달콩 살던 부부도 순식간에 파국을 맞이하곤 하는데, 하물며 처녀총각의 연애야 말해 무엇하랴.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는 것이다. 함께 책을 읽으면서 데이트를 하면 돈도 덜 들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높아진다. 또 책을 읽으면 주고받을 이야기도 자연 많아진다. 그러면 말하는 능력, 서사적 힘도 절로 붙게 된다. 일석삼조! 아니 사조! - (208쪽)

 

 


사랑이란 단지 그 대상하고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상이 살아가는 시공간과도 깊은 교감을 나누어야 마땅하다(이쯤에서 “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한다!”는 테제들을 암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러므로 사랑이 시작되면 내면에 웅크리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 속으로 성큼 들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 힘에 의거하여 인연이 형성될 수 있고, 인연이 맺어진 다음엔 그렇게 만들어진 삶의 서사를 다시 나눌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인연이 생길 수도 있고. 암튼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 (226쪽)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 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 P. 15

 

 

 

‘불멸의 사랑’은 망상 중의 망상이다. 그건 마치 어린 아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어른이 된 다음에도 계속 끼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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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장 하나. (백승욱)

 

"침몰하는 배의 마스트 꼭대기에 앉아서 우리만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 백승욱,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中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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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운동에 관한 짤막한 글 (장석준)

2007년 사회운동포럼 자료집 中 "사회운동 대토론회 1부"의 장석준 씨 글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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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여러 운동권 용어들 중에서 특히 '부문운동' 만큼 맘에 안 드는 말도 없다. 과거에는 노동운동과 그 나머지 운동들 중 후자를 지칭하는 은어로 쓰였고, 지금도 위의 질문과 같이 '부문별 운동' 식의 어법이 통용되고 있다.

 

한국의 운동권은 코포라티즘에 대해 각별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부문'이란 말 만큼은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부문' 이란 말은 그 야말로 어떤 조화로운 전체(집합)를 미리 상정해놓고 그 각 영역을 기능적으로 나눈다는 식의 사고를 갈고 있다. 코포라티즘이 결국 이런 태도에서 나온 것 아닌가? 사회를 각 이해당사자의 '부문'으로 나누고 이들 사이의 합의를 통해 사회 전체의 조화를 이뤄나간다는 입장.

 

'부문' 보다는 차라리 '주제'라는 용어가 그나마 낫겠다. '주제'는 노동운동이나 환경운동,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 등 각 운동마다 서로 다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내세우는 주제들이 서로 기능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이들 모두 광의의 노동계급운동으로 봐야 하고 민중운동으로 봐야 한다. 다만 현 체제를 비판하기 위한 출발점, 즉 '주제'가 다른 것뿐이다. 그렇다면 각 운동은 처음부터 서로 소통하고 접속하며 반향하고 합류해야 한다. 마치 음악에서 서로 다른 주제들이 만나 하나의 악곡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만나야 한다.

 

다만 주제들이 서로 만나 하나의 아름다운 악곡을 이루려면 화음이 서로 맞아야 한다. 그 '화음'을 맞추는 작업은 필요하다. 이 점에서 결국 우리의 기본 음계로서 '권리'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동의 권리, 여성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그리고 이들 권리 사이의 조율 작업('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이것이 결국 각 주제 운동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길일 것이다.

 

'민중'과 '시민'의 통일이라는 문제설정은 전형적으로 한국의 최근 상황에서 비롯된 것(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립)이라고 본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 '다른' 것이라는 주장 자체에 대한 거부여야 한다. '민중'이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말인 것처럼 '시민' 도 그러하다. '시민'은 권리의 보편적인 주체를 상징하는 <가면>이고 이 <가면>을 써야 할 사람들이 바로 '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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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中

 

“광기의 복원을 위하여”,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중

- 김원, (이후, 1999)



80년대 학생운동의 역사는 내일이라도 혁명이 일어날 듯한 혁명의 광기로 가득 찬 역사였다. 이들은 끓어오를 듯한 혁명 전야를 향해 내달렸고, 자신들의 미래보다는 노동자와 민중의 미래와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를 지향했다. 이제 이 글을 매듭짓기 전에 앞에서의 내용을 다시 정리해보자.

먼저 80년대 학생운동의 지향은 상상된 민중의 상으로서 ‘민중 공동체’였다. 이는 하나의 조직적인 실체라기보다 유대의 관계에 입각한 것이었고, 향후 이들이 만들고자 하는 혁명의 상, 미래의 상이었다.

두 번째, 이러한 공동체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하여 운동엘리트들은 학생회 조직, 자신들의 정치투쟁을 정당화화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과 이들의 일상을 민중과 노동계급의 것으로 통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규율화시켰으며, 대중의 일상에 근거하지 못하는 제도화된 실천과 전략을 낳았다.

세 번째로, 대중의 정서를 모아내는 역할을 한 것이 대학 내 하위문화였다. 이 글에서 분석한 하위문화는 대학 내 다양하게 존재하는 모든 하위문화가 아니라 운동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지배적인 하위문화였다. 즉 80년대 대학생의 하위문화는 자신의 모문화로서 계급문화를 지니지는 못한 채, 군부독재의 구조적 억압이라는 조건 하에서 아직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 사회세력으로 가시화된 못한, 담론적 수준과 미래의 사회적 행위자의 수준에서 ‘민중’을 지향했으며, 이는 공동체의 구성과 재생산에 필수적인 요인이었다. 당시 이러한 하위문화로의 지향은 구체적인 노동 현장, 작업장의 현실로서의 노동계급이 대학생들에게 다가온 것이 아닌, 지식과 의례 그리고 운동엘리트가 재해석한 과거의 전통을 통해 가능했다. 결국 상상된 실체로서의 민중은 처음부터 대학생에게 과학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실천 속에서 재구성되고 재발명된 것이다.



한국 학생운동의 위기, 그 탈출구는 없는가?


한편 나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위기는 대중 이데올로기로서 민중적 공동체의 변질과 그 조직적 형태인 학생회의 관료화, 부르주아적 조직 시스템의 형성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대중의 밑으로부터의 실천인 대중정치는 스스로의 운동적 정체성에 근거하지 못하는 대리주의, 선거주의, 엘리트주의다. 애초 그들이 지향하던 탈제도화 전략과 거리의 정치에서 퇴각하여 학생운동 정치의 정체성을 스스로 해체시킨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또한 운동문화로 상징되는 80년대 하위문화는 대중이 자발적으로 만들어 가는 실천의 과정으로서의 문화가 결여되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학생의 독자적인 물질적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라 민중․노동계급이라는 상상된 실체 혹은 공동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한 나머지, ‘공통의 계급경험’이 부재했던 학생 대중을 대상화시킨 것이다. 또한 80년대 학생운동은 운동․민중문화를 자신들의 고급문화로 간주한 반면,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하는 대중문화를 지배문화, 소비문화로 간주했다. 공동체 내 운동문화는 하나의  고급문화로 존재했으며, 오히려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자생적인 하위문화에 대한 천착이 간과된 채 운동문화가 공동체 내에서 고정화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불거져 나온 학생운동의 위기에 대한 논쟁은 이러한 요인들을 결여한 채 진행되었다. 물론 여러 가지 현상으로 미루어 현재 상황이 ‘객관적인 학생운동의 ’위기' 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학생운동 정치와 관련된 위기의 원인 분석은 ‘외인론’과 ‘내인론’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기존 대부분의 분석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따른 학생운동의 정치적 역할 소멸 및 제도화, 노동자 운동을 포함한 계급운동의 성장에 따른 역할의 축소 그리고 1991년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급진화 자원의 소멸 및 내부적인 이데올로기적 혼란 등의 외부적인 요인을 위기의 원인을 사고했다. 또한 학생운동 위기의 ‘내인론적 접근’ 역시 학생운동 엘리트의 과도한 급진주의, 최대강령주의, 대중의 의식과 괴리된 이데올로기적 급진성과 그 대표적인 표현으로서 스탈린주의의 폐해 등을 지적했을 뿐, 학생운동 정치의 핵심적인 구성 요소인 운동엘리트, 대중, 운동문화와 학생회 간의 총제적인 관계로서 학생운동 정치의 ‘동학’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이 글을 통해 80년대 학생운동 정치의 형성과 위기를 ‘내인론’적인 관점에서 살피고, 더 나아가 학생운동 정치의 급진화의 기원에서 위기에 이르는 과정을 엘리트와 대중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통해 규명하려고 했다. 결론적으로 80년대 학생운동은 그 내부 동학으로 볼 때, 대중운동의 수전에서 그리고 대중정치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했기에 실패와 위기의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밑으로부터 살아있는 역사 찾기


이 글은 학생운동 엘리트의 정치․조직노선과 저항 이데올로기만을 연구 대상으로 하던 기존 학생운동 연구의 한계를 공동체 내 대중과 엘리트 간의 권력 관계의 분석을 통해 극복하려는 최초의 경험적 연구라고 생각한다. 또한 80년대 대중 저항의 동력을 정세적인 조건, 구조적인 억압 효과를 중심으로 사고하던 연구를 뛰어넘어, ‘구조-행위’간의 매개 변수로서 하위문화와 공동체개념을 도입한 연구였다.

아울러, 그간 너무나도 당연시되었던 80년대 대학 내 운동문화의 구체적인 양상과 이를 둘러싼 공동체의 내부 동학을 규명하고, 운동문화가 80년대 대중 저항, 학생운동의 형성에 미친 구체적인 영향에 대해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기존의 사회과학에서 사용하지 않던 민족지 또는 정치인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방법을 시도함으로써 역사와 정치현상을 밑으로부터의 살아있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론적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보았다. 처음 있는 시도라 다소 어지럽고 거친 면이 없진 않지만, 나는 이러한 방법론 및 연구에 대한 태도가 많은 다른 연구에도 확산되어 ‘살아 숨쉬는 학문’, ‘뛰어 다니면서 당 시대를 재조명하는 연구방법’이 한국 지식사회에도 보편화되기를 희망한다.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 글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의 민중, 노동자의 역사에 관한 간단한 편린을 적고자 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80년대 학생운동의 실천은 엘리트와 대중이 발명한 ‘혁명에 대한 열정’의 기제로서 운동문화에 의한 것이었다. 이들의 문화는 단지 생활양식, 스타일, 규범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과 대학 내의 여러 공간을 규정하는 상식이었으며 내일이라도 혁명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광기(狂氣)로 가득찬 열정 그 자체였다. 졸버그의 표현대로, 광기의 순간은 근대적 인간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및는 정치적 열정으로 가득 찬 시기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여러 단체의 폭발적인 등장과 소멸, 흥분과 설레임, 집단적 철야, 폭포와 같은연설, 구름과 같은 집회와 인파, 수많은 노선과 쟁투(爭鬪)가 연달아 일어난다. 바로 이 모든 것들이 80년대 광기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집회와 투쟁, 자유, 행복, 정치적 충만감의 경험, 슬로건과 노래, 말의 격류 ― 나는 이들이 그 때 혁명의 마법에 취해 있었다고 본다. 적들에 그리고 역사에 의해 갇혀 있던 이들의 육체와 정신의 억압이 해방되고,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 통일되는 상상된 공동체가 구현된 광기의 시대는 또 다른 해방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의 주체로 상상했던 노동자․민중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극히 비뚤어진 것이었고, 노동자․민중이 시민사회 내에서 최소한의 정당성을 얻기에는 또 1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80년대 학생운동의 희망과는 달리 한국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혹은 맑스주의라는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모순적 구조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왜 자신들의 노동력과 한 시민으로서의 존재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약자의 무기로서 정권과 산업화에 대항하는 투쟁을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다닥다닥 붙은 두세 평짜리 방에서, 숨쉬기조차 힘든 다락방에서 고통스러워 했고 ‘공돌이, 공순이’로 사회적 차별과 무시를 받으면서도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여 왔었다. 그러나 공정한 법의 중개자라고 믿어오던 국가와 자본가로 대표되는 가진 자들이 자신들에게 퍼붓는 저주스러운 욕설과 폭력 앞에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집단적 계급 정체성을 알아 나아가고, 시민사회 내 사회세력으로 역사 앞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광기의 시대를 경험한 세대 중 다수는, 이제 그 때 그들이 그렇게도 되고자 했던 민중을 잊고 사는 듯하다. 전국단위 산업별노동조합의 대표가 국가기구의 대표를 압박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이제 과거의 주인공들은 그들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제 다시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부정 속에서 일상으로 함몰해 것일까? 역사가 반복된다면 금언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전히 이러한 질문들이 자기반성의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다.

이 글을 마치면서 몇 년 전 TV 드라마 「모래시계」에 등장한 한 여대생이 동일방직 노동자의 투쟁을 보고, 술에 취해 쌀 한 봉지를 흔들며 흐느끼던 대사가 머리를 스쳐간다. “저기 노동자들은 목숨을 걸고 단식하며 싸우고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매일 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창피해.” 이는 1970년대와 1980년대 다수의 지식인들이 공감하던 시대적 정서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너무 일찍 노동계급에 대한 부끄러움을 거두어 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 부끄러움은 한때 그들의 위선이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거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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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존 벨라미 포스터)

존 벨라미 포스터의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제이슨 무어 외,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에 실림) 126-7pp 에서 발췌. 자본주의와 생태 문제에 관한 중요한 논점을 다루고 있음. 전체적으로 오코너가 주장하는 생태모순에 대한 분리주의(??)적 사고를 비판함.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 개념의 전반적 취지는 일단 생태적 손상이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로 전환되면 일종의 피드백 매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자본이 생산조건의 손상과 결합된 생산비용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사회운동이 체계로 하여금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외부화해온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여기서 분명한 가정은 생태적 원인들에서 비롯된 경제위기가 좌파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제공하고, 나아가 계급에 기초한 노동자운동과 신사회운동의 제휴를 형성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자본주의에는 그러한 피드백 매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녹색당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었을 때야 비로소 화폐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개달을 것이다. 인간사회와 대다수 생물종을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소란스러운 생태 파괴의 와중에도 축적할 수 있고 (예컨대, 폐기물 관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환경 훼손으로부터도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은 자본주의 체계가 그것을 재족하도록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내부적 (또는 외부적) 조절 매커니즘도 그 체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큰 더 심각하다. 생태에는 경기순환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관점의 순환 이론에 가장 가가운 것은 폴라니의 '이중운동'에 관한 이론이다. 그것은 '허구적 상품들'("생산조건")을 조절하려는 자본주의적 시도와 결합된 규제운동과 탈규제운동의 정치적 순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중운동은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이론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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