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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09
    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1장 요약
    구르는돌

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1장 요약

제1장. 미국의 노동계급은 왜 다른가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주의 정당, 사회민주주의 정당, 공산주의 정당의 우세에서도 나타나듯이 상당 규모에 달하는 노동계급의 조직과 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미국에는 유독 없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미국 맑스주의를 괴롭혀온 망령이다. 이에 대해 고전 혁명이론에서는 어떻게 보았는지 검토해보자.

맑스, 엥겔스, 카우츠키, 레닌, 트로츠키 등은 저마다 한번쯤은 미국혁명운동의 발전전망에 매료된 적이 있다. 이들이 보기에 미국의 노동계급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소 ‘미성숙한’ 모습, 즉 과도기적 조건들 때문에 발전이 지연되거나 굴절당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사회 체제 전반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규모의 계급투쟁을 유발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미국사회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제도들은 독자적인 정치활동 및 대중적인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형성에 도약대 역할을 할 것이고,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발전단계들이 미국에서는 ‘결합된 불균등한 발전’ 과정의 가속화로 말미암아 ‘축약’된 모습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은 아직 사산상태이다. 민족적․인종적 분열, 자본가의 양당제도가 흡수해 버린 노동계급 내부의 문화적 간극 등은 신생 노동자정당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중에서 대공황은 가장 역설적인 경험을 몰고 왔다. 플린트에서 주방위군의 총부리에 맞서 싸우고 봉기에 가까운 미니애폴리스 총파업 때 경찰을 거리에서 쫓아낸 바로 그 노동자들이 선거에서는 로즈벨트를 지지하는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이다. 산별노조투쟁에 참가한 수백만의 젊은 노동자들이 한편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의 구원’이라는 깃발을 들고 나온 한 준귀족적인 정치가의 돌격부대로 동원되었다.

이런 미국의 ‘예외상태’를 해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로서 미국 문명에 대한 관념론적 접근법이 있다. 커먼스-펄먼(Commons-Perlman)학파가 제기하는 이런 시도는 봉건제하의 계급투쟁이 없었다든가 로크적인 세계관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고 변경이라는 안전판이 마련되어 있는 등등의 미국 문화 구조 자체에 의해, 이 계급의 탄생 이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이 발달한 것은 역으로 봉건제의 유물로 점철된 특수한 사회역사적 배경에 의해 산업화가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다른 미국 노동계급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준거틀을 재구축해야 한다.

일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유민주주의건 문화적 개인주의건 또 다른 무엇이건) 모종의 목적에 의해서 혹은 상호작용하는 단순한 원인들(신분상승 지향성 더하기 민족문제 더하기 ....)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해서 미국 노동계급의 운명이 형성되어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가능한 설명변수들을 계급투쟁과 집단적인 실천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체화해내야 한다.

그러나 그 동안 이런 방법을 택해 왔던 맑스주의 고전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경험들이 이후 노동계급의 발전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구속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적 계급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일시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관점은 미국 노동계급이 겪은 일련의 역사적인 패배들이 갖는 누적적인 영향력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서유럽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얼마간은 노동자개혁주의의 중개하에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집단적이고 자생적인 제도들이 서유럽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정치활동의 하부구조를 마련해주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계급의 ‘전국적인 제도와 의미체계들이 없기 때문에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과 지역공동체 등은 극단적으로 파편화되고 계열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조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전후에 경제팽창의 물결이 일면서부터였다.(의회민주주의와 대량소비가 안정화된 시기) 그렇다면 이 두 지역간의 차이는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미국 노동계급을 통일시켜내지 못한 1930, 40년대 노동운동의 실패가 아니었나 하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1. 미국 민주주의의 역설


모든 유럽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선거권과 시민적 자유를 얻기 위해 오랜 투쟁을 해야 했다. 중산층의 나약함이나 노골적인 배반에 직면한 신생 노동계급운동들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동원을 통해 민주주의 투쟁을 수행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잔존하는 전자본제적인 계급구조나 사회구조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로크철학, 청교도주의, 농업자본주의와 같은 17세기 가장 선진적인 생산관계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들이 옮겨 심어졌다. 즉 미국에서 (백인남성의) 인민주권은 산업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 이전에 이미 생겨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틀이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에 굳건히 반대하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조차도 평민층 분자들의 폭력적․혁명적 민주주의와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대표들(대상인, 은행가, 대자본가, 토지소유자, 농장소유자 등)이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상층 지도부를 별 무리 없이 장악했다. 다른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들이 구체제의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어느 만큼은 평민적인 분파들과 같은 ‘대리자들’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소자본가 농민계급이 수적으로 압도적이었으며, 이들의 존재는 사적 소유의 신성함과 자본축적의 미덕을 찬미하는 명백히 부르조아적인 청치입장에 확고한 사회적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민주적’ 부르조아지의 존재 및 ‘구체제’의 부재라는 역사적 요인들이 이처럼 특수하게 결합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장인과 노동자가 스스로 자율적인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일은 훨씬 어려워졌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경제적인 환상과 정치적인 환상 때문이었다. 전자는 소생산, 소자산이 지배적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모든 사회계급간의 이동이 왕성했기에 일어났다. 그 결과 ‘생산자주의’ 이데올로기가 생겨나, 계급관계는 ‘생산자’ 대 ‘기생적인 금융세력’의 축을 따라 설정되고 모든 층의 노동자와 대부분의 자본가가 하나의 ‘산업’블록으로 뭉뚱그려졌다. 또한 후자는 미국만이 독특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무제한적으로 백인남성의 참정권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노동계급에게 미국사회의 예외성을 깊이 신봉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백인 노동자는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착취와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전복적인 측면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착취와 계급적 양극화의 심화 앞에서, 미국노동자의평등주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조직화와 전투적인 저항의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었다. 유럽의 공장주는 하층계급의 경외심과 문화적 예속 등 예로부터 내려온 양상을 번번이 활용할 수 있었으나, 미국의 산업가는 온정주의를 거부하고 동격으로 대접받기를 요구하는 ‘자유롭게 태어난’ 양키노동자를 다루어야 했다.

국가의 탄압이나 경기침체가 노동당들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면, 19세기 후반 혹은 20세기 초엽의 미국에도 이런 요소들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미국노동자는 폭넓은 참정권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정치 기구들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였는가?



2. 정치의식과 계급구성


사회적 노동과정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이는 데 따라 생겨난 계층화는 노동계급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민족적․종교적․인종적․성적 적대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19-20세기 초에 걸쳐 작업장에서 방어조직을 결성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이를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이에 비견할만한 움직임이 없었다. 1870-1932년 미국의 투표성향에서 실제로 민조적․종교적 균열이 계속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1) 노동계급과 남북전쟁


1830년대 중반부터, 큰 항구도시의 장인들은 자기네끼리 공제조합과 초보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그들의 독자적인 경제적 이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1937년 공황 때와 1857년 경기침체 때 사멸했으나, 이러한 영고성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태동하는 ‘노동자주의’가 전체적인 정치적 정세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고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잭슨 시대에는 대규모의 자본집중과 평등주의의 유지가 양립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근로계급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한 예로 잭슨 임기말에는 뉴욕의 ‘워키즈’가 민주당 내의 ‘로코포코’ 이반파로 부활하였다. 로코포코 노선이란 기존의 독자적인 노동자운동으 공식적인 당제도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양당으로 하여금 늘어나는 유권자집단인 ‘노동’ 쪽으로 극적인 방향전환을 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대규모의 실업사태와 선업노동자의 소요가 발생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노동자가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주체로 서지는 못했다. 노동계급의 노예제 반대 흐름이 결핍된 가운데, 노동자는 남부 흑인대중과 통일의 고리를 만들어내거나 자기 나름의 혁명적-민주주의적인 정치 전통을 창출해낼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세 가지 원심력이 작용하여 미국 산업혁명이 ‘도약점’에 도달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노동운동을 산산이 부숴뜨리고 만다.


① 산업도시 변경지대

당시 미국 서부의 신흥공업도시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워지다시피 했으며 산업화 이전의 전통이나 사회관계와는 거의 연속성이 없었다. 이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산업화에 대한 장인들의 저항에 깊은 뿌리를 두지 않고 일어나났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로 인해 지리적 이동이 집단적 행동을 대신하는 일이 매우 잦아졌듯, 미국의 노동자는 억압적인 근로조건에 손으로가 아니라 발로 (즉 다른데로 옮겨감으로써)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② 토박이주의와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분열

두 번째 원심력은 1840년대 유럽의 흉작 이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물밀 듯 쏟아져들어온 수백만의 가난한 노동자의 물결에 대한 토박이노동자들의 반발이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경쟁관계의 영향도 있지만, 깊은 문화적 반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핵심적인 역설은, 그것을 “가장 순수한 부르조아 문화”라고 부른 엥겔스도 옳았지만, “북미는 현저히 종교적인 국가”라고 한 맑스의 지적 또한 마찬가지로 옳다는 데 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대중문화와 노동계급 의식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미국혁명에서 나타난 영국의회에 대한 애국적인 반란은 ‘인간의 권리’를 완벽주의적인 개신교의 어휘로 번역해 낸 급진적 복음주의의 발흥에 의해 정당화 되었고, 북부 개신교도의 민족주의적 정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개신교가 큰 몫을 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1789년 혁명이 패배한 뒤끝에 생겨난 ‘신앙혁명’의 소산인 그들 특유의 가톨릭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왔다. 더욱이 아일랜드 이민의 대다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소농이 아니라, 식민지하 저개발상태의 살인적인 결과를 피해 도망온 소작농, 농업노동자, 계절적 인부 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주도한 미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데 가장 선봉에 섰다.

그러므로 북부 노동계급의 문화적 동질성을 깨뜨린 것은 그냥 이민이나 가톨릭 이민 자체가 아니라 1840년대 후반 이래 종교적 분열을 축으로 하여 조직되어 막대한 제도들과 운동들을 통해 작용하는 두 개의 담합주의적인 하위문화가 형성된 점이다. 미국의 노동자와 대부분의 서구 노동자의 사회적․문화적 세계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 다양성이 전국적인 규모로 하나의 민족적․문화적 축을 따라 집결하고 대치하는 방식에 있었다. 1850년대에 이런 문화적 균열은 정치적으로 재생산 되어 반가톨릭적이며 반이민적인 ‘아메리카당’이나 ‘노우나씽당’ 등이 형성에 기여했고, 이후 휘그당의 진영과 융합하여 새로운 공화당을 형성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노동’이라는 공화당의 투쟁구호는 노동자집단의 권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개인적인 지위 상승을 통해 임노동에서 벗어나려는 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반발하여 가톨릭 이민은 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을 자유방임적으로 관용하는 정책을 들고 나온 민주당으로 쏠렸다. 이에 따른 미국 노동계급의 정치적 분열은 뉴딜 전야까지 계속되어 계급의식의 발전에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③ 인종차별주의: 통일의 주제

이미 백인의 인종차별주의가 굳어져 있는데다 북부 노동시장에 흑인이 넘쳐날 것이라는 풍설까지 더해지자, 토박이노동자들은 대부분 흑인자유민의 사회적 평등과 참정권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이민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일부 독일계 노동자층은 노예제의 위기가 미국노동자의 앞날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혁명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붉은 48년대인들’은 미국 노동자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언어문제 때문에 게토화되었다. 결국 이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노동운동의 주류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아일랜드계의 경우 1840년대에 개리슨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가톨릭법안 철폐운동과 노예폐지론 사이에 연대를 구축하는 과감한 전략을 만들어냈다. 아일랜드의 ‘위대한 해방자’ 다니엘 오코넬은 이에 답해 “드넓은 대서양 너머로 내 목소리를 전하니, 그대 아일랜드인이여, 그런 나라에서 나오라,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노예제도를 묵인한다면 우리는 그대를 더 이상 아일랜드인이라 인정치 않으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이에 대해 분노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하나의 뚜렷한 계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 위대하고 영광스런 공화국의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예철폐 문제에 대해서든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우리를 시민이 아니니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건간에 비열하고 간악한 행위라 본다.”고 응수했다. 이들은 비단양말을 신은 부자도 증오했미만 흑인도 똑같이 증오했다. 이것은 흑인이 이미 대부분의 육체노동 범주에서 밀려난 상태인 것을 감안할 때, 경제적인 경쟁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똑같은 ‘시민’이라는 단합을 강조하는 정착민식민주의의 신조를 담합주의적인 하층계급 문화들(토박이-프로테스탄트 vs 이민-가톨릭)이 저마다 고유한 가치의 프리즘을 통해서 충실히 반영한 당시의 사회상황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던 것이다.


2) 노동계급과 인민주의


남북전쟁 후 계속된 산업호황으로 많은 이민노동자들은 미숙련직종에서 숙련부문으로 옮아가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불어온 혁명의 새 바람은 이민노동자들을 한층 급진적인 방향으로 정치화시키고 있었다. 전후세대 노동투쟁의 기본 조류는 작업장에서의 노동계급 단결의 증가와 좀더 효율적인 연대 및 노조조직 형태에 대한 모색이었다.

파업의 물결들이 일 때마다, 한층 넓고 포괄적인 전국적 노동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강화되었다. 아무리 숙련된 기능공이라도 고용주의 적의와 국가의 폭력 앞에서 조합조직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이 시기에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거대한 운동만이 강력한 연대와 상호원조의 틀을 구성하여 산하조합을 성장․존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대표적인 노동자 비밀결사였던 ‘노동기사단’은 순수 경제적인 조직을 넘어서 좀더 대안적인 프롤레타리아 시민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맹아적인 계급문화는 ‘순수․소박’한 노조경제주의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배적인 민족적․종교적 하위문화들에 대한 최초의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기사단을 열렬히 환영한 엥겔스는 기사단의 발흥이란 바로 미국 노동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되는 분명한 첫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차 반(反)굴드파업의 패배 및 헤이마켓 학살에 잇따른 탄압의 여파로 기사단의 어지러울 만큼 빠른 성장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기사단 몰락의 이유로는 1> 주요 노동자가 경제 전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노동자집단 특유의 힘을 절감한 자본가(ex: 철도자본가)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에. 2>노동지도층과 민주당 후원기구 사이에 공생관계가 강화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몽고메리는 영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이 시기에 계급의 식의 성숙과 노동당 창출에 “가장 효과적인 방해물”이 된 것은 바로 “미국노동자가 쉽게 공직에 선출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시사한 바도 있다.

그러나 기사단의 몰락으로 노동자 전투성의 물결이 끝났다고 보면 잘못이다. 한편으로 유진 뎁스가 이끄는 미국철도조합은 모든 철도노동자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려는 근질긴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노동총연맹(AFL)도 그 이후의 모습과는 달리 아직은 실리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의 보수적 단일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1893~96년 대공황 이후 발생한 풀먼회사에 대한 미국철도조합의 파업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파업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농본적 급진주의와 국제저적인 노동자 정치운동의 두 거대한 흐름이 유례없는 결합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1880년대 후반에 탄생한 농민동맹은 농촌인구 중 빈곤층에 뿌리박음으로써 흑백 소작농을 단결시키는 미증유의 과업을 달성함으로써 가늠하기 어려운 잠재력을 지닌 전복세력이 되었다. 더욱이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는 노조들, 기사단지역회의, 동맹 사이에 적극적인 협력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동자인민주의는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현하고 있던 새로운 노동계급 정당에 해당하는 미국의 토착적인 운동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주정부가 1894년 탄광파업을 진압하고 풀먼파업에 연방정부가 개입하자, 인민주의 운동은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인민당 주창자들을 승인했으며, 전국 차원의 인민당 건설 논의가 촉발되었다. 특히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로이드는 노동자인민주의를 “인민당을 미국의 ILP(Independent Labor Party)로 변혁하는 운동의 선봉”으로 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반면 AFL 내부에서 생겨나는 사회주의의 도전을 물리치고자 하는 곰퍼즈의 결심 또한 대단했다. 은본위제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재정자원을 등에 업은 중서부인들은 우선 인민주의 정강을 무제한적인 은화 발생이라는 단일 논제에 국한시키고 나아가 민주당의 은본위제 지지파와 통합하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끌어가고자 했다. 이는 노동자인민주의에 대해 혐오하고 있던 곰퍼즈의 생각과 일치했다.

곰퍼즈는 결국 다수의 평조합원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ILP정강을 부결시키도록 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사회주의자들은 ‘화학성분상 순수한’ 혁명강령만을 주창하는 고립된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런 요인 외에도 급진주의적 노조투사와 아직 대다수 미조직상태였던 도시 노동계급의 명백한 냉담이나 무관심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었다. 독자적인 노동자정치를 추구하는 운동은 시카고 및 북서부 지역을 제외한 다른 주요 도시․산업 중심지에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왜인가?

첫째, 남부의 자영농과 소작농의 단합된 봉기는 농민동맹과 흑백협동을 ‘짐 크로’(Jim Crow: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권리를 박탈한 극도의 흑인차별주의적 관행이나 이를 보장한 법률체계)와 지방노동자 선동으로 되받아친 지방 지배계급의 격렬한 역습에 의해 분쇄되었다. 둘째, 산업노동계급 안에서 토박이주의와 민족적․종교적 갈등이 재연되었다. 황량한 공황기인 90년대 중반에 토박이 및 ‘구’이민노동자들은 늘어가는 이민이 자신들에게 심각한 경쟁의 위협이 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게다가 1890년과 1892년 선거에서 아일랜드계 민주당원들이 거둔 정치적 성공은 반가톨릭주의를 부활시켰다. 이른 흐름은 노동자인민주의의 기반임에 틀림없는 산별노조들, 즉 광부 및 철도노동자의 단결까지도 와해시켰다. 셋째로 인민주의 운동 자체도 이민노동자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거나 ‘생산자계급들’이 점점 양극화되어가는 것을 막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때보다도 더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시기에, 토박이주의의 역습과 보통선거권에 대한 새로운 제한의 결과 미국 노동계급은 놀랄 만큼 선거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링컨의 연방주의에 입각해 구성된 기존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과학적 인종주의’에 입각한 ‘앵글로색슨 미국주의’라는 외국인 혐오적인 신조로 변형되고 있었다.


3) 뎁스 사회주의의 실패


① 분열된 노동의 세계

신이민층은 구이민과 마찬가지로 천연자원개발산업, 가사용역, 건설 등에 초과착취되는 노동집단을 조달하였다. 이들은 대개 참정권도 없고 빈곤이나 의도적인 차별로 말미암아 토박이노동계급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빈민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민족, 종교, 기술이 새로이 결합된 위계구조가 생겨났다.

한편 작업장 내에서도, 노동분업의 심각한 재편은 신이민의 효과를 중층결정하고 더욱 강화하였다. 공장경영주측은 직능공들의 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의 기술을 희석시키면서도 그들을 반숙련공의 지위로 ‘평준화’하는 것은 피하는 방향으로 주도면밀하게 공작을 펴나갔다. 바로 이러한 지위의 폭발적인 균질화를 막기 위하여 회사에서는 기죽은 숙련노동자들에게 도급제, 보너스, 저축제도, ‘이윤공유’ 등을 미끼로 내밀었다. 기업은 이제 쁘띠부르조아지와의 상징적인 동화를 고부하는 새로운 사회규범들 --특히 주택소유자라든가 애국단체회원이라는 ‘자부심’--을 조장했다.

이러한 노동계급 내의 신분제도는 노동계급 주거생활의 엄격한 격리와 파편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즉 미국에서는 주거에서의 계급적 격리현상의 증가에, 마침 확대되고 있던 민족적 분화가 겹쳤다. ①중산층 교외 ②토박이노동자나 일부 ‘구’이민이 거주하는 주택지대 ③새 프롤레타리아트 이민에게 잠자리를 빌려주는 북적거리는 하숙집, 셋집, 허름한 아파트 지대.


② 미국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

1909~13년은 국제노동운동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해로서, 미국에서도 격렬한 대중파업이 일어나고 새로운 미숙련노동자층이 계급투쟁에 돌입하였다. 이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가 지원을 가했다. 한편 AFL은 기술편차의 희석, 테일러주의 능률촉진 등에 의해 그들의 숙련기술이 평가절하되는 데 맞서 쓰라린 수세투쟁을 해나가야 했다.

그러나 1877~96년 시기의 파업물결과는 달리, 20세기초의 대중파업들은 토박이와 이민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1912년 미국 사회주의의 주된 두 경향 중 어느 것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거나 노조의 전략과 사회주의자의 도시 정치권 개입을 조화시키는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개량주의자는 산별 노조운동을 꾸릴 계획이 없었던 반면, 혁명주의자들은 숙련노동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AFL의 곰퍼즈 지배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의 사회주의는 민족과 언어로 분열된 사회주의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언어권에 따라 구성된 소수민족 사회주의들의 개별 조직들은 분산적이고 당권력으로부터도 떨어져나간 상태였지만 당지도부는 이것을 방치해두었다.

사회당은 이러한 당내 모순을 인식하거나 해명하는데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했는데, 뎁스만이 혼자 공통된 투쟁방향에 기초하여 계급의 내부단결을 이루지 못하는 한 사회주의는 미국 노동계급을 획득하기를 결코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생디칼리스트 좌파가 지지한 복수노조를 거부하고, 동부(UMW)와 서부(WFM)의 광부연합을 기반으로 하여 산별노조의 ‘중앙’을 건설하자는 약간 엉뚱한 선언을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대량 생산산업의 조직운동을 이끌어내고 곰퍼즈 노선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축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뎁스의 호소는 무시되었지만, 이후 1917년에 되살아난다. 피츠패트릭과 나클즈의 전투적 지도하에 시카고 ‘노농동맹’은 협소한 숙련공 중심의 구호를 버리고 정육포장 노동자들을 조직해 역사적 승리를 거둔다. 다음 해, AFL의 미온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이들은 가축사육장의 운동방식을 펜실베이니아 계곡의 철강지대와 시카고 남부의 공장지대에 도입하려 했다. 이 곳은 미국 오픈 숍의 전선이었으며 그것의 조직화가 곧 전 산업노동계급의 중대한 전략적 열쇠가 된다는 점은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중서부 공업주들에서 큐 클럭스 클랜(KKK)이 발흥한 것을 필두로 하여 토박이주의적인 반동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새’ 이민들은 민족공동체라는 은신처로 후퇴하고, 한때 막강했던 광산 노동자와 철도수리보수공조합들의 폐허 위에 오픈 숍을 주축으로 한 ‘미국적 방식’이 세워졌다.

1919~24년 미국 노동계가 겪은 패배의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났다. ‘미국적 방식’이 채택된 이 짧은 막간에 고용주는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권을 공격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새로운 형태의 기업 경영과 작업감독에 발맞추어 새로운 대량생산기술의 지전도 이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혁명과 전후 AFL의 패주로 말미암아 숙련공의식의 물적 지주 또한 약화되고 있었다. 대량생산이 ‘포드주의’로 통합됨으로써, CIO가 출현하고 산별노조운동이 부활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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