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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은 2010년 10월 경 북한 3대세습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경향신문의 논조에 대해 한형식씨의 논평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을 정리한 것. 예전 글들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어서 블로그에 저장용으로 옮겨 옴.
아래는 (한형식씨의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유창선씨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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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북한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그러지 않나. 당신들 이상한 것 아닌가.”
<조선일보>가 한 말이 아니다. 진보언론을 표방하는 <경향신문>이 민주노동당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이윽고 민주노동당에게는 북한의 3대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돌팔매질이 이어진다.
이 글은 ‘진보언론’이 만들어낸 이 해괴한 상황에 대한 관찰보고서이다. 먼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몇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가자.
첫째, 민주노동당은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한 바 없다. 입장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았을 뿐이다. <경향신문>이 문제삼고 있는 지난 달 29일 대변인 성명에서 북한의 후계구도와 관련된 부분은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할 것이다” 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주노동당의 판단이며 선택”이라고 부연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권력세습을 옹호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마타도어이다.
둘째,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절독을 선언한 것은 <경향>이 북을 비판해서가 아니라, 권력세습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민주노동당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경향>은 이와 관련된 기사의 제목을 “민노당 일각 ‘북 3대세습 비판’ 경향신문 절독 선언”이라고 달아버렸다. 엄청난 오해를 낳을 사실왜곡의 제목이었다. 역시 <조선일보>가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흔히 쓰던 방식이었다.
셋째. 필자에 관한 얘기이다. 나는 북한의 3대 세습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의 이런 개인적 입장표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해도 북한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북한은 내부결속을 위해 다시 대화의 창을 닫아버릴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이런 입장표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노동당을 옹호하려는 당신도 종북주의‘ 아니냐는 비판을 <경향>으로부터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실에 대해 참담함과 자괴감을 감출 수가 없다. 명색이 한 지식인이 ’진보언론‘으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상적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현실. 차라리 상대가 <조선일보>였을 때가 마음이 편했다.
나는 이번 <경향>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비판을 ‘진보판 색깔론’이라고 규정한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북주의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물론 정당은 주요 사안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과 입장을 밝힐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략적 고려 하에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을 권리도 갖고 있다. 더구나 그 전략적 고려가 당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향>은 그런 민주노동당을 강압하고 나섰다. 표현만 달랐지, 다들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안그러느냐, 당신들은 권력세습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식의 얘기였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수많은 독자들과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상적 돌팔매질을 당해야 했다. 주체만 <조선일보>가 <경향신문>으로 바뀐 것이었을 뿐, 행태의 속성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표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옹호한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빚은 일종의 폭력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한 거국적 비판이 그렇게까지 급선무였다면 차라리 청와대 대변인의 비판성명을 요구하는 것이 빠른 길 아니었을까.
결국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정당의 분열을 낳았던 소모적인 종북주의 논쟁을 재연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인터넷과 트위터 상에서는 이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재연되었고, 논쟁의 구도는 진보정당이 분열될 때의 종북주의 논쟁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당시의 소모적인 논쟁을 접고 2012년 정권교체를 위해 진보정당도 다시 통합의 길을 찾자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이 시기에, 그래서 두 진보정당이 통합해도 시원치않을 판에 <경향>은 왜 이런 문제를 들쑤셔놓았을까. 나는, 당사자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경향>의 생각이 짧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경향>은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의 앞길에 대해 하나는 생각했지만,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향>에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당장 비판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로 서울광장에서 ‘북한의 3대 세습 규탄 궐기대회’라도 열리고 거기에 진보정당들까지 손잡고 나서는 광경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 있었던 <경향>의 민주노동당 비판은 진보 안에서의 색깔 덧씌우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 북한의 권력세습에 대해 민주노동당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도, <경향>의 일련의 보도 이후 민주노동당이 그에 동조했다는 오해를 갖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제라도 <경향신문>이 사실왜곡의 기사제목을 단데 대해서는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강압한데 대해서는 (사과는 안하더라도) 스스로 성찰하는 과정을 갖기를 주문한다. 명색이 진보 내부에서 색깔 덧씌우기가 활보하는 것을 두고 보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후기>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만 더 밝혀두자. 나는 민주노동당 지지자가 아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노선과는 거리가 있는 그냥 중도개혁론자 정도이다. 다만 우리 사회가 다원적 가치과 사고, 그리고 판단을 보장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구차하게 이런 사족을 달아햐 하는 것이 참 싫다. 그래서 색깔 덧씌우기는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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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나의 의견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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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재밌게 읽은 독자입니다. 책을 읽고 유익한 점을 많이 느꼈던 독자로서 드리는 의견이라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역사 강의>가 세간에 주목을 받은 주요 요인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 때문인 듯 한데(언론에 소개된 서평들에서 대부분 이 점을 장점이라고 지적하더군요), 저도 일견 필요한 접근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현실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권력' 북한에 대한 '정치적 판단' 지점에 까지 끌어오는 저자분의 입장은 참 거시기 하네요... ㅠ.ㅠ
지난번 레디앙에 실린 민경우씨의 서평을 보고 저는 그의 입장이 책의 내용을 악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의 입장이 저자분의 입장과 부합한다는 사실을 이 홈페이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리 그런 '내재적 접근법'을 용인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그런 접근을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압박, 지정학적 요인 등 현실의 북한을 제약하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옳은 정치적 선택을 했어야 할 책임이 북한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을 북한에게 요구하는 것도 과도한 것일까요?
민노당은 자신들의 '침묵'의 이유로 정보의 제약으로 인해 3대세습을 있는 그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3대세습의 정치적 올바름은 언제쯤에서야 판단내릴 수 있을까요? 북한이 망하고 나서? 사회주의 조국방위, 또는 약소국의 현실적 지위 등을 핑계로 이런 문제들을 덮어두기만 한다면 진보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고를 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오로지 '미국 책임'만을 부르짖는 지적 무능력의 알리바이만을 제공할 뿐입니다.
어제 책을 다시 보니 저자께서는 서구 맑스주의자들이 소련에 대한 반감을 모티브로 갖는 것은 냉전의식의 유산이라고 하신 부분이 눈에 띄던데, 최근의 북한논쟁을 접하고 나서 이 부분을 보니 참 머리가 띵해 오더군요. 저자의 우려가 뭔지는 알겠으나 좀 심하게 오버하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맑스주의 역사 속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사회주의 본국' 소련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과 교조화 아닌가요? 그 교조화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감정적인 반감도 섞여 있을 수 있으나, 이걸 무턱대고 유럽중심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이라고 규정짓는 것은 과도한 일반화이며, 좌파 이론의 쇄신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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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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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경우씨의 서평과 이에 대한 저자의 코멘트를 보고 제가 얼마전에 메모식으로 적었던 글이 있어서 올려볼까 합니다. 이것 또한 독자 한사람의 의견 정도로 생각하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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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이 사회에서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중에 과연 얼마나 포기할 용기가 있는지를 먼저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 이런 발언에 대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특권을 포기하고 사십니까'라는, 동일한 방식의 도덕주의적 질문을 돌려주는 것은 일단 제껴두자. 그것보다는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이 <윤리21>의 "비전향 공산당원의 '정치적 책임'"이라는 글에서 주장한 바를 환기시키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볼까 한다.
전후 일본에서 공산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도덕적 우위를 점하는 집단이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원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비전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식이 생겼다. 하지만 고진은 당시 문학계 논쟁을 인용하며 이런 도식 자체를 부정한다.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사실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공산당의 비전향이라는 것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은"것이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 따르면 자신을 포함해 "당시 대학생 대부분은 대동아공영권을 믿은 파시스트"였는데, 사실상 공산당의 현실인식은 이런 보편화된 인식을 깰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몰랐다, 속았다 등으로 변명할 수 있겠지만,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감옥가서 겪는 고통을 감수하는 등의 '도덕적 책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민주화된 한국에서 현실 운동에 크게 개입하지는 않되 관념적으로는 과격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몽상적인 교수들을 감옥에 보낼 이유는 별로 없다.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사회주의를 외치는 교수들은 버젓이 교직을 유지하면서도 범민련이나 한총련 등 자주파와 ‘다함께’가 감옥을 메웠던 이유이다."(민경우씨의 서평 中)
민경우씨가 이런 발언을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많은 대학생들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하고, 이들을 지지하던 대중들도 점차 등을 돌리던 시기에, 민경우씨를 포함한 자주파들은 얼마나 자신의 '인식하는 책임'을 다했는가? 여전히 북의 변혁가능성에만 기대어 남한의 사정을 판단하는 비주체적 몰인식을 보여오지 않았나? 그래서 나는 공안기관의 가혹성과는 별개로, 그들의 몰인식이 탄압을 자초한 면이 아주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냉전이 사라진 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남한 국가기구는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통제할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민중운동의 중심축들이 개구리 뒷다리 긁는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국가는 이들을 대중 앞에서 신나게 난타질했고 그게 또 대중에게 먹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의 사상적 순결성만을 강조하던 자주파를 상종못할 괴물로 보는 것은 그리 정당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전혀 이해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좌파들이 강단에서 확보한 시민권에 만족해 안위를 누리는 동안 범민련 한총련등이 감옥을 채웠다는 말도 내가 보기엔 도덕적 자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강단 맑스주의자들이 누군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있다 하더라도 소수에 불과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주파들이 전혀 관심갖지 않는 현장에서 싸우다 고통을 받은 좌파들이 숱하게 깔렸다. 하다못해 작년 용산참사투쟁으로 옥고를 치른 박래군, 이종회는 자주파인가 다함께인가? 요즘 기륭, 재능 등 장투사업장 투쟁에 연대했다는 이유로 세번째 소환장을 받았다는 송경동 시인은?
민경우씨는 아무래도 (<맑스주의 역사 강의>에 실린 스탈린주의의 진실에 대한 역사적 해명을 빌어) 민족해방노선에 대한 악마화에 대한 반론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되려 자기 무의식중에 잠재하던 자주파 스스로에 대한 도덕적 신비화로 빠져든 것 같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 재밌게 읽었던 <맑스주의 역사 강의>의 저자 한형식도 이에 대해 전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용산참사4주기]
용산, 그리고 삶의 뿌리가 흔들리는 이 나라 곳곳의 상처들을 기억하며.
비가 오면은 창문 밖을 두드리는 / 물소리가 음악이 되고 / 밤이 되면은 골목 수놓은 가로등이 / 별빛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지만 이 집은 이제 허물어져 / 누구도 이사 올 수가 없네 / 마음속에 모아 놓은 많은 이야기들을 / 나는 누구에게 전해야 하나
나는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나누고 / 수많은 고민들로 힘들어도 하다가 / 결국 또 웃으며 다시 꿈을 꾸었네 / 여기 조그만 옥탑방에서
좋아서하는밴드, “옥탑방에서”
집. 그것이 곧 나다. 나의 역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들어와 베개 위에 머리를 눕히고 하루의 고단함도 함께 내려놓을 때, 그 마음을 ‘내 집’만이 안다. 그것이 아무리 누추하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그곳은 결코 쉽사리 지워져서는 안 될, 우리 삶의 마지노선이다. 오직 그 곳에서만 가난한 우리의 고민과 웃음 그리고 눈물의 기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으니. ‘돈’이라는 반질반질하고 네모 각진 권력을 갖지 못한 우리들에겐, 작은 방 한 칸에 새겨진 울퉁불퉁한 기억들이 삶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니.
철거. 아마도 그것은 벽돌과 시멘트로 쌓아올려진 구조물을 허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어머니가 창가에 놓아두며 매일 정성껏 길러왔던 화분이 사라진다는 것, 어느 날 가족들과 여행에서 다정하게 찍어 벽에 걸어둔 사진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또 이와 같이 다른 무엇으로 대체 불가능한 삶의 흔적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그 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삶은 다른 어딘가에서 또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살던 이 곳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 때를 추억할 돌멩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영문 모를 콘크리트 더미만 쌓아올려져 있다면, 나의 과거가 허리가 끊어진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말 것이다.
얼마 전 사당동 판자촌 지역 주민 연구를 다룬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판자촌이 철거된 이후에 이들이 서울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온 20년이 넘는 세월을 한 권의 책에 빼곡히 담았다. 그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된 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삶에 대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속에서 1년 전 또는 10년 전의 삶을 떠올리고, 이를 통해 자기 삶을 반추하며 미래를 계획하는 삶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철거가 반인권적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나에게 이 물음이 던져진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삶의 뿌리를, 사정없이 흔들고 결국 끊어놓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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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학기 나는 노들에서 한소리반 사회수업을 맡았다. 어찌어찌 마지막 수업까지 오게 되었을 때, 무슨 내용으로 수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4주기를 맞는 용산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용산 뿐만 아니라 이 나라 곳곳에서 자기 역사와 삶의 뿌리들이 끊어져 신음하고 있는 곳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정부가 국민들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쫓는 아이러니의 현장들. 용산, 두리반, 그리고 강정마을.
용산. 그곳은 콘크리트 더미를 쌓아올려 빌딩숲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살던 터전을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비록 철거 이후 자금 조달이 어려워 재개발은커녕 겨우 주차장으로 쓰일지라도, 네모 각진 화폐의 권력으로 쓰일 일이 없는 낡고 허름하고 삐쭉삐쭉한 가옥들은 대걸레로 복도를 쓸어내듯이 내동댕이 쳐졌다.
두리반. 그곳은 한 가족의 소박한 생존을 위해 파 놓은 작은 우물이었다. 그런데 이 작은 우물을, 고작 이 칼국수 가게 하나를, 수천 수만개의 우물을 가진 대형 건설사가 차지하겠다고 벌린 탐욕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강정마을. 물이 귀한 제주 땅에서 유일하게 깨끗하고 풍부한 물을 가진 강정천이 있는 곳. 천혜의 희귀 생물들과 수천 수만년을 이어온 구럼비 바위가 있는 곳. 이 마을을 지켜온 강동균 마을회장은 구럼비 바위를 엄마의 품과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엄마 품과 같은 이 곳에서 정부는 화약을 터뜨리고 있다. 마치 지구와 전쟁이라고 할 듯이.
내가 마지막 수업 준비를 위해 돌이켜 본 이 세 곳 중에서, 두리반만이 투쟁에서 승리해서 온전한 자기 터전을 찾았고, 용산과 강정마을은 아직도 아파하고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구속되었으며, 벌금 탄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수업을 준비하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답답했다. 이 투쟁에 늘 함께하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나조차도 마음이 지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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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정도로 유약했다.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암담한 투쟁의 기록들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니.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용산참사 당시 구속자들이 특별사면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기분이 찝찝한 사면이었다. 이명박 측근 비리 인사들의 특별사면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용인 것이다. 치사하고 더러운, 그러나 어쨌든 사면이니 받지 않을 수 없는. 나는 쏟아지는 기사들을 무심하게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특별사면으로 나오신 이충연씨의 인터뷰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들이 권력으로 나를 석방했지만 나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살육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결국엔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사람. 그 때문에 누구보다 힘들고 신음했을 법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이런 사자후와 같은 일갈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일성은 마치, 저들이 여름날 밤을 귀찮게 하는 모기에게 살충제를 뿌리듯 우리 철거민을 모욕하고 모든 것을 빼앗는데도, 절대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용서의 자격.
권력자들이 보기에 모기보다 못한 목숨 따위가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감히 “용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들은 이 말이 가소롭게 들렸겠지만, 동료‘모기’의 한 명으로서 나는 큰 위안을 받았다. 저들이 아무리 우리의 삶을 짓밟아도 결국엔 우리의 용서를 ‘받아야’하는 자들이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무너져 내리더라도 이와 같은 ‘도덕적 긍지’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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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봄이 다가오지만, 삶의 뿌리를 위협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한겨울이다. ‘끝내 승리하리라’라고 장담하듯 응원하는 말을 하기엔 용기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한마디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긍지를 잃지 말자고. 자신을 버리지 말자고. 우리가 몸을 누이는 집이 비록 초라해도, 그 안에서 새긴 당신들의 삶의 역사는 매 순간 남김없이 감동이라고. 말이다.
마우스랜드에서 통치자를 뽑았다. 1위는 생쥐가 아니라 검은 고양이었다. 생쥐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졌다고 믿은 탓이다.
고양이는 쥐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쥐구멍은 고양이 발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한다.’거나 ‘생쥐는 너무 빨리 달려서는 안 된다.’는 등등. 참을 수 없었던 생쥐들이 투표장으로 몰려갔다. 이번엔 흰 고양이가 당선됐다. 그래도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흰털에 검은 반점이 있는 고양이로 갈아치웠지만 고양이에게 잡아먹히는 신세는 똑 같았다. 한 생쥐가 말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고양이들을 뽑는 거야?”
당연한 질문에 다른 생쥐들이 즉각 반응했다. “빨갱이다. 감옥에 잡아넣어라!”
페이스북에 쓴 글. 수유너머R에서 진행한 함석헌 선생 사상에 대한 강의 (김경재 교수)
어제 함석헌 씨알사상 강의 곱씹기.
강의 막판쯤에 나는 "왜 함석헌에게 주체성의 형성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수동적으로 당함, 또는 고통을 통해서만 가능한가. 왜 기쁨의 계기는 찾을 수 없는가."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김경재 교수님의 답변을 듣고 한참 곱씹어보니, 내 질문이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질때부터 시작은 고통이었다. 어두운 자궁에서 빛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질 때, 어떤 아기라도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니의 사랑은 그 울음이 잦아들고 아기에게 고요한 잠이 찾아올 때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태초의 관계맺음도 수동적으로 당하여지는 고통에 관계된다.
누구라도 자신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 앞에서 성숙해져야만 기쁨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함께 울 수 있어야 공동의 기쁨에 참여 할 수 있다.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ㅋ
페이스북에 쓴 글. - 201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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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모르나이다"라는 경구가 떠오르는군요. 저 역시 '북조선 비판' 담론이 전적으로 '국내용'이라는 걸 안다면 좌파가 함부로 거기에 동참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관념' 속에서만 좌파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말이죠.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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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당신은 북 인민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길래. 그래서 북 인민들은 훨씬 더 어려운 조건에서 인간답게 제 할바 최선 다해 살면서 자기 이웃이나 밀고해서 요덕수용소 보내고 쳐 앉았답니까?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그런 훌륭한 지성과 명석한 인식을 저 썩어빠진 남조선 입진보 인텔리들 계몽하는데 낭비할게 아니라 저기 어디 개마고원에라도 숨어들어가서 반김 무장게릴라 투쟁이라도 벌여서 북 인민의 주체적 해방의 밑거름이라도 되시던가. 왜 엉뚱한데서 정력을 낭비하고 계신지?그리고 정말 '국내용' 담론일 뿐이라면 북 눈치볼거 뭐있나요? 어차피 '국내용'일 뿐이라는 것을 북은 대번에 알아차리고 우리의 진심과 충정을 이해해 줄 것인데. 당사자들에게는 무례한 표현이 될 지 모르겠지만 당시 민주노동당의 생각짧음을 탓할 수 밖에 없네요.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의 앞길에 대해 둘은 생각했지만, 하나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을 절대 자극해서는 안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던 것이네요. 잘못된거 잘못되었다고 하는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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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같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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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해하실까봐, 당시 경향의 색깔론이 잘못되었고 미운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다고 인민뽕에 취해서 훈계질 하는건 꼴사나워서 못봐주겠네요.부가 정보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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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공산주의가 현실적 반공주의로 표현되는 법이지요.부가 정보
한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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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식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찾으려 구글링을 하다가 이 글 보았습니다. 위의 글은 제가 쓴게 아니고 유창선씨 글을 퍼온 것입니다. 님이 처음 댓글을 작성하셨던 새움 홈페이지에 분명 그렇게 올려놓았는데 갑자기 제가 쓴글이라니 당황스럽네요. 인터넷은 쉽게 진의가 왜곡될 수 있는 공간이니만큼 바로잡아주세요.부가 정보
구르는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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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가 글을 정리하는 와중에 좀 착오가 있었나 보네요. 정정하도록 하겠습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