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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세미나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 (2013.04.25)

토요일날 야학 교사들과 <프레이리의 교사론>을 읽고 세미나 하기로 해서, 아직 집에 안가고 남아서 요러고 있다.

그리고 오늘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열린 <시민제작 일상학습>이라는 심포지엄에 다녀왔다. 방통대 교육학과 정민승 교수의 기조발제가 있었고, 몇몇 지역의 우수한(!!) 평생학습 사례들이 발표되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민승 교수의 발제문은 매우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이었고, 발표된 사례들도 귀가 솔깃해지는 것들이긴 했지만, 뭔가 떫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민승 교수 발제문의 주제는 <교육의 경계를 허무는 시민의 힘>이다. 제도화된 교육이 '경계'를 확정하고 교수자와 학습자의 위계라는 형식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라면, 사회운동 또는 '학습운동'으로서의 교육은 그 경계에 구멍을 내는 것, 그래서 교...수자와 학습자간의 위계를 평등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 교수는 지금까지 사회운동에서의 교육도 사실상 (프레이리 식으로 말하면) '변혁'이라는 내용을 예금하는 은행저금식 교육이라고 비판한다. 즉, 학습자 또는 민중을 지속적으로 '무지한 자'로 재생산하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며 랑시에르를 인용한 것부터, 그리고 필리핀 민중교육 교본에 나오는 '우물안의 3마리 개구리'이야기까지 너무나 완벽한 논리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사례발표들은... 솔직히 너무 훌륭한 사업들을 하셨고 멋지기까지 한데, 나는 도저히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서울로 올라와버렸다. 활발한 주민참여, 지식 공유...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파주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시도했다는 '똑똑도서관'이라는 곳의 사례를 보면, 왜 여기 참여자들은 다 '전업'주부들일까? 남편들은 다 어디갔나? (똑똑도서관의 관장은 30대 중반의 남성) 또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진행된 수업은, 리본 만들기, 요리수업, 데일리드로잉... 이런 것들이다. 이런 교육이 (여성적 이미지가 부여되기 때문에) 수준이 낮다거나 그런 얘기는 아니지만, 뭔가 '학습자의 자율성'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에 갇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얼마 전 이계삼 선생님이 쓰신 글을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문화학자 엄기호는 언젠가부터 (교육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유행이 되기 시작한 '자기주도학습'의 끝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라고 지적했다 한다. 선험적으로 가정된 학습자의 주체성은, 학습자 개인이 주체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며칠이고 인터넷을 붙잡고 있게 만들것이고, 결국 고립된 자신의 지식 자본에 갇혀 히키코모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몇몇 사례에서는 주민 간의 지식 공유 사례들을 보여줬지만, 그 지식이 '공유'되기 이전에 어떻게 '생산'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이리의 교사론>의 발문을 쓴 도날도 마세도의 이런 지적이 눈에 띈다. "(한 자유주의자 백인 교수는) 그 위원회에 지역민들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지역사회가 가진 지식 기반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곧 낭만적인 온정주의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 지역민들이 대학 교수들보다 많이 알고 있으므로, 교수들이 지역민들을 가르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민들이 교수를 가르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 입장은 교수들이 상당한 혜택을 누렸던 문화자본을 지역민들은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권한부여에 대학의 문화자본이 꼭 필요한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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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은 이렇게 장황하게 했지만... 그래서 내가 뭘 어쩌겠다는 건가. 며칠 전 내가 야학에서 맡은 과학수업을 마치고 나서 나는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분들은 수업 시작하자마자 2분도 안되어 하품하고 있고, 나는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교과 보조용으로 보는 만화책으로 수업하면서, 그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수소는 H고, 산소는 O고, 질소는 N이고... 뭐 이딴 걸 칠판에 적고 있었다. 김상봉 선생이 쓴 <세 학교 이야기>를 보니까 80년대 야학인 까르딘학교에서는 기계적인 교과교육이 되기 쉬운 과학과 지리는 아예 없애버렸다는데, 우리 야학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특수교육법에서 정한 '학교형태의 평생교육시설'이어서 안되겠지?ㅠ.ㅠ)

나도 자기주도학습으로 수업 진행해 보고 싶다. 그런데, 달랑 두 세 문단 밖에 안되는 짧은 글도 혼자 읽고 이해하는 것도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주도학습'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랑시에르가 소개한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 실험(불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불어로 된 책 읽히기)을 과연 일반화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과연 '설명하는 일'을 중지하고 지능의 평등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능의 평등성'이라는 명제 위에서 오로지 교육자의 '의지'에 학습자를 연결시킴으로써 학습자의 지능을 작동케 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뭐 공부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었을 때, 애*누나가 "그냥 선생님 하고 싶은거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일단 그것부터라도...

엉. 이게 다 뭔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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