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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7/18
    예비장애인?(2)
    구르는돌
  2. 2012/07/18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구르는돌
  3. 2012/07/18
    "우리는 모두 예비장애인이다"!???
    구르는돌
  4. 2011/06/12
    낙태에 대한 생각
    구르는돌
  5. 2011/05/30
    반값 등록금...
    구르는돌
  6. 2011/05/13
    '우리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구르는돌
  7. 2011/04/03
    '나는 가수다'와 전문가주의.
    구르는돌
  8. 2011/03/23
    장애문제는 백분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2)
    구르는돌
  9. 2011/03/22
    갑자기 스쳐간 고민에 대한 갑작스런 메모.
    구르는돌
  10. 2011/02/17
    안녕 현배려.
    구르는돌

예비장애인?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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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판에 큰 집회가 있을 때에는 여러 높으신 분들이 오셔서 발언을 한다. 그 때마다 내가 의도치 않게 발언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한 사람,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 예전에 노동절 집회에서 '반신불수 정권' 발언으로 공개적으로 사과까지 한 후에, 규모가 작은 장애인 집회에서도 발언섭외가 오면 항상 애써서 발언하는 것 같아 그래도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했지만, 사실 항상 거슬리는 단어를 듣게되서 고민하던 차에 몇 마디 적어본다.

예비장애인. 김영훈 위원장은 꼭 이런 표현을 쓴다. 노동자들 집회할 때, 우리는 모두 예비 비정규직이다, 뭐 이런 표현을 즐겨 쓰니까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 같지만, 사실 '예비장애인'과 '예비비정규직' 또는 '예비 노동자'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예비 비정규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비정규직'과 같은 어떤 위험한 상태에 비정규직이 아닌 사람들도 내몰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같은 방식으로 '예비 장애인'이라는 말도 장애인이라는 단어에 위험하고 불안하고 삶의 벼랑끝으로 내몰린 상태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예비 장애인'이라면, 장애인이 되지 않도록 예방대책을 잘 세우면, 그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장애인이 왜 장애인이 되었는지, 그를 장애라고 명명된 감옥으로 밀어넣은 사회적 폭력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비정규직 철폐'라고 말할 때, 그 대안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할 수는 있지만, '장애인 차별 철폐'를 말하면서 장애인의 비장애인화를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것이 바로 재활 패러다임이고, 우리의 장애인운동은 이 재활 패러다임을 넘어서자고 주구장창 얘기해 왔던 것 아닌가?

예전 페북 글에도 쓴 적이 있는 얘긴데, 쌍용차 노동자와 용산 구속자들의 DNA를 채취하려한 정부의 시도는 정확히 지금 이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와 일치한다. 정리해고와 강제철거에 저항한 사람들을 유전적 질환자로 대하려는 태도, 이것은 장애가 의학적 기준이 아니라 정확히 사회적 기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장애학의 가장 중요한 명제를 떠오르게 한다.

내가 김영훈 위원장님과 페북 친구가 아니어서 전할 방도는 없지만... 혹시나 어쩌다 이 글을 보신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예비 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지금 이 땅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배제된 자들'이라는 동질성으로 함께하자고. 그것만으로도 연대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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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페이스북에 쓴 글. 2011.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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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원군에 있는 사회복지시설 꽃동네의 표어는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 주님의 은총을 모욕하는 발언을 지하철 방송을 통해 듣게 되었다. "지하철 내에서는 구걸행위가 금지되어 있습니다. 구걸행위를 하고 계신분은 빨리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다는 오웅진 신부님이 이 방송을 들으셨다면 어떤 반응이셨을까? 당신이 빌어먹을 힘이라도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고 시설 생활인에게 굴종을 강요할 때, 이 사회는 구걸행위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눈 앞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2AM이 아무리 서울메트로 찬양송을 불러대도, 어쩔 수 없이 서울메트로는 가난한 자들이 설 땅을 빼앗아 달리는 지옥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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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예비장애인이다"!???

페이스북에 썼던 글. 2011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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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20결의대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발언의 요지는 "이 정부는 멀쩡한 사람도 장애인 만들고 있다", "우리는 모두 예비 장애인이다"로 요약됨. 이 말을 듣고 예전에 적어두었던 문구가 생각났다.

 

“장애를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장애인을 결핍된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는 자나 장애인을 동정하는 자나 차이가 없다. 차별하는 자와 동정하는 자는 그 이유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이다. 장애인들은 의학적․공학적․정치적 기술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것은 어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자유롭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부커진 R - 소수성의 정치학』, "박경석과 고병권의 대담“ 中

 

참고로 내가 장애인운동에 함께하는 이유는 내가 '예비장애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적 다양성과 속도를 받아들이게끔 이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어떤 운동도 말짱 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선 어떤 대안적인 사회에서는 적어도 신체적인 기능의 일정한 결함이 불행의 표지여서는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비 장애인'인 것이 아니라 장애-비장애의 구분을 가로지른 새로운 공간 속에 스스로를 위치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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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대한 생각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을 읽으면서 낙태 문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페미니즘의 ‘은혜’를 입은 내 운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낙태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익근무를 할 당시 읽었던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의 『에코 페미니즘』(특히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을 읽으면서 낙태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시바와 미스는 생태주의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낙태찬성’을 넘어서 다양한 ‘기술적 대안’(예를 들면 대리모와 같은)을 이용해 성적 접촉 없이 자녀를 만들 가능성을 옹호하는 이른바 ‘생식선택권’ 그룹의 관점을 비판한다. ‘생식선택권’ 그룹들은 여성이 자기 신체의 ‘소유주’라고 보면서, 자기 신체를 ‘사고 파는’ 것이 가능해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시바와 미스는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는데, 그렇게 분해되고 나면 사고 파는 주체는 도대체 누구냐고 반문한다. 여성의 신체는 여성이 주인이라는 미명하에 여성의 신체를 조각조각 나뉘어진 ‘자본’으로 이해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여성 주체’를 제거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시바와 미스는 또한 이러한 접근법이 결과적으로 태아도 하나의 자본으로 보아 소위 ‘결함있는 태아’에 대한 제거를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있다.)

 

페미니즘의 입장에서는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내세워 낙태를 인정하자는 입장이지만,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 태아를 제거하는 논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야성의 사랑학 162쪽

 

 

 

생명 어쩌구 하면서 낙태 반대를 외치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 주장의 논리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그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여야 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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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썼음.

 

 

 

요즘 목수정의 [야성의 사랑학]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낙태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루 종일 좀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오갔지만, 어쨌든 결론은... 낙태를 반대한다는 사람들(특히 진보의 이름으로)이 자기들 논리의 정당성을 최소한이라도 확보하려면 그들 스스로가 최소한 '채식주의자'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들 말대로 '프로라이프', 즉 생명이 우선이기에 낙태를 인정할 수 없다면 지구 생명의 근본적인 토대를 부수는 육식주의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서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은 '생명우선'을 빌미로 (원하지 않는) 임신에 따른 사회적 부담과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려는 매우 야비한 가부장제의 술책이라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시도하는 저출산 극복 정책은 일찍이 1960~70년대를 풍미한 루마니아의 전설적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도했던 그것과도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부국강병을 위해 인구를 늘려야겠다는 결론을 얻고, 모든 여자들에게 아이 5명을 낳을 것과 피임과 낙태를 금지할 것을 명했다. 그 결과 전국의 고아원들은 곧 아이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보모 한 명당 80명의 아이들을 돌봐야 했고, 밤에는 120명의 아이들을 한 보모가 돌봐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돌본다는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아이를 '사육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그 어떤 종류의 따뜻한 스킨십도 받지 못하고 목숨만 부지하며 자랐다. 70년대 들어 이 아이들이 대거 서유럽과 북미로 입양되었는데, 입양된 아이들에게서 한결같이 자폐증 혹은 유사 자폐증 증상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야성의 사랑학], 161-2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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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 등록금...

 

한나라당이 반값 등록금을 한댄다. 시민사회진영은 미심쩍지만 일단 환영을 한댄다. 오, 그러나 이게 솜씨 좋은 낚시꾼의 밑밥이면 어쩌려구!? 신문을 봐라. 보수 언론에서 맨날 때려대는 얘기가 뭐냐? 국민세금으로 부실대학에 돈 퍼준다고 난리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맞는말 아닌가?

며칠전에 지하철 타고 가는데 옆 사람이 보고 있던 중앙일보를 힐끗 봤다. "이대 757억, 홍대 752억" 대학들이 적립금을 이렇게 남겨먹는데, 세금으로 등록금 대주는게 옳은거냐고 핏대를 올린다. 이거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한 3년 전쯤에는 등록금투쟁하는 학생운동단체 자료집에나 나올법한 내용이다. 근데 이런 내용이 보수언론에 실린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반값 등록금을 말하기 전에 부실대학 구조조정부터 해야 된다"는 거다. 국가가 학벌경쟁을 부추겨서 우후죽순처럼 생긴 부실대학을 반값등록금 때문에 청소해야 한댄다. 이말은 즉슨, 쉽게말하면 일류대학 중심으로 재정지원 해야 된다는 얘기 아닌가? 이런 공격에 대한 진보진영의 대응은 얼마나 옹색한가? 프레시안 기사인가를 보니까 한다는 소리가 "대학 구조조정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으로 시작한다. 이건 완전 놀아나도 제대로, 아주 댄스를 추고 계신다.

반값 등록금, (아니지... 한나라당 표현대로라면 장학금!!!) 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그런 정책이 지금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도 4년제 산업대나 전문대 등에서는 산업체랑 계약 맺어서 등록금 50%로 퉁치는 곳은 많이 있다. 그런데 이게 완전 노예 계약이라는 거다. 이런 계약학과 다니는 중에 회사에서 짤리거나 사표내면 학교에서도 바로 짤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하자면 반값 등록금이 아니라 무상 교육도 얼마든지 하고 남는다.

반값 등록금, 이게 민생정책이면 히틀러도 휴머니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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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로 '우리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문제라면, 사고를 예방해서 그럴 확률을 줄이면 되는 것이다(불조심, 차조심, 건강조심 등등). 이것은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인데, 그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장애인운동에 대한 연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과도한 결론이다. 또한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비슷한 심리일텐데, 그 중 뱃속의 태아가 '기형아'일 수 있다는 우려는 많은 경우 '낙태'로 이어져 사실상 장애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의도와는 다르게 장애인운동의 존재가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권력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얼마든지 우리의 신체가 장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가 배제와 억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얼마 전 경찰인가 검찰인가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DNA를 채취하겠다고 한 사태를 보자. 이들은 '해고자'라는 낙인을 무슨 유전적 질병으로 취급 하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만드는 무수한 턱들, 속도들, 노동의 장벽들 때문에 장애인이 수용시설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자체가 아니라 그 신체를 분류하는 권력의 기준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든지 그 권력에 의해서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날것의 삶',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그 권력의 기준을 갈갈이 찢어내 버려야만 온전한 '연대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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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와 전문가주의.

'나는 가수다' 전편을 어제 몰아서 봤다. 하도 여기저기서 말도 많고 하길래 일단 내 눈으로 확인하고 끼어들 겸 해서... 1회는 예전에 보긴 했는데, 매니저로 나온 개그맨들이 계속 호들갑 떨어대는 것도 보기 싫고, 왠지 가수들끼리 서로 자화자찬 하는 분위기도 맘에 안들고 해서 볼 생각을 접었는데... 노래 하나는 끝내준다는 소문에 귀가 간지러워서 저녁내내 다 보고 말았다.

 

밥먹고, 씻고, 설거지 하고 어쩌구 하는 시간 다 포함해서 5시간을 이거 보는데 투자한 것 같은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안들었던 걸 생각하면 노래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우선 이소라, 김범수는 어떤 노래를 부르던 입이 쩍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백지영은 너무 대중적이고 유행타는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라 가창력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웬걸 “백지영이 원래 노래를 이렇게 잘 불렀나” 싶을 정도로 훌륭했다. 음악의 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공중파에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문제는 이것이 전적으로 가수들의 실력이 이뤄낸 성과라는 점이고, 제작진이 이렇게 훌륭한 뮤지션들을 모아놓고 겨우 ‘서바이벌’이라는 저질스런 컨셉밖에 생각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이 서바이벌이 실제 탈락자 1인을 향해 화살을 날렸을 때, 제작진이 보인 엉성함이란... 이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찧고 까불고 있는 중이니 나까지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다.

 

나를 제일 어이없게 한 것은 김건모가 떨어지고 나서 한 발언이었다. 김건모는 자기가 떨어진 이유가 ‘립스틱 퍼포먼스’ 때문이라고 계속 중얼거렸다. 재도전을 제안한 김제동도 그 발언에 사실상 동의하며 ‘음악 외적인 부분’ 때문에 7위를 한 것이니 재도전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이 너무 쉽게 무시한 것은 김건모가 7위라는 판정을 내린 것은 김건모 자신도 아니고 김제동도 아니고 500명의 일반인 평가단이었다는 사실이다. 왜 김건모는 자신이 ‘음악’ 때문에 7위를 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일까? 왜 500명의 ‘일반인’들이 그의 음악성을 가지고 7위를 줬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일까? 누가 그에게 그렇게 오만할 권리를 줬단 말인가? 김건모의 립스틱 퍼포먼스가 전체적인 공연의 분위기와 안 어울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500명의 평가단의 ‘감상’에 미쳤을 효과는 다 제각각인 것이다. 게 중에는 퍼포먼스가 기발하고 독특하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건모는 7위를 했을 수 있다. 제작진, 그리고 가수 도전자, 개그맨 매니저들 모두 그럴 가능성을 배제해버리는 엄청난 오만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태도를 굳이 규정하자면 일종의 ‘전문가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주의’가 제일 빈번히 출현하여 대중과 마찰을 일으키는 분야는 단연 ‘과학’이다. 광우병, 조류독감, 천안함, 그리고 최근 일본 핵발전소 사고까지... ‘전문가’를 자청하는 과학자들을 등에 업은 정부와 언론은 자신들이 믿는 ‘가정’이 유일한 ‘진리’임을 강조하고, 이것이 대중의 불안에 기반한 정서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권력을 기반에 두고 끊임없이 지식인과 무지자를 갈라놓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과학의 영역이야 ‘패러다임의 전환’과 같은 한계적 조건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 학문적 성격 자체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다(상대적으로). 하지만, 음악이 진리를 추구하는 영역인가? 오로지 뮤지션들만이 알 수 있는 독특한 심미적 세계가, 나같은 문외한은 알 턱이 없는 그런 오묘한 세계에 똬리를 트고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가수는 프로그램의 흥행을 위해서 일반인을 평가단으로 500명이나 불러들여놓고, 그 평가가 자신들의 ‘전문가적’ 잣대와 맞지 않으니 손바닥 뒤집듯이 결과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평가단의 평가는 자신의 음악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서 이루어졌다는, 아주 오만한 자신감을 근거로.

 

데뷔 20년차 가수를 데려다놓고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을 선택한다는게,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는 것만큼 황당하고 어처구니 없지만, 어쨌든 그 서바이벌 과정에서 드러난 제작진과 가수들의 오만한 전문가주의에 더 화가났던 어젯밤이다.

 

 

뱀발) 어제 우연히 한겨레 [왜냐면]에 신동일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니, 나가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가방식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했다고 말한다.

 

“누가 어떻게 심사할 것인지 참가 가수들과도 협의를 하고, 심사단을 엄밀하게 선정한 뒤 심사자 교육 과정을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심지어 참가 가수나 시청자들도 평가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심사 권한을 위임한다. 탈락한 가수가 심사자로 참가할 수도 있으며, 동료끼리 또 각자 자신을 평가한 점수도 최종심사에 반영한다. 가수들 쪽에서 평가방식에 대해서 제작진이나 심사단에게 물어볼 수 있도록 대화창구가 있으며, 신뢰감을 서로가 가질 수 있도록 여러 행사도 준비한다. 그리고 결과는 당일에 깜짝 발표되기보다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한다.”

 

교원평가에서 그렇게 하듯이 다면평가를 도입하자는 얘기인데, 아무리 좋은 평가도 평가는 평가다. 그리고 7명의 가수들이 평가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패자부활전을 100번을 한다고 한들 어쨌든 꼴찌는 나오게 되어 있다. 가수들은 누구든 1명은 탈락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실제 결과가 나오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평가 ‘방식’이 아니라, 평가 ‘자체’에 있는 것이다. 교원평가든 일제고사든 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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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문제는 백분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

바로 어제 장애학 세미나 발제에 썼던, 아주 갑작스럽고 엉뚱한(?) 고민...

 

 

박경석 대표님이 예전에 하셨다는 그 말, “장애인들의 문제가 백분토론에 한번 나와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과연, 장애문제가 이 사회에서 ‘토론’ 가능한 문제일까?

난 이런 질문 앞에서 예전에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실상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가끔 사진도 찍고 하는 게 나는 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지막에 동물원을 나오면서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왜냐면 산만한 크기의 코끼리의 한 쪽 발이 쇠자물쇠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그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내내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동물해방’ 투쟁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날 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같은 문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원과 장애인 시설의 존재 목적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사실상 같은 게 아닐까? 동물원은 우리 속에 갇혀진 그들의 (우리는 무감각하게 ‘울음’이라고 부르는) ‘비명’ 소리로 인간들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이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서 동물들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할 필요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꼭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들이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지금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는 멸종위기 생물들에 대한 남획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뒷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맷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참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근대적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슨 동물보호단체라는 데서 나온 사람들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가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해야만 말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그게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의 삶의 방식에 ‘불편한’ 존재일 (뿐이라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으면서 비장애인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비장애인들은 그렇게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는 가끔씩 ‘봉사활동’이란 명목으로 찾아가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노동자 자녀들을 데리고 꽃동네 봉사활동 하는데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비장애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①우르르 몰려간다. ②잠깐 있다 나온다. ③먹을 것을 준다. ④가까이 오면 무서워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까? 그것도 백분토론 같은데서? 내 생각은 토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할 수도 있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실상 토론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신체의 ‘무결성’과 그들의 ‘안락함’이라는 개념을 깨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 토론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직은 장애문제를 둘러싸고는 ‘말’로 하는 토론보다는 ‘몸’으로 하는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더 없이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이 사회의 안락함이라는 것은 장애인을 ‘비(非)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진 ‘말’보다는 ‘공격’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 들어온 새내기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 다녀서 동아리 활동을 소홀히 한다길래 (그 전부터 노들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앉혀놓고 그런 거 다니지 말라고 몰아세워서는 결국 울려버린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것 참 반성을 많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참 잘한 것 같다.

 

(계속 논점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말해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근대사회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권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을 (예를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토록 시설에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해 더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특정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생명도 자신을 감금된 상태로 희생하며 다른 생명에게 유희를 제공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예전에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 같은게 이런 의미를 가진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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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스쳐간 고민에 대한 갑작스런 메모.

난 어떤 의미에선 우리나라가 ‘복지국가’가 맞다고 생각한다. 복지국가에 어떤 이상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보편적 삶의 권리가 보장되고, 소득분배가 평등한 나라라는 기준으로 보자면 택도 없지만. 사실 사회복지정책론 교과서 같은데 나오는 복지국가 유형분류를 논외로 생각한다면, ‘복지국가’라는 어떤 근대국가의 이상향적 모델은 근대인들의 무절제하게 팽창하는 욕구에 어떻게 사회경제시스템이 대처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 욕구를 어떻게 조절하여 지구상의 생명-생태계와 공(共)-존(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완전히 열외의 문제였다. ..... 그래서 .... 인간의 욕구와 등치된 개념이 되어버린 ‘권리’를 사실상 삭제하고 새롭게 ‘삶’을 창안하는 투쟁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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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현배려.

 

 

소중한 이가 떠났다.
사실 내게 그가 그렇게 소중했던 이였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오늘 아침 돌아서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목이 매여오는걸 보니 그가 내게 얼마나 큰 무게를 남긴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군대를 가기 전 1년 반동안 그 조그만 학교에서, 겨우 3-4명이서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참 아옹다옹거리면서 많이 웃고 싸우고 또 즐거웠는데... 얼마 전 제대하고 나서도, 그때와 같은 설렘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시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 너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었는데...

 

가끔 문득문득 그 때 그 무리들이 다시 모여서 인천 계산동 골목을 돌아다니는 꿈도 꾸곤 했는데, 이제 너가 없으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다 허망해지고 말았구나.

 

내가 조만간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많은 얘기 나누고 싶었는데, 너는 너만 혼자 사랑하는 하나님 곁으로 떠났구나...

 

그런 너가 너무 야속하지만, 내가 야속해하는 만큼 너의 세상에서 행복하렴. 그리고 그 곳에선 다신 아프지 마. 그렇게 아프도록 너 자신도 모를만큼 속으로 썩고 있지도 말고.

 

안녕, 너무 빨리 나의 추억이 되고 만 소중한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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