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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12
    박영균,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구르는돌

박영균,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

 

 

요새 한창 박영균의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와 이진경의 <역사의 공간>을 읽고 있다. 또한 웹서핑 차원에서 이러저런 블로그에 들어가는데 그 중에 문화평론가 이택광의 블로그도 있다. 의도적으로 이들을 비교해 봐야겠단 생각은 없었지만, 독서의 와중에서보니 이들의 차이점과 교집합이 조금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일단 그 첫번째로 박영균의 책에 대한 간단한 소감문.

 

 

*       *       *

 

지금 읽고 있는 <맑스, 탈현대적 지평을 걷다>는 08년 말쯤에 산 책인데, 50페이지쯤 읽다 포기해 버렸었는데 그 새 내 머리가 좀 컸는지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이해도 되면서 그럭저럭 읽고 있다. <진보평론>등에서 그의 논문을 몇 번 보긴 했는데, 이 책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제대로 읽은 적은 없다. 앞으론 별 두려움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맑스주의 '정통'의 붕괴라는 이론적 조건에서 마주하게 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 및 수용하면서 맑스 사상 속에서 이러저런 방식으로 왜곡되어 왔던 변증법과 유물론을 저자 나름대로 복권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사실 저자는 좌파 이론 진영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수하는 편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포지션의 사람들은 스피노자, 니체 등으로부터 연유하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비판을 그간 적지 않게 해 왔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이 책은 참 식상한 면이 있다. (박영균의 주장과는 많은 편차가 있긴 하지만) 나름 Orthodox한 맑스주의를 고집한다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자면 이 사람들이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짜증나는 구석도 있었다. 예전에 한 선배가 이들을 두고 농담조로 던진 한 마디가 생각난다. "걔네들은 메이데이날 공장가서 기도나 올리라 그래라."

 

그러나 적어도 박영균은 이런 비판을 들어야 할 일은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는 서론에서 "오늘날 많지 않은, 그렇지만 탁월한 탈현대적인 맑스 철학의 모색이 몇몇 논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최종적으로 결여하고 잇는 것은 맑스 철학의 근본적인 지반이다. 그것은 맑스 철학의 정체성이 아니라 탈현대적 기획과 흐름들에 정세적으로 묶여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경우, 맑스는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여러 시체들의 얼굴들을 짜깁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지적인 공포를 유발한다. 맑스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모를 지적인 공포가 방향을 잃은 담론들의 난무와 지적 진지함에 대한 의욕 상실을 낳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맑스 철학의 '근본'을 옹호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러한 옹호는 맑스주의자로서의 원칙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보여진다. 한편 그는 탈현대적 맑스주의 근저에 있는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 편한대로 넘겨짚지 않고 꼼꼼하게 따져보고 평가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알튀세르의 '철학의 실천'과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이라는 철학의 두 계기와 스피노자의 유물론과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이라는 두 계기를 설명하는데, 난 이 부분의 한 문장 한 문장을 힘겹게 읽으며 참 공부 제대로 했다. -_-;; 사실 Orthodox한 맑스주의자들의 글에서 이렇게 성실하게 탈현대적 흐름을 분석한 경우는 처음 본다. 그래서 이 책에 좀 고마웠다.

 

그는 끊임없이 맑스와 알튀세르, 맑스와 그람시, 맑스와 스피노자, 맑스와 들뢰즈를 대면시키고 대질심문한다. 그래서 그가 도출한 결론 중에 눈에 띄는 것은 "포스트적 담론들의 과학 비판과 해체는 윤리학적 문제설정이나 윤리적인 실천을 넘어서지 못하고 적대적 실천의 장으로 집중되는 정치를 해체하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12p)는 지적이었다. 이 점은 나도 얼마간 고민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요즘 이러저런 문화평론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느꼈던 어떤 공허감 같은 것을 잘 표현해 준 것 같다. 아래 문장에서는 그가 세운 '원칙'이 잘 드러난다.

 

이제, 던져야 할 질문은 포스트적 담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어떻게 사람들은 파시즘을 자신의 욕망으로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표상하고 욕망을 그런 식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었던 물질적 토대가 무엇인가'이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 토대의 효과가 어떻게 사람들의 욕망을 채취하고 굴절시키며 지배 권력으로 절합시키는가'를 찾아야 한다. (233p)

 

그러나 이 문장 바로 앞에 나오는 "그러므로 우리가 근본 변혁적 실천을 모색한다면 그것은 이 토대 중심성과 그 중심성에 의해서 제시되는 현 지배체제의 외부를 극한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적대성을 내재하고 있는, 그리하여 자본의 외부를 생성하는 운동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계급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그가 세운 원칙의 타당성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토대중심성에 대한 철학적 의문?) 특히 다음의 문장을 읽고 난 이후로 난 갑자기 이 책의 결론이 예상이 되면서 급 실망 모드로 돌아섰다.

 

우리는 부-자, 부-부의 관계맺음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노/자의 관계맺음 없이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관계맺음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자, 부-부 관계 또한 이런 본질적인 강제력에 의해 그 차이 또한 변형된다. 차이는 적대의 질서를 따라 절합되고 구획된다. 내가 아무리 선한 아버지라도 아들을 대하는 방식은 자본주의와 봉건제에서 다르다. 부-자 관계에 의해 노/자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자 관계에 의해 부-자 관계는 변형된다. (222p)

 

이런 (내가 보기에는) 황당한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 넘는 책을 썼단 말인가? 과연 우리는 부-자, 부-부 관계 없이 살 수 있는가? 난 저자의 결론을 반박하기 위해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쓰진 않겠다. 이런 결론을 내기 위해 400페이지를 달려나간 저자에겐 이를 반박하기 위한 실증적, 논리적 반박 모두 무의미하게 들릴것만 같다. 왜냐면 사실 그 자신도 노/자 관계가 왜 우선인지 '증거'를 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탈현대론자들이 주장하는 '차이의 존재론'과는 다른 맑스의 '모순의 변증법'과 '역사 유물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차이의 존재론은 차이 그 자체로 모든 운동을 '생성'으로 일반화하지만 모순은 그렇지 않다. 생성운동은 '구별'이 아니라 '대립'에 있다. 대립을 통해서 포착되는 '모순'은 운동이 하나의 강제적인 힘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성, 존재의 가능성을 제시한다."(223p)라고 말한다. 동의한다. 그러나 이 말 어디에도 그 모순의 중심이 노/자 관계라고 나와 있지 않다.

 

게다가 "맑스가 자본주의에서 해방 주체를 찾고 그 존재를 노동자계급으로 설정한 것은 진정한 운동운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라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는 수동적/소극적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불가피하게 강제'되었을 때에만 성립하는 운동을 과연 진정한 운동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이론적 논의 속에는 대중의 자율적 의식화의 가능성, '불가피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운동으로 조직화시킬 가능성에 대해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의 평론가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학생의 입장에서 읽었기 때문에 저자가 제기한 쟁점에 대해 가타부타 따지고 들어갈 여유 또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왜 그는 모순의 담지자를 존재론적으로 규명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고, 그 관계를 체현한 존재라면 오히려 그 존재를 존재 가능성을 변화시키는 관계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순의 중심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되는 모순이 어떤 것인지는 '역사유물론'의 관점에서도 변화 가능한 것이고, 모순의 과잉 또는 과소 결정되는 지점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성의 차별화는 노/자의 계열화 속으로 절합되며 이주노동자는 노/자의 계열화 안에서 이중적인 차별화로 강제되며 특이성 자체를 변형한다"(232p)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하간 이 책은 나름 '학습의 기쁨'과 함께 실망도 함께 준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이 현 시점에서 Orthodox한 좌파가 보여줄 수 있는 발전된 논의의 최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고마움과 씁쓸함을 함께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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