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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문제는 백분토론에서 다뤄질 수 있는가?

바로 어제 장애학 세미나 발제에 썼던, 아주 갑작스럽고 엉뚱한(?) 고민...

 

 

박경석 대표님이 예전에 하셨다는 그 말, “장애인들의 문제가 백분토론에 한번 나와 봤으면 좋겠다”라는 얘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과연, 장애문제가 이 사회에서 ‘토론’ 가능한 문제일까?

난 이런 질문 앞에서 예전에 학생운동단체에서 활동할 때,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동물들은 우리 안에 갇혀서 사실상 하루 종일 ‘멍’ 때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가끔 사진도 찍고 하는 게 나는 영 불편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지막에 동물원을 나오면서 ‘꼭지가 확 돌아버렸다’. 왜냐면 산만한 크기의 코끼리의 한 쪽 발이 쇠자물쇠에 묶여있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다. 난 그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돌아오는 내내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 ‘동물해방’ 투쟁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 날 나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되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같은 문제라 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가 장애문제를 인식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 동물원의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동물원과 장애인 시설의 존재 목적은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사실상 같은 게 아닐까? 동물원은 우리 속에 갇혀진 그들의 (우리는 무감각하게 ‘울음’이라고 부르는) ‘비명’ 소리로 인간들에게 ‘오락’을 제공하여 이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인간의 경계 ‘내부’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그 ‘내부’에서 동물들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할 필요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 꼭 동물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야생동물들이 그 ‘우리’ 안에 갇혀 있음으로 해서 자신들의 지금의 안락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가끔 TV를 통해 들려오는 멸종위기 생물들에 대한 남획에 분노할 수는 있어도, 우리 중에 누구라도 뒷산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맷돼지가 내려오는 것을 참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건 근대적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무슨 동물보호단체라는 데서 나온 사람들이 토론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대개가 의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해야만 말이 이어지는 것들이다. 이런 말이라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다행이긴 하지만, 나는 그게 생명체들의 보편적인 자기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한다.

한편 장애인 시설은 비장애인의 삶의 방식에 ‘불편한’ 존재일 (뿐이라 여겨지는)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으면서 비장애인들의 안락을 유지한다. 비장애인들은 그렇게 장애인들을 시설로 몰아넣고는 가끔씩 ‘봉사활동’이란 명목으로 찾아가 자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내가 고등학교 때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노동자 자녀들을 데리고 꽃동네 봉사활동 하는데에 간 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비장애인들이 취했던 태도는 동물원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랑 다르지 않은 것 같다. ①우르르 몰려간다. ②잠깐 있다 나온다. ③먹을 것을 준다. ④가까이 오면 무서워한다. (+알파, 베타, 오메가....)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의 삶에 대한 토론이 가능할까? 그것도 백분토론 같은데서? 내 생각은 토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토론을 할 수도 있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만, 사실상 토론 불가능의 영역으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신체의 ‘무결성’과 그들의 ‘안락함’이라는 개념을 깨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그 토론이 핵심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아직은 장애문제를 둘러싸고는 ‘말’로 하는 토론보다는 ‘몸’으로 하는 싸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더 없이 불편하게 해야 한다. 이 사회의 안락함이라는 것은 장애인을 ‘비(非)인간’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시설의 위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깨우치는 것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진 ‘말’보다는 ‘공격’인 것 같다. 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 들어온 새내기가 장애인 시설에 봉사활동 다녀서 동아리 활동을 소홀히 한다길래 (그 전부터 노들에서 교사활동을 하던 선배와 함께) 술자리에서 그 친구를 앉혀놓고 그런 거 다니지 말라고 몰아세워서는 결국 울려버린 적이 있다. 내가 살면서 여러 사람 눈에 눈물 흘리게 한 것 참 반성을 많이 하지만, 그 때만큼은 참 잘한 것 같다.

 

(계속 논점이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난 김에 말해보자면) 우리 인간에게 어떤 권리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 근대사회를 열어젖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투쟁을 하는데 있어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어떠한 권리가 없음’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어떤 인간을 (예를들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평생토록 시설에 가둬놓을 권리가 ‘없다’. 그것이 특정한 인간집단의 안락과 편안함을 위해 더 이로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인간이 아닌 동물들을 특정한 공간에 가둬놓고 그것을 보며 즐거워할 권리가 ‘없다’. 어떠한 생명도 자신을 감금된 상태로 희생하며 다른 생명에게 유희를 제공할 의무 따위는 없다. 예전에 지율스님의 도롱뇽 소송 같은게 이런 의미를 가진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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