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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로 '우리도 언젠가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하는 이유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될 수 있는 확률이 문제라면, 사고를 예방해서 그럴 확률을 줄이면 되는 것이다(불조심, 차조심, 건강조심 등등). 이것은 건강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당연한 욕구인데, 그러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불안이 장애인운동에 대한 연대로 이어진다는 것은 과도한 결론이다. 또한 자기 자식이 장애인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도 비슷한 심리일텐데, 그 중 뱃속의 태아가 '기형아'일 수 있다는 우려는 많은 경우 '낙태'로 이어져 사실상 장애인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의도와는 다르게 장애인운동의 존재가치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체적 손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권력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얼마든지 우리의 신체가 장애라는 울타리 안으로 밀려들어가 배제와 억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얼마 전 경찰인가 검찰인가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DNA를 채취하겠다고 한 사태를 보자. 이들은 '해고자'라는 낙인을 무슨 유전적 질병으로 취급 하려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장애인 수용시설처럼 '해고자 수용시설'이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 수 없게 만드는 무수한 턱들, 속도들, 노동의 장벽들 때문에 장애인이 수용시설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신체 자체가 아니라 그 신체를 분류하는 권력의 기준이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운동에 연대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가 언제든지 그 권력에 의해서 (조르조 아감벤이 [호모 사케르]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지만, 누군가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날것의 삶',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 점, 그래서 그 권력의 기준을 갈갈이 찢어내 버려야만 온전한 '연대적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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