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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정리 1 (<2008 글로벌 금융위기>, 최혁 저)

■2008년 9월 15일



1.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작


1) 서브프라임 모기지

- 부동산담보대출 : 주택을 살 때 사고자 하는 부동산을 담보로 하여 은행으로부터 장기대출을 받는 것. 프라임(prime), 알트에이(Alt-A), 서브프라임(subprime)으로 구분.

- 미국 주택가격은 규제완화와 낮은 이자율에 힘입어 1990년대 중반부터 상승세. 이에 기대어 은행들은 서브프라임 수준까지 담보대출 확대함. 그러나 2006년부터 미국 부동산시장이 침체에 접어들면서 위기 발발.


2) 모기지 금융상품

- MBS(Mortgage-backed securities) : 부동산담보대출금은 주택 구매자에게는 부채, 은행 입장에서는 자산. 그러나 이미 대출해 준 상태이므로 은행이 마음대로 쓸 수는 없음. 그래서 별도의 유동화 회사를 차려 모기지를 넘겨받게 한 후 이를 담보로 새로운 증권을 만듦. 매도받은 금액은 원래의 은행에 넘겨주어 은행이 쓸 수 있는 현금 조성. 이 외에도 학자금, 자동차 구입대금 등에 기초한 다양한 방식의 ABS(Asset-backed securities)도 개발됨. MBS는 ABS의 일종.

- CDO(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여러 ABS와 채권들을 함께 묶어 하나의 풀(pool)을 형성하고 이 풀 전체를 대상으로 우선순위가 서로 다른 새로운 증권들을 만들어 냄. CDO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은 CDO 배경에 있는 자산들의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음.


3) 흔들리는 리먼브러더스

- 2006년 미국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인해 모기지 관련 MBS와 CDO를 대량 보유한 리먼브러더스(자산규모 4위)는 재무상태의 악화에 직면. 2008년 상반기에만 주가가 69% 하락. 자산규모 3위의 메릴린치도 비슷한 상황에 처함.



2. 리먼브러더스의 몰락


1)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 08년 9월 12일 긴급회의 : 뉴욕연방은행장 가이스너(Timothy F. Geithner)가 소집. 리먼브러더스의 구제방안 모색을 위한 회의.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와 영국계 바클레이즈(Barclays)와 HSBC가 리먼 인수에 관심을 가졌으나 부실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어 정부가 손실을 함께 부담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게 됨.

- 08년 3월 JP모건체이스의 베어스턴스 인수 당시에도 미국 정부가 300억 달러를 지원했고, 회의 직전 9월 7일에는 패니메와 프레디맥 구제에도 2,000억 달러가 투입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들보다 자산규모가 큰 리먼도 정부지원을 기대함.

- 정부는 국민세금을 투여하는데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고, 인수 의향을 밝히던 회사들이 모두 포기를 선언함으로서 리먼은 최종적으로 법원에 파산호보신청을 함.


2) 축복받은 자와 저주받은 자

- 메릴린치의 경우 : 리먼 구제방안 논의 과정을 지켜 본 메릴린치의 테인(John A. Thain)회장은 위기를 직감. 리먼 문제 처리 이전에 행동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협상 끝에 500억 달러 인수에 합의. 이로서 BOA는 투자은행으로의 진출 가시화.

- 리먼브러더스의 경우 : 07년 5월 당시 글로벌채권붓서 책임자 겔반드는 풀드 회장에게 리먼이 과다한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경고를 했으나 그를 해고해 버림. 그는 ①리먼의 회생 가능성을 믿었을 만큼 당시 상황에 둔감했으며, ②정부가 세금을 통해 구제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고(도덕적 해이moral hazard) ③기업의 소유주체인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경영인의 도덕적 해이의 한 유형인 대리문제(agency problem)1) 발생. 실제로 풀드 회장은 회사가 휘청거리고 있던 2007년에만 3천4백만 달러를 받았고 당시 임직원들에게 지급한 보너스 총액은 57억 달러.



3. 파산보호신청 이후의 리먼브러더스


- 08년 9월 15일 파산보호신청은 리먼 전체가 아니라 ‘리먼브러더스홀딩스’라는 지주회사만 대상이 되는 것. 전 세계에 걸친 자회사, 손자회사는 제외.

- 미국 파산법 제11장 : 회사가 재무적으로 위기에 직면하면 채권자들이 자기 몫을 챙기려고 쇄도하게 되는데 이 순간 회사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회사의 회생가능성을 따져볼 기회를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함.


1) 시체를 둘러싼 경쟁

- 영국 바클레이즈 : 파산보호신청 다음 날, 17억 5천만 달러에 리먼의 미국과 캐나다 자본시장부문을 인수하기로 합의. 그러나 바클레이즈 자체도 부실자산을 안고 있던 상태라 인수를 위한 재원조달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투자자들은 인수에 호의적이지 않음. 바클레이즈의 주가가 이 날 2.5% 하락.

- 일본 노무라홀딩스 : 9월 22일 리먼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사업 인수 합의.


주식의 시장가치와 내재가치

시장가치

내재가치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이 만나 결정되는 가격

투자자가 주식을 샀을 때 앞으로 나올 현금배당의 흐름을 ‘적절한 방법’으로 모두 합한 값. 여기서 ‘적절한 방법’이란 미래에 나올 돈들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할인discount)하는 것.


글래스스티걸법과 그람리치블라일리법

글래스스티걸법(1933)

그람리치블라일리법(1999)

1929년 대공황 이후 안정적인 금융시장 형성을 위해 제정. 은행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으로 분리하여 각자 고유 영역에서만 영업활동을 하도록 하는 것. 상업은행의 예금자 보호를 위한 수단이 됨.

미국과 달리 유럽 여러 나라들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영업을 모두 할 수 있는 유니버설 은행 성장. 유럽계 은행과 경쟁에서 밀리게 된 미국계 상업은행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업무를 병행할 수 있게한 그람리치블라일리법 제정 됨.



※국부펀드 : 정부나 중앙은행이 소유하는 투자펀드. 국제수지 흑자나 원자재 수출 등을 통해 확보된 외화를 다양한 자산에 투자한다. 국부펀드의 규모는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아 증궈이나 원자재 시장의 가격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또는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어 많은 국가들이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한국투자공사(Korea Investment Corporation)가 한국의 국부펀드이다.


※국가간 통화스왑 : 두 나라의 중앙은행이 일정기간 동안 두 나라 화폐를 교환하는 계약. 약속한 기간이 지나면 다시 교환하여 원래 상태로 회복시킨다. 08년 10월 29일, 미국 연준은 한국, 싱가포르, 브라질, 멕시코의 중앙은행들과 각각 300억 달러 규모의 스왑라인을 6개월 동안 열기로 합의했음. 통화스왑을 이용하여 달러 보유고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으므로, 달러가 일시적으로 부족할 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


 


 

1) 갑이 을에게 갑을 위해 일해 달라고 계약을 맺었을 때, 을이 갑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 보다는 을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현상. ex) 갑이 홍길동을 고용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구멍가게의 운영을 맡겼다고 하자. 장차 이 동네 지방의원이 될 꿈을 품고 있는 홍길동은 가게의 이익을 높이기보다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물건을 공짜로 주어 자신의 미래를 위한 친분을 쌓고자 노력할 수 있다. ==> 도덕적 해이를 계약관계에 적용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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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2,3,4장 요약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1. 현대판 상인법


1) 중세 상인법 성립의 배경

- 중세 유럽은 법적 제도의 일관성이 없는 파편화된 사회. 이는 12세기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상업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감당할 수 없었음. 그래서 중세 상인들은 스스로 상인법을 만듦.

- 유럽의 주요 교역로와 상업 중심지 곳곳에 상인법을 시행할만한 재판소를 세우고,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하는 장치를 만듦. 여기서 판사는 오랜 장사꾼 경험 속에서 상업의 온갖 관행과 실제 사례에 정통해 있고 상인들 사이에서 신용과 명망을 쌓은 사람. 그는 ‘정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양쪽이 조속히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중재함.

- 상인법 재판의 특징 : ①재판소의 선택, 증거의 종류나 제출방식, 사용되는 법적 원천은 전적으로 분쟁 당사자에 의해 결정됨 ②판결이 강제력을 통해 집행될 수 없음. 영주 등 당시 물리력을 보유한 이들이 상인법에 관여하지 않음. 다만 판결에 복종하지 않는 상인은 상인 공동체에서 ‘왕따’가 됨.


2) 주권국가 등장 이후

- 베스트팔리아 체제 등장 이후 근대적 영토-주권국가의 등장. 이 국가들은 자국 영토 안에서는 오로지 자국만이 법을 정할수 있는 권력인 주권을 가지며 그 밖의 다른 어던 법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음. 이에 따라 이전 상인법은 국가의 법제화를 거쳐 각국에서 통일적으로 시행되는 민법과 상법으로 흡수.

- 국가간 법체계 수립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 이에 20세기에 들어 일정한 구속력을 갖는 국제법 체계가 성립됨. 이 국제법 체계 하에서 의미있는 구성원은 오로지 국가. 국가를 제외한 주체(ex: 투자자)는 국제법적으로 국가의 상대가 될 수 없음.

- 이런 경직된 국제법 체계는 세계적 차원에서 상거래를 펼치는 이들에게 인기 없는 것. 그래서 19세기 들어 공식적인 국제법 체계의 가장자리에서 옛날 ‘상인법’의 정신이나 관행에 따라 국제상거래 관계에서 상인들 스스로가 분쟁을 해결하는 중재절차에 호소하는 일이 많아짐.


3) 국제 중재절차의 제도화

- 1923년 국제상공회의소 주도로 유럽 17개국 대표들이 제네바에 모여 민간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해결을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에 넘기기로 합의하고 이를 각국이 법적으로 인정. 중세 상인법 관행의 부활. 그러나 국제상공회의소는 중재심판의 대상이 민간인들 사이의 상업적 사안으로 제한돼 있다는 것에 불만.

- 1965년 투자분쟁조정회의 : 기존의 사적인 국제중재절차제도를 국가와 외국 투자자 간의 분쟁에까지 적용하기로 함. 세계은행 산하에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라는 포럼을 설립하여 국가와 외국 투자자들 사이의 분쟁에서 투자자의 이익을 보호하고 중재심판을 하는 역할을 맡김.

- ICSID의 한계 : ICSID의 심판이 개별 국가에 국제법적 효력이 있는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 국가가 “이 건은 우리나라의 법적 권한에 속하지 않으며 ICSID의 중재심판 대상이 된다.”는 식의 명시적인 의사표명을 해야 함. 외국 투자자는 해당 국가와 계약 당시 이 조항에 합의를 해야 ICSID 중재심판에 대한 구속력을 갖게 할 수 있음.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투자협정(BIT)이나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한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2. 국제법 체계를 뒤엎은 자본의 공세


1) 잠에서 깨어난 국제 중재절차

- 특정 국가가 어떤 특정한 외국 투자자와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특정 국가와 협정을 맺는다면, 그 협정은 국가와 국가간에 맺은 조약이니 흠결 없는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다.(BIT) 이 경우 ICSID는 투자협정의 양 당사국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외국 타자자 대 국가의 분쟁에 대해 구속력 있는 중재심판을 할 수 있게 됨.

- 이런 투자협정은 국가 주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간헐적으로만 이루어져 왔을 뿐.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지구화가 본격화 되면서 양자간 또는 다자간 투자협정이 봇물처럼 터져나와 ICSID의 중재심판 건수도 증가.


2) 2차 대전 이후 ‘지구화’ 3단계

- 1단계(70년대 초) : 고정환율제 붕괴와 오일쇼크. 영미권에서의 보수화와 제3세계 외채 증가.

- 2단계(80년대) : 통화주의자들의 금리인상에 따른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위기. 제3세계 시장개방과 구조조정.

- 3단계 : 워싱턴 컨센서스에 후속하는 지구화의 단계


3) 전세계에 강제되고 있는 ‘신헌정주의’

- 타자자의 권리와 이익이 제일의 우선성을 가진다는 신헌정주의는 투자협정과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를 통해 몇백년 동안 유지되어 온 국제법의 체계를 무너뜨린다. 투자 수익성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장벽들에 따로따로 싸울 필요 없이 국가를 책임자로 몰아 소송으로 국제법정에 불러낼 수 있게 된 것.


 

 

 

■‘투자자의 보호’란 무슨 의미인가



1. 보호용 방패가 공격용 창으로 변하다


1) ‘물건’이 아닌 ‘자산’이 사적 소유의 대상이 되다

- 미국 헌법상의 ‘사적 소유 보호’ 개념 : “정부는 개인의 사적 소유물을 가져 갈 수 있지만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만 그렇게 할 수 있고, 적절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그 개인에게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소유의 대상은 ‘토지’와 같은 가시적인 물건에만 해당.

- 미국 남북전쟁을 거쳐 1870년대부터는 소유의 대상이 사물이 아닌 온갖 자산, 즉 소득을 창출해주는 모든 것으로 전환. 땅투기와 온갖 신종 금융기법들의 출현으로 사적 소유의 법적 정의는 ‘화폐가치’쪽으로 기울게 됨.

- 1890년 미네소타 주정부의 철도건설 과정에서 토지의 가치변동을 겪은 땅주인에게 보상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문제. 주정부 입장 “정부에서 토지 소유권을 가져간 것이 아니며 단지 토지의 가치 삭감만 일어났으니 사적 소유가 침해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 문제는 헌법적 사안이 아니라 주정부의 재량 아래 있는 것” 땅주인 입장 “정부에서 소유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해도 토지의 화폐가치가 떨어졌으니 주정부가 사적 소유물을 수용한 것이나 마찬가지” ==> 대법원 판결은 땅주인 입장 승소. 소유개념이 20년만에 단순한 사물에서 ‘소득창출능력’으로 바뀐 것.


2) 레이건 시대의 ‘규제에서 파생된 수용’

- 1930년대 뉴딜 정부의 등장으로 사적 소유의 의미가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의 소득을 취득할 권리’로 축소.

-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등장으로 ‘규제에서 파생된 수용’(regulatory expropriation)개념 등장. 1992년 판례에서 행정 규제라 하더라도 일정한 경우 토지에 대한 수용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

- 나프타 11장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도에서는 이 ‘규제적 수용’ 개념이 이상적으로 펼쳐져 있음.



2. 나프타 11장에 나타난 ‘투자’와 ‘수용’의 의미


1) ‘투자’의 넓은 범위

- 나프타 1139조의 정의 : ‘투자’는 기업은 물론 각종 유가증권, 부동산, 유형 및 무형의 재산 등 사실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자산’ 취득을 포괄하고, 더 나아가 각종의 이익을 낳는 자본기탁과 투자대상국 내의 각종 허가 및 특허권을 포함한 모든 경제활동 자원의 취득도 포함.

- 나프타 1101조의 11장 규정이 적용되는 대상 : 투자자 및 투자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투자대상국이 취하고 유지하는 ‘조치들’. 여기서 ‘조치들’이란 ‘모든 종류의 법, 규제, 절차, 요건 및 관행’.(201조 1항)

- 1110조에서 수용의 의미 : ‘간접적 수용’(indirect expropriation)과 ‘수용에 맞먹는 조치’(measures tantamount to expropriation).

┖→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설명에 의하면 이것은 곧 ①‘점진적 수용’(creeping expropriation). 즉 소유자의 소유권에는 아무런 직접적 영향이 없지만, 국가의 개입과 조치로 인해 조금씩 장기간에 걸쳐 투자의 가치가 잠식되는 상황. ②‘규제에서 파생된 수용’(regulatory expropriation). 소유권의 화폐가치에 영향을 주는 법적 규제. 경찰력까지도 문제 삼을 수 있음.



3. ‘공공이익’은 어떻게 되는가


1) 매탈클래드 사건의 경우

- 각각의 국제 중재재판소는 서로 독립적으로 심사하고 판결하며, 사건 유형별로 구속력 있는 판례가 쌓이지 않음. 따라서 분쟁의 구체적인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판결이 나오게 마련.

- 매탈클래드 사건에 대한 중재재판소의 판결문 : “본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환경보호 조치와 같은 동기라든가 의도 등은 고려하거나 결정할 필요가 없다.” 고려해야 할 문제는 오로지 “투자에 어떠한 영향이 있는가” 하나뿐.


2) 정부를 쫄아들게 만드는 된서리 효과

- 투자자는 제소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만으로도 투자대상국을 쫄아들게 해 어떤 입법이나 행정조치도 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음. 제소 절차를 밟기 이전에 투자대상국 관청에 ‘의도 통지’를 보내는데 여기서 제소의 논리와 배상금의 크기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면 중재재판으로 가지 않고도 해당 국가를 굴복시킬 수 있음. (캐나다 필립 모리스 사건과 공공자동차보험 사건)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1. 국제 중재절차의 성격


- 국제 중재절차는 일정한 법적 효력의 근거와 원천이 명확하게 규정된 법체계 내에서 그 법체계가 정해놓은 절차와 규칙을 따라 행해지는 일반 법정의 재판과는 성격, 절차과 완전 다름.

- 상인법의 심판과정은 두 명의 분쟁 당사자들간에 ‘쇼부’치는 과정.



2. 소송은 누가 제기하는가


- 간접투자자, 소수 주주, 채권 보유자 또는 주식 이외의 투자자, 소유 구조가 외국 투자가들에게 넘어간 현지 법인 모두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음. 게다가 투자자에 따라서는 원하는 국적의 나라로 가서 자회사를 세우든가 아니면 그 나라의 회사를 인수해 ‘투자협정 쇼핑’을 할 수 있음. 즉 한미FTA 협정 하에서는 중국회사가 미국에 자회사를 만들거나 그 나라 회사를 인수하여 한국에 투자를 하고, 여기서 손해를 입었다고 판단하면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음.

- 이 많은 주체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걸면 한국 정부는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놓고 여러 다른 주체들과 다른 곳에서 여러 다른 소송에 휘말리게 될 수 있음.



3. 국제 중재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1) 규칙과 절차는 양쪽 당사자들이 결정한다.

- 국제 심판소송을 주관하는 국제기구와 틀 : ICSID, 국제상공회의소의 중재법정 규칙(ICC Rule), 스톡홀름 상업회의소 중재 제도, 유엔 산하 국제연합국제무역법위원회의 중재규칙(UNCITRAL) 등.

- 그런데 투자협정은 대부분 투자자들이 이 가운데 몇 개를 동시 선택할 수 있는 ‘메뉴’로 제시. 그래서 투자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제도를 선택하여 투자대상국 정부를 공격하는 ‘규칙 쇼핑’을 감행할 수 있음.


2) 중재심판 과정은 철저한 비공개로 진행된다.

- 규칙과 절차가 결정되면 양쪽은 각자의 변호사를 내세우고 중재인을 결정하여, 세 주체로 중재심판소를 구성. 중재인은 ICSID의 경우 ICSID기관에서 미리 작성해둔 명단에서 한 사람을 지명하여 선임. 그런데 이 과정은 철저하게 세 주체만 참여. 양쪽 당사자는 자신들의 문서나 의견을 공개할 의무가 없고, 변호사와 중재인이 누구인지, 심지어 판결문 자체도 비공개.

- 중재심판에서는 장사와 투자를 하는 사람들의 사업 기밀과 평판만이 중요할 뿐 공공의 이익은 전혀 논의대상이 아님.

- 단 투자자와 투자대상국 정부가 모두 동의할 경우 당사자 이외의 이해 집단들에게 심판소에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전달할 기회를 줌.


3) 변호사는 물론 중재인도 경제적 보상을 받는다

- 보통의 재판에서는 분쟁의 양쪽 당사자가 그 재판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됨. 판사가 분쟁의 양쪽 당사자와 금전적 관계로 얽혀있다면 완전 상식 밖의 일. 그러나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에서는 변호사는 물론 중재인도 보상을 받음. 상인법의 전통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일. 법률 서비스에 대한 대가.

- 누구를 중재인으로 선정하느냐는 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실제 국제 중재 관련 경험이 있는 법률가가 극 소수여서 일종의 ‘클럽’이 형성되어 있고, 이들에 대한 인적정보는 초국적기업이 더 많이 가지고 있음. 법률가의 입장에선 이 중재심판 시장에서 인정과 평판을 쌓아 계속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 기업 쪽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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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중

피상적인 물질주의적 시각으로 볼 때는 짐작도 할수 없을 만큼 인간이란 깊고 복잡한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총체성을 말하면서 단순히 경제적 이해 관계에 기초한 사회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인식에 머문다면,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이 충분히 철저한 인간 이해를 수행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고, 따라서 크게 감동적일 수 는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 현대의 위대한 지적 업적 중의 하나는 인간 행동을 근원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표피적인의식의 수준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심층의 심리 구조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정신분석학의 성과가 아닌가 싶은데요.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들이나 노이로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경우에 그러한 질환은 환자 자신의 유아기의 어떤 경험, 프로이트가 대체로 그런 질환의 원인을 개인차원에서만 탐구하였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서구 부르주아 과학의 기본 가정을 초월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프로이트의 후학이면서 프로이트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간 융의 경우는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아다시피, 융은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사람이지요.

융이 쓴 <땅과 마음>이라는 글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대 미국 백인들의 심층 심리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뜻밖에도 그들이 내심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 하면 인디언들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네가 사람 이하로 보면서 야만적인  폭력으로 거의 멸종시키다시피 해 온 바로 그 인간 종족이 백인들 자신도 모르게 심층 심리의 가장 내밀한 고셍서는 외경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거지요.  백인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백인들의 무자비한 무력 행사 앞에서 죽어가거나 쫓겨갈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지만, 거의 완전한 패배속에서도 의연히 위엄을 잃지 않았던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은 어쩌면 심한 열등감을 느겼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은 깊은 심층 심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백인들 자신이 이것을 인정할 리는 없겠지요. (...)

융이 말하는 지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겪어 온 생명 진화의 전체 역사가 각 개인의 심층 심리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으로서 이렇게 직립하기 이전에 하나의 포유류로서, 또 그 이전에는  파충류, 그 이전에는 단순한 세포...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맨 처음 이 지구상에 생명이 싹틀때의 기억, 또는 좀 더 뿌리까지 간다면 생명을 잉태시켜 온 흙이나 물, 바람, 핷빛,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 생성의 근원적 기운과 같은 것이 내 기억의 까마득한 심층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본다면 나의 자아라는 것과 자아 아닌 것은 엄격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서양에서첢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 간단하게  구분하는 수준이 아니고 제1식에서 제8식까지 나누어 이야기해 왔는데요. 대개 우리의 외관을 통한 감각적 체험이 제5식까지의 내용이라면, 그 다음 단계가 우리의 의지적 작용, 감정 생활, 이지적 체험을 관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다음의 제7식부터가 이른바 무의식이나 잠재 의식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재미있는데, 같은 무의식의 차원이지만 정도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하는 7,8식으로 구분해 놓았다는 점입니다.

제7식의 범위는 말이지요, 이를테면 생존 본능의 심리라 할까요. 여러분이 잘 아는 죠지 오웰이 쓴 어떤 글에 보면 어느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요, 이것은 아마 오웰이 젊은 시절 버마에서 영국 식민지 경찰 노릇을 할 때 실제 체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사형수 한 사람이 사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서 간수들을 따라 교수대로 가는데, 전날 내린 빗물로 땅이 질퍽해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수는 될수 있는대로 그런 곳을 피해서 마름 땅을 골라 걸어가는 것입니다 .쌩각해 보면, 곧 목숨이 끊어질 처지에 있는 사람이 빗가랑이나 신발에 흙물이 투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은 우수운 행동이지만,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취하는 그런 행동이말로 진실한 행동인 셈이지요. 어떻든 불교에서 말하는 제7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식의 무의식적인 행동에 드러나는 생존 본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본능의 단계보다 더 지독한 차원이 있다고 유식학에서는 보고 있어요. 그것이 제8식, 다른 말로는 알라야식이라고도 하고 또는 종자식이라고도 하는 모양인데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각자의 전생, 금생을 통틀어서 내가 사념으로나 실제 행동으로나 지었던 모든 업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윤회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고,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자아 개념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인간과과 세계관이 전제되어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자아 개념, 즉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은 이 육신을 경계로 하여 나와 나 아닌것의 분별을 기초로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보면, 이런 식의 분별심에 기초한 자아 개념이 가장 철저하게 지배하는 것은 서구 근대 부르주아 문화의 개인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늘상 들어 왔듯이 자기라고 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연기의 법칙에 따라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생멸한다는 것이지요. 저 자신 옳게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연기법이라는 것은 결국 나와 세계와의 불가분리성을 뜻하고 근원적인 일체화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해요. 내 마음 가운데 우주가 있고, 우주는 내 몸, 내 마음이라는 생각도 거기서 비롯하는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하여튼 융의 관점이든 불교적 생각이든 어느 쪽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총체적 인격의 구조를 간단히 어떤 결단이라든가 양심이라든가 정의감이라든가하는 이지적, 의지적, 합리적 언어에 의해 다 통제하고 포착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우직한 착각인것 같아요. 인간성의 구조의 깊이와 복잡성에 대한 탐구가 깊어짐에 따라 "세계의 합리적 조직화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융은 술회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삶의 이성적 기획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인간 능력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보아야겠지요. (93-6쪽)

 

 

 

 

 

아인슈타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적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모든 참다운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볼까요? "신비의 감정에 낯선 인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가장 높은 지혜와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며,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을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만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 -- 그것은 모든 종교성의 중심을 이룬다. 이런 의미에서만이 나는 경건하게 종교적인 인간에 속하고 있다. 인간 존재는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서 생각하고 느끼는 경험은 일종의 의식의 광학적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착각은 일종의 감옥인데, 거기서 우리는 개인적 욕망의 세계로만 제한되고,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몇 사람에게만 애정을 갖게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자신을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비심의 권역을 넓혀서 살아 있는 모든 것, 모든 자연을 그 아름다움 속에 포용해야 한다. 누구도 이것을 완전히 성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취를 위한 노력은 그 자체로 해방의 일부가 되며, 내면적 안전의 토대가 된다."  (87-8쪽)

 

 

 

 

그런데, 그런 문명 사회를 이루는 데 여러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게 바로 문자란 말이에요. 문자가 나옴으로 해서 평등 사회가 무너진 것이에요. 동양에서도 가량 도가 사상은 문자나 지식 행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거부감을 끊임없이 표현해 왔는데, 이것도 그냥 관념적인 문명 비판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 지금 우리가 당장 문자 없는 삶을 구상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상적인 인간 질서, 인간 공동체에 있어서 우리가 누릴 수 잇는 문학 형태는 아마 문자를 벗어난 문학 생활일 거예요.

인도 사람들은 서구 지식인들이 인도의 문맹률이 높은 것에 대해 걱정으 하면, 아니 인도 사람들이 전부 글자를 깨쳐서 신문을 다 보기를 원한다면 히말라야의 나무가 한 그루인들 살아 남겠느냐고 반문한다고 하잖아요. 이런 이야기는 터무니 없는 듯하지만, 앞으로 지구 사회가 나아갸야 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해 깊이 시사하는 게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종래의 방식대로 지식 생활을 한다면, 지구가 살아 남을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거든요. 집집마다 책이 수백 권씩 있고, 매일 몇 십 페이지나 되는 신문을 잠깐 보고 버리고, 또 매일 같이 수십 장의 종이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면, 지금 인류의 10분의 1이 이렇게 해도 지구가 못 견뎌 하느데, 그런 생활이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겠어요? 조만간 생태계가 붕괴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해요.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차워의 구비 문학에 대해, 지금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일지 모르나,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생태학적 사고라는 것은 문명화 이후 인류가 당연지사로 여겨온 관습과 가치 전부를 뿌리로부터 다시 검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문자 중심의 문명 생활의 문제도 근본적인 각도에서 새로이 짚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128-9쪽)

 

 

 

 

그런데, 요즘 어디서 읽은 내용입니다만, 독일 튀빙겐 대학의 심리학 연구팀이 20년 동안 조사를 하고 연구 결과를 발표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연평균 1퍼센트의 비율로 청소년들의 감각 능력이 퇴화해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20년에 걸쳐 그 이전에 비해 20퍼센트나 감각이 둔화되었다는 거예요. 예전에는 미세한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즈 세대는 어지간한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대뇌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뇌간에 망상 구조라는 것이 있는데 그게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요. 예전 청소년들에게는 조그마한 소리도 그 망상 구조에 반응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작은 소리들은 아예 거기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큰 소리들만 들리는 것이죠. 시각 능력도 그래요. 전에는 가령 붉은 색 계통이라면 360개나 가려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붉은 색 중 분간할 수 있는 것은 100개 정도로 줄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뻘건 색깔이 아니면 식별하지 못한다는 얘기에요. 이런 보고 내용을 보고 새삼 놀랐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모양을 보면서, 전자 오락실의 굉장한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든지, 늘상 소음에 가까운 음악을 즐겨 듣는 것을 보면서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이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거예요. 이미 감각이 둔화디어 아주 충격적인 것들에만 반응할 수 밖에 없게 된었다면, 그 심성은 자연히 거칠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사실이 게 제일 문제란 말이죠. 하기는 20년 전의 사람들도 그 보다 훨씬 옛날 사람들에 비하면 무척 감각이 둔화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이 인간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급격하고 가장 심각하게 환경이 변화하고 손상되어 온 시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기에 아마 감각 능력에 가장 급격한 쇠퇴가 일어났다고 볼수 있겠지요. (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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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13장 요약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



‘불임여성 돕기’에서 ‘생식대안’으로


새로운 생식기술에 대한 논의는 대개 불임남녀에게 ‘친자식’을 갖도록 해주고자 개발되었다는 암묵적 가정에 기초한다. 그러나 1985년 본에서 열린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에 반대하는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이 새로운 기술의 목적이 오히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생식산업을 진흥시키려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로리 앤드류스의 「생식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의 시각」과 「나의 신체, 나의 재산」이라는 논문이 이런 주장의 증거이다.

앤드류스의 저술에서는 이전 시대의 ‘불임여성’ 혹은 ‘불임부부’라는 용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대신 ‘생식대안’, ‘생식옵션’, ‘생식선택권’, ‘생식자율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녀는 “낙태와 피임에 관한 생식선택권을 뒷받침하는 헌법적 토대는 인공수정, 태아 기증, 대리모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자율성도 보호”한다고 말한다.

생식선택권을 옹호하는 럿거스 활동그룹은 ‘생식선택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헌법적인 낙태권을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②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불임수술을 받거나 거부할 수 있는 그/그녀의 헌법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③ 임신을 예정일까지 수행하는 개인의 선택권.

④ 수정된 난자의 착상을 막거나 그 밖에 수정 전, 수정시, 혹은 수정 직후에 사용되는 다른 방법으로 임신 회피용 약이나 기타 물질의 합법적인 처방을 얻거나 사용하는 개인의 선택권.

⑤ 체외수정, 인공수정 등을 통해서 임신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권.


그러나 로리 앤드류스는 여기에 “누구라도 성적 접촉 없이 자신들의 자녀를 ‘만들’ 가능성”까지 포함시킨다. 물론 ‘생식대안의 자유로운 서택’은 또한 ‘대리모’와 여러 형태의 계약을 맺을 권리를 의미하며, 뒤집어 말하면 이른바 ‘대리모’가 될 여성의 ‘권리’까지도 의미한다.

하지만 앤드류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는 여성들과 ‘대안적 생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인 유전자 심사 및 의료심사는 옹호했다. 이러한 틀은 자궁은 들어냈지만 난소는 온전한 여성들의 대리모의 도움으로 ‘유전자 엄마’가 될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유전자심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녀는 ‘생식대안들’이 아주 새로운 가족구조를 만들어낼 것이라 보았다. 새로운 기술 덕택에 이제 한 아이가 여러명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앤드류스에 의하면 현행 가족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이런 복합적 부모-자녀 관계로 야기되는 법률적 문제는 임신 전에 누가 유전자 부모가 될 것이며 누가 임신한 어머니가 되고 누가 사회적 부모가 될 것인지 등을 명시하는 계약을 맺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까지 계약법이 침투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뜻한다.



대리모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뉴저지 판사 하비 쏘코우는 1987년 메어리 베스 화이트헤드 소송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의 권리보다 계약법을 더 중하는 판결을 내렸다. 쏘코우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생식이 보호받는다면 생식의 수단도 보호받아야 한다. 가족을 탄생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가치와 관심은 어떤 수단이 되든 동일한 것이다. 본 법정은 수단의 보호가 대리모의 이용까지 포함한다고 본다. 제3자를 이용했다고 해서 계약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 기증자나 대리모는 수태와 임신의 인자를 제공함으로써 아이 없는 부부를 보조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앤드류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대리모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기매매라는 비판에 대하여 판례를 들어 반박하는데, 실제 법정에서는 출산 후 아이를 포기한다는 결정이 임신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관해 충분히 인진한 냉정한 상태에서 계약서에 동의한 이상 그것을 아기매매라거나 여성착취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빈민여성들이 ‘번식자 여성’이란 새로운 계급으로 변모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여성들이 대리모가 되거나 생식체나 난자를 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 여성들이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성숙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스스로 대리모계약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성운동이 이룬 성취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 체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계약이 존중되어야 하고, 대리모계약도 존중되어야 하며, 생식과 관계된 모든 과정과 관계들을 우리의 자연적 존재의 일부로 여기던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인 모든 법률조항들을 도려내어 시장법칙인 계약법의 규율 아래 두어야만한다.

대리모가 지불받는 것은 오로지 ‘생산품’인 아이에 대해서뿐이다. 그리하여 대리모는 여성의 가사노동 착취와 유사하게 기능하는 새로운 ‘청부산업’이 되었다. 기업가(남성)은 원료의 일부(정자나 그가 사들인 기증난자)와 ‘임신수행자’ 여성에 대한 대가를 선지급한다. 그러나 생산품은 양도되어야 한다. 즉 생산자로 하여금 그들이 생산한 물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들이 하는 일이 소외된 노동이란 점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생식자율성’, 즉 출산과정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며 기술적, 사회적으로 가능한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모든 새로운 생식기술로의 자유로운 접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장치를 함축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식기술의 ‘진보 덕택에 이제 생식행위가 시장에 통합되었으므로 출산은 곧 네 것과 내 것을 사고 파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에는 계약이 필수적이다. 대리모이든, 수정란이나 그 밖의 ’생식재료‘를 파는 것이든, 혹은 체외수정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것이든, 이러한 계약에 들어가는 여성은 더 이상 자율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육체나 생식력과 상호작용 할 수가 없다. 생식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이제 이윤과 명성을 추구하는 기업과 ’첨단 의사‘들이 좌우하는 전격적 상업화에 여성의 생식력과 육체를 무방비로 열어놓기 위해 사용된다.



나의 신체, 나의 재산?


그녀는 생식과 관련된 우리 신체조직 뿐 아니라 혈액, 정액, 조직, 세포 등 모든 다른 기관과 물질들도 신체 소유자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생식기술의 발전으로 이제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생식체나 수정란을 의사나 실험기술자나 보건시설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가 재산으로 간주되자 않는다면, 산체 물질을 타인에게 맡긴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후에 신체기관과 신체물질을 매매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살아 생전부터 이미 팔린 해부용 시체로 걸어다니는 셈이 될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및 사회에 미칠 영향


재산으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개념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장기를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즉 가난한 사람들도 신장 두개만 가지고 있다면 ‘자본’소유자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신장은 한 개에 5만 달러 나간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복지급부 대상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다.

그녀는 도한 신체를 재산으로 규정하게 되면 인간 존재의 온전함이 파괴된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윤리적 문제도 간과한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조건에 대한 이분법적 규정에 근거해 육체를 파는 것이 정신을 파는 것(이를테면 지적재산권 같은)에 비해 더 나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해방에서 국가통제로


앤드류스는 생식기술의 잠재적 이용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적합성 여부에 대한 심사에는 반대하면서도 정자기증자나 대리모들에 대한 의학적, 유전적 심사의 필요성에 이르면 딜레마에 빠진다. ‘임신과 수태의 인자’들과 다른 신체기관의 시장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받는 쪽에서 유전적, 전염성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여기서 국가가 잠재적인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필요가 생긴다. 국가통제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은 의료소송에 대한 병원과 의료진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AIDS에 대한 공포로 인해 더 가속화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살거나 전체주의에 살거나, 또는 영국처럼 사회화된 보건체계이건 미국처럼 사적인 체계이건 상관이 없다.

유기적 혹은 비유기적 전체를 점점 더 작은 입자로 쪼개어 새로운 ‘기계들’로 재조립하는 데는 선택과 제거라는 우생학적 원칙이 깔려 있다. 바람직한 입자는 선택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입자는 제거된다. 생식의 영역에서 이러한 분해, 즉 ‘분리하여 지배한다’는 원칙은 임신한 여성을 ‘모체’와 '태아‘로 나누는 데서도 나타난다. 실제로 점점 많은 생식기술자들이 여성의 자궁을 태아에게 ’위험한 환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모체와 태아간의 이러한 새로운 적대를 규제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은 태아를 법률적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그들은 태아를 모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태아권리‘를 갖는 한 인간으로 보기 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태아보호법‘과 이 법을 시행할 국가적, 법적 기제를 요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태아가 환자로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결함이 있는’태아는 제거하거나 유전자치료로 손을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벌써 이른바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몇몇 있다. 결함이 있는 태아를 제때 발견하여 유산시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송이 산모를 향해 제기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배상법 전문가 마저리 쇼는 “태아가 살아서 태어날 경우, 태아에 대한 태만행위에 대해 ‘장래에 관한 조건부 책임’을 지게 된다. 이 행위는 산모의 태만으로 인한 태아학대로 간주되며 손상을 입고 태어난 아기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 임신 중 알코올 남용, 필요한 산전관리의 소홀, 부족한 영양섭취 등은 아기가 손상을 입은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 아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날 자신이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임신기간 중 의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은 감옥에 갇혔다. 물론 이에 적합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공소가 기각되었으나,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한 의원이 즉각 ‘모성태만’ 혹은 의사의 지시에 대한 ‘의도적 무시’의 사례를 다룬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분면 자넷 갤러허가 지적한 대로 “가임기의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복종과 강제의 체제로 이끌 것이다. 달리 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모든 여성에게 매달 집행되는 임신검진과 조깅, 음주, 노동에 대한 허가서 발급? 병워이 감옥이 되고 의사가 경찰이 되면, 산전관리가 가장 필요한 임부들(가난한 여성, 어린 여성, 약물 남용자)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산전관리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앤드류스가 표명한 자유주의적 입장과 생명권운동의 주장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보인다. 앤드류스는 생명권운동이 낙태에 간한 자유주의적 입법을 철폐하려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 특히 생식기관들이 재산, 즉 물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생식자율성’이란 여성에게 소유자로서 이 재산을 몇 번에 나누어 팔거나 임대하는 등의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신한 여성은 태아의 주인이고, 태아는 물건이 된다. 임신한 여성과 그 녀의 태아 사이의 공생관계 그리고 양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살아 있는 관계는 상징적으로 파괴될뿐더러 새로운 생식기술에 의해 현실적으로도 파괴되는 것이다.

한편 생명권운동은 태아가 법률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이며 임신한 여성의 임의적 간섭행위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고자 한다. 이 경우 역시 여성과 태아의 공생관계는 최소한 상징적으로 파괴되며 여성은 아이의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여성의 신체 내에서 여성 자신과 태아 사이에 적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둘 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앤드류스의 주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여기서 인간이란 신체 각 부분과 기관들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하므로 물건으로서의 인간과 사람으로서의 인간 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생명권운동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이란 결국 그녀/그의 신체기관의 주인 또는 매매인이다. 자유주의적 입장과 보수주의적 입장이 만나는 곳이 바로 부르주아적 재산 개념과 생식기술의 ‘진보’에 기초한 이런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과학적 식인풍습이다.



개체에서 조합으로


앤드류스에 의하면 여성이 자기 신체에 소유주가 못되는 지금의 상태로는 자유로울 수도, 평등할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여성들이 신체기관들을 사고 팔 수 있기 위해 자기 신체의 소유주가 되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듯싶다. 하지만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며 이는 다시 한 사람의 ‘온전한’ 여성 --분해되지 않은--은 자유로울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그렇다면 사고 파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개인--즉 나누어지지 않은 인간--이 팔 수 있는 부분들로 나뉜다면 그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계속해서 나눌 수 있는 조합만이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부분으로 분해되고 팔리고도 계속 ‘주인’과 ‘판매자’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모든 부분을 떼어내도 좋고 팔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핵심부분 즉 남아 있는 ‘주체’는 무엇인가? 두뇌인가? 지정된 주체가 없다면 자율성과 자기결정에 대한 모든 논의는 결국 공허할 따름이다. 계약서를 쓰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주체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주체 즉 개인이 이론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제거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각 부분들의 조합뿐이다. 부르주아적 개인이 스스로를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신체 내에서나 사회체제 내에서나 윤리적인 질문을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관계없는 부분들만 남은데다 각각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처럼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자화되고 적대적인 부분들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한데 유지시키는 국가를 필요로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국가조차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아니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기제이다. 이 기제가 인간의 가치를 경정하여 신장은 하나에 5만 달러, 자궁은 빌리는 데 1만 달러가 되었다. 이제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 그리고 남성 --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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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중에서

123-125쪽


한편 죽은 자는 어떨까? 죽은 자와의 사이에 ‘합의’가 성립할 수 있을까? 우리는 장례식에서 죽은 자를 애도한다. 이것은 근대의 풍습이 아니라 원시시대부터 있었다. 비코(Giovanni Battista Vico, 1668~1744)는 이미 18세기에 “장례가 없는 사회는 없다”고 지적했는데,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 있는 자를 원망해 재앙을 불러온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장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을 믿지 않더라도 장례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장례의 목적은 죽은 자를 제외한 사회적 관계의 체계를 재확립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의 차이를 생각하면 분명해진다. 행방불명이 된 사람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없는 관계 체계를 반들 수 없다. 예컨대 남편이 행방불명일 때 아내는 재혼할 수 없다. 남편이 돌아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단순히 생물적인 죽음이 아니라 사회적인 승인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를 정리하고 ,그가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영혼으로 머물며 산 자를 원망한다는 생각은 그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것은 특별히 그 죽은 자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재 때문에 불안정해진 공동체를 재확립하기 위해서고, 그 사람을 잊고 추방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에서는 전사자를 추모하고 있다. 또한 가토 노리히로라는 문예 비평가는 먼저 일본의 전사자를 애도하고, 그런 연후에 일본에 침략으로 죽은 아시아의 사자들을 애도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전후 일본인의 자기분열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애도한다’는 것은 마치 죽은 자와의 사이에서 ‘합의’가 성립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가 ‘타자’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은 자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자는 어떠한 현실의 대상도 아니다. 죽은 자는 자신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산 자 안에 무엇이 있는가를 끊임없이 밝히는 기회며, 혹은 산 자가 그에게는 이미 현존하지 않는 죽은 자에 대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죽은 자에 대한 의무 역시 안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변하는 법이 없다. 여기에서는 그대가 진 빚을 그의 탓으로 돌릴 변명의 가능성을 전혀 생각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그는 신실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렇지만 그는 어떠한 현실도 아니다. 그는 그대를 붙잡기 위해 무엇 하나, 정말이지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마약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했다고 한다면, 그 경우 적어도 산 자가 변했음에 틀림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랑의 기술”, 『키에르케고르 저작집』)


이것은 죽은 자가 바로 ‘타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은 자와 교섭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와 죽은 자의 관계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지 뭔가 변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애도한다고 해서 죽은 자가 변하겠는가? 단지 그로써 산 자의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뿐이고,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관계가 변하는 것이다.


 

 

 

 

157-169쪽


(일본이 저지른 태평양 전쟁에 대하여)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때 전쟁책임을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옥중에 있었던 비전향 공산당원들이다.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을 심화함에 따라 비전향자들은 그만큼 신성화된다. 진지하게 책임을 생각할수록 전향하지 않은 당 지도자는 위대해진다. 전후에 일본공산당이 가졌던 권위는 여기에 있었다. 이것이 전후의 정치와 사상을 왜곡시켰다.

이에 대해 오다기리 히데오는 「문학에서의 전쟁책임에 대한 추궁」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문학에서 전쟁책임이란 다른 무엇보다 우선 우리 자신의 문제다. 우리 자신의 자기비판에서부터 이 문제는 시작된다. 자유의 세계에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쟁중의 우리가 어땠는가를 스스로 추궁하고 검토하며 비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이 10년 동안 일본문학의 놀랄 만한 타락과 퇴폐에 대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밝혀나가고자 한다.


이 성명에 대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그들은 공산당 계열의 문학자였다. 더군다나 전쟁 전에 전향하고 전쟁 중에는 소극적․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반성은 무엇보다도 당을 배반했다는 것에 있다. 이 때 ‘전쟁책임’은 ‘전향’에 대한 책임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완수된다. 혹은 그들의 '상처‘는 그것에 의해서만 치유된다. 그리고 그들은 공산당원으로서 이미 반성을 표명했기 때문에 ’반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규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대량의 전향자를 낳았던 공산당의 현실인식 및 조직적 체질에 대한 반성은 없다.


(...)


(비전향=선, 전향=악이라는 도덕적 구별에 대해) 마루야마 마사오는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공산당 -- 더 정확하게는 비전향 공산주의자가 전쟁책임의 문제에 대해 가장 꺼림칙하지 않은 입장에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이 모든 탄압과 박해를 견디며 파시즘과 전쟁에 대항해온 용기와 지조를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쓰루미 슌스케가 비공산주의자는 전쟁책임을 지는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을 포함한 합의 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 것은 정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굳이 거론하려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전위 정당으로서의, 혹은 그 지도자로서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름 아닌 공산주의자 자신의 발상에서 이 양자의 구별이 종종 혼란을 일으키고, 명백하게 정치적 지도의 차원에서 추궁되어야 할 문제가 어느새 공산당원의 ‘분투하는 모습’으로 해소되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당면한 물음은 공산당은 애당초 파시즘과의 싸움에서 이겼는가 졌는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 책임은 결과에 대한 준엄한 책임이며, 더욱이 파시즘과 제국주의에 대해서 공산당의 입장은 일반 대중과 달리 단순한 피해자도 아니고 더더구나 방관자도 아니며 바로 가장 능동적인 정치적 적수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것과 일본의 전쟁 돌입이 설마 구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패장은 비록 그 자신이 아무리 최후까지 버텼다 하더라도 여전히 패장이며, 예상외로 적의 포격이 치열했다거나 그 수법의 잔인함, 아군 진영의 배신자 등을 이유로 들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전략과 전술은 바로 그러한 일체의 요소를 내다보고 세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을 가혹한 요구하고 한다면 처음부터 전위당의 간판 따위는 내걸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것을 진작 알고 있었다고 한다면 ‘죽어도 나팔을 놓지는 않았습니다’라는 식으로 저항을 자찬하기 전에 국민들에게는 일본 정치의 지도권을 파시즘에 넘겨준 점에 대해,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침략전쟁 방지에 실패한 점에 대해, 각각 당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유효한 반파시즘 및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던 이유를 솔직 대담하고 과학적 검토를 덧붙여 그 결과를 공표하는 것이 지당하다. 공산당이 독자적인 입장에서 전쟁책임을 인정하는 것은 공산당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나 자유주의자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고 통일전선의 기초를 강고히 하는 데도 적지 않게 공헌할 것이다.

(「전쟁책임론의 맹점」, 『전쟁과 전후 사이』)

 

(...)

그러나 마루야마는 공산당의 전쟁책임을 말할 때, 어디까지나 비전향자에 대한 도덕적 경의를 버리지는 않았다. 전쟁 중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채 방관자로서 보냈던 마루야마는 ‘비전향’ 지도자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앞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다.


(...)

나의 욕구로부터는 전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료하다. 그것은 일본 근대사회의 구조를 총체적인 비전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일어난 사고변환을 가리킨다. 따라서 일본 사회의 열악한 조건에 대한 상상적인 타협, 굴복, 굴절 외에 우성유전의 총체인 전통에 대한 사상적 무관심과 굴복은 전향 문제의 중요한 핵심 가운데 하나다.

(「전향론」)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이론과 현실의 어긋남을 무시하고 이론에 집착하는 ‘비전향’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향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고바야시 다키지, 미야모토 겐지 등의) 이러한 비전향은 본질적인 비전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와 대조적인 의미를 지닌 전향의 한 형태였고, 전향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전향은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접촉 없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사이클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요시모토 다카이키는 여기에서 그때까지 도덕적으로 보였던 내용을 인식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전향자가 존경받는 것은 죽음의 공포와 육체적 고통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시모토와 같은 전쟁세대에게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전쟁에서 죽을지 모르는 운명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옥중 생활 17년 같은 일은 그에게는 그다지 충격이 아니었다. 그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최대한 열심히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놓인 상황을 인식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좌익적인 담론이 두절된 시대에 자랐고,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어떻게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하려고 했던 학생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전쟁 중에 대동아공영권(아이사의 식민지 해방)을 믿은 파시스트였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 시기 대학생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내용일 것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에게 용서하기 힘들었던 것은 자신의 무지였다. 앞에서 나는 무지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을 논했다. 전쟁세대들은 우리는 몰랐다, 배우지 못했다, 속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토는 무지에도 책임이 있다는 태도를 취했다. 무지에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책임을 지면 되는가?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도덕성에 대한이 비판은 그 자체가 극히 윤리적이라는 사실이다. 요시모토는 미야모토 겐지와 같은 ‘비전향’을 전향의 한 형태로 봤을 때, 실은 ‘본질적인 비전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지향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이후 ‘현실적 동향 및 대중적 동향’과 함께 말 그대로 전향한 사람들이 그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떠받드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요시모토 다카아키가 경박하게 전향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 전후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일본의 ‘봉건유제’에 대한 대결 의지가 사라져버린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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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사상> 7월호 노회찬 인터뷰 메모

29-31쪽

 

[인터뷰어] 지강유철 : (...) 지식인의 사명이 바판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국민들이 세대와 성별을 망라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상중에 일부 지식인들이 쓴 글들을 읽는 일은 괴로웠습니다. "그 죽음 앞에서 한 달을 지속 못할 입에 발린칭송도 싸구려 신파조의 추억담도 모두 접"으라니! "이상주의자 노무현과 오만한 신자유주의자 대통령 노무현을 동시에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하되 기억해야" 한다니요. 비판이야 자유지만 국민들을 깔보는 언사는 불쾌합니다. 최소한의 예의는 좀 지키자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너무 쉽게 잊는다는 걸 기정사실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식인들의 생각은 반쯤만 옳습니다. (...)

 

[인터뷰이] 노회찬 : 저도 그런 지식인들을 곳곳에서 봤습니다. 물론 지식인 전체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이 문제가 진보니 보수니 하기 이전에, 개혁이니 민주 이전에,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예와 품격을 지켜야 하는가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지요. 다른 쪽에서 추모 인파를 비판하는 것은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나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부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면, 바로 그런 사고가 국민들과 진보세력의 간격을 좁히지 못하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과 진보세력의 거리감은 그냥 생긴게 아닙니다. 뿌리가 있는 겁니다. 이성적으로는 맞는 말일지라고 상중에는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식인들은 사안 자체를 정확하게 못 보고 있습니다.

사실 촛불 같은 경우도 한 없이 미화만 할 문제는 아니거든요. 그 긍정적인 에너지를 예상도 못했던 사람들로서 '왜 우리는 예상을 못했는가', '우리는 촛불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따위의 문제를 정확하게 보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나서서 불을 지피면 언제든지 촛불이 타오를 것처럼 오버하면 안되죠. 물론 촛불도 한계가 있습니다. 작년에는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만 용산참사 때는 그렇게 모이지 못했습니다. 시대적인 한계라는 게 있거든요. 때문에 지식인들이 자기들이 가르치면 사람들 의식이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건 또 다른 극단적 사고라고 봅니다.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3.1운동 끝났다고 독립운동이 끝났습니까? 3.1운동도 사회고학적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흐름에 영향을 미친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유사하지만 3.1운동과 다른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밑으로 다 연결돼 있는 거죠.

 

 

38-39 쪽

 

노회찬 :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1987년의 성과 이전으로 되돌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19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야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6월 항쟁은 민주 대 반민주가 승리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다시 권위주의 시대로 회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일시적으로 이명박 정부와 같은 반동의 시기는 있을지언정 민주화를 완가앟게 역전시킬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제 명시적인 반민주 세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민주 출신인 한나라당조차도 자기의 과거를 지우고 문신도 지우고 자신들이 국민을 먹여 살리는 보수라며 변신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시대의 한 축이 될 수 없거든요. 여기에 맞서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반민주세력을 상정하여 민주세력 다 모여라, 이렇게는 잘 안될 겁니다. 지난 대선도 그래서 실패했거든요.

이제 국민들은 모여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냐고, 너희들에게는 어떤 대안이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6월 정신을 계승하면서 이제는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수용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6월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정권을 담당해왔습니다만 이 정권들은 7~8월의 노동자 대투쟁을 무시해왔습니다. 6월의 정신과 노동자대투쟁이 만나야 합니다. 노무현 정신은 구시대의 막내가 아니었습니다. 새 시대의 맏이의 지위에 있었던 겁니다. 다만 노무현의 현실이 구시대의 막내였던 것이고, 그 괴리감 때문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거죠. 이제는 노무현 정신을 정신으로만 계승하면 안 되고 온전히 그 정신을 실현하는 데까지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추억을 팔아서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더라도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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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중에서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존재의 깊은 어둠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적/유럽적 철학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적 정신이 보여주는 존재의 슬픔에 대한 감수성이 아무리 예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적 정신 속에서 눈물과 슬픔은 아름다움 속에서 지양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모든 눈물은 함께 모여 아름다운 시내와 숭고한 바다를 이루기 위해 흐르는 것인가? 아니다. 얼마나 많은 피가 까닭도 없이 흘렀으며, 얼마나 많은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렸던가! 그렇듯 시인이 아름다운 수정 항아리에 담아낼 수 있는 눈물은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하물며 황소와 개미와 나무의 슬픔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인간이 흘린 눈물의 억만분의 일이라도 아름다운 형상 속에 담아내는 시인들이 있음에 대해 우리는 고마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눈으로 인간의 눈물을 파악하려 할 때, 그는 어김없이 인간의 슬픔을 모독하게 된다. (...) 마치 화가가 세상의 모든 색깔을 화폭 위에 불러모아 전체로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내듯이 이들 철학자들은 존재의 모든 모순과 슬픔을 총체성의 개념 속에서 지양하고 해소하려 하였다. 시인이 고통을 아름다운 형상에 담아 노래할 때, 그는 적어도 슬픔 속에 있는 사람을 위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철학자가 시인의 흉내를 내면서 인간의 슬픔과 존재의 어둠을 하나요 모두인 청체성의 이념 속에서 해소하려 할 때, 그는 오직 자기와 남을 모두 속일 수 있을 뿐이다.

 

(...)

 

철학은 물음이다. 그리고 모든 물음은 정신의 동요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종류의 동요인가? 우리의 철학자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도덕성"에 대한 동요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먹고 먹히는 세계에 대한 어떤 도덕적 동요이다. 모든 슬픔은 슬픔의 부정을 자기 속에 본질적 계기로 갖는 것이므로, 우리가 슬픔에 참여할 때 우리는 언제나 슬픔을 부정하게 된다. 그것이 절망적 현실에 대한 도덕적 동요와 거부감, 즉 모든 눈물과 모든 슬픔을 거부하는 우리의 양심이다. 이렇게 하여 철학은 모든 지음받은 것들의 눈물과 슬픔 앞에서 참을 수 없이 일렁이며 동요하는 우리의 양심의 소리, 양심의 논리를 따르는 생각의 여행길이 된다. 박동환은 이 길을 가리켜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이라 불렀다.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려가는 것"이다. 낮아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양심이다. 생각하면 양심이란 굳이 철학에서가 아니라도 흔하디 흔한 상투어이다. 그러나 양심을 말하는 것은 쉬워도 내려가 낮아지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려가 낮아지지 않은 정신이 추구하는 양심은 십중팔구 독선에 떨어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타자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게 마련이다.

생각하면, 서양철학은 양심적이다. 오늘날 땅 위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은 서양정신의 선물이다 .그런 한에서 양심을 말하는 것은 진부한 상투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서양철학이 양심적인 것은, 아름다움이 선을 포함하는 한도 내에서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서양의 양심은 마비되고 침묵한다. 그리하여 비할 데 없이 숭고하고 순결한 영혼을 가진 철학자들이 범해서는 안 될 오류를 범한다. 절대자의 지ㅏ리에 선의 이데아를 놓았던 플라톤이, 단지 장애아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태연히 영아살해를 승인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어떤 종류의 자연적 지배도 인정하지 않았던 루소가 놀랍게도 여자는 자연적으로 "남성이라는 존재에 복종하도록 만들어졌으므로 일찍부터 부정(不正)에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과 루소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볼 수 없는 양심의 일관성, "양심의 진리"를 다른 철학자에게서 기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약자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을 하지 않고 책을 끝맺는 철학자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모두 서양정신이 양심은 알았지만 내려가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들은 높이 치솟은 정신의 숭고를 알기는 했으나 "양심으로 내려가는 것"을 알지는 못했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양심과 야만의 싸움의 과정이었다. 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직 인간의 정신이 높이가 아니라 내려가 낮아지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 참된 의미에서 양심은 꽃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낮은 곳에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자만이 그렇게 양심으로 내려가는 길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 365 ~ 368쪽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동일성과 자기정체성을 순수히 내재적으로 정립해오지 못했다. 내적인 공동체 구성의 논리에서 이미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자유와 자율성의 실현을 그 이상으로 삼아왔고, 대외적 관계에서도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단 한 번도 이질적 문화 ,적대적 세력에 의해 전면적으로 정복당해 본 적이 없는 서양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든 자율성과 주체성을 추구하고 실현해온 역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개항 이후 식민지 경험과 역사의 단절은 우리의 역사를 내재적 동일성의 원리에 따라 파악하려는 시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서구 문명과의 만남 이후 주체적인 자기부정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극복하기 전에 외세에 의해 부정당했다. 모든 주체적 변혁은 좌절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외세에 의해 철저히  수동적으로 규정되고 부정되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

 

스스로를 내재적으로 정립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서양적 자율성과 주체성이 자기의식의 유일한 전범이요 원형이라면, 그리하여 우리 역시 주체적 겨레로서 자기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서양적 자기의식의 길을 따라야만 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양문명의 불완전한 모방자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초라해 보일 때, 우리의 가난을 신뢰하고 우리의 부끄러움 앞에 정직하자. 그리고 모든 전해들은 철학의 오염에서 벗어나 근원적 물음 앞에 마주서자. 도대체 우리는 언제 우리 자신을 하나의 주체로서 정립하게 되는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자기를 반성적으로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할 때이다. 우리는 주체적 자기의식을 통해 자신을 근원적으로 정립하고 자기를 능동적으로 규정함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에 내용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의식과 자기 규정은 오직 나의 자기반성 속에서만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의식을 통한 자기정립의 모든 비밀은 바로 이 의식의 자기반성에 놓여 있다.

그러나 나의 자기반성이란 무엇인가?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은 그것을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타자적 관계로 이해했다. 나는 그 자체로서 나 자신에 대하여 타자이다. 내가 남이 아니라 나 자신과 타자적인 관계 속에 있을 때, 그것이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 타자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내가 나에게 인시적 대상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내가 나에게 '그것'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여기서 자기의식성의 타자성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비인격적 대상성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모든 오류가 시작된다.

칸트든 헤겔이든 의식의 자기반성을 본질적으로 의식의 자기규정으로 이해한 점에서 독일관념론의 자기의식 이론은 근본적 오류속에 빠져 있다. 즉 그들은 모두 자기반성을 능동적 주체인 내가 수동적 객체인 나를 의식하고 규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반성을 설명할 때, 자기의식은 나의 나 자신에 대한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과 인식적 관계를 맺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나를 의식할 때 나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나를 타자적으로 의식하되 물건이 아니라 인격적 주체로서 의식한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그들은 내가 나를 대상적으로 의식한다는 이유만으로, 의식되는 나를 3인칭의 '그것'으로 사물화시켰다. 그리하여 자기 의식에 의해 개방되고 지탱되는 세계에는 오직 주체인 '나'와 객체인 '그것'이 존재할 뿐이다. 이들 이외에는 신이 있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자애로운 신이 나의 삶에 심술궂은 간섭을 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능동적인 주체로 군림할 수 있다.

 

(...)

 

이 모든 오류는 그들이 의식의 자기반성을 자기규정이라고 생각한 데 기인한다. 그러나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나 앞에 마주서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내가 마주한 나는 결코 사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물이 아니라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반성 속에서 나와 마주설 때, 마주서는 나의 이름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마주선 사물을 향해 '그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 앞에 마주선 인격은 '그것'이 아니라 '너'이다. 그리하여 나의 자기반성이란 나를 내가 대산적으로 규정하는 자기규정의 행위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 건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기규정이 아니라 자기와의 대화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규정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자로 마주서는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자립적인 너로서 대립하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너와의 관계, 너와의 대화 속에서만 나를 실현한다.

내가 너와 관계할 때, 나는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내가 능동적이듯 너 또한 능동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식의 수동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이전에 나의 너에 대한 의존성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가 나의 수동성과 의존성을 배제한 채 나의 자기의식의 진리를 해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자기의식의 본질을 왜곡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자립적인 너를 나 속에 품을 때에만 내가 된다. 나는 너에 의해 침투되어야 하며 또한 너 속에서 나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나와 너의 이러한 상호이행 속에서 내가 나르 상실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된 나르 실현하지 못한다.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내재적으로 자기의 동일성을 정립하고 자기를 ㄸ환 내저적으로 부정하려는 사람은 결코 참된 의미의 자기에 이를 수 없다. 오직 너를 위해 자기를 양도하는 자만이 기르고 너로 인해 자기를 상실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기, 참된 나에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식이 란 나와 그것의 상호이행이 아니라 나와 너의 상호이행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내가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고 나 속에서 너를 품고 너와 대립하는 것은 내가 나 속에서 나 아닌 너를, 자립적인 생명을 잉태하기 위함이다. 자기의 동일성이 파괴될까 두려워 자기 속에 너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 너 속에서 나를 상실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려 한다. 그러나 너를 사랑할 줄도 모르며 너로 인해 나를 상실할 서양적 자기의식은 병든 나르시시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자기도취와 나르시시즘에 뿌리박고 있는 서양정신은 영원한 처녀신 아테네처럼 품위와 단정함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고 어떤 새로운 생명도 출산할 수 없는 불임의 지혜이다. 그리하여 서양 문화는 아무리 우아해 보인다 하더라도 타자를 이용하고 소비할 뿐, 참된 의미에서 타자를 잉태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불임의 문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임신 중이다 .임신은 오직 너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리고 너를 나 속에 품게 된 나는 홀로 있을 때의 안정과 균형을 상실한다. 너를 나 속에 품은 정신의 동요는 임신한 정신의 입덧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아무리 어지럽게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가슴의 울렁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게 느끼는 낯설음과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우리 의식의 철저한 부정성을 기꺼이 긍정하자. 이 모든 혼란과 고통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 모든 이들이 견뎌야 할 입덧이므로.

 

- 374 ~ 379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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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3장 요약

제3장. 노동진영의 몰락



1983년말, 레이건의 ‘경기회복’이 한창인데도 또 한차례의 양보와 임금삭감 물결이 AFL-CIO의 핵심부에까지 파고들어 노동평화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현재 기업들은 상시적으로 노조를 파괴하고 있으며,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그들의 작업은 1920년대 초반의 ‘미국적 방식’ 공세 이후 가장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사실상 그때보다 더 놀라운 것인데, 왜냐면 외관상으로나마 영구적인 노사화합을 제도화하고 ‘보장’한 관료적 장치 전체가 변질되거나 혹은 아예 포획되는 일마저 필히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주 인용되는 그람시의 발언을 다시 한번 상기해본다면, “위기란 다름 아니라 낡은 것이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공장 내의 새로운 의사소통망, 이윤공유 임금구조, 더욱 인간적인 경영실천 등을 기반으로 하여 노동자들이 산업에 ‘참여’하는 새시대가 왔다고 경제신문 사설란에서 시끌법석 떠들어댔지만, 노사관계의 새로운 정착이 신속하게 이루어질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이 새로운 질서의 초석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의 자리에는 고참노동자의 특권과 권리를 내주는 대신 직장을 보장받는 것, 그리고 무노조 첨단기업이 채택한 종신고용제(그러나 종신고용인들 뒷주머니에 해고통지서가 찔러넣어져 있는)가 자리하고 있다.


임금관계의 사회화


미국의 산업화관정에서는 계급관계가 토지소유 귀족 계급에 잔존해 있는 온정주의나 혹은 행정적으로 강력한 국가기구의 개입에 의해 조절된 적이 없었다. 실제 미국에서 사회보험이나 보호입법을 제공함으로써 자유방임주의적인 임금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1차대전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생겨났다. 이 시기에 전국적인 규모에서 임금관계를 조절한 적이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이민정책, 노동관계 금지명령(법원이 노동자의 파업이나 농성과 같은 행위를 중지하도록 명하는 강제적 명력) 및 공화당의 관세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기업의 시장지배력과 생산성은 혁신되었지만, 연방정부의 경제규제와 사회적 구매력의 더딘 성장과 마찰을 빚는 상황 속에서는 노동자의 이직률과 생산량의 제한 그리고 공장노동자의 근로의욕과 같은 문제들이 새로운 생산체제의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주요한 장애물이 되었다. 대기업 규모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서, 자본은 노동자를 강제하는 혁신적인 새 기술을 획득했지만, 동시에 가족회사 특유의 낡은 종정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합의의 원천을 찾아낼 필요 또한 한층 커진 것이다.


복지자본주의인가 단체교섭인가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합의로써 강제를 보강하면서 임금관계를 조절해야 한다는 전반적인 문제에 대하여 ‘복지자본주의’적 해결책이 등장하였다. 포드는 국가의 사회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회사의 ‘복지정책’은 단지 산업군주의 의무만이 아니라 높은 생산성의 전제조건이자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달은 최초의 산업가 중의 하나였다.(ex: 일급 5달러 제도) 새롭고 과학적인 인사관리를 통해 공장생활과 가계경제 전체를 관리하는 한편, 생명보험계획, 회사연금 및 주식구매계획 등은 점차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복지자본주의는 내포적 축적체제(regime of intensive accumulation: 조절이론의 개념으로, 자본구성의 상승에 따르는 사회적 노동조직의 심한 변형과 급속한 생산성 증대, 그리고 투자 증대의 계획화를 특징으로 하는 축적체제)에 적합한 노사관계 계획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점 두 가지를 갖고 있었다. 첫째, 종업원의 합의와 대표라는 행복한 외관을 지탱해 준 것은 작업반장과 회사 보안과가 행사하는 일상적인 테러였다. 둘째, 복지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생산성 증가에 맞추어 유효수요를 조정하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전국전시노동위원회(NWLB)는 단체교섭의 제도적, 실질적 질서를 창출하는 터전이 되었다. 작업장에서 고충처리절차를 보편화하고 최종중재의 관행을 확립하는가 하면, 거기서 마련한 임금결정절차는 나중에 산업 전부문에 걸친 임금기준표들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한편 NWLB는 연공서열제 이상의 근본적인 경영자 통제권은 노조에게 하나도 양보하지 않은 채 노동자의 자율조직을 공장질서 속으로 통합시키는 규칙과 절차를 선구적으로 만들어냈다.

미국의 노동관계를 전후의 단체교섭의 형태로 바꿔놓은 것은 자동차 노조와 제너럴 모터즈사 사이의 끈질긴 투쟁이었는데,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1>소득을 임금과 이윤으로 나누는 기존의 분배방식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2>생계비와 생산성과 같은 객관적인 경제적 사실들을 임금결정 요소로 명백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임금은 정치력에 의해 결정되며 이윤은 잉여가치라고 보는 모든 이론을 내팽개치고 말았으며 3>관리기능의 중요성과 경영이 노동자의 이익으로 직접 작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한 몇 안되는 노조협약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미국의 노사관계와 국제포드주의


미국체제의 두드러진 특성은 전국이나 주의 정치권에서 노동자의 독립적인 정치적 대표체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미국에서 단체교섭은 법적으로 대표단에 대한 개인의 동의라는 고전적 자유주의 개념에서 유래된다. 노동조합의 합법성이 개별적인 동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법에 규정된 미국노조의 권리는 잠정적이고 취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우익측의 반(反)노조운동은 항상 ‘개별 노동자의 권리’라는 제퍼슨식의 언어로 수행되었다.

미국의 사회입법은 놀랄 만큼 억제당해왔는데, 그 보상으로 단체교섭의 영역이 확장되어 북지규정의 협상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시민권에 기초한 사회임금(social wage)으로 노동계급에 귀속될 것이 미국에서는 특정한 고용주집단과 그들의 노동자집단 사이의 사적인 계약에 의해 협상된 거치임금으로만 손에 넣을 수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사협약이 일반적으로 단기간 동안 유효한 최소한의 기초만 제공하고 그 나머지 세부사항은 전부 지부단위에서 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노사협약은 구속력이 있으며 협약기간도 오래간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파업금지 규정을 담고 있으며 적용대상이 광범위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그 내역이 극히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필히 상당한 수의 노조관료를 필요로 한다. 미국에서만큼 노사관계가 하위체제적 자율성을 갖고 재생산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법적 관료화와 중재) 이것의 추진논리는 노조관료와 기업경영자가 공모하여 단체교섭의 ‘국가관리’를 방지하거나, 전후 영국에서 독자적인 작업장 대표 조직의 힘으로 성취한 것과 같은 ‘이중권력’의 출현을 방지하려는 것이다.


불웨어주의: 첫 번째 불길한 징조


노사관계 이론가들은 이런 단체교섭을 틀을 물신화한너머지 노동관계와 경제민주주의가 역전 불가능한 ‘성숙’에 달했다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평조합원으로부터 노조 간부진으로 권력을 근본적으로 이양한 점, 단체교서이 보편적이지 못한 점, 노동시장이 분할된 점 등으로 인하여 기층노동자의 참여가 저조했다.


IBM은 60년의 역사 동안 노사분규에 단 한 시간도 빼앗긴 적이 없는데, 그것은 이 회사가 독보적인 성장과 이윤을 기록함으로써 종신고용제를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고충처리절차 대신에 그 유명한 ‘언로 개방’을 확립하여 종업ㅂ원이 직접 최고경영자에게 호소하도록 한편, 종업원의 근로의욕을 추적, 감시하기 위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GE의 인사관리자 불웨어를 시작으로 경영자 주도방식에 초점을 맞춘 노사관계 모델로 변형된다. UE가 최초로 전기산업의 모든 공장에서 조업을 중단한 1946년 파업이 전환점이었는데, 이에 불웨어는 듀퐁사에 의해 기발된 반노조적인 선전선동을 거리낌없이 채용하고 최신의 마케팅 방법을 전개하여, GE의 노동자들을 회사측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는 자기회사의 노동자에게는 자유기업체제를 판매하고 대중에게는 전구를 판매하는 방식을 드러냈다. CIO가 UE를 공산당이라 하여 축출, 비방하여 노조를 파괴함으로써, GE의 이데올로기적 공세가 더욱 가열되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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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2장 요약

제2장. 미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불임의 결혼



1933년 브리그스 자동차공장 파업에서의 주된 두 가지 요구는 평조합원이 통제하는 공장위원회를 회사측이 인정할것과 작업반장과 생산라인 감독의 권한을 제한할 것 등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7년 후, 자동차노동자연합(UAW)과 제너럴 모터스(GM)가 맺은 ‘디트로이트 협정’은 평조합원이 직접적 노동과정에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무산시켜 버리고 대신 이를 생산성 증가에 따라 임금과 각종 부가급여를 인상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흔히 새로운 산별노조가 점차 관료주의화한 탓으로 치부되어왔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산별노조가 관료주의의 틀 안으로 화석화되는 과정과 조합원대중 전투성의 내용과 궤도가 변화하는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좀 더 깊고 다면적인 변증법적 관계를 짚어내지 못했다. CIO가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순적인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이전 시기들에서 누적된 패배(곰퍼즈식 직능별 조합주의, 가톨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강요된 결합 등)와 다른 한편으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과 노동기사단이 지펴놓은 꺼지지 않은 불씨를 물려받았다. 여기서 CIO의 모순적인 가능성들과 피규정성들을 좀 더 신중하게 평가려면, 이들 사이에 형성된 긴장관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 브리그스 파업에서 플린트 파업까지


CIO 형성기에 관한 역사에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다음 사실을 우선 거론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의 기바니 된 전투적인 노동자의 대부분은 1900-20년 ‘신新이민’의 2세인 노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조합운동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뉴딜정책의 선거보루로 동원되어갔다. 이들은 대부분 급격한 도시화의 향연 속에 살면서도 빈민계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더 이상 부모의 언어나 농민적 미신에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직업적으로는 반(半)세습적인 미숙련 육체노동의 질곡에 동결된 채 도시의 빈곤과 시대의 혹독함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 2세 노동자야말로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 1933년 산업노동자의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봉기의 주된 관심은 상당히 비(非)경제주의적인 요인들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형적인 공장은 능률적인 공업기술과 노골적인 폭력이 결합된 일종의 소규모 봉건국가로서, 파시즘국가의 노동부장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정도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당시 노동자들의 요구는 작업장에서 나타는 전횡에 대한 반대였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산업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띠었다. 예컨대 버팔로 철강공장에서는 작업반장이 관장하는, 셰이프업(지원자들이 매일 아침에 작업장에 나와 일렬로 늘어서면 조합 혹은 회사의 간부가 일거리를 줄 사람을 선정했음)이라는 고용방식이, 자동차노동자들에게는 조립라인의 무차별적인 속도증가가 불만사항이었다.

셋째, 사실 원래의 CIO는 중요한 재정자원과 지배권력 고위층의 우군을 확보한 반대파 노동조합 관료들의 동맹으로서, 산업별 공장위원회와 반란적인 지부조합을 중심으로 이미 존재하는 대중운동을 말아먹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반란은 노조의 공식 지도자들의 자비 덕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에서는 공장의 핵으로 심어놓은 혁명적 기간요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자들로 궝송된 비공식적인 그룹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2세 반숙련노동자들의 전략적 그룹들과 굳건한 동맹을 맺기 시작했으며, 이 전략적 그룹들은 다시 비공식적인 작업장 그룹들과 민족별 연계조직망 등 숨어 있던 역량을 동원했던 것이다. 이런 흐름속에서 전국적으로 AFL의 지부설립 허가 신청이  쇄도하는 등 이 시기에 미국 노동운동의 대중적 참여도가 가장 높게 올라갔다. 그런데 이는 AFL을 지배하고 있던 허친슨, 프레이, 월 등 우익 삼두체가 대표로 있는 직능별 ‘동업인협의회’에 몹시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이들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새로운 조합원을 당분간 ‘연맹지부조합’에 강제로 가입시켜(지역본부에 가입시키지 않고 연방의 전국본부로 직접 가입시킨다는 의미) 기간산업의 조직화운동에 대한 독재적 통제력을 그린(William Green)위원장이 임명한 AFL의 ‘전문적인’ 관리들에게 맡긴다는 방침이었다. 이후 AFL은 평조합원들의 반란을 와해시키고자 온갖 획책을 벌이고, 이로 인해 전투적인 평조합원들과 지도부 사이에 빈번한 불화가 발생하여 이들이 AFL을 대거 탈퇴하도록 만든다.


1936-7년의 1년간, 자동차와 고무 및 전기 산업의 공장원회들은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창조적인 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에서는 매우 소중한 두 가지 자원이 활용되었는데, 그 하나는 앞세대의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이 개척한 평조합원의 단결과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연좌파업과 대중적인 피켓이었다. 또 하나는 좌파, 특히 공산당원들이 제공한 양질의 전략적 지도 및 공장간 조정역할이었다. 이 시기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원들로부터 유래한 고도의 참여주의적, 평등주의적 투쟁전통은 조직, 규율, 전략을 강조한 미국 레닌주의의 최상의 요소들과 결실있는 종합을 이루었다. 특히 연좌파업은 회사재산이라는 성역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한편 노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집단적인 힘을 앞서 보여주는 전술이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재산권보다는 인권을 우위에 두는 집단적 풍토가 강할 뿐 아니라 회사재산에 대한 존중심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부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루이스와 힐먼이 이끄는 분리주의파 조합관료들은 루이스 자신의 광산노동자연합(UMW)등을 이용하여 대중적 전투성의 급류를 막으려 들었다. CIO 간부진은 뉴딜정부의 관리들과 손을 맞잡고 ‘신뢰할 수 있는’ 협상안을 권장하는 한편, 평조합원들의 맹렬한 연좌파업 불길을 진압하려 했다. 이들의 전략이 성공하는데에는 두 가지 정치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그것은 첫째, 루이스는 필수불가결한 재정자원을 UMW의 기금에서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둘째, 더욱 중요한 요인은 CIO 지도부의 AFL탈퇴가 로즈벨트의 운명을 건 정치적 연합의 재편과정과 맞물려 일어났다는 점이다. 로즈벨트는 NRA 법조항을 북부 경공업에는 다소 친노조적으로 해석하고 대기업에는 중공업부문에서의 NRA 법조항 해석권을 양보함으로써 모순적인 동맹의 균형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사업장에서 평조합원들의 봉기가 계속 증가하자 기업들은 뉴딜에 대한 지원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한편 루이스와 힐먼은 평조합원들을 자기 쪽 대오로 끌어모으기 위해서 로즈벨트의 카리스마적 후원과 정치적, 사법적 지원이라는 영향력을 필요로 했다. 이렇게 되자, CIO는 로즈벨트의 지지세력을 동원하고 민주당파 은행가와 기업가의 이탈로 생긴 선거자금의 결손을 메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노동자무당파동맹을 창설했다. 로즈벨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노동부와 전국노동관계위원회에 친CIO 경향의 자유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공산당이 사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뉴딜과의 동맹에 가담함으로써 이 정략결혼은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2. 무산된 노동자정당 건설운동


계급연대의식은 선거국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부 유권자들이 전통적으로 보여준 민족적, 종교적 선거패턴이 물러나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확연히 양분되는 경향이 시작되었다. 이 재편은 민주당의 활동기반을 확장함으로써 자본가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엄청나게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나, 다른 한편 그것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통일시키는 경향도 갖고 있었다. 30년대 좌파는 CIO의 부상에서 대안적인 정치운동이나 노동자 지향적 제3당의 출현 가능성을 기대했다. 정치적 독자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자동차, 전기, 피복 노동자들의 지부조합들은 노동자정당 구상에 지지표를 던져서 루이스와 힐먼을 당황하게 했다. 연좌파업의 물결이 휩쓸고 간 후인 1937년 8월에 실시된 갤럽주사를 보면 적어도 전체인구의 21%가 전국적인 농민․노동자당의 결성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는 왜 실패하였는가? 주로 제시되는 설명은 첫째, 뉴딜정부가 ‘좌경’선회를 감행함으로써 반정부 정치운동의 거센 열기를 가로챘기 때문이라는 것과 둘째, 로즈벨트가 CIO를 암묵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산별노조운동의 구세주로 행세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1935-7년의 당면정세와 로즈벨트와 CIO간의 밀월기를 넘어서 일반화할 경우 설득력이 크게 줄어든다. 1938년 가을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참패한 이후 뉴딜정부는 자신의 외교정책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는 조급한 욕망에 사로잡혀 노동자에게 더 이상의 개혁안이나 새로운 양보조치를 허용할 수 없었다. 1937년 후반 SWOC(철강노동자조직위원회)에 대한 무력진압에서 입증된 바와 같이 뉴딜 주지사들의 파업분쇄행위가 널리 확산된 점을 고려한다면 CIO가 ‘국가권력과 근본적으로 맞서는 단계’를 결코 겪은 적이 없었다는 주장은 제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AFL의 소생


제3당 건설 시도가 좌절된 데에는 1937~38년에 AFL과 CIO사이에 일어난 내란 때문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우익 노조세력이 당시 공세로 전환한 자본가들과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단호한 방식으로 동맹하여 놀랄 만한 소생을 한 결과였다. AFL은 1937년 전국대회에서 정치적 배서(背書)정책을 채택함으로써, CIO에 동조적인 어떠한 후보자에게도 반대할 수 있게 되었다. AFL의 이 같은 형제살해광증은 2차 세계대전 전야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본-국가 사이의 정치적 연합을 놓고 협상할 가능성마저 배제시킬 정도로 자기파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AFL의 우경화에는 AFL조직원 중 상당수가 토박이-개신교 숙련공 및 ‘구이민’ 조합원들의 상대적인 보수성에도 큰 책임이 있다. 또한 미국에서는 중간계층의 상대적인 사회적 비중, 중간계층 하부와 노동계급 상부 사이의 상호침투성이 모두 유달리 높았는데, 이것이 노동계급이 쁘띠부르조아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는데 큰 기여를 했다. 언론매체 등을 통해 부추겨진 반급진주의적 물결은 CIO를 더욱 위축시켜 루이스와 힐먼을 로즈벨트와 민주당 자유주의파와의 연계에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했다.

공산당도 점차 로즈벨트를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이 시기에 약 7만 5천명의 당원과 50만명 이상의 외곽세력을 꾸리고 있어서 대중적인 영향력 면에서는 절정에 달했지만, 그 성장의 대부분은 사무직, 전문직에 종사하는 유태계 2세 노동자들이 당으로 몰려든 덕분이었다. 즉 공산당은 점차 탈(脫)프롤레타리아트화 되고 있었던 것이다.



3. 제2차 세계대전: 살쾡이파업과 인종차별파업


1941년 AFL로부터 주도권을 되찾은 CIO는 광산노조가 유니온 숍을 따내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불붙은 대중의 전투력은 진주만 공습으로 갑자기 끝장났다. 또한 전쟁의 도래는 노동인구의 편성과, 경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는 촉매가 되기도 했다.

첫 번째 변화는 수백만의 농촌이주민, 여성, 그리고 흑인이 산업노동시장에 들어감에 따라 ‘전례없는 노동계급 재편’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북부로 이주한 흑인인구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진행되었고, 수백만의 여성이 종래에는 남성이 독점했던 대량생산산업과 중공업부문의 요새에 처음으로 진입했다. 둘째로 전쟁은 조직노동, 자본 및 국가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투쟁을 통해 재편하는데 촉매역할을 했다. 지도적인 개혁가들이 행정부의 한직으로 좌천되는 한편 워싱턴의 경제관계 장군들이 월가의 꽃이 됨에 따라, 이전에 뉴딜을 이탈했던 기업자본의 주요 파벌들이 이제는 뉴딜과 친밀한 협조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1차대전때와는 다르게 장군들과 제독들은 전쟁물자 청부업자들 및 그들의 상시적 대리인들과 새롭고 상시적인 공모관계를 맺었다. 즉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위한 정치적․경제적 요소들을 융합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이 유지되려면 일정한 노동생산력과 산업평화가 유지되어야 했다. 이에 CIO에서는 스스로 기꺼이 생산력 향상을 이루면서도 조합이 공장경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노사협의회’ 결성을 제창했다. 그러나 CIO의 정치적 영향력은 AFL과의 갈등 이후 변변치 못한 상태였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신 준-유니온숍이라 할 수 있는 조합원 유지조항과 조합비 일괄 자동공제제도를 양보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과 실질임금의 감소로 대중의 불만이 계속 누적되어 갔고, UMW노동자를 시작으로 반란의 물결이 일었다. 물론 CIO관료들은 전투적인 노동자를 고립시키려 했으나, 제2계층의 지부조합 지도부들이 점차 평조합원의 불만을 수렴하여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저항을 결집해 냈다. 이는 바로 노동자정당에 대한 새로운 열망으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조정하고 다양한 종류의 독자적 정치활동을 벌일만한 기간요원은 부족했다. 그나마 공산당이 그런 자원이 가장 풍부했지만, 그들은 이미 민주당의 편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또한 전시에 노동자 전투성에 대한 좌파의 영향력이 약해짐으로써, 백인 노동계급의 인종차별주의는 더 극성을 보이게 되었다. 실제 전시의 노동조건과 파업중지서약에 대한 반란은 새로 들어온 흑인노동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공격과 중첩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게다가 CIO가 UAW지도자인 프랭컨스틴을 디트로이트 시장에 앉히려 했던 선거운동은 CIO가 공정소용실행위원회에 찬성한 데 항의하여 프랭컨스틴에게 등을 돌린 백인 노동자들로 인해 무산되기도 했다.



4. CIO의 정치활동위원회


CIO와 민주당의 정치적 동맹은 1936년 노동자무당파동맹의 결성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둘의 진정한 제도적 연합은 CIO의 새로운 선거운동기구인 정치활동위원회(PAC)가 출범하는 1944년에 비로소 상설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민주당측은 1942년 의원선거에서 중서부 의석을 대부분 공화당에 뺏기면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 이에 로즈벨트의 민주당은 남부와 서부의 산업중심지들에 민주당의 헤게모니를 확장시키려 하였다. 한편 CIO측에서는 AFL-보수주의 동맹이 산별노조를 완전히 격퇴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직 내부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에 동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집행위원회는 CIO의 본질적인 정치적 문제가 조합원들을 충분히 정치화시키지 못한 데 있다고 보았다. CIO가 PAC를 설립한 목적은 새로운 ‘CIO 투표인’을 창출하여 그 투표인집단과 민주당 뉴딜파의 유착관계를 영국의 노동당 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의 경우처럼 자연스럽고 믿을 많나 관계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CIO는 PAC를 건설하는데 엄청난 힘과 자원을 투입하였고 1944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데 PAC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이에 대해 CIO에게 돌아온 대가는 형편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CIO는 당내 기득권의 등쌀에 밀려 부통령 재지명에 나선 (CIO의 열렬한 지지자인 진보주의자) 월리스에 대한 지지를 꺼렸고, 결국 캔자스시의  부패한 팬더개스트파의 후원을 받은 트루먼 상원의원을 암묵적으로 승인하였다.

트루먼 시대에 대기업이 취한 전략은 그전의 ‘미국적 방식’처럼 대량생산산업체의 노조를 송두리째 격퇴시키려 하기보다는, 노동과정에 대한 경영자측 통제권의 복원과 단체교섭을 조화시킨 제도적인 굴레 속에 산별노조들을 묶어두는 것을 주축으로 하였다. 일선기업들은 ‘산업민주주의’를 요구하는 CIO의 간청을 거부하고, 임금에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함으로써 고의적으로 장기간의 소모적인 파업을 유발하여 기층노동자들의 전투력을 빼놓는 투쟁계획을 채택했다. 실제로 1945년 늦가을 파업이 발생했을 때, 그 규모는 미국역사상 가장 거대한 것이었으나, 평조합원의 주도력은 지극히 미미했다. 이는 파업을 이용하여 조합원들의 투쟁열기를 빼내면서 동시에 전국조합 지도부의 권력을 더욱 중앙집중화하려는 용의주도한 전략이었다.

게다가 태프트-하틀리법은 CIO의 급진성을 제거하고 노동자연대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들을 합법적으로 탄압하려는 고용주측의 목적을 성문화하였다. 이에 CIO 지도자들은 한편으로는 태프트-하틀리법에 도전하여 산별노조를 거리로 끌고 나와야 할지 말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월리스를 추종하는 인민전선적 물결(이는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제3당운동으로 되어가고 있었다)을 지지해야 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둘 모두를 거부하고, 오히려 트루먼 및 전국민주당과의 취약해진 동맹을 다시 강화하고 그 과정에서 CIO가 급속히 확대되는 행정부의 반공주의 성전에 필수적인 구성인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자유주의적인 민주당 대통령이야말로 1948년 선거에서 CIO의 지상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궁극적으로 전후 미국 노동계급에 새로운 문화적 응집력의 토대를 창출하는 것은 전시 민족주의의 발흥이었다. 종전에는 ‘아메리카주의’라는 용어가 일련의 토박이주의 운동의 슬로건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 새로운 민족주의는 백인 노동계급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며 더욱이 강력한 물질적 지원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강력한 물질적 지원에는 상시적 군수경제의 고용창출 능력은 물론이고, 좀더 일반적으로 보면, 미국자본이 지배하는 전후 세계경제의 구조에서 미국 노동계급이 차지하는 새로운 위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새로운 민족주의를 열성적으로 전파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진보주의자’들과 인민전선 좌파들도 있었다. 이들은 로즈벨트의 전시 지도력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였다. 특히 1942년에는 서해안에 사는 일본인 전부를 소용소에 ‘소개(疏開)’하는 계획을 실제로 지지하기도 했다.

적군(赤軍)의 동유럽 입성은 CIO조합원의 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슬라브계 및 헝가리계 이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CIO 초기 조직화 과정에서 영웅적인 역할을 했고 사회주의 영향력의 가장 중요한원천의 하나였으나 각각의 민족공동체에서 우익적․반공주의적 민족주의가 다시 거대하게 불붙자 광신적 반공주의와 새로운 민족적․애국적 합의속으로 편입되어갔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가톨릭교회와 가톨릭 노동계급의 일상적인 삶에 뻗어들어간 이 교회의 수많은 촉수들(미국가톨릭노조ACTU와 콜럼버스기사단 등)이었다. 그런데 CIO의 지도부는 슬라브계 노동자와 가톨릭 노동자의 표를 되찾기 위해서는 마셜플랜을 비롯한 트루먼의 반공주의적 대외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때, CIO주류 조합들 대다수가 사실상 태프트-하틀리법의 반공주의 조항들을 이용하여 좌파가 이끄는 다른 CIO조합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반공주의가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와 혼합되면서, 철강노조의 백인지도부는 평조합원 광부들에게 겁을 주고 흑인 CIO 노조원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5. 대차대조표

1952년, 아이젠하워가 민주당을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후, PAC위원장인 잭 크롤은 CIO는 민주당을 위한 어떤 값비싼 노력도 아끼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민주당과 고용주를 대하는 것과 다름없는 입장에서 협상하고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크롤은 특히 반(反)노조적인 ‘일할 권리’(right to work: 노조에 가입하지 않고도 일할 수 있는 권리, 즉 오픈 숍을 의미한다)법안에 대한 ‘남부 이반파 민주당의원’들의 지지를 들었다. 이렇게 민주당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던 것에는 1>노동자의 단결 2>정치제도의 계급적 재편 3>소신있는 ‘CIO투표인단’ 이라는 요인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첫째, 급격히 불어나는 여성 사무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남부 노동자 전체로 노조조직을 확대하지 못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새로운 계층화와 분절화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둘째, 초창기 CIO의 강력한 연대의 원칙이 점차 ‘신형’의 실리적 조합주의에 밀려났다. 직능별조합의 배타주의가 점차 강화되었고, ‘최저정액(flat rate)'을 따내기보다는 일정한 인상률을 얻어내는 임금협상 등의 관행이 확립되었다. 게다가 1938년 이후에는,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양당의 합의를 유지하는 일이 사회입법이나 정치개혁의 절박성보다 더 우선적이었는데, 노동조합과 그 자유주의 동맹자들은 독자적인 활동을 포기하고 사회복지보다는 전지구적 반공주의를 우선시하는 방침을 정당화해주었다.

남부 대중의 투표권 쟁취야말로 민주당을 재편하고 의회에 자유주의자-노동자 다수파를 공고히하는 데 관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CIO는 체계적인 탄압과 내부의 냉전적 갈등에 직면하여 ‘남부공작’을 포기하였고, 40년대 후반에는 전국을 휩쓴 반동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물결에 더욱 심한 타격을 입었다. 노동운동과 흑인운동이 상호결합하지 못한 것은 더 운동 모두에 황폐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마지막으로 노조투표인단 문제가 있다. PAC의 목표는 CIO 조합원들을 정치화하여 신뢰할 만한 훈련된 유권자단을 창출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민주당과의 동맹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주 단기적인 노동자의 이익조차 대변하지 않았다. 게다가 CIO자체가 노동운동의 독자성을 외면한 채 의회로비활동에 전념하여 평조합원의 전투성을 스스로 해체하고 말았다. 역설적이게도 노조 관료들에게 조합의 진정한 정치적 영향력은 궁극적으로 생산현장에서 대중활동을 동원하고 유지하는 능력에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태프트-하틀리법의 통과에 맞서 투쟁하자고 주장했던 이는 존 L. 루이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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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1장 요약

제1장. 미국의 노동계급은 왜 다른가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주의 정당, 사회민주주의 정당, 공산주의 정당의 우세에서도 나타나듯이 상당 규모에 달하는 노동계급의 조직과 의식이 있는데, 이것이 미국에는 유독 없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미국 맑스주의를 괴롭혀온 망령이다. 이에 대해 고전 혁명이론에서는 어떻게 보았는지 검토해보자.

맑스, 엥겔스, 카우츠키, 레닌, 트로츠키 등은 저마다 한번쯤은 미국혁명운동의 발전전망에 매료된 적이 있다. 이들이 보기에 미국의 노동계급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소 ‘미성숙한’ 모습, 즉 과도기적 조건들 때문에 발전이 지연되거나 굴절당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들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사회 체제 전반의 경제위기가 거대한 규모의 계급투쟁을 유발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미국사회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제도들은 독자적인 정치활동 및 대중적인 노동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형성에 도약대 역할을 할 것이고,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난 발전단계들이 미국에서는 ‘결합된 불균등한 발전’ 과정의 가속화로 말미암아 ‘축약’된 모습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희망은 아직 사산상태이다. 민족적․인종적 분열, 자본가의 양당제도가 흡수해 버린 노동계급 내부의 문화적 간극 등은 신생 노동자정당을 붕괴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중에서 대공황은 가장 역설적인 경험을 몰고 왔다. 플린트에서 주방위군의 총부리에 맞서 싸우고 봉기에 가까운 미니애폴리스 총파업 때 경찰을 거리에서 쫓아낸 바로 그 노동자들이 선거에서는 로즈벨트를 지지하는 주춧돌 역할을 한 것이다. 산별노조투쟁에 참가한 수백만의 젊은 노동자들이 한편으로는 ‘미국 자본주의의 구원’이라는 깃발을 들고 나온 한 준귀족적인 정치가의 돌격부대로 동원되었다.

이런 미국의 ‘예외상태’를 해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로서 미국 문명에 대한 관념론적 접근법이 있다. 커먼스-펄먼(Commons-Perlman)학파가 제기하는 이런 시도는 봉건제하의 계급투쟁이 없었다든가 로크적인 세계관이 헤게모니를 잡고 있고 변경이라는 안전판이 마련되어 있는 등등의 미국 문화 구조 자체에 의해, 이 계급의 탄생 이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이 발달한 것은 역으로 봉건제의 유물로 점철된 특수한 사회역사적 배경에 의해 산업화가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다른 미국 노동계급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준거틀을 재구축해야 한다.

일단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유민주주의건 문화적 개인주의건 또 다른 무엇이건) 모종의 목적에 의해서 혹은 상호작용하는 단순한 원인들(신분상승 지향성 더하기 민족문제 더하기 ....)의 기계적인 작용에 의해서 미국 노동계급의 운명이 형성되어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모든 가능한 설명변수들을 계급투쟁과 집단적인 실천의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체화해내야 한다.

그러나 그 동안 이런 방법을 택해 왔던 맑스주의 고전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경험들이 이후 노동계급의 발전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구속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적 계급의식을 가로막는 장애물의 ‘일시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관점은 미국 노동계급이 겪은 일련의 역사적인 패배들이 갖는 누적적인 영향력을 잘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서유럽의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는 얼마간은 노동자개혁주의의 중개하에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집단적이고 자생적인 제도들이 서유럽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정치활동의 하부구조를 마련해주고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계급의 ‘전국적인 제도와 의미체계들이 없기 때문에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과 지역공동체 등은 극단적으로 파편화되고 계열화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조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전후에 경제팽창의 물결이 일면서부터였다.(의회민주주의와 대량소비가 안정화된 시기) 그렇다면 이 두 지역간의 차이는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미국 노동계급을 통일시켜내지 못한 1930, 40년대 노동운동의 실패가 아니었나 하는 짐작도 해볼 수 있다.



1. 미국 민주주의의 역설


모든 유럽국가에서 노동계급은 선거권과 시민적 자유를 얻기 위해 오랜 투쟁을 해야 했다. 중산층의 나약함이나 노골적인 배반에 직면한 신생 노동계급운동들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동원을 통해 민주주의 투쟁을 수행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잔존하는 전자본제적인 계급구조나 사회구조가 없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로크철학, 청교도주의, 농업자본주의와 같은 17세기 가장 선진적인 생산관계와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들이 옮겨 심어졌다. 즉 미국에서 (백인남성의) 인민주권은 산업혁명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 이전에 이미 생겨난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틀이었다.

또한 유럽에서는 ‘민주주의’에 굳건히 반대하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조차도 평민층 분자들의 폭력적․혁명적 민주주의와 대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대표들(대상인, 은행가, 대자본가, 토지소유자, 농장소유자 등)이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상층 지도부를 별 무리 없이 장악했다. 다른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들이 구체제의 구조를 무너뜨리는데 어느 만큼은 평민적인 분파들과 같은 ‘대리자들’에 의존해야 했던 상황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는 소자본가 농민계급이 수적으로 압도적이었으며, 이들의 존재는 사적 소유의 신성함과 자본축적의 미덕을 찬미하는 명백히 부르조아적인 청치입장에 확고한 사회적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처럼 ‘민주적’ 부르조아지의 존재 및 ‘구체제’의 부재라는 역사적 요인들이 이처럼 특수하게 결합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장인과 노동자가 스스로 자율적인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일은 훨씬 어려워졌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경제적인 환상과 정치적인 환상 때문이었다. 전자는 소생산, 소자산이 지배적이었다는 이유로 인해 모든 사회계급간의 이동이 왕성했기에 일어났다. 그 결과 ‘생산자주의’ 이데올로기가 생겨나, 계급관계는 ‘생산자’ 대 ‘기생적인 금융세력’의 축을 따라 설정되고 모든 층의 노동자와 대부분의 자본가가 하나의 ‘산업’블록으로 뭉뚱그려졌다. 또한 후자는 미국만이 독특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무제한적으로 백인남성의 참정권을 허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노동계급에게 미국사회의 예외성을 깊이 신봉하게 만들었다. 미국의 백인 노동자는 자신의 정치적 자유를 경제적 착취와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전복적인 측면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착취와 계급적 양극화의 심화 앞에서, 미국노동자의평등주의 이데올로기는 집단적 조직화와 전투적인 저항의 강력한 촉매가 될 수 있었다. 유럽의 공장주는 하층계급의 경외심과 문화적 예속 등 예로부터 내려온 양상을 번번이 활용할 수 있었으나, 미국의 산업가는 온정주의를 거부하고 동격으로 대접받기를 요구하는 ‘자유롭게 태어난’ 양키노동자를 다루어야 했다.

국가의 탄압이나 경기침체가 노동당들의 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면, 19세기 후반 혹은 20세기 초엽의 미국에도 이런 요소들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미국노동자는 폭넓은 참정권을 활용하여 독자적인 정치 기구들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였는가?



2. 정치의식과 계급구성


사회적 노동과정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놓이는 데 따라 생겨난 계층화는 노동계급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민족적․종교적․인종적․성적 적대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물론 19-20세기 초에 걸쳐 작업장에서 방어조직을 결성하려는 일련의 노력들은 이를 약화시키기는 했지만,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이에 비견할만한 움직임이 없었다. 1870-1932년 미국의 투표성향에서 실제로 민조적․종교적 균열이 계속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1) 노동계급과 남북전쟁


1830년대 중반부터, 큰 항구도시의 장인들은 자기네끼리 공제조합과 초보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면서 그들의 독자적인 경제적 이해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1937년 공황 때와 1857년 경기침체 때 사멸했으나, 이러한 영고성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태동하는 ‘노동자주의’가 전체적인 정치적 정세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고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잭슨 시대에는 대규모의 자본집중과 평등주의의 유지가 양립할 수 없다는 자각이 근로계급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한 예로 잭슨 임기말에는 뉴욕의 ‘워키즈’가 민주당 내의 ‘로코포코’ 이반파로 부활하였다. 로코포코 노선이란 기존의 독자적인 노동자운동으 공식적인 당제도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양당으로 하여금 늘어나는 유권자집단인 ‘노동’ 쪽으로 극적인 방향전환을 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와 같이 대규모의 실업사태와 선업노동자의 소요가 발생하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노동자가 하나의 독자적인 정치주체로 서지는 못했다. 노동계급의 노예제 반대 흐름이 결핍된 가운데, 노동자는 남부 흑인대중과 통일의 고리를 만들어내거나 자기 나름의 혁명적-민주주의적인 정치 전통을 창출해낼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 후 세 가지 원심력이 작용하여 미국 산업혁명이 ‘도약점’에 도달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노동운동을 산산이 부숴뜨리고 만다.


① 산업도시 변경지대

당시 미국 서부의 신흥공업도시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워지다시피 했으며 산업화 이전의 전통이나 사회관계와는 거의 연속성이 없었다. 이는 미국의 노동운동이 산업화에 대한 장인들의 저항에 깊은 뿌리를 두지 않고 일어나났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로 인해 지리적 이동이 집단적 행동을 대신하는 일이 매우 잦아졌듯, 미국의 노동자는 억압적인 근로조건에 손으로가 아니라 발로 (즉 다른데로 옮겨감으로써)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② 토박이주의와 미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문화적 분열

두 번째 원심력은 1840년대 유럽의 흉작 이후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물밀 듯 쏟아져들어온 수백만의 가난한 노동자의 물결에 대한 토박이노동자들의 반발이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경쟁관계의 영향도 있지만, 깊은 문화적 반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문화의 핵심적인 역설은, 그것을 “가장 순수한 부르조아 문화”라고 부른 엥겔스도 옳았지만, “북미는 현저히 종교적인 국가”라고 한 맑스의 지적 또한 마찬가지로 옳다는 데 있다. 미국의 산업혁명은 대중문화와 노동계급 의식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이 다시 강화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미국혁명에서 나타난 영국의회에 대한 애국적인 반란은 ‘인간의 권리’를 완벽주의적인 개신교의 어휘로 번역해 낸 급진적 복음주의의 발흥에 의해 정당화 되었고, 북부 개신교도의 민족주의적 정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개신교가 큰 몫을 했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1789년 혁명이 패배한 뒤끝에 생겨난 ‘신앙혁명’의 소산인 그들 특유의 가톨릭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왔다. 더욱이 아일랜드 이민의 대다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소농이 아니라, 식민지하 저개발상태의 살인적인 결과를 피해 도망온 소작농, 농업노동자, 계절적 인부 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주도한 미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데 가장 선봉에 섰다.

그러므로 북부 노동계급의 문화적 동질성을 깨뜨린 것은 그냥 이민이나 가톨릭 이민 자체가 아니라 1840년대 후반 이래 종교적 분열을 축으로 하여 조직되어 막대한 제도들과 운동들을 통해 작용하는 두 개의 담합주의적인 하위문화가 형성된 점이다. 미국의 노동자와 대부분의 서구 노동자의 사회적․문화적 세계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민족적․종교적 다양성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이 다양성이 전국적인 규모로 하나의 민족적․문화적 축을 따라 집결하고 대치하는 방식에 있었다. 1850년대에 이런 문화적 균열은 정치적으로 재생산 되어 반가톨릭적이며 반이민적인 ‘아메리카당’이나 ‘노우나씽당’ 등이 형성에 기여했고, 이후 휘그당의 진영과 융합하여 새로운 공화당을 형성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노동’이라는 공화당의 투쟁구호는 노동자집단의 권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개인적인 지위 상승을 통해 임노동에서 벗어나려는 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반발하여 가톨릭 이민은 종교적․문화적 다양성을 자유방임적으로 관용하는 정책을 들고 나온 민주당으로 쏠렸다. 이에 따른 미국 노동계급의 정치적 분열은 뉴딜 전야까지 계속되어 계급의식의 발전에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③ 인종차별주의: 통일의 주제

이미 백인의 인종차별주의가 굳어져 있는데다 북부 노동시장에 흑인이 넘쳐날 것이라는 풍설까지 더해지자, 토박이노동자들은 대부분 흑인자유민의 사회적 평등과 참정권에 반대하고 나섰다. 반면, 이민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일부 독일계 노동자층은 노예제의 위기가 미국노동자의 앞날에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혁명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붉은 48년대인들’은 미국 노동자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과 언어문제 때문에 게토화되었다. 결국 이들의 영웅적인 노력은 노동운동의 주류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아일랜드계의 경우 1840년대에 개리슨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가톨릭법안 철폐운동과 노예폐지론 사이에 연대를 구축하는 과감한 전략을 만들어냈다. 아일랜드의 ‘위대한 해방자’ 다니엘 오코넬은 이에 답해 “드넓은 대서양 너머로 내 목소리를 전하니, 그대 아일랜드인이여, 그런 나라에서 나오라,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노예제도를 묵인한다면 우리는 그대를 더 이상 아일랜드인이라 인정치 않으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에 살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은 이에 대해 분노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하나의 뚜렷한 계급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이 위대하고 영광스런 공화국의 시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예철폐 문제에 대해서든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우리를 시민이 아니니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는 시도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이건간에 비열하고 간악한 행위라 본다.”고 응수했다. 이들은 비단양말을 신은 부자도 증오했미만 흑인도 똑같이 증오했다. 이것은 흑인이 이미 대부분의 육체노동 범주에서 밀려난 상태인 것을 감안할 때, 경제적인 경쟁관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똑같은 ‘시민’이라는 단합을 강조하는 정착민식민주의의 신조를 담합주의적인 하층계급 문화들(토박이-프로테스탄트 vs 이민-가톨릭)이 저마다 고유한 가치의 프리즘을 통해서 충실히 반영한 당시의 사회상황에서 이루어진 선택이었던 것이다.


2) 노동계급과 인민주의


남북전쟁 후 계속된 산업호황으로 많은 이민노동자들은 미숙련직종에서 숙련부문으로 옮아가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아일랜드와 독일에서 불어온 혁명의 새 바람은 이민노동자들을 한층 급진적인 방향으로 정치화시키고 있었다. 전후세대 노동투쟁의 기본 조류는 작업장에서의 노동계급 단결의 증가와 좀더 효율적인 연대 및 노조조직 형태에 대한 모색이었다.

파업의 물결들이 일 때마다, 한층 넓고 포괄적인 전국적 노동조직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강화되었다. 아무리 숙련된 기능공이라도 고용주의 적의와 국가의 폭력 앞에서 조합조직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이 시기에는, 모든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거대한 운동만이 강력한 연대와 상호원조의 틀을 구성하여 산하조합을 성장․존속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여기서 대표적인 노동자 비밀결사였던 ‘노동기사단’은 순수 경제적인 조직을 넘어서 좀더 대안적인 프롤레타리아 시민사회를 이룩하려 하였다.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맹아적인 계급문화는 ‘순수․소박’한 노조경제주의를 넘어설 뿐 아니라 지배적인 민족적․종교적 하위문화들에 대한 최초의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기사단을 열렬히 환영한 엥겔스는 기사단의 발흥이란 바로 미국 노동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되는 분명한 첫걸음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3차 반(反)굴드파업의 패배 및 헤이마켓 학살에 잇따른 탄압의 여파로 기사단의 어지러울 만큼 빠른 성장은 갑자기 끝나버렸다.

기사단 몰락의 이유로는 1> 주요 노동자가 경제 전체를 멈추게 할 수 있는 노동자집단 특유의 힘을 절감한 자본가(ex: 철도자본가)에게 매수되었기 때문에. 2>노동지도층과 민주당 후원기구 사이에 공생관계가 강화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몽고메리는 영국과 미국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이 시기에 계급의 식의 성숙과 노동당 창출에 “가장 효과적인 방해물”이 된 것은 바로 “미국노동자가 쉽게 공직에 선출될 수 있었던 점”이라고 시사한 바도 있다.

그러나 기사단의 몰락으로 노동자 전투성의 물결이 끝났다고 보면 잘못이다. 한편으로 유진 뎁스가 이끄는 미국철도조합은 모든 철도노동자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려는 근질긴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노동총연맹(AFL)도 그 이후의 모습과는 달리 아직은 실리적 조합주의(business unionism)의 보수적 단일체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1893~96년 대공황 이후 발생한 풀먼회사에 대한 미국철도조합의 파업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 파업에서 중요한 점은 바로 농본적 급진주의와 국제저적인 노동자 정치운동의 두 거대한 흐름이 유례없는 결합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1880년대 후반에 탄생한 농민동맹은 농촌인구 중 빈곤층에 뿌리박음으로써 흑백 소작농을 단결시키는 미증유의 과업을 달성함으로써 가늠하기 어려운 잠재력을 지닌 전복세력이 되었다. 더욱이 남부와 남서부 지역에서는 노조들, 기사단지역회의, 동맹 사이에 적극적인 협력관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동자인민주의는 유럽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현하고 있던 새로운 노동계급 정당에 해당하는 미국의 토착적인 운동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주정부가 1894년 탄광파업을 진압하고 풀먼파업에 연방정부가 개입하자, 인민주의 운동은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노동자들이 인민당 주창자들을 승인했으며, 전국 차원의 인민당 건설 논의가 촉발되었다. 특히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로이드는 노동자인민주의를 “인민당을 미국의 ILP(Independent Labor Party)로 변혁하는 운동의 선봉”으로 삼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반면 AFL 내부에서 생겨나는 사회주의의 도전을 물리치고자 하는 곰퍼즈의 결심 또한 대단했다. 은본위제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재정자원을 등에 업은 중서부인들은 우선 인민주의 정강을 무제한적인 은화 발생이라는 단일 논제에 국한시키고 나아가 민주당의 은본위제 지지파와 통합하는 방향으로 교묘하게 끌어가고자 했다. 이는 노동자인민주의에 대해 혐오하고 있던 곰퍼즈의 생각과 일치했다.

곰퍼즈는 결국 다수의 평조합원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ILP정강을 부결시키도록 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사회주의자들은 ‘화학성분상 순수한’ 혁명강령만을 주창하는 고립된 입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런 요인 외에도 급진주의적 노조투사와 아직 대다수 미조직상태였던 도시 노동계급의 명백한 냉담이나 무관심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었다. 독자적인 노동자정치를 추구하는 운동은 시카고 및 북서부 지역을 제외한 다른 주요 도시․산업 중심지에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왜인가?

첫째, 남부의 자영농과 소작농의 단합된 봉기는 농민동맹과 흑백협동을 ‘짐 크로’(Jim Crow: 남북전쟁 이후 흑인들에게 주어진 부분적인 권리를 박탈한 극도의 흑인차별주의적 관행이나 이를 보장한 법률체계)와 지방노동자 선동으로 되받아친 지방 지배계급의 격렬한 역습에 의해 분쇄되었다. 둘째, 산업노동계급 안에서 토박이주의와 민족적․종교적 갈등이 재연되었다. 황량한 공황기인 90년대 중반에 토박이 및 ‘구’이민노동자들은 늘어가는 이민이 자신들에게 심각한 경쟁의 위협이 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게다가 1890년과 1892년 선거에서 아일랜드계 민주당원들이 거둔 정치적 성공은 반가톨릭주의를 부활시켰다. 이른 흐름은 노동자인민주의의 기반임에 틀림없는 산별노조들, 즉 광부 및 철도노동자의 단결까지도 와해시켰다. 셋째로 인민주의 운동 자체도 이민노동자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히거나 ‘생산자계급들’이 점점 양극화되어가는 것을 막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어느 때보다도 더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시기에, 토박이주의의 역습과 보통선거권에 대한 새로운 제한의 결과 미국 노동계급은 놀랄 만큼 선거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링컨의 연방주의에 입각해 구성된 기존의 대중적 민족주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과학적 인종주의’에 입각한 ‘앵글로색슨 미국주의’라는 외국인 혐오적인 신조로 변형되고 있었다.


3) 뎁스 사회주의의 실패


① 분열된 노동의 세계

신이민층은 구이민과 마찬가지로 천연자원개발산업, 가사용역, 건설 등에 초과착취되는 노동집단을 조달하였다. 이들은 대개 참정권도 없고 빈곤이나 의도적인 차별로 말미암아 토박이노동계급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빈민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민족, 종교, 기술이 새로이 결합된 위계구조가 생겨났다.

한편 작업장 내에서도, 노동분업의 심각한 재편은 신이민의 효과를 중층결정하고 더욱 강화하였다. 공장경영주측은 직능공들의 세력을 분쇄하고 그들의 기술을 희석시키면서도 그들을 반숙련공의 지위로 ‘평준화’하는 것은 피하는 방향으로 주도면밀하게 공작을 펴나갔다. 바로 이러한 지위의 폭발적인 균질화를 막기 위하여 회사에서는 기죽은 숙련노동자들에게 도급제, 보너스, 저축제도, ‘이윤공유’ 등을 미끼로 내밀었다. 기업은 이제 쁘띠부르조아지와의 상징적인 동화를 고부하는 새로운 사회규범들 --특히 주택소유자라든가 애국단체회원이라는 ‘자부심’--을 조장했다.

이러한 노동계급 내의 신분제도는 노동계급 주거생활의 엄격한 격리와 파편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즉 미국에서는 주거에서의 계급적 격리현상의 증가에, 마침 확대되고 있던 민족적 분화가 겹쳤다. ①중산층 교외 ②토박이노동자나 일부 ‘구’이민이 거주하는 주택지대 ③새 프롤레타리아트 이민에게 잠자리를 빌려주는 북적거리는 하숙집, 셋집, 허름한 아파트 지대.


② 미국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

1909~13년은 국제노동운동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해로서, 미국에서도 격렬한 대중파업이 일어나고 새로운 미숙련노동자층이 계급투쟁에 돌입하였다. 이에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가 지원을 가했다. 한편 AFL은 기술편차의 희석, 테일러주의 능률촉진 등에 의해 그들의 숙련기술이 평가절하되는 데 맞서 쓰라린 수세투쟁을 해나가야 했다.

그러나 1877~96년 시기의 파업물결과는 달리, 20세기초의 대중파업들은 토박이와 이민 노동자를 단결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1912년 미국 사회주의의 주된 두 경향 중 어느 것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거나 노조의 전략과 사회주의자의 도시 정치권 개입을 조화시키는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개량주의자는 산별 노조운동을 꾸릴 계획이 없었던 반면, 혁명주의자들은 숙련노동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거나 AFL의 곰퍼즈 지배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사실상 미국의 사회주의는 민족과 언어로 분열된 사회주의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언어권에 따라 구성된 소수민족 사회주의들의 개별 조직들은 분산적이고 당권력으로부터도 떨어져나간 상태였지만 당지도부는 이것을 방치해두었다.

사회당은 이러한 당내 모순을 인식하거나 해명하는데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했는데, 뎁스만이 혼자 공통된 투쟁방향에 기초하여 계급의 내부단결을 이루지 못하는 한 사회주의는 미국 노동계급을 획득하기를 결코 바랄 수 없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생디칼리스트 좌파가 지지한 복수노조를 거부하고, 동부(UMW)와 서부(WFM)의 광부연합을 기반으로 하여 산별노조의 ‘중앙’을 건설하자는 약간 엉뚱한 선언을 하였는데, 그렇게 하면 대량 생산산업의 조직운동을 이끌어내고 곰퍼즈 노선을 대신할 만한 새로운 축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뎁스의 호소는 무시되었지만, 이후 1917년에 되살아난다. 피츠패트릭과 나클즈의 전투적 지도하에 시카고 ‘노농동맹’은 협소한 숙련공 중심의 구호를 버리고 정육포장 노동자들을 조직해 역사적 승리를 거둔다. 다음 해, AFL의 미온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이들은 가축사육장의 운동방식을 펜실베이니아 계곡의 철강지대와 시카고 남부의 공장지대에 도입하려 했다. 이 곳은 미국 오픈 숍의 전선이었으며 그것의 조직화가 곧 전 산업노동계급의 중대한 전략적 열쇠가 된다는 점은 널리 인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중서부 공업주들에서 큐 클럭스 클랜(KKK)이 발흥한 것을 필두로 하여 토박이주의적인 반동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새’ 이민들은 민족공동체라는 은신처로 후퇴하고, 한때 막강했던 광산 노동자와 철도수리보수공조합들의 폐허 위에 오픈 숍을 주축으로 한 ‘미국적 방식’이 세워졌다.

1919~24년 미국 노동계가 겪은 패배의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엄청났다. ‘미국적 방식’이 채택된 이 짧은 막간에 고용주는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권을 공격하는 데 박차를 가했고, 새로운 형태의 기업 경영과 작업감독에 발맞추어 새로운 대량생산기술의 지전도 이룩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혁명과 전후 AFL의 패주로 말미암아 숙련공의식의 물적 지주 또한 약화되고 있었다. 대량생산이 ‘포드주의’로 통합됨으로써, CIO가 출현하고 산별노조운동이 부활할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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