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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13장 요약


13장. 개체에서 조합으로: ‘생식대안’의 슈퍼마켓



‘불임여성 돕기’에서 ‘생식대안’으로


새로운 생식기술에 대한 논의는 대개 불임남녀에게 ‘친자식’을 갖도록 해주고자 개발되었다는 암묵적 가정에 기초한다. 그러나 1985년 본에서 열린 ‘생식기술과 유전공학에 반대하는 여성’대회에서 참석자들은 이 새로운 기술의 목적이 오히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생식산업을 진흥시키려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로리 앤드류스의 「생식기술에 대한 페미니즘의 시각」과 「나의 신체, 나의 재산」이라는 논문이 이런 주장의 증거이다.

앤드류스의 저술에서는 이전 시대의 ‘불임여성’ 혹은 ‘불임부부’라는 용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대신 ‘생식대안’, ‘생식옵션’, ‘생식선택권’, ‘생식자율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녀는 “낙태와 피임에 관한 생식선택권을 뒷받침하는 헌법적 토대는 인공수정, 태아 기증, 대리모 등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의 자율성도 보호”한다고 말한다.

생식선택권을 옹호하는 럿거스 활동그룹은 ‘생식선택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헌법적인 낙태권을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② 국가와 연방헌법의 보호를 받는 한도에서 불임수술을 받거나 거부할 수 있는 그/그녀의 헌법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개인의 선택권.

③ 임신을 예정일까지 수행하는 개인의 선택권.

④ 수정된 난자의 착상을 막거나 그 밖에 수정 전, 수정시, 혹은 수정 직후에 사용되는 다른 방법으로 임신 회피용 약이나 기타 물질의 합법적인 처방을 얻거나 사용하는 개인의 선택권.

⑤ 체외수정, 인공수정 등을 통해서 임신할 수 있는 개인의 선택권.


그러나 로리 앤드류스는 여기에 “누구라도 성적 접촉 없이 자신들의 자녀를 ‘만들’ 가능성”까지 포함시킨다. 물론 ‘생식대안의 자유로운 서택’은 또한 ‘대리모’와 여러 형태의 계약을 맺을 권리를 의미하며, 뒤집어 말하면 이른바 ‘대리모’가 될 여성의 ‘권리’까지도 의미한다.

하지만 앤드류스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아이를 낳는 여성들과 ‘대안적 생식’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발적인 유전자 심사 및 의료심사는 옹호했다. 이러한 틀은 자궁은 들어냈지만 난소는 온전한 여성들의 대리모의 도움으로 ‘유전자 엄마’가 될 수 있게 한다. 결국 이러한 시도는 유전자심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녀는 ‘생식대안들’이 아주 새로운 가족구조를 만들어낼 것이라 보았다. 새로운 기술 덕택에 이제 한 아이가 여러명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앤드류스에 의하면 현행 가족법으로는 다룰 수 없는 이런 복합적 부모-자녀 관계로 야기되는 법률적 문제는 임신 전에 누가 유전자 부모가 될 것이며 누가 임신한 어머니가 되고 누가 사회적 부모가 될 것인지 등을 명시하는 계약을 맺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가장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에까지 계약법이 침투하는 결과를 초래함을 뜻한다.



대리모산업


역사상 처음으로 뉴저지 판사 하비 쏘코우는 1987년 메어리 베스 화이트헤드 소송에서 아이를 출산한 여성의 권리보다 계약법을 더 중하는 판결을 내렸다. 쏘코우 판사는 이렇게 말했다.


"생식이 보호받는다면 생식의 수단도 보호받아야 한다. 가족을 탄생시키는데 바탕이 되는 가치와 관심은 어떤 수단이 되든 동일한 것이다. 본 법정은 수단의 보호가 대리모의 이용까지 포함한다고 본다. 제3자를 이용했다고 해서 계약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 기증자나 대리모는 수태와 임신의 인자를 제공함으로써 아이 없는 부부를 보조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앤드류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그녀는 대리모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기매매라는 비판에 대하여 판례를 들어 반박하는데, 실제 법정에서는 출산 후 아이를 포기한다는 결정이 임신 이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강요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관해 충분히 인진한 냉정한 상태에서 계약서에 동의한 이상 그것을 아기매매라거나 여성착취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빈민여성들이 ‘번식자 여성’이란 새로운 계급으로 변모하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여성들이 대리모가 되거나 생식체나 난자를 팔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또 여성들이 책임있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성숙한 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스스로 대리모계약서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성운동이 이룬 성취를 위태롭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이 체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계약이 존중되어야 하고, 대리모계약도 존중되어야 하며, 생식과 관계된 모든 과정과 관계들을 우리의 자연적 존재의 일부로 여기던 케케묵은 과거의 유산인 모든 법률조항들을 도려내어 시장법칙인 계약법의 규율 아래 두어야만한다.

대리모가 지불받는 것은 오로지 ‘생산품’인 아이에 대해서뿐이다. 그리하여 대리모는 여성의 가사노동 착취와 유사하게 기능하는 새로운 ‘청부산업’이 되었다. 기업가(남성)은 원료의 일부(정자나 그가 사들인 기증난자)와 ‘임신수행자’ 여성에 대한 대가를 선지급한다. 그러나 생산품은 양도되어야 한다. 즉 생산자로 하여금 그들이 생산한 물건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상품이며 그들이 하는 일이 소외된 노동이란 점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생식자율성’, 즉 출산과정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며 기술적, 사회적으로 가능한 것은 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이것은 모든 새로운 생식기술로의 자유로운 접근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새로운 사회적 장치를 함축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식기술의 ‘진보 덕택에 이제 생식행위가 시장에 통합되었으므로 출산은 곧 네 것과 내 것을 사고 파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기에는 계약이 필수적이다. 대리모이든, 수정란이나 그 밖의 ’생식재료‘를 파는 것이든, 혹은 체외수정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것이든, 이러한 계약에 들어가는 여성은 더 이상 자율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육체나 생식력과 상호작용 할 수가 없다. 생식자율성이라는 개념은 이제 이윤과 명성을 추구하는 기업과 ’첨단 의사‘들이 좌우하는 전격적 상업화에 여성의 생식력과 육체를 무방비로 열어놓기 위해 사용된다.



나의 신체, 나의 재산?


그녀는 생식과 관련된 우리 신체조직 뿐 아니라 혈액, 정액, 조직, 세포 등 모든 다른 기관과 물질들도 신체 소유자의 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생식기술의 발전으로 이제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생식체나 수정란을 의사나 실험기술자나 보건시설의 손에 맡기게 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일부가 재산으로 간주되자 않는다면, 산체 물질을 타인에게 맡긴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사후에 신체기관과 신체물질을 매매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살아 생전부터 이미 팔린 해부용 시체로 걸어다니는 셈이 될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및 사회에 미칠 영향


재산으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개념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장기를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즉 가난한 사람들도 신장 두개만 가지고 있다면 ‘자본’소유자로 간주될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신장은 한 개에 5만 달러 나간다. 따라서 이들이 사회복지급부 대상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다.

그녀는 도한 신체를 재산으로 규정하게 되면 인간 존재의 온전함이 파괴된다는 사실에서 생기는 윤리적 문제도 간과한다. 그녀는 인간의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조건에 대한 이분법적 규정에 근거해 육체를 파는 것이 정신을 파는 것(이를테면 지적재산권 같은)에 비해 더 나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해방에서 국가통제로


앤드류스는 생식기술의 잠재적 이용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적합성 여부에 대한 심사에는 반대하면서도 정자기증자나 대리모들에 대한 의학적, 유전적 심사의 필요성에 이르면 딜레마에 빠진다. ‘임신과 수태의 인자’들과 다른 신체기관의 시장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받는 쪽에서 유전적, 전염성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여기서 국가가 잠재적인 구매자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할 필요가 생긴다. 국가통제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은 의료소송에 대한 병원과 의료진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AIDS에 대한 공포로 인해 더 가속화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살거나 전체주의에 살거나, 또는 영국처럼 사회화된 보건체계이건 미국처럼 사적인 체계이건 상관이 없다.

유기적 혹은 비유기적 전체를 점점 더 작은 입자로 쪼개어 새로운 ‘기계들’로 재조립하는 데는 선택과 제거라는 우생학적 원칙이 깔려 있다. 바람직한 입자는 선택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입자는 제거된다. 생식의 영역에서 이러한 분해, 즉 ‘분리하여 지배한다’는 원칙은 임신한 여성을 ‘모체’와 '태아‘로 나누는 데서도 나타난다. 실제로 점점 많은 생식기술자들이 여성의 자궁을 태아에게 ’위험한 환경‘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모체와 태아간의 이러한 새로운 적대를 규제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은 태아를 법률적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선언하고자 한다. 그들은 태아를 모체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태아권리‘를 갖는 한 인간으로 보기 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태아보호법‘과 이 법을 시행할 국가적, 법적 기제를 요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태아가 환자로서 취급받는다는 사실이다. ‘결함이 있는’태아는 제거하거나 유전자치료로 손을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는 벌써 이른바 유전자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기의 부모들이 의사와 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한 사례가 몇몇 있다. 결함이 있는 태아를 제때 발견하여 유산시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소송이 산모를 향해 제기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배상법 전문가 마저리 쇼는 “태아가 살아서 태어날 경우, 태아에 대한 태만행위에 대해 ‘장래에 관한 조건부 책임’을 지게 된다. 이 행위는 산모의 태만으로 인한 태아학대로 간주되며 손상을 입고 태어난 아기가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 임신 중 알코올 남용, 필요한 산전관리의 소홀, 부족한 영양섭취 등은 아기가 손상을 입은 원인이 될 수 있으며, 그 아기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태어날 자신이 권리를 침해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라는 주장을 했다. 실제로 임신기간 중 의사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은 감옥에 갇혔다. 물론 이에 적합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공소가 기각되었으나,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한 의원이 즉각 ‘모성태만’ 혹은 의사의 지시에 대한 ‘의도적 무시’의 사례를 다룬 법안을 제출하였다. 이것은 분면 자넷 갤러허가 지적한 대로 “가임기의 모든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복종과 강제의 체제로 이끌 것이다. 달리 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불임을 증명할 수 없는 모든 여성에게 매달 집행되는 임신검진과 조깅, 음주, 노동에 대한 허가서 발급? 병워이 감옥이 되고 의사가 경찰이 되면, 산전관리가 가장 필요한 임부들(가난한 여성, 어린 여성, 약물 남용자)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산전관리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앤드류스가 표명한 자유주의적 입장과 생명권운동의 주장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보인다. 앤드류스는 생명권운동이 낙태에 간한 자유주의적 입법을 철폐하려 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 그녀는 인간의 신체, 특히 생식기관들이 재산, 즉 물건이라고 주장한다. 이 개념에 의하면 ‘생식자율성’이란 여성에게 소유자로서 이 재산을 몇 번에 나누어 팔거나 임대하는 등의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임신한 여성은 태아의 주인이고, 태아는 물건이 된다. 임신한 여성과 그 녀의 태아 사이의 공생관계 그리고 양자의 생명을 보호하는 살아 있는 관계는 상징적으로 파괴될뿐더러 새로운 생식기술에 의해 현실적으로도 파괴되는 것이다.

한편 생명권운동은 태아가 법률적인 의미에서 완전한 인간이며 임신한 여성의 임의적 간섭행위로부터 법적인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선언하고자 한다. 이 경우 역시 여성과 태아의 공생관계는 최소한 상징적으로 파괴되며 여성은 아이의 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여성의 신체 내에서 여성 자신과 태아 사이에 적대가 형성된다. 그리고 둘 다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앤드류스의 주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여기서 인간이란 신체 각 부분과 기관들의 단순한 조합에 불과하므로 물건으로서의 인간과 사람으로서의 인간 간의 차이는 사라진다. 생명권운동이 지키고자 하는 인간이란 결국 그녀/그의 신체기관의 주인 또는 매매인이다. 자유주의적 입장과 보수주의적 입장이 만나는 곳이 바로 부르주아적 재산 개념과 생식기술의 ‘진보’에 기초한 이런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과학적 식인풍습이다.



개체에서 조합으로


앤드류스에 의하면 여성이 자기 신체에 소유주가 못되는 지금의 상태로는 자유로울 수도, 평등할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 이 논리를 따르자면 여성들이 신체기관들을 사고 팔 수 있기 위해 자기 신체의 소유주가 되어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듯싶다. 하지만 사고 파는 자유란 그들 신체의 분해에 의존하며 이는 다시 한 사람의 ‘온전한’ 여성 --분해되지 않은--은 자유로울 수도 자율적일 수도 없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그렇다면 사고 파는 사람은 누구인가? 만일 개인--즉 나누어지지 않은 인간--이 팔 수 있는 부분들로 나뉜다면 그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계속해서 나눌 수 있는 조합만이 남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체 어디까지 이런 식으로 나눌 수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많은 부분으로 분해되고 팔리고도 계속 ‘주인’과 ‘판매자’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모든 부분을 떼어내도 좋고 팔아도 좋다고 결정하는 핵심부분 즉 남아 있는 ‘주체’는 무엇인가? 두뇌인가? 지정된 주체가 없다면 자율성과 자기결정에 대한 모든 논의는 결국 공허할 따름이다. 계약서를 쓰고 지키기 위해서라도 주체는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주체 즉 개인이 이론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제거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각 부분들의 조합뿐이다. 부르주아적 개인이 스스로를 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신체 내에서나 사회체제 내에서나 윤리적인 질문을 위한 자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서로 관계없는 부분들만 남은데다 각각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처럼 서로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원자화되고 적대적인 부분들이 모든 것을 기계적으로 한데 유지시키는 국가를 필요로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국가조차 더 이상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아니다. 실제로 지배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기제이다. 이 기제가 인간의 가치를 경정하여 신장은 하나에 5만 달러, 자궁은 빌리는 데 1만 달러가 되었다. 이제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 그리고 남성 --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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