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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들의 실패, 또는 낙원의 상실?
1. 유토피스틱스 -- 가능한 역사적 대안의 탐구
유토피아는 종교적인 기능이 있으며, 때로는 정치적인 동원을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또 그것은 환상을 길러내며, 환멸을 낳는다. 내가 대체 용어로 고안해 낸 유토피스틱스라는 단어의 취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대안들에 대한 진지한 평가이며, 가능한 대안적 역사체제의 실질적인 합리성에 대한 우리의 판단 행위이다. 이는 인간의 사회적 체제들과, 이 체제들이 지닌 가능성의 한계, 그리고 인간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냉철하고 합리적이며 현실주의적인 평가이다.
유토피스틱스는 우리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다시 말해 수단이라 불리는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전반적인 목표-- 에 대해서 과학과 도덕 그리고 정치학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바를 조화시키는 일이다. 수단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체제가 정상적인 삶을 누릴 때 지속되는 문제들의 일부이다. 내가 변혁적 시공간(TimeSpace)이라 부르는 바로 이러한 순간들에 이르러서야 유토피스틱스는 그저 타당한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집단적 지식의 타당성과, 특히 이 지식으로부터 우리의 역사적 체제들에 대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들의 타당성은 무엇이 실질적 합리성을 구성하는가에 관한 투쟁에서 중심 쟁점이 된다. 따라서 유토피스틱스는 지식의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사회적 세계의 작동방식에 관해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면밀하게 재검토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2. 근대세계의 혁명은 왜 환멸만을 낳았는가?
인간이 정치적 혁명의 꿈을 가져온 이래 언제나 환멸을 겪어온 듯 하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 그 좋은 예이다.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이것이 사회공학의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벌어지게 마련인 사태일 뿐이라고 한다.
근대세계의 혁명적 격변들의 대부분은 피억압 대중의 자발적 봉기라기보다는 (적어도 초기에는) 특정 집단이 국가질서의 붕괴 순간에 기회를 장악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대중들의 지지는 사후적인 것이었다. 보수주의가 대중에게 강요하는 인내심은 결코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하층집단들은 이를 그저 감내해 왔을 뿐이다. 하층집단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혁명에 지지를 보낸다.
진정한 혁명적 변화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논란이 많지만,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사실은 기본적 변혁은 국가 수준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근대 세계체계를 구성하는 국가들에서 혁명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혁명이라는 말이 그 근저에 놓인 사회구조나 혁명을 겪었다는 국가의 작동양식을 뒤바꾸는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있을 수도 없었다.
국가간체제의 제약 내에서 작동하는 이른바 주권국가들의 창출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창출의 요체였으며, 그 구조화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국가는 결코 자율적인 실체였던 적이 없으며 세계체제의 주요한 제도적 특성에 불과하다. 생산양식을 가졌다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전체로서의 세계체제였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 국가는 체제의 제도이며, 따라서 그 특정한 형태에 관계없이 이러한 자본주의적 추진력의 우선성에 어떤 방식으로건 부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이라는 용어가 이전에는 봉건적이었던 국가가 자본주의적으로 되었다거나, 이전에 자본주의적이었던 국가가 사회주의적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현재 적용 가능한 의미를 갖지 못하며 현실의 기만적 묘사일 뿐이다.
사회주의 국가도 이러한 세계체제의 일부였는데, 이런 주장에 대한 주요한 반박 중 하나는 바로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순수하지 못했고 제대로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충분히 혁명적이었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그리고 체제로서 자신들이 세계체제의 구조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특정한 매개변수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약받고 있으며, 이를 무시할 경우 세계체제 내에서 중요한 행위자가 될 모든 능력을 상실하게 되리라는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시기의 이르고 늦음은 있을지언정 자신들의 의도를 현실에 맞춰 굽히게 된다.
프랑스와 러시아 등 대부분의 혁명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정상적이고 지속적인 삶 가운데서 일어났다. 일부 사람들이 보여준 혁명에 대한 열광과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엄청난 적대감은 그 체제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일부였다. 열광이 누적된다는 사실이 한 가지 메커니즘이며, 열광이 환멸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이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혁명은 결코 그 옹호자들이 바란 방식이나, 그 반대자들이 두려워한 방식대로 작동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혁명이 있으나마나 한 것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상 그러한 격변의 거듭된 패턴은 체제의 어떠한 장기적 추세를 수립하는 중대한 요소였으며, 그 장기적 추세들의 영향은 오늘날 1945년 이후에 와서야 그리고 1989년 이후에 더욱더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3. 프랑스혁명 이후 -- 민중의 열말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누군가가 이들 나라에서 혁명 20년 전의 어느 한 순간과 일반적으로 혁명이 종결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으로부터 20년 후의 어느한 순간을 비교한다면, 형편은 비슷하되 이른바 혁명을 겪지 않은 나라들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그 변화가 과연 클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세계체제 전체를 본다면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이들 두 혁명의 결과로서 세게체제의 지구문화(geo culture)에서는 커다란 변화들을 추적할 수 있으며, 이는 세계체제 전체의 장기적 추세에 반영되는 변화인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정당성을 획득하게 된 개념은 세 가지가 있다. ①정치적인 변화가 예외적이며 본질적으로 부당하다기보다는 항상적이며 정상적이라는 개념. ②주권이 군주나 귀족집단체가 아닌 인민에게 있다는 것. ③국가 안에 거주하는 인민이 민족을 구성하며 그들은 그 민족 내지 국민공동체의 시민이라는 점. 이에 대해 프랑스혁명에 대한 거부로서 보수주의 이념이 등장했고, 프랑스 혁명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지만 기본개념들은 승인하는 자유주의가 등장했다.
보수주의자들은 법제화를 통한 변화가 사회질서에 끼칠 수 있는 손상에 주목하면서, 전통적 기구들과 상징적 지도자들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희망을 걸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민중이 요구하는 이론적 정상성, 민중주권, 시민권을 허용하되 이들 원칙에 따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변화를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통제된 변화를 원했다.
4. 1848년 혁명 -- 지구문화로서의 자유주의의 확립
1848년 혁명은 좌파 이념이 중도파 자유주의로 간주되던 것과 결별하여 우파 보수주의와 중도파인 자유주의 모두에 대립하는 제3의 이념으로서 출현한 순간을 이른다. 이를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매우 빨리 불타올랐으며, 그만큼이나 빨리 소진되었다. 그럼에도 당국자들은 이 때문에 크게 겁먹었고, 이 두려움은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이 함께 기성의 질서를 수호하는데 협력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48년 실패는 좌파에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각성을 강요했는데, 이는 주권국가에서 권력의 획득과 국가사회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게끔 했다. 이러한 전략은 장기적으로 볼 때 전문가들에 의하여 관리되는 합리적인 변화라는 자유주의의 전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의 어디서나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라는 3대 이념이 정치적으로 경합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중도파인 자유주의가 세계적인 이념이 되었는데, 이는 보수주의와 사회주의가 결국 관리된 개혁을 기초로 하는 자유주의적 주제의 변형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서 대중의 압력이 정당화된 상황에서 이를 억제할 방법에 관해 한 조를 이루는 세가지 이념이 등장하자, 한 세기 넘게 모든 사회적 행동이 그 안에서만 일어나도록 할 매개변수가 수립되었다. 그 결과로 참정권과 복지국가가 등장했다. 결국 자유주의적 양보들은 더욱 근본적인 변화들에 대한 압력을 낮추게 되었다.
5. 민족주의․인종주의․성차별주의의 대두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자의 저항이지만, 그 반대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에 이러한 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민족주의와 시민권의 연계이다. 무엇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또한 무엇을 제외시킨다는 뜻이다. 시민권이 한 일은 배제가 공개적인 계급장벽이 아니고 민족적인, 혹은 숨겨진 계급적 장벽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바꿔놓는 것이다.
백인종의, 혹은 아리안족의 우월성에 대한 노골적인 이론화인 인종주의는 19세기에 북부와 서부 유럽에서, 그리고 유럽의 정착자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른 지역의 국가들에서 흥성하였다. 자유주의적 정치체에 소속된다는 것은 강대국 집단의 공통 시민권이라 할 일종의 특급시민권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현재는 강대국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인종적으로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기원을 둔 사람들이나, 백인들이 정착한 국가의 토착민을 포함한 세계의 나머지사람들이 거기서 배제되었음을 뜻했다.
성차별주의는 주부(housewife)의 개념을 창조하고 신성화하는 것을 필요로 했다. '단독임금 가정'의 남성 생계담당자와 주부는 한 짝이 되는 위치에 자리매김 되었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효과를 낳았다. ①얼마만큼의 잉여가치가 노동계급에 실제로 재배당되고 있는지를 흐리게 했다. 단독임금의 남성 임노동자의 늘어난 임금은 노동시장에서 여성과 어린이 경쟁자가 배제됨으로서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②커다란 집단이 배제된 현실에서 편입의 가치는 올라갔다. 백인 여성들은 비백인 세계에 간단히 추가되었고, 남성 노동계급의 지위는 덜 모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③시민권의 부대조건으로 군복무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6. 러시아 혁명 -- 민중적 열망의 비유럽세계로의 확산
러시아혁명은 볼셰비끼들에 의한 계획된 봉기의 결과라기보다는, 혹독한 군사적 패배에 더하여 주민 사이의 기아가 확산됨으로써 러시아의 정치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볼셰비끼가 상대적으로 더 잘 조직화되어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었던 사실의 결과였다. 또한 볼셰비끼는 러시아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독일혁명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독일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는 스탈린주의, 그리고 91년 소련의 붕괴다.
러시아혁명은 범유럽의 강대국들에게는 노동계급을 무마하기 위해 자유주의가 나눠주는 꾸러미에 담아야 할 분담금을 상당히 증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유럽세계의 경우에는 이보다 효과가 더 크다. 러시아혁명 이후 민족주의의 세균은 유럽의 경계 바깥으로까지 확산되어갔다. 이는 비유럽 국가가 유럽의 통제로부터 해방되어 산업화를 이루고 군사력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프랑스혁명이 범유럽세계의 위험한 계급들에게 희망과 기대, 그리고 더욱 커진 열망을 불어넣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이를 비유럽세계의 위험한 계급들에게 불어넣은 것이다. 비유럽세계의 민족해방운동은 자유주의 이념이 전지구적으로 적용될 수밖에 없으며 그들의 양보에는 전지구적인 내용이 담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7. 1968년 혁명 -- 자유주의의 퇴출과 구좌파에 대한 환멸
1848년 세계혁명의 변이는 세계체제의 지구문화의 토대로서 자유주의가 수립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1968년 세계혁명은 바로 이 역할로부터 자유주의를 퇴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바로 지구문화에서 지닌 자유주의의 지배적 역할 자체를 과녁으로 삼았으며, 갖은 수단으로 자유주의를 이 위치에서 끌어내리고자 했다.
68이후 세계는 지정으로 삼분법적인 이념상의 분열상태가 되었다. ①보수주의. 가부장적 전통주의와 극단적 반복지주의를 강화했다. ②자유주의. 이 이념의 대표주자는 이제 사민주의 정당으로 넘어갔는데, 이들은 전문가에 의해 관리되는 개혁이라는 벤섬과 밀의 전통을 공개적으로 수용했고, 여기에 적당히 ‘사회적인’ 경제를 가미하는 정도였다. ③급진주의. 마오주의 분파들이 등장했다 희미해지고, 묵시론적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과 개혁주의적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이제 대중들이 전통적인 반체제운동들(이른바 구좌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의 본질적인 요소는 환멸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환멸은 이들 정당이 했던 역사적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는 의식에 다름아니었다. 이는 특정한 정부팀의 업무수행에 대한 일시적인 실망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런 대중적 감정은 구소련의 붕괴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8. 국가에 대한 희망의 상실 -- 역사적 이행기의 시작
이러한 희망 상실은 반국가주의(antistatism)의 확산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한편으로 국가구조의 전반적인 정당성 상실이자, 도덕적 연대와 실질적 자기보호를 위한 비국가 기구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돌아섬을 의미했다. 부활한 보수주의 운동은 복지국가의 장치들을 폐기하는데 이러한 정서를 이용했다. 이렇게 만연한 반국가주의는 (국가간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주의 승리가 아님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지구화의 이데올로기 찬양이란 우리의 역사적 체제가 죽어가면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에 대해 참을성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곧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열망을 버렸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욕망은 그 어느때보다도 강하며, 이 사실이 희망과 믿음의 상실을 더더욱 절망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가 역사적 이행기에 돌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이는 또한 역사적 이행이 고난의시기, 그리고 이행이 계속되는 동안 내내 지속될 암흑의시기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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