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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중 일부 발췌독


 

 

 

 

「스파이크」

 

1931년 4월 문학잡지 <뉴 아델피>에 게재. 문학적인 에세이로선 처음으로 지면에 실린 글이다.사리 명문교 이튼을 졸업한 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오웰이 식민지 버마에서의 5년간(1922~1927)의 경찰 생활을 접고, 민바닥 생활을 하며 작가 수업을 하다지면에 본격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던 무렵의 에세이다. 이 글은 나중에 줄이고 고쳐져 그의 첫 책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의 27장과 35장에 실렸다. ‘파이크’는 구빈원에 딸린 부랑자(노숙자)를 위한 임시 무료 수용소를 일컫는 속어인데, 간결한 번역어가 마땅찮고 강렬한 어감을 살리기 위해 본래 발음대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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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산한 방에서 부랑자들 대부분은 연이어 10시간을 있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는 따분함이야말로 부랑자 최대의 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허기나 불편보다도, 심지어 언제나 남 보기 망신스럽다는 느낌보다도 더한 것이지 싶다. 무지한 사람이라고 해서 온종일 아무 할 일 없이 가두어둔다는 건 어리석고도 잔인한 짓이다. 개를 통 속에 가둬놓고 묶어두는 일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거의 대부분이 무학인 부랑자들은 빈곤에 대해서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의자할 데도 없이 당할 뿐이다. 그런 그들이니 10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 꼼짝없이 앉혀놓으면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지 알 길이 없다. 거러니 생각나는 게 있다 한들 불행을 푸념하거나 일자리를 갈망하는 것밖에 없다. 그들에겐 무위無爲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삶의 너무나 많은 부분을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보내야 하는 그들로선 따분함으로 인한 고통이 더 큰 법이다.

 

- 15-16pp

 

 

 

우리는 더돌이 생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부랑자를 하루 14시간씩 스파이크에 있도록 하고, 나머지 10시간은 길을 걸으며 경찰을 피해 다니게 하는 체제를 비판했다. 그는 또 자기 사례, 즉 3파운드어치의 연장 세트가 없어 6개월 동안 생활보호 대상자 생활을 해야 했던 얘기도 해주었다. 말이 되는 일이냐고 그는 말했다.

나는 구빈원 부엌에서 버려지는 음식쓰레기 얘기를 해주고 내 생각이 어떤지를 말해주었다. 내 말에 그는 당장 어조가 바뀌었다. 나는 내가 모든 영국 노동자 속에 잠들어 있는 주인 근성을 자극한 걸 알았다. 비록 다른 부랑자들과 함께 굶주려온 처지이지만, 그는 음식을 부랑자에게 주지 않고 버려야 하는 이유를 바로 알았던 것이다. 그는 제법 엄하게 타이르듯 내게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요.” 그가 말했다. “이런 데를 너무 좋게 만들어놓으면 온 나라의 쓰레기들이 다 몰려들게 돼요. 그런 쓰레기들을 떼어놓으려면 음식이 나빠야만 되고요. 여기 이 부랑자들은 너무 게을러서 일을 하려고 안 하지. 다들 그래서 저 골이 된 거라니까. 그런 사람들 격려해줄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며 반대론을 펴려고 했으나 그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저런 부랑자들 동정할 것 없어요. 다 쓰레기니까. 저 사람들을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하고 같은 기준으로 판단할 것도 없고. 다 쓰레기라니까, 쓰레기.”

그가 동료 부랑자들과 자신을 용케도 분리시키는 게 흥미로웠다. 그는 6개월 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지만, 하느님 보시기에 자신은 부랑자가 아니라고 넌지시 마하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스파이크에 있을지 몰라도 정신만은 멀리까지 날아올라 중산층의 순전한 정기 속에 있는 셈이었다.

 

18~19pp

 

 

 

「교수형」

 

1931년 8월 <뉴 아델피>지에 게재. 식민지 버마의 경찰 간부로 있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오웰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스케치가 돋보이는 유명한 에세이 중 하나다. 오웰은 같은 해 가을에 첫 소설 『버마 시절』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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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교수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간수 둘은 죄수 양쪽에서 총을 어깨에 걸고 행진하고, 다른 둘은 뒤에 바짝 붙어 팔과 어깨를 미는 듯 떠받치는 듯 잡고 걸었다. 치안판사 등 나머지 우리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10야드쯤 갔을까, 아무 명령도 주의도 없이 갑자기 행진이 딱 멈춰버렸다. 황당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개 한 마리가 안마당에 떡 나타난 것이다. 녀석은 우리들 사이를 마구 뛰어다니며 연이 세차게 짖어대더니, 많은 인간들이 한데 모여 있는 게 너무 반갑다는 듯 온몸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우리 주위를 펄쩍 펄쩍 뛰어다녔다. 에어데일과 떠돌이 잡종개가 섞인 덩치 크고 털이 긴 개였다. 녀석은 한동안 우리 주변을 껑충껑충 돌다가 누가 제지하디고 전에 잡가지 죄수에게 달려들어 펄쩍 뛰어오르더니 얼굴을 핥으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놀라 개를 미처 붙들 생각도 못하고 아연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

교수대까지는 40야드 정도가 남았다. 나는 바로 앞에 걸어가는 죄수의 갈색 등을 지켜보았다. 그는 팔이 묶여 있어 어색하긴 했으나 저벅저벅 잘 걸었다. 절대 무릎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글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 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있듯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내장은 음식물을 소화하고, 피부는 재생하고, 손톱은 자라고, 조직은 계속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교수대 발판에 설 때에도, 10분의 1초만에 허공을 가르며 아래로 쑥 떨어질 때에도, 그의 손톱은 자라나고 있을 터였다. 그의 눈은 누런 자갈과 잿빛 담장을 보았고, 그의 뇌는 여전히 기억과 예측과 추론을 했다—그는 운동이에 대해서도 추론을 했던 것이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뒷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4~26pp

 

 

 

「코끼리를 쏘다」

 

1936년 가을 <뉴 라이팅>지에 게재. 「교수형」과 더불어 버마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며, 사후에 출간된 에세이집의 제목으로 선정되었을 만큼 유명한 작품이다. 1936년은 오웰이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라고 할 만큼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해였다. 같은 해 6월에 결혼한 그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가게를 하고 텃밭을 일구며 집필에 열중했는데, 1월부터 3월가지는 한 진보단체의 의뢰를 받아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취재했고, 12월에는 이 르포 원고를 완정하자마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러 떠났다. 이 원고는 오웰이 스페인에서 싸우던 이듬해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발간되어 이전에 출간한 4권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널리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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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우회적으로 깨우침을 주는 일이 벌어졌다. 그 자체로는 사소한 사건이었지만, 제국주의의 본질을 (달리 말해 전제적인 지배의 진짜 동기를) 이전보다 더 잘 간파할 수 있게 해준 일이었다. 아침 일찍 시내 다른 경찰서의 고참 경위가 내게 덜컥 전화를 하더니 코끼리 한 마리가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부디 와서 어떻게 좀 해주십사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몰랐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 조랑말에 올라타고 그곳을 향했다. 소총도 챙겼는데, 케케묵은 윈체스터 44구경이라 코끼리를 잡기에는 너무 빈약했지만 그 소리는 위협용으로 쓸 만하다 싶었다. 도중에 여러 버마인들이 나를 지체시키며 코끼리의 소행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것은 야생 코끼리는 아니었고, ‘발정기’를 맞은 길든 코끼리였다. 길든 코끼리가 다 그렇듯 녀석은 ‘발정기’가 닥치지 묶여 있었는데, 전날 밤 사슬을 끊고 탈출한 것이었다. 발정난 코끼리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조련사는 녀석을 잡으러 나섰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그곳에서 12시간은 걸리는 곳에 있었고, 아침에 녀석이 갑자기 시내에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무기가 없는 버마인 주민들은 녀석이 나타나자 속수무책이었다. 녀석은 이미 누군가의 대나무 오두막을 부쉈고, 소 한 마리를 죽였으며, 과일 노점 몇 군데를 덮쳐 진열품들을 먹어 치웠다. 뿐만 아니라 시 당국의 쓰레기차와 마주쳤을 때 운전사가 뛰어내려 줄행랑을 치자 차를 뒤집어엎고는 마구 짓밟기도 했다.

(...)

나는 사망자를 보자마자 가까이 잇는 친구의 집으로 전령을 보내 코끼리용 소총을 빌ㄹ오도록 했다. 조랑말은 일찌감치 돌려보냈다. 녀석이 코끼리 냄새를 맡고 두려움에 미쳐 날뛰다 날 내동댕이치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령은 몇 분 뒤에 총과 탄약통 5개를 들고 왔다. 그 사이 버마인 몇 사람이 우리한테 오더니 코끼리가 불과 몇백 야드 거리의 밭에 있다고 했다. 내가 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실상 그 동네 인구 전체가 집에서 몰려나와 나를 따라왔다. 큰 총을 본 그들은 내가 코끼리를 쏠 거라며 모두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들은 코끼리가 자기네 집을 대놓고 부술 때는 대단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코끼리가 총에 마즐 거라고 하니 달라졌다. 영국인 군중이라도 그랬을 것처럼, 이 일은 그들에게도 제법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고기 생각도 있엇던 것이다 .나는 어딘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우선 나는 코끼리를 쏠 생각이 없었으며 (필요하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총을 빌려오라 했을 뿐이었다) 자기 뒤를 따라오는 군중이 있다는 건 언제나 당혹스러운 일이다. 나는 비탈 아래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총을 어깨에 걸친데다 뒤로는 계속해서 늘기만 하는 군중이 서로 미치며 졸졸 따라오니, 내 모습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보스러웠다.

(...)

나는 이미 길 위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리끼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 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시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를 손따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거대하고 값진 기계장치를 파괴하는 것에 비할 만한 일이다)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멀리서 보니 평화롭게 풀을 뜯는 코끼리는 소보다도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정기’의 발작은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녀석은 위험하지 않게 그저 배회할 것이고, 조련사가 돌아와서 데려가면 그만일 터였다.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적어도 2000명은 되고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길 양쪽을 다 막고 길게 늘어서 있었다. 빛깔 요란한 옷들 위로 길게 이어져 있는 노란 얼굴들의 물결이 보였다. 모두 코끼리한테 총을 쏠 것이라 확실히 믿고서 제법 흥이 나 좋아하는 표정이었다. 마치 마술사의 묘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은 날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술의 소총을 든 나는 잠시 봐줄 만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소총을 들고 서 있는 그 순간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가 공허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부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춰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리를 쏴야 했다. 나는 소총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이미 그럴 것이라 알린 셈이었다. 백인 나리는 백인 나리답게 행동해야 한다. 단호하고, 생각이 분명하고, 확실히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는 것이다. 2000명이 졸졸 따라오는 가운데 총을 들고 여기까지 왔다가 아무것도 안 하고 슬그머니 물러나버린다—그런 건 잇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중들이 날 비웃을 터였다. 나의 모든 생활은, 동양에 있는 모든 백인의 삶은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한 기나긴 투쟁이었다.

하지만 난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코끼리가 정신이 팔린 할머니 같은 태도로 풀 다발을 제 무플에 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 존재를 쏜다는 건 살인처럼 꺼림칙한 일이었다. 그 나이에 나는 짐승을 죽이는 것에 대해 결벽적이진 않았지만, 코끼리는 쏘아본 적도 없었고 그러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아무튼 ‘큰’ 짐승을 죽인다는 건 언제나 더 불쾌한 일이다.)

(...)

나는 코끼리 가까이, 아마도 20야드 거리 이내까지는 다가가서 코끼리의 행동을 확인해야 했다. 코끼리가 덤벼들면 쏴야 할 것이고, 날 본체만체하면 조련사가 올 때까지 내버려둬도 좋을 것이었다. 그러나 난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나는 소총 사격 실력이 별로였고, 땅이 너무 질어서 밭에 들어가면 발이 쑥쑥 빠질 터였다. 그러니 코끼리가 덤벼들고 내가 맞히지 못하면, 나는 스팀롤러 밑에 깔린 두꺼비 신세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순간엗 ㅗ나는 내 목숨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내 뒤에서 주의 깊게 지켜보는 노란 얼굴들만 의식하고 있었다. 그 많은 군중이 날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혼자 있었다면 느꼈을 법한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되기에 대개 두려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때 나한테 든 유일한 생각은 일이 잘못되면 2000명의 버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쫓기다 붙들려 짓밟혀서, 비탈 위에 있는 인도인처럼 이를 싱긋 드러낸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대안이 하나 있었다. 나는 탄약통을 탄창에 밀어넣고 길에 바로 엎드려 정조준하는 쪽을 택했다.

(...)

방아쇠를 당겼을 때, 총성이 크게 들리지도 않았고 반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명중했다는 뜻이었다). 대신에 군중이 좋아서 날뛰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총알이 표적에 닿기까지의 신간보다 짧은 순간이었을 테지만, 코끼리한테 알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걸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코끼리는 움직이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몸의 모든 선이 변해 있었다. 당장 쓰러지진 않았어도 총탄의 엄청난 충격에 마비가 된 듯, 느닷없는 일격에 몸이 오그라들고 엄청나게 늘어버린 느낌이었다. 꽤 오래 그 상태로 있더니(아마도 5초쯤 됐을 것이다) 코끼리는 결국 풀썩 무릎을 꿇었다. 입에선 침이 흘렀다. 너무나 노쇠한 기운이 코끼를 압도해버린 것 같았다. 수천 년은 산 존재가 아니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같은 자리에다 다시 총을 발사했다. 두 번째 일격에 코끼리는 쓰러지는 게 아니라 천천히 필사적으로 일어서더니 다리를 떨고 고개를 떨어뜨리며 거우 몸을 폈다. 나는 세 번째 탄알을 쏘았다. 이게 결정타였다. 코끼리의 온 몸이 흔들이며 마지막 남은 힘이 다리에서 빠져 나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코끼리는 쓰러지면서 잠시 다시 일어서는 듯 보였다. 뒷다리는 무너졌지만 코를 나무처럼 하늘로 뻗는 모습이 거대한 바위가 위로 솟구치는 듯했다. 코끼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트럼펫 소리 같은 울음을 토했다. 그러고는 배를 내 쪽으로 향하며 쓰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내가 엎드려 있는 땅까지 흔드는 듯했다.

나는 일어섰다. 버마인들은 이미 나를 지나쳐 진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코끼리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건 분명했지만 죽은 건 아니었다. 아주 규칙적으로 길게 그르렁거리며 헐떡일 때마다 거대하고 불룩한 옆구리가 고통스레 오르내렸다. 입은 헤벌려져 있어 옅은 분홍빛인 목구멍 깊은 곳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코끼리가 죽을 때까지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호흡은 더 약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남은 두 발을 심장이 있지 싶은 부분에 발사했다. 빨간 벨벳처럼 진한 패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래도 죽지 않았다. 총을 맞을 때 몸을 꿈틀하지도 않았고, 고통스러운 호흡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나는 그 불쾌한 숨소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거대한 짐승이 움직임 힘도 죽을 힘도 없이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 꼴을 보는 것도, 그 목숨을 어서 끊어버릴 수 없는 것도 몹시 불쾌한 노릇이었다. 나는 내 작은 소총을 가져오라고 해서 코끼리의 심장과 목에다 한 발씩 쏘아넣었다. 아무 효과도 없는 듯했다. 고통스러운 헐떡임은 시계 초침이 움직이듯 꾸준히 이어졌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리를 떠버렸다. 죽기까지 반 시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다. 버마인들은 내가 가기도 전부터 칼과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다. 정오 무렵엔 코끼리가 거의 뼈만 남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물론 그 후 코끼리 사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인은 몹시 화를 냈지만 인도인일 뿐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법적으로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이었다. 미친 코끼리는 주인이 제대로 못 다스릴 경우 미친개처럼 죽어야 했던 것이다. 유럽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렸다. 나이 든 사람들은 내가 옳았다고 했고, 젊은 사람들은 쿨리를 죽였다고 코끼리를 소는 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했다. 코끼리는 그 어떤 드라비다 쿨리보다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나는 그 쿨리가 코끼리 때문에 죽은 걸 다행으로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쏠 핑계가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내가 코끼리를 쏜 게 순전히 바보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 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시와 마이크」

 

1943년 가을에 집필해 1945년 3월 <뉴 색슨 팜플렛>지에 게재한 글. 이 글을 쓰던 무렵인 1943년 11월에 오웰은 2년 남짓한 BBC 라디오 프로듀서 생활을 접고, 좌파 주간지인 <트리뷰>지 문예 부문 편집장 일을 맡는다. 그리고 같은 때에 집필에 들어가 1944년 2월에 완성한 『동물농장』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정당하다 결국 1945년 8월에야 출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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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 문학 방송 프로그램을 인도로 내보내는 일을 했다. 주로 당대와 당대에 가장 가까운 영국 작가들의 시를 많이 방송했는데, 그런 작가들이란 예를 들면 엘리엇, 허버트 리드, 오든, 스펜더, 딜런 모머스, 헨리 트리스, 알렉스 컴포트, 로버트 브리지스, 에드먼드 블런든, D.H. 로렌스 같은 이들이었다. 우리는 가능한 경우라면 언제나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나와 방송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딱히 왜 이런 특정 프로그램을 시작했는지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인도의 특정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방송을 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구성하는 테크닉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덧붙이고 싶다. 본질적으로 우리의 문학 방송은 인도의 대학생들을 겨냥한 것이었는데, 소규모의 적대적인 그 청취자들은 영국의 선전운동이라 할 만한 다른 무엇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우리가 기껏해야 수천 명 이상의 청취자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진작부터 알려진 바였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방송에서 가능한 것보다 ‘고상’해도 되는 핑계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써먹은 방법 하나는 음악 속에 시를 앉히는 것이었다. 먼저 잠시 후에 이런저런 시를 방송할 것이라고 예고해준다. 이어서 음악을 1분 정도 틀어준 다음 페이드아웃하면서, 제목이든 뭐든 시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은 채 시를 낭독한다. 그리고 음악을 다시 페이드인해서 1~2분 정도 계속 틀어준다. 이렇게 해서 5분 정도에 시 한 편을 음악과 함께 소개하는 것이다. 어울리는 음악을 고르는 게 중요하지만, 여기서 음악을 이용하는 진정한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프로그램의 다른 부분들로부터 시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하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한 편을 3분 분량의 뉴스 속보 속에 끼워넣으면서도 어쨌든 내 귀에는 크게 어색하지 않돌록 할 수 있는 것이다.

(...)

나는 시를 쓴 사람이 직접 방송을 하는 게 그저 청취자들에게만 어떤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도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하고서 매료되었다. 시를 방송하는 방법에 관한 한 영국에선 별달리 시도된 바가 거의 없으며,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크게 소리내어 릭는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이크 앞에 앉음으로써(특히 그럴 일이 정기적으로 있을 대) 시인은 우리의 시대와 나라에서는 달리 접할 수 없는 새로운 관계를 자기 작품과 맺게 된다. 근대에 와서 시가 음악이나 구어와 갖는 연관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시는 존재라도 하기 위해 종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시인이란 사람에게 노래나 낭송을 기대한다는 건 건축가에게 천장에 회반죽 바르는 기술을 기대하는 것보다 곤란한 일이 되어버렸다. 서정적이거나 수사적인 시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고,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는 나라라면 어디서나 일반인들이 시에 거부감을 갖는 게 당연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간극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그 틈이 계속해서 벌어져가고만 있으니, 시는 주로 인쇄된 형태로 소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관념이 모호하과 ‘교묘함’을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

방송에서 청취자는 어차피 어림짐작이지만 ‘단’ 한사람 같은 존재다. 수백만이 듣고 있을 수도 있지만, 각자 혼자 듣고 있거나 작은 그룹의 일원으로 듣고 있으며, 그 각자는 방송이 자기에게만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혹은 받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방송하는 입장에선 청취자들이 공감하거나 최소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여겨도 무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따분한 사람은 언제든 채널을 다른 데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취자들은 공감은 할지언정 방송하는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방송이 연설이나 강연과 다른 게 바로 이 점이다 .대중 연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 알 듯이, 연단 위에서는 청중의 반응에 따라 어조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청중이 무엇에 반응하고 안 할지는 항상 몇 분 안에 분명해지며, 실제로 연사는 청중 가운데 제일 모자란다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발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도 ‘개성’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란을 떨어가며 환심을 사야 한다. 안 그러면 결과는 언제나 냉랭하고 당혹스런 분위기로 나타난다. 청중 앞에서 하는 ‘시 낭송’이 끔찍한 건, 청중 가운데 따분하거나 거의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단순히 채널을 돌림으로써 다른 데로 가버릴 수 없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제대로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도 본질적으로 같은 어려움 때문이다. 극장의 관객은 선별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선 그런 상황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송에서 시인은 시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울러 방송에 익숙해진 시인들이 마이크에 대고 시를 읽으며 청중이 보이는 데서라면 발휘할 수 없는 기량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하는 요소가 개입된다는 건 별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로서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통해, 시를 크게 소리내어 읽는다는 게 당혹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사람 대 사람의 정상적인 교류처럼 느껴지는 상황을 시인에게 만들어줄 수 있으며, 그 자신의 작품을 종이 위의 패턴보다는 ‘소리’로 여기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서 시와 일반인 간의 화해가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 화해는 전파를 수신하는 쪽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발신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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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놀드 베넷이 영어권 나라에서 소방 호스보다 군중을 더 빨리 흩어버릴 수 있는 게 ‘시’라는 단어라고 한 건 과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 이런 유의 간극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벌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인들은 점점 더 시에 반감을 갖게 되고, 시인은 점점 더 거만하고 난해한 존재가 되어, 결국엔 시와 대중문화 사이의 단절이 일종의 자연법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실은 우리 시대에만, 그것도 지구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일부지역에만 있는 문제인데도 말이다. (...) 우리의 삶이 볼품없는 데는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원인이 있으며, 어느 순간부터 전통이 실종됐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의 틀 속에서 개선이 불가능한 건 아니며, 미적인 개선이 사회 전반을 구원하는 데 불필요한 부분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장 미움 받는 예술이라는 특별한 처지로부터 시를 구제하여 사람들이 음악에 베푸는 만큼의 관용만이라도 받도록 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볼 만하다. 단, 그러자면 시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인기가 없는지를 질문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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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례로 나는 글을 쓰기 직전, BBC 9시 뉴스 바로 전에 늘 하는 두 코미디언의 방송을 듣고 있었다. 마지막 3분을 남겨두고 한 코미디언이 갑자기 “잠시 좀 심각해지고 싶다”더니 국왕 폐하를 찬양하는 「멋쟁이 영국 신사」란 말도 안 되는 애국시를 읊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느닷없이 최악의 영웅시를 듣게 된 청취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은 결코 아닐 것이다. 아니면 BBC에 그런 짓을 즉각 중단하라는 분노의 편지들이 꽤 날아들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다수 대중이 ‘시’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을지언정 ‘운문’에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다. 아무튼 사람들이 운율이라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면 어떤 노래나 익살5행시도 유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는 것은 시가 불가해성, 지적 허세, 그리고 남들 바쁜데 혼자만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라는 단어 자체가 ‘하느님’이나 목사의 개목걸이(빳빳이 세운 칼라)같은 말처럼 나쁜 인상부터 심어주는 것이다. 시를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후천적인 억제를 완화시켜주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야유를 내뱉는 대신에 듣도록 해주는 문제다. 진정한 시를 다수 대중에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소개할 수 잇다면, 그것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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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라디오를 보다 희망적인 매체로서 제시했고, 라디오의 기술적인 장점을 특히 시인의 입장에서 짚어보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처음엔 부질없이 들릴 텐데, 그건 라디오가 헛소리 이외의 것을 퍼드리는 데 이용된다는 상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온 세상 곳곳에 있는 확성기에서 그야말로 줄줄 흘러내리는 헛소리들을 듣고 있으며, 그래서 라디오를 딴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걸 들으라고 존재하는 것으로 단정 짓는다. 그래서인지 ‘라디오’라는 단어 자체가 고함지르는 독재자나, 아군 비행기 세 대가 귀환하지 못했음을 알리는 점잖고 묵직한 음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전파를 타고 들려오는 시는 줄무늬 바지 입은 뮤즈 여신들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매체의 가능성과 그것의 실제 쓰임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방송이 그 모양인 건 마이크와 송신기라는 장치 자체가 본래부터 저속하거나 시시하거나 부정직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전파를 타는 전 세계의 모든 방송이,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래서 일반인들이 너무 똑똑해지는 걸 막으려 하는 정부와 거대 독점기업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영화 역시 독점 자본 형성기에 처음 나왔고, 제작부터 소비 단계까지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장르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모든 예술이 다 마찬가지다. 예술 작품이 만들어지는 경로가 점점 더 관료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있는데, 관료의 목표란 결국 예술가를 망가뜨리는 것, 혹은 최소한 거세라도 해버리는 것이다. 현실이 이렇기만 하다면 전망은 암울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진행될 게 분명한 전체주의화는,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예견하기 어렵던 새로운 변화 덕분에 완화되고 있다.

 

 

 

 

 

「당신과 원자탄」

 

1945년 10월 <트리뷴>지에 게재. 일본 원폭(8월 6일) 두 달여 뒤에 발표한 글이다. 원자탄 제조 기술이 인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성찰을 담은 이 글은, 원폭 전쟁으로 폐허가 된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1984』를 설정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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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역사는 대체로 무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주장은 이제는 흔한 말이 되어버렸다. 특히 화약의 발명과 부르주아에 의한 봉건제 전복의 연관성은 누차 지적된 바 있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일반적인 사실로 판명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가장 강력한 무기가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시대는 폭정의 시대인 경향이 있고,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고 단순한 시대에는 서민들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예컨대 탱크나 전함이나 폭격기는 본질적으로 압제적인 무기인 반면에, 소총이나 머스킷총이나 긴 활이나 수류탄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무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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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조짐으로 추측건대, 러시아는 아직 원자탄 제조의 비밀을 보유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수년 안에는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게 일치된 견해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몇 초 만에 수백만 명을 없애버릴 수 있는 무기를 보유한 가공할 초강대국 두셋이 세계를 나눠 가질 전망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런 전망은 전쟁이 점점 더 커지고 끔찍해짐에 따라 기계문명이 종말을 맞이할지 모른다는 식의 다소 성급한 해석을 낳았다. 그러나 만일 살아남은 강대국들이 서로에겐 절대 원자탄을 쓰지 않기로 암묵적인 동의를(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 한다면? 보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쓰거나 쓴다는 위협을 한다면? 그럴 경우 우리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차이가 있다면 권력이 더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피지배 민족들과 피억압 계급들의 미래는 더 암담해진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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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50년 동안 H.G.웰스씨 등은 인간이 무기로 자멸함에 따라 개미처럼 군집 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 인간을 대체할 위험이 있다는 경고를 해왔다. 독일의 파괴된 도시들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해봄 직하다. 하지만 세계 전반이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수십 년 동안의 흐름은 무질서가 아니라 노예제가 부활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전반적인 와해가 아니라 고대 노예제국처럼 끔찍하게 안정된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만일 원자탄이 자전거나 자명종처럼 싸고 쉽게 만들 수 잇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다시 야만으 ltl대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단, 그랬다면 국가 주권과 고도로 집중화된 경찰국가의 시대도 끝났을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지금 그래 보이듯 원자탄이 전함처럼 만들어내기 어려운 귀하고 값진 물건이라면, ‘평화 아닌 평화’를 무한히 연장하는 대가로 대대적인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왜 쓰는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실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잇는 한, 그리고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 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그런데 그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문장의 구성과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가 발생하며, 충실성의 문제가 새롭게 개입된다. 보다 투박한 유형의 어려움이 있는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스페인내전에 대해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물론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책이다. 하지만 대체로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으로 형식을 고려하며 쓴 작품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나의 문학적인 본능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모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 이 책엔 프랑코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변호하는, 신문 인용문 따위가 가득한 긴 장章이 있다. 이와 같은 장은 1~2년 뒷면 일반 독자의 관심에서 멀어질, 말하자면 책을 망칠 게 뻔한 부분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 평론가는 그 부분에 대해 내게 훈계를 했다. “그런 걸 뭐하러 다 집어넣어요? 좋은 책이 될 만한 걸 보도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영국에선 극소수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던,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한 혐의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어쩌다 알게 되었다. 그 사실에 분노하지 않았다면 나는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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