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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독]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존 벨라미 포스터)

존 벨라미 포스터의 "자본주의와 생태: 모순의 성격" (제이슨 무어 외, [역사적 자본주의 분석과 생태론]에 실림) 126-7pp 에서 발췌. 자본주의와 생태 문제에 관한 중요한 논점을 다루고 있음. 전체적으로 오코너가 주장하는 생태모순에 대한 분리주의(??)적 사고를 비판함.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 개념의 전반적 취지는 일단 생태적 손상이 자본주의의 경제위기로 전환되면 일종의 피드백 매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직접적으로는 자본이 생산조건의 손상과 결합된 생산비용의 증가를 억제하려고 시도함으로써, 간접적으로는 사회운동이 체계로 하여금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도록, 바꾸어 말하면 자본이 외부화해온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지불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체계가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생산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든다. 여기서 분명한 가정은 생태적 원인들에서 비롯된 경제위기가 좌파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제공하고, 나아가 계급에 기초한 노동자운동과 신사회운동의 제휴를 형성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전체로서 자본주의에는 그러한 피드백 매커니즘이 존재하지 않는다. 독일 녹색당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는 마지막 한 그루의 나무가 벌목되었을 때야 비로소 화폐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개달을 것이다. 인간사회와 대다수 생물종을 위해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아주 소란스러운 생태 파괴의 와중에도 축적할 수 있고 (예컨대, 폐기물 관리산업의 성장을 통해) 환경 훼손으로부터도 이윤을 얻을 수 있으며 회복 불가능한 지점까지 지구를 계속 파괴할 수 있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는 생태 문제의 위험은 자본주의 체계가 그것을 재족하도록 인식하게 만드는 어떤 내부적 (또는 외부적) 조절 매커니즘도 그 체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큰 더 심각하다. 생태에는 경기순환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관점의 순환 이론에 가장 가가운 것은 폴라니의 '이중운동'에 관한 이론이다. 그것은 '허구적 상품들'("생산조건")을 조절하려는 자본주의적 시도와 결합된 규제운동과 탈규제운동의 정치적 순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중운동은 오코너의 "두 번째 모순"이론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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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코포라티즘을 넘어서자.

한 때 불자였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다시 불자의 길을 걷고 싶어 하는 나로서는, 요즘 MB정권이 휘둘러 대는 종교편향 행위에 적지않은 불만을 갖고 있고, 그래서 이번 불교계의 총궐기에 적극적인 응원을 보내는 바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교계의 대응에 약간의 불만 또는 불만족을 느끼면서 몇 마디 적어보고자 한다.

 

지금 불교계의 외도(!!)가 얼마간 전국민적인 동의를 얻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건 딱히 불교계가 잘해서라기 보다는 MB가 너무 못해서이다. 얼마 전 화물연대 파업이 많은 지지를 받았던 것이 노동운동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MB의 고유가 정책에 모두들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대중적인 반이명박 정서. 현재의 대중 이데올로기는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거리로 뛰어나오는 모든 대중들의 행동을 승인하는 아주 보기드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나름대로의 호조건이 아니었다면, 불교계가 이 정도로 힘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따지고보면 불교계도 소망교회로 대표되는 기독교계 못지 않게 부패와 권력의 상징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MB가 워낙 기독교 라인으로 권력의 줄을 형성하다보니까 불교계가 위축되는 것처럼 보일 뿐... 웬만한 사람들은 예전에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문제로 전국의 승려들이 조계사에 모여 몽둥이 들고 싸움질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불교계의 '흠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불교가 그 동안 한국사회의 진보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고 말하는 것에 있어서는 누구나 주저할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욕을 먹고 있지만, 기독교는 그래도 그 내부의 건강한 분파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여했던 측면이 많다. 7,80년대 성행했던 노동야학 등은 대부분 '교회'에 기반을 둔 것이지 않는가? 천주교 또한 도시빈민 사목회 등을 통해 빈민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등 종교의 양심을 '실천'으로 보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그에 비하면 '실적'이 한없이 미미하다. 지율스님 단식 투쟁을 통해서 환경문제에 두각을 보였던 것 외에는 한국 사회의 진보적 역할에 있어서 불교의 이름을 찾는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랬던 불교가 아이러니하게도 반이명박 전선의 선두에 서 있는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주간지 기사를 보니 불교계의 투쟁을 80년대부터 불교계 내에서 민주화운동, 사회운동과 관계를 맺고 있던 단체들이 주도를 하여 조계종 총무원을 견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측면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지금 불교계를 둘러싼 정세의 핵심은 '불교 코포라티즘'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개별 노동조합의 존립을 지키고, 임금과 근로조건만을 가지고 정부, 기업을 압박하며 그 성과로 협상을 따내려고 하는 것처럼 현재 불교계의 행동도 현 정권의 종교차별을 막기 위한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에 방점이 찍혀 있다. 종교차별을 막는 것이 하찮은 일은 아닐테지만, 그간 정권과 밀월관계로부터 그닥 자유롭지 못했던 불교계가 정부와 법제화에 합의한 이후 투쟁을 소강시키는 시나리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이야 주요 요구안에 '어청수 퇴진'이 들어가 있어 냉각국면이 계속되고는 있지만, 이것이 '불교 코포라티즘'을 넘어서는 요구라고는 할수 없을 것이다. 사실 '어청수 퇴진' 요구의 주요한 이유는 경찰이 얼마전 조계종 총무원장의 차를 불심검문한 데에 대한 불만의 표출인 것이고, 여타의 사회운동과 촛불에 대한 탄압에 대한 분노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종교에 대한 차별에 분노하는, 그래서 사찰 밖의 차별과 폭력(예를 들면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와 같은)에 둔감한 분노와 저항이라면, 이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란 장담은 할 수 없다.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에 사람들이 보내는 따가운 시선이 불교계의 '대사찰 이기주의'로 향하지 말란 법도 없다.(들리는 얘기로는 불교계가 소유한 재산은 기독교 버금가는 수준이라더라. 얼마라고 계산도 불가능할 만큼...) 불교계가 정말 제대로 이명박 정권의 정책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사찰 지명 표기가 누락된 것에만 분노할 것이 아니라, 전국의 유구한 문화유산을 파괴하고 자연 환경을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하는 개발정책에 대해 종교적 양심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고, 소수의 탐욕을 위해 다수의 노동 대중을 희생케 하는 비정규직에 대해 분노하고 싸워야 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5년 전에 이라크에 한국 군대가 파병을 한다고 했을 때, 지금 시청 앞을 가득 메운 스님들은 다 어디에 계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언젠가 꼭 불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이 땅의 불교가 사회적 양심을 대변하는 종교가 되길 바란다. 그것만이 진정한 '성불'(成佛)의 길일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불자'(佛者)들이여! 불교 코포라티즘을 넘어, '성불'(成佛)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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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재 투쟁은 시효만료?

 

최근 정연주 KBS사장이 검찰조사를 받는 등 MB정권의 언론장악 기도가 한층 가속화 되는 상황에서 한동안 잊혀졌던 쟁점이 다시 부각되는 느낌이다. 아, 물론 정연주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촛불의 등장 그 자체가 우리(흔히 자칭 타칭으로 '좌파'라고 호명되던 사람들)에게 아픈 기억과 함께 그 '쟁점'을 다시 불러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독재냐 민주주의냐(반독재)'라는, 흔히 87년 항쟁의 부정적 성과물로 인식되던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쟁점은 이미 좌파들 내에서는 김대중-노무현 두 신자유주의 '개혁'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효만료되었다고 판정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독재정권 물러나라'라고 외쳤을때, 고등학교 정치과목 시간에나 대충듣고 말았던, 그래서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외쳤을 때... 아마 기존 운동판에 발을 담그고 있던 사람들 중에 그런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그래서였을까? 5월 말, 촛불 집회가 피크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시점에 참여연대 류의 논자들과 최장집 부류의 인간들이 '정당정치의 위기인가, 직접민주주의의 제도화인가' 따위의 논쟁을 하고 있을 때, '계급적 좌파'를 자임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엄청난 지지율의 이명박 대통령을 두번이나 사과하게 만들고, (집회 자체에서 전면적으로 한미FTA반대의 구호가 내세워지지는 않았지만) 한미FTA 비준 흐름에 브레이크를 거는, 당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정치적 성과를 내고 있던 시점에, 소위 '데모꾼'들은 손가락빨고 있었다고 해도, 우리 스스로 기분은 나쁘겠지만 사실관계상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민중언론 참세상에서는 그런 시기에 '대중은 진보적인가'와 같은 칼럼을 게재하면서, 글이 의도했던 안했건 간에, 현 정세속에서 촛불대중 진출의 의미를 폄하하는 엉뚱한 행동을 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상당한 시차가 있긴 했지만, 좌파가 촛불집회에 지속적으로 결합해 오면서 '민주주의'를 둘러싼 투쟁의 첨예한 공간에 적극적으로 결합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로 어제 배성인의 "촛불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칼럼에서 강조한 '프로젝트의 복원과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주장은 촛불투쟁 속에서 좌파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지적해 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그 며칠전에 올라온 유영주 기자의 기사, "KBS 구성원들 '독재-반독재'프레임 넘어설 수 있을까"는 솔직히 실망스러움을 다시 반복하게 만든다.


빵구라닷컴님이 말했던 것처럼 2004년 탄핵 때 만들어진 독재(=한나라당) vs 반독재(=민주당 또는 노무현)이라는 왜곡된 전선은 남한 사회운동에 있어서 성가신, 아주 성가신 걸림돌이 아닐 수 없다.(KBS, 공영방송, 민주주의) 그 당시 철이 덜 들었던 나는 광화문에서 '탄핵반대 민주수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향해 '홍위병'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좀 차분히 생각해 보자. 누구 말마따나 '모든 반역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이를 조반유리(造反有理)라고 불러왔다.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에서도, 2008년 쇠고기 수입반대, 공영방송 장악 반대 촛불도 다 이유가 있다. 이걸 배성인처럼 '진짜같은 가짜'라고 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부분을 비롯해서 배성인의 글은 그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이곳저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여진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말 중요하고 절대 패배해서는 안되는 싸움이라는 사실이 방송장악 반대 투쟁이 가짜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난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촛불과 함께하기 위해 내걸었던 “일터의 광우병, 비정규직을 철폐하자!”라는 구호에 동의한다. 그러나 참세상의 많은 기사들, 그리고 많은 좌파들이 이 구호를 가짜 아닌 진짜는 ‘반-이명박’ 투쟁으로 상징되는 ‘반독재’투쟁이 아니라, 비정규직 투쟁이라는 식으로 억지부리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투쟁의 경중을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 이명박에게 가장 사활적인 과제는 공기업민영화를 추진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조정해 줄 언론을 꽉 쥐어내서 전방위적인 사회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기륭전자 같은 비정규직 문제는 사실 이런 사안이 완성된 다음에는 정말 수두룩 뻑뻑하게 많이 나올 것이다. 지금 전자에 해당하는 투쟁을 이끌어가고 있는 주체들(언론노조, PD협회, 각종 시민단체와 촛불 시민들)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87년 식의 독재-반독재 프레임에 갇혀있다는 이유로 그 투쟁의 중요성을 부차화시키는 건 정말 아니라는 거다. (어떤 좌파단체에서는 방송장악 저지 투쟁이 소시민적 쁘티 부르주아적 투쟁이라고 까지 하더라.)


문제는 변화된 정세를 읽고 있지 못하는 우리가 아닐까? 지난 5년간 독재-반독재와 같은 투쟁 방식이 문제였던 것은 집권세력이 민주주의라는 담론을 신자유주의적으로 포섭하고 변용하면서 정치에 대한 대중적 환멸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이는 ‘민주주의’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던 좌파의 무능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의 등장과 함께 정당 정치 - 대의민주주의 일반이 위기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대중들은 어떤 식으로든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예전에 모 좌파 단체에서 냈던 성명서 제목이 생각난다. “대한민국은 과연 민주공화국인가?” 아니면 대체 어쩌자는 건데?)을 넘어서려는 노력을 보인 적이 있는가?


이명박 정권은 분명 독재정권이다. 물론 박정희-전두환과 똑같이 유비시키면서 ‘군사독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잠정적으로 ‘자본독재’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는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적 담론을 둘러싼 투쟁을 87년, 04년의 흉부를 드러내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것으로 받아 안을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래서 문제는 ‘독재-반독재’ 프레임을 벗어나는게 아니라, 강화하는 것이다. 반독재, 민주주의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이를 대중의 직접 민주주의 프로젝트로 확장해 나가는 것.



(아, 너무 중언부언 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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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 선거 패배, 그러나 다시 시작이다!

다들 곧 디스토피아가 몰려 올 것처럼 난리들이다. 그렇다. 분명 암흑과 같은 공포가 밀려올 것이다. 미친교육은 한층 더 힘을 받을 것이고, 강남 학부모들의 입김은 더 세질 것이다. 다들 절망에 빠져 있다. 이 대통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교육감 선거를 계기로 공기업 개혁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한다. (대체 교육하고 공기업 개혁하고 무슨 상관이길래? 초중고등학교가 기업이냐?) 갑제형이 기뻐 날 뛸 상황은 너무 보기 싫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우울해 하기만 하는 것이 능사인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지만 패배의 원인, 그리고 그 패배 속에서 우리가 얻은 성과와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정확히 따져보자.

 

여러가지 분석이 난무하고 있지만, 내가 볼 때 공정택 승리의 핵심 포인트는 (당연한 얘기이지만) 반전교조 기치하에 보수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분석과는 다르게 보수세력의 결집이라는 것은 이 반전교조 기치가 노린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목표는 다른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바로 '탈동원화 전략'인 것이다.

사실 선거 초반에는 (물론 교육감 선거에 대한 시민들의 인지도는 매우 떨어졌지만) 나름의 분명한 정치/정책적 쟁점을 가지고 대중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주 후보와 촛불운동이 노렸던 것과 같이 '이명박 정권의 미친교육 심판'이라는 구호로 집약되었다. 대중적으로 만연한 반이명박 정서를 구체적인 정치일정에 녹여내고 스스로 조직화하기 위한 실천들이 이어졌다. 바로 이 때까지, 정확히 얘기하면 KBS와 MBC토론회가 있기 전까지는 이 구도가 먹혔던 것 같다. 이는 실제 여론조사에서 주후보의 지지도가 더 높게, 그것도 적극 투표의사가 있는 층에서는 더 큰 폭으로 높게 나온 것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KBS, MBC 합동 토론회에서 공정택을 위시한 모든 후보가 '주경복=전교조 후보'라는 마녀사냥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매니페스토니 뭐니 하는 것들은 끝난 거다. 반이명박 프레임을 반전교조 프레임으로 돌려놓기 위한 보수세력의 필살의 무기. 사실 보수 후보 단일화도 쫑난 듯한 마당에 이런 전통의 무기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거둔 대중적 효과는 무엇이엇을까? 나는 다음의 글이 지금의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2004년 총선에서 부시의 공화당이 보여준 격렬한 선거기법은 ‘탈동원화와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전통적인 선거 전략은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후보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온건하게 제시해서 부동층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러한 외부적 확대보다는 내부적 자기강화를 선택했다. 대다수의 대중이 특정 정당에 대한 안정적 지지층이 아닌 것이 현실인 마당에야 공화당을 지지할 가망성이 높은 특정집단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는 더욱 명료한, 즉 극단적인 정치메시지를 전달하고(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등등), 나머지 집단에서 대해서는 탈동원화 전략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비방광고(네거티브 캠페인)나 추문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혐오를 확산시켜서 유권자의 선거 참여를 일반적으로 억제하거나, 상대방 후보를 선호할 것 같은 집단의 투표 참여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 사회화와 노동 387호, "인민주의 정치의 휘발성과 뉴타운의 폭발력"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선거운동 기간 동안 공정택은 자기가 잘났다는 얘기를 하나도 한 게 없다. 솔직히 할게 없기도 하다. 그나마 자랑한 '교육노벨상'에 해당한다는 상훈도 UN등록단체가 준 것을 산하단체가 줬다고 허위 기제했고, 지난 그가 재임했던 3년간 서울시 교육청의 청렴도는 전국 꼴찌였다. 그가 공약으로 내건 우열반, 0교시, 야간 자율학습은 촛불 운동을 통해서 이미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상태다. 결국 남는 것은 비방전 뿐이다. 시쳇말로 선거를 과열, 혼탁 양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색깔론은 여기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렇게 되면 교육정책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명박 교육정책은 안되겠다 싶어 투표하려던 사람도 이런 더러운 선거판에 발 담그고 싶지 않아서 투표를 포기하는 것이다.

 

투표가 있기 며칠전에 한국일보에서는 "투표율 25%면 보수, 15% 이하면 진보 유리"라는 기사를 냈다. 교육감 선거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상황에서 촛불민심이 그나마 지지기반이 탄탄하기 때문에 투표율이 낮을 수록 진보진영이 유리하지만, 투표율이 높다는 것은 보수세력의 위기감이 작동한 결과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보수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런 예측은 투표 결과가 말해주고 있기도 하지만, 완전히 빗나갔다. 투표율이 15%대 밖에 되지 않는데도 강남, 서초를 중심으로한 보수표는 결집세를 보였다. 반면 촛불 민심은? 촛불 민심도 나름 결집했다. 그러나 그것은 강남벨트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촛불 운동의 자발성의 공백을 발견하게 된다. 촛불민심이라는 것은 사실 '산수'가 안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해 표계산을 할 수 없다. 무정형적이고, 강제성이 없고(이는 다시 말하면 조직적이지 않다는 말과 같다) 그저 선거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고라에 '[경복궁]' 머릿말 달아서 글 올리는 것 정도가 최대치다. 반면 보수세력은? 이번 선거에서 말하는 보수세력이라 함은 '재향군인회'로 표상되는 전통적인 수구세력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과 학원가를 쥐고 흔드는 강남 학부모와 그들을 선망하는 일부 강북 학부모들이다. 이들에게 '반전교조' 프레임은 전교조의 평등교육이 우리 애들이 남들보다 좋은 대학 가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식으로 이해되게 만들었고, 이런 이데올로기는 학급 운영위를 통해, 과외정보를 공유하는 부모들의 연락망을 통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교회'를 통해 전파되어 갔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처음 실시된 거소투표인지 뭔지 때문에 교회에서도 투표할 수 있었다는 점은 아마 공정택 승리의 견인차 중에 하나로 꼽힐 것이다.)

 

결국 7월로 넘어오면서 촛불과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촛불의 조직화'의 문제가 다시 확인되는 셈이다. 보수세력들은 '반전교조' 프레임 하나로 결집할 수 있었던 반면, 진보세력들은 상대적으로 반이명박 정서를 교육감 선거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강남 학부모를 앞장세운' 보수세력들은 그 내부적으로는 상대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경쟁관계에 있지만,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를 표출해야 하는 선거라는 국면에서는 부동산 가격과 일류 대학이라는 공통된 목표 아래 강고하게 연대한다. 그렇다면 촛불은? 쇠고기 재협상을 넘어 촛불이 정치화될 가능성, 연대의 새로운 매개지점은 어디인가? 많은 이들이 노력했지만, 아쉽게도 이번 교육감 선거가 '보수-학부모 연대'를 깰 수 있을 정도의 매개고리로 작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가 시급히 촛불민심을 담아낼 연대의 새로운 형식들 - 계급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한 - 을 창출해 내지 않으면, 이후 또 다시 '반전교조' 프레임 같은 서민층 떨궈내기 전략에 다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38.3%라는 지지도는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고 생각하며 이는 앞으로 촛불운동이 일보 전진해 나갈 소중한 자산이다. 패배는 인정해야 겠지만, 잃은 만큼 얻은 것도 많다. 하지만 승리에 대한 미련과 왜 더 잘하지 못했나 하는 원망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선거 종반에 치달으면서 주 후보 측이 공 후보의 네거티브전에 말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주 후보는 '이명박의 미친교육 심판'이라는 전략을 초심을 잃지않고 꿋꿋하게 밀어붙이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공정택을 리틀 이명박으로 규정하고 정책적인 대비를 확실히 하는 게 필요했다. 특목고/자사고 반대, 평등교육, 인성교육과 그에 반대되는 이명박의 교육정책.... 그런데 초반에 "부모님의 걱정을 주경복이 덜어들이겠습니다." 같은 뜨뜸미지근한 구호가 달린 선거 플랑이라던지, 후반에 흑색선전 맞공세라던지... 결국 공정택의 탈동원화 전략에 말린 셈이다.

그러다보니 후반에 가서는 약간 수세적인 자세도 드러났다. '교원평가 반대'를 비판하는 타 후보에 대해 '난 교원평가 반대한 적 없다'는 당췌 뒷 감당 안되는 소리를 한 것은 나 같은 지지자들도 당혹케 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간에 2주 동안 수고하신 주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리 손으로 이명박 정권의 교육 반역자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주 후보가 공정택과 박빙의 접전을 벌이면서 공정택 교육감의 성격 규정을 명확히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그를 '강남 교육감'으로 부르자. 그리고 17개 구에서의 1위를 통해 보여진 '경쟁교육이 아닌 평등교육'에 대한 열망을 새로운 정치의 공간에서 조직해 나가자.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하재근씨의 말처럼 교육감 선거가 '노명박의 독사과'이고, 신자유주의 교육 분권화의 산물이긴 하지만(레디앙 기고글 클릭!), 이번 교육감 선거를 통해 이명박 경쟁교육에 맞서는 평등교육이라는 대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은 분명한 결실이다. 그런 구도 속에서 당선된 공 교육감은 앞으로 1년 8개월이 매우 고달플 것이다. 멈추면 안된다. 공정택을 괴롭혀야 할 시간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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