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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기도하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강력한 종교지배하의 사회였으니까, 유대인은 모두 기도를 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해서도 상당히 시끄럽게 논의된 사회였다. 저녁기도를 서서하느냐, 누워서 하느냐는 것으로 신학적 측면에서 대논쟁이 있었고, 그것으로 율법학자의 분파가 식별될 수 있었던 사회에서의 이야기다. 매일 아침에도 기도하고 저녁에도 기도한다. 이 것은 구약서의 긴 인용구(引用句)를 연결시킨 것이 중심이며, 기도라기보다는 송경(誦經)의 일종이었다. 토요일의 안식일에는 회당에 모여서 예배를 보고 유대교의 율법에 대한 교육도 받는데, 예배의 도중에도 곧잘 기도를 드리곤 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도가 정해지고 있었다.

예수가 그와 같은 활동을 하게 되면서, 당연한 일이지만, 유대교의 신성불가침의 전제까지도 비판의 도마 위에 얹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태도였으니까 사람들로부터 많은 질문이 있었을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너는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하느냐고 예수를 비판하는 종교세력측에서도 이러한 질문은 나왔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라고 자칭 혹은 타칭하는 자들로부터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나왔을 것이다. 전자의 질문은 사회질서를 비판대에 올리는 자에 대해, 그렇다면 너는 어떠한 질서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고, 후자의 질문은 사회질서를 비판대에 올리는 자에게 얼마간 찬동은 해봤지만 역시 불안하니까 우리에게도 몸을 붙일 수 있는 질서를 부여해주십시오라고 하는 물음이다. 본질적으로 양자는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전자는 후자의 위에 서서 자기를 지탱하고, 후자는 전자를 보완한다. 또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예수쪽에서도 능동적으로 많은 기회에 「기도」라는 형식으로 설정된 유대교 지배의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짓궂은 비판을 퍼붓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냐고 하는 물음이 집요하게 달라붙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여러 가지 기회에 「기도」에 관해서 여러 가지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복음서의 전승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예수의 발언들 중에서 같은 종류의 것은 통합정리하여 하나의 짧은 말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한 장면에서 얘기 된 것처럼 해서 결국 아주 짧은 단편전승으로 정리되어 전해진 것이다. 물론 전승을 정리하고 정비한 것은 그리스도교도들이니까 자연히 거기에는 여러 가지 호교론(護敎論)적인 의도나, 교조적인 선전이 가미되어 갔다. 그리고 각 복음서의 저자가 그것을 쓸 적에 자기의 사상적인 시점(視點)에서 내용을 첨삭했다. 대체로 하나로 통합정리하고, 짧게 정비한다는 일 자체가 이미 극도의 추상화작업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의 가지가지의 장면을 짧게 몇 줄의 글로 정리해서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쪽을 말하더라도 같은 취지의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했을 것이니까, 그것이 하나로 통합 정리되어도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와 같은 활동을 하고 있으면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질 것이니까, 이쪽에서도 같은 말을 싫증이 날 정도로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하나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공통성은 의외로 강도가 강한 법이다. 소관료적인 권력의 꼬리는 어디서 만나도 같은 꼴로, 같은 말을, 같은 억양으로 지껄인다. 잘 길들여진 민중도 역시 어디서나 같은 말을 하게끔 되어 있다. 고대사회라고 하지만, 1세기의 팔레스티나는 이미 각각의 크고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밀접하게 유대교회당과 연결되어 거기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주입작업이 국민교육식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예수도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들에게 예수가 「기도」에 관해서 발언한 것이 몇 가지 전해지고 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마르코 1:38~40).


종교가가 고생하면서 사는 과부들을 등쳐먹고, 대학교수가 광장에서 인사받는 것을 좋아하는 일은 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변하지 않는 세태 중의 하나이지만 여기서 과부를 등쳐먹는다는 것은 좀 악랄한 짓이다. 유대교의 율법학자란 종교가로서 구약성서의 모세의 율법을 민중에게 가르치고, 그 까다로운 해석의 체계를 학파적으로 전승하는 일을 한다. 율법은-「율법(律法)」이라고 번역한 것이 애당초 잘못된 일이고, 정확한 의미로는 법률(法律)이지만-종교적인 규정인 동시에 사회윤리적으로도 민중의 생활을 규정한다. 「율법」에 쓰여진 「정의」가 민사적․형사적으로 재판을 시행하는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율법학자는 동시에 민중의 재판관을 겸한다. 과부의 약점을 악용하여 강탈하는 자는 세상에 많다. 그래서 과부는 재판관에게 제소한다. 재판관에게 공평한 재판을 요구한다. 그러나 실태는 어떤가.

이런 이야기를 예수가 한 적이 있다.


어떤 도시에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재판관이 있었다. 그 도시에는 어떤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늘 그를 찾아가서 “저에게 억울한 일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요”하고 졸라댔다. 오랫동안 그 여자의 청을 들어주지 않던 재판관도 결국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과부가 너무도 성가시게구니 그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꾸만 찾아와서 못 견디게 굴 것이 아닌가”(루가 18:1~8)


이것을 전한 루가복음서의 저자는 어처구니없게도 이 이야기를 「하느님에 대하여 밤낮으로 계속해서 기도드려야 함」을 가르친 설교로 해석해 버렸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 읽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사회관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서, 재판관이 어리석어도 그런 자만이 있을 때는 달리 도리가 없으니까 이 쪽에서 악착같이 주장을 펴 나가야 한다는, 민중의 생활의 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생활의 지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차근차근 설교하는 것과 권력에 매달려 있는 인간을 비웃으면서 얘기하는 것과는 방향이 다르다. 배가 튀어나온 사나이가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로소이다”라고 무대에서 자기소개를 한다면 시골 연극의 촌극으로서는 박수를 받고 웃음이 터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생활에서는 율법학자의 대부분이 재판을 유리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과부로부터 사례금을 약탈하여 꽤 수입을 올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예수는 한편에서는 꼬집어서 웃어넘기면서도, 때로는 날카롭게 비난한 것이다. 저 자들은 과부들을 등쳐먹고 있다고.

그러한 인간들이 올리는 기도는 대체 어떤 것일까. 무턱대고 길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떠들어댄다. 송경(誦經)의 대사를 쓴 양피지인가 뭔가를 넣은 상자를 팔이나 어깨의 끈으로 동여매고 기도를 드리는데, 보란 듯이 그 끈은 넓고 화려한 것으로 한다. 남에게 보이고 싶어서 못 견딜 지경이라. 회당에 사람들이 모이면 기도를 하고 싶어 하고, 기도의 시간이 되면 밖으로 나가, 마침 광장을 지나가게 되면, 기도시간이 되었습니다라고 외기라도 하는 듯이 우뚝 서서 큰소리로 기도를 시작한다. 그렇게도 기도가 하고 싶으면 골방에라도 들어가서 조용히 하면 될 것 아닌가. 기도란 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인데 남에게 보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대체로 당신들의 기도는 너무 길어요……(마태오 23:5이하, 6:5이하를 요약)

이런 말을 항상 하고 있으면,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기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는다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에 예수가 문득 생각한 것이 카디쉬(성스럽도다)의 기도다. 이것은 짧게 정리된 기도문, 기도문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문귀로서, 여러 가지 긴 기도나 송경의 도중에 약간 숨을 돌리기 위해 읊기도 하고 긴 기도나 송경의 마지막에 끝맺음으로서 읊기도 한다. 현대에서도 아직 유대교회당에서 쓰여지고 있지만, 그 기초적인 원형은 예수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이라면 짧아 좋다고 예수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 뜻대로 창조된 세계에서 거룩한 이름이 높여지옵시고, 신성해지옵소서. 그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생애와 너희들의 시대에, 또 모든 이스라엘의 집들에 생명이 있는 동안에 한시라도 빨리 실현되게 하옵소서. (여기에 대해 사람들은) 아멘(이라고 제창한다)


이야기가 약간 옆길로 새는 기분이지만 「아멘」이라는 말이 나온김에 거기에 대해 설명을 한 마디 해야겠다. 이 말은 원래 히브리어로서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종교의례적인 찬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미 구약성서에는 옛날부터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이 유대교회당에서 하느님 예배에 쓰이게 되면서 종교가의 말에 대해 회중이 화창(和唱)할 때나 누군가가 대표로 기도했을 때 그에 찬동한다는 뜻으로 소리를 모아 「아멘」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교는 이 말을 그대로 이어받아, 2000년이 지난 동양의 교도들도 아멘, 아멘하고 있지만, 예수라는 사나이는 이런 때에도 엉뚱한 데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로 아멘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예배같은 데서 다른 사람 말에 찬동하는 뜻으로 마지막에 화창하는 것인데, 예수는 이 통상적인 용례에 구애받지 않았다. 통상 이야기할 때에 자기 말에 대해 자기가 아멘이라고 하기도 하고, 보통 때는 발언의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하여 확인하는 것인데, 그는 말을 시작할 때에 자기말의 첫머리에서 아멘이라고 선언해 버린다. 유대교 랍비의 어록중에는 자기의 말에 자기가 스스로 아멘이라고 덧붙이는 것은 교양이 없는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의 경우에는 교양이 없어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해버린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아멘의 용법을 거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토론을 하고 있을 때 예수는 상대방에게 “아멘,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명백히 알린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상대로 좀 긴 연설을 할 때는 도중에서 한숨 돌리면서, “아멘, 나는 명백히 말한다”라고 자신감을 나타내 결정적인 말을 내뱉는다. 그것뿐인가. 불쑥 사람을 붙들고 “아멘, 당신에게 말한다”라고 말을 꺼내기도 한다.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 온 거대한 종교적 권위 앞에서 얌전히, 살짝, 뒤에서 소리를 모아 아멘하고 찬동하는, 그러한 언행에 예수는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이 얼마든지 있었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사회체제 속에서 살고 있으면 절규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혹은 삶의 충실함에서 힘이 넘쳐나올 때 그것이 소리가 되어 튀어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럴 때에 어째서 권위에 뒷받침된 발언에 대해서만 조용히 소리를 모아 「아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말이다. 그렇지는 않다. 나는 말하겠다. 아멘, 단호히 말하겠다.

그런데도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시작하여 2천년간 이어져온 그리스도교는 구약․유대교의 종교의례의 아멘은 충실히 지켜 내려오면서, 예수의 외침, 숨이 막히는 권위에 역습해서 들이대는 그러한 태도는 계승하지 않았다.

카디쉬의 기도이야기로 돌아가자. 이것은 그 사람들의 기도로서는 짧고 선명하다. 그런데도 얼마나 신중하고 신학적인 배려가 되어 있는 것일까.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하느님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절대적 초월자(超越者)인 하느님에 대해서 입만 벌리면 우리에게 설교한다. 그런데도 모세의 10계명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는 말을 형식적으로는 엄격하게 준수해서 절대로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들먹이지 않고 우회적인 표현을 한다. 좀더 분명하게 부르면 좋지 않는가. 유대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라고 하게 되어 있다. 아버지라면 좀 더 또렷하게 「아버지」(아빠)라고 부르면 어떤가.

성스러운 히브리어가 아니고 아랍어의, 그것도 속어로 「아버지」라니 이게 웬 일인가.

그렇지만 당신들은 집에서 부친을 뭐라고 부르는지.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의 말을 정직하게 써야할 일이다. 게다가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하면, 당황하여 「거룩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높여지옵시고, 신성해지옵시고」라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않아도 어느 쪽이든 한 쪽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그 「이름」이 높여지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세상」이라고 하면 반드시 머리말로서 「그 뜻대로 창조하신」이라고 덧붙여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인가. 그러니까 카디쉬의 기도도 오히려 너무 긴 것이다.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만으로 좋지 않을까.

다음 구절도 너무 길다. 하느님 나라가 참으로 오면 좋겠다고 한다면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또렷하게 표현하면 되는 것이지, 이런데서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들고 나올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민족적 생명이 있는 동안에 하느님이여, 당신의 불가사의한 질서 속에서 이스라엘 민존을 세계의 으뜸가는 자로 하여 나라를 세우시옵소서 어쩌고 해서는 민족주의의 노골적인 소망을 말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거기에다 종교가들은 마치 하느님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한 기도속에서도 우리들에 대해 “너희들, 너희들”하고 책망한다. 우리들이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것이라면 명백하게 「우리들」이라고 하면 될터인데 말이다.

이렇게 하여 예수는, “당신은 율법학자의 기도가 길다고 항상 불평을 하는데 당신 같으면 어떻게 기도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예를 들면 카디쉬만 해도 나 같으면 이렇게 줄이겠소”라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옵소서」라는 두 구절로 끝내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놓고서 조금 있다가 살짝 한 마디 한 것일까, 카디쉬에는 없는 구절이 하나 보태졌다.

  “한 마디만 더 첨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들이 매일 필요로 하는 빵을 주십사고.”

듣고 있던 자들은 아연했으리라.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속어까지 섞어가면서 줄일대로 줄여놓고, 거기다가 「오늘 먹을 빵을 주십사」 따위를 덧붙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무엇에 대해 기도한다는 그 자체보다 당시의 민중에게 있어서는, 로마제국의 간접지배, 헤로데 왕가의 지배, 종교적 귀족층의 수탈과 이중 삼중의 수탈에 허덕이는 민중에게 있어서는, 무사히 그날 그날의 빵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보다 절실했을 것이다. 예수가 빵이 있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진 않았음은 분명하리라. 그러나 빵이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과, 그날 먹을 빵이 틀림없이 매일 매일 있으면 좋겠다는 것 사이에는 무한대의 거리가 놓여져 있다.

「기도」에 관한 이와 같은 예수의 발언이 원시 그리스도교 가운데서 다시 한 번 정비되어,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꾸며졌을 때(마태오 6:9이하, 루가11:1이하), 말씨는 거의 같아도 방향이 달라짐으로써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린다. 예수의 경우 「기도」라는 명칭아래 설정되는 유대교 전체의 양상에 대해, 또 거기에서 행해지는 실제의 기도에 대해 비꼬아서, 그리고 비판적으로 말을 내던지고 있다. 그것은 짓궂은 비판이면서 동시에 생활하는 자의 절규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어쨌든 결코 모범적인 기도의 형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디쉬라는 하나의 모범적인 기도의 형에 대결하는 자세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원시 그리스도교는, 거기에서 대결의 요소를 지워버리고 다시 하나의 모범적인 기도로 꾸며버렸다. 예수가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라고 바꾸어 말했을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꾸어 말한 것」이었을 뿐 머릿속에는 카디쉬의 대사가 가득했음이 틀림없다. 그것을 원시 그리스도교가 영원불변의 진리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이자마자 역사적인 장(場)에서의 생생한 돌진은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거기에서 역류(逆流)가 생기는 것은 쉬운 일이다. 루가의 경우는 아직 예수의 발언을 말로써는 거의 그대로 전하고 있지만, 마태오에 이르러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뒤에 그래서는 너무 짧아서 불만이었던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첨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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