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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너무 놀았던것같네요.

이번 챕터도 나눠서 올립니다.  너무 길어서 몇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사랑의 설교자가 아니다


「기도」에 관한 예수의 발언중의 하나를 이야기한 것은, 그것이 예수라는 사나이가 유대교에 대하여 어떠한 반항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준 하나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예수는 카디쉬를 공격대상에 올렸다. 그러한 방식으로 예수는 유대교의 기본적인 교조(敎條)의 하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유대교의 다른 기본적인 교조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비판을 퍼부었다. 쉐마앙고백에 대해서도, 모세의 십계에 대해서도 그랬던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인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내 몸같이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이 말은 예수가 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말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이 말이야 말로 예수의 가르침의 근본이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예수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논적(論敵)의 한 사람인 율법학자가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라는 사나이는, 이러한 종교적인 교조를 화려하게 입에 올리고 그것으로 다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단순한 사나이가 아니다. 본시 예수는 현대의 휴머니즘을 좋아하는 그리스도교도와 같이 무턱대고 사랑, 사랑하면서 그것을 내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예수의 언동의 본질을 잘 추상하여 포착해 보면 사랑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지만, 예수 자신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알아 두는 게 좋겠다. 중학이나 고교의 시험에서 예수의 종교는 곧 사랑의 가르침이라고 연결하면 ○를 준다는 따위의 일은 이제는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본시 「예수의 종교」 따위는 없으며, 예수는 종교지배의 사회에 대해 반항한 사나이였다.

복음서에서 「사랑」 또는 「사랑한다」는 단어가 나오는 경우에 「귀여워한다」든가 「좋아한다」든가 하는 가벼운 뜻으로 사용된 두세 가지의 경우는 별도로 하고, 말하자면 방금의 예와, 그의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구절의 전후부분만이 예수의 발언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태오나 루가가 그 자료에다 덧붙여 쓴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종교라는 교의적(敎義的) 측면에서 예수의 말들이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이와 같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두 군데만 하더라도 둘 다 당시의 유대교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논평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 한 사람의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마르코 12:28, 루가 10:25)

하나의 가치의 체계가 만들어졌을 때, 그 합리성의 기준을 지탱하는 기초적인 척도를 사람들은 반드시 구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모든 합리주의에 자연적으로 따라다니는 발상이다. 그리하여 고대사회에 있어서 합리주의의 전형의 하나인 유대교 법체계에 봉사하는 율법학자 사이에서는 율법의 계율 중에서 가치수준을 정리하여 「큰 계율」과 「작은 계율」로 분류한다는 것은 이미 상식화되어 있었다. 어느 것을 어떻게 세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의 유대교회당에서는 율법전체에는 613개의 계율이 있다는 식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율인가 하는 물음은 그들 사이에서는 종종 논의의 소재가 되기도 했고, 그리고 결론도 어느 정도까지 공통적으로 되어 있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예수보다 2, 30년 전의 랍비에 관해서 전해지고 있다.

어느 이방인이 랍비 ․ 샴마이에게 와서 자기가 한쪽다리로 서 있을 동안에 율법전체를 얘기해준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샴마이는 몽둥이로 이자를 쫓아버렸다. 그래서 그는, 샴마이와 대립하는 또 한 사람의 랍비 ․ 히렐에게 가서 똑같이 물었다. 히렐은 대답했다.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이웃에 대해서도 안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율법의 전부이며, 다른 것은 모두가 그 해석에 불과하다. 가서 이것을 배워라”라고.

또 기원 후 2세기 초의 제 2차 유대독립전쟁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랍비 ․ 아키바도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자기 몸처럼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야 말로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포괄적인 기본계율이다”

이와 같은 것이 말하자면 상식화되어 있는 세계에서 율법학자 한 사람으로부터 가장 중요한 계율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예수가 아니더라도 그런 것은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때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질문했을 때에는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계율인지 너 나름대로의 견식을 가지고 있겠지하는, 아니꼬운 생각이 이면에 감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루가 복음서의 저자는 율법학자가 「예수를 시험하여 말했다」고 되어있지만, 그 말이 맞지는 않더라도 동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질문에 방심하고 대답하게 되면, 개개의 율법조문에 대해서 아무리 비판해 보아도 유대교 법체계의 기초구조는 승인하고, 그 전제 위에서 사물을 생각하는 꼴이 되고 만다. 예수가 비판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기초구조인 것이다.

그런 것은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듣고 율법학자는 옳다구나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자기가 선생에게서 배운 것을 늘어놓는다.


「그것은 물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앞에 말한 히렐이나 아키바의 발상과 닮은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나란히 되어있는 점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히렐이나 아키바의 경우, 물론 그들도 당연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강조하나, 이와 같이 이웃에의 사랑과 동시에 가지런히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예를 들면, 예수당시의 유대교문학 중에서도 상당히 독특한 색채가 있는 「12족장의 유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잇사칼의 유언」이라는 장에서 “아들들아,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주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식으로 율법을 중심으로 하여 이 두 가지를 나란히 하고 있고, 또 “나는 마음을 다하여 주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왔다. 아들들아, 너희도 그와 같이 하라”라든가, 「단의 유언」에는 “생명을 다하여 주를 사랑하고, 또 성심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뒤에 기술하겠지만, 원시 그리스도교단 중에는 율법학자와 같은 수련을 겪은 자도 상당히 존재하고 있었고, 이런 자들이 교단의 이론가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사상적 계보의 하나로서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 「12족장의 유언」이다. 여기서도 예수와 상관없이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로 계승되어 가는 요소의 하나가 있다. 이런 종류의 말투가 종교적 상식으로서 퍼져 있는 세계에 비판적인 쐐기를 박아간 예수인데도 그리스도교는 이와 같은 말을 자기들의 간판으로 채용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율법학자가 예수에게 답하면서 자기들의 유대교 신앙의 상식을 표현한데 불과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전승되는 동안에 어느새 질문한 자와 답한 자의 관계가 바뀌어버렸다. 즉, 율법학자에게 무엇이 중요한 계율인가라고 물은 예수가 자진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한 것이 되어버렸다.(마르코 12:28 이하, 마태오도 같다. 이 점에서는 루가가 원래의 문답을 잘 전하고 있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토양을 떠나서 세계 종교로서의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면서부터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의 사랑이야 말로 예수의 독특한 주장이고,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근본정신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사랑을 말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물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정신을 남에게서 배웠다면, 너무 자랑스럽게 이것이 우리의 독자적인 본질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렇게 말한다면 유대교도가 의외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들이 오랫동안 걸려 공통의 인식으로 만들어 낸 자세를 그리스도교도가 차용해 갔을 뿐 아니라, 마치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교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선전하니, 이렇게 되면 불평 한 두 마디는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예수는 어떠했는가. “당신이 그런 것쯤은 알지 않소”라는 말을 듣고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을 늘어놓은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좋지요. 당신같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구태여 나에게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실천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한 예수는 복잡한 웃음을 뱃속에 감추고 있었을 것이다. 대개 체제내적인 규범의 원칙은 그것을 진심으로 실행할 수 없을 때에만 무난한 간판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된다. 어떠한 대학에도 「영원한 진리를 탐구하며」 따위의 상투문구를 장식해 놓고 있는 것이며, 경찰은, 시민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고 법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좋지 않은가. 진심으로 실천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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