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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는 두번 꽃이 핀다고 합니다.
한번은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꽃이되며
또 한번은 그 삶의 바탕에서 솜꽃을 피워 낸다고 합니다."
문제는...
난 여지껏 내 자신을 위해
아름다운 꽃이 되어보지 못햇다는것...이다!
지금 난 내자신의 아름다운 꽃을 원하는건가?
아니면 삶의 바탕위의 솜꽃이 되고자 하는건가?
30대라는 애매한 나이에 있다.
나는 어느쪽이란 말인가?
사실 난 첫번째의 자신의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지 못했다는
좌절감,상실감,억울함,자기연민에 빠져있었다.
난...너무 억울했고
슬펐고,
인간 본성적 욕구에
괴로와했다.
그 괴로움은...
죽음으로 치달을 정도로 큰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외국이라는 외적 공간의 무미건조함과 사화적 단절감으로
나의 20대 전반부가 흘러갔고
시한폭탄과같이 폭력적이었던 나의 출산과정과
몸부림치며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이제 벌써 30대 중반을 바라보고있다.
남들은 가장 에너지를 맘껏 발산하며
젊음을 만끼할 시기에...
난 홀로 그러고 산거다.
참내~!
이런 운명도...있더군!
(암만해도 연애도 변변히 못해본 채
20대를 지나온건 아쉽기는하다.^^)
3년전 서울에 돌아왔을때...
난 서울의 여자들이 너무 예뻤다.
너무 예뻐서 번화한 거리를 거닐때면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길을 주고 또 주었던 기억이난다.
여자들 쳐다보다가 앞사람과 부딪친적도 몇번 있었지.
아직도 그 버릇이 있지만...^^
난 왜 그렇게 쳐다봤을까?
낯설음?동경?부러움?혹은 대리만족???
나는 어느쪽을 원하는걸까?
첫번째의 꽃인가 아님
두번째의 꽃이란 말인가?
........
그냥 있는 그대로 살자.
구지 사랑이나 연애는...
실은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그냥 소소한 행복을 쫓으며 사는거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에효~그게 힘든거지만!
버리고 또 버리다보면...
알게되것지.
각자 자신의...꽃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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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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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날라다닐 때시니까 여러쪽을 다 되어보실 수도 있으시겠삼... 환갑도 칠갑진갑도 걱정 없으시겠구만 뭐...부가 정보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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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표현 한다는 것 그 수단에 기교를 느낄때 소통의 진실은 무뎌질 것이라고 봅니다.그런데 나는 진아씨의 경우 진실의 느낌의 동기가 "모든"보다는 "개인과 특징"에서 어떤 인간적인 아름다움이 理性과 異姓으로써 다시 "모든"으로써 그것이 소통의 관계로 주어질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겠지요
내가 느낀 진아씨 글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지난 과정의 내면을 드러낼때 전혀 주위로 부터 의식됨 없는 표현이라고 봅니다.그것이 자신의 조건에서 모든 여성이 아니라 진아씨 개인의 경험적 세계이며 그 시간들의 고뇌와 욕망이 어떻게 표현 되느냐에 따라서 공감하게 되는데 표현력엔 전혀
삶의 방향을 위한 두서 없는 글
기교가 없다는 것이 관심이 가는 것이고 앞전에 말했지만 진보적이라 하면 가장 인간적인 그리움의 원이다 라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그리움의 원이라는 것은 "욕심내지 마라" "소박하게 살아라"이것이 사실은 가장 아름다운 말이며 힘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인생은 고통과 절재가 자신을 위축한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자신의 자연스러운 일상적 행위가 드러남에 있어서 그것이 거름이 되어 표현력 자체가 꾸밈이 없단는 것입니다.
결국 자아중심의 인생은 타인을 위한 함께의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그리움으로써 마치 불교적 윤회처럼 뭐라할까요 생태적 하나의 원이 되겠지요
그래서 저는 내면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말과 글의 문장의 과정에서 그것이 위축되거나 표현되는 과정을 의식하며 본심의 표현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 입니다.
이것이 어제,"참 아름답다"는 미적 가치관인데 사실은 이렇게 표현하고는 다른 일체의 부연을 자제해 버렸습니다.
아무리 표현력이 진실을 말할수 있다해도 그 사진에서 주는 느끼는 의미는 그냥 어느화가의 '바보산수화'를 보고 오히려 어떤 표현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름다움은 내면의 투쟁의 결과이지만 나는 그 솔직한 표현력에 오히려 열등감을 느낍니다.때문에 그것과 충돌하며 소통의 관계를 공감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그러하겠지요
당신을 만난 것이 개인간의 충돌이면서 또한 규정에 대한 비정규정으로써 자신만의 어떤 울타리에 대하여 결국 그 울타리는 물리적일수도 없고 어떤 경계도 없다는 진실에 대하여 소통은 자유로우며 관계또한 어떤 바리케이트도 존재할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만.... (진보는 만용이 아니라 용기이며 앞으로 전진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갈때 진실은 소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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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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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생물학자의 편지(생명의 편지 중에서...)"편지중에서.......
목사님,
우리는 만난적이 없지만....
나는 목사님을 벗이라고 부릅니다(겠습니다)
목사님은 천국이 있지만 저는 죽음 이후 생에 대한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의 윤리]는 목사님은 창세기 이지만 저는 오늘이며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보완했음)
목사님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이 나에게는 마침 밝혀진 우주의 영광 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려고 빛을 만들었다고 믿지만 나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려고 불을 훔쳤다고 믿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진리를 발견했지만 저는 여전히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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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한때'가 아니라 또한 종교적 절대적 규정의 사랑의 조건은 없는것 같다.생물학자가 인간의 기원을 말하듯이 사랑도 진리를 찾는 과정일 것이며 관계일 것이고 "사랑한다,안한다"의 말의 규정이 아니라 가슴과 느낌 이성이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간은 사랑의 동물이다.
그럼 사랑함이란 생활에서 사람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주어질 것인데 단지 이에대한 윤리적 사회 관습에 대한 진보적 용기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소위 진보적이라고 하는 동네에서도 윤리적 잣대는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자아중심적 태도들이 있지 않을까?
이런점에서 "프로메테우스의 신의 윤리적 규휼로 부터 인간의 자유를 위해 불을 훔치는 행위는 분명 진보이다.물론 목사는 분노 하겠지만 그렇다면 신프로메테우스여(女),지금의 사회윤리로 부터 어떤 화석화된 권위에 인간의 자유가 더욱 신장되어야 한다면 그대는 불을 훔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향유하는 주체적 행위 그러한 용기는 없는가?"
우리는 진화생물학자의 사회적 태도에서 그것을 더욱 진보적인 사관으로 보면서도 현실은 우리 모두 목사의 종교적 윤리에 얽메여 있는것은 아닌가?
몸은 한국인이지만 분명 진아씨는 이방인의 문화와 동시에 우리의 사회적 윤리의 관습적 권위에 저항하며 고민하는 것 같고 동시에 전통의 수평적 문화에 대하여 가치관도 충돌하고 있는것 같다.
인생이 20대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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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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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이라...저의 너무나 아픈 컴플렉스인디...찌르시는군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