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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01
    [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겨울철쭉

[독서]빅토르 세르주 평전


빅토르 세르주 평전
수잔 와이스만 지음, 류한수 옮김 / 실천문학사

<빅토르 세르주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폐쇄된) 케산/세르쥬님의 블로그를 통해서였다. 블로그 글 중에서 세르주를 인용한 것이 있었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용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천문학사에 나온 책을 사두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행을 다녀와서야 읽게 되었다.>


빅토르 세르주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는
[한겨레21] 박노자,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참고

아나키스트에서 출발해서 볼세비키가 되었으며,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 수감되고 소련에서 추방된 혁명가.

빅토르 세르주는 소수파 중의 소수파였다. 그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반대한 소수파였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반대한, 그리고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소수의 좌익반대파였으며, 트로츠키의 제4인터네셔널에 대해서도 종파주의이며 국제당을 만들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고립된 좌익반대파의 마지막 소수였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단지 우리가 기질적으로 정당치 못한 것에 더 참지 못하는 소수파이기 때문일까? (우리 역시 소수파인 이른바 ‘운동권’들일 뿐 아니라, 그 중에서 소수인 좌파이며, 좌파 중에서조차 소수파이다.)

세르주는 더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두고 벨기에인으로 자라났으며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수감되었다가 러시아혁명에 참여했고, 코민테른 성원으로 독일에서 혁명운동을 했으며, 소련에서 추방당하고 벨기에, 프랑스에서 투쟁하고 스페인 내전을 지원했고 나치 치하의 프랑스를 탈출해 멕시코에서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 운동이 진정으로 국제적인 이념과 활동양식을 가졌던 시기,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시기를 일생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는 또한 혁명가였지만 사회, 경제를 분석한 사회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혁명시기의 역사와 혁명가들의 전기를 서술했다. 언론을 위한 기사를 쓰기도 했고 시를 쓰고 소설을 출간하고 러시아어 저작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다른 사상 조류의 지식인들과도 풍부하게 교류했다. 그는 독특한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지식이 혁명과 관련해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열정을 다했다. 분과적이지 않은, 종합적인 지식인으로서 혁명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편, 그는 왜 소수파 중에 소수파가 되었나? 그것은 그가 모든 것의 정당성에 대해서 회의하고 자신 속에서 반성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솔직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이런 그의 자질이 그를 소수파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의 이런 정신을 사랑한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미치광이같은 정세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볼세비키가 내전 이후에도 계급독재가 아니라 당독재를 지속하는 것을 반대했다. 노동자조직이 ‘노동자계급의 국가’에서 분쇄되는 것을 혁명의 후퇴라고 인식했다. 소련 사회의 관료주의를 비판했고, 자신도 그 일원이었던 좌익반대파가 실패하는 원인, 즉 그들의 당에 대한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도 비판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망명한 좌익반대파의 사실상의 수장이었던 트로츠키에 대해서도 (그러나 노 혁명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은 채로) 스탈린의 거울대당이라 할 그의 종파주의와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에 대해서나 혹은 좌익반대파와 함께한 정치활동에 대해서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세르주에 대해서 읽는 이유는 그가 가진 진정으로 타협하지 않는 혁명가다운 정신 때문이다. 바로 혁명이 고립되고 패배하고 혁명가들이 변절하는 시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의 야만이 희망을 압살하는 시대.

세르주는 사방에서 역사의 나쁜 측면들에 마주했을 때, 그러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고난을 헤쳐간 인물이다.(그런 점에서 그는 비록 ‘실패한’ 혁명가이지만 영웅이라고 할만하다.)

더욱 역설적이게도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같이) 근거없는 낙관주의에는 빠지지 않은 채로도 시종일관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동지들이 망명지에서 탄압받고 소련 첩자들에게 살해당하고 자신도 살해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도 “항로는 희망행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소렐)이라기보다는, 어떤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상대하겠다는 영웅적인 자세와 더 가까워보인다. 그가 모든 운명을 상대했던 방식들을 생각해자면 그렇다.

트로츠키주의자를 제외한 좌익반대파는 사실상 소멸했다는 점에서(게다가 트로츠키주의자도 사분오열되고 의미있는 혁명투쟁을 전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반스탈린투쟁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체제, 그리고 스탈린주의는 훨씬 오래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소련 사회주의는 결코 갱신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의해서 다음 혁명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체제경쟁에서 패배하고 붕괴했다는 점에서 그는 그의 시대에는 물론 훨씬 더 먼 미래에도 실패했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의 전개방향과 결과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도, 20세기 초중반의 세계에서 한명의 공산주의자였다면 얼마나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를 묻게 된다. 그것은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일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더 용감하지 못하거나 스스로 강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1.

좌익반대파들이 줄줄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당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당을 통해서 대중을 만나야한다는 강박, 당의 일괴암성에 대한 (신뢰하기 힘든) 신화가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당’이라고 생각한 것을 배신할 수 없었지만 그 ‘당’은 이미 스탈린의 권력도구가 된지 오래였던 것이다.

그러나 추방된 좌익반대파들은 당에 대한 사고를 쇄신한 것은 아닌데, 트로츠키를 중심으로 제4인터내셔널이라는 또 다른 국제당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대응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문제삼았어야하는 것은 당형태 자체였을 것이다. 그들의 올바른 비판 중에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대중운동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이 국가와 융합하고 관료들의 지배가 완성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료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체카(KGB의 전신)의 테러가 공공연히 사용된다는 점을 비판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들은 ‘당을 관통하는 투쟁’을 당 자체에 한정시킨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특히 중국의 문혁과 대비해서 그렇다. 문혁에서는 당내의 모순이 계급투쟁의 반영일 뿐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가 당을 관통한다는 점이 그러났다. 소련공산당 내의 투쟁에서 생존이 절박한 상황에서조차 좌익반대파들은 대중을 조직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은 당형태에 대한 맹목이 얼마나 견고한 것이었는지 보여준다.(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좌파들에게 그렇지만.)

(한편, 스탈린과의 당내 투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혁명주의 세력들은 국내에서는 숙청되고 유배되고 살해되어 청산되거나 외국에서는 개별적으로 고립되거나 코민테른 소속의 공산당들에게 탄압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트로츠키주의 정도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혁명에서 얻을 수 있는 역사의 긍정적인 측면은 인적으로는 거의 완전히 청산되거나 트로츠키주의 안에서 부분적으로만 계승될 수 있었을 뿐이다.)

2.

해외에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위협한 것은 소련 스파이조직(체카 이후 게페우, 엔카베데, KGB로 바뀐다)의 항상적인 위협이었다. 이들은 혁명가들을 살해하는 것은 물론, 각국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조직에서 이들을 비방하는 임무를 맡거나 직접 망명 공산주의자들의 사회에 침투해서 분열을 조장하기도 했다. 책에는 이 과정에서 오히려 ‘변심’하고 양심고백을 하는 엔카베데 요원의 이야기도 있다.

이들은 단지 망명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에서는 (스탈린주의적인 통일사회당과 경쟁하는) 통일노동자당에 대해서도 테러를 자행했던 것이다. 이쯤되면 소련의 국제사업이 코민테른을 통해서 국제주의적인 혁명을 지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탈린주의 위성정권을 세우는 것에 초점이 가있다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런 점은 후에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과정, 이후 프라하의 봄 진압과 같은 사건에서 더 비극적으로 드러난다. 도대체 그나마 소련이 혁명세력이라고 믿을 수 있는 여지가 도대체 얼마나 남아있었던 것일까.

3.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독재와 테러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해도) 대외 정책의 결정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의 결정이 처한 어려움은 생각하게 된다. 즉, 혁명 후 내전의 과정에서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해야하는가의 문제, 2차 대전 직전에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문제. 혹은 더 큰 전쟁을 촉발할 위험이 있는 상태에서 스페인내전과 같이 외국의 혁명투쟁을 직접 지원하는 문제 등.

이런 판단에서는 더 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쟁점들을 쉽게만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자칫하면 혁명의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판단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쟁점들이기는 하다. 따라서 ‘쉬운’ 판단은 ‘안전빵’으로, 보수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쟁점들에 직면해서 소련 공산당이 내린 결정은 “항상” 국제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와 안전이라는 기준에서 판단되었다는 데 있다. (물론 “항상” 국제적인 혁명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유지한 채로.) 오히려 그들은 이 과정에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감과 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을 정작 별로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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