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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공존의 기술 -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이기라.양창렬 외 지음 / 그린비


2005년 가을 이후 파리 외곽 지역을 중심으로 폭발한 (주로 "이주자들의 폭력사태"로 알려진) 소요를 분석한 책. 프랑스에 유학 중인 한국인 연구자들이 썼다. (책의 에필로그로는 발리바르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다.) 어찌보면 먼나라 이야기이기는 하겠지만 매우매우 흥미로운 정치적 쟁점들이 담긴 책.

“방리유”는 도시 근교를 일컫는 말이다. 프랑스 도시에서 방리유(근교)는 한편으로는 중산층들의 주택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시테'라고 불리는 이주민, 하층 프롤레타리아의 열악한 주거지를 의미한다. 이 사건은 당시에 "선진국"이라는 프랑스에서, 그것도 "똘레랑스"의 나라라고 불린 곳에서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측면에서 접근한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 국가의 정책, 노동자운동(주로 CGT)의 입장과 활동, 노동시장의 성격 등은 물론이고, 특히 국가의 대응으로서 범죄-치안담론, 이주자의 "배제적 통합"에 대한 정치철학적 비판 등도 다루고 있다.

프랑스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역사가 긴 만큼, 남한에서 생각하기 힘든 쟁점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조만간" 우리에게도 현실화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부는 벌써 현실이기도 하고.)

극우들이 이주자를 배제하는 인종주의적 의제를 제기하고, 우파들이 그것을 포용하며, 좌파들도 그 의제에 답을 하게 되는 상황에서 이주자와 관련된 쟁점들은 점점 더 우경화된다.(이런 걸 정책프레임 전쟁이라고 할텐데, 미국에서도 우파들이 강한 것으로 유명.)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의 문제를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로 전가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입장이 확대된다.

우파들은 백인 하층 노동자, 자영업자들의 불만을 이주자들에게 돌린다. 이 과정에서 이주자들을 범죄자로 몰아부치게 되는데, 이는 "사회보장"을 후퇴하면서도 대신 "사회적 안전"을 지킨다는 것으로 쟁점을 이동한다. 이를 위해서 방리유 지역에 대한 억압은 증대되고, 오히려 폭력과 저항을 유도한다. (2005년 사태도 사르코지가 의도적으로 도발했다는 강한 혐의가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남한의 국가가 노동자운동에 대해서 하는 짓거리도 이런 측면이 있는 듯)

치안담론 속에서 이슬람국가의 이주자들은 실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슬람원리주의 테러리스트와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범죄와의 전쟁‘은 ”테러와의 전쟁“과 같은 것으로, 사회적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표상된다.

책은 너무나 많은 흥미로운 쟁점들을 많이 담고 있지만, 다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 특히 관심있게 본 쟁점 두개만 일단 언급하자.(쟁점들을 요약하는 것도 힘들다; 나머지는 담에 생각나면..)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 착용 문제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종교적 상징물인 히잡(이슬람식 여성 스카프)을 착용하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입장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법안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법안이 아니라 이 안에 담긴, 드디어 폭발한 쟁점들이다.

여기에는 정교분리의 원칙부터, 다문화주의, 이슬람 사회(공동체와 가족)에서의 여성의 지위, 식민주의 등과 같은 쟁점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런 쟁점들을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힘들겠지만, 다만 “정교분리”원칙에 대해서는; 이것은 애초 대혁명 이후 기독교 교회의 지배로부터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현재 언급되는 “정교분리”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언급할 수 있겠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논쟁에 대면하는 원칙으로 “그녀들의 입장에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히잡을 쓰는 이슬람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으로부터 생각하자는 것이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조차,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만 이슬람 여성들을 대상화해왔다는 비판.

이슬람 여성들(이슬람 페미니스트들도)은 오히려 스스로 히잡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것이 남성우월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자신을 “무성적인 존재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생존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여성으로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사진은 마르세유에서 이슬람 여성들의 시위)

이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무엇보다 문제는 히잡을 착용하는 이슬람여성들, “그녀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져야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녀들이 그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드는 문제라는 점,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오히려 그녀들이 학교로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전혀 올바른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의 입장과 이중노동시장

이주자들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입장은 어땠을까? 저자는 그것이 이중적이라고 말한다.(“연대”와 “통제‘의 모순) 한편으로 이미 합법화된 이주노동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대변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이주노동자의 유입에 반대하고, 이에 따라 불법 이주자들에 대해서는 눈감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것은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이 전후 사회적 합의의 한 주체로 자리하면서 노동시장 정책에 대한 입장에 제약이 가해진 상황과도 연관된다. 이러한 이중적 입장은 프랑스 공산당의 몇몇 쟁점들에 대한 모호한 입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 노동자운동(특히 CGT)가 민족주의적이라는 것은 아닌데,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동유럽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한 이주노동자를 조직해왔고, 이들을 대변해온 역사가 있다.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형성-지원하고 이들을 대변하려한 노력들을 보면 단지 민주노총에 "가입시켜준" 정도의 활동 이외에는 적극적인 조직화 전략도 지원도 없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입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차이는 이주노동자의 합법화가 그나마 상당히 이루어져있다는 사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장기간의 노동자 이주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사회에 거의 완전히 통합된 2~3세대가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상황이다보니 남한과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다. 남한 정부의 극단적인 이주노동자 관리, 불법화가 민주노총에게는 이주노동자의 합법-불법과 무관한 지원이라는 입장을 요구하는 셈이지만, 정부의 입장이 어느 정도 유화적으로 변화할 경우 민주노총의 입장도 모호해질 수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방리유의 소요에 대해서 의미있는 행동을 조직하지 못했고, 입장도 모호했다. 방리유의 소요 이후 불과 만에 쟁점화된 CPE(최초고용계약법) 투쟁은 전혀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시기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이렇게 된데에는 노동자운동이 조직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 혹은 노조가 조직되어 있는 공공부문, 안정적인 노동시장에 몰두한다는 점도 작동한다고 지적된다.(사회운동적인 성격을 가져온 프랑스의 노동자운동에서조차 난점이었다는 점) 이들 방리유의 청년들은 실업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운동은 일자리로부터도, 사회로부터도 배제되는 이주자들에 대해서 어떤 입장으로 갖고, 또 실천할 수 있을까?
(한편, 이런 지점은 "노동운동을 잘하면 사회운동의 과제들은 다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냐"는 노동운동 좌파들의 입장들에 다시 한번 회의적이게 한다. 사회운동포럼 사전 토론에서도 제기되는 논점인데.. 노동운동으로 안되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밖의 쟁점들을 간단하게만 메모.

* 시빌리테(시민윤리)의 문제. 그것은 발리바르에 의해서 운동에 필요한 이념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이게 이주자와 관련해서 프랑스에서 기만적인 성격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무례한” 이주자 청년들.. 이런 식의 비방과 이를 범죄와 연결시키는 시도. 정작 문제는 이주자들에게 먼저 “무례한” 국가권력이 문제라고 하겠지만, 개념이 이런 현실에 봉착할 때 어떤 이론적 전략이 필요할까?

* 공동체주의 문제. 이주자들의 (민족에 기반한) 공동체는 긍정적인가? 그것은 공동체주의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발리바르는 공동체주의를 강화하는 배제와 추방을 먼저 사고해야하고, 이주자들의 공동체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이도 매우 현실적인 문제.

* 정치의 부재 혹은 소멸의 상이한 양상.. 이주자들, 하층 프롤레타이아는 “대표되지 않음”으로서 정치에서 배제된다. 극단에서 초민족 부르조아지는 굳이 국내정치에서 대표될 필요가 없다. 방리유의 반란은 정치적 생성, 봉기적 생성의 계기일 테지만 그것은 여전히 슬로건도 정치적 목표도 부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 생성의 계기를 가질 수 있을까.. (발리바르가 제기하는 7가지 논점 중에 하나)

* 이중노동시장. 프랑스에서도 이중노동시장이 고착되고, 2차 부문 노동시장(중소영세비정규직 일자리라고 보면 될텐데)에서 특히 이주자들과 백인노동자들이 경쟁한다. 이에 따라 주로 노조로 조직화된 1차 부문(공공부문, 대기업, 전문직)은 오히려 무관심. 일단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최저임금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제시된다.(옳다고 본다) 문제는 제한된 일자리에서 경쟁하는 2차 부문 노동시장에서 인종주의적인 대결이 심화될 수 있다는 점. (남한에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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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극단적인 모습의 방리유를 무대로한 프랑스 영화도 있다.

“13구역”은 도시에서 방리유를 배제하는 방식의 극단을 상상한 영화다. 그곳에서 장관(아마도 내무부겠지)은 이미 콘크리트 장벽으로 고립된 방리유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릴 음모를 꾸미는 것으로 나온다.

(마침 오늘 케이블 TV에서 하더군. 실제로 빠리 외곽의 방리유는 도시외각순환고속도로에 의해서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책을 읽고 보니, 사르코지가 비슷한 짓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징적 배제를 물리적 배제로 만드는 것은, 몇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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