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2008/03/28 13:00

수동사진기

나의 오래된 물건은 아니다.

찍히기만 했다.

손도 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빠른 시대다.

사진 한 장 찍는데 소중함이 있다.

지울 수도 없고, 함부로 찍지도 못한다.

현상 인화료 1만원이다.

충분히 바라보고, 자세히 들여다 봐야한다.

인간관계도.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을 다해 집중하고,

내 마음 속의 필름에 너를 담고 싶다.

  

  

이 사진기이 나에게 온 지는 이제 1주일 쯤 되었다. 그래서 사실 나의 오래된 물건은 아니다. 다만 첫 번째 필름을 현상소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옛날 일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이와 똑같은 수동사진기가 있었다. 어린 내 손에 들기 무거울 정도로 컸던 그 사진기를 나는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다. 사실 누가 찍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나 스스로 함부로 찍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필름이 아까워서 였을까? 사진이 잘못나오면 혼날까봐 그랬을까? 한 번은 엄마가 옆에서 초점 맞추는 법을 일러준 적이 있는데, 그렇게 초점을 맞춰 놓고도 끝끝내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첫 번째 필름을 사진기에 넣고 36장을 다 찍는데 사흘이 걸렸다. 디지털사진기였다면, 한 시간에 100장도 찍었을 텐데... 지금도 셔터 누르는 일은 쉽지 않다. 조리개를 맞추고, 셔터속도를 조절하는 사이 수십 번은 더 생각하게 된다. 인화되어 나올 사진을 머리에 그리며, 자리를 조금 옆으로 옮겨보고, 자세를 약간 낮췄다가, 앞에 있는 사람을 요리조리 찬찬히 살펴본다. 그렇게 한동안 그 사람을 쳐다보고 있으면 ‘아.. 이 사람 참 예쁜 사람이구나’하고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도 참 정겹게 보이고,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도 무척 반갑다.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

  

디지털사진기가 널리 퍼져서, 잘못 찍으면 바로 확인해서 지우고 다시 찍으면 된다. 현상소를 갈 필요도 없고 연결선만 있으면 컴퓨터에 사진을 저장할 수 있다. 이런 디지털 세상에 살면서 수동사진기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과 '마음을 담아 살펴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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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13:00 2008/03/28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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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뚱띵이  | 2008/03/28 13:31
그렇죠. 한장한장이 아까워 셔터를 누르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보고, 또 내가 그렇게 힘들게 셔터를 누른 결과가 과연 어떨지 기다리는 마음과 설레이는 마음. 애틋하죠. ㅎ
B급 좌파  | 2008/03/28 21:22
가끔 너무 생각해서 탈일 때도 있는 것 같아요...제 카메라에 물려 있는 필름에는 4계절이 다 들어있어요....^^;;;;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작은 사람  | 2008/03/29 20:57
좋아 보이네,
달군이 자꾸만 살림을 블로그 진에 올리는 겨?
덕분에 살림이 이제 별로 밉지만은 않으이.
살림  | 2008/03/30 11:31
빨간 뚱띵이/ 아.. 맞아요. 애틋^^

B급 좌파 /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참 좋아요 ^^;

작은 사람 / 그려요.. 다행이네.. 블로그진에 올랐는지는 몰랐는데, 암튼 기분 좋아!! 쿠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