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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래된 동지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가눌길 없어 결국 그는 공중전화 박스 유리를 깨고 피를 철철 흘렸다.

붕대위로 벌겋게 솟아오르는 피를 보고도 농성장 계단에 그림자 처럼 앉아 쳐다보기만 하는 사람들.

오랜 농성의 피로는 서로에 대한 미움도 싹트게 한다.

어두운 계단 그림자들이 내 뒤통수에 꽂는 시선을 느끼며 난 그와 함께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소독약을 들이 붓고, 엑스레이를 찍고 의사의 수술 준비를 기다리는 내내 그는 소리쳤다.

그래, 아무도 안 온단 말이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어떻게? 이건 동지 아니야!

 

날이 밝아 그의 손에 감겨진 붕대를 본 사람들이 일제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가락질 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저런 사람 필요없어! 나가라고 해! 여긴 투쟁하는 곳이야! 귓가에 윙윙 거리는 매정한 목소리.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참 오랜만이었다. 이런 상황.

마음이, 옆자리가 허전했다.

전화기를 꺼내고 , 국제 전화 카드의 긴 숫자들을 찍어 누르며 멀리서 들려올 그의 목소리를 기대한다.

언제든 이런 상황이면 함께 대책을 고민하던 동지. 상처받은 사람도 매정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다 껴안고 "괜찮아~"라고 할 그 친구의 자리가 새삼 허전하게 느껴졌다. 보고 싶었다.

 

"뭐야! 맨날 이렇게 늦게 전화하고. 술마시면 생각나죠? 나 동지들한테 complain 많아요~"

"미안, 넘 오랜만에 전화했죠?"

"그렇죠~ 동지들 나 다 잊어 버렸죠?"

"에이, 그런게 어딨어? 이렇게 생각나서 전화 하잖아요..."

 

정말 그렇다. 많은 시간 잊고 지낸다. 그는 한국에 없다. 이 투쟁에 함께 하고 있지 않다. 때론 없는 그를 떠올리며 징징거리기도 하고 가슴 한편의 응어리가 불쑥불쑥 올라와 힘겹기도 하지만 그가 옆에 없는 현실에 적응하고 있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너무나 경쾌한 그의 목소리.

"우리나라 지금 물 많이 나왔잖아요.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공동체에서 돈 모아서 사람들 도와주는 일 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와서 기뻐요. 지금 회의하고 있었어요."

"잘 되고 있어요. 낮에는 신발가게 일하고, 밤에는 모임하고 너무 바뻐요. 이렇게 사회 활동 하지 않으면 나라에 있는 거 힘들어서 또 다른 나라 갔을 텐데... 바쁘고, 같이하는 친구들도 많이 있고..."

 

그럴 줄 알았다. 어디든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그는 물 만난 물고기 처럼 파다닥 거리며 헤엄쳐 다니는 사람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사람.

공간이 바뀌어도 투쟁은 계속된다. 

 

병원이라는 말에 왜,어떤 친구가,얼마나 많이 다쳤는지 꼼꼼히 묻고 걱정한다.

"나도 거기 있고 싶어요. 동지들이랑 같이 투쟁하고 싶어요. 힘들죠? 다 알아요~"

위로의 말도 놓치지 않는다.

"얼마전에 헉씨 만났는데, 헉씨는 한국어 학원 할 거에요. 사람들한테 한국말 가르쳐 준데요..."

아, 우리 헉씨. 전직 교사 출신의 헉씨가 칠판 앞에서 "안녕하세요?"라고 쓰는 모습이 떠오른다. 

 

접수처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전화 끊어야 되요. 잘 지내고, 또 전화할께요."

"또 1년 있다 전화 할꺼죠? 맞아요. 오래 시간 지나면 사람들이 잊어버리죠."

"알았어요. 1년 있다 전화할게요.하하"

 

바보.누가 그를 잊었겠는가?

그의 따뜻한 미소를, 불끈 쥔 주먹을, 경찰과 출입국에 맞선 절규를.

가슴에 아로새겨진 그의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의 오래된 동지 비두,

빛나는 투쟁의 자리 보다는, 투쟁의 밑바탕을 만들고 떠난 비두.

시간 지나면 잊혀지는게 당연하다고 말하는 비두.

하지만 결코 우리에게 잊혀질 수 없는 동지 비두.

 

한 손에 붕대를 칭칭감고 계단에서 잠이 든 '오늘의 사고' 동지를 보며, 비두씨를 생각하며 날이 환해질 때 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찔끔 눈물이 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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