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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근상은 원하지는 않는다

나보다 늦게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한 젊은 친구가 있다. 결근이 잦더니 오늘은 관리자가 질책할만한 사고를 친 모양이다.  한 직원은 그 친구가 근무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을 보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질책을 받는 게 아닐까 싶었다. 관리자가 그를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질책한 것은 아니었고, 데스크 뒤쪽으로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는데, 그것이 질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항상 웃던 관리자가 그때만은 화가 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공정의 사람들 대부분은 성실하다. 체력이 딸려 천천히 일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놓고 일을 하지 않았던 경우는 그 친구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지금처럼 행동한다면 그 친구는 수습기간을 통과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그 전에 그 친구가 일을 그만 둘 가능성은 더욱 높아 보인다. 그런데 왜 계약직 사원으로 입사를 했을까?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몸과 마음이 안 따라주는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말 놀라운 것은 불성실한 그 친구가 아니라 성실한 우리가 아닐까.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묵묵히 PDA의 지시에 따라 카트나 파렛트를 끌며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로봇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는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로봇화되어 일하는 모습이야말로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경이로운' 일상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고, 쿠팡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관리자들은 한달에 3번까지의 결근은 재계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건 노동강도가 그만큼의 결근을 묵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노동강도가 세다는 뜻을 쿠팡이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는 우등상만큼 중요한 상이 개근상이라고, 어른들은 말하고는 했다. 그래서 당시 학생들은 아파도 학교에 꾸역꾸역 나오는 경우가 잦았다. 나도 그 시절 규율에 전염된 사람이다. 결근을 하면 마음이 괴로워 오히려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든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쓰러질 정도로 아프지 않는 한 출근을 할 것이다.

 

그래서 불성실한 그 친구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하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내 짝이 가출을 해서 보름 정도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빈자리를 부담스러워 했던 기억까지 떠오른다. 짝이 등교한 후에 왜 가출을 했냐고 물었다. 짝은 내 질문에 엉뚱한 답을 했다. 엄마가 아프다고 해서 집에 왔는데 멀쩡하더라고. 속았어, 속았어. 

 

어쨌든 현재의 쿠팡은 개근상은 원하지 않는다. (과거에 만근수당이 있었다고는 한다.) 결근을 일정 부분 허용할 수 있는 이유는 쿠팡의 인력 운용이 일용직에 상당히 기대고 있어 그만큼 '유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성은 어느 기업과 마찬가지로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다. 쿠팡에서는 보수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는 결근보다, 보수를 지급했는데 행해지는 태만은 더 큰 죄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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