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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치 - "배제와 포섭의 정치" 세미나 모집(2009년 3월 26일 시작)

문화사회연구소에서 세미나를 시작한다.

관심 있는 분들 참여하시라~~

문화정치 세미나 - "배제와 포섭의 정치"

 

 

-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배제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배제의 문제는 때때로 현대성이라는 이름과 함께, 또 때로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되곤 한다. 유구한 현대의 역사 속에서 '쓰레기가 되는 삶'이 확대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 우리는 이것이 정치경제적인 문제임과 동시에 문화정치적인 문제임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폭력적 과정을 통한 축적은 상징체계에서의 사회적 타자에 대한 배제와 더불어 나타났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은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시장의 퇴행적 확장 과정을 통해 더욱 공고화되고 있다.
- 이에 본 세미나에서는 폭력과 배제에 대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분석과 더불어,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언제나 특정한 주체들에 대한 배제를 전제로 했던 역사적 보편성이 아니라, 특이성들의 구도가 내재된 보편성의 재구성 작업이 본 세미나의 장기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 첫 모임: 3월 26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문화사회연구소.
* 세미나 진행 방식: 격주 1회. 각 회별로 1~2회 가량 발제 및 토론.
* 읽을거리: 다음과 같은 틀거리로 구상하되, 첫 모임의 토론을 통해 재조정하도록 함. 참여자 분들이 읽고 싶어하는 읽을거리나 아이디어를 기대하고 있음.


1주제: 배제의 정치적 삶
- G. 아감벤, <호모 사케르>
- J, 버틀러/ G. 스피박,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

 

2주제: 역사적 자본주의와 배제
- K. 마르크스,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적 법칙", in: <자본>
- K. 마르크스, "이른바 시초축적", in: <자본> 
- K.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결과", in: <경제학 노트>
- K. 폴라니, 2부 1편 "악마의 맷돌", in: <거대한 변환>
- E. 발리바르, "배제인가 계급투쟁인가?", in: <역사유물론의 전화>

3주제: 신자유주의와 배제
- D. 하비, <신제국주의>
- D. 하비, <신자유주의>
- E. 발리바르, "유럽적 인종주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in: <대중들의 공포>
- E. 발리바르, "인종주의: 여전히 보편주의인가?", in: <대중들의 공포>

 

4주제: 현대성과 배제
- M. 푸코, <광기의 역사>
- M. 푸코, <담론의 질서>

 

5주제: 세계화와 배제
- Z.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 A. Ong,
- 이기라/양창렬 외, <공존의 기술: 방리유, 프랑스 공화주의의 이면>



참가 신청 

세미나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홈페이지 수강 온라인 신청게시판에 답글 달아주세요.

문화사회연구소 홈페이지(www.kccs.or.kr) ->  '문화사회아카데미' -> '온라인 신청(아카데미 신청)' -> '문화정치 게시글'에 댓글 작성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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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어에 대해

   여성어는 남성어와의 차이를 통해서 구분된다. 여성어는 발화자나 표현 대상의 성별 혹은 언어 속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 여성어가 한 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여성이 말하고 듣고 인식하는 언어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70년대 이후 여성주의적 언어학이 학문의 새로운 분야로 정립되면서 여성어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다. 

 

   여성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주되게 언급되는 것은 여성어이든 남성어이든 그 쓰임이 지극히 남성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남성을 지칭하는 말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하거나 대표하는 경우이다. 영어에서‘History’(그의 이야기)가 역사를 뜻한다거나, 우리말의 아들이나 딸을 통합해서 ‘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예이다. 두 번째는 남성과 여성을 가리킬 때 ‘소년소녀’, ‘남녀문제’, ‘자녀 교육’과 같이 남성이 앞에 오고 여성이 뒤따르는 방식이다. 세 번째는 여성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 속어나 비어 등의 부정적인 뜻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년놈들’이나 ‘애미애비도 모르는 자식’등이 그 예이다. 

 

   여성어가 성차별적인 요소를 가지고 남성중심의 언어 속에 포섭되는 네 번째 방식은 가장 극적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방식이다. 여성어가 학문의 분야로 정착되어 가는데 반해 남성어는 여성어를 연구하기 위한 하위범주로써 존재한다. 남성어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여성어만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방식이다. 남성들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지만 여성들은 ‘여’중과 ‘여’고 그리고 ‘여’대를 다닌다. 학교라는 집단적 틀을 벗어나면 문제는 더욱 확대된다. 순수한 주체로써 개인으로 사회에 진입한 이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호명된다. 남성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자가 되고 사장이 되고 시인이 되지만, 여성은 ‘여’기자가 되고 ‘여’사장이 되고 ‘여류’시인이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어는 바르트가 (비록 부르주아지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말하듯 “이름을 거부함으로써 그 기원을 잃어버리고 신화가 된다.” 신화는 역사적인 의도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정당화 하고 우연적인 것을 영원한 것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가부장제를 탈정치화 된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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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 민호

은수 님의 '고대녀와 네이년은 한끝 차이'를 읽고 예전에 썻던 글이 생각나서 올려본다.  

2006년에 쓴 글이니 벌써 3년이 지난 글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문화사회 2호에 기고했었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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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 편향의 사회 : 영상매체의 발달과 된장녀 논란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감각기관은 시각이다. 우리는 어딜가든 만들어진 영상들과 대면한다. 거리에서는 만들어진 영상들이 나와 함께 걷고, 집과 사무실에서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이 쏟아내는 영상들의 폭격을 받는다. 필자는 현대사회의 주된 특징이 이러한 시각 편향성-그 중에서도 특히 영상매체에 의존한 시각 편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시각편향성은 다른 감각을 억압할 뿐 아니라 같은 시각에 의존한 매체인 활자매체마저 배제시킨 채 영상매체를 특권화 시킨다. 영상매체가 특권화되는 과정에서 기술복제가 가능한 사진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등의 전자매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매체발달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매체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대상을 재현하고 인식하는 방식의 변화를 수반한다.

   이글은 영상매체의 발달과정을 추적하고 그에 따른 인지방식의 변화(혹은 그 가능성)를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나아가 마지막 사례인 된장녀 논란이 발생하는 과정을 매체의 특성과 함께 분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머물고 있는 매체발달의 지형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 사례 1. Video killed the radio star

 

   1981년 하나의 살해사건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범인은 video였고 피해자는 radio star였다. 1981년 개국한 MTV는 그들의 첫 뮤직비디오로 그룹 가 1979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Video killed the radio star'를 내보냈다. 이 곡의 가사를 잠시 살펴보자.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Video killed the radio star / In my mind and in my car / We can't rewind / We've gone to far / Pictures came and broke your heart / Put the blame on VCR …”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어 / 내 마음, 내 차 속에서 살아 있던 / 되돌릴 수는 없어 / 너무 멀리 와버렸거든 / 영상이 너의 맘을 짓이겼지 / VCR을 원망해라.)

- 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중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살해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은 라디오 스타의 청각 중심 음악이 시각성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청각중심의 음악에 시각성을 부여하는데 실패한 몇몇 음악인들은 살해당하기도 했고, 크게 다치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청각에만 의존하던 음악인들의 필연적인 퇴화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는 청각만으로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VCR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VCR을 활용하는 것이다.

 



# 사례 2. 전화와 카메라

 

   멀리 있는 것을 소리를 통해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화이다. 따라서 전화는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핸드폰도 전화의 일종이고 당연히 청각에 기반을 둔 매체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청각 장애인은 전화를 사용할 수 없지만 핸드폰은 사용할 수 있다. 2001년 방영된 드라마 <엄마야 누나야>에는 청각 장애인이 주인공으로 나왔으며 핸드폰은 타인과의 중요한 소통수단으로 쓰였다. 핸드폰에는 시각에 기반한 소통 수단인 문자 서비스 기능이 있다. 따라서 당연히 청각장애인도 사용 가능하다. 근래에 나오는 핸드폰에는 문자 서비스 외에 중요한 기능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메라’ 기능이다. 요즘은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구하기도 힘들다. 카메라 없는 핸드폰은 잘 팔리지도 않는다니 핸드폰에 카메라는 필수적인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핸드폰 기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게임과 인터넷은 기본이고, 작년에는 핸드폰에 텔레비전마저 부착되었다. 이쯤 되면 핸드폰은 더 이상 전화가 아닌듯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핸드폰이 전화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오늘날 시각과 청각이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마샬 맥루한에 따르면 (알파벳의 발명과 함께) 인쇄술의 발달 이후 인간의 감각은 시각에 편향되어 왔다. 활자매체를 접하기 위해 인간은 시각을 사용해야 했다. 활자매체를 해독하기위해 시각을 주된 정보 수용 감각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경험은 단편적인 것이 되었다. 또한 선형적 문자에 따라 선형적 사고가 복합적인 비선형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가로막아왔다.(선형적 사고에 대해 빌렘 플루서는 그의 글 ‘코드화된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의 텍스트를 해독하려면(읽으려면) 눈은 행을 따라 미끄러져야 한다. 행의 마지막에 가서 비로소 우리는 메시지를 수신해 그것을 요약하고 종합하도록 해야 한다. 선형의 코드는 그것의 통시성을 동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진적인 수신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새로운 시간 체험이, 말하자면 선형의 시간, 철회할 수 없는 진보의 흐름, 반복 불가능성이라는 극적인 상황, 구상, 간단히 말해 역사라는 새로운 시간 체험이 생겨난다.” 플루서의 이러한 관점은 뒤에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맥루한은 이를 시각이 다른 감각을 배제하고 스스로를 특권화시키는 일종의 왜곡이라고 본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알파벳은 어떤 문자문화에 있어서도 청각, 촉각, 미각과 같은 시각 이외의 감각의 역할을 줄여버린다(맥루한, 미디어의 이해).”

   맥루한은 활자매체 이후 전자매체에 분석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가 보기에 전자매체는 활자매체의 시각편향적인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매체였다. 맥루한이 전자매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텔레비전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텔레비전은 시각에 청각을 결합시킴으로써 활자매체에 의해 잠식된 청각을 복원시키는 매체이다. 즉 그에게 텔레비전은 단편적인 경험이 아닌 종합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매체이다. 텔레비전을 시각과 청각의 종합적인 매체로 본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맥루한이 텔레비전을 정세도definition가 낮고 참여도participation가 높은 쿨한 미디어로 본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그의 미디어에 따른 지각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론이 시대착오적인 것은 단순히 텔레비전에 대한 잘못된 분석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사회가 시각 편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 자체가 더 시대착오적이다. 앞에서 제시한 두 가지 사례는 시각과 청각의 결합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텔레비전과 다른 결합이다. 두 사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한 예술과 매체가 시각에 의해 ‘흡수’되고 있는 현상이다.

   가장 순수하게 청각에 의존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과 결합하였다. 그것은 청각이 사라질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결합이지만 현대의 음악 중 어떤 음악들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흡수이다. 얼굴과 몸으로 음악을 하는 댄스 가수들과 영화제작비와 맞먹는 물량을 투입해서 만든 화려한 뮤직비디오들을 생각해보라. 음악은 마치 영상의 배경일 뿐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벨벳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들으면 앤디워홀의 바나나가, 핑크플로이드의 음악을 들으면 베를린 장벽이, 야니의 음악을 들으면 자금성이 떠오른다. 패션을 생각하지 않고 그램록과 힙합을 들을 수도 없다. 음악은 이제 청각만으로는 과거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 없다. 핸드폰도 마찬가지이다. 통화 기능이 아무리 잘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카메라가 없는 핸드폰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활자매체 시대를 지나 전자매체 시대에도 시각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이다. 그렇다면 현재도 맥루한이 말한 시각편향의 구텐베르크 은하계에 속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지금 시대는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시각 편향을 보이고 있다. 활자매체 시대와 다른 지금 시대의 시각편향의 특징을 포착해 내기 위해서는 레이 초우를 따라 루쉰의 사례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 사례 3. 뉴스영화와 루쉰

 

   루쉰은 의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영화(슬라이드)를 보고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은 루쉰은 사람들의 병든 몸보다 병든 마음을 개조하는게 더 시급한 일임을 인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영화 매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담고 있는 레이 초우의 책 <원시적 열정>은 이처럼 루쉰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게 만든 (루쉰 자신이 서술한) 에피소드를 분석하면서 시작한다. 레이 초우는 루쉰의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근대성’이, 특히 시각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는 세계 곳곳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루쉰의 경험은 마르틴 하이데거와 발터 벤야민과 같은 유럽 지식인들이 근대에 대해 썻던 것을 선취했다. … 잔니 바티모는, 아주 상반된 내용의 하이데거와 벤야민의 두 논문이 같은 해인 1936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그들이 최소한 ‘방향감을 상실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 루쉰이 충격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 ‘영화라는 미디어에 의한 확장과 증폭의 과정’이라는 것은 거의 지적된 바가 없다(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루쉰의 에피소드는 영상이 근대인에게 가져온 충격과 그 영향력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규명되어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루쉰은 영상매체에 충격을 받았는데 ‘왜 활자매체를 병든 맘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선택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이다. 초우는 이를 ‘전향’-나아가 ‘물러남’과 ‘도피’라고 표현한다. “‘신체’가 아닌 글쓰기를 통해서 중국의 ‘정신’을 치유하겠다는 루쉰의 결심은 일종의 '물러남'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초우는 ‘루쉰의 물러남’을 통해 과거의 활자매체와 현대의 영상매체의 차이를 포착하고 있다.

 

“루쉰이 택한 문학으로의 전향이라는 ‘해결책’은 말의 의의를 계속해서 특권화한다는 오래된 대책이었다. … 루쉰의 이야기에는 의학에서 문학으로의 근본적인 전향말고도 또 하나의 다른 전향, 즉 ‘전통으로의 재전향’이 있다. … 루쉰이라고 하는 박학한 남성 지식인은 ‘문자텍스트로 도피’했는데, 그것은 초국적 제국주의의 한가운데서 학살당하는 중국인 남성이 야비하고 잔혹하게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는 것이 된다(레이초우, 원시적 열정).”

 

   활자매체와 영상매체는 둘 다 시각 편향의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영상매체와 활자매체 사이에는 초우가 문자텍스트를 ‘전통’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는 초우가 루쉰에게 문자 텍스트로 도피함으로써 전시되는 것을 은폐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초우는 활자매체가 영상매체가 가진 날것의 느낌과 그것이 보여주는 시선, 다시 말해 영상을 통한 재현의 충격적 사실성과 제 3세계를 대상화하는 제국주의의 시선을 은폐시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활자매체의 전통이 영상매체의 새로움을 억압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시각은 “억압되어도 반드시 돌아온다. 쓰기와 읽기 개념을 내부에서부터 변화시키기 위해서.” 초우에 따르면 루쉰의 소설은 과거의 소설과 상당히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과거 왕조의 전통적인 소설이 장광설이었던 데 비해, 짧은 문학형식은 압축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메시지를 전하는 언어텍스트이다.” 초우는 근대의 소설쓰기 방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영상문화가 어떻게 전통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초우가 보기에 “그것은 그림이 텍스트가 되는 문제가 아니라 언어텍스트가 그림으로 변화하는 문제이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전통과 구별되는 현대사회의 시각 편향은 사진과 영화로부터 출발한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를 찍는 기술적 도구인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지각 방식이 변화할 것이라 예언했다. 카메라는 클로우즈 업과 고속촬영을 통해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탐구할 수 있게 했고 이는 시각의 변화와 함께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했다. 영상매체는 그 기술적 잠재성을 실현하여 활자매체와는 다른 시각 편향을 가져왔다. 카메라로 대표되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은 바로 그 새로움에 있다. 활자매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생각이 고정되고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자기 완결성을 갖는다. 그 자기 완결성은 선형성의 외부를 사유할 수 없게 한다. 활자매체 안에서 우리는 활자매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플루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언어는 ‘논리’라고 불리는 규율을 따르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언어는 방언적․상상적 그리고 모든 비언어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데 막강한 도구가 되었다. … 문자언어는 탈신비화 및 탈마술화를 위한, 곧 계몽을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논리적 규율을 지키는 문자언어는 서양의 사고에서 강력한 우위를 차지한 나머지, 그 규칙, 곧 논리는 모든 사고규칙과 동일해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비언어적으로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 시작했다(플루서, 코드전환)."

 

   영상매체는 활자매체가 가진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영상은 자기 완결적 텍스트가 아니다. 우리는 영상을 통해 시각적 무의식을 탐구할 수 있으며,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영상은 열린 텍스트이다. 그것은 언어적 사고 능력을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영상매체는 복제의 전면성과 전복성을 가지며, 비언어적 사고(선형성을 탈피한 직물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기존의 시각 체제를 동요시키는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은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다.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테크놀로지 일반이 그러하듯 정치․군사적, 산업적 논리에 의해 매개되어 제도화됨으로써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기술적 잠재성이 정치경제적 논리에 의해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태된 영상의 범람 속에서 살고 있다. 주은우가 메츠의 말을 빌어 이야기 하듯 “영화제도란 영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영화에 친숙해진 관객이 역사적으로 내면화해 왔고 소비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정신적 기계’이기도 하다.” 주은우의 말에서 영화를 영상매체로 바꾼다 해도 아무런 어색함이 없다.

   영상매체의 전면성과 전복성이 활자매체와 다른 현대사회 시각 편향의 내용이다. 우리는 루쉰처럼 영상을 통해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지만 엄청난 정보량을 자랑하는 영상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루쉰처럼 충격을 받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영상을 소비하는 능력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영상매체의 또 다른 기술적 잠재성인 비언어적 사고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 위해서는 영상을 단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 사례 4. 핸드폰으로 찍은 영화

 

"세계 최초로,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한 장편영화가 등장했다. <버라이어티>는 남아프리카 출신 감독 아리안 카가노프가 이라는 90여분짜리 장편영화를 100%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완성했다고 보도했다. 카가노프 감독이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11일, 들인 제작비는 약 16만5천달러다. 감독은 소니 에릭슨 W900i 기종의 휴대폰 8대를 동원해 영화를 찍고 극장 상영이 가능한 버전으로 블로업까지 마쳤다. 카가노프 감독은 '블로업 결과도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며 '휴대폰 카메라가 35mm카메라의 독재로부터 영화감독을 해방시켰다. 나는 기술적인 제약없이 정말 마음껏 내가 찍고 싶은 것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시네21 No. 545, 순도 100% 휴대폰 카메라 영화 등장)."

 

   영상매체의 기술적 잠재성을 포괄적으로 실현할 가능성을 획득하기 시작한 것은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 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영상매체의 일상화를 가져왔다. 영상을 소비 하던 대중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핸드폰에는 디지털 카메라가 달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들은 심지어 영화까지 찍는다.) 반드시 핸드폰이 아니더라도 휴대하기 쉽고 가격도 싼 디지털 카메라나 디지털 캠코더도 이미 널리 보급되었다. 만들 의지만 있다면 비전문가도 영상을 간편하게 찍어 컴퓨터로 편집하여 영화를 만들 수 있다. 위의 사례가 핸드폰으로 장편 극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가지지만 이미 몇 해 전부터 핸드폰이나 디지털 캠코더로 찍은 다큐멘터리나 간단한 영상물들이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고 있다.

   이처럼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영상을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영상 생산 과정의 비밀이 대중에게 베일을 벗고 드러난다. 대중은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비로소 영상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영상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나서 비로소 대중들은 영상을 통해 비언어적(혹은 직물적) 사고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직물적 사고란 창조하는 것이다. 선형적 사고가 우리를 미리 프로그램화된 해석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다면 직물적 사고는 우리를 둘러싼 울타리를 제거하고 마음껏 활개하도록 만들어 준다. 선형적 사고에서는 현재의 원인이 되는 과거-즉 이미 있는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데서 머무른다. 하지만 직물적 사고에서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대안적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의 주체가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들의 기획이다.(플루서, 디지털 가상)"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과연 우리는 직물적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함께 누구에게나 영상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영상을 생산해 내는 것이 대안적 삶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을 생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원시인들은 영상을 통해 자신들의 상상력을 펼쳤다. 그들이 영상을 통해 사유한 것은 문자와 같은 소통할 수 있는 매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시시대의 상상력은 자연을 모방하거나 허구적 표상에 염원을 담아두는 "주술적 상상력"이다. 현대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오랜기간 문자를 통한 사고와 소통이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은 문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영상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대의 상상력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를 타고 넘는 "기술적 상상력"이다. "기술적 상상technoimagination은 그림들을 개념으로 만든 후 그러한 그림들을 개념의 상징으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다(플루서, 코무니콜로기)."

 

# 또 하나의 사례. '된장녀' 논란의 발생 과정

 

   몇 해 전부터 여성을 'oo녀'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개똥녀', '떨녀', '딸녀', '월드컵녀', '덮녀', '괴물녀', '귀족녀' 그리고 '된장녀' 등이 그것이다. 이 수많은 ‘oo녀’들의 탄생은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메라에 찍힌 여성들에게 누리꾼들이 관심을 보이며 나타나는 현상이 ‘oo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최근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된장녀' 논란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된장녀 논란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영상매체 발달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하나의 징후로 포착되어야 한다. 2006년 여름 우리사회는 '된장녀' 논란에 휩싸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된장녀가 논란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과정이다. 사치와 허영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문제적 시선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식민지 시기 '신여성(모던걸)'이나 영화 <자유부인>이 일으킨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된장녀 논란은 내용 자체로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또한 '된장녀'라는 말도 이미 오래 전부터 쓰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된장들의 저녁식사(cafe.daum.net/ihat-edwhenjang)'같은 인터넷 카페 등에서는 한국 여인들을 '된장'으로 표현, 서양 문화를 추종하고 서양 남자라면 맥을 못 추는 한국 여성들을 성토해왔다(월간 말 No. 243, 21세기 된장녀로 부활한 식민지 시대 모던걸)."

   된장녀가 논란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에 <된장녀와 사귈 때 해야 되는 9가지>라는 만화가 올라오면서 부터이다. 몇 몇 누리꾼들이 이 만화를 보고 된장녀에 관심을 보이며 널리 퍼져 나간 것이다. 특히 초기에 된장녀는 디지털 카메라에 찍힌 - 특히 스타벅스로 대표되는 외국 브랜드를 소비하는 - 여성들의 ‘사진’과 함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된장녀는 여성주의 관점에서 쏟아진 분석과 언론의 과잉 보도로 하나의 주류 담론이 되었다.

    된장녀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이다. 첫째, 된장녀는 사치와 허영을 표상하는 (과거부터 있어왔던 문제적 시선의)언표로써만 존재할 뿐 실체가 불분명하다. 둘째, 불분명한 대상이 만화나 사진 등의 영상을 통해서 ‘구체성을 획득’함으로써 명확한 (지배규범을 만들어내는 남성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영상은 대상을 확인 가능한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구체성을 부여한다. 또한 영상은 충격적인 사실성과 구체성으로 사람들을 자극한다. 영상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영상을 통해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한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살해한다. 사람들은 영상의 일차적인 직접성에만 천착함으로써 문자를 타고 넘는 것이 아니라 문자의 프로그램 안으로 흡수된다. 여기서 세 번째 과정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프로그램화된 구조 속으로 그림을 투여함으로써 그림을 보기 ‘전에’ 해석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프로그램을 만드는게 아니라 프로그램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된장녀 사례는 우리 사회가 머물러 있는 기술적 상상력의 단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영상은 문자가 내포한 사고의 결핍을 극복하는 기제가 아니라 그 결핍을 강화시키는 보족물로써 사용되고 있다. 이로써 디지털 카메라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디지털 매체는 대상에 대한 믿음이나 표피적 재현만을 수행함으로써 ‘주술적 상상력’과 조우한다. 이를 퇴행으로 해석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며, 필자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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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천재' - 미술사에는 왜 여성 천재가 없는가?

'왜 천재적인 여성 미술가는 존재하지 않는가?'를 쓴 린다 노클린  예술작품은 배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작품은 누가 창조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예술은 천재가 만든다. 번뜩이는 창작은 범인이 할 수 있는건 아닐테니 말이다. 천재란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미켈란젤로, 다빈치, 고흐, 몬드리안, 피카소 등의 쟁쟁한 예술가들의 이름을 듣고 보면 이 ‘사실’은 좀 더 명확해진다. 린다 노클린은 언뜻보면 당연해 보이는 예술창조와 천재의 관계에 의문을 가진다. 71년 그녀는 ‘왜 천재적인 여성 미술가들은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제목으로 한 논문을 발표한다. 

 

그 잘나신 자칭 천재 살바도르 달리의 책 '나는 천재다'초현실주의 화가 달리는 65년에 스스로 천재라고 자화자찬한 자서전인 <천재의 일기>를 출간했다. 달리는 그 책 속에서 천재미술가 10명을 선정해 천재성의 점수를 매겨 도표로 만들었다. 최고 점수인 20점으로 대상의 영예를 안은 미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 벨라스케스와 베르메르, 피카소였다. 달리는 19점을 얻어 당당하게 6등을 차지하고 있다. 이 천재들의 명단에 여성은 한 명도 없다. 

 

  린다 노클린은 예술이란 오로지 천재적 재능을 지닌 한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성 천재 미술가가 탄생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환경과 교육제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듯 하다. ‘천재는 만들어진다’라고. 

 

  그렇다면 천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예술의 영역에서 천재는 예술이라는 개념이 일상성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특권을 부여받으면서 탄생한다. 이는 근대적 의미에서 주체 혹은 개인의 형성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채 표현의 자유를 부여받고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이들이 천재이다. 그들의 능력, 즉 창조하고, 발명하고, 지배하는 능력은 그들이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개인적 믿음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권리에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러한 권리에의 접근을 우리는 권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의 주체만이 천재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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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 Linda Nochli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by Linda Nochlin

 

 

 

* Linda Nochli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first published in Art News,Vol. 69, No. 9, (January, 1971). Reprinted in Linda Nochlin,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88).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The question tolls reproachfully in the background of most discussions of the so-called woman problem. But like so many other so-called questions involved in the feminist "controversy," it falsifies the nature of the issue at the same time that it insidiously supplies its own answer: "There are no great women artists because women are incapable of greatness."

 

The assumptions behind such a question are varied in range and sophistication, running anywhere from "scientifically proven" demonstrations of the inability of human beings with wombs rather than penises to create anything significant, to relatively open minded wonderment that women, despite so many years of near equality and after all, a lot of men have had their disadvantages too have still not achieved anything of exceptional significance in the visual arts.

 

The feminist's first reaction is to swallow the bait, hook, line and sinker, and to attempt to answer the question as it is put: that is, to dig up examples of worthy or insufficiently appreciated women artists throughout history; to rehabilitate rather modest, if interesting and productive careers; to "rediscover" forgotten flower painters or David followers and make out a case for them; to demonstrate that Berthe Morisot was really less dependent upon Manet than one had been led to think-in other words, to engage in the normal activity of the specialist scholar who makes a case for the importance of his very own neglected or minor master. Such attempts, whether undertaken from a feminist point of view, like the ambitious article on women artists which appeared in the 1858 Westminster Review, or more recent scholarly studies on such artists as Angelica Kauffmann and Artemisia Gentileschi, are certainly worth the effort, both in adding to our knowledge of women's achievement and of art history generally. But they do nothing to question the assumptions lying behind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On the contrary, by attempting to answer it, they tacitly reinforce its negative implications.

 

Another attempt to answer the question involves shifting the ground slightly and asserting, as some contemporary feminists do, that there is a different kind of "greatness" for women's art than for men's, thereby postulating the existence of a distinctive and recognizable feminine style, different both in its formal and its expressive qualities and based on the special character of women's situation and experience.

   

 



This, on the surface of it, seems reasonable enough: in general, women's experience and situation in society, and hence as artists, is different from men's, and certainly the art produced by a group of consciously united and purposefully articulate women intent on bodying forth a group consciousness of feminine experience might indeed be stylistically identifiable as feminist, if not feminine, art. Unfortunately, though this remains within the realm of possibility it has so far not occurred. While the members of the Danube School, the followers of Caravaggio, the painters gathered around Gauguin at Pont-Aven, the Blue Rider, or the Cubists may be recognized by certain clearly defined stylistic or expressive qualities, no such common qualities of "femininity" would seem to link the styles of women artists generally, any more than such qualities can be said to link women writers, a case brilliantly argued, against the most devastating, and mutually contradictory, masculine critical cliches, by Mary Ellmann in her Thinking about Women. No subtle essence of femininity would seem to link the work of Artemesia Gentileschi, Mine Vigee-Lebrun, Angelica Kauffmann, Rosa Bonheur, Berthe Morlsot, Suzanne Valadon, Kathe Kollwitz, Barbara Hepworth, Georgia O'Keeffe, Sophie Taeuber-Arp, Helen Frankenthaler, Bridget Riley, Lee Bontecou, or Louise Nevelson, any more than that of Sappho, Marie de France, Jane Austen, Emily Bronte, George Sand, George Eliot, Virginia Woolf, Gertrude Stein, Anais Nin, Emily Dickinson, Sylvia Plath, and Susan Sontag. In every instance, women artists and writers would seem to be closer to other artists and writers of their own period and outlook than they are to each other.

 

Women artists are more inward-looking, more delicate and nuanced in their treatment of their medium, it may be asserted. But which of the women artists cited above is more inward-turning than Redon, more subtle and nuanced in the handling of pigment than Corot? Is Fragonard more or less feminine than Mme. Vigee-Lebrun? Or is it not more a question of the whole Rococo style of eighteenth-century France being "feminine," if judged in terms of a binary scale of "masculinity" versus "femininity"? Certainly, if daintiness, delicacy, and preciousness are to be counted as earmarks Of a feminine style, there is nothing fragile about Rosa Bonheur's Horse Fair, nor dainty and introverted about Helen Frankenthaler's giant canvases. If women have turned to scenes of domestic life, or of children, so did Jan Steen, Chardin, and the Impressionists Renoir and Monet as well as Morisot and Cassatt. In any case, the mere choice of a certain realm of subject matter, or the restriction to certain subjects, is not to be equated with a style, much less with some sort of quintessentially feminine style.

 

The problem lies not so much with some feminists' concept of what femininity is, but rather with their misconception-shared with the public at large-of what art is: with the naive idea that art is the direct, personal expression of individual emotional experience, a translation of personal life into visual terms. Art is almost never that, great art never is. The making of art involves a self-consistent language of form, more or less dependent upon, or free from, given temporally defined conventions, schemata, or systems of notation, which have to be learned or worked out, either through teaching, apprenticeship, or a long period of individual experimentation. The language of art is, more materially, embodied in paint and line on canvas or paper, in stone or clay or plastic or metal it is neither a sob story nor a confidential whisper.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there have been no supremely great women artists, as far as we know,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interesting and very good ones who remain insufficiently investigated or appreciated; nor have there been any great Lithuanian jazz pianists, nor Eskimo tennis players, no matter how much we might wish there had been. That this should be the case is regrettable, but no amount of manipulating the historical or critical evidence will alter the situation; nor will accusations of male-chauvinist distortion of history. There are no women equivalents for Michelangelo or Rembrandt, Delacroix or Cezanne, Picasso or Matisse, or even, in very recent times, for de Kooning or Warhol, any more than there are black American equivalents for the same. If there actually were large numbers of "hidden" great women artists, or if there really, should be different standards for women's art as opposed to men's--and one can't have it both ways--then what are feminists fighting for? If women have in fact achieved the same status as men in the arts, then the status quo is fine as it is.

 

But in actuality, as we all know, things as they are and as they have been, in the arts as in a hundred other areas, are stultifying, oppressive, and discouraging to all those, women among them, who did not have the good fortune to be born white, preferably middle class and, above all, male. The fault lies not in our stars, our hormones, our menstrual cycles, or our empty internal spaces, but in our institutions and our education-education understood to include everything that happens to us from the moment we enter this world of meaningful symbols, signs, and signals. The miracle is, in fact, that given the overwhelming odds against women, or blacks, that so many of both have managed to achieve so much sheer excellence, in those bailiwicks of white masculine prerogative like science, politics, or the arts.

 

It is when one really starts thinking about the implications of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that one begins to realize to what extent our consciousness of how things are in the world has been conditioned-and often falsified-by the way the most important questions are posed. We tend to take it for granted that there really is an East Asian Problem, a Poverty Problem, a Black Problem and a Woman Problem. But first we must ask ourselves who is formulating these "questions," and then, what purposes such formulations may serve. (We may, of course, refresh our memories with the connotations of the Nazis' "Jewish Problem.") Indeed, in our time of instant communication, "problems" are rapidly formulated to rationalize the bad conscience of those with power: thus the problem posed by Americans in Vietnam and Cambodia is referred to by Americans as the "East Asian Problem," whereas East Asians may view it, more realistically, as the "American Problem"; the so-called Poverty Problem might more directly be viewed as the "Wealth Problem" by denizens of urban ghettos or rural wastelands; the same irony twists the White Problem into its opposite, a Black Problem; and the same inverse logic turns up in the formulation of our own present state of affairs as the "Woman Problem."

 

Now the "Woman Problem," like all human problems, so-called (and the very idea of calling anything to do with human beings a "problem" is, of course, a fairly recent one) is not amenable to "solution" at all, since what human problems involve is reinterpretation of the nature of the situation, or a radical alteration of stance or program on the part of the "problems " themselves. Thus women and their situation in the arts, as in other realms of endeavor, are not a "problem" to be viewed through the eyes of the dominant male power elite. Instead, women must conceive of themselves as potentially, if not actually, equal subjects, and must be willing to look the facts of their situation full in the face, without self-pity, or cop-outs; at the same time they must view their situation with that high degree of emotional and intellectual commitment necessary to create a world in which equal achievement will be not only made possible but actively encouraged by social institutions.

 

It is certainly not realistic to hope that a majority of men, in the arts or in any other field, will soon see the light and find that it is in their own self-interest to grant complete equality to women, as some feminists optimistically assert, or to maintain that men themselves will soon realize that they are diminished by denying themselves access to traditionally "feminine" realms and emotional reactions. After all, there are few areas that are really "denied" to men, if the level of operations demanded be transcendent, responsible, or rewarding enough: men who have a need for "feminine" involvement with babies or children gain status as pediatricians or child psychologists, with a nurse (female) to do the more routine work; those who feel the urge for kitchen creativity may gain fame as master chefs; and, of course, men who yearn to fulfill themselves through what are often termed "feminine" artistic interests can find themselves as painters or sculptors, rather than as volunteer museum aides or part-time ceramists, as their female counterparts so often end up doing; as far as scholarship is concerned, how many men would be willing to change their jobs as teachers and researchers for those of unpaid, part-time research assistants and typists as well as full-time nannies and domestic workers?

 

Those who have privileges inevitably hold on to them, and hold tight, no matter how marginal the advantage involved, until compelled to bow to superior power of one sort or another.

 

Thus the question of women's equality--in art as in any other realm--devolves not upon the relative benevolence or ill-will of individual men, nor the self-confidence or abjectness of individual women, but rather on the very nature of our institutional structures themselves and the view of reality which they impose on the human beings who are part of them. As John Stuart Mill pointed out more than a century ago: "Everything which is usual appears natural. The subjection of women to men being a universal custom, any departure from it quite naturally appears unnatural."' Most men, despite lip service to equality, are reluctant to give up this "natural" order of things in which their advantages are so great; for women, the case is further complicated by the fact that, as Mill astutely pointed out, unlike other oppressed groups or castes, men demand of them not only submission but unqualified affection as well; thus women are often weakened by the internalized demands of the male-dominated society itself, as well as by a plethora of material goods and comforts: the middle-class woman has a great deal more to lose than her chains.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is simply the top tenth of an iceberg of misinterpretation and misconception; beneath lies a vast dark bulk of shaky idees recues about the nature of art and its situational concomitants, about the nature of human abilities in general and of human excellence in particular, and the role that the social order plays in all of this. While the "woman problem" as such may be a pseudo-issue, the misconceptions involved in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points to major areas of intellectual obfuscation beyond the specific political and ideological issues involved in the subjection of women. Basic to the question are many naive, distorted, uncritical assumptions about the making of art in general, as well as the making of great art. These assumptions, conscious or unconscious, link together such unlikely superstars as Michelangelo and van Gogh, Raphael and Jackson Pollock under the rubric of "Great"-an honorific attested to by the number of scholarly monographs devoted to the artist in question-and the Great Artist is, of course, conceived of as one who has "Genius"; Genius, in turn, is thought of as an atemporal and mysterious power somehow embedded in the person of the Great Artist.' Such ideas are related to unquestioned, often unconscious, meta-historical premises that make Hippolyte Taine's race-milieu-moment formulation of the dimensions of historical thought seem a model of sophistication. But these assumptions are intrinsic to a great deal of art-historical writing. It is no accident that the crucial question of the conditions generally productive of great art has so rarely been investigated, or that attempts to investigate such general problems have, until fairly recently, been dismissed as unscholarly, too broad, or the province of some other discipline, like sociology. To encourage a dispassionate, impersonal, sociological, and institutionally oriented approach would reveal the entire romantic, elitist, individual-glorifying, and monograph-producing substructure upon which the profession of art history is based, and which has only recently been called into question by a group of younger dissidents.

 

Underlying the question about woman as artist, then, we find the myth of the Great Artist-subject of a hundred monographs, unique, godlike-bearing within his person since birth a mysterious essence, rather like the golden nugget in Mrs. Grass's chicken soup, called Genius or Talent, which, like murder, must always out, no matter how unlikely or unpromising the circumstances.

 

The magical aura surrounding the representational arts and their creators has, of course, given birth to myths since the earliest times. Interestingly enough, the same magical abilities attributed by Pliny to the Greek sculptor Lysippos in antiquity--the mysterious inner call in early youth, the lack of any teacher but Nature herself--is repeated as late as the nineteenth century by Max Buchon in his biography of Courbet. The supernatural powers of the artist as imitator, his control of strong, possibly dangerous powers, have functioned historically to set him off from others as a godlike creator, one who creates Being out of nothing. The fairy tale of the discovery by an older artist or discerning patron of the Boy Wonder, usually in the guise of a lowly shepherd boy, has been a stock-in-trade of artistic mythology ever since Vasari immortalized the young Giotto, discovered by the great Cimabue while the lad was guarding his flocks, drawing sheep on a stone; Cimabue, overcome with admiration for the realism of the drawing, immediately invited the humble youth to be his pupil. Through some mysterious coincidence, later artists including Beccafumi, Andrea Sansovino, Andrea del Castagno, Mantegna, Zurbardn, and Goya were all discovered in similar pastoral circumstances. Even when the young Great Artist was not fortunate enough to come equipped with a flock of sheep, his talent always seems to have manifested itself very early, and independent of any external encouragement: Filippo Lippi and Poussin, Courbet and Monet are all reported to have drawn caricatures in the margins of their schoolbooks instead of studying the required subjects-we never, of course, hear about the youths who neglected their studies and scribbled in the margins of their notebooks without ever becoming anything more elevated than department-store clerks or shoe salesmen. The great Michelangelo himself, according to his biographer and pupil, Vasari, did more drawing than studying as a child. So pronounced was his talent, reports Vasari, that when his master, Ghirlandalo, absented himself momentarily from his work in Santa Maria Novella, and the young art student took the opportunity to draw "the scaffolding, trestles, pots of paint, brushes and the apprentices at their tasks" in this brief absence, he did it so skillfully that upon his return the master exclaimed: "This boy knows more than I do."

 

As is so often the case, such stories, which probably have some truth in them, tend both to reflect and perpetuate the attitudes they subsume. Even when based on fact, these myths about the early manifestations of genius are misleading. It is no doubt true, for example, that the young Picasso passed all the examinations for entrance to the Barcelona, and later to the Madrid, Academy of Art at the age of fifteen in but a single day, a feat of such difficulty that most candidates required a month of preparation. But one would like to find out more about similar precocious qualifiers for art academies who then went on to achieve nothing but mediocrity or failure--in whom, of course, art historians are uninterested--or to study in greater detail the role played by Picasso's art-professor father in the pictorial precocity of his son. What if Picasso had been born a girl? Would Senor Ruiz have paid as much attention or stimulated as much ambition for achievement in a little Pablita?

 

What is stressed in all these stories is the apparently miraculous, nondetermined, and asocial nature of artistic achievement; this semireligious conception of the artist's role is elevated to hagiography in the nineteenth century, when art historians, critics, and, not least, some of the artists themselves tended to elevate the making of art into a substitute religion, the last bulwark of higher values in a materialistic world. The artist, in the nineteenth-century Saints' Legend, struggles against the most determined parental and social opposition, suffering the slings and arrows of social opprobrium like any Christian martyr, and ultimately succeeds against all odds generally, alas, after his death-because from deep within himself radiates that mysterious, holy effulgence: Genius. Here we have the mad van Gogh, spinning out sunflowers despite epileptic seizures and near-starvation; Cezanne, braving paternal rejection and public scorn in order to revolutionize painting; Gauguin throwing away respectability and financial security with a single existential gesture to pursue his calling in the tropics; or Toulouse-Lautrec, dwarfed, crippled, and alcoholic, sacrificing his aristocratic birthright in favor of the squalid surroundings that provided him with inspiration.

 

Now no serious contemporary art historian takes such obvious fairy tales at their face value. Yet it is this sort of mythology about artistic achievement and its concomitants which forms the unconscious or unquestioned assumptions of scholars, no matter how many crumbs are thrown to social influences, ideas of the times, economic crises, and so on. Behind the most sophisticated investigations of great artists-more specifically, the art-historical monograph, which accepts the notion of the great artist as primary, and the social and institutional structures within which he lived and worked as mere secondary "influences" or "background"-lurks the golden-nugget theory of genius and the free-enterprise conception of individual achievement. On this basis, women's lack of major achievement in art may be formulated as a syllogism: If women had the golden nugget of artistic genius then it would reveal itself. But it has never revealed itself. O.E.D. Women do not have the golden nugget theory of artistic genius. If Giotto, the obscure shepherd boy, and van Gogh with his fits could make it, why not women?

 

Yet as soon as one leaves behind the world of fairy tale and self-fulfilling prophecy and, instead, casts a dispassionate eye on the actual situations in which important art production has existed, in the total range of its social and institutional structures throughout history, one finds that t he very questions which are fruitful or relevant for the historian to ask shape up rather differently. One would like to ask, for instance, from what social classes artists were most likely to come at different periods of art history, from what castes and subgroup. What proportion of painters and sculptors, or more specifically, of major painters and sculptors, came from families in which their fathers or other close relatives were painters and sculptors or engaged in related professions? As Nikolaus Pevsner points out in his discussion of the French Academy in the seventeenth and eighteenth centuries, the transmission of the artistic profession from father to son was considered a matter of course (as it was with the Coypels, the Coustous, the Van Loos, etc.); indeed, sons of academicians were exempted from the customary fees for lessons. Despite the noteworthy and dramatically satisfying cases of the great father-rejecting revoltes~s of the nineteenth century, one might be forced to admit that a large proportion of artists, great and not-so-great, in the days when it was normal for sons to follow in their fathers' footsteps, had artist fathers. In the rank of major artists, the names of Holbein and Durer, Raphael and Bernim, immediately spring to mind; even in our own times, one can cite the names of Picasso, Calder, Giacometti, and Wyeth as members of artist-families.

 

As far as the relationship of artistic occupation and social class is concerned, an interesting paradigm for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might well be provided by trying to answer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artists from the aristocracy?" One can scarcely think, before the anti traditional nineteenth century at least, of any artist who sprang from the ranks of any more elevated class than the upper bourgeoisie; even in the nineteenth century, Degas came from the lower nobility more like the haute bourgeoisie, in fact-and only Toulouse-Lautrec, metamorphosed into the ranks of the marginal by accidental deformity, could be said to have come from the loftier reaches of the upper classes. While the aristocracy has always provided the lion's share of the patronage and the audience for art-as, indeed, the aristocracy of wealth does even in our more democratic days-it has contributed little beyond amateurish efforts to the creation of art itself, despite the fact that aristocrats (like many women) have had more than their share of educational advantages, plenty of leisure and, indeed, like women, were often encouraged to dabble in the arts and even develop into respectable amateurs, like Napoleon III's cousin, the Princess Mathilde, who exhibited at the official Salons, or Queen Victoria, who, with Prince Albert, studied art with no less a figure than Landseer himself. Could it be that the little golden nugget-genius-is missing from the aristocratic makeup in the same way that it is from the feminine psyche? Or rather, is it not that the kinds of demands and expectations placed before both aristocrats and women-the amount of time necessarily devoted to social functions, the very kinds of activities demanded-simply made total devotion to professional art production out of the question, indeed unthinkable, both for upper-class males and for women generally, rather than its being a question of genius and talent?

 

When the right questions are asked about the conditions for producing art, of which the production of great art is a subtopic, there will no doubt have to be some discussion of the situational concomitants of intelligence and talent generally, not merely of artistic genius. Piaget and others have stressed in their genetic epistemology that in the development of reason and in the unfolding of imagination in young children, intelligence or, by implication, what we choose to call genius-is a dynamic activity rather than a static essence, and an activity of a subject in a situation. As further investigations in the field of child development imply, these abilities, or this intelligence, are built up minutely, step by step, from infancy onward, and the patterns of adaptation-accommodation may be established so early within the subject-in-an-environment that they may indeed appear to be innate to the unsophisticated observer. Such investigations imply that, even aside from meta-historical reasons, scholars will have to abandon the notion, consciously articulated or not, of individual genius as innate, and as primary to the creation of art.'

 

The question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has led us to the conclusion, so far, that art is not a free, autonomous activity of a super-endowed individual, "Influenced" by previous artists, and, more vaguely and superficially, by "social forces," but rather, that the total situation of art making, both in terms of the development of the art maker and in the nature and quality of the work of art itself, occur in a social situation, are integral elements of this social structure, and are mediated and determined by specific and definable social institutions, be they art academies, systems of patronage, mythologies of the divine creator, artist as he-man or social outcast.

 

Extract from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 Westview Press, 1988 by Linda Nochlin, pp.147-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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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총장 박씨의 잃어버린 60년

 

   위 사진은 사진작가 이경모씨가 1951년 6월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이기붕이 무쵸대사와 콜트 중장을 '모셔다' 놓고, 이화여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최정무는 '미국, 무의식의 식민화 그리고 자기분열'이라는 글에서 이 사진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그는 적산가옥의 다다미 위에서, 구두와 군화를 그대로 신고 방안으로 들어온 무쵸대사와 콜트 중장 앞에서 식민화의 현실을 읽어낸다. 이 사진 속에서 보이는 식민화는 단지 외세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문지방 바깥에 서서 마치 스크린 속 배우들처럼 노래 부르는 여대생들의 모습 속에서 다른 종류의 식민화를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협상의 매개로 등장했다 사라지는 대상화된 -과정에는 등장하지만 결정에서는 누락된-여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사진은 단지 씁쓸한 과거의 초상일 뿐일까? 아닌것 같다. 이번에도 여전히 그 출중한 무식과 비루함을 자랑해주신 중앙대 박범훈 총장을 보니 1951년 6월이나 2009년 2월이나 상황은 별로 변하지 않은것 같다. 박'씨'는 한나라당 내 의원 모임인 '국민통합포럼'이 공동주최한 MB출범 1주년 기념 초청 강연회에서 '풍류를 알아야 정치를 잘 한다'라는 어이 없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국악인인 자신은 풍류를 잘 아니 정치도 잘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나 보다. 좀 측은하긴 하다. MB캠프 문화예술정책위원장을 지내고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까지 했음에도 그럴듯한 자리 하나 못 얻어 먹었으니 말이다. 

 

 

   정치할 그릇이 못되는 것 쯤은 한나라당이나 MB도 알고 있었던게 아닐까? 그래도 한자리 앵버리 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나보다. 못내 아쉬웠던지 박'씨'는 결국 제자들 데려다가 노래 시키고, 여학생에게 '감칠맛'이 난다는 둥 , 예쁜 여자들을 돗보이게 하기 위해서 '못난 사람 갖다' 놓으면 된다는 둥 의원들 비위나 맞추려고 저질 농담까지 하게 됐다. 잃어버린 10년을 찾겠다는 정권이나 그 정권에 빌붙겠다고 60년을 잃어버리는 사람이나 한심해 보이기는 매 한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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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 임동근

이 글은 지난 2009년 2월 20일에 있었던 '문화/과학' 집담회에서 임동근 선생님이 발표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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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도시와 통치성: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본 대도시

 

 

“통치불가능한 사회들?” 2005년 11월 푸코의 통치성 강의를 되짚어 보는 『에스프리』 잡지의 권두 제목이다. 2004년 10월 푸코의 강의록 중 『치안, 영토, 인구』와 『생정치의 탄생』의 출간으로, 그 동안 푸코의 저작에서 한발 비켜가 있던 많은 이들이 푸코의 글에 관심을 갖게 된다. 68혁명과 그 이후 전개되던 소비자본주의의 만개, 1970년대 좌파이론의 붕괴와 뒤이어 온 80년대의 신자유주의 출현, 90년대의 사회주의국가의 몰락과 2000년대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푸코의 강의는 아주 원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우리를 통치하는 ‘이성’이 있다.” 통치이성은 17세기 이후, 근대라 불리는 현 세상을 지배하며, 다양한 ‘통치 실천들’을 행한다. 이 실천이 사용하는 것이 ‘장치들’이며, 이는 ‘기구’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순수한” 기계이다.

 

통치이성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통치가능하게 만들기. 통치이성은 통치의 정당성 문제가 아니라 통치의 방식을 따진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으며, 오직 계산할 뿐이다’라는 테오도르 슐츠(Theodore W. Schultz)의 인간관처럼 통치이성은 ‘통치’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이성’이다. 통치실천들은 이 이성에 따라 탄생된다/현실화되고, 각각 지배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도시정책을 예로 든다면 ‘통치가능한 도시인구’를 위한 각종 ‘실천들’이 있고, 이 실천들을 작동시키는 지배적인 ‘장치들’이 있는 셈이다.

 

 

1. ‘장치’라는 개념

 

푸코가 말하는 ‘장치’(dispositif)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성적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사법장치, 또 가장 일반적으로는 권력장치라는 말을 한다. 이 개념에서의 핵심은 ‘하나의 장치는 하나의 기능을 담당하고, 이를 위해 다양한 선분들이 결합된다’는 점이다. 권력의 장치들은 저마다 맡은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 법률, 이데올로기, 물리력, 지식, 기타 등등 무한한 종류의 요소들이 결합된 기계가 된다. 예를 들어 ‘치안장치’는, 경찰의 방패나 재판관의 의자 등, 치안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요소들이다. 이는 알튀세가 말한 ‘국가기구’에서의 ‘기구’와 다르다.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국가의 ‘기구’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푸코는 이들을 횡단하는 보다 유연한 ‘장치’들이 권력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즉, ‘국가의 기구’가 아니라 ‘권력의 장치들’이 문제가 된다.

 

『말과 사물』에서 선보인 ‘에피스테메’라는 개념 또한 넓은 의미의 ‘장치’가 되고, 『감시와 처벌』의 규율 또한 ‘장치’의 일종이 된다. 푸코는 1976~78년 강의에서 세 종류의 ‘장치’를 설명한다. 사법, 규율, 치안. 각각의 장치들을 범주화하는 기준은 ‘현실’이다. 사법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해서 처벌규정을 만들고, 규율은 현실에서 부족한 부분을 완성시키고자 하며, 치안은 현실이 있어야만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이 때 권력의 실천들이 이 장치들을 사용하는 기준은 ‘경제성’이다. 흔히 ‘권력의 일반 경제학’이라 불리는 푸코의 이 전제, 이를 통해 우리는 통치는 언제나 ‘통치비용’을 고려하며, 잘못된 통치 실천에 따른 초과 비용이 권력관계들을 뒤집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장치’ 개념은 현실 속에서 모호하다. 예를 들어 도시의 건축행위를 제한하는 법들과 실천들을 장치를 통해 해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학교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고 말하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은폐된 권력 통치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는 없겠지만 받아들이기는 쉽다. 그러나 푸코의 장치로 학교를 설명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규율장치인가 아니면 치안장치인가? 푸코의 답은 학교라는 시설 혹은 제도에서 장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치개념의 한 요소로서 학교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시설 혹은 제도에서 권력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더 나아가 이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제도의 틀을 만든 또 다른 지식-권력 안에 갇힌다. 학교가 교육기관인 것만도 아니고, 교육기관에 학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이들을 지지하는 지식은 이들 외부에서 결정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방식으로 인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다른 이가 사용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예를 들어 통치실천들을 말하면서도 자신은 정부의 통치실천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푸코는 통치성을 설명하며 다양한 현실의 제도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제도를 설명하기 위해 푸코의 통치성을 말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설정이다. 푸코의 전작에서 나타나는 이 난점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푸코를 재미있게 읽지만 정작 푸코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리학 또한 예외가 아닌데, 결국 푸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짝사랑’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학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주권-영토, 규율-공간, 치안-환경, 푸코가 장치를 설명할 때 시도한 이 세 가지 연결을 발견한다. 주권은 영토의 위계를 생산하고 이를 토대로 주권을 뒷받침해주는 자본을 순환시킨다. 규율은 기능에 따라 공간을 건축하며, 이로 인해 차별화된 공간들이 생산된다. 치안은 다양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을 조절하며 환경을 관리한다. 푸코는 우리가 사는 공간을 각각의 장치에 조응하는 세 개념, 영토, 공간, 환경을 설정한다. 그러나 문제는 영토의 기의는 권력장치라는 기표를 초월한다는 점, 즉 영토 속에는 사법장치, 규율장치, 치안장치 등이 혼재하며, 영토 또한 치안장치에 의해 통치화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치들과 공간들을 조합하여 현재의 통치 실천들을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2. 계보학

 

1972년 CERFI의 토론에서 푸코는 ‘집합시설’ 프로젝트 제안서를 읽고 다음과 같은 계보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집합시설의 전유와 소유는 다르다. 누구의 소유인가?

둘째, 집합시설의 기능은 누군가에게 서비스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왜? 사용하는 이들은 왜?

셋째, 집합시설은 생산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무슨 유형의 생산?

넷째, 집합시설의 존재와 기능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는?

다섯째, 계보학적인 함의. 이로부터 어떻게 특정 효과들이 달라지기 시작하는가? 이미 있던 다리, 제분소 등 여러 시설들이 집합시설로 변하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통치 실천들은 이들이 맡은 기능을 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다. 도시계획을 분석하고자 할 때 도시계획에 현재 담당하는 기능들, 전체 도시체계에서 수행하는 역할들을 본다면, 우리는 이미 담당하도록 구획된 틀 안에서의 타당성, 실효성 검사만을 반복할 뿐이다. “탄생은 기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도시계획을 만들고, 이를 따르게 억압하고, 또 이를 기꺼이 따르도록 만드는 힘들이다. 바로 이 지점이 ‘장치’가 개입하는 순간이다. 통치실천들, 특정 제도나 기구들의 탄생은 권력 장치의 (구성)변화를 의미한다. 학교라는 시설 혹은 의무교육제도 등을 보기 위해서는 그 탄생의 시점에서 달라진 장치들을 추적해야 한다. 들뢰즈는 이를 ‘현실화’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한때 유행했던 ‘탄생’, ‘발명’ 시리즈의 책들을 떠올려보자.)

 

계보학적인 접근이 가진 매력은 연구의 출발 시점 그 이전에 이미 연구의 목적이 되는 ‘의도’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막연히 제도의 탄생을 훑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탄생을 야기한 그 ‘무엇’에 대한 동인이 우선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도시 속의 통치실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 이전에 그것이 ‘자본주의 분석’이 되었든 아니면 ‘자유주의 분석’이 되었든, 각 실천들의 영역을 초월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자본의 탄생을 보는 것은 ‘자본’의 외부를 보고자 함이며, 도시의 탄생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때 이중의 이질적 결합이 상정된다. 실천들은 이질적인 장치를 가지고, 각각의 장치 내부 또한 이질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푸코의 접근방법 때문에 통치성 개념을 ‘제도 및 시설 연구’로 한정할 때면 어려움에 처한다. 푸코의 권력 분석이라는 큰 틀에서 나타나는 ‘장치들’, 이를 사용하는 실천들은 외부와 연결을 잃어버리는 순간 실천과 장치들의 스틸사진만을 나열하는 일종의 표로 전락해버린다.

 

 

3. 대도시의 문제설정

 

푸코가 치안장치 개념을 고안한 것은 도시 인구의 통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18세기 이후 도시, 혹은 영토를 사유할 때의 강박관념은 인구와 재화의 ‘순환’이었다. 이 때 푸코의 관점에서 이동하는 인구를 통치함에 있어서 규율 메커니즘은 효율성이 떨어진다. 즉,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통치술과는 전혀 다른 통치이성이 출현했다. “통치는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도시의 예를 든다면, ‘도시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토가 통치의 대상이 되는가의 논의는 잠시 뒤로 미룬다.) 대도시는 이러한 조절, 관리의 문제가 가장 지배적인 장이다. 대도시는 계획인구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인구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학에서 제공하는 지식에 따라, 지대, 생산성 등의 지표들에 따라 끊임없이 반응해야만 한다.

 

치안장치가 두드러지는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을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우선, 대도시의 계보학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거대도시들은 있었지만, 현재 우리가 메트로폴리스라 불리는 대도시는 어떻게 출현했는가? 누가 만들었는가? 등등의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만일 소련의 모스코바라면 인구를 재배치시키고자 하는 국가기구들을 분석해야 할 것이고, 아나톨 콥(Anatole Kopp)의 ‘혁명도시’가 바로 그런 접근방법을 취한다. 반면 자본주의 도시라면 자본주의가 대도시를 만든 방식들과 그것을 둘러싼 권력관계들을 볼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대도시가 인구를 흡입하고 난 후에야 통치이성이 작동하여, “어떻게 이 많은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대도시 주변의 공장에 노동자들이 정착한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고, 이때부터 도시의 폭동은 계급투쟁으로 변화한다. 따라서 ‘도시인구를 통치하는가’의 질문 이전에 ‘도시인구들이 왜 정착하게 되었는가’가 앞서 제기되어야 한다. 과잉도시화가 사회의 병폐라고 언급되다가 이후 대도시가 생산기지라고 찬양되는 것에서 보듯이, 대도시라는 장치가 작동하는 효과들이 존재한다.

두 번째로, 통치 대상으로서의 ‘인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이후 통치이성이 출현하게 된 근본적인 토대는 국민국가의 안정된 영토설정이었다. 국민국가간의 외부적 안정성과 내부적 경찰국가화, 이를 통한 인구의 등록 및 생산자원화는 국가자본주의가 기능할 수 있었던 핵심이었다. 반면 대도시는 안정된 ‘인구’를 확보하지 못한다. 따라서 대도시의 통치실천들은 국민국가 영토에서 기능하는 통치실천들과는 다르다. 바로 이 점에서 세계화 이후 국가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화된다고 논의된다. 즉, 대도시의 통치는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대도시권, 크고 작은 자치정부들로 구성된 대도시권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 장치’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타국적자의 노동이 결합되는 대도시의 기능들이 증가하는 이유, 또 그로인해 국민국가의 통치실천이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 또한 주요 이슈들이다.

 

세 번째로, 자유로운 인적 물적 순환 그자체로 대도시 인구는 끊임없이 정상화과정을 겪음에도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들을 보아야 한다. 익명의 도시이지만 이 속에서, 가족과 이웃들, 더 나아가 여러 사회집단들이 통치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담당하는 ‘시민사회’를 만드는 방식은 사회학의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농촌과 다른 방식으로 도시의 사회가 기능하는 양상들은 무엇인가?” 푸코의 질문을 여기에 추가한다면 권력의 장치로서의 시민사회의 계보학이다. 아파트 단지, 교육시스템, 할인점, 자동차도로, 등등 대도시 장치를 분석하지 않으면 ‘재래시장 살리기’ 혹은 ‘재건축 반대운동’과 같은 것들은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4인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 장치의 한 요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한 기존의 국가-시민사회의 대항을 설정하는 것은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의 딱지를 붙은 아파트 단지, 삼성아파트, 여기에 국가 주도의 반상회, 이들이 거부하는 자본가 기업들과 재산증식이 될 수 있는 재건축 반대, 또 소각장 반대와 같은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운동, 등등.

 

마지막으로, 대도시를 자연적인 것으로, 그 자연성을 설정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권력-지식들을 살펴봐야 한다. 예를 들어 자유주의의 큰 주제 중 하나가 개인의 욕망이 모여 어떻게 자본의 이익이라는 ‘공익’으로 수렴되는가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를 자본-국가-개인-사회라는 네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정치경제학이 개인-자본-국가를 연결한다면 사회학은 개인-사회-국가를 담당했다. 정치경제학은 시장이라는 ‘진실체제’를 통해 상품의 가격 조절, 상품의 분배 양태를 정당화시켰다면, 사회학은 ‘시민사회’라는 ‘상식-문화’를 통해 개인의 행동들을 조절했다. 대도시에서는 ‘도시학’이라 부를 수 있는 지식체가 존재하며, 이들은 대도시인구를 통치하는 이성이 끊임없이 참조해야 하는 지식망들을 생산한다. 이 지식망들이 ‘삶의 질’, ‘도시경쟁력’, 등등 지금 현재의 모습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파악하고 통치실천들이 개입해야 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앞선 대도시의 문제설정을 서울에 적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1) 대도시화: 서울에 인구가 정착하는 과정들에 대한 연구. 농촌인구의 정착, 이주노동자, 등.

2) 인구: 유동적 인구를 통치하는 방식. 수도권에 거주하는 서울 노동인구를 통치하는 장치들. 광역지하철, 지방자치단체선거, 거버넌스, 등등.

3) 사회운동: 주택단지 내에서의 공동체 형성. 전통적이고 친밀한 공동체가 아니라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이를 기능하게 만드는 공동체들. 만일 광우병 반대운동을 거부한 정부는 시민사회를 통한 통치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부당한’통치가 아니라 ‘실패한 통치’가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 통치이성에 대한 비판이 없는 정부에 대한 비판은 자유주의 통치를 강화할 수 있다.

4) 지식: 서울을 연구하는 학문들,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들과 통치성간의 관계. 정부가 통치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재조정되는 인구들을 뒷받침하는 지식들.

 

 

4. 남겨진 질문들

 

■ 인구와 계급: 통치성의 대상은 ‘인구/사물’이다. 여기에는 인구와 사물은 별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를 설명하며 푸코는 맑스의 ‘계급’은 인구가 형성되는 당시의 권력관계를 ‘계급’으로 치환해버렸다고 비판한다. 이를 더 연장하면 인구는 통치이성의 대상으로, 계급은 그 통치실천의 한 양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구가 계급으로 형성되는 과정은 푸코의 통치성 논의에서 주변부에 위치한다.

 

■ 자본과 통치성: 반면 통치이성의 출현은 ‘생산체제’라는 물적 토대의 변화에서 기인한다. 통치이성은 철저히 자본의 계보학과 연결되어 있다. 푸코는 이를 설명하며 통치는 결코 경제에 종속된 것도 아니고 경제를 종속하는 것도 아닌, 경제와 병렬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과 계급, 그 이전에 자본-통치성-인구라는 계열이 제시된다. 계급은 인구를 통치하는 시민사회의 한 양상인가?

 

■ 국가와 인구: 국가의 위기, 국가주도 발전, 등등 국민국가 담론의 토대는 인구의 포획/기입이다. 통치성 개념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주의 발전의 부침 속에서 최종적으로 인구를 포획하게 된다. 즉, 자본의 위기 시 국가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통해 과잉인구를 흡수하기도, 전쟁을 통해 제거하기도 하는 등, 자본축적을 인구의 측면에서 뒷받침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현재 유럽 연합에서의 국가 위기 담론도 더 이상 국가가 자본의 위기시 인구를 안정적으로 포획하지 못하는 상황(노동력의 자유로운 월경이 자본축적을 방해하는 상황)이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유럽이 하나의 국가가 되는 방식, 이로 인한 인구의 새로운 정착이다.

 

■ 대도시와 장치: 통치화된 국가가 존재하듯이 통치화된 대도시정부 또한 존재하는가? 혹은 대도시는 통치실천의 한 장치인가? 이는 대도시가 있기에 가능한 통치효과들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공업도시의 경우 존재하는 통치효과, 실리콘 밸리의 통치효과는 밝히기 용이한 반면, 세계 수위도시들 이외의 대도시들의 효과는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 국가 내 중소도시가 망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세계적 차원에서의 대도시들이 망하는 것을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렇지 않다면 적절한 규모로 감소하는 대도시들 간의 위계화가 가진 효과는 무엇인가?

 

■ 통치성과 사회운동: 앞서 광우병 반대를 언급했듯이 푸코에게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반동이다. 사회운동은 정치경제학이 물가 폭등과 같은 ‘비정상’ 신호를 내보내는 것과 같이 정치적 지지기반의 ‘비정상’ 신호를 표출하는 ‘진리체제’이다. 정치경제학이 지식을 동원해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들듯이 ‘시민사회’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것들의 정상화라는 지식-권력이 시민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또한 시민사회와 사회운동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푸코 자신도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듯이 통치이성을 전복하는 운동의 방식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새로운 통치: 푸코 말기에 집착했던 ‘자기로부터의 통치’. 자유주의 통치이성의 비판에서 더 나아가 푸코가 주장하는 통치방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진리’라는 테제를 통해 이를 주장했고, 뒤이어 그리스 철학에서 이를 찾아보고자 했지만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 계보학적인 접근방법이 가진 효용과 한계를 논할 필요가 있다. 자본의 계보학을 연구한다는 것이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 통치하다 - gouverner / 통치술 art de gouverner

• 통치가능한 - gouvernable

• 통치 - gouvernement / (a) gouvernemental

• 통치성 - gouvernementalité

• 통치화하다/되다 - gouvernementaliser /gouvernementalis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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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의 히스테리 :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 유죄 판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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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광우병 사태를 계기로 조,중,동 광고 게제 중단 운동을 벌인 네티즌 24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2009년 2월 19일의 일이다. 이 날짜가 놀라운 것은 아직도 기초적인 언론 소비자 운동조차 거부당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지랄 맞은 정치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날짜는 별로 놀라운 것이 아니기도 하다.


판결의 핵심 근거는 '업무방해’이다. 자본과 국가의 자기 유지 활동을 방해했으니 당연히 업무방해죄 성립이다. 잉여가치 창출과 그를 위한 경제외적 강제 행위는 자본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활동이다. 때문에 국가 정책 선동자 역할을 해왔던 언론사의 근간을 흔드는 운동들에 대한 그들의 히스테리적인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그들은 이런 반응 자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적이다) 이러한 반응은 평상시에 잠재되어 있지만, 위기라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그 존재론적 근원을 드러내고 만다. 그 근원은 바로 자본과 국가의 생존이 시민에 대한 착취와 약탈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히스테리적 판결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착취와 약탈이라는 정치적 실재이다.


그러나 자본과 국가의 히스테리적 반응이 어떤 특정한 위기 상황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임기응변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는 활용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조작될 수도 있)는 상태(state)이다.


언론과 교육은 이 정부가 취임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영역이다. 그것들에 대한 지배는 장악 과정에서의 직접적인(그래서 단기적일수밖에 없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권력 재생산의 자원이 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하지 않고 그들을 노동자의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착취하며, 정치가들은 개별적인 주체들을 민족이나 국가에 소속된 것으로 호명함으로써 지배한다. 즉 그들은 각 개인들이 타자의 그늘 아래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는 정치적 주체임을 명확히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조건들은 억압적 국가장치(구속, 수배, 구타 등의 물리적 폭력)에 기반해서 마련되고 유지되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은폐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이데올로기적 과정을 통해 자체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이번 판결처럼 유치한(이건 논리나 상식 보다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싸움처럼 보인다) 사건조차도 단순히 ‘이 정권이 정말 후지다’고 욕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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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릴적 교과서에서 삼권분립이라는 것을 본적이 있다. 입법, 사법, 행정이 나뉘어져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독재가 불가능하고 민주적인 질서가 유지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소한데서 서로를 견제하되 정말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의 단결력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이었던 것이다.(그들은 정말로 정치의 전문가들이다. 베버가 말했듯이 전문가란 작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커다란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입,사,행간이건 정당간이건 그들의 견제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나 타협을 통해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여기에 현 정치체제의 핵심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현 정치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은 개별적 정치 주체들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실제로 정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구속된 24인은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정치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거래는, 실은 소위 신성한 권리를 가졌다고 상정되는 개별적인 정치 주체들을 도매금으로 처리하는 거래이다. 즉, 정치는 갈등, 견제, 균형, 타협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일종의 거래인데, 문제는 그것이 내가 없는 곳에서 (내 의지와 상관 없이)나를 거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선거라는 것은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에 나를 위치시키는 과정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은폐시키는 교묘한 장치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 있으면 다시 포스팅 하도록 하겠다)


나는 지금 현 정치의 문제를 단순히 대중 참여의 문제로 환원하기 위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정치, 그러니까 정치가(주체)의 진실은 정치가(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구속된 24인 혹은 나 혹은 정치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정치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대상화되어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의 영역에서 주체(정치가) 역시 스스로 존립할 수 없음을, 즉 대상(우리들) 없이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쌩뚱맞게도 오늘은 여기서 끝. 뒷이야기를 하려면  책 좀 더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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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도 풍경

 

 

 

 

이제 곧 MB 취임 1주년이다.

 

그 1년의 풍경이다.

 

재미 있고,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사실...

 

 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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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블랙25 프로젝트 - 25일 하루는 검은 옷을 입으세요~~

함께하는시민행동이 제안하신 캠페인입니다.

 

아고라 토론방 제안문  바로가기

MB블랙25 프로젝트 블로그 바로가기








MB블랙25 프로젝트
MB 1주년, 25일 하루는 검은 옷을 입읍시다

"2월 25일, MB 1주년에 검은 옷을 입어요"
"MB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었던 우리들의 드레스코드는 블랙"
"MB 때문에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사람들의 속풀이 한마당"
"MB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연대, MB블랙 플래쉬몹"



혹시 2월 25일(수)이 무슨 날인줄 아시나요?
기억하기 싫으실지 모르지만 MB가 취임한지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1년은 어땠나요? 1년이 왜 이렇게 긴가요?
도대체 1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나를 생각해보면 끔찍하기만 합니다.

MB 정부와 한나라당은 취임 1주년을 맞아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하겠지요? 그들은 축하하겠지만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광우병 파동, 민주주의 후퇴, 역사 퇴보, 경제 위기, 인권의 박탈, 실업자 대란, 시민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 용산 참사 . . . 정말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MB 1년 되는 날이 축하할 날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날을 맞아 우리들만의 이벤트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MB 당신은 이미 틀렸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며, 분명 역사가 진실을 드러내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항의하는 이벤트를 제안합니다.

2월 25일(수), MB 1년이 되는 날,
우리 모두 검은 옷을 입어보는건 어떨까요? 일명 블랙투쟁입니다.

이 제안에 공감하시면 아래 [찬성버튼] 꾸욱 눌러주세요.


지난 1년간 MB 때문에 검은 옷이 자주 등장했습니다. 방송 장악에 항의하는 앵커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뉴스를 진행했고, 일제 고사에 반대하는 교사들도 검은 옷을 입고 출근했습니다. 용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족들도 검은 소복을 입고 정부에 항의하고 있습니다.

검은색은 항의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희망의 빛을 살려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는 블랙투쟁을 '무게 있는 시위, 암묵적인 반대, 점잖은 투쟁'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MB 취임 1년을 맞아 2월 25일에 항의의 의미를 담아 하루 동안 검은 옷을 입는 블랙 투쟁을 제안합니다. 이번 블랙투쟁은 MB에 대한 항의의 뜻도 있지만 지난 1년 동안 고생한 우리들을 서로 격려하는 의미이기도 하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지하철 출근길에 한칸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을...
직장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동료가 검은 옷을 입고 출근한 모습을...
점심시간에 식당에 갔는데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있고,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광화문에서, 청계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검은 옷을 입고 MB에 항의하는 모습을...
저녁에 소주 한잔 걸치러 술자리에 갔는데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소주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방송에서, 신문에서, 인터넷에서 MB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이야기보다 검은 옷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는 모습을...

단지 상상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나부터 먼저 2월 25일(수)에 검은 옷만 챙겨 입으시면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25일에는 검은 색 옷을 입읍시다.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우리가 어떻게 상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2월 25일, MB 1주년에 검은 옷을 입어요"
"MB 때문에 답답하고 힘들었던 우리들의 드레스코드는 블랙"
"MB 때문에 속이 새카맣게 타버린 사람들의 속풀이 한마당"
"MB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즐거운 연대, MB블랙 플래쉬몹"

MB 1주년, 25일 하루는
MB에게 항의하는 뜻으로 검은 옷을 입읍시다



MB블랙25 프로젝트 블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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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옷 입으실 의향이 있으시면 아래 [찬성버튼] 꾸욱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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