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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화도 전등사에 다녀왔습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절이라기에 나름 기대를 하고 있었지요.
들어갈 때 부터 입장료를 내라더니 여기저기 돈달라는 글귀와 소리가 메아리 치네요.
언제부터일까요? 그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이 미덕처럼 되어 버린게...
대웅전에 갔더니 대웅전 처마를 벌거벗은 여인네가 받치고 있더군요.
이 절을 짓던 목수와 사랑에 빠진 여인네가 있었는데, 그 여인이 그만 도망을 갔다는군요.
목수는 그 여인네를 벌하려 전등사 대웅전의 지붕을 지키도록 했다는군요.
여성들은 왜 항상 죄를 저지르는자 혹은 그 죄를 짊어지고 사는 삶의 표상이 되는 것일까요.
대웅전 안에는 조용히 절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보살님도 한 분 계시지요.
그런데 왠걸요, 쌩뚱맞게 부처상의 정면 맞은편에는 CCTV가 달려 있었습니다.
대체 뭘 감시 하고 있는 걸까요?
부처는 CCTV를 CCTV는 신자를, 신자는 부처를 바라보는 이 일방향적 시선의 삼각형이 쓸쓸하게 느껴 집니다.
그분과 그녀의 조용한 대화에 끼어 있는 저 감시의 시선은 또 다른 메타적 응시이겠죠.
아마도 현대 사회의 신의 시선은 CCTV처럼, 그렇게 현현하는듯 보입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바라보고 감시하는 신의 보살핌으로서의 시선, 그것이 바로 CCTV 아니겠습니까.
이런 미친...
1. '사실' 그리고 '성폭행 미수'라는 언어
불과 2,3일 전의 일이다. 민주노총 간부에의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알려진 것이.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민주노총은 "사실 관계에 대해 피해자 확인 및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확인도 없이 보도된 내용은 전부 허위 사실"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입장 표명을 할 때 그들은 이 일을 '간부의 성폭행 미수 사건'이라고 지칭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언어들 속에는 가해자 (주로)남성의 자기 정당화 논리/변명들이 스며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가해나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제시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인정받는다. 사건에는 사실을 뒷바침하는 물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이란 무엇인가. 성폭력 사건에서 물증이 제시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것일까. 물증이 쉽게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은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거기에는 물리적, 육체적 흔적이 아닌 정신적 상처가 기입된다. 민주노총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며 사용한 '사실', 혹은 '허위 사실'이라는 언어들 속에는 성폭력 사건에 대한 남성들의 절대적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남성들의 무지가 만들어낸 폭력적 구조가 바로 가부장제이다. 가부장제는 타인에 대한 통제와 배제를 통해 유지되는 전형적인 남성적 향유의 산물이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의 "공식적인 확인도 없이 보도된 내용"은 "허위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민주노총의 공식적인 확인(보통은 이것을 검열이라고 한다)도 없이 보도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탄원자의 목소리이다. 그들이 통제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탄원자 (주로)여성의 목소리이다.
'성폭행 미수'라는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왜 그것을 미수라고 표현하는가. 우선 그것은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그들의 지칭이다. 그러나 방금 언급했듯 성폭력 문제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다. 때문에 이 사건은 계속 '미수'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미수'는 남성적 권력이 한 여성을 대상으로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했음을 지칭하는 언어이다.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별 것아닌 사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공하지 못한 성폭력은 죄질도 가벼울 것이라는 논리가 숨어 있는듯 하다. 그러나 성적 수치심과 혐오감이 정신적 외상으로 각인되는 '과정'은 성폭력이 '결과'적으로 성공했는지 여부와는 필연적 관계를 갖지 않는다. 이미 상처받은 사람이 존재할 뿐이다.
설피보면 사실이나 미수라는 언어가 객관적, 중립적 기술 처럼 보일 수 있다. 사실 관계의 확인이나 미수라는 언어는 확인(성공)되지 않은 것들을 가리키는 법적 용어이다. 그 법적 용어 속에 객관적, 중립적 기술이라는 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성폭력 문제는 법에 기입되어 있는 언어들이 결코 객관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환상을 폭로한다. 오히려 그 언어들은 가부장적 질서의 표상체일 뿐이다. 성폭력 사건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건이 발생하는 조직(혹은 사회)의 감성과 지성 자체가 가해자를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에서 객관적, 중립적 입장은 존재하지 않으며,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하나의 윤리적 입장만이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변명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개관적-중립적 언어라는 환상의 외피를 통해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윤리적 입장을 배제하려는 가해자의 논리이다.
2. '언론보도=2차 가해'라는 변명
민주노총은 또한 언론보도가 있자마자 '언론보도는 2차 가해'라고 주장하며 이 사건이 더 이상 공론화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의 성폭력 사건에서 사건의 공론화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진다. 탄원자에게 부과될 수 있는 타인들의 편견에 찬 시선이나 접근을 막고, 심리적 상처를 상기시킴으로써 탄원자에게 가해질 수 있는 또 다른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조직 안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이런 목적 하에서 이루어진다. 2차 가해를 막기 위한 노력은 조직의 배려를 확인하고 탄원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언론보도=2차 가해'라는 주장은 조직 보존이라는 맥락에서 제기된 것으로, 오히려 탄원자의 상처를 인정하지 않고 이 사건 자체를 은폐 시키려는 반치유의 과정이며 2차 가해의 과정이다.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2차 가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피해자가 공개를 원치 않는 성폭력 사건을 공개하는 행위도 2차 가해에 해당하지만, 성희롱 및 성폭력 발생시 사건을 방관하는 행위, 신고자의 신고를 방해하거나 위증하는 행위,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행위, 피해자에게 피해사실의 구체적인 진술을 강요하는 행위, 그리고 사건을 은폐 축소 시키려는 행위 이 모든 것들이 2차 가해가 되는 것이다.
3. 개인책임이라는 변명
이번 사건에서도 민주노총 일부에서는 개인책임론이 등장했다. 특정 조직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빠짐 없이 나오는 주장 중 하나가 성폭력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다(심할 경우에는 책임 추궁이 가해자가 아닌 탄원자에게로 향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충격적인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사건의 범인을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는 예외적 개인으로 규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무크지 문화사회 3호, 최철웅의 글 참조).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회는 성폭력 문제에 대한 사회적 안정감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것을 스캔들화 시키는 것은 이미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극도로 둔감한 야만상태임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저지전략처럼 보인다. 사실 우리 사회가 성폭력의 야만상태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회적 편견이 두려워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임을 감추는 일이 허다하고, 용기내어 성폭력 문제를 고발한 탄원자는 상처 투성이가 되기 쉽다. 법정에 가도 재판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며 끝나버리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 언론보도에 대한 입장 발표가 있던 2월 5일 오전 중앙대에서 제자에게 성폭력을 행하여 고소된 K교수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K교수는 사건이 있은 직후 탄원자에게 전화해 돈을 줄테니 합의하자고 하며 통장으로 돈을 입금했다가, 성폭력 사건이 죄를 입증하기 힘들다는 점과 자신의 권력이 학교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한 이후 입금한 돈을 지불중지시켰다. 이 사건의 진실은 누가봐도 명백한 것이었지만, 법정에서는 K교수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K교수는 사건 직후 태도를 바꾼 이후 집요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며, 비열한 사적 수단과 친분을 이용해 탄원자를 압박하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학교와 사회의 무책임한 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결코 어느 한 예외적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폭력은 성폭력 행위를 묵인, 방치, 은폐해 온 단체나 조직 나아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개인의 특수성이 아닌 조직과 사회의 (성)문화의 일부로 여겨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구성원들은 일정정도 문제의 책임을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때문에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한 노력들은 특정한 개인이 아닌 구성원 모두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폭력의 문제가 도덕의 문제로 환원되어 가고 있다. 이번 민노당의 강기갑 의원이 벌인 ‘액션 활극’을 두고 말이 많다. 조선일보는 국회가 “폭력에 굴복”했다고 진술하고 있으며, 자유선진당의 이회창은 “이번 폭력사태를 야기한 행위자”인 강기갑 의원에 대해 “즉각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여 “엄격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기갑 의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한나라당은 민주당의 폭력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규탄하고 있다. 오늘도(1/9) 한나라당의 홍준표는 “민주당이 또 폭력으로 상임위를 틀어막겠다고 하면 국민들도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난했다. 어떤 목표가 있더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특히 폭력이 그 수단이라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언의 근저에는 폭력은 무조건 도덕적 해악이라는 판단이, 혹은 그러한 판단을 유도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좀 더 멀리 가서 (벌써 ‘작년’이라고 불러야 하는) 2008년에 있었던 촛불집회를 생각해보자.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이슈들을 만들어낸 이 집회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쟁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폭력의 문제이다. 시종일관 비폭력을 외치며 정부에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했다.(물론 집회 참가자와 경찰들의 잦은 충돌이 발생했지만, 이것이 촛불집회의 비폭력적 경향의 반증이 되지는 못한다) 집회 내부에서는 몇 번의 논쟁이 있었다. 물대포 앞에서, 명박산성 앞에서, 전경에게 구타당한 어느 시민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매번 논쟁은 폭력의 의미에 대한 성찰보다는 폭력의 도덕적 결함으로 결론지어졌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의 충돌이 발생할 때, 누가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는가? 누가 더 많은 폭력을 행사했는가가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 대상이 된다. 정작 집회 참가자와 경찰 신분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폭력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한 폭력보다 더 많은 폭력들이 보도 되고, 그 의미도 과잉되어 간다. 이 과잉된 이미지들을 통해 폭력은 그것이 가진 의미를 상실한다. 이 지점에서 타협이 불가능한 윤리의 잣대로 폭력을 재단하고 그 의미를 초월해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폭력은 언제나 바로잡아야 할 예외상태로 상정된다. 그것은 정상에서 벗어난 것이고, 포섭되지 않은 낯선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태, 즉 정상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지금의 상태(State, 국가/상태)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면?
폭력이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적극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면? 프로이센의 군사학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이야기 했다. 아렌트는 이를 역전시켜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라고 주장한다. 정치에 정상 상태란 없고, 일상적인 예외상태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회나 정치의 안정적인 자기 기반이라는 것은 없고, 이 사회는 오직 예외적 수단, 체제 외적 강제력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때로)폭력이 드러내는 것은 정치의 일상적인 모순 상태(/국가)라는 금지된 실재의 영역이다.
나는 지금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분명 해악이다. 그러나 그 중의 어떤 폭력은 맹목적으로 비난하기(과잉) 보다 그 폭력이 드러내는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언론을 통해 수십 년 간 매맞고 살던 아내가 특정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편을 공격했다는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소식을 접하곤 한다. 누가, 쉽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그 아내에게 절대악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 있겠는가? 그 아내의 폭력은 공고화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폭력은 아니었을까? 이런 일상 속의 폭력 이외에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에 매개된 구조적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 영구히 호명하는 노동법들 속에 녹아 있는 폭력도 있다. 파업은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다른 방식의 폭력이다.(조르주 소렐에 찬양하는 폭력은 바로 자본주의적 구조에 균열을 내는 총파업이라는 대항폭력이었다.)
폭력은, 악으로 낙인찍힐 수 없는, 보다 세밀하게 분석되어야할 현상이다. 예를 들어 비비오르카가 제시한 정치이하(infrapolitical)의 폭력과 정치상위(metapolitical)라는 폭력의 구분, 조나단 프리드먼이 제시한 수평적 분단화와 수직적 분극화라는 구분, 마틴 루터 킹의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폭력, 사르트르나 파농의 적대와 치유로서의 폭력 등 폭력이라는 이름만으로 매도될 수 없는 수 많은 폭력이 존재하는 것이다. 폭력을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의미 역시 좀 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비폭력은 언론을 통해 자신을 비극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발생하는 스펙타클이라는 정치적 계산 없이는 무의미한 희생을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경우 비폭력은 무폭력의 의미로 쓰인다. 비폭력의 사상적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간디는 비폭력을 무폭력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 간디에게 비폭력은 ‘직접행동’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피비린내나는 무기의 사용을 동반하는 운동보다도 훨씬 적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폭력, 혹은 그것이 발생하는 장소는 거부하거나 회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해 해석해야 할 정치적 저항의 근원(적 장소)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강기갑 의원, 민주당, 촛불집회에서 폭력이 가진 의미를 초월해 악으로 낙인 찍는 행위야 말로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폭력을 탈정치화 시키는 사건들을 정치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벤야민이 1913년에 쓴 ‘경험(Erfahrung)’이라는 글이다.
원문은 독일어이지만 내가 독일어를 못하는 관계로 영역본을 기초로 번역했다.
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Havard University Press에서 나온 벤야민 선집이고(이 선집에서 이 글은 제일 처음 실려 있다), Lloyd Spencer와 Stefan Jost가 영역했다.
벤야민 영역본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 구분되지 않고, 둘 다 Experience로 번역되어 있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이 글에서도 경험(experience)이라는 단어만 나오고 있다. 아직 독어판과 비교해 보지 못한터라 Erlebnis도 Experience로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경험과 체험이 이 글에서도 (표기는 경험으로 되어 있지만, 내포된 의미를 보면)명확히 구분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뒷부분에서 경험으로 번역한 몇몇 부분은 체험으로 옮겨 적어야 의미가 명확해 질 듯 하다. 이 구분은 벤야민의 사상을 연구할 때 핵심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므로 개념적으로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영상 매체가 대중에게 던지는 충격을 체험이라고 말한다. 경험에 대한 체험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상징계에 대한 실재의 침입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나는 여기서 경험=상징계, 체험=실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벤야민에게서 이 두 개념의 구분은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떠들어도 이 글을 번역해서 올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글을 굉장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태해지려할 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어떤 것이든 전환점이 필요할 때 즐겨 읽는 글이다. 내 영어(와 번역_ 실력의 미천함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읽기 싫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니 내 책임은 아니겠지... 라고 정당화해 본다. 아직 초벌 번역이라 문장이 이상한 데가 많을테니 감안하고 읽어 보시길.
추가 : 연구소의 로아님이 벤야민 독어판 전집을 가지고 있어서 비교해 본 결과, 이 글에 나오는 경험이라는 단어는 모두 Erfahrung으로 나와 있었다고 합니다(로아님 확인 감사^^). 그리고 영어로 sprit(독어 Geist)이라고 되어 있는 용어를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했는데, 보통 독어의 Geist는 영어로 spirit로 번역되는데 한글로도 정신으로 옮기는 것이 통례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제가 영혼이라고 번역한 것들(옆에 spirit이라고 영문표기를 달아놓았습니다)은 정신(geist)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spirit을 영혼으로 옮긴 것은 without spirit과 같은 문구가 나와서 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정신 없이'정도가 되서 어감상 오해의 여지가 있으리라 판단해서입니다. 정신없다는 말은 우리말에서는 관영어구처럼 쓰이기 때문에 벤야민이 쓰는 맥락과 조금 다르게 다가올수 있으니까요. 어쨋든 이런 점 주의해서 읽으시면 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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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Experience, Erfahrung, 1913) - 발터 벤야민
책임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는 가면 쓴 이들에 맞서 싸운다. 어른들의 가면은 ‘경험’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고 항상 동일하다. 어른은 항상 이미 모든 것을 경험했다: 젊음, 이상, 희망, 여성. 그것은 모두 환상이다. - 종종 우리는 겁먹거나 괴로워한다. 아마도 그는 옳다. 우리의 반론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했다.[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가면을 벗기려 시도해 보자. 어른이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에게 증명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그 역시 한 때 젊었었다는 것, 그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했었다는 것, 그 역시 그의 부모에 대한 믿음을 거절당했다는 것, 그러나 그들이 옳다는 것을 삶이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보자, 그는 훌륭한 방식으로 웃는다. 우리도 그렇게 할 것이다. - 그는 미리 우리가 살아갈 (진지한 삶의 기나긴 엄숙함 이전에 오는)철없는 환희의 세월들을 평가 절하한다. 이렇게 선한 것, 교화된 것. 우리는 우리에게 짧은 젊음을 허용조차 하지 않는 씁쓸함(bitterness)이라는 다른 선생들을 알고 있다: 진지하고 엄한, 그들은 우리들을 삶의 고역으로 바로 밀어 넣는다. 양자의 태도는 우리의 세월들을 평가절하하고 파괴한다. 게다가 감정에 엄습 당한다: 우리의 젊음은 짧은 밤이다(환희로 채워라); 그것은, 타협의 세월들, 관념의 빈곤, 그리고 활력의 결여와 같은, 거대한 ‘경험’에 뒤따라 올 것이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경험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그들의 경험이다. 이 하나, 결코 다를 것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 그것은 잔인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훌륭하거나 새롭거나 진취적인 어떤 것을 장려한 적이 있던가? 아니다, 명확히도 이것들은 경험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미 - 진실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 는 그 자신 안에 지평을 수립한다. 그럼, 경험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리고 이 속에 비밀이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위대한 것, 의미 있는 것에 시선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속물(the philistine)은 경험을 그의 복음으로 취한다. 그것은 그에게 인생의 공통성에 관한 메시지가 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거기에 경험과는 다른,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험될 수 없는 가치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속물에게는 왜 삶이 의미도, 이유도 없는 것일까? 그는 (다른 것은 모른채) 경험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영혼(sprit)의 부재와 황량함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공통적인 것 그리고 항상-이미-낡은 것 외에 다른 것과 내적 관계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경험이 우리에게 줄 수도 앗아갈 수도 없는)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비록 지금까지의 모든 사상들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혹은 비록 아직까지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했다 해도 지속되어야 하는 충실함을 알고 있다. 그런 것들은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 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나이든 이들은, 피곤한 몸짓과 초연한 절망으로, 모든 것에서 옳은 것일까? 다시 말해, 우리가 경험한 것은 후회일 것이고, 초석이 되는 용기, 희망, 의미는 경험될 수 없는 것이라는게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영혼(spirit)은 자유로울 게다. 하지만 또 다시 삶은 쇠약해질 것이다. (경험의 총체인)삶은 위안 없는 것일 뿐이므로.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물음들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영혼(spirit)과 함께 그런 낯선 삶을 인도해야 하는가? 그들의 나태한 자아는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 같은 삶에 의해 농락당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값어치가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만의 영혼으로 그것들에 값어치를 투여한다 - 경솔한 그는 착오에 만족한다. 그는 탐색자에게 “너는 절대 진리를 찾을 수 없어”라고 외친다. “그것이 내 경험이야.” 그러나 탐색자에게 ‘착오는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스피노자). 다만 어리석은 자에게 그것은 의미와 영혼이 결여된 경험이다. 아마 맞서는 자에게 경험은 고통스럽겠지만, 그를 절망으로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어째든, 그는 결코 덤덤하게 포기하지도, 속물의 리듬에 마취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속물에게 ‘(당신은)모든 새로운 무의미함 속에서 기쁨만 느낄 수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그는 옳음 속에 잔존한다. 그는 스스로 재-확신 한다: 영혼(spirit)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영혼’ 앞에서 위대한 경외와 가혹한 복종을 요구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비판적이 된다면, 그도 그가 만들 수 없는 것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지에 반해 그가 겪는) 영혼의 경험 조차도 그에게는 무관심한 것이 된다.
그에게 말하라
그가 한 사람의 남자/어른(a man)이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젊음의 꿈을 우러러보아야 한다는 것을.
(프리드리히 실러, 돈 카를로스 중)
속물에게는 “그의 젊음의 꿈”만큼 꺼림칙한 것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감성적임은 그의 혐오의 보호적 위장이다. 왜냐하면 그의 꿈에서 그에게 나타난 것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예전의 그를 부르는)영혼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젊음이 끊임없이 그리고 불길하게 그를 일깨우는 어떤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젊음에 적대적인 이유이다. 그는 어린 사람들에게 그런 무서움(압도적인 경험)에 대해 말하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비웃도록 가르친다. 특히 영혼 없이 경험하는 것이 편하다고, 만약 되찾을 수 없다면.
다시: 우리는 다른 경험을 알고 있다. 그것은 영혼에 적대적이고, 피어나는 꿈을 파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범접할수 없고, 가장 직접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젊음을 유지하는 동안 결코 영혼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가 말했듯이, 개인은 방황의 끝에서만 자신을 경험할 수 있다. 속물은 그만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속적인 영혼없음(spiritlessness) 중의 하나이다. 젊음은 영혼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덜 쉽게 위대함을 얻을수록, 방황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영혼과 더 많이 대면할 것이다. - 그가 남자/어른이 되었을 때, 젊음은 측은하게 될 것이다. 속물은 불관용적이다.
식상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신만의 색을 찾아나가길 원하는 이들(혹은 그를 통해 재미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식상하다는 말은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식상하다는 말에는 뻔하거나 진부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너는 재미없는 인간이야’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식상함을 저주하는 우리(자주 듣는다고 해서 그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직접 겪어 보지 않아도 영화나 드라마, 소설을 통해서 세상의 온갖 충격적인 더러움에 대해서는 모두 알아버렸고, 세상의 운영원리도 대충은 꿰고 있다(딴거 있을까? ‘힘쎈놈이 이긴다 + 인간은 원래 외롭다 = 사는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 정도의 결론만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대충 아는 거다). 이렇게 위대한 진리를 알고 나니 웬만한 일은 재미없고 식상한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더 많은 새로움, 더 많은 자극, 더 많은 특이함, 더 많은...’ 이렇게 살아가게 되는게 아닐까? 정말이지 끝이 없다. 그렇게 끊임없이 감정을 착취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식상하다고 말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로 식상한걸까? 혹시 그 식상함들은 언젠가 눈을 돌려 자신들을 봐달라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방을 한 번 둘러보자. 책장에 꽂혀 있지만 읽지 않은 책들이 있다. 사놓고 아직 보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침대 밑에서 구조되길 기다리는 동전과 볼펜들도 있다. 어릴 적 쓴 일기와 고등학교 때 친구와 주고받던 애매한 편지는 책상 서랍 속에 묻혀 있다. 식상함이라는 말로, 너무 익숙해서 재미없다는 느낌으로 버려지고 있는 일상의 흔적들이 우리 주위에 널부러져 있다.
<동경 이야기>에는 버려진 일상의 흔적들이 있다. 일상은 삼각대 다리를 잘라내고 담아낼 사람의 눈높이에 카메라를 맞추면서부터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행가서 쓸 공기배게를 찾으려고 주고받는 노부부의 대화 속에, 목욕하고, 밥 먹고, 간식 먹고, 잠자는 - 심지어 여관의 시끄러운 유흥 속에서 일상은 발견된다. 일상은 더 이상 식상한게 아니라 발견되길 기다리는 삶의 흔적이 된다. 그렇다고 일상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일상은 삶의 내밀함을 들여다보기에는 너무 얇은 표층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표층 이외에 무엇이 있는가?) 오즈는 일상을 보여줄 뿐 말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것은 일상의 모습도 아닐뿐더러, 감정을 착취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오즈의 뛰어남이 있다. 표층을 통해서 삶의 내밀함을 보여주는 그의 방식이 그것이다. 내면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드러나는 표층의 모습인 일상. 그 일상이 조금씩 쌓여 축적이 이루어질 때, 일상의 농도는 점점 짙어지게 되고, 일상의 농도를 통해 그 삶이 거쳐 왔을 심연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영화 막바지에는 늙은 여인의 죽음이 있다. 스필버그라면 늙은 여인의 죽음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죽음이 극화된다면, 바로 그 순간 일상은 그 맛을 잃고 표류하게 되고, 전통적 가족상이 붕괴되어 가는 일본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오즈는 죽음을 극화시키지 않는다. 오즈는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늙은 여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즈는 영상이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솔직히 이야기 한다. 대신 오즈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그 죽음의 얼굴을 연상하게 한다. 오즈에게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발화토록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삶과 언제나 공존하지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회피하고 있는 죽음의 일상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한편의 영화라는 외연을 넘어 관객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동경이야기>에는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얻게 되는 이 충만함이 있다. 그것은 신선함과 재미, 새로움과 활력으로 삶을 채워나가는 데에만 익숙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시 한 번 그 메시지를 되돌아 본다. (여백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할 것 같은) 결여는 그 자신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보충할 수 있다. 일상 속의 결여를 채워나가는 것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게 아니다. 오즈는 나의 결여(나의 결여는 식상함이 아니라 식상함이라는 말로 매도되는 일상에 대한 애정의 결핍이다)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동시에 그 결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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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영화이다보니 참 좋은 영화를 낳는 모티브가 되었다.
그 가슴 따뜻한 등 돌린 식사가 나오는 카페 뤼미에르...
세속적 각성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남발일까?
폭력론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박홍규 • 영남대학교 교수/ 법학
1. 폭력의 뜻
국어사전에서 폭력이란 ‘함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힘’으로 풀이되고, ‘폭력을 써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단체’가 폭력단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폭력주의자는 테러리스트, 폭력주의는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즉 폭력은 테러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이해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폭력의 영어를 force라고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폭력은 테러(terror)도 힘(force)도 아닌 violence를 말한다. 영어사전에서 violence란 ‘비공인의 완력이나 물리적 힘에 의한 강습’을 뜻하고, 공인된 군대나 경찰의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나 경찰력의 행사는 폭력이 아니게 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정의하는 입장과 같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폭력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폭력 개념은 윤리나 정치 또는 법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념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폭력을 힘의 비합법적인 행사인 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개념이다.
이런 입장은 ‘구체적인 행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조희연․조현연, 「국가폭력․민주주의 투쟁․희생에 대한 총론적 이해」, 조희연 편, ꡔ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ꡕ, 함께읽는책, 2002, 26쪽.
그러한 견해는 이러한 비판을 하면서도 달리 폭력을 정의하지 않고서, 억압의 폭력(기성 지배체제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 공격적 폭력)과 해방의 폭력(필연적으로 불법적인 저항적 폭력, 생존의 방어를 위한 폭력)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제도나 저항까지 폭력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폭력 개념을 구체적인 행동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견해에서 사용되는 폭력이란 개념은 매우 특수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폭력 개념은 억압의 폭력이나 해방의 폭력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폭력이란 개념은 억압과 해방이라고 하는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특수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위 견해는 억압의 폭력을 전쟁, 고문, 살인, 학살 등으로 상징되는 ‘국가폭력’이란 말로 이해한다. 위의 책.
그러나 그러한 국가폭력도 구체적인 행동을 뜻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위 견해는 그런 국가폭력을 낳는 근거인 유신체제와 같은 악법을 ‘제도적 폭력’이라고 보고 있으나, 법제도까지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 폭력에 대한 더욱 엄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폭력에 대한 구조적인 정의는 빈곤을 비롯한 사회적 부정의를 말하는 더욱 광범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The Journal of Peace Research6(2), 1969, pp. 167-91. 특히 p. 168과 p. 173. 또한 N. Garver, “What Violence Is," in J. Rachels and F. A. Tilman (eds), Philosophical Issue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New York: Harper & Row, 1972, pp. 223-8. 또한 빈곤과 관련해서는 S. Lee, 'Poverty and Violence', Social Theory and Practice 22 (1) 1996, pp. 67-82.
그것은 개인이나 제도에 의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 가해지는 물질적인 피해는 물론 심리적인 피해까지 낳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된다. 주로 평화 연구의 영역에서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반평화적 행태나 제도를 폭력으로 보려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광범하고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다. C. A. J. Coady, “The Idea of Violence,"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 (1) 1986, pp 3-19.
이와 달리 폭력=테러라는 말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정부가 이슬람 또는 그 일부 세력 그리고 북한 등을 비난하며 지칭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행사하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슬람 등은 미국 등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서 사용되는 폭력 논의는 그 판단이 쉽지 않으나, 어느 측이든 자신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개념으로 사용함은 확실하다.
이처럼 폭력이란 말의 사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폭력은 불법이므로 그 합법성이 논의될 수 없다. 물론 법적인 차원에서도 가령 범죄의 피침해자가 자력구제를 가하는 경우라든가 또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와 같이 그 폭력에 대한 법적 판단이 반드시 구체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그러나 그런 법적 평가와 무관하게 억압적 국가 권력 자체를 ‘합법적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국가 권력 자체를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보는 것을 전제로 하여, 권력의 부당한 폭력적 행사에 대해서만 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부당한 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예컨대 인도의 간디처럼) 유효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대부분의 경우 더욱 큰 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도리어 폭력적 저항(예컨대 알제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 투쟁)이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해방 전략의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비폭력 주장은 반드시 유효한 것이 아니고, 폭력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글은 폭력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의에 대해서는 각종 사회과학 사전이나 문헌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 글에서는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폭력 논의를 중심으로 폭력에 대한 사상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논의의 핵심은 국가폭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사용되는 폭력은 위에서 본 일반적인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즉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의 행사와 그것에 저항하는 정당한 폭력의 행사를 대립시켜 그 범주에서만 폭력을 검토하는 것이다.
원문 : http://jbreview.jinbo.net/maynews/readview.php?table=organ&item=&no=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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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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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없이 사건을 판단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도 하기 힘드네요어떤 사건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객관적이면서 과학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피해자의 증언에만 의존한다? 그렇다면 모든 성폭력 사건에서 어떠한 조사도 필요가 없겠군요? 단지 피해자가 그렇게 당했다고만 말하면 되니까 말입니다.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못하겠다 이런 얘기는 아닙니다. 저 역시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들이 처벌받기를 원합니다. 다만 피해자 중심주의가 마치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할 윤리인것처럼 주장하시는것에 대해서는 동의가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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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님두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첫번째, 이 글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그 특성상 '물증'을 확보하기 어려운 사건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물증이 쉽게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은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거기에는 물리적, 육체적 흔적이 아닌 정신적 상처가 기입된다.]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가 느끼는 '피해감'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피해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피해감이 물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를 '증명하라'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를 이 글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감을 실체가 없는 것이라 공격하며 피해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들이 확인됩니다.(위 글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성폭력 미수'라는 언어에서 그러한 태도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제출 된 것이며 이는 결코 '객관화(물화)'될 수 없는 의 정신적 상처를 성폭력 사건의 핵심으로 이정하라는 태도입니다. 이는 지나가다님께서 오해하시는 것 처럼 사건의 진상 조사에 있어서 '피해자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는'태도와는 다릅니다. 사건의 외적 측면, 즉 전개과정을 밝히는 것은 수 많은 정황 증거와 증언을 종합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사회의 남성중심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인용하겠습니다.[성폭력 사건은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개인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사건이 발생하는 조직(혹은 사회)의 감성과 지성 자체가 가해자를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이번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은 그 시작에서부터 해결과정까지, 운동사회 혹은 우리사회 전체의 남성중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시키고 여성의 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려는 일반적인 성 감수성에서 발생했습니다. 또한 이후 과정에서 전개된 2차가해의 과정은 개인에 대한 조직적 폭력일 뿐 아니라 성폭력을 어디까지나 남성의 기준, 가해자의 기준에서 판단하려 하는 태도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남성(일반)이 '객관적으로' 주장하는 '그것은 성폭력이 아니다'라는 말이 피해 여성이 호소하는 상처를 압도해버립니다. 이는 실제로 사회가 성 중립적으로 구성된 것 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남성에게 상위의 권력을 부여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의 언어가 결코 객관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지시하며 때문에 성폭력 사건에서 객관성과 중립성이 환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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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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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해자 중심주의-> 피해자의 증언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식"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게 아니라고 하시니까 제가 오해한 측면도 있는거 같습니다.
만약 오해가 아니라 저런 방식이라면 동의할수없구요. 어떤 경우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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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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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여성의 말이 받아들려지지 않는다면(제대로) 민주노총(노동계)의 여성 어느 누구의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세요.부가 정보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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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진술을 사실 혹은 사건의 진리로 환원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그것은 가해자의 언어 속에서 배제되어 있는 탄원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업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건 혹은 (과거의)사실은 완벽히 인지되거나 파악될 수 없고, 그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그것을을 둘러싼 담론 속에서 사후적으로 재구성 됩니다. 문제는 담론이 구성될 때 기반이 되는 틀이 가부장의 언어로 구조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가부장의 언어로 구조지어진 틀을 거부하는 적대와 저항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