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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양의 시 '그 날'

그 날

-경기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민경(18)양의 시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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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장에 가던 엄마

물리적으로 떨어져있어서, 최근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돌아가면 많이 만나보리라.. 모내기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전에 돌아가리라^^ 아, 벌써 모내기를 마쳤나??). 이런 적막한 시기에 밀려오는 것이 엄마생각이다. 내가 만약 글을 알기시작한 5살이나 10살때부터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써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제일 처음 기억은 음성장에 나를 데리고 다녔을 때였다. 그때 나는 한 네살쯤 되었나보다.  충주에서 버스를 타고 한 1시간 (그때는 버스도 흙길을 가야했으니..) 남짓가면 음성이 나왔던것 같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음성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장보러가신것은 아니었다. 작은엄마네 가게를 도와주러 가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던 작은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다 일찍 돌아가셨다. 작은엄마는 딸린 5명의 자식들을 먹여살려야 했다. 작은엄마의 호탕한 웃음과 씩씩한 목소리와 억센 팔뚝은 5남매를 기르고 보호하기위해서 발달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집에두고 가실수 없으니, 나와 내동생을 데리고 음성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멀리가시면서 나와 내동생을 집에두고 가실수 없다고 생각하신 것인지, 우리 둘을 데리고 장을 도와주러 가신것이다. 엄마가 둘을 다 데리고 가시기 어려울때면, 나는 아버지학교 (아버지는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담임은 주로 1학년을 맡으셨었다.)에 나를 맡겨놓고 가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학교에 있을때보다 엄마를 따라 음성장에 가는게 더 좋았다.

 

시골장은 매우 시끌벅적했고, 작은엄마가 장사하시는 곳은 큰 기와집으로 된 집에 여러가지 물건들이 즐비하게 쌓여있는 그야말로 아주 시골장터의 한 귀퉁이에 있었다.

 

나는 음성장에 엄마가 나를 데려갈때가 매우 즐거웠던 것 같다. 거기가면 마름모꼴의 사카린도 볼 수 있었고, 작고 동그란 모양의 단것 (지금 이름이 기억이 안나는데, 인공감미료의 일종, 아마 감미정일것이다.)들이 많았다. 또 웬 빨간색, 파란색 등등 색색이 아롱진 과자들이 많았는지......

 

그러나 그때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은 시골장터에서 사람들을 보는 것이었다. 그때 기억으로는 흰색와이셔츠같은 옷과 검은색이나 회색바지들 그리고는 검은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바로 농부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바로 몇년뒤에 아버지의 모습이었는데, 나의 아버지가 도저히 생업으로 교사직을 할수 없다며 (그당시 교사월급은 쌀한두가마니정도, 이것으로 8식구(막내동생은 아직 안태어났으니 아직은 8명이다)가 도저히 살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만두시고 충주 달천으로 들어가셨을 때 아버지가 입으셨던 옷도 바로 낡은 흰색와이셔츠에 검은바지였다.  

 

엄마의 일생동안의 노동은 끝이없었고, 나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엄마의 노동을 보면서 자라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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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1

일이 많은 날은 꼭 블로그를 열어보며 시간을 더 애태운다. 특히 아침에... 이 늦장피우는 습관이 언제나 없어질꼬..

 

최근..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답하기위해서 나는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러사람들의 행태를 관찰하여 정리해보기로 했다. 다른사람들로부터 들은 간접적인 경험이 아닌,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그것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정리가 될것이다^^

 

그것들의 한 시리즈로 [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시리즈가 나간다. 오늘은 시간상 짧게^^

 

사랑이 무섭다고 느낄때1 : 봄이오고, 갑자기 더워지는 이 날씨에 부인이 사주었다며 모임때마다 검정색 가죽자켓을 줄구장창 입고 나오는 후배를 볼 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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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인형극장 앞에서 나린파파가족과 함께 사진^^

지난 2007324일 춘천 인형극장 앞에서 나린파파가족과 함께 사진이다^^ 블로그에서 사진을 어떻게 싣는지 당체 모르겠네!! 이게 맞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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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데이소감

그전날 (4월 30일) 전야제에 참석을 못했었다. 지리적으로도 멀고 저녁에 잘곳도 없고.. 등등 여러가지 변명거리는 있다. 그런데, 한 동지로부터 왔냐?는 전화를 받고는 '갔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다음날 아침인 메이데이날 부랴부랴 대학로에 갔다.

 

수도권에서만 모였다는데도 많이 왔다.

 

올해는 아무생각없이 그냥 아는 이들을 보는것이 나의 최대의 목표였다.

 

오랫만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보니 반갑다. 역시 다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잊지않고......

 

매년 메이데이에 참석을 해왔지만, 올핸 유난히도 세월의 흔적을 본다. 여러 여성활동가들이 고운 아이와 함께 나타났을때, 그 대견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얼굴에 하나씩 주름살이 늘어난 것을 보면서 세월의 무심함을 느낄수 있었다. 나 또한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얼굴들을 보니 정말 반가왔다. 보고싶은 사람들의 얼굴은 대개 보았다.

 

 이제 또 다시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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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혁명은 불과 일주일만에 이루어진다.

지난주에 "상춘"을 한다고 들판을 뛰어다닐때, 마치, 낭만파의 그림처럼 점점이 아롱거렸던 나무에 붙은 이파리들이 이제 벌써 제법 자신의 모양새를 갖추고, 불과 일주일만에 산천을 푸르게 돋구어가고 있다. 봄의 혁명은 불과 일주일만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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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춘" 마라톤이야기

4월 22일 춘천호반마라톤대회가 열렸었다. 이번 마라톤은 정말 "상춘" 마라톤이라^^ 오시는 봄을 맞으러 나는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봄을 맞으러 버선발로 나가지는 못해도, 새로 준비한 운동화에 챙달린 모자하나를 쓰고 종합운동장에 들어섰다.

 

이제 나도 참 뻔뻔해졌다. 예전에는 엄두도 못내던 일이다. 예행연습을 단 한번도 안해보고, 어쩌면 이렇게 풀코스를 뛰려고 나왔단 말인가? 그래도 꾸준히 수영을 매일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면서, 이번에는 세번째줄정도에 서서 출발신호가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마라톤은 출발점에서 실수를 좀 해도 괜찮다는게 나에게는 또하나의 위안이다. 만약 100m 달리기를 하는데서 출발점에서 넘어지면 그런 낭패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반환점 (21km)정도까지는 여유있게 달렸던것 같다. 반환점근방에서 아름답게 피어있는 매화꽃도 보았다. 왠 춘천에 매화꽃? 하지만... 요새는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매화꽃도 있고, 감나무도 잘 자란다고 한다. 물론 도시를 휘감고 도는 소양강기슭에 흐르는 강물따라 다가오는 봄은 정말 아름답다.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물론 전국의 산천경계가 모두 봄을 맞는 열기로 가득할 것이다.

 

들판은 며칠전 하루동안 비가오는 그 시각에 촌각을 다투며 점점 푸르러가더니, 어느새 이파리들이 하나하나 돋아난 모습이 수채화나 유화에 점을 찍어놓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니, 낭만파들이 이 대자연을 보고 그림을 그렸었지^^

 

어느 책에서 20-30km까지를 잘 뛰라는 말에 정말 천천히 그리고 잘 뛰려고 노력했다.. 처음에 왼쪽 바깥 무릎부위의 통증을 느꼈으나, 점차 나아지고 있었다. 통증이 점차 없어지면서 오늘은 끝까지는 뛰겠군.... 하는 느낌이 들자 좀 여유가 생겼다..

 

2003년도 처음 마라톤을 시작했을때에는 여성주자도 많았으나, 오늘은 풀코스에는 단 8명이 참가했다보다... 급수대를 지날때마다 "7등입니다" 라고 격려해준다.. "으이구.. 8등은 과연 다 뛰고 있나? 아니면 기권을 했을까?"  그것에 따라 내가 꼴찌인지 아닌지가 결정이 되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ㅠㅠ

 

시험보면서 시험공부 못한 것을 탓하듯이, 마라톤을 뛰면서 연습 못한것을 탓해본것도 정말 징하다......

 

30-40km까지는 처음 뛰어본다는 어느 아저씨와 발을 맞추어서 뛰고 있었다. 이때 진행요원인듯 한 분이 한분 지나면서 "여자 6등이 없어서 시상식이 안되고 있는데, 빨리 뛰지 뭐해요?" 하면서 나보고 빨리 뛰란다. "아 그러면 내가 6등, 시상식을?"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 순간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뛰던 아저씨를 까맣게 잊고는 "걸음아 나좀 살려줘라" 하면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거의 운동장에 다달아서는 고의는 절대 아니었는데, 약 200m를 지름길로 달려서 오기도 했다.. 당황스러워서 다시 돌아가려니까 진행요원이 그냥 들어가라고 한다......

 

막 운동장에 들어서서 마지막 한바퀴를 뛰려는 순간 시상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자 1등... 2등....3등.... 6등까지 불려졌다.. 여자 6등은 나보다 약 20-30분 먼저 왔나보다...... 그 진행요원은 여자6등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못했나보다......

 

나는 속으로 운동도 안했으면서 욕심을 너무 부렸다고 자책을 하면서 골인점에 들어왔다. 아무도 안봐줄것 같았는데, 그래도 마지막 도착점에서 사람들이 서 있다가 환호를 해준다.......

 

이렇게, 나의 올해 "상춘"은 엉겹결에 마무리되었다.

 

며칠 후면 메이데이가 돌아온다. 매년 힘들게 올라가서 시청앞에서 앉아있다가 내려오는 마치 정해져버린 반복적인 일상이 되었다고 해도, 나는 또 가야한다. 화살처럼 쏘아 날라가는 시간을 쫒아가지 못하는 탓에 동지들의 얼굴을 잊을까 염려가 되어 나는 가야겠다.

 

그 면면들을 다시한번 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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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경악으로 하루를 보내다

허세욱열사가 망월동에 묻히는 슬픈아침에, 엊그제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32명을 권총으로 사살한 살인마가 한국인 조승희라는 한국학생이라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 하루가 슬픔과 경악으로 범벅이 되어 너무나도 정신이 없었다.

 

오후에는 중국에서 또 광산이 폭발하여 32명의 노동자들이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폭력적인 총격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이 육체와 정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사회라고 이해하더라도 그 사회가 주는 절망감이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잔인성을 드러내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할 수 없다......

 

중국에서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죽음과 함께 발전해온 역사이다. bbc뉴스에서는 1년에도 몇차례 광산폭발 등으로 죽어가는 중국의 노동자들이 보도된다.

 

결국, 인간의 생명을 단축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하에서의 폭력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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