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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22
    리차드 레빈스, 혁명의 재무장: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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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1/08/12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서비스 향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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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레빈스, 혁명의 재무장: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혁명의 재무장: 험난한 시기, 이론의 임무

 

리차드 레빈스


 

맑스주의 유물변증법의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곳에서 연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여기에서, 이론과 실천이 이토록이나 잘 결합된 한 저작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우리는 혁명의 다음 물결을 준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재활성화에 필요한 과제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러한 기획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이론은 다섯 가지 주요 과제를 가질 것이라 생각한다.

1. 순간의 사건들에 의해 너무 압도되지 말 것.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라야 우리는, 일시적 상황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더라도, 그것으로부터 기본적 견해들을 재평가하도록 요구할만큼의 진정 역사적인 변화를 분별해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현재를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맥락을 갖게 되기도 하며, 오늘의 급박한 즉흥적 판단이 미래와 타협하게 될 수도 있는 원칙의 문제가 되는 걸 방지할 수 있다.

2. 무엇이 실제로 새로운 것이고 무엇이 익숙한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있도록,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분석할 것.

3. 사회주의의 경험을 분석할 것. 이는 우리 이론이 아직 미발전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이며, 우리가 이론과 실제 관찰 사이에서 가장 커다란 불일치를 발견하는 영역이다.

4. 의식 및 정치 투쟁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킬 것.

5. 반동주의자의 공격과 맑스주의의 폐기를 원하는 이들의 왜곡으로부터 맑스주의를 방어할 것. 물론 이러한 방어는 교조적인 재론이 되어서는 안되며, 결함과 비판에 대한 진지한 고려를 전제로 하는, 방어뿐만 아니라 발전을 위한 작업이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을 일반화하지 말 것

세계 정세의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변화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정당과 정부들은 모든 종류의 비상수단을 취해왔다.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오늘을 헤쳐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많은 모순점들을 논해야만 한다. 간단하게 세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1) 현 시점에서 쿠바의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결국, 쿠바에 투자한 기업들이 쿠바 경제를 지원하는 셈이고, 만약 그들이 헬름스-버튼 법안과 미국의 봉쇄조치에도 도전한다면, 쿠바는 그들에게 진실로 고마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쿠바에서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추출하고자 하는 착취자라는 사실, 자신들에게 이윤만 남는다면 기업 내의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기꺼이 부추긴다는 사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쿠바 노동자 계급은 그들과 갈등/협력의 관계에 있다. 우리에게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소거하지 않도록 하면서 이러한 모순의 양극점을 동시에 직시케 해주는 맑스주의적 관점이 필요하다. 한편, 중국의 성장 극대화 전략은 계급 투쟁을 부정하고, 신흥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위해 계급 이데올로기를 희생시키고 있다. 중국의 노동자 계급과 농민들은 그들 자신의 계급 정당 건설을 전면적으로 다시 시작해야 할런지 모른다.

2) 맑스주의자들은, 상호 존중과 공동의 헌신에 기반한 그리스도교 좌파와의 장기적 동맹 관계(alliance)를 발전시킬 것으로 보인다. 전적인 동맹은 아니더라도,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및 군사적·경제적 전쟁의 위협에 대해 불편해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핵심과의 매우 중요한 동맹 관계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유물론이나 맑스주의적 종교 비판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 성경 연구와 종교사는, 혁명적 그리스도교도들이 우리와 오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반면에 그리스도교 우파들이 이에 대항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는 이 세계에서,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교육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맑스주의-그리스도교의 조우(遭遇)에서, 우리는 후자의 최악의 오용들을 전자의 가장 숭고한 이상들과 동렬에 놓을 수는 없다. 이상과 이상 간의 비교, 실천과 실천 간의 비교 모두에서 그렇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호소하는 교황이 신학상의 이단자들을 입다물게 만들고, 주교와 목사가 교구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며, 교회가 수세기 동안 여성의 평등권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종교에게 도덕의 영역을 양도할 수 없으며, 교회가 사회주의의 양심으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공산주의적 도덕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바, 공산주의적 도덕이란 일련의 설교들이 아니라, 영웅적 행위와 희생의 순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결정 과정 속에서도 우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일관성있는 사회적·개인적 힘을 말한다. 또한, 여기서 투쟁이라는 말은 이중의 의미를 띠는 것으로, 한편으로 혁명적 연대와 사랑의 관념에 관한 원칙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 예시와 논증을 통해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도와 맑스주의자 모두, 공표된 이상과 실제의 실천 사이에 놓인 커다란 간극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그 간극을 원죄와 타락의 개념으로 채운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간극은 우리의 실천을 뛰어넘는 열정을 불러 일으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것 what we might do'이라는 견지에서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 what we do'을 끊임없이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예시해준다. 만약 우리가 표방한 이상이 실천과 완전히 부합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의 완전한 고갈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우리가 지닌 관점과 종교적 우군들이 지닌 관점 간의 이러저러한 대조는 우리가 종교와 맺는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대조들은, 모든 제휴에서 나타나는 모순적인 협동적/대립적 관계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3) 세계 자본주의의 명시적인 승리는 자본주의적 방식과 논리에 대단한 위세를 부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발전 경로에 '현대적'이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있다. 심지어 '기업적인 business-like'이라는 단어에는 '탐욕적인,' '편협한,' '타락한,' '냉소적인' 같은 뜻 대신에, '현실적인,' '타당한,' '효율적인'이라는 의미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영 기술은 여전히 비인간적이다. 또한 '철저하게' 제한적인 그 효율성 개념이라든가, 농업, 건강, 산업, 주거 형태상의 자본주의적 발전 패턴은 모든 인류를 위협하는 만연된 생태-사회적 고통 증후군(distress syndrome)의 원천이다. 따라서 맑스주의는 이런 각각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사회적 경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기술적 경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한다.

농업 분야에 관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노동집약에서 자본집약으로, 무작위적 다종재배에서 특정 작물의 단종재배로, 소규모 생산에서 대규모 농업기업으로, 자연에 대한 순종에서 자연에 대한 통제로, 전통적인 인습에서 근대 과학으로 향해가는 단일한 경로만을 진보라고 파악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러한 발전 경로가 계급 투쟁과 지식의 불균등한 상품전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맹목적인 자본집약을 넘어 지식-집약 저투입(low input) 생산으로, 단종재배의 외관상의 효율성을 넘어 모자이크식으로 정비된 각각의 농지에서 각자 생산물을 산출할 뿐만 아니라 다른 농지의 생산성 제고에도 기여하는 농업기업의 계획적 다종재배 방식으로 나아가는, 생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합리적인 경로를 추구함으로써 균형을 추구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자기조정이 유지되도록, 생물학적-비료(bio-fertilizers), 질소고착미생물(nitrogen fixing microorganism), 광물성 균류(mineral-mobilizing fungi), 지렁이(invertebrate)를 이용한 쓰레기 재활용, 자연적 해충 관리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오히려 투입물을 줄이는 방식을 개발하고 있다. 우리는 농업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모두가 이러한 시스템의 기획에 기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쿠바는 부분적으로는 확신에 기반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특정 시기의 필요에 의해 이러한 발전 경로를 채택했으며, 그만큼 그 노력은 아주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것이지만, 아직 튼튼하지는 못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이 1만 평방 미터당 보다 적은 투입보다는 더욱 많은 투입을 요하는, 기술에 대한 자본주의적 요구와 대립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분석할 것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새로운 역사적 시대, 즉 포스트모던,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맑스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어떠한 진지한 논거도 대지 않은 채, 사회주의 이론을 시대에 뒤떨어진 것, 낡은 것, 무의미한 것, '지겨운 것' 등으로서 폐기해버린다. 이러한 상황은 맑스가 이미 묘사했던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들과, 진정으로 새로운 것들을 구별해야 한다는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전자에는 이런 것이 있다.

― 세계의 가장 고립된 지역에까지 자본주의가 침투하는 것.

―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상품 형태가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측면에까지 침투하는 것. 안구와 신장이 매매되고, 자궁이 임대되며, 정서적 위안은 시간당으로 구매되고, 의료직의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더불어 보건은 행정가에 의해 결정되는 상품이 되었다.

― 정보와 문화가 독점화되는 것.

― 연구가 지식산업으로서 조직되고 합리화되는 것. 그리고 자유무역이 무역상의 자유를 지배할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추동되는 것.

― 경기순환이 국제화되는 것(동아시아 경제의 붕괴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기습공격한 셈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피델[카스트로]이 이미 1983년 경에 제3세계 부채가 상환불가능함을 지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번영이 끝없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예측하지 못한 위기를 우리가 예견했다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정태적인 세계관에서는 '정상적인 normal' 것으로부터의 놀라운 이탈로 여겨지는 것이, 자본주의 발전의 불안정성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예측가능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유력한 비판자로서 사회주의 진영이 사라지자,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소유자에게로 거대한 힘의 이전이 일어났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을 사랑한다는 시늉을 연출할 필요가 없어졌고 그 대신, 노동시간 연장을 요구하고 고용안정성을 침식하며 작업조건을 더욱 철저하게 통제하고 지난 세기에 이뤄진 성취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보다 강력한 운동능력을 사용함으로써 그들 편의 계급 투쟁을 공공연하게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새롭고 아직 연구되지 않은 현상들도 존재한다.

1) 천연자원의 소진, 대기·수질·토양 오염, 동식물 및 인간의 신종 질병 발생, 기후 변화 등 생산 확대가 미치는 환경적 영향. 맑스주의는 이러한 생태-사회적 고통증후들이 자본주의 논리의 결과라는 걸 보게 해 준다. 심지어 이것이 자본주의의 두번째 모순, 즉 자본주의와 자연 사이의 모순을 구성한다고 주장되기도 했다(동유럽 국가들이 남긴 끔찍한 환경파괴 기록은 환경위기가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우리의 주장과 모순된 것으로 보이며, 또한 외관만으로 판단한 일부 논자들은, 대신 '산업주의'에 책임을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처럼 과도한 발전들은 자본주의적 발전경로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고 변증법적 관점 대신 기술관료적 '진보주의'의 발전관을 채택한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2) 생산과 재생산의, 그리고 상품과 사용가치의 노동을 겸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남녀평등의 방향으로 큰 걸음을 내딛은 사회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느 곳에서도 완전한 평등을 성취하지 못한 여성들의 지위에 대한 미해결 문제.

3) 민족주의의 놀라운 완강함(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증오에의 자연스럽고 항구적인 경향을 가정하는 인종분쟁[ethnic conflict]이 아니라, 이를 역사적으로 틀 지워진 하나의 정치적 선택으로서 파악하는 민족주의 분쟁[nationalist conflict]에 관한 것이다).

4) 뉴스 및 문화적 생산과 판매의 거의 완전한 독점. 그것들은 대다수 사람들의 의식 속에, 주입되는 순간 품성을 타락시키며 동시에 결코 도달 가능하지 않은 그러한 욕망을 불어넣는다.

5) 전자 통신의 도움을 받지만 그것에 의해 대체되지는 않는 생산의 새로운 조직과 국제연대에 대한 함의.

6) 생산으로부터 여러 단계 떨어진 금융 수단에 의해 주로 발생하는 경제 위기의 새로운 동학. 부분적으로 이는 투자가들이 자본의 회전율을, 최고 수준의 기술적 합리화에서 가능한 실제 상품 생산의 회전율보다도 상회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7) 경제적 힘에서는 이미 2류국이 되었지만 군사적으로 여전히 최강국인 미국의 위험한 역할. 군사적 힘을 경제적 이득의 지렛대로 활용케 하려는 압력은, 미국을 점점 공격적인 국가이자 모든 인간성에 대한 주적(主賊)으로 만들 것이다(고대 메스포타미아에서 토양 염화[鹽化]의 결과로 농업 생산성이 하락하자, 높은 농업 수확에 기반했던 도시들은 군사적 확장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8) 특정한 투쟁들을 둘러싼 '시민사회'의 '신사회운동들'의 등장. 이러한 투쟁들은 때때로 매우 전투적이고 단호하지만, 체계적 전망이 부재하며 종종 상호 고립적이다. 이러한 운동들을 '정체성의 정치 identity politics'라고 기각해서는 안된다. 모든 반(反)제국주의자가 민족주의자는 아니며, 마찬가지로 모든 페미니스트 투쟁이 고립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사회운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로, 자본주의 폐절의 전망을 결여하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 충돌을 빚을 수 있다. 만약 실업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된다면, 서로 다른 인종(ethnicity)들과 성(gender)들이 일자리를 놓고 다투게 될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수용된다면, 깨끗한 공기에 대한 요구는 일자리 요구와 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정당한 이유가 있는 해방적 투쟁에 임해서 그들은 너무도 적게 요구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적 조건들을 주어진 것으로 수용하고 만다.

둘째로, 신사회운동이 과연 계급 투쟁을 대체하는가? '신사회운동' 유형의 투쟁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미래의 변화 방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운동들이 철저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이유가, 활동 범위의 의도적인 제한에 기인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최근 신사회운동의 부각은,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 운동의 방향 상실과 상대적인 역량 부족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 운동들이 환경, 여성 평등 및 여타 해방적 투쟁의 주장들을 자신의 프로그램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받아안는 데 실패한 것은, 노동자 계급 스스로의 해방 속에서 사회 전체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공산주의당 선언}(이하 {선언})의 전언을 간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트의 파편화(fragmentation) 프로그램의 적절성을 반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아마도 이러한 [좁은] 시야가 불러일으킬 해악에 대한 경고일 것이다.

사회주의 경험을 분석할 것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9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의 승리의 불꽃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많은 곳에서 민중들은 "이윤이 아닌, 민중들을 위한 음식," "건강은 [당연한] 권리이지 특권이 아니다"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알아차린 구호들을 외치고 있다. 환경주의자들은 기업의 탐욕이 환경보호와 상충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으며, 새로운 투쟁성의 첫번째 징조들이 전세계 노동자 계급들 내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암묵적인 반(反)자본주의적 감정에도 불구하고, 광범한 대중들은 우리가 과거의 재앙, 실책, 범죄에 만족스럽게 대결하고 그것들이 재발하지 않게끔 보장하기 전에는,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운동을 신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그리고 전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민주주의 정당으로 행세한다고 해서 이를 달성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바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있었던 일을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는 해야 할 과제가 아주 많이 남아 있지만, 우리는 적어도 문제의 윤곽은 그릴 수 있다.

첫째, 동유럽과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발한 것은 붕괴가 아니라 반(反)혁명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는 적어도 두 집단으로 구성된 초기 또는 성장 중인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폐기된 것이다. 그 두 집단이란, 한 집단은 이미 재화와 용역에 대해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기업체 및 산업의 고위 경영자와 감독자들로, 특권을 통해 축적한 재화를 자본과 사적 소유의 기업으로 전화시키고자 했으며, 또 다른 한 집단은 국가경제의 붕괴 와중에 번창한 합법/반합법/비합법 부르주아지이다. 그들이 그 과정을 이끌었던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자본주의의 재수립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왜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주로, 민중이 장기간에 걸쳐 탈-정치화됐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가 아예 사용되지 않거나 계속 오용됨으로써 쇠퇴했으며, 대담하고 도전적이며 창조적인 변화의 철학인 맑스주의의 전유가 정책결정의 단순한 변명거리라든가 강단의 직업 또는 졸업학위의 요건 등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의 강제적 행진에 비해서 사회주의의 사회적 발전은 지체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스탈린과 체 게바라 간의 사상적 차이를 볼 수 있다. 스탈린은 모든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생산을 증대시키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사회는 그 변화들에 맞춰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에, 체 게바라는 의식과 사회적 관계가 경제와 발맞춰 함께 진보하지 않으면 두 가지 다 잃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그의 말은 옳았다.

이 말은 곧, 공산주의자가 민주주의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은, 사회주의 건설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중의 모든 집단적인 지혜를 동원하고, 사회주의 해체 과정에 저항할 최대한의 역량을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실수가 방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과제는 이전의 인류가 한 번도 시도하지 못했던 기념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끝내 좌절시킨 최악의 오용들, 범죄, 기회주의들을 막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서 공산주의자가 지녀야 할 도덕의 핵심이 도출된다. 만약 대중이 역사를 건설한다면, 피상적 슬로건으로 그들을 조종한다거나, 그들을 기만한다거나,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을 제한시킨다거나,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그들의 실제적 권위를 손상시킨다거나 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2) 우리는 공산주의 정부와 정당에 의해 저질러진 오류와 범죄를 설명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오류과 범죄를 구별해야 한다. 먼저 경제를, 나중에 사회관계를 발전시킨다는 생각은 매우 해악적인 오류이긴 했지만, 어쨌든 하나의 오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와 합법성의 억압, 동지를 공격하는 음모들, 일부 최정예 간부들의 숙청, 폴 포트의 대량학살, 변명거리로 타락한 맑스주의, 우리 대오 내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반(反)유대주의, 민족적 쇼비니즘의 용인 등은 범죄였다. 만약 우리가 그것들을 범죄로서 인식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의 재발을 방지할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혁명적이고 낙관적이며 용기있고 창조적인 그러한 대중운동을 결코 획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그 범죄들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범죄를 부인하거나 단순한 '오류'로 치부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범죄를 공산주의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부정해버릴 수도 없고, 스탈린, 베리야, 폴 포트, 케이예타노(Cayetano), 밀로셰비치 등에게 떠넘겨 우리 사이에서 추방해버리고 손을 씻을 수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으며,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한 범죄적 행위들이 사회주의의 본질적 요소이며 사회주의의 실제적 정의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없다.

농업에서 빌려온 한 이미지가 도움이 되겠다. 사탕수수 녹병은 사탕수수 자체가 아니라 사탕수수가 걸리는 병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탕수수의 병이지 토마토의 병은 아니다. 이것[사회주의의 범죄]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다시 한번, 해결책은 우리가 모순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운동이 그러한 왜곡에 왜 그렇게 취약한지 깨달아야 한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올바른 방향에 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계승된, 그리고 현재 존재하는 물적 조건을 가지고(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미래를 건설한다. 때문에 우리가 대체하려고 투쟁하는 사회의 오용들, 위계들, 기회주의와 실용주의들은 재생산되기 쉬운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다음의 이론적 과제를 안겨준다.

의식 및 그 변화에 대한 이론을 향하여

사회주의 나라에서든 자본주의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든,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혁명가의 과업이다. 혁명가의 임무는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체 게바라의 지침에 비교하면 이는 퍽 온건한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첫 인상은 잘못이다. 첫째로 그것은 체 게바라의 사상이 지닌 복합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며, 둘째로 그 과정에 대한 맑스주의적 접근을 간과한 것이다.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의식이 변화한다고 설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의식은 슬로건의 묶음이 아니라, 서로가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상충되기도 하는, 새로운 경험들에 의해 강화되거나 약화되는, 믿음, 판단, 느낌들의 총체적인 체계인 것이다. 그것은 체계적 네트워크이다. 새로운 경험들은 그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여과되며, 그 네트워크의 어떤 경로를 통해서 증폭되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한다. 몇 가지 사고들이 바뀌더라도, 반면에 전체 이데올로기에 더욱 핵심적인 의견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체계의 용량을 넘는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싸움은, 경험의 형태를 바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그 경험을 해석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에 달려 있다. 조언과 교육, 그리고 가장 영감을 주는 모델조차도 그것과 상충하는 경험의 벽을 넘을 수 없다. 그러나 매일의 일상이 어떤 이론적 입장을 뒷받침하게 될 때, 훌륭한 주장, 모델, 가르침은 승리할 것이다.

상호모순적이지만 대개는 한 의식 속에서 분리되어 있으면서 서로 만나지 않던 상이한 믿음들과 느낌들이 이제 갈등에 돌입할 때, 의식은 변화한다. 또는 새로운 경험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기존의 생각과 모순을 일으킬 때, 이데올로기의 재조정이 일어난다.

자본주의하의 당면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사고들이 생활에 의해 도전받는 교육적 계기를 창출하고 그 사건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활동이 그 참여자와 반대자 및 구경하는 이들의 의식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활동을 평가해야 한다.

사회주의하에서, 노동은 중앙집중적으로 조직화된다. 생산수단은 노동자 계급의 소유이지만, 그것이 국가적 계획 수준이나 국가적 필요에 의해 단지 선언만 될 뿐 작업장 수준에서는 기존의 명령/복종의 위계적 구조가 여전히 우세하다면, 그 결과는 사회주의의 수동적 수용을 입증하는 것이고,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참여보다는 냉소와 무관심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나 의식의 변화를 위해 투쟁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의식이 무엇인지, 이데올로기 체계를 구성하는 상호작용의 네트워크 내에서 사상과 감정들의 상호보족과 모순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람시, 브레히트, 파농, 프레이리, 그리고 체 게바라의 작업이 유용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맑스주의의 방어

오늘날 맑스주의에 대한 공격은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하나는 기존의 반동적 적들로서, 늘 그러했듯이, 우리를 영원히 제거하기 위한 운동 속에서 우리의 약점을 포착하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또 다른 원천은 우리의 동지들로서,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의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비생산적인 교조주의와의 갈등에서 깊이 상처입고 과거의 오류와 범죄의 폭로에 의해 좌절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덧없는 현란함에 눈이 먼 채 맑스주의를 포기하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맑스주의를 폐기하려면 그들은 먼저 맑스주의를 반박해야 하고, 또 반박하려면 먼저 반드시 맑스주의를 과잉단순화하고 왜곡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그들은 우리를 비생산적인 경직성의 최악의 사례로 치부하면서, 자신들이 보다 시대에 부응하고 개방적이며 유연하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다.

맑스주의를 방어하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재확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작업은 유연성, 자기비판, 창조적 발전을 전제로 한다. 온실의 맑스주의는 우리를 둘러싼 사상의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며, 지구적/지역적 수준의 새롭고 불확실한 변화 물결 속에서 우리의 항해를 인도할 수도 없다. 그 작업은, 철학, 과학, 문화의 이슈들을 외면한 채 맑스주의를 단지 노동자에게 우호적인 정치경제학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해야 한다. 맑스주의의 방어는, 그들이 허울좋은 상식으로 우리를 제압하지 못하도록, 모든 영역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선언}은 공산주의자와 여타 사회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이, 그 국제주의와 더불어, 운동의 전체적 조망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의 어떤 측면도 영원히 우리의 시야 바깥에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던의 궤적은 최근 몇 해 동안의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충격을 받은 이들에게 맑스주의의 포기를 호소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세계 인식에 도움을 주는 어떠한 일반 이론의 가능성도 포기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이론을 '거대 담론'이라고 조롱하고, 어떠한 일반 이론도 ― 우연히도 무솔리니로부터 빌려온 용어인 ― '전체주의적'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엄밀성이 결여돼 있으며, 유행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모호하기만 할 뿐인 개념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들이 찬사의 용어로 사용하는 '다원주의'가 한 예이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몇 가지 아주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1) 미해결 문제에 대한 완전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촉진시키는 의견의 다양성. 이는 모든 의견이 존재론적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동등하게 유효하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경계를 넓혀나감에 있어 이미 승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논쟁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고무되어야 할 부분적인 정보, 막연히 그럴듯한 주장, 미검증 가설 등이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경계가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된다거나 한 문제를 갖고 진척없이 논쟁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과학의 활기보다는 차라리 침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학에 있어, 의심은 인식을 향한 한 걸음이지, [그 자체가] 상대적인 확실성보다 더 심오한 인식론적 목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확실성은 물론 상대적인 것이다. 정치에서처럼, 과학에서도 모든 이론들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며, 오늘의 위대한 이론도 조만간 좀더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에 의해 대체되리라는 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이론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상대적으로 진리인 이론들과,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으면서 부당한 것을 부추기고 정당화하거나 또는 용인하는 이론들을 분별해야만 한다.

이론이 대체되는 과정 자체가 매우 복잡하다. 대개 그것은 하나의 이론을 기각시키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것 또는 논리적 일관성의 상실에 직면하여 일어나는 어떤 이론의 임시방편적인 땜질의 누적 때문에 일어난다.

2)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다양성을 종종 혼동하는 또 다른 종류의 다원주의가 있다. 농업을 공부하는 어떤 학생들이 생태계 측면에서 생산 체계를 분석하고, 다른 학생들은 농촌의 부당한 구조를 고찰하고, 또 다른 이들은 농촌 지역의 인구 구조를 조사하였다면, 이것은 서로 다른 의견 제출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러한 의제 모두는 자체의 목적상 분명히 합당한 것이며,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는 그러한 의제들을 교직(交織)하고, 그 의제들이 더 큰 전체로 보면 부분적이고 상대적으로만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급구조와 토지보유가 생산기술에, 나아가 생태변화 등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연구하는 일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옛 이야기처럼, 그들은 각자 자신의 부분적인 관점에서 코끼리를 그려낸다. 그 이야기는, 모두가 자신의 고유한 현실을 갖고 있다는 결론으로 이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그것들이 모인 것이 코끼리이고, 그들은 서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으로. 만약 그 이야기가 네 명의 여성 장님의 이야기로 고쳐진다면, 그들은 코끼리에 대해 좀더 포괄적인 관점을 종합하게 될 것이다!

3) 모든 진보주의자들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착취, 동성애혐오에 맞선 투쟁을 인간해방 투쟁의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용들의 목록으로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혐오, 계급차별' 등이 우리에게 제공될 때, 그것들이 그 해악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가진 동학이 매우 상이하다는 사실은 사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해결책은 아주 다르다. 우리가 인종주의를 철폐하려고 할 때, 그것은 인종주의에 의해 확립된, 과학적으로 근거없는 '인종 race'이라는 범주 자체를 철폐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성차별주의를 철폐하려고 할 때, 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을 철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계급차별'의 분쇄는 어떤 나쁜 태도를 청산하자는 것이 아니라 계급착취체제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4) 이해 관계의 다양성.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군인, 기업가, 농민과 전문직업인들의 공존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직업과 계급들을 혼동하고 착취와 억압의 영속성을 옹호한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관용이라는 가면 속에 숨겨진 그들의 제안의 진정한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사상에서 엄밀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개인적 특징이 아니라, 원칙에 관련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에 대한 과학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맑스주의를 부정하려고 할 때, 그들은 지난 시대의 역사와 이론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만큼 세계는 새로워졌다고 주장하면서 맑스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선언하고는, 그리고나서 18세기 아담 스미스의 자유시장 경제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다당제(또는 미국 사례처럼, 양당제) 선거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 '민주주의'와 같은 현재의 부르주아 담론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택하며, 실제로 민족주의의 갈등인 것을 두고 '인종분규 ethnic conflict'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최근 몇 십년의 사건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고, 우리의 과학이 초기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급격한 [역]이행을 적절하게 설명해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같은 현실은 진지한 정치적, 이론적 작업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를 개선시키기에 충분할만큼 세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적 기획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경우에든 과학적 사회주의의 슬로건을 부정하는 이들은 과학적 과정의 실재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다. 맑스주의는,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그렇다고 간주되는 '실증과학'이 결코 아니며, 더욱이 물리학과 생물학 역시도 실증과학이 아니다! 과학적 연구의 목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객관적 진실에 도달하는 길이라는 자연과학의 자화자찬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서, 그렇게 추정되는 과학의 확실성을 맑스주의와 일반적 사회과학에서의 이론적 혼란상과 대조시킨다. 그러나 과학은 확실성(certainty)이 아니다. 결국 모든 이론은 오류를 범하거나 부분적인 것으로 판명된다. 물질(matter) 이론들이 길어야 겨우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근본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설명들에 잇따라 새로운 설명들 ― 쿼크, 글루온(gluons), 끈(string), 다차원 초끈(superstrings) 이론 등 ― 이 줄을 잇는 최근 물리학의 발달사를 보라. 우주론, 공중보건, 농업, 수학과 화학에서도 놀라운 일들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은하계에서 엄청난 양의 보이지 않는 물질의 발견, 하이테크 생산방식이 위험(risk)에 대하여 갖는 취약성, 수학적 카오스, '불활성' 희소기체들('inert' noble gases)의 화학적 활동성, 이 모든 것들은 과학의 오류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과학의 활력과 자기정정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맑스주의에도 해당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기본적 분석은 150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효력을 지니는 반면, 사회주의에 대한 분석은 아직 초보적인 상태에서 교정(矯正)의 도상에 있다.

과학의 오류가능성이 불가피한 까닭은, 우리가 미지의 것을 연구할 때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같은 것이라 간주하고서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미지의 지식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마찬가지로 과학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지만,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는 달리 과학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어떤 영역을 과학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것은, 방법론, 새로운 것에 대한 반응능력, 새로운 도전을 검증할 수 있는 자기비판 능력 등이다. 여기에 필요한 과학적 정신은, 자신이 올바르다는 점이 아니라 상충되는 사실(contradiction)에 개방적이라는 점을 자부심으로 가지며,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이론에 집착하지 않되 싫증과 지루함 때문에 유효한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 정신이다. 마지막으로, 이는 외양 이면의 현실을 간파해내는 핵심적 개념을 포착하고 있을 정도로 과학적이어야 한다.

맑스주의는 또한 강단 과학이나 기술 과학과는 매우 다르다. 맑스주의는 학문 제도와 함께 거리와 작업장에도 모두 뿌리를 둔다. 맑스주의는 직업적 학자와 공인되지 않은 사상가 모두에 의해 생산된다. 솔직히 말해 맑스주의는 당파적이며, 불의를 고무하고 정당화하고 용인하는 모든 이론들은 잘못되었다는 작업가설을 기꺼이 채택하고자 한다. 맑스주의는 사상과 감정의, 어느 하나에 종속되지 않은 채로의 통일을 주장한다. 맑스주의는 사회적/생물학적, 무작위적/결정론적, 태생적/환경적, 물리적/심리적과 같은 잘못된 통속적 이분법을 기각한다. 맑스주의는 자신의 실천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며 역사적 뿌리를 갖는 것의 일부라고 인식함으로써, 의식적으로 반성적이다. 따라서 이는 강단 분과학문에서 말하는 공식적 의미의 '과학'도 아니고, 세계의 일부를 인식할 목적으로 경험을 조직하기 위하여 자원과 제도가 따로 떨어진 채 이뤄지는 지식 생산의 특정한 국면으로서 '과학'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세계를 인식하는 과학적 접근이다.

맑스주의의 방어는 보다 훌륭한 분석과 비판적 개방성으로, 지식의 전 영역에서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전의 맑스주의가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그리고 영국 정치경제학을 자양분으로 흡수했던 것처럼, 이제는 생태학과 페미니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의 통찰력을 단지 정치적 슬로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지적 구성에 대한 이론적 기여로서 인식해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운동을 전체적으로 바라본다."

<뉴욕 맑스주의 학교 New York Marxist School>는 맑스주의의 재활성화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학교는 정당도 아니고 어느 한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도 아니다. 활동가 단체도 아니다. 그러나 이 학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이들은 활동가들이고, 그들은 매일의 정치적 실천 속에서 이론적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리고 현재에 맥락을 부여하고 넓은 범위의 프리즘을 통해 매일매일 지향해야 할 비전을 필요로 하기에 이 학교에 참여한다. 전세계의 동지들과 연대하는 국제주의자들이, 혁명의 재무장이라는 우리의 고된 과제에 동참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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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서비스 향상이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사유화가 팽창되고, managed care가 보급되어 온 과정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의료 시장화가 소비자의 선택권을 늘리고 다양한 형태의 의료 공급을 증가시켜서서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일 것이라는 전형적인 논리는 의료 시장화를 주장하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의료서비스의 질이라는 것이 더 많은 환자들을 성공적으로 치료해내는 게 아니라 소파와 가구를 바꾸고 벽지를 깔끔하고 예쁜 것으로 사용해서 더 비싼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하고, 병원의 의료기기, 컴퓨터를 최첨단으로 갈아치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서비스의 질적 향상' 이란 건 언제나 이런 방식일까? 9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화가 진행되면서 대학들이 경쟁하듯 분주히 새건물을 지어대고 강의실을 호텔처럼 꾸며대지만 돈안되는 과는 통폐합되고 자본이 필요한 과에만 자원이 집중되면서 학과 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의료 서비스 질 향상과 그 현실의 모습과 꼭 닮아있지 않나. 거기다가 정작 수요자들(소비자, 학생  whatever!!)은 등록금 때문에 학교를 포기하거나 휴학하거나, 생존의 압박으로 공부를 전념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 흥미롭게도 '질의 향상'이라는 구호가 사회의 갖가지 영역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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