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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탈 없는 일상을 꿈꾸며.

<일상과 일탈, 그 바깥으로.>

 

어릴 적 어른들이 늘 하시던 말마따나 꿈은 ‘크면 클수록’ 행복한 것이었던가. 대학생들은 행복한 연애와 여행을 꿈꾸고, 직장인들은 집에서 쉬거나,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상상을, 중-고등학생들은 대학교에 가는 미래를 꿈꾼다. 모든 이들이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리 행복하지 않다.

꿈을 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꿈을 꾼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에 와서는 특별한 경우가 되어 버렸다. 보통 꿈이란, 행복한 환상을 만들고 그것을 갉아 먹으며 하루하루 삶을 미래로 이어나가기 위한 사탕과도 같은 것이다. 삶과 일상이 초라해 지면 초라해 질수록 인간은 꿈과 환상을 만들게 되고, 그것으로 하루하루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행복, 그것은 흡사 가짜음식을 먹고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며 자위를 하며 허탈하게 성욕을 채우는 것과도 같다.

프로그램 된 듯 무감각하게 같은 길을 다니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자신을 느낄 때 집을 나서 한발 한발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득 멈추고 싶을 때, 하루에도 몇 번씩 일탈에 대해서 생각한다. 다니던 직장을 잠깐 휴직을 할까, 사표를 쓸까. 학교 가기 싫은데, 오늘도 그걸 해야 하나. 결국 같은 길을 걸어가며 이렇게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결국, 우리는 탈출을 꿈꾼다. 이 지겨운 일상에서의 탈출. 그것을 우리는 ‘일탈’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다른 삶을 상상하며 일상을 견디지만 그 견딤속에는 조용히 하루하루의 불만스런 일상이 아닌, 삶을 향한 열망이 차오르고 있다. 세계에 대한 기계적인 순응이 아닌,삶에 대한 의지 그것이 곧 일탈에의 욕망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일탈은 허용되어 있다. 지금의 일상은 일탈을 포함한 일상이다. 학교엔 방학이, 직장엔 휴가와 휴일이 있다. ‘일탈’에 대한 공식적인 허가다. 만약 이 일탈에 대한 허용이 없다면, 과연 지금의 지루한 일상은 뒤집히지 않고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며 버틴 댓가로 돌아온 이 휴일. 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가. 우리는 이날을 그냥 보낼 수 없다. 우리는 더더욱 부지런히, 휴일을 더더욱 행복하고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고, 그 동안 해소되지 못했던 욕구들을 충족하러 돌아다닐 것이다. 먹고 싶었던 것을 먹고, 새로운 체험을 하고, 운동을 하고, 영화와 공연을 보고, 여행을 가고. 이 황금 같은 휴일(Golden weekend!)인데 말이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삶에 대한 엄청난 열망을 느낀다. 한참을 눌렸다가 반사적으로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말이다. 일상의 무감각한 자기분열의(자기 욕구와, 신체의 분리) 상태와 휴일이면 솟아오르는 삶에 대한 강박증적 열망은 우리 삶을 관통하는 두 개의 축이다. 정신병과, 허무가 온 세상을 잠식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우리는 평일이나 휴일이나 늘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적이고 부자연스런 몸의 흐름에서 우리는 한 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유희와 놀이 까지도 신체의 자연스런 흐름이 아닌 노력하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기 위해 애쓰게 되는 상황. 거기서 우리는 삶의 불감증과 욕구불만에 시달린다. 일탈의 시간조차 우리를 피곤과 욕구불만으로 잠식해오는 우리들의 삶에 과연 일탈이 어디에 있는가!

형태야 어찌되었건 휴일이면 솟구치는 일탈, 삶에 대한 강한열망은 왜 우리를 더 큰 피로와 허무함으로 몰아가는 것인가? 내 몸을 둘러싼 세상의 배치는 우리의 일탈과 삶에 대한 욕망을 쪽쪽 흡수해 간다. 우리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와도 같다. 어쩌면 주말이면 우리 스스로 피를 빼고 살을 베어 바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우리는 물신物神(의 종교)이라고 부른다. 특히 휴일이면 세상엔 물신을 찾고 숭배하러 다니는 신도들로 온 세상이 바쁘다. 그 신도들에게 물신은 행복을 선사한다. 거기엔 ‘돈’이라는 대가가 필요하다.

외식과, 레져, 미디어, 스포츠, 이벤트·······. 삶의 욕망의 충족은 ‘이미’ 상품과 서비스로 존재하며 우리는 그 소비의 동선을 맴돈다. 모든 것이 상품과 소비의 형태로 존재한다. 운동의 욕구에 대한, 어떤 짜릿한 체험에 대한, 새로운 것을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싶은 것에 대한, 여행에 대한, 심지어 정신적인 평화와 영적인 체험에 대한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상품의 형태로 존재한다.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그것을 누리기 위한 ‘돈’. 화폐다. 휴일의 일탈에서 우리의 탈주에 대한 열망은 TV와, 사람과, 웃음과, 지식 여타 모든 것을 소비하는 형태로 흡수되어 버린다. 그러한 소비 속에서 (일상에 대한) 불만이 줄어드는가 싶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다른 삶에 대한 욕망 또한 어디론가 증발해 버린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다시 돌아온 일상에서 ‘그래, 이게 내 삶이야’ 한숨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삶을 자위한다. 그리고 다시 더 나은 휴식과, 일탈의 때를 꿈꾸며 그 때를 위해 마련할 것들(소유물! 돈!)을 위한 준비로서의 일상을, 내 몸을 가동시킨다.

나는 절규하며, 묻고 싶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간단히 현대인이라고 하자) 일상이 랄 것이 있는가? 몸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삶을 구성하고 만들어 가는 ‘일상’,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과연 있는가? 우리에게 일상은 없다. 노동과 일상, 유희와 일상은 멀어진지 오래다. 노동에 필요한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아닌, 인내력과 무감각이며, 유희에 필요한 것은 그동안 충족되지 못한 모든 욕망에 대한 거대한 보상, 즉 쾌락과 축제, 이벤트다. 이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다고. 잘 살기 위해서 애썼고, 행복하기 위해서 애썼는데 늘 허전하고 억울하다고.

누군가는 지금은 5일 일하고 이틀 쉬지 않느냐. 과거엔 6일 일하고, 고작 하루 쉬거나 7일 내내 일하기도 했다고, 배부른 소리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것 같다. “Shut up! 불감증 환자 같으니라고.”

저 삶에 대한 불감증! 삶에 대한 무감각함! 그것이 기존의 삶을, 사회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재생산해 낸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행복과, 휴식이 아닌, 일상이다. 치열하기도 하고, 한가하기도 한, 자연스럽고 충만한 일상이다.

우리의 불만의 핵심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느냐 이틀 쉬느냐, 노동시간이 몇 시간이냐가 아니다. 노동이건, 유희건 일상 그 자체를 어떻게 행복하게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의 질문이다. 활동 자체가 누군가에게 행복함을 선사한다면 하루에 열 시간, 열세 시간 일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노동의 시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생산하는 노동의 질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제기한다.

자연스럽게 슬퍼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기뻐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화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우리는 그러한 일상을 원한다! 우리에게 행복한 노동과 건강한 유희라는 단어가 있는가? 화폐에 대한 불안과 갈망의 사이에서 모든 스트레스와 불합리함을 인내와 무감각으로 버티는 노동, 쾌락과 이벤트로 소비되는 유희. 우리의 신체와 삶은 그 둘의 사이에서 구성되는 삶의 리듬에 취해 무표정함과 정신병을 호소한다!

노동과 유희는 반대말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노동의 반대말은 삶의 소비다. 유희의 반대말 또한 소비이다. 인내하고 억지스러운 삶으로 구성된 일상과 그러한 일상에서 만들어지는 일탈, 삶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상품과 서비스를 통해 흡수하며 사람들의 생명력을 빨아먹고, 정신병에 걸리게 만드는 체계. 그게 바로 자본주의가 증식해 가는 방식이 아니던가.

나는 굳이 혁명이나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어떻게 살까 모색하는 것에, 내가 활기차고 건강하게 사는 것을 궁리하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는 이미 내 몸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리듬 한가운데의, 정신병을 왔다 갔다 하는(건강에 대해 이미 무감각 해져서 이런 삶의 리듬이 정상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일상에서 벗어날 궁리. 일탈을 꿈꾸지 않아도 되는, 일상에 대한 꿈! 가능할까? 세상에 대한 요구와 투쟁도 필요하지만, 내 몸과 삶에 대한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사회의 리듬은 지금 내 삶의 공간과 관계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서와, 욕망, 세포들 까지 구성해 자신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증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내가 행복해 지는 것, 사회가 건강해 지는 것은 함께 간다. 그래서 혁명이건 진보건 시작은 무언가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포획된 내 신체의 정서와, 삶의 리듬을 바꾸는데서 시작한다. 나는 정신병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고, 충만한 삶을, 충만한 일상을 꿈꿀 뿐이다.

자.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어떻게 누구와 삶을 재밌게 꾸려갈 것인가?

 

 

 

릴레이로 글을 써서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무진장 갑갑하다. 정신병에 걸리지 않으면 반쯤 죽은것처럼 무감각하게 살거나의 일상과는 다른 일상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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