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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 화려하다 화려해

삶과, 사회에 대해서 화려한 개념과 이론, 논리와 수사학들을 빌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저 사람들의 언어는 왜 그렇게 화려했을까. 언젠가 내게 공부처럼 보이는 것, 자기 언어를 가진다는 것은 아마도 저렇게 개념적인 정리를 잘 해나가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었나 보다. 혹은 자기 콤플렉스 였거나.

<생의 한 가운데>라는 소설 속 주인공이 말했다.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은 그것을 결코 알 수 없고, 그것을 한 번도 묻지 않는 사람은 그 대답을 알고 있는 것 같" 다고. 삶에 대해서, 우주에 대해서, 적어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몸을 맞대고 사는 그 모든 부분에 대해서의 앎과 역사란 그 세계에, 내 삶에 존재하는 아우라와 신비를 모두 제거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닐까. 이건 이런것이고, 저건 저래서 저러한 것이고... 무언가를 안다고, 혹은 알고자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그것에서 튕겨져 나와 버리는 것은 아닐까. 기존에 내가 생각하던 이론들, 개념들을 바꾸면서, 그러니까 '아 이건 이렇게 되는 거고, 저건 저렇게 되는 거니까, 이러저러 해서 요렇게 되는 거잖아!' 라고 생각해서 글을 쓰고, 정리를 하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했다' '새롭게 발전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들은, '자유'라는 것 또한 자유란 이런 것이고, 일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라고 인식하고, 말하는 것으로 기분좋아 하며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의 이성에게 도둑맞지 않을까. 허상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인가를 말하고,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큼의 삶의 공간, 삶의 관계를 자기가 만들고 돌파한 뒤에, 그 삶의 이야기에서 이론과 개념들을 말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를 말하고,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 내 몸에 아무런 자극을 주지 못하니까 말이다. 순차가 바뀐채로 끊임없이 공부처럼 보이는 것을 하다보면, 결국 책이나 세상을 읽고, 그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 것 외에 모든 삶이 텅 비어버릴 것이다. 왜냐면 지금의 삶의 관계와 공간을 먼저 열어 젖힌 후에 말과 이론이 생겨나야 하는데 그 순차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었다. 그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조차 결국엔 이론과 개념들 속에서 삶을 구가하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묻는다. 화려한 저 개념들과 이론들을 말하고 생각하는 있는 나와, 사람들의 몸뚱아리는 진정 얼마나 풍족한가. 결국 많이 사는 만큼 많이 아는 것이 아닐까? 내 몸이 사는 만큼 나는 아는 것이 아닐까. 살 궁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관계를 직접 만들면서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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