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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갱들이여>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기괴한 노스탤지어의 끝은 시시한 자기파괴였고, 역사적-사회적 상상력은 증발된 채 무력한 알레고리만이 남았을 뿐이다. 결국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절대기억으로 중핵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는 이야기이다. 겐이치로는 그때 그 처절했던 시간들을 아이러니로서 기억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렇게 성공한 글쟁이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또 다른 아이러니를 낳게 되고, 그 순간 기억이 가진 절대성은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들은 희미한 반복을 통해서만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건을 재생산해내지 못하는 사건은 무용하다. 무용성을 획득한 사건은 멋진 서사적 질료가 되어 거리의 군중 속을, 극장의 스크린 속을, 책장의 먼지 속을 배회한다.
사건(들)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같은 열도에서는 그것을 설익은 낙관주의자들의 유희로 기억하기도 하고(식스티 나인), 바다 건너 사건의 중심지였던 곳에서는 탐미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의 분출로 기억하기도 한다(몽상가들). 방법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사건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만큼은 위 작품들 사이에서 차이점을 찾기가 힘들다. 그들은 일관되게 ‘그때 그 사건’을 아이러니의 영역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사건을 아이러니의 영역에 가둔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역사를 아이러니의 연속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 아이러니의 이름 앞에선 희대의 독재자도 파쇼적 열기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히틀러는 우연히 나타났다가 우연히 사라진 아이러니한 인물이었고, 파시즘은 민족-국가주의의 희비극적 배리였다. 그렇다. 이질적 계열들의 우발적 조우가 만들어내는 역사의 유희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세계는 아이러니로 점철되어 있고, 인간의 삶은 그 아이러니를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때 그 사건’이 아이러니에 대한 대항으로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경제적 동물들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 ‘그때 그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건 단순한 재현 그 이상이다. ‘그때 그 사건’이 경제적 동물들의 세계를 보편화시켰다는 지적도 있지만(이것도 일종의 아이러니인가?), 나는 그것이 사건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상황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은 오로지 자연적 아이러니를 초월한 상태에서만 ‘현존’할 수 있다. 다만 사후에 아이러니로서 ‘기억’될 뿐이다. 사건은 계열들의 배치과정에서 상황의 틈을 뚫고 솟아오른 일종의 변이이다. 거기에는 그 어떤 초인적 의지도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연을 넘어선 우연이고, 공통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상상력의 동시적 분출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의 과정과 굉장히 유사하다.) 상상력이 아이러니의 우위에 서는 순간 모든 무력함은 해방적 행위들에 의해 전치된다. (그리고 이것은 문학과 예술이 수행해야 할 본연의 임무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은 완전히 방기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그때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건 ‘앞으로 도래할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동시에 사건의 도래를 막는 경제적 동물들의 윤리적 외피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때 그 사건’이 겨냥했던 지독한 현실의 모순들은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동물들은 도착적 윤리학을 통해 사건의 도래를 끊임없이 유예시킨다. 그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무기들은 다음과 같다. 1) 재앙의 스펙타클에 대한 끝없는 환기, 2) 인권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쟁이라는 쇼비즈니스, 3) 결국엔 모두가 선량한 피해자라는 알량한 사해동포주의. 특히 3)의 이름으로 펼쳐지는 집단 망각의 쇼는 자유-책임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어진다. 자유주의적 세계/역사관에서 자유는 뻔뻔한 관용과 양보의 제스처로 나타난다. 결정불가능성이라는 구조주의적 신의 보살핌 아래 ‘선량한 피해자들’은 역사의 폐허 위를 자유롭게 활보한다. 미래의 사건은 이 윤리적 외피의 취약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공격한 후에야만 도래할 수 있다
1. 유용 = 자본제 생산
첫 번째 에피소드. 광동의 한 의류공장에서 여공원들이 재봉틀을 다루며 옷을 만들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흔하디 흔한 제3세계 공장의 풍경. (여기서의 제3세계란 단순한 지리적 분류를 뛰어넘어, 자본주의 국가 내부에서 제1세계와 함께 상존하는, 동시에 언제든지 확대-재생산이 가능한 '광대한 게토'를 의미한다.) 그리고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육체적/정신적 질병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 이것은 뒤에 펼쳐질 (영화적) 마법을 위한 준비단계일 뿐이다. 다만 그 유용한 생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산의 외부에선 곧 무용한 존재로 전락한다는 점만은 상기해두자.
2. 무용 = 예술
유용성의 논리에 대항하는 아티스트 마커의 방식. 그것은 비인격화된 상품 대신에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진, 만든 이의 혼과 역사가 담긴 '예술품'으로서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기획은 서구 명품브랜드들의 전략과 본질적으로 같은 원리를 따르고 있다. 아티스트에 의해 창조된 독창적 디자인, 대량생산되지 않는 옷의 고유성,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옷의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점까지. 이러한 명품들은 이제 '자본제 생산논리'에서 벗어나 '유한계급 논리'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계급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위치한 사람들은 자본제 생산이 만들어내는 살벌한 현실에서 벗어나, 품위와 낭만으로 가득한 탈자본주의적 문화들을 향유할 수 있다. 무용한 것들에 대한 접근은 유용한 것들에 대한 걱정과 부담이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나는 이렇게 무용성을 추구하는 예술들을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부른다. 나는 이런 예술들을 존중하며, 자신의 고유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내주길 바란다. 다만 예술의 자율성이니, 정치-사회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니 하는 헛소리들은 자제해줬으면 한다.
3. 무용한 존재들의 절대적 유용성
첫 번째 에피소드의 반복, 혹은 변주. 노동자들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은 같지만, 이번엔 생산과정이 아니라 옷을 입고 고치는 모습들을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합리적 교환이 아니라, 인정과 호혜에 의한 교환이 이루어지는 양장점. 그리고 탄광일로 얼룩진 작업복을 벗고 몸을 씻는 노동자들의 '숭고한' 뒷모습. 자본제 생산(유용)의 차원과 예술(무용)의 차원을 넘어서 옷은 그들의 삶에 녹아 스며들고, 결국엔 삶과 구분되지 않는 '부분으로서의 삶'이 된다. 비록 자본제 생산에 의한 비예술적인 옷들이지만, 그것들은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서 예술을 뛰어넘은 예술성을 구현해낸다. 침묵의 응시가 유도하는 부끄러움, 반성적 사유, 그리고 필요에 대한 감각들. 이것이 내가 앞에서 말한 (영화적) 마법의 정체이며, 이러한 마법은 또다른 반복과 변주를 통해 확대-재생산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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