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

2009/12/08 06:07 잡기장

얼마 전에 다시 엄청난 폭풍이 밀려왔을 때, 그 동안 미루고 있었던 책장정리와 과외문제집 정리를 했다. 그러던 중에 정말 기절할 만큼 놀랬던 것은, 내 책상 밑 작은 책장에, 항상 야오이나 빼보곤 했던 그 책장에 뭉크의 일기를 번역한 한국어책이 있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종로에 살았을 때 샀었던 것도 같았다. 그렇다면 적어도 3년은 넘게 내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종로 집을 나올때 책은 무거워서 거의 다 두고 나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정말 우연이라기엔 소름끼치는 일이었다. 정말 이 엄청난 수확이 좋으면서도 이걸 갖고 있음을 몇년 간 전혀 몰랐다는 것, 뭉크라는 화가에게 관심을 지독히 쏟게 된 것이 매우 최근이라는 것 등등의 생각에 머리 속이 살짝 복잡했었다. 오랜 마비의 기간을 거치는 와중에도, 아마 나의 우울증이 나도 모르게 뭉크의 그것에 이끌렸던 걸까 하는 생각에 좀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이렇게 내 몸은, 혹은 내 정신은 나에게 무던히도 신호를 보냈었구나. 좀 슬퍼지기도 한다. 불과 3-4년 전의 나를 두고 "어린 나"라고 하면 좀 웃길 지 모르겠지만, 최근의 나에게 그 당시의 나는 너무나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라, 그렇게 어릴때도 나는 우울했구나 슬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어쩌다 어제 발레를 다녀오고 10시에 잠들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마크 로스코의 전기를 마저 읽었다. 중간에 마네도 읽고 좋은 이별도 읽느라고 굉장히 중간 텀을 길게 쉬다가 마저 읽은 책이었다.2008년 봄에 뉴욕 현대 미술관 MOMA에 갔을 때, 나는 한 전시실을 거의 다 메우고 있던 큰 캔버스의 그림들에 엄청나게 정신을 뺏겼었다. 너무나 커서 거리를 두고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그림. 하지만 나도 모르게 점점 빨려들어가서 코 앞에서 보게 되는 그런 그림. 다른 화가들을 엄청 몰랐던 무식했던 나는 미친듯이 사진을 찍고, 화가의 이름도 찍어 두었다. 그게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었다. 그 당시 내가 그 그림에 그렇게 빠져버렸던 것은 그 화가가 정말 너무도 잘 하는 화가라서 였을까 혹은 나의 우울증과 마크 로스코의 우울증이 만나던 순간이었던 걸까.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로스코의 마지막은 자살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우울증이 스민 그 그림을 나의 무의식이 알아 본 것일까. 이제 다시 그때 찍은 사진들과 책의 도판들을 보면, 그의 색채는 너무도 깊이 깊이 우울하다. 뭉크가 보여주는 우울과는 또 다른 느낌의 우울함과 고독함이 정말이지 가슴을 후벼판다. 이런 색채를 2008년 봄의 나는 너무나 아름답고, 세련되고, 멋지게만 느꼈었다. 무려 화려하단 생각을 했었는 지도 모른다.

 

 

 

 

사진을 보다가 또 깨달은 것은, 나는 이 그림들이 있는 전시실에서 한참을 있었는 데도 불구하고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는 지 가다가 돌아서서 전시 전경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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