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2009/12/17 15:07 잡기장

 

 

어렸을 때 엄마가 점을 보고 와서 그런 얘기를 했었다. 점쟁이가 얘는 그림 시키길 참 잘한거라고. 얘는 자신의 응어리를 풀 곳이 있어야 하는 아이라고. 지랄맞은 세월동안 그림을 그리겠다고 어릴 때부터 싸우다가 그림그리기를 '쟁취'했던 나에게, 그림을 시켰다 혹은 시켜주었다 라는 말조차 너무나 역겨웠지만, 어쨌든 저 말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그 점쟁이가 정말 미래를 보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사람을 꿰뚫어볼 줄 아는 그런 대단한 역술가였다면, 그 그림으로 풀어야할 응어리가 자기 딸의 운명을 묻는 그 여자때문에 생기게 될 것도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 점쟁이는 눈 앞의 여자를 어떤 눈으로 쳐다보았을까. 그리고 그 응어리의 깊이에 대해서 얼마나 가늠할 수 있을까.

 

 

나는 요새 나의 모든 상처를 후벼파고 있다. 아물것 같으면 다시 억지로 딱지를 떼서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고 필요하다면 손톱을 길게 기른 손가락 끝으로 그 상처를 벌려본다. 예전처럼 어설프게 전쟁군인들이 급하게 벌어진 상처에 스테이플러를 찍듯이 그러지 않기 위해서 많이 노력한다. 그래서 요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나를 계속 살게 해주는, 죽을 생각을 하지 않게 해주는 큰 기둥이 되어준다.

 

 

하지만 요즘들어 생각하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상처를 후벼팠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다보니 상처를 후벼파게 되는 것인지. 내 몸과 마음은 정말 전쟁터와 같다.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는 그런 곳과 같다. 그래서 나는 자꾸 근육통을 느끼고, 계속 마음은 싸하다.

 

 

그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는 것. 내 갈길을 가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안다, .하지만 분노는 분노이다. 아무리 그래도 분노는 분노이다. 그래서 그 분노가 다시 살아숨쉬게 되어서 힘이든다.

 

 

아침에 일어나 메모장을 열어 엄마에게 쌍욕을 한바가지 쓰고 다시 잠을 잤다.

나는 좀 따뜻한 세상에 있고 싶다.

 

상처를 자꾸 들여다봐야 나중에 이것이 다시 우울증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막 따뜻한 세계에 있고 싶다.

누구를 증오하고 원망하고 억울함이 가득한 그런 세계 말고

그냥 잘 사랑받고 잘 사랑하는 그런 따뜻한 세계에 있고 싶다.

그런 걸 좀 나에게 허락해주며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글거리는 분노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런 세상 말고

그냥 조용히 따뜻하게 그렇게 있는 세상으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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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15:07 2009/12/1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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