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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선진노동자는 인권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느낌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과거에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활동가들이 인권운동으로 '전향'하여 백화점식 운동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노조관료가 되어 자본과 야합하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판에, 인권운동을 하는 활동가는 그래도 그만큼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모습에 신뢰감을 갖기도 한다. 더군다나 인권운동은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정보 등 새로운 운동영역을 개척하고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이 들어 노동조합운동의 타락에 신물이 난 노동자들은 신선한 기대감을 갖기도 한다.

이런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생각은 선진노동자들로 하여금 인권운동을 무시해 버릴까, 반대로 차라리 인권운동을 적극적으로 해볼까 하는 혼란까지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단순한 거부나 무비판적 동참, 모두 옳지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권이란 무엇이며, 선진노동자들은 인권운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국노동운동과 인권운동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후퇴와 인권운동의 부각


인권운동이 진보운동에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90년대 중, 후반부터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 즉 계급투쟁적 노동운동이 상대적으로 활성화됐을 때는 인권운동이 거의 부각되지 않았다. 87년 여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이 진보운동의 중심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당시 노동운동은 전투적 조합주의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지만 그것은 성장해가는 운동이 안고 있는 한계였으며,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한계였다. 또한 당시에는 선진노동자라면 당연히 노동자의 과학을 학습했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확연하게 갈라져 있으며, 노동자계급이 중심에 서야만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점 정도는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때에는 노동자운동을 어떻게 더욱 의식적이고 계급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 해방으로 진군할 것인가가 대부분의 활동가들과 선진노동자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이자 모든 것을 바쳐 이루어야 할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구소련의 변화와 한국 지배세력의 보다 교묘한 통치방식은 노동해방 정치운동의 한계와 맞물려 노동운동을 급속히 쇠퇴시켰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 '노동자계급은 해체되고 있다. 노동운동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이데올로기가 부자언론과 자본, 정부에 의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활동가들이 썰물처럼 현장과 노동운동을 떠났다. 길을 잃은 선진노동자들은 좌절하고 방황하거나, 무너져가는 현장을 추스르는 데만 자기 활동을 제한하거나 아예 타락한 노조관료가 되기도 했다. 노동운동에서 후퇴했지만 차마 모든 진보운동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일부 활동가들은 마지못해 인권운동을 대안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노동운동의 후퇴에 비례하여 인권운동이 상대적으로 부각됐다. 이 점에서 지금의 인권운동은 '후퇴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측면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인권운동이 노동운동과 대립한다고 간단히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인권운동도 몇 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자본가들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박애주의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아시아, 아시아>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그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노동자들을 고통받는 자로만 볼 뿐, 투쟁과 해방의 주체로 보지 않으며 자본가들의 시혜에 의지해서 탈출구를 찾으라는 환상을 심어줘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흐릿하게 하기 때문에 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동정적 박애주의 캠페인은 노동운동과 명백히 대립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인권위나 UN 인권위, 기타 자본가들의 원조를 받거나 정부와 밀접히 연계된 NGO(비정부기구)들은 '인권운동'의 옷을 걸친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의 계급적 실체를 항상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폭로하고 경계해야 한다.

다음으로 중간계급 인권운동을 들 수 있다. 중간계급이 그 내부에서 상층, 중층, 하층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도 다양한 계층들이 있듯이, 그들의 인권운동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인정하는가, 자본과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그들에 맞서 전투적으로 투쟁하려고 하는가,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의 개량만 추구하는가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는가, 주로 어느 계층에 기반을 두고 누구의 이해를 대변하는가에 따라 중간계급 인권운동도 천차만별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권운동에 대한 태도는 중간계급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다. 노동운동은 중간계급 인권운동이 노동자계급 편으로 다가올 때는 박수를 쳐주면서 더 빠르고 곧게 다가올 것을 격려해야 하며, 그 운동이 자본가계급 편으로 후퇴할 때는 비판의 채찍을 휘두르면서 그들이 노동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이 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권리는 오직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완전히 충족되므로, 이 인권운동은 궁극적으로 노동해방운동일 수밖에 없다. 한편 노동자계급은 노동자들의 해방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억압계급의 인간해방을 추구한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의 '인권운동'은 노동해방이라는 확고한 관점 아래에서 피억압계급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모든 형태의 억압과 수탈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자본가적 박애주의 캠페인이나 중간계급 인권운동의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적 관점을 갖되, 모든 인권운동을 무조건 적대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권운동을 계급적 경계선을 따라 명확하게 구별하면서, 노동자의 자기해방운동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권리'를 쟁취하는 수단임을 강조해야 한다. 현재의 인권운동은 주로 선진노동자들과 노동해방 활동가들이 아니라 중간계급 인권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기에 숱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노동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부정하거나 회의하는 부문주의, 정치의 모호함, 평화주의, 백화점식 사업태도 등등.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인권운동을 통해 선진노동자들이 관심을 갖고 개입해야 할 운동의 지평이 확대되고, 여성노동자 차별, 장애인노동자 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등의 형태로 노동운동 내에도 존재하는 불합리한 차별을 보다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역사를 검토하면 노동운동 강화가 여전히 핵심 관건임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이 퇴조하고 인권운동이 떠오른다고 해서 인권운동으로 힘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에 더욱 힘을 쏟아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을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굳건한 구심을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아무리 인권운동이 활성화돼도 노동해방은 요원하며, 자본주의는 질기게 목숨을 이어갈 것이다.

노동운동이 활성화될 때만 인권이 실현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과거 노동운동이 활력 있게 전진했을 때는 여성운동, 장애인운동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강력하게 전개됐다. 이주노동자운동, 동성애자운동 등은 노동운동의 후퇴기에 성장한 운동들이지만, 이 운동들이 성장한 것도 과거에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물결이 있었고 그 물결이 여전히 저조하게나마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노동운동을 철저히 강화시키려 하지 않은 채 몰계급적인 관점에서 인권운동만 강화시키려 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권의 역사


'인권'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아주 유해하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하늘이 부여한 권리를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등등의 주장을 살펴보자. 하루 12시간 죽도록 일하고도 서너 식구가 생활할 임금도 받지 못하는 수백만의 비참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기아와 식수 부족, 전염병으로 하루에도 부지기수로 죽어가는 북한, 이라크,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운하는 말이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공문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 역시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뿐만 아니라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반영하지 못하는 말이다. 대신 그 말은 자본가들에게 마음껏 부를 축적할 자유 즉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할 자유가 있고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불평등한' 조치, 가령 국가가 자본가들에게 누진세를 적용하여 분배의 극심한 불균형을 조금 완화하는 것 등의 조치를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실제로도 자주 그렇게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반드시 역사를 검토하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급했던 원시시대에 인권이란 개념은 희미한 흔적조차 없었다. 노예제 시대에도 인권이란 말은 없었다. 뛰어난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여자와 노예들을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짐승과 같은 부류로 여겼다. 민주주의를 꽃피웠다고 찬미 받는 그리스 시대에도 오직 자유민들만이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 봉건제 시대에도 봉건귀족들은 절대군주에 맞서 자신들만의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근대적인 인권보장의 첫걸음이라고 하는 자유대헌장(마그나 카르타)에도 모든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 봉건귀족들의 권리만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인권이란 말은 프랑스대혁명 등이 있었던 18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등장했다. 인류가 노예주인과 노예, 봉건영주와 농노, 남자와 여자를 모두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기까지 최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걸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으며, 하늘이 부여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권리선언은 당시로서는 거대한 진보적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선언은 절대왕정이나 봉건귀족들의 신분적 지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었으며, 지배자들의 압제에 맞선 투쟁을 고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분적 예속이 사라졌다고 해서 법 앞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는 실질적 평등이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토지, 기계, 공장을 가진 자본가와 무일푼의 노동자로 인간이 나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예속과 불평등이 신분적 예속을 대신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프랑스대혁명과 차티스트 운동 당시 민중들이 외쳤던 대로 '생존권 보장 없는 자유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를 떠도는 사람에게 어떻게 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자본가들만이 자유와 평등의 '인권'을 맘껏 누릴 수 있었으며, 노동자들은 빈껍데기뿐인 '인권'에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노동자들은 몰계급적이고 공허한 껍데기뿐인 '형식적 인권' 대신 항상 일자리 보장, 생활임금 보장, 죽지 않고 다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는 권리 쟁취, 다쳤을 때 치료받고 휴양할 수 있는 권리 쟁취와 같은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법조문에 보장된 형식적 인권 대신 실질적인 노동자의 인권을 추구해나갔다. 그 후 줄곧 자본가의 권리와 노동자의 권리가 충돌했다.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자본가의 경영권과 고용안정을 추구하는 노동자의 노동권이, 이윤 확대를 위해 임금을 삭감하려는 자본가의 권리와 사람다운 삶을 위해 임금을 인상하려는 노동자의 권리가, 그리고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본가들의 권리와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격렬하게 부딪혔다.

따라서 노동자의 권리를 인권 또는 노동인권이라는 모호하거나 수줍은 표현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피어린 투쟁을 통해 전진시켜온 역사를 뒤로 끌어당기거나 과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행위일 뿐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몰계급적 인권으로 후퇴시키면 정리해고 분쇄, 임금인상 쟁취, 민주노조 사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계급적 요구 대신에 '인권'이라는 추상적이고 감상적인 요구로 후퇴하게 된다. 몰계급적 휴머니즘이 널리 퍼지게 되면 노동자들은 날카로운 계급의식과 자본가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수 없게 되며, 수동성과 순종의식에 물들게 된다.

또한 노동운동을 다른 부문운동과 동일한 위상으로 보고 백화점식 사업으로 힘을 분산하여 노동운동을 약화시킨다.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보다 인권을 앞세우는 경향의 결정적인 약점은 계급 대립이 격화됐을 때 "자본가들도 인간인데 너무 나가면 안 되는 것 아니냐"며 투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누리지 못하는 짐승과 같은 처지로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몰계급적 인권운동이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을 수밖에 없는 천형의 길이다. 노동자 자신의 요구를 내건 가차 없는 투쟁,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장애인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동성애 취향의 노동자 등의 권리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가는 투쟁, 이것이 현대 사회에서 진실로 인권을 추구하는 운동이다.

인권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자본가들이 근대 시민혁명기에는 인권의 대변자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분명히 반(反)인권의 대명사가 됐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신들이 귀족들로부터 차별당하고, 봉건군주들에게 세금이란 명목으로 수탈당할 때는 '인권'을 부르짖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함으로써 자신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난 다음에는, 그리고 자신들이 노동자계급과 날카롭게 충돌하게 된 다음에는 '인권'보다 자신들의 '질서'를 강조했다. 자본가들은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권문제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철저하게 반동적인 계급으로 돌아섰다. 반면 노동자계급은 다수이고, 여전히 실질적인 인권을 보장받고 있지 못하기에 가장 강력하게 인권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세력이다. 인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피억압 민중들이 노동자계급과 함께 어깨 걸고 싸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주의할 점이 있다. 군주제, 귀족제가 만연했던 시대에 천부인권 사상은 진보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근대 시민혁명의 결과로 자본가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국민들이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 있는 이상,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원리도 자본가들의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로 나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시 힘이 더 강했던 자본가들이 권력을 차지해 자본가 민주주의가 먼저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자본가 민주주의가 표현하는 인권이란 '1인 1표' 식의 형식적 권리에 불과했고, 노동자의 파업과 권리개선, 불평등 척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보호 등에 관해 자본가 민주주의는 온갖 억압과 공격, 기만을 자행함으로써 스스로 '인권의 적대자'임을 드러냈다. 이윤과 인권은 결코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과거의 인권의 옹호자들은 현재의 인권의 파괴자들로 변화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인권에 대한 자각을 노동자 해방을 향한 대장정에 나서는 것으로 표출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기에 인권도 자본가의 소유권과 노동자의 노동권으로 나뉘게 된다.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에서 자본가들이 제기한 인권이지만 결국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인권보호는 '자본가의 소유권 보호' 정도로 변질했다. 자본주의의 법률과 질서, 공권력이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인권이 바로 자본가의 소유권이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자본가적 인권은 노동자의 인권과 대립하게 되었다. 자본가의 소유권과 이윤권 보호의 이름으로 노동자 투쟁은 무참히 공격당했고, 노동자의 삶은 잔인하게 짓밟혔다. 결국 이 점이 분명해졌다. 이 사회는 두 개의 인권이 충돌하고 있다. 착취자와 억압자의 인권,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노동자의 인권!

한때 추상적인 인권에 집착하면서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선언에 머물던 노동자들은 여러 경험을 통해 자본가의 소유권에 맞서 노동자의 계급적 권리를 내세우게 됐으며, 그것은 결국 노동해방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인간'이라는 초기 선언에서,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이라는 더 명확한 선언을 향해 전진해나갔던 것이다.





모호한 인권 대신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 정규직, 남성, 한국인, 비장애인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장애인노동자를 대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그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은 무조건 올바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자유와 평등을 만끽해야 한다'고만 막연하게 생각하면 자본가들의 '착취할 자유', '돈으로 국회의원 뺏지를 사고, 합법적으로 정치를 주무를 자유'에 대해서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는 하나라는 계급적 관점을 빠뜨린 채 막연히 인간주의(휴머니즘) 관점만 갖는다면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노동자, 장애인노동자들에 대해 보잘것없는 동정, 시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비정규직, 장애인노동자,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모두 스스로 투쟁하고 해방을 쟁취할 잠재력을 가진 노동자계급의 일부분으로 바라보고, 항상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렇게 계급적 관점을 갖게 되면 비정규직의 적이 정규직이 아니고,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며, 이주노동자의 적이 한국인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고 굳건하게 연대투쟁을 하면 백화점식으로 인권운동을 벌일 때보다 훨씬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중 노동자는 아니지만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들도 이 힘을 보고 희망을 얻으며 노동자들과 기꺼이 손잡을 수 있다. 몰계급적 인권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확고히 견지할 때만 결정적 국면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진 자들의 권리를 짓부수고 노동자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쟁취할 수 있다. 그것만이 노동자들에게 승리를 즉, '영원히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다.

노동자 세상에서만 인간해방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자본가 사회에서는 아무리 인간애를 드높이기 위한 교육을 강화하고 '인권'을 외쳐도 남녀차별, 장애인 소외, 동성애자 억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각종 형태의 인간차별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사람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자본가 근성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수 자본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굴러가는 사회다. 자본가들은 첨예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자의 피땀을 단 한 방울이라도 더 쥐어짜내려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 내부에 층층이 위계구조를 만들어 일치단결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 장애인, 외국인,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일상적으로 유린한다. 그러면서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이 자신들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불우이웃돕기와 같은 자선사업에 나서며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따라서 이런 가진 자들의 질서에 과감히 도전하지 않는다면 인간해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물론 노동자 세상에서도 모든 피억압자들의 인간해방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노동해방은 인간해방을 위한 기본 동력을 제공하고 반드시 인간해방을 완성시킬 것이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상당기간 동안의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와서 인권운동은 깡그리 무시해도 되는 것인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반자본주의 진보운동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인권운동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피억압 민중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인권운동가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자유와 파업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다면 노동운동은 거기에도 개입해서 노동자의 대안을 제기하고, 그들을 노동해방의 관점 아래 통합시켜 나가야 한다.

역사를 앞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은 몰계급적 인권운동의 한계를 정확히 이해하면서 노동운동을 계급적 단결과 연대, 해방의 깃발 아래 재차 강화해야 한다. 이렇게 중심을 분명히 세우고 인간다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빈민들, 그리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진보적 인권활동가들에게까지 손을 뻗쳐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운동의 동력을 확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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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칠레의 교훈




1973년 쿠데타


1973년 9월 11일 장갑차, 탱크와 무장한 군 병력이 칠레 대통령궁을 포위했다. 공중에는 전폭기들이 순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피노체트를 우두머리로 한 군부 쿠데타세력은 대통령 아옌데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곧이어 공군 폭격기가 대통령궁으로 폭탄을 투하했으며, 지상군도 탱크를 앞세워 모네다궁으로 진입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쿠데타는 완료되었다.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의 출범이라는 세계 최초의 실험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아옌데정권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부로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들을 어느 정도 펼쳤다. 그러자 포악해진 자본가세력은 아옌데정권을 파괴하는 데 머뭇거리지 않았고 단호한 군사행동을 실시했다. 칠레 아옌데정권은 군부 쿠데타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졌다.

칠레의 경험은 우리에게 노동자의 진정한 정치세력화란 무엇인지 의문을 던진다. 선거에서 당선되면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그렇다면 선거를 통해 대통령까지 배출하여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했다고 이야기되는 칠레가 결국 쿠데타로 한 순간에 붕괴된 상황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실패한 실험은 그릇된 정치노선을 그대로 반영할 뿐이다. 칠레의 패배는 우리에게 잘못된 정치세력화의 파괴적인 결말과 동시에 진정한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제시해준다.


민중연합정부의 건설 - 투쟁의 시작


1970년 9월 칠레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연합 후보인 아옌데가 36.3%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민중연합은 노동자정당인 사회당, 공산당과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통일행동운동(MAPU), 인민독립행동(API)의 6개 정당이 모여 69년에 결성했다. 경제가 악화되고 빈부 격차와 빈곤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은 기존 자본가 정치세력에 분노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 했다. 이 노력이 곧 노동자정당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설하려는 민중연합의 길로 이어졌으며, 이 대중적 열망을 토대로 아옌데는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었다.

아옌데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최초의 40개 정책’으로 노인 및 퇴직자의 연금수혜 확대, 의료비 감면, 400만 어린이에 대한 우유 무료급식, 빈민가 주택개선, 저임금 노동자 66%의 임금인상 등 소득재분배 정책을 펼쳤다. 특히 물가상승률에 100% 연동해서 임금을 인상시키는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저임금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활개선을 추구했다. 그리고 칠레의 핵심 산업인 구리광산과 철, 섬유산업 등의 국유화를 실시하고 대농장을 몰수하는 등 토지개혁을 통해 가난한 농민층 속에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투쟁 속에서 의식적으로 발돋움함으로써 개혁정책의 ‘소극적인 수혜자’에서 ‘적극적인 주인공’으로 도약해나갔던 노동자와 빈농들은 아옌데정권의 제한된 정책을 뛰어넘어 훨씬 멀리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공장위원회를 조직했다. 빈농들 역시 대농장점거와 농민평의회 건설을 통해 생산과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자주관리를 실행했다. 칠레의 노동자, 빈농들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데 그치는 소극적인 존재에서 생산과 노동과정을 스스로 통제하는 사회 운영의 주체로 우뚝 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혁명적 조치를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 없으며, 이제 막 시작된 초보적인 개선조치들을 근본적인 조치들로 전진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점차 더 높은 수준의 계급의식을 갖게 된 노동자들은 빠른 속도로 단결의 힘을 강화하여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했고, 아옌데정부의 급진적 개혁을 선두에서 강제해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자본의 공세에 맞서 노동자투쟁의 성과를 지키는 실질적 힘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옌데정권의 수립, 그리고 이 정권의 여러 진보 조치들은 이미 그 이전부터 강하게 솟구치고 있던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급진적인 저항을 선거와 의회정치라는 구조 속에 가두어놓기 위해 자본가들이 채택한 차선책이었다. 만약 이 정도라도 진보적 조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칠레의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의 거대하고 결정적인 공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본가계급이 불안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 각료들이 아니라 이 궁 바깥에 포진한 더욱 급진화되는 노동자투쟁의 흐름이었다.


자본가세력의 반격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에 위협을 느낀 자본가세력은 칠레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를 깨뜨리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무기를 하나씩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당선되기는 했지만, 의회에서 다수파는 여전히 자본가세력이었다. 그들은 다수파의 유리한 지위를 이용하여 민중연합정권의 소득재분배정책, 산업국유화 정책과 토지개혁에 대한 법안통과를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대단히 현실적인 자본가들은 의회에서의 공허한 말다툼에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든 것은 의회 바깥의 실제 투쟁에 의해 결정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 기존의 경제혼란을 확대하여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에서 ‘자본가파업’을 일으켰다. 자본가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운수업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중소기업가들이 회사를 폐쇄하고, 소상점주와 의사들이 영업거부에 들어갔다. 특히 트럭 운수업자들의 파업은 물자수송에 타격을 주어 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다. 아옌데정부는 이러한 자본가들의 입체적인 공격에 부딪혀 최소한의 개혁정책조차 실행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옌데정부는 자본가파업을 진압하라는 대중의 요구, 즉 반항하는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주도자들을 구속시키라는 요구를 외면했다. 오히려 이 정부는 대중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자본가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급격한 개혁을 자제해야 한다는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냈다. 대중이 접수한 공장과 대농장을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자본가세력을 자극하여 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한다며 대중적 시위를 자제시키며, 심지어 각 지역에서 자본가에 대항한 투쟁들을 경찰을 동원하여 진압하기 시작했다. 아옌데의 민중연합정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자본가의 쿠데타로부터 정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과거의 반동적인 군 장성 3인을 장관으로 임명했다. 심지어 쿠데타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쿠데타 수괴노릇을 할 피노체트를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기에 이르게 된다. 한마디로 아옌데정부는 노동자의 힘을 강화하고 자본가들의 힘을 제거하는 대신, 자본가들에게 ‘이 정부는 당신들과 협조하고, 당신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오.’라고 확신시키는 데 집착했다.

이것은 두 가지 결정적인 효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이 정부로부터 점차 멀어졌고, 그 결과 이 정부는 자신을 방어해줄 가장 중요한 토대를 잃어버린 채 허공에 붕 떠버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을 통해 상당한 재미를 본 자본가들이 자신감을 강화시키면서 ‘이참에 아예 이 정부를 쓸어버리고 아주 강력한 자본가 독재정권을 수립해 노동운동을 말살시켜야겠다’는 야심찬 계획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자본가세력의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려 했던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한 희망과는 달리, 군 장성들은 공장점거와 토지점거를 파괴하고 노동자들의 무장을 막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민중연합정부의 소심한 대응에 모든 것을 맡겨두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독자적 힘을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본가파업에 대처했다. 각지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점거를 확대했다. 각 지역의 노조와 부인회 등으로 구성된 물자공급위원회가 물자분배와 소매상의 매점매석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 민중연합정부에 대한 자본가들의 공격은 바로 자신들을 향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계급 단결의 힘을 끌어 모으기 위해 분투했다.

자본가들은 1973년 3월 국회의원선거에서 승리하여 민중연합정부를 탄핵할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민중연합에 대중은 표를 던졌다. 노동자들은 이 정부를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당장에는 이 정부에 표를 던지는 것이 전술적으로 이롭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선거는 다시 한 번 민중연합의 승리로 끝났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목적을 달성할 모든 수단이 실패하자, 마지막으로 자본가세력은 쿠데타라는 결정적 카드를 꺼내들었고 재빨리 준비에 들어간다.

그해 6월 29일 쿠데타 미수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24시간 총파업을 조직했고, 9월 4일에는 80만이 모여 민중정부 사수를 위해 노동자들이 무장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자신의 목에 쿠데타라는 칼이 겨누어지는 상황에서도 아옌데정부는 오히려 자본가세력과의 타협 가능성을 굳게 믿었고, 노동자들의 무장요구를 묵살했다. 결국 아옌데정부는 노동해방을 향해 철저하게 전진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 의지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압살하고자 하는 자본가세력에 더 의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투쟁의 성격이 근본적인 지점을 향하면 향할수록 아옌데정부는 혁명을 할 의지가 전혀 없는 개량주의 세력임을 드러냈는데, 이것은 자연스럽게 이 정부를 노동자의 편에서 자본가의 편으로 이동시켰던 것이다.

1차 쿠데타 시도에서 민중연합정부의 무기력함(이것은 기본적으로 급진화되고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하려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대변하려 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다)을 확인한 자본가들은 결정적인 2차 쿠데타를 감행한다. 결국 9월 11일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는 성공했고, 군부는 의회를 폐쇄하고 모든 정당을 금지했다. 피의 보복이 뒤따랐다. 쿠데타 과정에서 아옌데 대통령이 사살된 것은 물론, 이날 이후 단 일주일 만에 3만 명의 노동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사회적 격변의 시기에 구 지배계급과 타협하려는 시도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비극적으로 입증되었다.

사실 쿠데타는 결코 아옌데 민중연합정부를 겨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정도의 소심한 정부라면 유럽에서 볼 수 있듯이 ‘개량주의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의 집권’처럼 충분히 그냥 허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아옌데정부로서는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도처에서 자본가들과 충돌하면서 스스로 생산수단과 현장통제권을 확보해나가고 있었던 거대한 노동자투쟁의 흐름을 저지할 수 없다는 점이 바로 핵심적 문제였다. 이 흐름을 박살내서 자본주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총과 감옥으로 무장한 피노체트 군사자본가정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쿠데타는 모네다궁의 아옌데정부가 아니라 이 궁 바깥의 노동현장에 포진한 혁명적 노동자들을 정확히 겨냥했다. 쿠데타세력이 학살하고 진압했던 것은 바로 이 노동자들의 조직이었던 반면, 확대하고 보존했던 것은 모네다궁의 자본주의 정부 질서였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 운명공동체로서의 자각


칠레의 경험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몇 명을 노동자정당에서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는 정치노선으로는 새로운 사회 건설이 불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직 획득, 소위 선거를 통한 집권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업의 끝이 아니라 단지 아주 자그마한 시작일 뿐이라는 점, 노동해방 사회는 불평등과 착취를 완전히 없애는 경제적 변화와 연결될 때 가능하다는 점,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투쟁기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유형의 정부를 창조하지 않고 기존 자본가정부의 구조를 유지한 채 노동해방을 꿈꾸는 것은 노동자계급에게 독약과 같다는 점이 다시 한 번 여실히 증명되었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협하는 노동자들을 결코 용인하지 않는다. 선거를 통해 정부를 노동자에게 빼앗겼던 칠레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무기 중 단지 하나만을 빼앗긴 것뿐이었다. 자본가들은 의회의 권력으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불법화할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었고, 공장, 기계, 버스, 트럭 등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을 발동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으며, 여전히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대와 경찰의 물리력으로 노동자투쟁을 파괴하고 민중연합정부를 전복할 수 있었다.

역으로 칠레의 패배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단결력, 투쟁력, 노동자 정치의식을 성장시켜 하나의 핏줄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로서 세력화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역사적 운동에 뛰어든 노동자들은 선거에서의 승리가 노동해방을 향한 출발점일 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노동대중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공장과 토지점거를 통해 생산현장에서의 힘을 쟁취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계급의식으로 각성된 노동자들은 자본가 쿠데타로부터 자신의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며 ‘무장할 것’을 주장했다. 노동자들의 단결된 조직력과 역동적인 투쟁은 민중연합정부의 형식적인 권력보다 훨씬 강한 힘이었다.

민중연합정부의 패배는 이와 같은 노동자 정치의식을 더 높이 성장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그릇된 정책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기존 자본가들의 권리와 질서를 결정적으로 침해하지 않고서도 불평등과 착취를 없앤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공상적인 관념이 있었다. 민중연합정부는 이 공상적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본가들의 협력을 필요로 했고, 공장과 기계를 돌려달라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노동대중의 힘을 기반으로 건설된 민중연합정부는 역설적으로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자본가들의 입지를 확대하는 타협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려 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4월 총선


2004년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4월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을 배출하는 첫 번째 선거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획기적인 돌풍을 일으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존 정당에 환멸을 느껴 탈정치화하고 있는 노동대중이 자본가정당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는 출발점 역할을 일정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칠레의 패배를 주의 깊게 검토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노동자들이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결속하는 것은 현장의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전체 계급의 일부로서 자신을 간주하며 단결하고 투쟁하려는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노동자정치세력화의 힘은 의회 내로 갇히는 것이 아니라 노동현장에 바탕을 둔 단결과 투쟁력을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곧게 뻗어나가야 비로소 참된 의의를 다할 수 있다.

현재 한국노동운동의 상황에서 “선거의 한계는 분명하기 때문에 보이콧해야 한다.”거나 반대로 “당선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 모두가 어리석은 주장이다. 문제의 핵심은 계급적 정치의식을 대중 속에 불어넣고 현장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확대하는 데 선거라는 계기를 종속시키고 활용하는 데 있다. 칠레의 역사적 경험은 이러한 사실을 환하게 밝혀주고 있다. 진정으로 새로운 세계의 건설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칠레의 비극적 경험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경험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배운다면, 그럼으로써 선거와 의회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면서도 우리의 힘은 근본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단결과 투쟁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명심한다면, 칠레의 교훈은 우리 운동의 전진을 위한 값진 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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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ital


 

 

Viktor Deni, 1919
Capital
(Lithography, 51.5x36 cm., inv.nr. BG D23/103)

Capital as the source of all evil. Under the image a satirical poem by Demjan Bedny. The red text on the left states that damaging the poster or pasting another one over it is a counter-revolutionary c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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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r enemies wants to..


 

 

Nikolay Kogout, 1920
Your enemies want to send you to war against me, your brother, by deceit and intimidation. Do not listen to them! If you want peace and freedom, take up your rifle with me and beat your enemies.
Publisher: Revvoensovet, Moscow
(Lithography, 83x60 cm., inv.nr. BG E11/737)


Poster with text in Tatar, meant for distribution in the Crimea. The Tatars are to fight on the Red side against the White generals Vrangel and Joffre, who are pictured as the accomplices of bourgeoisie and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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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live the Red Army


 

 

Nikolay Kochergin, 1920
Long live the Red Army
Publisher: Revvoensovet, Moscow
(Lithography, 71x105 cm., inv.nr. BG E11/910)


Trampled beneath the feet of the Red Army are the defeated White generals and the idol of Mammon, symbol of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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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 guerrilla


 

 

Alfredo Rostgaard, 1969
Christ guerrilla
Publisher: OSPAAAL
(Offset, 54x37 cm., inv.nr. BG D12/851)

This poster illustrates a quotation of the Columbian priest Camilo Torres: If Jesus were alive today, he would be a guerrillero. Torres, one of the most forceful spokesmen of the so-called liberation theology, joins the armed struggle and gets killed in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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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ing Women - Take a Rifle

 

A woman worker in simple clothes brandishes a rifle before a large factory. The image reflects the large scale employment of women in the industrial labor force which began during World War I and continued through the Soviet period. During the Civil War of 1918-20, when most of the country had broken away from Soviet control, all citizens, men and women alike, were expected to participate in civil defense and active f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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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T)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해방

맑스주의, 페미니즘, 여성해방

지닌 수십 년간 여성의 평등을 주창하는 수많은 국제회의들이 열렸으며 "(여성의 권리를 위한) 보편적 선언문들" 발표되어왔다. 그러나 전세계 여성 대부분은 편견과 억압에 시달리고 있다. 남성의 우위가 강제되는 방식은 사회와 계급마다 각기 다르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그리고 여성은 이것을 인정하라고 교육받고 있다.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여성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도 남성과의 연줄을 통해서나 가능하다. 여성노동자 대부분은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이라는 이중의 멍에를 지고 있다. 유엔 통계에 의하면 여성은 전세계 노동의 3분의 2 담당하고 있으며 세계 식량의 45%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전체 소득의 10%만을 벌고 있으며 재산은 1% 소유하고 있다([여성에 대한 전쟁], 매럴린 프렌치 , 1992).

맑스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성의 평등과 권리를 옹호해왔다. 그러나 인종 억압, 민족 억압 등과 똑같이 자본주의의 특별한 억압에 속하는 여성 억압도 억압들을 키우고 유지시키는 자본주의가 타도되지 않으면 근절될 없다고 주장해왔다.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타도와 분리될 없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결국 여성의 억압은 부르주아 계급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부록: <여성 억압 ---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참조).

여성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맑스주의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은 종종 같은 편에 선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화해할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 사회는 사회 계급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근본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 페미니즘의 대전제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선전가들은 여성의 평등을 사회주의 혁명 투쟁과 분리시킨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가부장적" 지배체제의 형태로 본다.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 저술가들과 학자들은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남성 중심적 관행들의 다양성과 범위를 폭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동화에서 텔레비전 광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여성의 굴종이 주입되고 규범화되고 강화되는 방식들을 묘사했다. 또한 성희롱, 강간, 가정 폭력 개인 생활의 영역에서 자행되는 성차별의 다양한 병적 증상들을 선두에 서서 폭로했다. 1960년대 후반 여성운동이 부흥하기 전까지 사안들은 자유주의 좌익 사회비평가들로부터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아프리카의 여성 성기 절단, 아시아에 만연한 여아 살해, 회교국가의 차도르 강제 착용 등에 반대하는 국제 캠페인을 적극 벌여왔다. 이들의 운동은 자본주의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인식시키는데 유용했다. 그러나 남성 우위와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계급 지배의 관계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계급 갈등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맑스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화해할 없이 서로 충돌한다는 사고를 배격한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 억압의 주체이며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억압을 통해 물질적 정신적 "이익을 얻는다" 사실을 인정한다. 다만 성차별을 통해 대부분의 남성이 얻는 이익은 대수롭지 않을 아니라 공허하고 일시적이다. 그리고 이익에 대해 남성은 비싼 대가를 지불한다.

일자리에 대한 남성의 우선권과 여성 배제, 전통적으로 "여성" 직종에 대한 사회의 형편없는 대접, 동일 노동에 대해 남성보다 낮은 여성 임금의 수준 등은 남성에게 후한 보수와 고용 안정 등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은 평균임금 수준을 낮추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현상을 2 세계대전 직후 미국 연방정부 여성국장이었던 프리다 밀러가 이렇게 설명했다:

"평균 임금보다 낮은 임금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고용될 경우 기존의 노동자들은 일자리에서 밀려나거나 낮아진 임금을 감수해야한다. 이것이 임금 이론의 기본원리이다. 시간이 지나면 낮은 임금의 압력이 전체적으로 퍼져 임금 수준을 하락시킨다. 상황이 노동자들의 직접 투쟁으로 개선되지 않으면 모든 노동자들이 낮은 소득과 낮은 구매력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전쟁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을 익힌 여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악랄한 고용주에 의해 임금 삭감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미국 연방정부 여성국 회보 224, 1948 (1959 출판된 [전환기의 미국 노동] 저자 낸시 리브즈가 저서의 "직장 여성" 장에서 인용)

임금의 동일한 기본원리가 이주 노동자, 소수민족 노동자 그리고 기타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차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종주의, 민족주의, 동성연애자 혐오증 여타 후진적인 사고방식과 같이 남성 중심 의식도 임금 수준을 낮추고 동시에 계급 지배의 방식들을 은폐시킨다. 그리고 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부추긴다. 결과 근본적으로 억압적이며 서열구조식 사회체제를 지키는 버팀대가 된다.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모든 인민을 단결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에 반해 페미니즘은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자매"들을 단결시키는 반동적 유토피아 전략을 구사한다. 여성 억압은 빈민 여성과 노동계급 여성 없이 모든 여성에게 가해진다. 그러나 억압의 정도와 결과는 계급에 따라 질적으로 다르다. 지배계급 여성들은 특권과 물질적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지금의 사회질서를 옹호할 강력한 이유가 있다. 이들의 안락한 삶은 3세계의 기아임금에 허덕이는 "자매들" 초과 착취 때문에 가능하다. 계급을 초월하여 여성의 단결을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빈민 여성, 흑인 여성, 노동계급 여성의 이익을 부르주아 "자매들" 이익에 종속시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2 세대' 페미니즘의 기원

지금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 2 세대"라고 부른다. " 1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1 제국주의 세계대전 전까지 남성과 똑같은 교육권, 재산권, 투표권 등을 요구했다. " 2 세대" 페미니즘은 베티 프리든 (Betty Friedan) 1963 베스트 셀러 [여성의 신비](Feminine Mystique) 출판과 함께 시작되었다. 저서는 "여성다움"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여성의 처참한 실생활과 대비시키고 있다. 1966 프리든은 전미여성단체(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 창립했다. 단체는 전문직 여성들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여성단체로 "지금 바로(now) 여성을 미국 사회의 주류로 참여시키는 임무" 위해 활동했다. 지금도 단체는 미국에서 가장 여성단체이다. 그러나 압력 단체 그리고 민주당의 방계조직에 불과하다.

그러나 좀더 급진적인 페미니즘이 1960년대 미국 "여성해방운동"에서 탄생했다. 신좌익(New Left) 여성운동의 유명한 지도자들은 거의 미국 남부의 인종분리 정책에 저항한 흑인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 초기 활동가 출신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 중반 남부로 내려가 "자유 여름 운동" 참여한 수천 명의 이상주의 청년세대의 일부였다. 그리고 운동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잔인한 현실에 눈뜨면서 급진화 되었다.

한편 1960년대 말엽 신좌익 출신 여성 운동가들은 이렇게 비판했다: 자유 , 평등, 연대를 말로는 외치면서 남성 동지들은 "운동"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여성 동지들을 주변화 시키고 있다. 급진적 소장 사회학 교수 말린 딕슨은 감정을 정확하게 표출했다:

"젊은 여성들은 남성에 대한 수동적 종속적 관계에 더욱 반발하였다. 또한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순전히 성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섹스 시장의 상품으로 간주되는 현실에 반발했다. . . . 여성이 생물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표현하는 상투적인 말과 행위는 흑인의 억압을 정당화하는데 사용되는 이미지와 유사하다. 노예와 같이 여성도 종속적이며 이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아동처럼 단순하고 따뜻하며 어머니의 역할에서 희생을 감내하며 섹스 파트너로는 신비로운 존재로 묘사된다. 여성의 열등한 지위로 인해 남성은 좋은 경우에는 부성애를 발휘하지만 나쁜 경우에는 믿을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가정 독재를 행사한다."--- " 여성해방인가?", [성벽(城壁)] 1969 12

글로리아 스타이넘: 여성의 단결과 미중앙정보부(CIA)

여성해방운동의 초기에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여성 평등을 위한 투쟁을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로 보았다. 하나는 여성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여성운동이 다른 사회운동 세력과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독자성"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했다.

" 2 세대" 페미니즘의 초기 지도자들은 대개 흑인민권운동과 신좌익 운동에서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명예롭지 못한 과거를 가진 지도자들도 있었다. 미국 최대 페미니즘 잡지인 [미즈](Ms.) 창립자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50년대에 미중앙정보부와 함께 일했다. 그녀는 "소련이 주도한 세계청년축제에서 미국청년들에게 돈을 대주는" 앞잡이 조직과 관련되었다. 우연히 행사에 참여했던 쉴러 토비아스는 이후 코넬 대학교에서 여성학 교수가 되었는데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중앙정보부는 행사에 참여하는 미국인들 가운데 누가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누가 공산주의자인지를 파악하는데 골몰했다. 결국 아무도 모르는 우리는 정보부의 끄나풀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마샤 코언, [1988년의 여성 단결]

스타이넘의 이력이 마침내 세인의 관심을 끌자 그녀는 오리발을 내밀기로 작정했다:

"1950년대 후반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공동창립자였던 단체가 중앙정보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그녀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단체가 중앙정보부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또한 헬싱키 청년축제가 `중앙정부부의 정보수집 작업에 대단히 유용했다` 사실을 부인했다." --- 앞의

좀더 전투적인 페미니즘 조직들, 예를 들어, 보스턴의 "빨간 스타킹" 등만이 스타이넘의 중앙정보부 협력 활동을 비난했다. 보스턴 조직의 지도자 로재너 던바는 흑인민권운동의 노장 지도자였다. 그러나 소위 주류 페미니스트들 대부분은 제국주의 반혁명의 주요 기구인 중앙정보부와 스타이넘의 관련설을 무시하거나 논외의 사항으로 치부했다. 해프닝은 "여성 단결" 노선의 성격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급진 페미니즘과 생물 결정론

슐라미쓰 파이어스토운 역시 흑인민권운동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에 출판된 자신의 저서 [성의 변증법]에서 그녀는 급진 페미니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여성 억압의 기원은 사회-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적이다. 인류가 "뚜렷이 구별되는 생물적 계급"으로 구분된 것이 모든 사회분열의 기원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맑스의 분석을 모방하여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의 성적-생식적 조직이 언제나 사회의 진정한 기초이다. 기초 하에서만 어느 역사 시대의 경제적 사법적 정치적 제도와 종교, 철학 그리고 기타 사상 상부구조 전체가 궁극적으로 설명될 있다."

여성 억압의 뿌리가 인체구조에 있다면 해결책은 과학 기술에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피임을 좀더 강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자궁 임신이 가능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이 "유물론적" 분석이라고 했다. 물론 분석은 유물론의 일종이기는 했지만 대단히 조야한 생물적 분석이었다. 그녀는 여성의 억압이 결국 해소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전망은 유토피아적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 정치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저서는 계속 영향력이 있었다. 아마 그녀가 생물적 요인으로 논리적 결론을 이끈 급진 페미니스트 선구자의 일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에 발표된 "빨간 스타킹 선언서" 파이어스토운의 결론을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여성이 계급이라는 그녀의 주장에 동의했다:

"여성은 억압받는 계급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주체는 남성임을 인정한다. 남성 우월 주의는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기본적인 지배 형태이다. 인종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 다른 모든 착취와 억압의 형태들은 남성 우월 주의의 연장에 불과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며 남성이 나머지 전부를 지배한다. 역사상 모든 권력 구조는 남성 중심적이었다. 남성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제도들을 장악하면서 폭력으로 체제를 유지해왔다. 남성은 자신의 권력으로 여성을 열등한 지위에 묶어놓았다. 모든 남성들은 남성 우월 주의로부터 경제적, 성적, 심리적 혜택을 누리고 있다. 모든 남성들은 여성을 억압해왔다.... 우리는 무엇이 `혁명적'이며 무엇이 `개량주의적'인지를 묻지 않는다. 오직 무엇이 여성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물을 뿐이다."--- "빨간 스타킹 선언서", [여성의 단결은 강력하다], 1970년에서 인용

급진 페미니즘의 주장은 반동적 사회-생물론자들 대부분과 유사하다. 이들은 사회적 불평등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있으며 이것에 저항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고 주장한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할 것을 종종 주장한다. 심지어는 한술 떠서 "" 계속 동침하는 여성은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의 나라: 페니미즘의 해결책](1973) 저자 잔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 혼자 성적 만족을 느끼는 것은 페미니즘 혁명의 필수 조건이다.... 모든 여성이 레즈비언이 되어야 진정한 정치혁명이 성취된다."

사회주의와 성차별

1970년의 에세이 "주요한 "에서 크리스틴 델피는 "맑스주의 원리에 기초한 급진 페미니즘" 제시했다. 글에서 그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남성이 여성의 가장 주요한 적이라고 주장했다. 1984년의 저서 [가정 가까이] 실린 에세이의 결론은 이렇다: 독자적인 여성 혁명이 없이는 탈자본주의 노동자국가 내에서도 남성은 여성에게 가사 대부분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을 도모한다.

여성 억압이 사회주의에서도 계속된다고 신좌익 급진주의자들은 확실히 주장하는 듯했다. 이들은 쿠바, 월맹, 북한, 알바니아 경제적으로 후진적이며 일국적으로 고립된 기형화된 노동자국가들을 온전한 사회주의로 인식했다. 자본주의가 타도된 모든 나라에서 여성의 삶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명목적으로나마 성차별은 폐지되었다. 여성들에게도 일자리가 보장되었다. 탁아시설, 학교, 병원, 주택 등은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에서는 생각도 없는 것이었다. 구소련과 동구에서 자본주의 반혁명이 일어나 모든 혜택이 없어지자 여성들이 다시 가정과 육아의 노예가 되고 생존을 위해 매춘에 나서고 있다. 현실은 집단적 소유의 우월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경찰국가체제에서 남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기생적 관료집단이 여성의 출산, 육아, 가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적극 선전하고 "가정의 혁명 요새화" 강변한 것도 사실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주의 관료기구를 사회주의 건설의 장애물로 간주했다. 그리고 지배집단이 여성에게 "사회주의" 가정을 지킬 것을 선전하면서 "부르주아 법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이익을 옹호하는 현상" 비판했다.

페미니즘은 스탈린주의 체제와 많은 측면에서 성격이 다른 진정한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견해는 여성 억압의 역사적 유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또한 물질적 궁핍을 해소한 사회주의 체제가 사회의 우선 순위를 조정하고 인간관계의 모든 측면들을 획기적으로 개조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생산력의 혁명적 몰수와 세계적 차원의 계획경제 건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조건 식량, 주택, 직장, 의료, 교육 등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할 것이다.

단지 세대만에 생산의 사회화는 현재 극소수 특권층만이 누리는 삶의 질과 경제적 자립을 모든 인민에게 보장할 있을 것이다. 현재 이들에게 그림에 떡에 불과하지만 사회주의에서 보장될 휴양시설, 여름 캠프, 스포츠 교육문화 시설 그리고 다른 혜택들은 인구 대다수의 삶을 엄청나게 개선시킬 것이다. 사적 이윤 추구만을 중심에 놓는 시장 원리를 극복한 사회에서 인민은 삶과 관련된 모든 선택들을 다양하게 누릴 있을 것이다. 특히 현재 여성이 전담하고 있는 가사노동은 사회 전체적으로 제공되는 우수한 질의 육아시설, 식당, 세탁시설 등으로 크게 줄어들 것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경쟁, 근심, 생활의 불안정 등이 과거의 기억으로 사라지면 인간의 사회적 행위도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개인적 삶을 누릴 물질적 조건은 이윤 극대화 논리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는 제공될 없다. 그러나 계획경제 체제에서는 물질적 조건은 합리적인 선택의 문제에 불과할 것이다. 국가가 지원하는 예방접종 프로그램과 하수시설이 사회 성원 모두의 혜택이 되듯이 개인의 안전하고 보장된 생산적 삶의 확보는 반사회적 행위, 정신병, 질병 등의 원인들을 제거하여 모든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시킬 것이다.

이미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는 특권층 내에서도 남성이 여전히 여성을 억압한다고 페미니스트들은 주장할지 모른다. 주장이 옳다면 사회주의는 여성 억압을 철폐할 없을 것이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특정 사회계급의 물질적 이익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는 어느 정도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 노동력의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는 여성의 일반적 상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본주의는 여성을 차별하는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옹호한다. 따라서 지배 계급 여성 아니라 모든 여성들이 성차별을 겪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행은 이것들을 발생시킨 조건들이 전복되더라도 자동적으로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산물인 후진성과 무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투쟁이 전개되어야한다. 계급 사회는 사회 구석구석에서 남성 우월 주의와 인종차별 등을 강화시키고 촉진시킨다. 그러나 모두가 안락하고 보장된 삶을 누리는 평등 사회는 차별적 편견들을 근절시킬 가능성을 결국 현실로 만들 것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가망 없는 절충주의

파이어스토운, 빨간 스타킹 그룹, 델피 등은 1970년대 초반 여성해방운동의 축을 대표하고 있었다. 경향의 정반대에서 최상의 투사 수백 명은 맑스주의-레닌주의를 자칭하는 다양한 그룹들에 합류했다. 그런데 양극단의 중간에 "사회주의 페미니즘" 자칭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경향은 1970년대 내내 특히 영국에서 영향력이 있었는데 결국에는 가망 없는 절충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급진 페미니즘의 생물 결정론을 거부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분리시켜 바라보면서 억압체제를 모두 여성의 적으로 간주하는 "이중 구조" 고안해냈다. 바람직한 분석 틀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다수는 올바른 것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별개로 존재하면서 서로 배치되는 억압체제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했다. 또한 인종차별, "노인 차별" 그리고 기타 사회적 억압들을 자본주의/가부장제의 "이중 구조" 모델에 통합시키는 것도 곤란했다.

그리고 "가부장제" 정확한 규정과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서로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남성의 폭력성, 시기심, 자궁에 대한 부러움, 여성의 생식기능을 남성이 엄격히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언어, 심리적-성적 구조의 차이, 물질적 특권 가부장제를 발생시킨 원인들은 수없이 나열되었다. 그리고 가부장제의 기능과 발생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위에서 언급된 요인들에 결합되었다. 그리고 이것도 모자라 다른 원인들이 제시되고 통합되었다.

미약하나마 존재했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투쟁은 급진 페미니즘보다 노동계급의 이해에 근접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면 양자는 매우 유사했다. 전통적으로 맑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조직의 건설을 지지해왔다. 모든 부문운동의 가장 헌신적이고 의식 높은 투사들로 구성된 혁명정당을 통해 여성운동은 노동계급 여타 대중운동과 연대해야한다. 운동은 개량주의, 자본가 계급, 노동조합 관료집단 등으로부터 "독자성" 유지하면서 조직적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전위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급진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주장한다: 남성을 포괄하는 모든 조직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자적 여성운동만이 진지한 여성해방 투쟁을 전개할 있다.

그러나 조직 노선도 현실에 적용되자 문제를 드러냈다.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대해 투쟁하려는 다수 대중의 지지가 있어야 자본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투쟁할 있다. 단순히 성이 다르다고 해서 인구의 절반인 남성을 애초부터 배제하는 것은 패배를 보장하는 노선이다. 더욱이 주로 성별에 기초해서 적과 아군을 구별한다면 우익운동에 가담한 여성 또는 파업대체인력 여성이나 경찰 여성들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배계급의 여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페미니즘 사회주의를 위해 투쟁할 자연스러운 동맹세력을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처럼 더럽게 행동하는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라고 단순히 선언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과학적 세계관을 추구하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해결책이 없었다. 이미 붕괴한 10년이 넘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생각이 깊은 주창자 가운데 리즈 보걸이 있다. 그녀는 1981년에 출판된 자신의 시론인 "맑스주의와 페미니즘: 불행한 결혼, 별거 시도, 아니면 무엇인가?" 다시 출판했다. 1981년의 시론에서 보걸은 노동계급의 적인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에 대한 입장을 이리저리 탐구하였다. 그러나 1995년에 나온 시론은 문제에 대해 확고히 입장을 정리했다:

"좌익의 일부 의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이 성공적으로 조직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 모든 계층의 여성을 참여시키는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독자적 여성조직은 여성들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필요하다. 사회주의 이론과 실천의 전통은 너무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충돌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각계 각층의 여성들을 조직하여 독자적 여성운동을 발전시킬 틀을 개발하는 것을 자신의 핵심적 임무라고 생각한다."--- 리즈 보걸, [여성 문제: 유물론적 페미니즘의 시론집], 1995

보걸은 이보다 30 전에 미국 남부로 내려가 흑인민권운동을 했던 급진파 여성이었다. 이제 그녀는 근본적으로 서로 적대적인 "페미니즘" "사회주의" 결합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맑스주의자들은 모든 여성들을 "단결"시키겠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계급협조주의 노선이라고 빈정거렸다. 그리고 급진 페미니즘은 운동을 "남성에 동화된 정치협잡꾼" 운동이라고 공격했다. 미국 급진 페미니즘의 저명한 이론가이자 앤드리어 도오킨의 협력자인 캐써린 매키넌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근본 모순을 이렇게 지적했다:

"맑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시키려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이론의 독자적 성격과 상호 적대적 깊이를 모두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페미니즘 국가 이론을 위해], 1989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운동은 이미 소멸했다. 전제 자체가 일관되지 못하여 진지한 투쟁을 수행할 강령이나 조직을 수립할 없었기 때문이다. 계급을 초월한 여성의 단결(페미니즘) 추구하는 세력과 성을 초월한 노동계급의 단결(맑스주의) 추구하는 세력 사이에 끼어들 공간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노동자들이 사회보장 프로그램 삭감의 폐해를 일차적으로 겪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부는 정치적 색깔이 어떠하든 국가가 이상 아동, 노인, 병자 등을 돌볼 비용을 감당할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비용은 "가정" 주로 여성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회보장 프로그램 삭감에 자연스럽게 대항할 세력은 누구인가?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들은 정부의 긴축정책과 결과 발생하는 부의 불공정한 분배를 일반적으로 지지한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사회적 필요를 위한 공공기금의 지출로 사적 자본의 축적이 방해받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노동계급 남성들은 탁아 보조비, 노인 연금, 의료 보험 등의 삭감에 맞선 투쟁에서 여성들과 함께 싸울 있는 자연스러운 동맹 세력이다.

현재 좌익 학계에서 유물론으로 남성 우월 주의를 분석하는 일은 이미 유행이 아니다. 맑스주의는 이미 한물간 것으로 치부되고 있으며 대신 자크 데리다, 줄리아 크리스티바, 루쓰 이리가래이, 미셸 푸코, 보드리야르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하고 있다. 때때로 정치 좌익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설파한 반동적 역사비관주의로의 회귀현상이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니체를 "() 계몽주의 연금술사" 규정한 있다. 계몽주의와 맑스주의의 핵심은 인간 사회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하여 개조될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는 이것을 파산한 "인본주의" 사상이라고 거부한다! 따라서 포스트주의는 정치투쟁을 포기한 보수적 좌익의 경향을 이론의 이름으로 치장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영국 "사회주의 페미니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미셸 배릿은 "담론으로의 추락" 대표하고 있다. 1980년에 나온 자신의 저서 [오늘날 여성 억압의 실태] 1988 신판 서문에서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같은 거창한 정치운동을 명확히 거부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이다.... 벌써 포스트모더니즘은 미래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중심 축이 되었다. 내가 지금 책을 다시 쓰게 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야말로 나의 주장을 풀어나가는 서두가 것이 틀림없다."

'문화 페미니즘'과 정치투쟁의 폐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페미니스트 대부분은 주류 사회의 성차별에 대해 연극, 음악, "여성의 역사(herstory)", 문학 대항 여성문화를 구축하여 탈출을 시도했다. 1970년대 후반 "문화 페미니즘" 하나의 경향으로 성장했다. 배려, 공유 , 정서적 온기 소위 여성적 가치를 탐욕, 폭력, 이기심, 정욕 소위 "남성적" 가치와 대비시키는 작가들이 인기를 누렸는데 바로 경향의 반영이었다. 1960년대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의 억압 상을 처음으로 개인의 영역에서 공개 영역으로 끌어내었다. 그러나 1990년대의 문화 페미니즘 여전사들은 "여신 "이라는 개념을 유포시키면서 여성스러움이라는 기존의 사고를 다시 포장하여 이것을 "여성의 권력"으로 호도하고 있다 "여성의 역사" 산업은 정치적 퇴행의 대표적 예이다. 1970 미국 여성운동의 어느 주요 기관지는 "역사상의 여성" 주제로 특별호를 발간했다. 잡지의 커버스토리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의 역사를 남성들이 훔쳤다. 우리의 영웅들이 죽은 방식은 처참하다. 출산 중에 죽기도 하고 복막염에 걸려 죽기도 하고 과로로 죽기도 하고 억압을 당하면서 죽기도 하고 홧병으로 죽기도 했다. 우리의 천재들은 글을 몰라 자신의 역사를 수가 없었다."--- [여성: 해방 저널], 1970 봄호

데일 스펜서와 같은 현대의 "여성 역사가들" 이러한 주장을 거부하면서 남성 역사가들이 중요한 여성 예술가, 여성 작가, 여성 과학자 등을 역사에서 발굴했다고 주장한다:

"여성들이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은 여성 때문이 아니라 남성 때문이다. 여성이 역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남성들이 `기록을 왜곡'했다. 이것을 인정하면 (여성 억압의) 현실이 크게 변화된다."--- [여성 사상가들 그리고 남성이 이들에게 가한 악행], 1982

인류 역사에 대한 여성들의 기여를 연구하고 널리 알리면 현재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투사들의 사기가 진작될 수는 있다. 그러나 추악한 진실의 미화는 여성 억압을 영구화시키는 사회체제 타도의 시급성을 무디게 할뿐이다. 여성들은 가사노동이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강등되는 것을 통해 역사 발전의 주인공이 기회를 예외를 제외하면 박탈당해왔다. 역사책에 여성이 배제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엄청난 잔혹성과 규모를 시시한 것처럼 만들뿐이다.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정치활동보다는 기권을 설교하고 있다. 여성의 정치운동이 남성의 정치영역에 어쩔 없이 포섭될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여성의 평등권으로 위장된 생색내기 여성 평등은 진짜 생색에 불과하다. 결과 여성의 권력이 가로막힌다. 여성의 단결이라는 속임수 구호로 활기를 여성 권력은 남성들의 집단적 권력에 집어삼켜진다. 부분적 성과라는 환상으로 인해 여성의 자아는 거세된다....생색내기 속임수는 여성의 단결을 슬그머니 파괴시킨다. 왜냐하면 아마존 여성전사들의 결속력이 가지고 있는 전투적 측면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결과 여성 억압에 대한 `반격'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시켜서 여성 단결의 초월성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초월성을 남성적인 동지애의 모조품으로 만들어버린다. 또한 아마존 여성전사들의 전투적 측면을 축소시켜 이것의 중요성을 극소화시킨다. 결과 여성 억압에 대한 투쟁은 막다른 골목에 갇힌다."--- 메리 데일리, [여성/환경], 1978

억압 그리고 이것에 대항할 투쟁의 필요성 자체가 극복되어야할 "남성" 사상으로 조롱 당한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원하거나 사회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후진적인 방식이다. 존재의 ()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방해받지 않은 홀로 있으면 우리는 자유롭게 우주의 조화를 찾고 그것의 영롱한 소리를 듣는다."--- 앞의

반동적인 헛소리는 수천 명의 소부르주아 베이비 세대를 신좌익(New Left)에서 신시대(New Age) 후퇴시킨 정치적 패배주의 허무주의의 페미니즘 선언문이다.

여성 권익의 신장이 정지 당하자 수동성과 정치적 기권주의를 찬양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진짜 고통이 발생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향을 찾으면서 구원을 약속한다. 여기에는 나름의 논리가 존재한다. 여성에 대한 억압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영구불변의 차이에서 온다면 무엇을 하든 실제적인 변화는 기대할 없다. 따라서 의식을 규정하는 제도와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킬 투쟁에 참여하는 대신 내적 세계로 개인적 정신여행을 떠나라고 신시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 조언한다. 정신적 성취의 길이 여성들과의 토론에서 열린다고 메리 데일리는 충고한다. 토론을 통해 언어가 여성에게 포섭되고 남성적 "의미들" 전복된다:

"남성 지배의 굴레를 깨기 위해서는 언어의 빛나는 힘을 얻어야한다. 언어를 해방시키면서 자아를 해방시킬 있다."--- [순수 욕망], 1984

문화 페미니스트들은 인류역사를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하는 모험을 시작한다고 상상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에게 유행하고 있는 보수적 경향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변종들은 언어와 "담론 " 대한 관념적 집착, 정치적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 격하 등을 포함한 "포스트모더니즘" 핵심 특징들을 다수 수용하고 있다.

'여성의 노동'

정치투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페미니스트들도 1970년대 초기에 외쳤던 () 자본주의 수사는 포기했다. 이들의 다수는 낙태 시술소, 강간 재활 쎈터, 여성의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봉사 활동은 이것을 이용할 있는 여성들에게는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제공하는 활동가들에게는 뭔가 "실제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활동은 여성 억압의 근원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개량적 반응일 뿐이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숙련직, 전문직, 기업 경영 여성들에게 배제되어온 분야에서 여성 참여의 비율을 높이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활동은 일부 여성들에게 직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부 편견들을 없애는데 기여했으나 전통적으로 "여성" 직종에 고착되어있는 대다수 여성들의 조건은 전혀 개선시키지 못하고 있다.

최근 년간 미국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임금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많이 있었다. 1955년과 1991 사이에 상근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남성 임금의 64%에서 70% 늘었다. 그러나 현상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 육체노동 직종의 축소로 인한 남성 임금의 하락에 크게 기인한다. 모든 직종에서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남성의 직업에 대한 여성의 무제한적 접근 등을 맑스주의자들은 옹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끈질기게 존재하는 성차별과 편견이 여성의 진정한 평등을 막고있음도 인식하고 있다.

"남성" 직종과 "여성" 직종의 구분은 대부분 객관적 근거가 없다. 평균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힘이 있다는 것이 직무능력과 관련된 유일한 차이이다. 그러나 신체적 힘을 요하는 남성 직종은 저임금 직종이다. 기술 , 손재주, 정신적 조직적 능력이 훨씬 가치를 인정받는다. 기업 경영자, 의사, 항공 조종사들이 거의 남성인데 비서, 간호사, 비행기 승무원들이 거의 여성인 이유는 사회의 편견 때문일 능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1959 에세이에서 낸시 리브즈는 "남성" 직종과 "여성" 직종 구분의 자의성에 대한 놀라운 예를 제시했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 인부는 대부분 여성이었으며 옥수수를 다듬는 인부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그런데 극서부 지역에는 역할이 완전히 바뀐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 우월적 관행은 너무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상황에 따라 대단히 융통성 있게 발휘되고 있다. 전에 남성이 지배했던 직종에서 여성들이 자리를 잡으면 공개적 비공개적 형태의 장벽들이 등장한다:

"1973년에는 미국의 법학 학위의 8%만이 여성들에게 수여되었다. 그런데 1990년이 되면 비율은 42% 급증한다. 권위 있는 분야에 여성들의 진출이 상당히 진전된 셈이다. 그러나 법률상담원과 같은 비교적 낮은 보수의 직종에는 여성들이 너무 많은 반면 대형 법률회사의 보수가 가장 높은 직종에는 여성들이 거의 없다."--- 조이스 제이콥슨, [성의 경제학], 1994

기업에도 똑같은 현상이 관찰된다:

"여성 경영학 석사에 대한 콜럼비아 대학교와 스탠퍼드 대학교의 연구에 의하면 경영학 석사를 따고 직장에 들어간 여성과 남성의 초봉은 같지만 7년이 지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봉급이 40% 낮았다."--- 앞의

도서관의 사서직은 그나마 남아있는 "여성" 전문직의 하나인데 직종에서도 주요 연구도서관의 고위 행정직 최상 직급은 거의 남성 차지이다. 제이콥슨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력 비중에 비례하여 여성이 진출한 직종이나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직종은 찾기 힘들다. 저임금 직종에 여성이 몰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별이 바뀌는 직업은 문제의 체제적 성격을 보여주는 다른 예이다. "여성"직에서 "남성"직으로 바뀐 안되는 직종 가운데 하나가 조산원이다. 1910년에는 여성 산파들이 미국 아기 절반의 출생을 도왔다. 그러나 1970년이 되자 비율은 1% 미만으로 떨어졌다. 병원에서 남성 의사의 도움으로 대부분 출산이 이루어지자 일에 대한 지위와 보수는 급격히 상승했다.

이와 반대로 일자리가 남성 중심에서 여성 중심으로 바뀌면 직종의 지위와 보수는 쇠퇴한다:

" 2 세계대전 전에는 은행창구 직원이 여성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80년이 되자 직종의 90% 이상이 여성으로 채워졌다. 그러자 봉급 수준과 승진의 기회는 급격히 떨어졌다. 산업혁명이 서류 처리 인력을 증대시키자 사무직종은 지배적으로 남성의 일자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이 압도하고 있다. 이제 분야는 보수가 형편없이 낮은 전형적인 여성 직종이 되었다."--- 앞의

전통적으로 남성이 지배한 직종에 여성이 진출한 가장 뚜렷한 예는 마거릿 쎄처의 영국 수상 취임 사건(!)이었다. 남성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철의 여인" 최고위직에 오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녀가 집권하는 동안 여성이 훨씬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빈민계층 그리고 노동계급은 유례가 없이 야비한 공격을 당했다. 쎄처의 성공은 다양한 남성 우월 의식을 침식시켰으며 야망이 영국 소녀들에게 최고위직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불어넣었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제시한 교훈은 자명하다: 사회억압의 기초는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논리이지 체제를 움직이는 인물의 성별이 아니다.

포르노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

지난 년간 급진 페미니즘이 주도한 가장 정치적이며 가장 반동적인 운동은 포르노 불법화 운동이었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의 가치를 떠벌리는 얌전빼는 우익 분자들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종종 주장한다. 하지만 포르노를 반대하는 이들은 낙태를 형사 처벌하고 동성연애자들을 탄압하고 학교에서 진화론과 성교육 강좌를 금지시키려고 애쓰는 편협한 자들과 기꺼이 동맹을 맺어왔다. 사법당국은 국가의 검열을 옹호하면서 자신들이 "여성의 권익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포르노 금지운동의 가장 주요한 표적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국가의 검열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타고난 잔인한 성욕이 중심이 불변의 남성성이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미국에서 국가 검열을 옹호하는 페미니즘의 화신인 앤드리어 도오킨은 "섹스와 살인은 남성 의식 속에 결합되어 있으므로 살인의 가능성이 없는 섹스는 생각할 수도 없고 불가능하다.("행동하기", [밤을 되찾아라], 1980)" 따라서 "남성 의식" 표현인 포르노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검열을 옹호하는 페미니즘이 있듯이 "모성" 지지하는 페미니즘이 있다. 경향은 새로운 생식 기술 (reproductive technologies) 개발에 광적으로 반대한다. "생식 유전 기술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국제 네트워크" 1984년에 창립되었는데 여성운동의 핵심 사안은 인공수정과 시험관 수정에 대한 반대라고 주장한다. 생식 기술의 발전이 여성해방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물 결정론 페미니스트 슐라미쓰 파이어스토운이 주장했다. 이에 반해 피해 망상적 페미니스트들은 이것이 새로운 종류의 여성 노예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핵전쟁 이후의 끔찍한 상황을 우리는 생각도 하기 싫어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신도 산통도 없이 아이가 태어나고 , 여성들이 남아만 임신하고 여아는 낙태시켜 죽이는 미래는 생각하기도 싫다. 중국과 인도의 여성들은 이미 고통을 겪고 있다. 사회 집단으로서 여성의 미래가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모성의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르는 과학을 승인하기 전에 모든 가능성들을 철저히 고려해야한다."--- 로빈 롤런드, [인공 여성], 1987

"포르노 반대" 동지들과 마찬가지로 롤런드와 여타 "모성" 주창자들은 전통 우익 세력과의 동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들은 우익 여성과 같은 기이한 동침자들과도 동맹해야할지 모른다"(앞의 ). 롤런드의 "동침자"에는 자칭 인종주의자 이녹 파월도 포함되어 있다. 1985 이녹 파월은 배아 연구를 금지시키고 시험관 수정을 철저히 규제하는 "미출생 아동 보호 법안" 도입했다. 법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는데 법안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에서 롤런드는 연설을 자청했다(마지 베러, "생식에 대한 음모와 새로운 생식 기술 ", ---[난관과 투쟁] 1986 여름호).

수전 팔루디의 `역전 현상'

1970년대 이래로 페미니즘은 우경화 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스스로를 좌익으로 자처하면서 포르노 금지를 비롯한 다양한 우익 운동에 격렬히 반대해왔다. 1990년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의 하나는 수전 팔루디의 [역전 현상: 여성에 대한 포고되지 않은 전쟁](1991) 이다. 저서는 지난 10년간 진행된 "가정 옹호" 반동운동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여성들이 지금 평등을 누리고 있다면 이들은 특히 노년에 남성들에 비해 빈곤에 시달릴 가능성이 많은가? ... 아직도 영국과 미국에서 여성노동자들은 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임금을 3분의 1 적게 받고 있는가?. . .여성들이 `자유롭다면' 출산에 대한 선택의 자유는 10 전보다 악화되었는가? 임신을 연기하려는 여성들은 10 전에 비해 선택할 있는 방법이 적은가?"

팔루디가 지적하고 있듯이 부르주아 언론은 문제들을 결코 제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저서는 사회 평등을 감히 추구하려는 여성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여론 " 제조되고 조작되는 방식을 풍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개인적 성장" 위해 정치활동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면서 집단적 투쟁을 옹호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저항하고 있는 반동적 정세의 기원을 설명하지도 못하며 이에 대항할 강령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대신 그녀는 여성해방운동이 이룬 성과가 현재 역전되고 있는 현상을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존재의 거대한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권리가 역전되는 현상은 전혀 새롭지 않다. 이것은 역사상 계속 반복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여성이 평등을 위해 전진을 하기 시작하면 현상이 나타난다. 페미니즘이 잠깐 개화하면 서리가 일찍 내려 이것을 역전시키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미국의 문학연구가 더글러스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진보"와는 달리 여성 권리의 진보는 우리 문화에서 언제나 이상하게 역전되어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여성들이 올렸던 성과들은 정치투쟁의 직접적 결과였다. 그러나 대중 정치투쟁의 결과 쟁취된 지배계급의 양보조치들은 역관계가 달라지면 역전될 있다. 인종주의, 여성 억압 사회적 억압에 대한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결코 최종적으로 승리할 없다. 왜냐하면 특권과 불평등의 유지는 사적 생산수단 소유체제의 불가피한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팔루디의 가장 눈에 띠는 결함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역전 현상을 고립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있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의 권리에 대한 반동적 캠페인은 전면적인 반동적 공세의 일부에 불과하다. 팔루디가 그렇게 묘사하고 있는 부르주아 선전 기법은 지배계급이 공격하고 있는 다른 대상들 생활보호 대상자들, 노동조합원들, 사담 후세인 등에게도 주기적으로 구사되어왔다.

낙태를 반대하는 "태아 구조 활동" 광신도들에 대한 국제적 저항운동을 자신의 저서에 각주로 처리하면서 팔루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989 뉴질랜드 웰링튼의 교외에 위치한 낙태 시술소에 태아구조대 일개 부대가 도착하면서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는 이미 30명의 여성들이 시술소에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태아구조대의 방해를 저지하고 낙태 시술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여성들은 대단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당시 시술소를 방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성들도 끼어 있었다. 그리고 웰링튼의 우리 동지들도 함께 있었다. 전투적이며 남성을 포함하고 있는 낙태 옹호 "신속 출동" 네트워크의 이름은 "선택"이다. 단체는 낙태의 권리를 옹호할 태세가 되어있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단체를 통해 우리 조직의 지지자들은 파크뷰 시술소를 지속적으로 방어하는 투쟁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투쟁의 교훈은 명확하다: 성별이 아니라 정치노선에 기초해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해야한다.

여성 해방, 사회주의 혁명으로 쟁취하자!

여성이 가정의 노예가 되면서 여성의 권리에 대한 많은 사안들은 오랫동안 단순히 "개인적" 관심사로 치부되어왔다. 1960년대 후반 여성해방운동 내에는 "의식을 환기시키는 그룹들" 확산되어 여성들이 자신에 대한 억압을 내면화시키는 다양한 방식들과 사회가 여성의 복종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취급하는 범위를 탐구했다.

낙태, 산아제한, 의료, 육아, 고용 등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법적 제도적 규제는 모두 명백히 "정치" 문제들이다. 그러나 수천 년간 지속된 남성 지배의 결과 고착된 뿌리깊은 심리적 사회적 태도와 편견을 통해 여성 억압이 자행된다. 여자 애들은 어렸을 때부터 남자가 있는 것을 여자가 수는 없다고 교육받는다.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들은 우리 문화에 너무 뿌리 박혀 여성 억압의 많은 측면들은 심지어는 여성해방투쟁에 헌신하는 투사들의 눈에도 거의 띠지 않는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들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자고 제한했을 일부 좌익 맑스주의 언론은 주류 부르주아 언론보다도 격렬하게 반대했다.

남성에 의해 자행되는 성희롱, 강간, 가정 폭력 등으로 많은 여성들의 삶은 망가지고 있다. 이런 일들은 남성과 여성 개인 사이에 벌어지고 있지만 병리현상들은 모두 사회적 문제이다. 이것들을 야기하고 조장하는 사회체제가 타도되고 대신 근본적으로 다른 가치관들이 공존하는 문화를 가능케 하는 물질적 조건을 조성할 있는 다른 사회체제가 등장할 때까지 문제들은 사라질 없다.

여성해방은 개인적 삶의 영역에서 성취될 없다. 가사를 남녀가 좀더 균등하게 나누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육아, 청소, 식사준비 등이 개인의 책임에서 사회의 책임으로 전환되어야한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를 완전히 개조하여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을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로 바꾸어야한다.

여성해방이 계급투쟁의 결과와 밀접히 관련되는 것과 똑같이 사회혁명의 운명도 빈민 노동계급 출신 여성들의 참여와 지지에 달려있다. 1868 12 12 루드비히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카알 맑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는 사람은 거대한 사회혁명들이 여성들의 열정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성의 평등을 옹호하고 진전시키는 투쟁에 혁명가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한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 내에 여성 지도자들의 발굴을 촉진시켜야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타도 투쟁에 참여함으로써만 여성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한 길로 전진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타도되어야 기아, 착취, 빈곤, 수천 지속된 남성 지배의 해악 등을 일소할 물질적 조건들이 창출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투쟁 목표인가!

부록: <여성 억압 ---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사회적 억압 가운데 가장 널리 퍼져있으며 가장 뿌리가 깊은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나 억압은 인종 억압과는 달리 자본주의 이전부터 존재했다. 1884년에 완성한 획기적 저서 [가족, 사적 소유 , 국가의 기원]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부족의 모든 성원들이 함께 일하고 모든 재산이 공동으로 소유된 수렵과 채취 위주의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이등시민이 아니었다. 여성의 종속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사회계급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음을 그는 특히 주목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문명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온 남성 지배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유전자 차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결정된 현상이라고 그는 결론 내렸다.

출산과 육아의 능력이 여성에게만 있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사이의 자연스러운 노동분업이 원시사회부터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동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계급사회의 등장과 함께 여성들은 서서히 정치 경제 활동에서 배제되고 가정에 묶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사회와 시대마다 여성 억압의 형태, 정도, 강도는 다르지만 억압은 언제나 다음 세대의 생산이라는 여성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억압은 이어서 궁극적으로 지배적 생산양식과 이에 따르는 사회구조의 필요에 의해 고착되었다.

사회 유지에 필요한 가사노동을 돈도 받지 않고 제공하는 역할 때문에 여성은 자본주의 "자유시장" 체제에서 억압당하고 있다. 역할에는 식사와 의복과 청소에 대한 일차적 책임, 유아와 노인과 병자의 간호, 가족 성원 전부의 정서적 심리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등이 있다. 지배계급이 보기에 가정은 다른 어떤 방식보다 필수적 기능을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서 가장 값싸게 제공하는 단위이다. 따라서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는 가정을 기본 단위로 설정하여 옹호해야할 절대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이다.

엥겔스가 활동할 당시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저서의 기초가 되는 실증적 자료는 한계가 있었으며 일부 중요한 측면에서는 오류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여성 억압이 사회적 산물이라는 그의 통찰이 의미를 퇴색 당하지는 않는다. 비교적 최근까지 부르주아 사회과학자 대부분은 남성의 지배를 보편적 규범으로 간주하고 이것이 대체로 생물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난 몇십 년간 인류학자 다수는 수만 년간 성평등이 유지된 수렵-채취 사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인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자체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식의 전환은 부르주아 매체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나 [뉴욕타임즈] 1994 3 29일자 기사는 예외적으로 진실을 보도하고 있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 성평등이 존재하다]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는 위스칸슨 대학교 인류학 교수인 마리아 르파우스키 박사의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있다. 1993년에 출판된 저서 [모국의 열매]에서 그녀는 뉴기니섬 남동쪽에 위치한 외딴 바나티나이를 묘사하고 있다:

" 섬에는 남성 우월 의식, 남성의 강제력,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식적 권위 등이 없다.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역할에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여성은 공적이며 권위를 부여하는 역할들을 맡는다. 여성은 생산물에 대한 권한과 귀중품 분배를 남성과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여성은 재산을 상속받는다. 여성 남성 없이 똑같이 귀중품을 교환하고 연회를 준비하며 고구마 심기, 치료 중요한 의식을 관장한다. 여성은 친척에게 조언을 하고 공공 집회에서 연설을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연설을 열심히 듣는다. 여성은 귀중한 마술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 생존활동에서 남성과 함께 일한다."

섬에서 여성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타우부와라가"이다. 이것은 "조상들의 삶의 방식"이라고 번역된다. 섬에서 남성은 여성의 육아활동을 돕는다. 언어도 중립적이다. "", "그녀" 같은 단어는 없다. 자신의 저서의 결론 부분에서 르파우스키 박사는 이렇게 논평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공평한 대접이라는 사회 전반의 도덕 관념, 정치권력의 분산, 공적 권위를 갖는 직위에 여성과 소수인종을 포함한 모든 계층들의 참여 등에 의해 성평등이 촉진된다는 사실을 바나티나이 섬의 예가 암시한다....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현상도 아니며 불가피한 현상도 아니라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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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T)중국의 당면상황

(국제 좌파 그룹 IBT의 중국 관련 글입니다. 전북 현장연대 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중국의 당면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입니다.)


경제특구와 국영기업

마오저둥의 사망 후 도입된 핵심 "개혁들" 가운데 하나는 집단농장을 가내기업으로 분해시킨 것이었다. 현재 농촌에서는 수백만 가구가 국가로부터 좁은 농토를 빌린다. 몇몇 농민들은 대규모 사업을 시작할 정도로 충분한 자본을 축적했지만 대다수는 절박한 빈곤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가장 성공한 중국의 농민도 서방의 초국적 거대 농업기업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시카고 현물시장에서 옥수수는 2000년 9월에 톤당 100달러였으나 중국에서는 175달러였다([미니애폴리스 스타 트리뷴], 2000년 10월 1일). 현재 중국 농촌의 노동력은 거의 20%가 실업자이다. 1억 명 이상의 전직 농민들이 도시 주위의 빈민굴에서 노점상, 매춘, 경미한 범죄 등에 종사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중국 농업부의 예상에 따르면 세계무역기구의 요구에 따라 수입 규제를 완화할 경우 최소한 2천만 개의 농업 관련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1980년 정부는 홍콩과 인접한 광둥성에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4곳의 경제특구를 설치했다. 현재 경제특구는 약 1만2천 곳으로 늘었는데 대부분은 남동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들은 근본적으로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경제 식민지인데 중국의 전체 제조업 생산량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수출의 절반을 담당한다. 초기 투자를 한 홍콩과 대만 출신의 중국인 자본가들은 경제특구가 대단한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중국은 세계에서 임금이 가장 싼 나라에 속해서 멕시코 임금의 절반 수준이고 미국 임금의 20분의 1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임금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중국공산당이 노동조합 설립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이 직접 관리하는 북동 지역의 거대한 국영기업들은 1949년 혁명이 수립한 집단적 경제의 핵심부이다. 1980년대에는 국영기업이 중국의 비(非)농업생산을 거의 전부 차지했지만 지금은 그 비중이 30%로 하락했다. 그러나 국영기업들은 중공업, 첨단 군수산업, 에너지산업, 통신산업 등 경제의 핵심부문이며 전체 고정자산의 약 70%를 차지한다. 더욱이 국가의 재정원인 세금을 비중에 비해 엄청나게 많이 낸다. 국가는 국영기업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식량, 의료, 주택, 연금 등 "철 밥그릇"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관료집단의 권력 유지에 필요한 핵심 도구이다. 시장의 압력이나 생산자의 민주적 통제가 없기 때문에 국영기업은 절대적 수치와 외국기업들과의 상대적 수치로 비교했을 때 당연히 생산성이 꾸준히 하락해왔다.

부르주아 금융언론은 국영기업을 실패한 체제의 유해로 간주하면서 가능하면 빨리 해체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없애려는 "유물"인 공산당 관료집단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공산당은 국영기업 "합리화"를 시도해왔다. 생산성이 최악인 기업은 파산시키고 다른 기업들은 자본주의 기업을 모델로 합병을 추진하고 주식을 발행한다. 또한 생존능력이 부족한 부문들은 팔아치운다. 이것이 공산당의 계획이다.

2003년 5월 후진타오 주석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동안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해온 국영기업들은 이제 중앙의 국가자산감독경영위원회(SASAC)가 관리할 것이다. 이 조치의 목표는 일본이나 남한의 재벌을 모델로 하여 전략산업에서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열 몇 개의 국영기업을 설립하는 것이다. 이 조치는 집단적 경제에 대해 관료집단이 통제력을 행사하는 근본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단기적으로 국영기업의 실적을 개선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국영기업의 "합리화" 결과 노동자들과 은퇴자들의 기본 서비스는 감축되었고 노동력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국영기업들은 2천5백만에서 5천만 개의 일자리를 없앴다.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이렇게 전방위로 공격당하자 수백만 노동자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실업률이 40%에 도달한 북동 공업지대에서는 "경찰과 도둑" 대신 "사장 죽이기"가 어린이들의 놀이거리가 되었다.

서부 지역의 거대 개발과 티베트, 신장의 민족문제

공산당은 최근 몇 년간 간쑤, 구이저우, 닝샤후여, 칭하이, 산시, 쓰촨, 윈난, 신장 등 서부지역 성들에 살고 있는 민족들을 위해 "서부 거대개발" 사업을 시작했다. 이 지역은 중국 전체 면적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3억 인구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고 전략적으로 핵심적인 국경지역, 핵심 군사기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석유 및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지리적 고립, 정치 불안정, 원시적 사회기반시설, 낮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널리 흩어진 인구 등의 특징 때문에 이 지역은 자본주의 방식의 투자가 적합하지 않다.

거대 개발 사업은 도로, 철도, 공항, 신장에서 샹하이까지 2천5백 마일에 걸친 시가 140억 달러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등의 건설을 포함하는 것으로 국영부문의 대대적 팽창을 의미한다. 중국의 가장 넓은 성인 신장은 가장 빈곤한 성의 하나이며 터키어를 말하는 8백만 위구르족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회교 민족주의의 불만이 들끓고 있다. 1997년 초 신장 서부의 도시 이닝에서 발생한 반체제 시위에서 위구르족 500명이 체포되었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이 가운데 30명이 분리주의 및 종교와 관련된 활동으로 2001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정부는 석유와 면화를 수출하는 신장에 한족의 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한족은 이미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 운영하는 대규모 면화농장은 위구르족이 운영하는 소규모 개인 면화농장을 생산량의 면에서 앞지르고 있다. 위구르족이 아직은 한족보다 수가 많지만 한족은 미래에 국가 주도 개발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다.

위구르족에 대한 정부의 억압은 서방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생포한 탈레반 포로들 가운데 300명이 위구르족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테러대전"에 중국이 파트너로 비열하게 합류하려고 하지만 미국은 신장의 회교 근본주의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인정하거나 위구르족 포로들을 중국 당국에 넘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신장의 회교 광신도들을 장차 이용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미 중앙정보국이 20년 전에 오사마 빈 라덴의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무기와 훈련을 제공한 것과 같은 논리이다.

위구르족과 달리 티베트족의 곤경은 친제국주의 "민주주의자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그런데 이들은 1949년에 티베트가 대단히 후진적이고 승려들이 우글거리는 봉건사회였으며 인구의 평균수명이 30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1950년대 초 권력을 처음 장악한 후 중국공산당은 티베트의 종교국가주의자 및 귀족 기생충들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응석받이 10대 소년 달라이 라마와 그의 하수인들에게 아양을 떨려고 했다. 그러나 이 협약은 몇 년 내에 깨지고 1959년에 대규모 반란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진압되고 티베트족 수만 명이 희생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로 도망쳤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직접 통제하고 귀족과 수도원의 토지들을 농민들에게 배분하여 전통 사회체제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고유한 언어, 문화, 영토를 가지고 있는 티베트족이 한족의 지배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위구르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족도 민족으로 존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 내 피억압 민족들의 민족적 권리를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방어에 종속시켜야한다. "자유 티베트"를 위한 국제 캠페인은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의 한 방식이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59년에 미 중앙정보국이 티베트 반란에 개입한 것은 공공기록에 나와있다. 몇 년 전 연합뉴스(AP)는 이렇게 보도했다: "달라이 라마 망명정부는 미 중앙정보국으로부터 1960년대에 매년 170만 달러를 받았다고 오늘 인정했다...."([뉴욕 타임즈], 1998년 10월 2일). 18만 달러의 연간 지원금이 "달라이 라마를 위해 책정되었다."

반동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 감정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의 물질적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진실을 맑스주의자들은 인식하고 있다. 가능한 한 우리는 탄압보다는 교육과 경제적 동기부여를 통하여 사회 후진성의 영향력을 잠식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레닌주의 정부는 소수민족지역의 개발을 위한 풍부한 지원금을 진정한 자치와 결합시켜 한족 국수주의를 퇴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역 정치기관들을 토착민족이 스스로 장악할 권리, 이들이 원하는 언어로 교육과 정부의 공공 서비스를 받을 권리, 정치적 표현과 여행의 자유를 누릴 권리 등을 부여하는 것이 이 노력에 포함되어 있다. 티베트족과 위구르족이 자치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점에 중국의 혁명정부는 동의할 것이다. 동시에 티베트의 전통 지배 집단 그리고 신장의 회교 지도자들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경우 이들과 혁명정부는 공존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제국주의의 올가미

지난 몇 년간 중국의 목에 걸린 제국주의의 올가미는 상당히 촘촘해졌다. 제한 없이 제국주의적 약탈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중국을 되돌리는 것이 미국의 가장 우선하는 핵심 전략이다. 미국이 최근에 벌이는 신식민지 전쟁들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인 중국에 대한 우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중국은 갈수록 수입 석유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라크에 생존 능력이 있는 미국의 괴뢰정부가 수립될 경우 중국은 진짜 큰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점령 중에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건설된 미군 기지들은 한때 소련의 영토였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차단시켰다. 아프가니스탄, 남한,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은 현재 월남, 태국과 해군, 공군 기지 사용권 협상을 진행 중이다. 더욱이 대만에 계속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고 해외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저지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동시에 미국의 미사일은 중국의 핵심 요충들을 영구히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이 어떤 핑계를 대든 중국에 대해 군사도발을 일으킬 위험성은 상당히 있다.

파륜궁은 중국공산당에게 위협적인 존재인가?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정치에 대한 독점권을 조심스럽게 지켜왔다. [중국의 꿈]에서 조우 스타드웰은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들은 정부의 허가 없이는 낚시클럽, 알코올 중독자 자활 모임, 지역 신문 등을 조직할 수 없다." 지역 밖의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는 어떤 조직도 위협으로 간주된다. 중국의 뉴스 매체들은 주요 산업재해, 부패 스캔들, 파업, 시위 등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다. 정부에 대한 전국적 규모의 분노를 촉발시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공산당의 통제는 언제나 불완전했으며 인터넷의 등장은 정권에게 새로운 골칫거리이다. 파륜궁의 급속한 성장에 인터넷이 기여했다고 널리 인정되고 있다. 파륜궁은 일종의 중국식 뉴에이지 명상/신체단련 운동으로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던 기공/태극권 강습에서 개발되어 나왔다. 정부는 오랫동안 기공/태극권을 대부분 노인들의 체력단련과 사회활동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체제에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이 운동의 많은 조류들이 가지고 있는 반(反)유물론적 철학의 토대를 하찮은 것으로 무시해버렸다. 정부는 심지어 기공연구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에서 리홍지의 주도로 파륜궁이 1990년대 초에 등장했다. 1994년 리는 이 협회에서 탈퇴하여 뉴욕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파륜궁은 "진실, 자비, 금욕"을 설교하면서도 혼혈 인종은 내세에서 자리를 제대로 잡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또한 컴퓨터와 비행기 등 현대의 기계를 인간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발명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일련의 5가지 운동을 연습하면 파륜궁 회원들은 자기 몸 속에 황금빛의 회전하는 "파륜"을 갖게 될 것이며, 이 파륜을 통해 이들은 종교적 해탈과 신체 건강을 동시에 성취하고 여러 우주들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연금이나 값싼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받지 못할 지도 모르는 사회에서 파륜궁의 미신은 당연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중국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노인, 실업자 그리고 기타 서민들에게 파륜궁이 인기인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1999년 지방 당국이 파륜궁 집회의 소란스러움에 대해 불평하기 시작한 후 중국과학원의 이론물리학자 헤조우시우는 파륜궁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서를 썼으며 이것은 널리 읽혀졌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파륜궁 회원 1만 명은 1999년 4월 25일 중국의 정치 엘리트들이 사는 베이징의 종란하이 지구 외곽에서 명상 집회를 열었다. 공안 당국은 이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놀랐다. 공산당은 직접적 요구에 초점이 맞추어진 지방 차원의 항의시위는 그냥 넘길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조직 활동은 절대 금지하고 있다. 이 시위 이후 파륜궁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다수의 파륜궁 지도자들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최소한 5개의 성에서 파륜궁 지지자들은 한때 정부의 텔레비전 채널을 해킹하여 "파륜궁은 좋다!"는 단순한 권유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컬트를 선전하는 한시간 이상의 프로그램을 방영하기까지 했다.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는 너무 심각하여 파륜궁 같은 원시적 사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사상에 사상으로 대처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탄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파륜궁은 의심의 여지없이 제국주의자들과 이들의 용병인 반혁명 분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파륜궁은 폴란드의 연대 노조 운동과는 다르다. 연대 노조 지도자들은 폴란드의 기형적 노동자국가 내부에서 의식적으로 친제국주의 세력의 앞잡이가 되었다. 그러나 파륜궁에게는 이렇다할 정치적 사회적 강령이 없다. 맑스주의자들은 이 특이한 미신 운동에 대한 공산당의 탄압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파륜궁은 무너지고 있는 노동자국가의 불안정한 삶과 물질적 궁핍을 피하려는 절박한 중국인들 다수가 애용하고 있는 확실히 해로운 아편이다. 그러나 공산당 내부를 포함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파륜궁보다 훨씬 위험한 친자본주의 세력이 이미 뿌리내리고 있다. 문제는 한때 파륜궁이 인민해방군 내부 심지어는 공산당 상층부에까지 널리 전파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한때 "맑스주의-레닌주의-마오저둥사상"에 고무를 받았던 공산당 간부들이 있었지만 지금 공산당은 자기의 특권과 특전을 유지하는 일에만 온통 관심을 쏟고 있다는 증거이다.

중국 노동계급의 투쟁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 내내 노동계급은 끊임없이 자신의 조직을 건설해왔다. 1956년-1957년의 짧았던 "백화제방"의 자유화 시기에 중국의 공식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ACFTU)의 외부에서 현장 중심의 "불만시정회"가 다수 조직되어 파업의 물결을 일으켰다. 이 운동의 절정은 광둥성의 도시 광저우에서 부두 노동자 절반이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했을 때였다. 그러나 결국 공산당은 파업투쟁을 진압하고 다수의 노동계급 지도자들을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냈다. "문화혁명"으로 알려진 1960년대 중반 관료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은 잠시나마 노동계급의 독자적 투쟁을 위한 공간을 열어주었다. 수십만 노동자들을 포괄한 대중 조직들이 수립된 샹하이를 중심으로 1966년-1967년에 노동계급의 전투성은 상당히 상승했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공산당의 시 정부를 무너뜨리고 짧으나마 샹하이 인민 꼬뮌을 수립했다.

1967년 2월 초 백만 노동자들이 참석한 집회에서 꼬뮌은 수립되었다. 샹하이 꼬뮌은 단명한 삶 내내 공산당에 식상한 일 분파가 주도했다. 이들은 1871년 빠리 꼬뮌을 다룬 맑스의 [프랑스 내전]에 기초하여 통치할 의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에 의해 지도부를 선출하고 소환해야 한다는 이 고전적 저서의 언명은 무시했다. 결국 수립된 지 3주일이 지나서 꼬뮌은 위대한 지도자 마오저둥의 "요청"에 의해 해체되었다. 결국 "꼬뮌"은 중국공산당 일 분파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조직에 대한 샹하이 노동자들의 열정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었다. 이 사건은 관료집단의 불안정성과 노동계급의 휘발성을 동시에 증명했다.

1976년 4월 마오저둥주의 극좌파였던 "4인방"의 정책에 대항하여 현장 중심의 투쟁이 또 다시 물결쳤다. 이 혼란에 책임을 지고 등샤오핑은 두 번째로 잠시 권력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복귀했다. 등샤오핑의 "자본주의자"들은 권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에서 정치탄압을 잠시 완화시켰다. 이 틈을 타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인 노동조합 수립을 요구하고 저임금, 자의적인 경영진 그리고 기타 새로운 시장 "개혁"의 해악 등을 비난했다. 타이유안 제련소에 중심을 둔 어느 신문은 이렇게 제안했다: 진정으로 자기 이해를 방어하려면 노동자들이 직접 대표들을 선출하고 소환하는 독자적 조직을 건설해야한다. 이 주장은 즉시 침묵을 강요당했으나 이 신문이 주창한 사상은 지금도 살아남아 있다.

1989년 4월 초 학생 시위자들이 천안문광장을 점령하고 민주개혁을 요구하자 베이징 공장 노동자 대표들이 즉시 이 투쟁에 합류했다. 이 달 말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WAF)이 철도, 제철, 항공 노동자들에 의해 수립되었다. 다른 주요 도시들에서도 이와 유사한 조직들이 건설되었다. 초기에 이들은 전국노동조합총연맹과는 별도의 독자적 노동조합을 합법화시키라는 요구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러나 곧 임금, 생활수준, 관료적 특권, 임금격차, 직장 민주주의 등의 사안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도시의 노동자 조직들은 조직적 연대를 시작하여 다수 조직들이 베이징노동자자치연맹에 대표들을 보냈고 자치연맹은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89년 5월 18일에 대부분 노동자들로 구성된 1백만 인파가 베이징에서 시위에 나섰다. 이로부터 일주일 후 전국"노동자자치연맹" 준비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공산당은 이 움직임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대중의 총파업 요구에 긍정적이던 전국노동조합총연맹은 갑자기 6월 2일 노동자자치연맹을 불법화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정부에 충성하는 군부대들이 시위대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 수백 명을 살해했다. 노동자 자치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기소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노동자자치연맹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조직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행동의 잠재력을 강력하게 증명시켰다. 1990년과 1994년 사이에도 노동자 권리 향상을 위한 조직들이 시도되었으나 탄압 당했고 활동가들은 감옥에 갇혔다. 공산당의 노동자 통제기구인 전국노동조합총연맹만이 합법성을 인정받고 있다. 또한 이 조직에게는 "합리적 요구"를 제출하고 "시장 개혁을 지지하며 가능한 한 생산의 정상적 질서를 회복시키는" 선에서만 노동 분쟁이 허락되고 있다.

노동자 투쟁의 상승

최근 몇 년간의 대대적 실업으로 촉발된 노동자 투쟁의 상승은 1949년 혁명이래 최고의 전투성을 보이고 있다. 공안부가 작성했다고 인정되는 보고서에 따르면 1998년과 2002년 사이에 일상적 항의투쟁의 평균수치는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투쟁들의 대부분은 개별 직장 차원의 일자리 회복, 의료서비스, 실업수당 등 직접적 요구들에 집중되고 있지만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경영인들과 지역 당국의 부패를 비난하기도 한다.

노동자 투쟁의 규모와 범위가 상승하자 공산당 당국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2001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어느 연구 결과는 이렇게 보고했다: "미숙한 일 처리와 다른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최근 몇 년간 일부지역에서 집단행동의 빈도가 증가해왔고 투쟁의 규모도 확대되어 천 명 또는 만 명 수준의 투쟁이 빈번하다"([뉴욕 타임즈], 2001년 6월 2일). 이 보고서는 이렇게 불평했다: "시위자들은 빈번하게 교량과 도로를 봉쇄하고 당과 정부의 사무실에 난입하고 당과 정부의 위원회에게 강제로 명령한다. 심지어는 폭력행사, 기물파괴, 약탈, 방화 등 범죄행위를 자행한다." 시위에 "농민과 은퇴 노동자들로부터 현업노동자, 개인기업주, 제대 병사, 관리, 교사, 학생들까지 가세하는" 양상이 더욱 우려스럽다.

1989년 노동자 투쟁에 관련되었던 일부 투사들이 현재 노동자 투쟁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 다. 1989년 노동자자치연맹 투쟁에 연루되어 7년 징역형에 처해진 장샹광은 1998년에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미국의 선전매체인 [자유 아시아 라디오]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명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범죄는 해고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슈푸군 노동자협회를 조직한 것이었다. 이 조직은 자의적인 세금징수에 대한 농민들의 항의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유에티안시앙은 고참 노동운동가로 1983년 샤오양 시의 노동자공제회를 출범시켰다. 1989년에 샤오양 시의 자치노동자조합을 지도한 혐의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1999년에 간쑤성에서 [중국 노동자 모니터]를 출판한 역할과 관련하여 다시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99년 수에지펑은 허난성의 독립 노동조합을 조직한 죄로 정신병동에 수감되었다. 2002년 4월 30일에 발표된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는 카오마오빙의 투쟁을 소개했다. 독립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관리자들의 부패를 폭로하려던 그는 장쑤성의 비단공장 노동자였다. 그는 결국 정신병동에 보내져 약물을 강제로 복용과 전기충격 "요법"을 당했다.

[자유 아시아 라디오]와 연관되어 있는 홍콩의 [중국 노동 게시판]과 친자본주의 민주당 등 제국주의 앞잡이 조직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배를 와해시키기 위해 냉소적으로 노동자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대다수의 노동운동가들은 자본주의 시장"개혁"의 부정적 결과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다수는 제국주의자들의 "민주" 하수인들이 늘어놓는 사탕 발림식 약속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다. 지역의 투쟁을 지도한 분자들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탄압으로 희생되었으나 친자본주의 "개혁가들"과 동맹 이외의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반동의 하수인으로 쉽게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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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p>맑스주의와 테러리즘-존몰리뉴

맑스주의와 테러리즘
체제의 폭력이 테러리즘을 낳지만, 혁명가들은 사뭇 다른 투쟁 형태를 위해 싸운다



존 몰리뉴



우파들은 항상 지난 3월 11일 스페인 마드리드 테러 같은 사건들과 혁명을 연관시키려 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그런 [투쟁] 방법에 항상 반대해 왔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폭력이 없는 사회, 지금 우리가 겪는 억압과 차별이 과거지사가 돼 버린 사회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은 이 새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에서 폭력을 일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폭력을 일절 거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전쟁?핵무기?군대?감옥 따위를 지지하는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순전한 위선자들이며, 맑스주의자들은 특정 상황 ― 민족 해방 전쟁이나 대중의 혁명적 투쟁 ― 에서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계급 투쟁과 무관하게 소수가 저지르는 관공서나 민간시설 폭파, 항공기 납치, 암살 등의 테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 이유는 테러가 맑스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맑스는 착취?억압?폭정?전쟁의 근본 원인이 사악한 지배자 개인이나 악독한 정부가 아니라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돼 있으며 다수의 노동 덕에 먹고사는 소수 계급이 생산수단을 지배하기 때문임을 보여 주었다.
지배계급 타도와 그들이 의존하는 경제 체제 타도는 수많은 개인들을 살해하거나 협박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경제 체제의 주역인 새 계급의 투쟁으로만 가능하다.
이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해 보면, 자본가 계급을 패배시킬 수 있는 힘은 오직 노동계급 대중의 조직된 투쟁뿐이라는 것이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뿐 아니라 그 목표, 즉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위로부터의 혁명, 심지어 노동계급을 대리해서 행동한다고 자처하는 세력들이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혁명조차도 한 무리의 착취자들?억압자들을 다른 착취자들?억압자들로 교체하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그 혁명가들의 의도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말이다.) 이 점은 역사에서 거듭거듭 입증됐지만, 특히 동유럽?중국 등지에서 스탈린주의 군대의 정권 장악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런 곳에서는 사유 자본주의를 국가 자본주의가 대체했을 뿐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방법―리플릿 배포, 서명 운동, 노조와 정당을 통한 대중 시위, 선거 운동과 대중 파업―은 모두 노동자들의 의식?자신감?조직하기를 발전시켜 그들 자신의 행동을 진전시키기 위한 조처들이다.
테러 방법은 이런 전반적 전망과 모순된다. 마드리드에서 그랬듯이, 흔히 테러리스트들은 지배자들이나 억압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노동 대중을 공격하는 등 완전히 잘못된 표적을 겨냥한다. 이것은 특정 민족이나 인종 집단 지배자들의 행위를 그 집단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잘못? ― 더 나아가 ?범죄? ― 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잘못은 우파가 흔히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흔히 이것은 좌파가 극복해야 할 과제인 인종적?민족적?종교적 분열을 강화시켜 노동계급의 투쟁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심지어 더 신중하게 표적을 선정한 경우, 예컨대 폭군 개인이라든가 억압 국가의 고위 관리 등을 공격할 경우에도 의도치 않게 무고한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잘못을 저지를 위험 부담은 여전히 남게 되고, 그 정치적 결과는 다르지 않다.
테러리즘의 공통된 결과 또 하나는 테러로 무너뜨리려 하는 바로 그 국가의 억압 기구를 강화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테러] 공격을 받은 정권은 오히려 시민적 자유에 대한 공격, ?용의자들?에 대한 무차별 검거 선풍으로 대응한다. 물론 항상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스페인의 최근 사건―스페인 국민의 훌륭한 대응 때문이다―은 놀라운 예외다. 그러나 그럴[억압 기구의 강화] 가능성이 훨씬 높다.



납치와 살인



마찬가지로, 테러 행위는 완전히 경멸받던 정치인이나 기업인을 모종의 순교자나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1978년에 붉은여단이 전 이탈리아 총리 알도 모로를 납치?살해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에조차 ― 테러의 표적이 누구나 인정하는 폭군이고 무고한 사상자 한 명 없이 완벽하게 그를 처형했을 때조차 ― 테러 활동은 맑스주의적 원칙에 어긋난다. 레온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목적 달성을 위해 권총 무장만으로도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계급 투쟁을 위해 노력하겠는가?…엄청난 폭발로 고위 인사들을 위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도대체 왜 당이 필요하겠는가? 집회, 대중 선동, 선거가 왜 필요하겠는가?…
?우리가 개인 테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런 테러가 의식 고양에서 대중이 하는 역할을 하찮게 만들고 대중 스스로 무기력함에 체념하게 만들고 대중으로 하여금 언젠가 위대한 복수자나 해방자가 나타나 임무를 완수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트로츠키를 인용하는 것이 적절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트로츠키는 테러리즘과 관련해서 맑스주의의 주장을 탁월하게 요약한 일련의 글을 쓴 바 있고, 이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 지금도 구할 수 있는 팸플릿 ≪맑스주의와 테러리즘≫이다. 둘째, 그 글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 테러리즘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드니키, 즉 민중주의자들, 그 가운데 특히 나로드나야 볼랴(민중의 의지)라는 조직이 수행한 테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테러 활동 가운데 하나였고 아마도 체계적인 정치 전략으로 명확하게 정식화된 최초의 경우였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는 심각하게 억압받던 러시아 농민에 기대를 건 지식인들이었고, 그들의 목표는 짜르와 그 각료들에 대한 체계적 공격으로 짜르 체제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지도한 러시아 맑스주의 운동은 민중주의에 반대하며 등장했고, 따라서 테러리즘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맑스주의의 입장이 분명하게 정립됐다.



테러 위협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테러리즘에 대한 태도와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태도를 구분했다. 테러리즘은 비타협적으로 거부했지만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늘 공감을 표시하며 그들의 개인적 용기를 항상 칭송했다.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그들의 언론은 테러리스트들을 ?겁쟁이?, ?악마?, ?비인간적?이라고 끊임없이 비난한다.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그런 생각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테러 위협?을 핑계로 짜르 체제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을 누그러뜨리려 하지도 않았으며, 테러리스트들에 반대해 짜르 체제 편에 서지도 않았다. 그들이 테러리즘을 비판한 요지는 진정한 혁명 투쟁과 비교했을 때 테러리즘은 비효과적이며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론 역사는 그들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결국 짜르 체제와 러시아 부르주아지 둘 다 무너뜨린 것은 폭탄 테러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대중 행동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정식화된, 테러리즘에 대한 맑스주의의 태도는 시간의 검증을 견뎌 냈고, 몇 십 년 동안 하나의 행동 지침이 돼 주었다. 그러나 지난 몇 십 년 사이에 다양하고 강력한 테러 활동들이 벌어졌고, 이를 보면 몇 가지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먼저, 우익과 파시스트들의 테러리즘이 상당히 존재함이 분명하다. 북아일랜드의 오렌지[개신교 정치 단체] 준(準)군사조직, 이탈리아의 볼로냐 폭파 사건, 미국의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 사건, 데이빗 코플런드[영국의 나찌]의 소호[런던 중앙부 옥스퍼드 거리의 외국인이 경영하는 식당가] 폭파 사건, 컴뱃 18[영국의 나찌] 등이 그런 예다. 분명히 이런 것들은 좌파에게 어떤 이론적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모두 반대하기 때문이다.
다른 형태의 테러리즘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주로 1970년대에 극좌파와 학생 반란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단체들로, 미국의 웨더맨, 영국의 앵그리 브리게이드, 독일의 바더-마인호프 그룹, 이탈리아의 붉은여단 등이다. 대체로 이런 단체들은 그들을 배출한 대중 운동이 쇠퇴하는 것에 절망하고 이에 조급하게 대응한 결과다. 부분적으로 붉은여단을 제외하면, 그들은 대중 기반도 없었고 지배계급에 심각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도 거의 없었다. 그들의 주요 효과는 좌파를 와해시키고 혼란에 빠뜨린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그런 분위기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물리적 행동이 아니라 ― 다함께 편집자] 주장을 통해서, 그리고 대중 투쟁의 적극적 계기를 확보함으로써 그렇게 해야 한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피억압 민족을 대변하려 애쓰는 다양한 민족주의 테러 단체들, 즉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조국과 자유(ETA), 다양한 팔레스타인 단체들 등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다. 대체로 이런 조직들은 상당한, 그러나 주로 수동적인 사회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고―비록 그 규모는 소수인 경우도 있고 상당히 다수인 경우도 있는 등 다양하지만 말이다―결정적으로 그들은 대체로 민족 부르주아지의 일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재래식 전쟁(또는 적어도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는 정치적 결사체들이지만, 압도적으로 우세한 억압 민족의 군사력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다. 그들의 계급 기반과 그들의 정치적 관점 때문에 그들은 노동계급을 대안으로 여기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인티파다가 가장 잘 보여 주듯이, 때때로 테러 전술이 대중 저항과 거의 결합되고, 이것이 분명히 우리 비판의 언어와 논조에 영향을 미치거나 미쳐야 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좌파인 우리가 팔레스타인의 자살 폭탄 공격이나 이라크 저항 세력의 공격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맑스주의적 비판의 일반적 설득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타협적 반대라는 맥락 속에서 맑스주의자들이 계속 주장해야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 타도는 서로 연관된 과제들이며 이 과제들을 완수할 수 있는 세력은 국제 노동계급뿐이라는 것이다.



존 몰리뉴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고,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과 ≪렘브란트와 혁명≫(책갈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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