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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쿠바 사회주의는 러시아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 거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된다  


(편집자 주) 1989년 구소련과 동구권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우후죽순 무너질 무렵 미국의 일본계 학자인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회주의는 역사의 사생아, 혹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장 먼 길’로 전락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줄줄이 과거의 이념을 버리고 자유주의나 심지어 파시즘으로 전향해버렸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제임스 페트라스는 자본주의-사회주의 논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와 동유럽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고 또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를 견지해온 쿠바를 비교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삶의 질 측면에서 ‘신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그나마 옛 사회주의와 쿠바가 훨씬 우월하다고 판단한다.

저자 : 제임스 페트라스 미국 빙햄턴 대학 사회학과
출처 : Rebelion 2004년 6월호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념 전쟁’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유엔, 국제노동기구, 식량농업기구(FAO), 세계보건기구 등과 엔지오, 유네스코, 각종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보면 이 논쟁은 오히려 지금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려면 우선 ‘자본주의 도입’ 이후 러시아, 동유럽의 모습을 그 이전과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재와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를 비교해보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시작한지 15년이 흘렀다. 평가엔 충분한 시간이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 : 산업은 절망, 실업률은 급등, 조직범죄 극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공산주의 체제였을 당시, 경제 자원들은 국가 소유이거나 공공 소유였다. 또한 이를 운용하는 결정도 국가적이거나 공공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국가들이 자본주의로 이행한 15년 동안 일어난 일은 이런 경제 자원들, 즉 모든 기초산업, 에너지, 광업, 사회하부구조, 유통 등이 미국과 유럽 혹은 억만장자 마피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었다. 혹은 문을 닫았다. 이는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가, 경기침체, 이민, 돈 세탁과 국민경제에서 자본이 탈출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

폴란드에서는 연대노조의 기반이었던 그다노스크 조선소가 폐업하고 박물관이 되었다. 이 나라의 노동인구 중 20%는 공식적으로 실업상태이다.(『파이낸셜 타임스』 2004년 2월21일) 나머지 30%는 성매매, 밀수, 노천시장, 행상, 각종 지하경제 등 주변부의 저임금 부문에서 일하고 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라트비아, 동독도 비슷하거나 더 나쁜 상황이다. 이러한 옛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지난 15년 동안의 1인당 평균 실질소득 증가는 그 이전의 15년(공산주의 치하) 보다 훨씬 낮았다. 이와 함께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심각해져서 최상위 소득계층 1%가 사적 자산의 80%와 소득의 50%를 지배하게 되었다. 빈곤층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옛 소련,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생활 표준이 80%나 떨어졌다. 인구의 25%가 이민을 가거나 극빈 상태에 놓였으며, 산업과 공공자금, 에너지는 강탈당했다. 과학, 보건,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었다.

옛 소련에서는 하이테크의 중심지였던 아르메니아의 경우 지난 1990년엔 2만 명에 달했던 과학기술 연구자의 수가 1995년엔 5천명으로 폭락했으며 지금도 줄어드는 추세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3월호) 아르메니아는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중앙난방장치와 전기 없이 사는 국가로, 국가의 경제적 자원들을 마피아들에게 강탈당한 국가로 전락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쇠퇴는 더욱 심각하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러시아 인구 중 50% 이상이 빈곤층이며 이러한 현상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 외부에서 더욱 심각하다. 노숙자는 증가 추세이고 국가적 차원의 보건․교육 시스템은 붕괴했다. 비(非)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하게 무너진 경우는 현대사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민영화되면서 마피아들에게 접수되었다. 러시아 마피아를 이끄는 것은 8개의 억만장자 과두체제이다. 이들은 뉴욕, 텔아비브, 런던, 스위스 등의 은행으로 2천억 달러 이상을 반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 경제 부문에서 살인과 테러는 ‘경쟁력’이 되었고, 과학은 말살되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현재는 저소득과 설비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러시아 자본주의 : 한 나라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히 망가진 적은 없다

‘러시아 자본주의화’의 수혜자는 옛 소련의 관료, 마피아 보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은행, 유럽의 땅 투기꾼, 미국의 제국주의자, 군부, 초국적 기업들이다. 이렇게 약탈과 대량실업, 빈곤, 절망이 만연하면서 자살과 알콜, 약물 중독이 폭증하고 있다. 소련 체제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옛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 남성의 예상 수명은 65세였으나 2003년엔 58세로 줄어들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이는 방글라데시 보다 낮은 수준이다. 또 쿠바 남성의 예상 수명인 74세 보다 16년이나 적다. 인구학 전문가들은 러시아 인구가 다음 10년 동안 30%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년 2월4일자)

그러나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도입한 자본주의는 대중적인 보건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붕괴시켜 과거엔 통제 가능했던 전염병을 다시 대대적으로 부활시켰다. ‘유엔 합동 프로그램’ 보고서에 따르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는 에이즈 전염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2004년 현재 1백50만 명이 에이즈 보균자인데 1995년엔 3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상황을 초래하는 데 큰 몫을 한 집단이 바로 러시아, 동유럽, 발칸, 발틱 국가의 범죄조직들이다. 이들은 헤로인 무역을 주도하면서 매년 20만 명의 성노예를 세계 각국으로 팔아 넘기고 있다. ‘해방’된 코소보를 근거지로 설치고 있는 알바니아 마피아들은 헤로인 무역의 요충지를 통제하면서 성노예들을 서유럽과 북미에 ‘수출’하고 있다.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과 동맹을 맺었던 군부가 헤로인을 생산, 옛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반입시키고 있다. ‘해방’된 러시아의 마피아 과두체제는 주로 마약 및 불법무기 거래, 성매매 여성 양산, 미국-유럽-캐나다를 경유한 돈세탁 등에 종사하고 있다. 마피아 억만장자들은 정치인과 정당들(‘동방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거에서 선출된)을 사실상 사고 팔면서, 미국, 유럽 등의 정보기관과 공식/비공식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자본주의’의 경제, 사회적 상황들은 본질적으로 이전의 사회주의체제 당시 실존하던 완전 고용, 안정적 성장, 복지 보다 못하다. 개인적인 삶에서 봐도 고용, 노후생활, 저축, 생활의 공적, 사적 안전성 측면에서 옛 사회주의 체제는 ‘범죄집단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훨씬 안전한 시스템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옛 공산주의 국가들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수요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했고, 소득 불평등을 억제했으며, 대외정책에서도 자국의 이해를 지킬줄 알았다. 또한 경제의 주요 부문을 산업화했고 소유했다. 그러나 새로 도입된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가들은 자국의 모든 주요 산업을 해외나 특정인에게 팔아 넘겼고 기괴할 정도로 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보건과 고용은 무시된다.

쿠바 사회주의는 건재하다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자본주의 15년’과 ‘이전의 15년’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사회주의 당시에 시민들은 질적으로 훨씬 우월한 삶을 누렸다. 이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신생 자본주의 사회’인 러시아,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쿠바 사회주의와 비교해보자.

쿠바 사회주의는 소련과 동유럽의 자본주의화로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산업 생산과 무역은 60% 하락했으며, 쿠바인의 1인당 칼로리 섭취량도 절반으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유아사망률은 1989년의 1천명 당 11명에서 2003년엔 6명으로 하락했다. 한편 러시아가 국민소득의 3.8%를 공공 보건에, 1.5%를 사보험에 쓰는데 비해, 쿠바는 16.7%를 사용한다. 남성의 예상 수명도 자본주의 국가인 러시아에서는 58년이지만, 사회주의 쿠바에서는 74년이다.

자본주의 국가 폴란드에서는 실업률이 21%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3%로 떨어졌다.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마약과 조직범죄자들이 날뛰고 있다. 그러나 쿠바에서는 청년실업자들을 위한 교육, 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젊은이들은 기술을 배울 때마다 봉급을 받고 일자리를 제공받을 수도 있다. 쿠바에서는 과학기술(특히 생명공학과 약학)이 계속 발전해왔으며 이젠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과학 인프라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 국가들의 과학자들은 이민을 가거나 국내에 머물러도 먹고 살 수가 없다.

쿠바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군사적으로 예속되어, 발칸반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용병을 보내 미 제국주의에 봉사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현재 쿠바의 의료인 1만4천 명은 남미와 아프리카의 최빈곤 지역에서 그곳 정부와 협력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쿠바는 하이티에도 의료인 5백 명을 파견했다.

산업 측면에서 보면 쿠바에서는 대다수 산업이 국민적이거나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시장 부문도 존재하며, 외국자본과 합작한 벤처회사도 영업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우 거의 모든 기간 산업과 언론매체, 문화산업 등의 소유권을 해외로 넘겨 버렸다. 쿠바는 기초 식량, 주택, 보건, 교육, 스포츠 등에서 사회적 안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실업자와 저소득자들이 재화와 서비스로의 접근에서 배제되고 있다.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전망

이렇게 경제․사회 지표들을 비교해 보면 쿠바의 ‘개혁 사회주의’는 동유럽과 러시아, 중앙아시아의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 보다 훨씬 낫다. 윤리, 문화적 측면에서 봐도 쿠바의 경우 비록 1990년 이후 관광 부문의 성장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만, 마피아가 주도하는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마약, 성매매, 미제국으로 종속 때문에 부패한)보다 우월하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백만 명을 감염시킨 에이즈에 대해서도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예방중심적이며 인간적인 의료 시스템으로 대처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무료 의료, 무료 약품, 광범위한 공공 보건 프로그램 및 교육은 쿠바의 에이즈 발병률이 개발도상국 중 가장 낮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 분명히 관광산업과 저소득으로 인한 성매매가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될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에 도입된 자본주의가 그 이전의 체제 보다 모든 경제, 사회적 부문에서 훨씬 열악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다. 쿠바의 성과가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아메리카에서 시작된 사회운동들이 자치(사파티스타), 토지소유 민주화(브라질의 MST 운동), 자원에 대한 민주적 통제(볼리비아)에서 실질적인 변혁을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미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것, 그리고 ‘신생 자본주의 국가'들이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 보다 훨씬 우월하다.

이렇게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사회주의는 과거의 복지국가에 쿠바식 인간적 사회 프로그램과 사회 안전망, 사파티스타와 MST의 자치 실험을 결합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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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의 함성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의 함성



2003년 7월 또다시 지도부의 배신적 타협으로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은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자신의 힘을 믿고 투쟁했다면, 그리고 민주노총의 연대총파업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면 분명 승리로 전진했을 투쟁이었다. 철도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벌벌 떨게 할 위력적인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투쟁은 바리케이드 너머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에 의해 가로막혔다. 승리를 향한 파업의 진군을 가로막은 지도부의 타협과 배신, 이후 자본의 거침없는 현장탄압. 불과 1년 반 사이에 세 번이나 이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철도의 선진노동자들은 낡고 불철저한 지도부를 대체할 새로운 지도력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과제와 또다시 마주치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지도력을 만들자!"라는 선언을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답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과거 선배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쉽게 문제의 해답을 얻어낼 수 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은 오늘날 민주노조운동에 많은 영감을 던져준다.


골리앗투쟁. 첫번째 장애물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거대한 불길에 겁먹고 동요했던 자본가들은 민주노조운동의 불꽃을 꺼뜨리기 위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공격의 초점은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이었다. 대낮의 식칼테러, 노조사무실 습격, 직권조인 무효와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며 벌였던 88년 128일 파업과 가두투쟁의 무력진압 등 탄압은 강도를 더해갔다. 숨막히는 공안정국 속에서 누군가 앞장서 저지선을 구축하고 재반격의 계기를 만들어야 함을 모든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을 때, 현중노동자들은 자신이 그 "누군가"가 되겠다고 선포했다.

90년 4월 25일 단체협상 이행, 구속동지 석방, 노태우 타도를 내걸고 1만 7천여 현중노동자들은 법률적 제약 따위를 단호히 거부하며 쟁의발생신고 없이 과감하게 파업에 돌입했다. 그간의 패배를 겪으며, 승리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힘을 남김없이 모두 동원해야 함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이라는 자본가의 족쇄에 묶이기를 거부했다. 공장의 장비와 재료로 무기가 만들어지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128일 파업에서는 겁이 나서 쓰지 못했던 민주박격포에도 볼트와 너트를 가득 집어넣었다. 우유부단과 머뭇거림은 패배를 의미할 뿐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타오르는 현중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은 첫번째 장애물은 끝까지 이 싸움을 책임질 지도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대중의 뜨거운 투쟁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간 진민복 비대위장의 뒤를 이어 총파업의 총대를 메겠다고 나섰던 김영환 비대위장 역시 "정치파업은 못하겠다"며 적들에게 투항해버렸다. 그러나 대중들은 첫번째 장애물을 멋지게 뛰어넘었다. 위원장의 잇따른 투항에도 대중의 투쟁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고, 곧바로 전투적인 지도부를 탄생시켰다. 새롭게 구성된 이갑용 집행부는 무장한 사수대로 둘러싸였다. 자신들의 지도부를 자본의 회유뿐만 아니라 공권력으로부터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현중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지도부의 직권조인과 파업철회에 단순히 분노하거나 풀죽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수동적인 모습을 거부하며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지도부를 만들어내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지도부를 포섭하여 파업을 꺾으려는 시도가 실패하자 정부는 직접적인 공격으로 전환한다. 28일 새벽 73개 중대 1만명이 지상, 해상, 공중으로 동시에 들이닥쳤다. 총파업전선을 사수하고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곧바로 150여명이 골리앗 크레인으로 올랐다. 중공업 진입로에서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시작으로 격렬한 가두투쟁이 시작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후퇴를 막아내려는 현중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은 전국노동자들의 연대를 끌어냈다. 전노협 선봉대가 울산으로 모여들었고, 5월에는 전국 127개 노조 25만명이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연대총파업에 나섰다!


골리앗투쟁. 두번째 장애물


대중의 자발성이 고양될수록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느끼는 조합주의적 지도부는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현중골리앗투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중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정부의 탄압을 보며 노동자투쟁은 승리하기 위해서 연대투쟁과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배운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을 향해 현자 이상범 집행부는 "임단협을 준비하기 위해 정상조업에 들어간다"고 배신 결정을 발표했다. 이 이탈을 기점으로 투쟁은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연대투쟁이 소강기로 접어들고 결국 싸움은 골리앗투사들의 외로운 투쟁으로 변해갔다.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은 패배를 예감했다. 전체 자본에 맞서 전체 노동자의 힘을 충분히 동원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점거 14일만인 5월 10일 골리앗투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골리앗을 내려오게 된다.

두번째 장애물은 이 시기에 등장한다. 투쟁이 일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거나 패배하면 대중은 일시적으로 사기저하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힘을 끌어내 싸운 노동자들은 패배주의에 빠지는 대신 "승리하기 위한 투쟁의 정확한 방향과 수단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격렬한 투쟁을 통해 법, 의회, 정부, 언론 따위는 자본가의 권력기구이고, 노동자는 단사투쟁을 전체 노동자의 투쟁으로, 나아가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킬 때 비로소 진정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배우며 자부심을 느낀다. 골리앗투사들은 자본가를 굴복시키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전망을 갖고자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진 노동해방 지도부를 만날 수 없었다. 결국 희망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은 패배주의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골리앗투쟁이 마주쳤던 두번째 장애물은 미래의 승리를 위한 투쟁의 방향과 수단의 부재, 노동해방 정신으로 무장한 지도력의 부재였다. 노동자투쟁은 성장하면서 더 거대한 과제를 선진투사들에게 던진다. 이때 선진투사들이 충분한 답을 쥐어주지 못할 경우 대중의 사기저하는 계속되고 투쟁이 아닌 굴종, 노동해방이 아닌 개량주의에서 대안을 찾는다. 조합간부보다 관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당당히 투쟁하기보다 눈치보며 계산기를 두드리며, 단사의 울타리를 절대 뛰어넘지 않으려 하고, 정치문제에 무관심하게 된다.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이익을 사수하기 위한 투쟁에는 무관심해진다. 오직 자기사업장, 자기부서, 자기 가족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만 편협하게 모든 관심을 쏟게 된다.

반면 대중의 투쟁의지와 열망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수로를 여는 진정한 지도부를 발견했을 때 대중은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굴하지 않고 행동하려 한다. 이것은 투쟁을 끈질기고 완강하게 만들뿐 아니라, 투쟁의 파고가 꺾이면서 동요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그간의 투쟁의 성과를 보존하고 대중의 투쟁의지와 단결력을 보호하며 다음의 투쟁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


대중의 자발성과 선진노동자의 지도력


골리앗투쟁은 노동자가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그리고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르쳐준다. 골리앗투쟁은 대중의 열망을 현실화시키는데서 무능력한 지도부를 단호하게 갈아치우는 역동성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현중노동자들이 보여준 역동성은 전체 노동자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다. 현중노동자들은 자본가정부의 대대적인 공세 속에서 질식해가던 민주노조운동의 활로를 뚫으려는 돌격대로 자신을 간주했고, 자신들의 투쟁이 정치투쟁임을 분명히 했다. 현중골리앗투쟁을 둘러싼 공방전은 총노동과 총자본의 이후 투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회전의 성격을 가졌다. 비장한 마음으로 골리앗 크레인에 올랐던 현중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자의 공동의 이익"이라는 계급적 시야와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골리앗투쟁은 대중의 자발성에 걸맞는 지도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마지막에 선출된 전투적 지도부는 대중이 이끌어간 투쟁에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했지만, 대중들을 장기적인 승리의 방향으로 이끌 만큼 확고하지는 못했다. 투쟁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본능적인 힘을 의식적 투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지도해내고, 전체 노동자를 하나의 투쟁대열로 결집시키는 더 강력한 지도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 힘을 갖추지 못했기에 현중골리앗투쟁은 난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좌초하고 말았다.


더 멀리 나아가자!!


이제 과제는 더욱 분명해졌다. 조합주의적 지도력을 뛰어넘는 선진노동자다운 지도력을 획득할 것! 그 지도력을 바탕으로 아래로부터 활력있게 밀어나가고 지도부를 강제하는 현장노동자들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도록 대중 속에서 활동할 것! 대중의 잠재력과 열망이 현실화되는 정도는 선진노동자들의 분투에 달려있다. 이렇게 나아갈 때 골리앗투사들의 외침은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 미래의 희망을 개척해나가기 위한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다. 90년 현중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던져준 교훈을 받아안고, "골리앗의 외로운 늑대들"보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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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연대>전평의 1946년 9월 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전평의 1946년 9월총파업과 자주관리운동



1946년 전평의 9월총파업


1946년 9월 24일, 4만 철도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미군정 운수부의 25% 감원방침이 그 계기였다. 철도노조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은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쌀을 달라! 물가인상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폐쇄·해고 절대반대!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체포령 철회와 즉각석방! 언론·출판·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해방일보 등 탄압받고 있는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직원들을 석방하라!" 등의 요구를 내걸고 총파업에 돌입했다. 경제적 요구뿐 아니라 정치적 요구까지 포함하는 총파업투쟁이었다. 전화국, 우체국 노동자들이 이 파업에 합세하고 더욱 확대되어 전국적으로 25만 이상이 참여했다.

한국노동운동 최초의 위력적인 총파업이었으며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전평의 9월총파업은 결국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의 물리력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패배로 타격을 입은 전평은 이후 다시 한번 조직화에 나섰으나, 미군정과 우익세력은 기세를 몰아 탄압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전평은 급속히 쇠약해졌다.

오늘날 전평은 "먼 과거의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뛰어난 계급의식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전진해나가던 전평노동자들의 위대한 업적과 의의를 계승해야 한다. 또한 그토록 강력했던 전평노동운동의 패배의 원인을 규명하고, 우리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보다 더 중요할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어서지 못했던 "벽"은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이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벽"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전평운동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전평노동운동의 전진과 패배를 검토하며 미래의 승리를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먼 과거"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이유다.


전평 건설과 공장위원회


일제 패망 후 이 나라 산업의 80%가량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자본가들이 대대적으로 철수하자 경제 또한 극심한 침체와 혼란을 맞게 된다. 친일자본가들은 공장폐쇄와 사보타지를 통해 공장가동을 중단시켰다. 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공장이 멈추면서 심각한 물자부족과 물가폭등으로 노동대중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하락했다. 노동자들은 일본자본가들과 친일자본가들이 운영했던 공장들의 공백을 메꾸고, 마비된 산업을 재건하며, 심각한 물자부족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생존을 위한 투쟁 자체가 노동운동을 한층 고도한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 시기 노동운동의 역사 속에서 "자주관리운동"을 만나게 된다.

해방 후 전국 각지에서 산업별로 노동조합 혹은 공장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5일, 전국 단일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즉 전평이 건설된다.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나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야근철폐, 8시간노동제 실시, 차별배급 철폐" 등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섰다. 동시에 폐쇄된 공장, 경우에 따라서는 폐쇄되지 않은 공장에서도 "공장관리를 공장위원회에 맡길 것"을 요구하는 공장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자본가 없이"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성방직의 경우, 김연직이라는 한국인사장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맞서 공장 문을 닫고 투쟁지도자 5인을 해고했지만,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지도 하에 조업을 계속했으며 오히려 생산액을 증가시키기도 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 :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전평은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분투했다. 생산의 조직화는 기존에 조직되어 있는 조합원들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공장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사무직·생산직을 막론하고, 숙련공·미숙련공·관리직을 막론하고, 무엇보다 조합원·비조합원의 차이를 넘어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 협력해야만 한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생산현장의 모든 노동자를 포괄해야만 한다는 과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가령 전평은 공장 내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시도에 정면으로 맞서 "직종간 물자 차별배급 철폐"를 주장하며 노동자의 단결을 외쳤다.

더 나아가 전평은 "노동시간 단축, 인력 확충, 실업 방지, 실업노동자에게 일자리 보장"을 요구했다. 전평노동자들은 실업자 역시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동료임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평은 "실업자 즉 산업예비군이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현업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실업자운동은 실업자뿐만 아니라 현업노동자가 선두에 서야 한다"고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했다. 전체 노동자의 일부로서, 그리고 먼저 조직된 노동자로서 노동자계급 공동의 이익을 위해 선두에서 투쟁할 것을 꺼리지 않는 헌신적인 태도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전성기 전평의 55만 조합원 중 절반 이상이 실업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전평이 현업노동자인가 실업노동자인가를 떠나 모든 노동자들을 굳게 단결시키기 위해 분투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단결조차 두려워하는 현시기 정규직 노동조합운동(물론 전부 그렇지는 않다)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전평노동자들의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활동으로 전평은 노동자 전체를 단일하게 결속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 자체를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기관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었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러나 자본가 없이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가동하고,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자 문제는 달라졌다.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은 "누가 공장의 주인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을 전개하던 노동자들은 자신의 실천 속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자본가들 밑에서 땀흘려 일해왔던 이 공장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가 아니라 바로 노동자라는 것, 노동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생산 전반의 통제와 계획이라는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곧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이탈리아 공장평의회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전평의 자주관리운동 역시 국가의 문제에 직면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를 체계적으로 생산, 관리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개별공장에서의 생산통제를 전체 산업으로 확장시킨다면 그 통제기관은 낡은 지배자들의 국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권력기관으로 등장할 수 있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바로 그와 같은 기관의 맹아였다. 해방 후 정치적 공백기에 펼쳐진 노동자계급의 역동적 운동이 새로운 사회의 씨앗이 되는 새로운 형식의 기관을 창조해갔던 것이다.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로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금씩 자신의 힘을 축적하며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벽"을 넘는다면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승리할 것이고 노동자의 피땀을 한줌 자본가들에게 빼앗기지 않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가능할 것이었다. 반면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자주관리운동은 정체하게 되고, 미군정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한 자본가들의 공격에 괴멸될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벽"은 전평노동자들에게 치명적 한계로 다가왔다

 

 

전평의 정치적 한계


 

급격히 성장해가던 전평의 자주관리운동은 두 가지 난관을 맞게 된다.

우선 전평이 이른바 "양심적 민족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자제하고 협력할 것을 하달한 것이다. 당시 전평은 "자주독립을 위한 견실한 통일전선 결성을 통한 민중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위해 노동자, 농민, 도시 소자본가, 양심적 민족자본 등 모든 계급이 연합할 것을 제기해왔다. 민중권력의 수립을 위해서 "민족자본"과의 마찰은 피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를 수긍할 수 없었다. 자주관리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보장의 의미뿐 아니라 기존 자본가들을 몰아내어 착취를 없애기 위한 파업투쟁의 형식을 띠었다. 그리고 전평이 이야기한 "양심적이고 건전한 자본가"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전평이 제시한 협력방침은 노동자들의 고유한 무기인 파업의 권리를 박탈하여 무장해제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방향타를 망가뜨렸다. 현장의 노동자들은 전평의 이와 같은 조치에 반발하거나 혼란에 휩싸였다.

두번째로, 전평은 "자주독립을 원조하는 미·소 양군에 협력"이라는 원칙하에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취하였다. 전평은 소련과 함께 미·영·중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로 규정하고 조선 해방의 은인으로 격상시켜 평화적 민중권력 수립을 기대한 조선공산당의 어리석은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협조노선이 성과를 가질 수는 없었다. 전평이 "협조"라는 이름으로 무장해제시킨 노동자들을 미군정이 짓밟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노동자들의 대중투쟁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탄압받기 시작한다.

전평은 그릇된 지도방침으로 전평노동자들의 능동적인 공장 자주관리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공장 자주관리운동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노동자들은 미군정과 자본가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코민테른과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


 

해방 후 공장위원회, 노동조합의 건설과 공장 자주관리운동의 확산은 노동대중의 자생적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노동대중의 폭발적 물줄기를 자주관리운동으로 이끌었던 것은 일제시대부터 현장과 밀접하게 결합해 왔던 노동해방 세력이었다. 공장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노동대중의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노동해방 세력이 없었다면 자주관리운동은 빠르고 강한 힘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부터 활동하며 해방 후 노동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던 노동해방 세력 즉 조선공산당은 성장하는 노동운동을 억제하고 결국 패배하게 만든 근본원인이 되었다. 전평의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 자본가 및 소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전술은 바로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노동운동의 발전방향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미리 획득하여 노동운동을 선두에서 이끌어 갈 선진노동자들 없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 반면, 현실과 어긋난 왜곡된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세력이 노동운동을 주도한다면 그 운동은 패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의 하나로 자국의 이해를 위해 전쟁을 벌여나가고 있던 미국을 "진보적인 국가"로 인식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서의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권력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그리고 일제자본이든 민족자본이든 노동자를 착취함에는 변함이 없음에도 "양심적 민족자본"으로서 노동자계급과 협력할 수 있다고 본 엉터리 정치노선은 전평노동운동을 패배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수는 없다. 조선공산당의 그릇된 입장은 국제노동운동의 전반적 미성숙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1920년대 말을 통과하며 러시아 노동자국가가 관료들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러시아 즉 소련이 주도하고 있던 코민테른 (당시 노동자들의 국제연대기구) 역시 관료적 외교기구로, 국제노동운동 압살기구로 타락하기 시작했다. 세계노동자들의 공동이익을 도모해야 할 코민테른은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한 소련의 일국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코민테른은 노동자의 단결과 해방이라는 포장지를 덮어쓰고 세계노동운동을 주도한다. 때로는 극좌적으로 때로는 극우적으로 비틀거리며 코민테른은 세계노동운동을 위험에 빠뜨렸다. 1935년 7차대회에서는 이른바 "반파시즘 인민전선" 방침이 채택되는데, 이는 소련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해 미국, 영국 등과 동맹관계를 맺고, 조선공산당에 미군정과 협조할 것을 제기했던 것이다. 코민테른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은 이 방침을 따르게 되었다. 당시 관료기구로 변질한 코민테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하기에는 국제노동운동이 성장해 있지 못했고, 조선공산당 역시 이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처럼 그릇된 정치의식이 바로 전평노동운동을 패배로 이끈 핵심요인이다.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올바른 노동해방 정치를 획득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노동운동이 뛰어넘지 못한 커다란 "벽"이었다. 그리고 이 "벽"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다시, 1946년 9월 총파업


 

1946년 중반이 되자 미군정은 전평노동운동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한다. 그리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전평과 조선공산당은 미군정에 대한 협조노선을 폐기하고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다. 9월 총파업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진행된 것이다.

미군정의 탄압에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기력한 처지에 놓여있던 노동자들은 재차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전평과 조선공산당의 정치적 오류로 노동자들의 힘은 약화되어 있었다. 반면 미군정은 우익세력의 힘을 결집하여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평노동자들은 패배를 예감하면서도 정면으로 미군정에 맞선다.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투쟁에 나섰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9월 총파업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평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창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남겨둔 숙제


 

노동자는 자본가와의 투쟁을 통해 성장해간다. 노동운동은 패배를 통해 더 많은 교훈을 얻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 그리고 다시 자본가들에 맞선 투쟁, 패배, 보완을 통해 결국에는 자본가들보다 더욱 큰 존재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미래의 승리를 위해 현재의 희생을 감수하는 가장 선진적이고 헌신적인 노동자 없이 노동운동의 승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전평노동자들은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희생을 감수했다. 미군정의 힘에 눌려 자신의 힘을 최대한 동원하여 싸워보지 못하고, 노동운동의 생명인 단결, 연대, 투쟁의 무기를 빼앗겨 무기력한 존재로 떨어지게 된다면 결국 노동해방의 전망으로부터 더욱더 멀리 떨어지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전평의 노동자들은 9월 총파업이라는 힘을 동원한 것이다.

패배를 예측하면서도 미래의 승리를 위해 당장의 고통을 감수한 전평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승리를 포기하는 경향이 주류를 장악해가는 현재, 전평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희생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전평의 노동운동은 자신의 한계를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당시 전평과 조선공산당이 넘지 못했던 정치적 한계는 민주노조운동에 그대로 남아있다. 우리는 전평과 같이 강한 규율과 헌신성을 가진 선진노동자들을 충분히 배출하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해외자본과 국내자본을 다르게 바라보는 민족주의 관점, 개혁의 옷으로 갈아입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환상 등과 같은 정치적 한계 역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이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과거의 동지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 끈질기게 전진해간다면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며 최대한 빠르게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전평노동자들이 넘지 못한 장벽! 이제 우리가 그 장벽을 무너뜨리고 전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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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혁명정당&quot;에 관한 연구노트

<전국현장조직대표자회의에서 펌>


“혁명정당”에 관한 연구노트


  현재 남한 노동해방주의자들은 “혁명정당 건설”이라는 사활적 과업에 직면하고 있다. 이 과업은 비록 한 두 해만에 해결될 수 없는 과업이자 부단히 새로워지는 그런 과업이지만, 우리는 이 과업을 달성하는 데서 의지해야 하는 “설계도면”을 확립해야 하며, 이 도면에 따라 일관되게 전진해야 한다. 혁명정당이라는 높고 정교한 건축물은 오두막 혹은 단층 건물과는 달리 잘 짜인 입체적 설계도면 없이는 결코 착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 당의 한 요소가 되기를 꿈꾼다면, 남한 노동해방주의 그룹은 자신의 모든 정치적, 조직적 활동을 즉홍적으로 펼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하고자 하는 당, 그리고 이 당이 대변하는 계급 -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 에 정확히 부합하는 방식으로 활동해야 하며, 우리의 실천 하나하나, 발걸음 하나하나를 이런 방식으로 제대로 요약하고 평가하며 혁신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천과 발걸음을 향도하고 검증하는 ‘기준점’인 “혁명정당 건설의 설계도면”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혁명정당이 어떤 식으로 기능하고 성장하며, 따라서 이것의 중핵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우리가 어떻게 활동하고 발전해야 하는지를 부단히 탐구해야 하며, 이를 실천에 적용해 검증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결과물을 재차 “설계도면”에 투영해 진실로 남한 노동해방주의 운동을 지도하고 안내할 수 있는 훌륭한 “설계도면”을 끊임없이 완성해야 한다. 우리는 더 멀리 보고 더 멀리 전진함에 따라, 그리고 우리의 실천활동의 실제적 경험이 쌓여감에 따라 설계도면을 부단히 보완할 것이며, 혁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견지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견지해야 하는 노선과 방향은 분명히 있다. 이 글은 그것에 대한 “연구 노트”다.


1.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의 상호관계에 대하여

  정치학은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한다는 분명한 사실에 기초한다.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이렇게 분할되는 것은 서로 대립하는 계급 사이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분할’, 즉 지배 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의 분할이라는 적대적 형태를 취한다. 이 경우, 정치학의 핵심은 “어떻게 현재의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스스로를 지배계급으로 성장시킬 것이며, 어떻게 적대 계급을 종속시키고 복종시킬 것인가”에 있다. 그것은 너무나 자명하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동일한 한 집단 내부에서도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분할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문제는 바로 이 영역에서 “어떻게 정치를 적용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서는 분할은 적대적이어서는 안되며, 상호융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 안에서 발생하는 분할은 궁극적으로는 “노동의 분할”(분업)에 그 기초가 있는데, 이 기초는 전면적으로 발전한 인간들이 세포를 이루는, 완성된 노동해방 공동체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항상 일정한 정도로는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이처럼 지도자와 피지도자가 존재하는 이상, 정당은 지금까지 발견된, 지도자와 지도력을 발전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따라서 어떤 정당이건, 혹은 정당을 지향하는 어떤 정치세력이건, 지도자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목적에 부응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지도할 수 있는가, 그리고 피지도자들의 동의를 확보하고, 그들의 능동성, 창조성, 자발적 결의를 끌어내고자 할 때 의지해야 할 노선과 수단은 무엇인가를 정확히 하는 데에 있다.
  혁명조직에서도 (노동해방 혁명을 완수하기 이전에는)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은 불가피하다. 이런 분화를 인정하는 것이 엘리트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는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을 영구화하고 확대하려 하는가, 아니면 이러한 분할을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존재하는 객관적 조건들로부터 발생하는 불가피한 것으로(일종의 필요악처럼) 간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실제 행동을 전개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노동해방주의 혁명조직은 이 분할을 승인하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엄격한 전제 하에서 승인한다. 다시 말해 혁명조직이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을 승인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이지 그것을 확대하고 영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혁명조직은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상급 지도기관과 하급 기관으로의 분할)에서 “정확한 기준과 원칙, 한계”를 설정하여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오히려 가장 큰 오류가 발생하고 가장 치명적이고 교정하기 힘든 결함이 드러나는 영역이 바로 이 영역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며, 그것도 이 목적에 대한 강렬한 지향을 갖는 집단에서는 통상적으로 복종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무조건적이라는 생각이 일반화되기 쉽다. 이 경우, 모든 실천과 행동에서 위로부터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것, 혹은 어떤 체계적인 설명과 납득 없이도 위로부터 지시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점차 극복되어야 할 “역사적 필요악”인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을 확대하고 이를 영구화하는 것으로서 노동계급 혁명조직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혁명조직은 이 분할에 기초하여 출발하지만 이 분할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혁명조직은 “모순과 긴장 관계” 속에서 작동하며, 이는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주의 사이의 관계”에서 그리고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표현된다.  
  
대중적 요소

  하나의 정치세력이 정당으로 상승하는 것이 역사적인 필연이 되고, 그래서 그 정치세력의 승리와 전진을 예측할 수 있게 되는 시기는 언제인가? 그 시기는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가 모두 충분하게 존재하고, 상호간에 적절한 비례관계가 형성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만 이 정치세력은 중단없이 전진할 수 있으며, 혁명을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힘 있는 행동과 실천을 조직할 수 있다.
  대중적 요소의 특징은 규율성과 대의에 대한 충성이다. 이들은 조직에서 다수를 이루는데, 노동대중의 직접적 일부로서 가장 앞선 부분이다. 만일 이 대중적 요소가 충분하게 형성되어 있지 않다면, 어떤 정치세력이건 단지 정당의 맹아에 불과할 뿐 실제의 정당이 될 수 없다. 이 경우 이 정치세력은 자신이 기반하고자 하는 계급의 힘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이론적 조류’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물질적’ 힘을 가진 위력적인 실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대중적 요소 없이는 정당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이들을 조직하고 집중시키며, 훈련시키는 응집적 세력이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세력이 될 수 있다. 이들에게 규율성을 부여하고 대의에 대한 무한한 “자발적 충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응집적 힘들이 없다면 이들은 자신의 힘을 동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모래알처럼 무규율한 분산적 대오로 떨어지며, 대의에 대한 확신과 전망을 잃고 동요하고 사기저하에 빠지며 행동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이들이 보유한 규율성과 대의에 대한 헌신성을 제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당의 정신”을 확립해야 한다. 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세력은 과거의 위대한 전통과, 그리고 원대한 미래와 연속성이라는 굳건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생한 자각을 대중적 요소들에게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고 위대한 미래를 열어젖히는 행동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을 통해 “현재” 이미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것은 앞으로도 반드시 계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부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조직에서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다는 책임감, 아직 외형적으로는 크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으며 열어젖힐 수 있다고 느끼는 세력과 연대하고 있으며 그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책임감,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정당의 정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데, 이 정신을 창출하지 않는다면 대중적 요소들이 가진 가능성과 잠재력은 절대 현실적 힘으로 끌어올려질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자각들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혁명조직의 실천과 조직적 행동 하나하나를 통해 “선언”하고, “확인”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대중적 요소들은 끊임없이 자극받고, 규율성과 대의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다. 반면에 혁명조직이 그것을 부여하지 못한다면, 불가피하게 대중적 요소들은 규율성과 충성심을 잃고 개별화된다. 그들은 엄격한 규율에 의지하고, 조직과 함께 행동하기보다는 일시적인 기분에 휩쓸려 자족적이고 충동적인 행위에 의지하게 된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야수들의 행동과도 같은 야만적인 개인주의 요소가 대중적 요소들 사이에 퍼지며, 이는 곧 조직을 고갈시킨다.
  따라서 과거의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고 미래를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정당의 정신”을 세워냄으로써, 그것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화나 자임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직의 하나하나의 실천과 행동을 통해서 세워냄으로써 대중적 요소들의 “규율성”과 “대의에 대한 헌신성”을 수호하고 이들을 하나의 강력한 세력으로 육성해나가는 “응집적 요소” 및 “응집적 요소를 대중적 요소와 연결시키는 중간적 요소”가 없다면 “대중적 요소”를 하나의 힘으로 조직할 수 없으며, 모여 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무기력해진다. 물론 조직의 이 대중적인 인자들은 누구나 응집적이고 중간적인 힘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은 단번에, 그리고 한꺼번에 그렇게 도약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오로지 그들을 그렇게 육성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을 때에만 “점차” 도약할 수 있다. 따라서 “정당의 맹아”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응집적 요소”를 먼저 마련해야 한다.

응집적 요소

  응집적 요소는 혁신의 능력, 창조성, 불완전한 것들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 총체성, 다면성, 불굴의 혁명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들은 그 자체로는 별것 아니거나 아무것도 아닐 대중적 요소들을 단일한 방향으로 집중시켜 효율적이고도 강력하게 만든다. 응집적 요소들은 대단히 목적의식적이고 효율적이며 규율잡힌 힘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보유한 이 힘은 ‘누군가 자신들에게 부여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내부에서 샘솟는 힘’이기에 아직 “정당의 정신”이 생겨나기 이전에도 이들은 그것을 먼저 체화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정신”을 조직 전체로 확산시킬 수 있으며, 그것을 “정당의 정신”으로 우뚝 세워내 대중적 요소들을 동화시키고 그들에게 규율성과 확신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런데 일종의 “당의 본원적 자본”으로 기능하는 이들이 탄생하는 것 자체가 운동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전제로 한다. 응집적 요소가 창조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현 체제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특정한 혁명적 해결책’이 존재하며, 이 해결책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문제들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굳건한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 없이는 응집적 요소가 형성될 수 없다. 이 경우, 응집적 요소를 자처하는 지도자들 자신이 오래가지 않아 스스로 붕괴하며, 대중적 요소들은 순식간에 구심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그런데 이 “혁명적 해결책”이 대두되는 것 자체가 기존 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고, 미래 사회의 싹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객관적 발전단계에 의존하며, 또한 실천을 통한 검증이 축적됨으로써 나타나는 역사적 발전단계를 요구한다. 따라서 응집적 요소가 생겨나는 것 자체가 “혁명정당이 창출되기 위한 조건이 무르익기 시작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응집적 요소들은, 낡은 기존 사회를 반드시 혁명적으로 쇄신해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수단들은 이미 마련되었다는 확신으로부터 “목적의식성과 혁명적 규율성”을 발전시킨다. 현존 체제에 대한 완벽한 거부와 미래 사회에 대한 명확한 확신으로 무장한 이들은 생생한 의무감과 무한한 헌신성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끌어낸다. 이들은 불굴의 혁명성과 낙관으로 무장하고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들은 “조직의 정신”을 규정하며, 이 정신 아래 대중적 요소들을 모집한다. 만일 이들의 정신이 투철한 것이라면, 이 정신의 빛은 더 많은 대중적 요소들을 고무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다. 대중적 요소들은 이들이 제시하는 혁명적 해결책으로부터 확신을 끌어내고, 이들이 발산하는 혁명적 의지에 고무되어 자발적 규율성을 확립함으로써 이들을 중심으로 “응집”한다. 또한 응집적 요소들은 자신의 혁명적 해결책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단일한 노선과 전망에 입각해 단일한 방향으로 자신의 대오를 혁신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혁신의 능력은 혁명조직이 변화하는 정세와 상황에 자신을 능동적으로 적응시키면서, 그것에 부단히 자신의 각인을 찍도록 보장하며, 아울러 불필요한 희생이나 역량의 낭비를 제거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조직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규율이 이완되고 사기저하가 퍼지는 것을 차단한다.  
  이런 식으로 기능하는 “응집적 요소”는 적은 숫자일지라도 하나의 혁명적 조직이 자신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지도력”을 제공한다. 이 응집적 요소에 대한 판단 기준(자질)에는 다음의 것들이 있다. 첫째, 응집적 요소는 조직을 운영하는 데서 대중적 요소들이 확신에 차서 자발적으로 규율을 따르고, 헌신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활동의 전망을 제공하고,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성 속에서 현재를 조망해줌으로써 현재 수행하는 실천들에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며,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운동가들이 자신의 실천이 조직활동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분명히 의식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이와 관련, 응집적 요소의 시야는 반드시 원대해야 한다. 조직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보면, 조직이 어떤 조직이며, 또한 어떤 조직을 지향하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절대로 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없는 분파주의자들은 내부적인 사소한 사건을 놓고도 광적으로 흥분하고 지엽적인 문제에 지대한 가치를 부여하는데, 그것은 그 사건이 그에게는 어떤 비장한 의미가 있는 것이어서 그로 하여금 열광주의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의 경우, 그들이 말하는 “계급적 전위조직”은 공문구이며 실제로는 ‘자신들의 협소한 경계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러저러한 사소한 문제들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분파주의에 감염되어 있다. 이 경우, 응집적 요소가 노동자계급의 대지 위에서 호흡하지 못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혁명운동의 역사적 맥박과 분리되어 있으며,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원대한 시야에서 운동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협소한 내부 문제(이것은 시시콜콜한 갈등들이나 순전히 아카데믹한 이론논쟁들로 나타난다)에 관심사가 집중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 하나의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맹아로 혁명조직을 육성하려 한다면, 응집적 요소는 발생하는 주요한 모든 사안에 대해 그것이 전체 운동 속에서 점하는 적절한 비중에 맞게 정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을 둘러싼 관심과 논쟁을 적절하게 끌어내며, (당분간 실제 미치는 영향력이 크건 적건) 주요한 사건들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수립하고 최대한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으로 조직의 진정한 효율성, 그 능동적인 힘을 강조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응집적 요소는 가장 책임성 있는 “조직적 화신”이어야 한다. 가장 치명적인 재난은 지도자들이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데서, 그리고 조직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의 생명으로 도박을 한 데서 비롯된다. 그런데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승객들의 생명을 책임지고 배의 키를 잡을 수 있는 선장은 반드시 다음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 “배가 난파당해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에는 선장은 ‘반드시’ 그 명단에 포함되어야 하며, 구조시에도 ‘가장 늦게’ 구명보트에 오르는 사람은 선장이어야 한다” 이 덕목은 희생을 요구하는 모든 행동에 적용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누구도 희생하려 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규율을 준수하지 않게 된다. 오로지 선장이 끝까지 배를 사수하려 하며, 승객들의 목숨을 책임지려 할 때,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을 기꺼이 담당하려 할 때에만 승무원과 승객들은 모든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려 하며 선장의 명령을 따라 규율을 지킬 것이다. 반대로 선장이 가장 먼저 구명보트에 오르려 하는 상황이라면, 모두가 배를 포기할 것이며 아비규환의 무질서 상태가 조장될 것이다. 이 경우 조직에서는 어려움이 발생했을 때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먼저 도망가려 눈치보는 “패잔병의 분위기”가 자라난다. 따라서 재난이 발생한 다음에는 가장 먼저 지도자들의 책임을 엄격하게 추궁해야 하며, 지도자들이 스스로 기꺼이 그것을 선도해야 한다. 이런 책임성 있고, 자기희생적인 분자만이 응집적 요소가 될 수 있으며, 그럴 때에만 조직은 혁명조직다운 규율과 헌신성을 확립할 수 있다. 어떤 시기이건 가장 어려운 곳에 제일 먼저 달려가고, 가장 힘든 일을 제일 먼저 자청하며, 가장 거대한 희생을 제일 먼저 치를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한 분자가 지도적 역할을 담당할 때만, 모든 조직원들 사이에서 자신에게 부여되는 임무를 결코 회피하지 않으며 어떠한 난관도 희생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용감한 기풍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규율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풍토가 자라날 수 있다.  
  셋째, 응집적 요소는 조직의 “전통”을 수립하고, 이것을 통해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와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만이 뿌리깊은 나무처럼, 과거로부터 힘과 전통, 경험을 빨아들이면서 현재를 밀어가도록 보장할 수 있다. 여기서 전통이란 적극적 의미의 전통, 즉 “끊임없는 발전 속에서의 연속성”을 뜻한다. 이 연속성은 응집적 요소로 조직 내에 체현되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응집적 요소는 연속성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조직적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현실적인 방식으로 구현해야 한다. 또한 응집적 요소는 자신이 파괴될 경우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응집적 요소들을 재창출할 수 있는 맹아를 조직적으로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유기적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잘 정리되어 있는 “역사적 문서고”를 마련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조직의 모든 과거를 재조명하고 비판적으로 정당화해야 한다. 그리고 실천 활동의 중요한 국면에서 항상 해설적이고 이성에 호소하는 안내문을 제공하여, 조직원들이 자신의 실천을 역사적 견지에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단련하도록 도와야 한다. 마지막으로 응집적 요소들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차기 지도부”를 적절하게 마련해 두어야 한다.
  넷째, 중앙기구(응집적 요소)의 연속성이 초래하는 위험은 연속성의 단절로부터 비롯되는 즉홍성과 능력의 결핍이 낳는 위험에 비한다면 작은 것이다. 따라서 중앙기구의 인적 연속성은 필요하며, 문제는 그것이 관료화될 위험성을 적절히 차단하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응집적 요소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주의깊게 행사해야 하며, 조직원들의 능력을 부단히 계발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수준으로 상승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이는 혁명정당의 원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혁명정당은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것, 즉 자신을 역사적으로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혁명정당은 (계급 폐지에 이르는 오랜 기간의 실천을 통해 계급을 전위의 수준으로 상승시킴으로써) “계급의 한 부분이되 계급 전체와는 구별되는 전위”인 자신이 불필요해질 때에만 비로소 완전하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이 점은 혁명조직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하나의 혁명조직이 완벽하고도 충분하게 성숙해 나가는 것은 내부에서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고, 조직의 대중적 요소들이 부단히 지도적 요소의 수준으로 격상되어 나가는 유기적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응집적 요소의 가장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피지도자들과 자신 사이의 간극을 부단히 “좁혀나가는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응집적 요소가 이런 식으로 제대로 기능할 때에는 조직은 “민주적”으로 작동한다. 왜냐하면 민주적 수단을 통해서도 지도자들은 조직원들의 지지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으며, 또한 바로 이런 식의 지지만이 가장 가치 있고 가장 강력한 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응집적 요소가 그런 힘을 잃으면 조직은 “관료적”으로 작동한다. 왜냐하면 조직원들이 지도자들의 견해를 이해하고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경우, 다시 말해 지도자들과 조직원들 사이의 간극이 지나치게 벌어질 경우, 지도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관료적” 방식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중간적 요소

  마지막으로는 중간적 요소가 있다. 이 요소는 응집적 요소와 대중적 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담당한다. 응집적 요소와 달리 이들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능력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대중적 요소와는 달리, ‘비판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도자와 대중적 요소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대중적 선전, 선동, 조직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응집적 요소가 창출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힘을 대중적 요소의 규율과 헌신, 확신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중간고리의 역할을 담당한다. 동시에 그들은 대중적 요소로부터 빨아들인 상황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응집적 요소가 관료화되고 상황에 뒤처지지 않도록 비판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들은 응집적 요소와 대중적 요소를 매개하는 ‘허리’인데, 이들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아래에서 위로 이어지는 쌍방향의 피드백 구조를 지탱한다. 다시 말해, 이들은 뇌수와 신체를 연결시키는 혈관이자 신경으로서 기능하는데, 한편으로는 뇌수의 명령을 신체의 각 부위로 전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의 각 부위가 빨아들인 자양분과 정보를 뇌수로 전달한다. 그리하여 신체를 유기적으로 작동시킴과 동시에 뇌수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다. 조직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못하고, 관료적인 방식의 불건전한 집중주의가 나타나며, 지도적 기구에서 상황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많은 경우 이 중간적 요소의 “책임감과 능력의 결핍” 때문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 이들의 “정치적 미성숙” 때문이라는 사실은 강조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간적 요소를 창조하고 단련시키는 것은 조직의 위와 아래 모두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만일 중간적 요소들을 제대로 육성하지 못한다면 조직은 몸과 머리가 따로 놀 듯이 분절화되고 파편화된다.
  다음으로 중간적 요소들은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들은 대개 한두 가지의 전문적인 분야에서만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다. 분업에 따른 전문성은 중간적 요소의 특징이자, 이들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토대이다. 조직적 분업체계를 통해 중간적 요소들의 전문성을 통일집중하여 완성된 것을 창조하는 작업은 다방면에서 균형있게 발전해 있으며,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응집적 요소의 역할이지만, 혁명조직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들을 실제로 집행하고, 이 집행에 대중적 요소들을 동원하는 역할은 중간적 요소들이 수행한다. 따라서 만일 이 중간적 요소들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아무리 잘 짜인 총체적 계획일지라도 그것은 제대로 집행될 수 없다. 응집적 요소는 중간적 요소들을 각각의 자질에 걸맞게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만 중간적 요소들이 특별한 능력들을 제대로 발휘하게 만들 수 있으며, 역으로 이들이 부족한 면 때문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을 적절히 차단할 수 있다.
  또한 중간적 요소는 응집적 요소의 지도를 대중적 요소가 자발적이고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방침을 해설하고 이것의 실천적 의의를 설명하며 그것을 대중적 규율로 전화시키는 연결벨트이다. 만일 이 연결벨트가 부실하다면, 응집적 요소의 지도는 조직의 저변으로 스며들지 못하며, 지도자들과 기저 사이에 거대한 심연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응집적 요소와 대중적 요소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정도로는 간극(이는 시야와 경험, 능력 등의 요소에서 비롯된다)이 존재하는데, 이 간극을 메우는 정규적이고 지속적인 작업은 중간적 요소들이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간적 요소들이 게으르거나 무능력하게 되면, 대중적 요소들은 응집적 요소들의 판단들을 따라가지 못하며, 불가피하게 “정치적 수동성”이 조장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정치적 간극이 확대되게 되면, 지도자와 피지도자 사이의 분할이 확대된다. 이것이 확대되는 것과 나란히 지도자들 사이에서 엘리트주의와 관료주의가 성장하며, 이들은 (자신이 확실히 옳다고 판단하며, 많은 경우 실제 옳기도 한) 결정들이 정치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다수의 대중적 요소들에 의해 기각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여러 음모들과 기술들에 의지하게 된다. 역으로, 지도자들과의 확대되는 간극을 느끼되 무기력한 상황에 놓여 있는 대중적 요소들은 ‘지도자들의 결정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뒤따르는’ 수동주의를 발전시키게 되며, 그 결과 그들은 응집적이고 중간적인 요소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뒤로 “후퇴”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혁명조직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며, 머리와 신체는 서로 대립하고 겉돌게 되면서 질병들이 자라난다.  
  이런 질병들이 자라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중간적 요소들이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객관적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중간적 요소는 창조적이고 총체적인 방식으로 결정들을 내릴 수는 없더라도 각각의 결정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대중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 그리하여 대중적 요소들과 응집적 요소들을 연결시키고 양자 사이의 간극을 부단히 좁혀나가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능력은 (비록 응집적 요소의 능력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이론적, 조직적 능력 모두로 구성된다. 중간적 요소로 기능할 수 있을 만큼의 이런 능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에만 그들은 “조직의 신경이자 혈관, 그리고 비판자”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응집적 요소와 대중적 요소를 중간에서 제대로 매개하고 양자를 연결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중간적 요소들은 한편으로는 “응집적 요소와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적 요소들과 호흡”할 수 있는 능력을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전자는 최소한 응집적 요소들의 판단과 사고, 시야들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발전되어 있을 것을 그들에게 요청한다. 후자는 대중적 요소들로부터 운동에 대한 생생한 감각과 열망들을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을 확보할 것을 그들에게 요청한다. 양자 모두가 상당한 수준의 이론적, 조직적, 실천적 능력과 경험을 요구함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능력을 갖춘 중간적 요소들을 배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에 있다. 그것은 “응집적 요소”로부터 나온다. 응집적 요소는 중간적 요소를 매개로 부단히 대중적 요소들과 교통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중간적 요소들의 성장을 도와야 한다. 중간적 요소들은 응집적 요소들과 접촉하면서 그들의 시야와 능력, 혁명성, 결단력, 판단력, 이론적 감각 등을 빨아들이며, 이로부터 중간적 요소에게 필수적인 능력을 확보하며 나아가서는 응집적 요소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을 축적해 나간다. 동시에 이 과정은 그들이 대중적 요소들을 지도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응집적 요소와 중간적 요소 사이의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하건) 정규적이고 지속적이며 안정적인 교통을 보장하는 것은 중간적 요소들을 배양하는 데서 필수적인 조건이다. 또한 중간적 요소들을 양성하는 독자적인 수단들을 마련하는 것에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한다. 조직을 숫적으로 다수인 대중적 요소들의 수준에 맞추어 일면적으로 운영하게 되면, 결코 중간적 요소들이 육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중적 요소들이 훈련되는 데 필요한 것들과 중간적 요소들이 훈련되는 데 필요한 것들 사이에는 수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중간적 요소들을 육성하기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을 따로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가령 조직의 대중적 요소들은 아직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고급 주제들을 기관지의 일부란에 특별히 할애하는 것, 그들을 위한 특별 훈련계획을 집행하는 것, 그들과의 교통시에는 논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 높은 수준의 발전된 선진노동자들과의 접촉 기회를 그들에게 특별히 제공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서 중간적 요소들 중 응집적 요소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장 선진적 부분을 위한 특별한 프로그램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응집적 요소들과 아주 긴밀히 호흡하고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응집적 요소가 수행하던 기능 중 일부를 맡겨 시험하고 단련하면서, 이런 실제의 경험을 통해 그들을 부단히 응집적 요소로 격상시켜 나가는 것이다.
  어떤 방식을 취하건, 혁명조직은 이 조직 내의 다양한 층들(이들은 각각 상이한 발전단계를 반영한다)을 고려해야 하며, 획일화되지 않는 다면적이고 중층화된 방식으로 성원들을 단련시켜야 한다. 대중적 요소들은 부단히 중간적 요소로 끌어올려야 하고, 중간적 요소들은 부단히 응집적 요소로 성장시켜야만 하며, 응집적 요소는 더 높은 수준의 응집적 요소로 단련시켜야지 그 역으로 해서는 안된다. 조직원들은 항상 자신의 발전단계보다 아래에 있는 성원들과 호흡하고 그들을 지도하되, 그들의 눈은 위를 향해야 하며 보다 발전된 성원들로부터 자극받고 지도되면서 성장해야 한다. 그리하여 혁명조직은 응집적이고 중간적인 요소들을 부단히 두텁게 하고, 이 두터워진 힘에 기반해 대중적 요소들을 확대해야 한다. 그것만이 “위로부터의 사상”, 다시 말해 “가장 붉고 투철한 색깔로부터 시작해 이것이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도록 보장하면서 양적으로 붉은 색깔을 확대하는 것”을 제대로 관철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계급의 선진적 부분이 되고자 하는 혁명조직이 진정 “선진적”으로 작동하는 길이다.  

세 가지 요소 사이의 적절한 비례관계

  혁명조직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들 사이에는 적합한 일정한 비율이 있으며, 그것이 확보될 때 그 조직의 힘은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가령, 군대는 각자 유형에 따라 고유한 비례 관계가 있다. 포병 부대냐 보병 부대냐에 따라, 전방 부대냐 후방 부대냐에 따라 사병과 하사관, 위관급, 영관급, 대장급 장교 사이에 숫적 비율이 달라진다. 혁명조직도 자신이 성장하는 각각의 단계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발딛고 있는 계급투쟁의 조건에 따라서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 사이에 변동하는 탄력적인 비례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이 비례관계가 부적절하게 되면 화학반응에서와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서로 결합하는 화학원소들 중 가장 부족한 한 원소에 의해 화학반응정도가 결정되듯이, 상대적으로 결핍된 어느 한 요소가 전체 조직의 성장을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시기에 과연 어느 요소가 결핍되어 성장이 장애에 봉착하는지를 포착해야 하며, 힘을 집중하여 그 요소를 보강해야 한다. 가령 어떤 정당이 지방선거에서는 많이 득표하지만 정치적 중요성이 더 큰 전국 선거에서는 조금밖에 득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중앙지도부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이 경우 지방의 하급요원은 충분히 성숙해 있지만, 그 나라의 전체 운동을 지휘하는 총참모부는 허약한 것이다. 이와 달리, 전국적 쟁점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데서는 활발하지만, 지역별 쟁점에서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총참모부는 강하지만, 지방의 하급요원은 부족하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응집적 요소가 결핍되어 있는 조직은 자발적 규율이 이완되어 있으며, 혁명적 활동력이 정체되어 있고, 활력과 진취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경우, 운동가들의 헌신성과 패기, 자신감, 자신의 활동에 대한 자부심은 없거나 대단히 약하다. 그리고 조직의 각각의 부분은 서로 따로 놀며 집중화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조직은 지역이나 사업장에서는 눈에 띄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 규모에 비해 현저하게 작은 힘만을 발휘한다. 개별 인자들이 휘날리는 깃발은 도처에서 심심치 않게 보이지만 전체로서의 조직적 힘은 느낄 수 없게 된다. 조직은 항상 상황을 뒤쫓기에 급급하며, 일관되며 계획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직의 결집력은 모래알처럼 대단히 취약하다. 이런 조직은 절대 “역사적 전통”을 수립하지 못하며, 매 상황에 자신의 각인을 찍어내지도 못한다. 이런 조직은 개별 인자들의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지만 해체와 재결집을 반복해 왔기에 단지 ‘인적 구성’에서만 연속적일 뿐, 그 어떤 “조직적 전통”도 확립하지 못한다. 가령 “노힘”과 같은 조직이다.
  이에 비해, 응집적 요소는 발달되어 있되 대중적 요소가 부족한 조직은 매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정책을 제기하기는 하지만 이를 집행하는 데는 무기력하다. 이 조직은 응집적 요소가 결핍된 조직에 비해 훨씬 더 발전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상황을 주도할 수 없으며 자신의 각인을 모든 상황에 제대로 찍어낼 수도 없다. 이런 조직은 그 조직의 규모에 비해서는 항상 도드라지게 부각되며 훨씬 더 강력하게 느껴지지만, 자신의 힘을 모든 개별적 부분에서 입증할 수는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조직은 하나의 입장으로는 분명 가장 앞서 있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서는 아직 무기력하다. 따라서 누구나 이 세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느끼고 이 세력이 제출하는 입장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아직 이 조직의 힘을 피부로 강하게 느낄 수는 없다. 이런 조직은 강력한 조직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 아직 현실에서 강력한 세력은 아니다. 중간적 요소가 결핍되어 있는 조직은 관료성이 만연하거나 상급 요원들이 관성화되어 활력을 잃게 된다. 이 경우, 대중적 요소들의 규율과 충성은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형식을 취하며, 응집적 요소는 현실적 감각을 잃고 무기력해진다. 조직의 기저로부터 신선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단히 창출되지 못하며, 중앙기관은 혁신 능력과 탄력성을 잃고 경직된다. 중앙기관의 결정은 하부에서는 제대로 집행되지 못하며, 그 결과 조직이 취하는 입장과 실제의 실천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겨나게 된다. 이런 조직은 언젠가는 결국 응집적 부분과 대중적 부분이 서로 나뉘어 자립화하게 되며,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병사들을 잃고 고립된 장군들의 소규모 부대로, 다른 한편으로는 구심도 방향성도 없이 단순히 모여있을 뿐인 대중적 세력으로 분할된다.
  어떤 세력이 정당으로 발돋움하는 것은 그것이 여러 수준의 요원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형성하거나 혹은 외부로부터 끌어들여 결집한 정도, 그리고 그 요원들이 확보하고 있는 역량 정도, 마지막으로 여러 수준의 요원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의 적절함에 달려 있다. 조직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이 균형을 지탱하는 비례관계는 조직이 성장하는 객관적 발전단계에 따라 수시로 변동한다. 따라서 혁명조직은 매 시기에 발생하는 질병들을 정확히 진단하여, 어떤 요소가 결핍되어 질병이 생기는지를 판단하고 이를 보강하기 위한 작업을 적시에 펼쳐야 한다. 결핍된 요소를 보강하는 작업은 조직 내에서 이 요소를 창출하는 ‘내부 작업’과 외부로부터 이 요소를 수혈받는 ‘외부 작업’ 모두로 구성되는데, 어떤 조직의 내적 생산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전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또한 혁명조직은 자신의 발전단계에 따라 각각의 요소들의 비중을 달리 한다. 혁명조직이 자신을 수립하는 단계에서는 응집적 요소가 가장 선차적인 조건이고, 이것이 없다면 일관된 성장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부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요소를 결집하고 규율을 부여할 수 있는 응집적 요소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의 맹아는 대단히 의식적이고 투철할 뿐만 아니라 노선과 방향성을 분명히 한 응집적 요소들이 결집하는 것에서 생겨나며, 당은 응집적 요소가 자신의 연속이자 표현으로서 중간적 요소를 형성하는 시기에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 중간적 요소들이 대중적 요소를 결합시키고, 응집적 요소와 긴밀하게 연결짓는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을 때 어떤 시기에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력 있는 당이 창조된다.  
  따라서 혁명정당 창건은 응집적, 중간적 요소를 육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점에서 현재 남한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유능한 지도자들, 그리고 이 지도자들을 노동자계급의 선진부분들과 연결시키는 중간간부들을 형성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현재의 남한 혁명조직은 노동자계급의 전위들을 체계화되고 유기적으로 준비된 정치적 군대로 조직하는 데 필요한 지도자들을 선별하고 계발하는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을 정치적으로 성숙하고 조직적으로 투철한 노동해방 혁명가들로 끌어올리는 데 필요한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미래 당의 기간 요원들을 체계적으로 결집시키고 육성할 응집적 요소들은 현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특정한 해결책’(혁명적 노동해방주의)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 계급들의 장단점 및 노동자계급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 정확한 방도를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론적 활동 없이는, 다시 말해서 혁명조직이 대표하는 노동자계급의 힘과 특성을 규정하는 여러 원인들과 이 계급이 발전해 왔으며, 발전해 나갈 경로에 대한 체계적인 탐색과 연구 없이는 지도자들은 형성될 수 없다. 동시에 실천적 활동 없이는, 다시 말해서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자신을 긴밀하게 연결지으며, 노동자계급의 최우량 분자들을 지속적으로 노동해방주의 운동의 지도적 요원으로 인입하고 육성하며, 광범한 노동대중들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들 수 있는 실제 방도들을 부단한 실천 속에서 계발할 수 없다면 지도자들은 형성될 수 없다. 남한 혁명조직은 이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작업에서 성공함으로써, 그리하여 당을 벼려낼 혁명적 지도자들을 부단히 양성함으로써 당창건 운동을 당위에서 현실로, 염원에서 확신으로,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반드시 끌어올려야 한다.

종합을 통한 완전화

  혁명조직이 위력적인 실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풍부”해야 한다.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 없이는 강력한 당을 창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론적, 정치적, 대중적, 국제적, 혁명적, 문화적, 전국적 요소 등을 모두 구비하지 않는다면 완전한 혁명조직을 창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조직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들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초기에는 뛰어난 개별 인물들, 그룹들, 당파들 속에 분산되어 있기에 이들을 종합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혁명조직을 세워낼 수 없다. 그런데 상당히 협소한 지반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소그룹들이나 개인들은 불가피하게 이상의 요소들 중 몇몇만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세력은 이론적 측면에서 발전되어 있는 반면, 어떤 세력은 실천적 측면에서 발전되어 있다. 어떤 세력은 영남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면, 어떤 세력은 수도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각각이 특수하게 발전시킨 이 요소들은 그것이 협소한 한계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배타주의와 편협함’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각각의 세력들은 자신이 발딛고 있는 좁은 지반에서 끌어낸 경험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고, 자신의 특수한 실천감각들을 과대포장하며, 자신들이 발전시킨 요소들과 타 세력이 발전시킨 요소들을 즉자적으로 대립시키면서 특별한 한두 측면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며 대립한다. 이런 배타주의와 협소함, 대립은 하나의 혁명조직 내에서도 각각의 인물들의 특성과 발딛고 있는 지반 등의 차이를 반영하여 나타난다. 그러나 만일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이런 요소들이 제대로 집중되고 종합될 때에는 그것은 풍부함, 다채로움, 편향에 대한 안전판을 산출한다. 응집적인 요소가 갖춰야 할 자질은 이처럼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요소들을 편협함과 배타성으로부터 구출하여 완전하고 풍부한 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혁명조직에서 확립된다면, (물론 동일한 정신과 노선이라는 기초 위에서) 각각의 개인들, 부분들이 발전시킨 특별한 감각과 그들이 발딛고 있는 특수한 지반은 서로간에 불필요한 대립과 반목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힘으로 전화한다.
  정신상의 통일성, 다시 말해 근본 노선상의 통일성을 혁명조직을 굳게 단결시키는 기초로 놓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단순히 사소한 실천상의 동질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견고한 통일성의 초석을 놓을 수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협소한 부분적 실천으로부터 대두되는 통일성은 대개의 경우, 각각의 운동가들, 그룹들이 기반하고 있는 실천공간의 동일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경우, 이 통일성은 실천적 통일성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결코 견고하지 않다. 그것은 서로 활동하는 공간, 지역, 사업장이 다르거나 하면 곧장 붕괴될 그러한 종류의 통일성에 불과하며, 결코 “완전한 종합”에 도달할 수 없다. 이런 정도의 통일성으로는 결코 전국적이며 정치적인 원대한 통일을 이룰 수 없으며, 사소한 충격만 가해져도 또는 혁명조직의 활동공간이 조금만 확장되더라도 곧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 이런 세력은 결코 이론적 요소들과 실천적 요소들을 종합할 수 없기에 불가피하게 이론적 요소 혹은 실천적 요소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단지 하나의 면만을 완고하게 발전시키게 된다. 그 결과 이론가들은 실천적 힘을 박탈당하며, 실천가들은 편협하고 즉홍적인 실무가 수준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비해 강령, 전술, 조직 노선상의 굳건한 통일에 기초한 조직은 구성원들이 서로 판이하게 다른 지반 위에서 실천을 전개하더라도 그것이 배타주의와 편협함, 불필요한 대립을 낳는 것이 아니라 당면 상황에 대한 전체적이고도 균형잡힌 이해, 편협한 지역적 시야와 단사주의를 뛰어넘는 원대한 시야, 사소하고도 지엽적인 대립을 피하면서도 주요하고 결정적인 문제들에 관심과 토론을 집중시킬 수 있는 힘을 낳도록 추동한다. 이 경우, 각자가 발전시킨 특별한 요소들(가령 이론적 역량과 실천적 역량, 조직적 투철함과 대중과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종합되어 풍부하고 완전한 것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전화하며, 서로 상호융합하여 높은 단계로 상승한다. 서로는 서로를 존중하게 되며, 자신의 단점을 상대방의 장점으로 보완하고, 자신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메우게 된다.

종합의 수단

  이제 우리는 “종합화”의 “수단”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 그 수단은 첫째, 근본화 능력, 즉 정신상의 경향을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근본화 능력이란 표면적으로는 상이해 보이는 것 속에서 동일한 것을 추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일해 보이는 것 속에서 상이하고 대립되는 것을 비판적으로 추출할 수 있는 힘이다. 이 힘에 기초하면, 통일과 분리는 아카데믹하고 배타주의적인 눈에 따라서가 아니라 실천적이고 계급적인 눈에 따라 추진하며, 토론은 “이론적”(이것은 토론을 지엽말단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화시켜 수행할 때 나타난다)으로 전개할 수 있게 된다. 둘째, 진지함과 책임감이다. 구체적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생생한 실천 감각을 발전시키지 못한 영역에서는 다른 동지의 견해와 감각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는 그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성장 중에 있는 미완의 혁명조직이 자신을 냉철하게 객관화시키는 능력과도 연결된다. 진지하고 책임성 있는 혁명조직은 각각의 시기에 자신의 성장 정도에 정확히 부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정식화하고 결론을 끌어낼 수 있으며, 아직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사안과 관련해서는, 실천과 경험을 통한 검증의 결과에 맡겨두면서 공란으로 기꺼이 남겨둘 수 있다. 이는 아직은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 없는데, 해결책을 둘러싸고 소모적인 논쟁을 거듭하고 쓸모없이 대립하는 분파주의적 습성을 추방한다.
  셋째,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로 이어지는 역동적 토론과 경험의 끊임없는 일반화, 이론의 끊임없는 실천화이다. 이론과 실천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없다면 편향은 불가피하다. 이 경우 혁명조직은 경험주의의 늪 아니면 아카데믹한 습성에 빠져든다. 실천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불가피하게 소중한 경험을 전조직적 재산으로 전화시키지 못하며, 다른 운동가들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지도 못한다. 각각의 상이한 경험들은 서로를 대립시키고 완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배타주의를 낳을 뿐이다. 또한 운동가들은 단지 개인적 경험에 의지해서만 실천할 뿐, 전세계 노동자 운동의 경험들로부터 빨아들인 자양분에 기초한 원대하고도 치밀하게 실천할 수 없게 된다. 이런 경험주의와 편협함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모든 성원들의 이론적 능력을 배양하는 것, 그리고 이론적으로 일반화하여 토의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론과 실천의 유기적 결합과 종합을 통해 전진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지역의 활동에서 전국적인 요소를 추출해 내고, 일국적 활동에서 국제적 요소를 추출하면서 운동을 확장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역동적인 활동이며, 운동이 발전하고 보다 높은 지반 위에서 통일되는 데 기여하는 유일한 활동이다. 민주집중제의 견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상의 기초들이다. 왜냐하면 어떤 민주집중제적 형식도 내용적 기초 없이는 무망한데, 이 내용적 기초는 다름 아닌 “정치적 통일성”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살아 있고 약동한다면, 혁명조직은 그것에 부합하는 민주집중제의 형식을 채택하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기초 위에서 ‘토론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에 대한 확고한 승인’을 결합시켜야 한다. 민주집중제가 없다면 종합화는 모두 허구적인 것으로 전락하며, 어떤 실제적 단결도 낳을 수 없다. 왜냐하면 종합화 작업은 오랜 기간에 걸친 부단한 역사적 작업을 통해 성장하며 결실을 거둘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는 “점근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종합화를 위한 충분한 토론과 검토의 기회를 갖지만, 그 이후에는 “민주집중제”에 기초해 결정을 내려야 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종합화 작업’은 행동으로 승인되는 것이며, 그 구체적 결실을 맺는 것이다.

혁명조직의 운영원리

  정당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하려 한다면, 혁명조직은 불순한 요소들을 일정한 정도로는 포함할 수밖에 없다. 만일 완벽하게 순수한 것으로만 자신을 제한하려 한다면 불가피하게 혁명조직은 소수의 혁명가들만의 좁은 한계 내로 갇히고 말 것이다. 문제는 “정도”에 있으며, 어느 경향이 어떤 경향을 무의식적 도구로 이용할 것인가에 있다. 만일 정도가 지나쳐서 모든 다양한 조류들이 마음대로 공존한다면 그것은 “노힘”과 같은 회색의 무정견한 세력으로 떨어진다. 만일 기회주의적 경향이 혁명적 경향을 압도한다면, 그것은 기회주의 세력이 혁명적 세력을 자신의 무의식적 도구로 이용하는 비극적 상황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역이라면 일정 정도로 불순물이 섞이는 것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적합한 한계 내에서 (물론 혁명조직의 발전단계와 성숙정도를 고려하면서) 조직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을 겁낼 필요가 없다. 진정 강력한 조직이란 단 하나의 불순물도 포함하지 않은 완벽하게 순수한 조직이 아니다. 그것은 극소수의 선비 혁명가들만을 모집하고 있는 그런 순수주의 소그룹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을 뿐 강력하고 위력적인 혁명그룹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진실로 강력한 혁명조직이란 약간 미완이며, 일정 불순한 요소들이 섞여 있을지라도 그것을 제어할 수 있고 소화할 수 있는 조직, 그리고 그것들까지도 무의식적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조직이다. 심지어 일정한 편향을 가지고 있는 불안정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호령하고 이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조직이다. 가령 무정부적 생디칼리즘 경향은 그 자체로는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에 대립하며, 격렬하게 맞서는 경향이다. 그러나 만일 이 경향이 일정한 한계 내로 제한되며, 조직 내에서 극소수파의 지위에 머물러 있다면, 또한 그것이 조직의 규율에 복종한다면 그것은 혁명조직에서 “해독제”로 기능할 수도 있게 된다. 이 경향은 혁명조직이 관료화되는 징후를 경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기능할 수 있으며, 과도한 중앙집중주의를 제어하는 안전판으로 기능할 수도 있게 된다. 레닌의 경우, 일부 아나코-생디칼리즘 세력을 계속 끊임없이 교정시키면서 제3인터내셔널에 결합시켰고, 이를 통해 국제 노동자계급운동을 강화시켰다. 이처럼 문제는 지배적인 경향이 무엇인가에 있으며, 응집적인 요소들이 불완전한 경향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이용할 수 있으며, (적절한 시기에는 과감히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혁명조직에는 다양한 부류의 운동가들이 참여하지만, 따라서 모든 성원들이 진실한 혁명가일 수는 없지만 다음의 점은 분명해야 한다. 혁명조직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정신은 오로지 투철한 노동해방 혁명가들로부터만 나와야 한다.
  이는 곧바로 “중핵의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혁명조직의 지도자들은 모든 운동가들에 대해 무한한 낙관주의(변화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견지하지만, 동시에 모든 운동가들에 대해 가장 날카로운 비관주의(운동가들의 한계에 대한 엄밀한 인식)를 결합시켜야 한다. 각각의 운동가들, 그룹들, 당파들의 경향성은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특히 운동에 입문한지 수년 이상된 개인들, 자신의 활동을 개시한지 오래된 그룹들, 당파들은 결코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이들의 경향성, 한계들은 상당히 고질적인 것이며, 그것이 단순히 관념적 교화로 손쉽게 극복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지도자들은 이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것은 관념적 교화가 아니라 일상적 활동 하나하나를 통해 오랜 기간 동안 수행해야 한다)을 끈질기게 수행함과 나란히 이들의 한계들이 조직에 해악을 미치지 않도록 경계하고 보장책을 반드시 마련해 두어야만 한다. 이 보장책 중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의 중심기구의 구성을 혹독한 검증대를 통과한 철두철미한 혁명분자로 제한하는 것이다. 1장에서 언급한 응집적 요소의 자질에 가장 부합하는 투철한 혁명가들만으로 중심기구를 구성하고, 이들을 조직의 중핵으로 명확히 세워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혁명적 노동해방주의에 굳건하게 입각하고 있음이 증명된, 정치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자들이 중핵을 구성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들이 조직의 여타 부분들을 정확히 지도하고, 불완전한 운동가들과 일정 미숙한 경향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조직의 중심부에 비혁명가적 경향이 침투하고, 위험한 경향들이 파고드는 것을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이 어떤 실책과 오류를 범하건, 그리고 그들이 어떤 파괴적 역할을 수행하건 그것이 조직에 별다른 타격을 미칠 수 없도록 대비할 수 있다.  

혁명조직의 훈련에 대해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데서 관건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즉각 실천에 투입할 수 있도록, 잘 조직되어 있고 준비되어 있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느냐이다. 어떤 상황이 유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렇게 준비되어 있고 또한 전투정신으로 충만해 있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상황은 그냥 스쳐지나가며, 혁명조직은 그것에 아무런 각인도 찍을 수 없다. 이 경우, 상황이 유리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혁명조직이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일상적 작업은 능동적으로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끈질기게 작업하는 것이다. 그런데 혁명조직이 가장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할 가장 결정적인 국면은 다름 아닌 혁명적 투쟁 시기다. 따라서 혁명조직을 “일상적 시기”의 정신이 아니라 “혁명적 시기”의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혁명적 시기에 빛을 발하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전투조직일 수 있도록 일상적 시기에 잘 준비하고 단련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전투부대는 평상시에도 “가장 가혹한 전쟁” 시기에 대비할 수 있는 대형과 정신으로 편제되고 훈련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부대는 “영국 황실 문앞을 지키는 장난감 병사”들이지, 적의 대포가 불을 뿜는 속에서도 적의 진지를 향해 돌격하는 전투부대가 될 수 없다. 혁명조직도 동일한 방식으로 훈련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혁명조직은 결정적 상황에서 준비된 전투세력으로 자신을 우뚝 세워낼 수 없으며, 무기력한 실체를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조직은 다음 번 혁명의 파고가 밀려오기 전의 휴지기에 과거 혁명의 전통을 수호하고, 혁명적 정신을 보존하며, 혁명의 교훈을 추출하여 이를 다음 번 혁명에 넘겨주는 “혁명 기억의 담지자”로 기능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현실적 수단들의 총체들을 계발하고 이를 부단히 발전시키는 작업이 일상적 시기에 혁명조직이 전개하는 활동의 기초를 구성한다. 이는 혁명조직의 정치활동 문제와 곧장 직결된다. 과거 혁명의 위대한 전통과 정신을 수호하고, 이 혁명이 패배한 이유를 정확히 정식화하여 다가오는 혁명을 준비하는 것은 혁명과 혁명, 전투와 전투 사이의 막간극 - 이 막간극은 3-4년일 수도, 30-40년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세계사적 잣대가 적용된다. - 에서 혁명가들의 정치적 임무이다. 이는 과거 혁명의 교훈에 대한 이론적 정식화, 골간 핵들과 투철한 고참 혁명가들의 육성, 혁명 정신과 기치의 보존 등으로 구성된다. 가령 맑스는 1848년 유럽 혁명기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끌어냈다. 그는 생애에서 1848년을 제외하고는 다른 유럽 혁명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이래 모든 시기에 그가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노동자 당파의 실천적 태도를 결정하기 위해 항상 돌아왔던 지점은 다름 아닌 “1848년 유럽 혁명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나타난 각 계급과 조류들의 입장, 태도에 기초하여 정치적 대응을 결정했으며, 바로 그 시기의 혁명적 정신으로 실천했고 자신의 당파를 무장시켰던 것이다. 이 점에서 막간극의 평화적 정서에 적응하고 영합할 수 있을 뿐인 “노힘”이나 “한노정연”이 평화의 시기에 번성하는 나약한 기회주의 거품이라면, 혁명 정신에 기반해 부단히 훈련하고 투쟁하는 노동해방주의 조직은 혁명 시기에 쭉쭉 뻗어나가는 혁명적 중핵이다.
  이런 혁명적 중핵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혁명조직은 일상적 시기에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고 충분한 예행연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파업과 전투적 투쟁 국면에서 우리의 정확한 각인을 찍는 역동적 활동을 정규적 활동으로 정착시키는 것, 혁명적 결단의 시기에 결연하게 투쟁할 수 있도록 투철한 혁명적 규율을 집행하고 무한한 헌신을 조직활동의 규범으로 세우는 것, 가장 정력적이고 결단력 있으며 자기 헌신적인 강고한 분자들을 조직의 중핵으로 육성하는 것 등으로 구성된다. 또한 혁명조직은 이론적 활동과 훈련을 통해 과거 혁명과 부단히 대화하고, 혁명운동의 역사적 숨결을 호흡하며, 자신의 모든 실천을 미래 혁명과 연결시켜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서 혁명조직은 혁명적 투사들과 전국적 연결망을, 그리고 국제 노동해방주의 세력의 견고한 연결망을 아무리 작더라도 끈질기게 조직해야 하며, 그리하여 결정적 국면에서 이 연결망을 봉기의 망이자 혁명을 지도하는 망으로 끌어올릴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이런 작업만이 종이호랑이와 같은 지위에서 포효하는 맹수의 지위로 혁명조직을 격상시킬 수 있으며, 날쎄게 먹이를 나꿔채는 매처럼 혁명의 기회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붙잡으며, 적들의 모든 약점을 예리하게 공격하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위대한 혁명조직을 창조할 수 있다.
  혁명 정당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혁명조직은 언제 어떤 시기이건 자신이 전개하는 실천활동의 전노선을 “혁명을 조직하고 준비하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세워내야 한다. 눈앞만을 보는 세력, 그리하여 단지 당으로 이름 붙여진 파벌이나 조합주의의 정치적 변종만을 생산할 수 있는 세력과 혁명조직은 판이하게 달라야만 하는 것이다. 혁명조직은 “응집적, 중간적, 대중적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짓고”, “자신이 보유한 모든 힘들을 종합하여 부단히 완성체로 전진하며”, “혁명의 시기에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일상적 훈련을 전개”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멀리 보며, 치밀하게 준비하는 혁명조직이라면 우리 노동자계급의, 우리 혁명가들의 참모부 - 노동해방주의 혁명정당 - 를 건설하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전진하는 혁명조직이라면 그 어떤 난관도 뚫고 기필코 승리의 고지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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