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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관악에서의 지난 1년에 대한 회고(2) - 민노당 학생위원회

  술 먹고 들어와서 좀 정신이 없긴한데 블로그가 너무 재밌는 것 같아서 글을 또 쓴다. 오늘은 무

 

려 회를 얻어먹었다. 아주 오랜만에 먹는 회였다. 아 뭐 이건 허튼 소리고 하여튼 지난 1년에 대

 

한 회고를 다시금 이어갈까 한다. 보시려면 또 아래를 클릭



  민노당 학생위원회와 인연을 맺게된 건 어떤 계기에 의해서였다. 바로 5월 4일에 있었던

평택 대추분교 침탈 사건 때문이었다. 그 날 관련 보도를 보고 나서 한동안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내막을 자세히 알기 위해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제도권 언론의 보도 내용보다도 더욱 현지의 상황이 처참했던 것이다.

 

 

  사실 5월 3일 밤에 한길반 컴티에 관련 글이 올라왔고 같이 가자는 제안도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 반 학우들이 7명 정도 갔던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가지 못했, 아니 가지 않았다.

단지 다음 날에 '1교시'를 들어간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도

일단 그러한 집회나 상황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데에서 나오는 두려움, 무서움이 더 큰

이유로 작용했던 것 같다. '연행'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해보았기에 그런 것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장 적합한 핑계로 수업을 들어가야 된다는 것을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행히 일종의 부채의식을 지고 있었던 7명의 학우들은 연행되지 않았다.(무사히 돌아온

사람들도 물론 연행된 사람, 주민들에게 부채의식을 지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대추분교가 무너진 후 스스로에게 계속 책망을 했다. 나는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가, 단지 이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여진, 아니 스스로 그렇게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분명히 그것은 옳은 상황이 아니었고 행동을 했어야만 했는데. 5월 4일 이후로

이러한 생각이 계속 나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

다.

 

 

  그러한 나날을 보내던 중 드디어 기회(?)가 왔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 확장 저지를 위한

제2차 범국민대회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가기로 결심

했다. 일단 같이 갈 사람을 구해보았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5월 4일 대량 연행의

경험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의 가치판단의 문제 때문에 학우들이 많이 망설였던 것 같다.

선배에게도 연락을 해보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결국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평택으로 향했다. 사실 그때는 기차를 타고 바로 갈 수 있다는 것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이후 대추리, 도두리로 가는 소풍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져 거기에 합류

해서 가게 되면서 이 방법을 알게 되었다)지하철을 타고 100분 넘게 걸려서 평택역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나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집회 참가자로

보이는 사람들을 따라갔다.(아마 전교조 교사였던듯) 시내버스를 타고 무슨 사거리인가

에서 내렸다. 집회의 대오가 보였다. 하지만 무척이나 낯설었고 두려웠다. 전경이

바로 앞에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였기 때문이리라. 예의 수줍음으 

인하여 모르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기억났던 것은

제24대 동연 회장이었다. 선관위 시절 같이 일한 경험으로 인해서 그나마 안면이 있었고

연락처도 알고 있었다.(이 사람에 대한 가치판단은 나중에 하도록 한다)

 

 

  연락을 했더니 자기는 지금 여기에 없다고 했다. 그렇게 얘기하면서 민노당 학생위원장

(누군지 다들 아시겠죠?)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겨우 겨우

대오에 합류하게 되었다. 처음에 만나서 하는 말들이 선관위 동지였다. 사실 이 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선관위 임기는 이미 끝났지만 중립적이어야 하고 중립적으로 행동했던

그 동안의 활동이 왠지 왜곡 됐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자면 선관위의 구성도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선관위는 신입생 4명, 재학생 4명으로 구성되었다. 신입생은 정치성향은 차치하고

라도 정치조직과는 별 관련이 없으니 앞에 말했던 선관위의 지위와 임무에 있어서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재학생 중 2명은 내가 이전에 썼던 글에서 경멸한 선본과 아주 밀 

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관위가 결정을 내릴 때 있어서도 어쩔 때는 편향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4월 선관위는 정말

무난했다. 징계를 최대한 주지 않으려고 했고 그것 때문에 욕도 별로 안 들은 것 같다.

 

 

  아, 거기서 새로운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날 간 집회의 성격은 '대중집회'이니 별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중집회'와 '선도투쟁'의 차이도 알려주었고 '선도투쟁'을 하면

연행되거나 구속되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2004년 국보법 철폐 투쟁을 예로 들며. 이

사안은 고등학교 때부터 관심을 많이 가졌던 문제이다. 직접 참여하거나 간접적으로 도와

주지는 못했지만 심정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이 국보법

폐지 전략을 폐기했을 때는 정말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말대로

그 날 집회에서는 별 다른 사건도 없었고 언론이 과장 보도한 '죽봉'이나 '쇠파이프'도 등장

하지 않았다. 아마 지도부의 판단으로 '평화집회'의 기조를 유지하려고 했다는 것을 언뜻

들었다. 이렇게 돼고 나서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한 가지 감정은 국민들에게 더 이상

호응을 받을 수도 없고, 지지를 받을 수도 없고, 공감을 받을 수도 없는 불법폭력시위를

안 해서 다행이라는 감정이었고 다른 한 가지 감정은 대추리를 진입하지도 못한 데에서

나오는 무력감이었으리라. 그렇게 끝난 후 그 사람들과 뒷풀이를 하고 하루가 지나갔다.

 

 

  그 이후로 한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민노당 학생위원장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평택미군기지 이전 저지를 위한 평화마라톤'에 참가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였다. 원체 뛰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재밌는 행사라고 생각

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행사 준비를 위해 평택에 행사 전날에 갔다. 숙소로 갔더니

(그 지역의 공부모임방이었던 듯하다) 민주노동당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위원회 사람들뿐만

아니라 90년대 초반 학번의 당원들도 몇몇 있었다. 아마 학교에서 나름의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겠지.

 

 

  다음 날의 준비를 끝내고 잠을 청했다. 새 날이 밝아왔다. 오랜만에 무언가 남과 경쟁을

한다는 생각에 왠지모를 흥분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아 덧붙여 말하자면

이 마라톤은 단축마라톤으로, 5km를 뛰는 경기였다. 처음부터 치고 달려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초반에 너무 많은 힘을 소진했다. 그러자 점점 뒤쳐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에

는 어떤 여자분에게까지 추월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묘한 감정이 일기 시작 

다. 우스운 얘기지만, 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체력도 달리고 너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결과는 참가자 2~300명중 11위였다. 그 여자분은 12위를

했고, 여자 중에 1위를 했다. 결승선을 끊고 나서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떠한

감정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참 재밌는 과정과 결과를 초래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그 날도 별탈없이 지나갔고 학위 사람들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시험 시즌도 점차 다가오고 있었고, 다른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

다. 그런데 갑자기 민노당 학생위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달리 만날 일도 없고 볼 일도 없는

데 무언가 이상했다. 맥주나 한 잔 걸치자는 것이었는데, 거부했다. 인간적으로는 내 자신이

무척 냉정하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것인데도, 목적

없는 만남은 별 의미가 생각하는 나는 달리 만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났으면 정말 좋았을뻔 했다. 하지만 연락이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 왔다. 정말 지겨울 정도

로 말이다. 급기야는 전화 상으로 왜 안 만나주느냐고, 내가 싫냐고라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지 않겠냐고. 이 소리를 듣고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이 사람이 그 동안 호의적으로 대해준 것은 역시나 이런 목적을

위해서였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민주노동당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강요하는 

것을 보고 민주노동당 자체가 싫어졌고 물론 민주노동당 학위도 싫어졌다. 돌이켜보면,

그 사람에게는 그러한 행동이 조직화 방식이고, 운동 방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충분한

논의와 대화없이, 그 단체의 성격과 행동 방향에 대한 토론 없이 무작정 가입하자고 하는

것은 새내기를 '낚는'다고밖에 볼 수 없는 행위이다. 이것 때문에 기분이 극도로 나빠져서

똑같은 방식으로 응수했다. 가입하기 싫다고. 그리고는 전화가 끊어졌다. 이후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종종 마주칠 때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길 멀리서 얼핏

보이면 피해다니기까지 했다. 무언가 이상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행동해야 되는

걸까? 순진함을 자책하면서 다음부터는 처음부터 모르던 사람으로 낙인찍으면서 그들을

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악화된 관계를 더욱 더 악화시키는 일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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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관악에서의 지난 1년에 대한 회고(1) - 선관위

기숙사 밖을 잠옷 차림으로 나갔다가 얼어 죽을뻔 했다. 정말로 겨울이라는 것을 실감케하는

 

순간이었다. 이 쌀쌀한 날씨만큼 올해 관악도 전반적으로 쌀쌀했다. 단지 날씨뿐만 아니라

 

여러 환경적인 면에서 그렇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를.



  서울대에 입학했다. 합격 통지를 받아들고 온 가족이 기뻐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활동'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워낙 정치적

지향성이 강했으니 말이다.(하지만 실제적으로 한 것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가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49대 총학생회 재선거 선거관리위원이었다. 학생회관에

서 공고에 있는 연락처를 보고 바로 연락했다.(아님 바로 총학실로 갔던가? 이것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첫 회의가 소집되고 선관위원들의 면면을 보았다. 4명은 재학생, 4명은 신입생이었다. 인사

를 하고 3, 4월에 정말 열심히 선관위 일을 했다. 이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다른 7명보다

도 말이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아픔도 많이 겪었다. 3월에 수습 시험을 통해 들어간 '교지관

악' 활동을 게을리 해버리고 만 것이다. 수습 교육을 몇 번 빠지자 당시 교지관악 편집장이었

던 김지산씨(이 분은 원래 성을 밝히지 않는다. 아마도 여성주의적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나

는 굳이 그렇게 써주지는 않겠다.)는 나더러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빠

진 교육을 보충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그만 둘 것인가.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전자를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을 강요받을 그 당시에는 무척 힘든 상황이었다. 아마 그 때가 투표율 저조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담배에까지 손을 댔으니 말이다.(사실 나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특히 동갑내기 녀석들에게. 그런 내가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그러한 요구에 자제력 같은 것을 별로 없었던 그 시절

에는 속으로 화가 났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에 올인했다.

 

 

  투표 마지막 날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전날까지 누적 투표율이 약 43%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50대 총학 선거는 총 누적 투표율이 이것도 안 되니 그것보다는 낫지만)

그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자신을 책망했다. 선관위가 홍보를 못 한 것일까?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걸까? 이러한 고뇌 끝에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종 행동을 택했다.

 

 

  그것은 바로 '마임'이었다.(혹시나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 중에 본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

겠다.) 그것이 투표율을 얼마나 올릴 수 있을 지, 영향이나 끼칠 수 있을 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달리 선택의 방법은 없었다. 우리 반 애들에게 연락을 해서 도움을 줄 친구들을

구했다. 그리고 중도, 자하연, 해방터 등에서 '불나비', '희망은 있다' 등등의 마임을 하면서

투표를 독려했다. 정말 이 때는 미쳤었다. 선거 성사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대학

시절 처음의 좌절의 기억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글을 빌어 그때 도와준

한길반 학우들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날 기적이 일어났다. 투표율 50%를 넘은 것이다. 이 당시에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뻤다.(이후에 생각이 바뀌긴 했지만) 그리고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다.

마지막 날에 각 선본의 후보들이 밤 늦게까지 투표를 독려했다. 그러나 제49대 총학

재선거에 출마한 세 선본 중 한 선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직접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이후에 나와 인연을 맺다가 지금은 거의 인사도 안 하게 된 조직이다. 제25대 

사회대 선거에서는 My 머시기로 출마한 선본이다.) 게다가 그 한 선본은 바로 내가 투표한

선본이었다. 인간적인 배신감과 경멸감을 느꼈다. 아마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그러한 감정을 느낀 대상이었던 것 같다. 동시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투표를 독려하는

황라열씨의 모습에서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개표장에서 수락 연설을 통해서

(나는 개표장에서 투표 기간에 죽도록 한 '불나비' 마임을 선관위 새내기 발언 시간에

또 하였다.) 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무관심을 돌리겠다고, 학우들의 지지를 받는 학생회

를 만들겠다고 말을 했을 때는 정말 울뻔했다.(물론 이에 대한 판단도 나중에 바뀌니

오해 마시길)

 

 

  개표가 끝나고 총학생회가를 불렀다. 사실 이 때 총학생회가를 알 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물쩡어물쩡 따라 부르는 총학생회가는 정말 감격적이었다. 나는 이 순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대학 졸업 전까지는.

 

 

  그렇게 나의 3, 4월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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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캐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를 보고 나서

  이 영화는 물론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배경과 설정은 정말 근대스럽다. 남자 주인공은 신

분이 대장장이이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왕국(왕국이 아닐지도..)의 공주(왕국이 아니라면

그 영토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딸)를 좋아한다. 이 시대는 근대와 전근대 사이이기 때문에

물론 그는 함부로 이 공주를 넘볼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고난에서 공주를 구하기 위해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주에게 호감을 산다. 그리고 공주는

원래 약혼하기로 되어있던 '준장'(아무래도 섬이다보니 이런 신분도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듯하다.)을 내팽개치고 결국은 남자 주인공과 함께 하는 길을 택한다. 이는 자유/평등/형제애로

대표되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신분을 초월한 자유연애, 집단에서

의 위치보다 개인의 위치가 좀 더 중시되는 시대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생각할 건 딱 이 것뿐인 듯하다. 이 영화의 나머지는 스펙터클한 전투씬, 대항해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어드벤처적 요소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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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평] 김전일을 보면서 느끼는 것

0. 소년 탐정 김전일은 총 148화로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이다. 100화를 넘게 보면서 나름대로

 

많은 것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아래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1-1. 주술적 요소를 인간 세계에서 분리

 

  이건 사실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에서 종교가 세속화된 과정을

상기해보면 곧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미신이나 귀신 따위가 인간

세계에 있지도 않고, 영향을 주리라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여러 살인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를 살펴보면 살인귀의 전설이나

여러 미신들의 이야기가 존재하거나 만들어진 곳이다. 그리고

김전일의 일행은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에 근거해

서 어떤 초인간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존재가 그러한 사건을 일으

킨다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하지만 김전일은 항상 이러한 것들을

믿지 않고 그러한 이야기나 전설을 빙자하여 내부의 누군가가

살인사건을 행하고 있음을 '신념'으로 보일 정도로 항상 사고한다.

이를 보면 김전일은 철저히 '과학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2.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

 

  소설 '뫼비우스의 띠'를 보면 앉은뱅이와 곱추는 원래 그 사회

내에서 핍박받는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핍박을 직접

적으로 가한 존재에 대해 '가해'를 하는 '가해자'로 변하게 된다.

이는 바로 앞면이 뒷면이 되고 뒷면이 앞면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라는 제목을 상징하는 내용이다. 김전일의 대부분의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밀실 살인, 연쇄 살인, 내부 살인

이라는 김전일 추리 사건의 큰 특징 하에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김전일의 추리와 추궁 끝에 자백을 하게 된다. 가해자의

얘기를 들어보면, 가해자가 죽인 여러 '피해자'들은 바로 가해자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사람을 죽인 '가해자'들이다. 살인사건을 일으

킨 사람을 무작정 욕할 수만은 없다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살인은 정당화 돼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 김전일은 살인이

옳았다고 주장하는 가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연 하늘 나라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살인을 한다고

편해질까요? 당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사람들을 죽임으로

써 당신도 그들과 똑같은 부류가 된 것일 뿐입니다."

 

 

 

 

 

1-3. 항상 정의는 승리한다 

 

  사실 이 명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역시 김전일

은 창작물의 장점을 발휘하여 언제나 범인을 밝혀내고야 만다.

이러한 모습은 보는 사람의 가치체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비록 현실은 부패하고, 모순과 부조리가 판치고 있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이데아)은 김전일에 나오는 것처럼 정의가 죽지 않

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으며 가해자도, 피해자도 함께 잘 살 수 있

는 세상이라는 것이고 이는 아까 말한 명제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화시킨다. 그리고 이 명제와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자각을 함으로

써 현실에 대해 더욱 더 비판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현실 변혁

적인 입장을 강화시키는 하나의 동인으로써 작용할 수도 있다.

 

 

 

 

2. 결론

 

  김전일과 나는 비슷한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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