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⑦
시베리아여행의 기억-⑦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구한말, 연해주에는 다양한 조선인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엔 농사지을 땅을 찾아서, 나중엔 항일독립운동을 위하여 조선 팔도 경향 각지에서 소문을 듣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농업이민지에서 차츰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의 근거지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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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최재형

어느 시대나 선구자는 있게 마련이다. 연해주에 고려인촌을 형성한 이래 이들의 버팀목이 돼준 사람은 최재형 선생이었다. 우리가 흔히 연해주라고 하는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주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을 발행하고 의병을 양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최재형 선생이 감당했다고 전해진다. 돈이 없으면 무장투쟁이든 문화투쟁이든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내 한 몸 의지할 데도 없는 나라 잃은 백성들이었기에 너나없이 빈곤하고 힘든 상황에서 최재형 선생만이  손수 많은 부분을 짊어진 명실상부한 대부였다.

최재형은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 1860년 심한 기근으로 고향을 떠나 아버지와 함께 연해주로 건너간다. 그러나 형수의 구박에 더해 배고픔은 여전했고 이를 타개하고자 무작정 집을 나와 헤맸다. 낯선 땅에서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포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 선장에게 발견된다. 최재형은 선장을 따라 6년간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의 '남해항로'를 누비게 된다. 그러는 동안 선량하고 교양있는 선장의 부인에게서 러시아어를 배우고 견문을 넓히며 정교회에 입문하고 고등교육도 받는다. 프트르 세묘노비치의 양자가 되고 러시아 국적도 취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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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가 된 최재형

최재형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을 때는 부동항 건설이 한창이었다. 우리가 세계역사에서 배운 대로 러시아는 겨울에도 바다가 얼지 않는 부동항 건설이 지상 과제였던 나라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들의 희망이었기에 주요 군항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려던 참이었다. 한인 이주자들은 건설노동자로 대거 참여하게 된다.

최재형은 러시아어에 능통했으므로 이일에 수완을 발휘하고 군납으로 큰돈을 벌어 거부가 된다.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게 가능한 위치가 된 것이다. 이러한 선생은 일본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고 러시아는 일본의 사주를 받아 최재형의 사업에 직간접적인 타격을 입힌다. 이뿐만이 아니라 ‘최재형은 일본스파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려 체포하게 만든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여 풀려나오긴 했지만 그들의 방해와 핍박은 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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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20년 일본은 러시아 혁명기를 틈타 연해주를 점령한다. 그들은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한인들을 체포하여 학살을 자행한다. 이를 4월 참변이라 부른다. 4월5~7일 선생도 잡혀 참변을 당한다. 선생을 체포한 일본은 정당한 조사나 재판도 없이 이틀 후 살해를 한다. 최재형 선생의 나이 61세 때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재산가로서 편히 살 수도 있었던 선생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지원한다. 신채호와 이광수가 글을 썼던 <권업신문>의 발행인이 최재형이었다. 안중근이 사격 연습을 했던 장소도 최재형이 마련해주었다. 연해주가 항일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의로운 사업가 최재형의 공이 이처럼 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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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 죽음 전후의 연해주 정세

레닌 사후에 30년간 권좌에 있었던 스탈린은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일본에 의해 만주국이 세워지는 것을 보며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황인종들을 화물차와 가축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싣는다. 그러고는 6천키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의 황량한 동토에 집중적으로 소개시킨다. 시베리아와 연해주와 사할린 섬 등에 대한 영유권을 공고히 하려는 스탈린의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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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어(語)로 통칭 ‘까레이스키’라고 불리는, 고려인 또는 고려족들은 토굴을 파고서 몸을 뉘였고, 황무지 자갈밭을 개간하여 집단 농장을 꾸렸다. 악착같이 일하고 강한 생명력으로 버틴 결과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노동영웅 칭호를 받으며 잘사는 민족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빼앗긴 들녘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절규하던 이상화의 시어(詩語)처럼 빼앗긴 조국이었기에 참다운 봄도 없었고, 자유도 인권도 없었기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발해의 옛 땅 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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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조라고 부르던 연해주는 그처럼 우리 민족에겐 슬픔과 회한의 역사가 잔존하는 곳이다. 조선인들이 그곳을 밑도 끝도 없이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극동국립대 학자들에 의해 산성과 평지성터인 ‘스쪼클랴누하성터’와 평지성으로 된 ‘콜라예프카성터’가 발굴되었는데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의 행정구역이 있던 발해 현(縣)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이 연해주는 고구려의 옛 유민들이 살던 곳이라는 얘기다.

158년 전, 자유를 찾아 둥지를 튼 곳이었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린 유대인이나 백인들처럼 독립국가든 자치를 인정받는 형태로든 탄탄하게 권리를 인정받거나 입지를 굳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쇄국에 갇히고, 유교사상에 절어 산 탓이었을 거다. 이민족들과 섞여 사는데 필요한 요령과 열린 사고가 부족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핸디캡이 해방정국에선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조선인들 앞에는 또 다른 얼굴의 악마가 얼굴을 디밀고 나타난다. 무국적자라는 낙인의 악마였다. 언덕에 올라가 오지도 않을 귀국선만 무한정 기다리며 국적 취득의 시기를 놓친 탓이다.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감각을 지니지 못했고 그에 대한 인식이나 대비책도 부족했다.  

그래서 말이다. 역사를 주워 담고 챙길 것이냐 흘려보낼 것이냐의 문제는 중요하다. 그렇다. 우리가 찾은 한인유적지들은 1992년 1월 구 소련이 붕괴된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연해주로 되돌아온 고려인들이 그나마 가다듬고 챙긴 곳이다. ‘까레이스키’들이 뿌리의식을 살려 다시 발돋움 하며 힘을 모은 결과다. 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귀환하여 노후를 의탁하고 있다. 돌아갈 고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

최재형,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 그의 애칭은 페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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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로 태어났기에 국가로부터는 멸시천대만 받던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입지전적인 인물이 되었다. 거부가 되었고, 러시아 국적도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락한 삶이 보장되는 사람이었다. 이 길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서 자금을 조달하고 언론매체를 발행하였으며 한인사회의 미래 꿈나무를 양성하는 교육사업가로 나섰다. 이런 일 때문에 일본의 주적이 되어 제거대상 1순위가 된 인물이다.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경제적인 후원자자로서 독립운동과 국민계몽운동에 헌신한 조선 사람이었다. 이런 이유로 1920년 4월 죄명도 없이 체포돼 주살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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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이 죽고 난 후 그의 후손들은 러시아 곳곳으로 흩어지거나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최재형의 큰 아들 최운학은 러시아 내전 중 전사한다. 그의 둘째 아들 최선학은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추방 시절 모함을 받아 지식인 숙청으로 역시 죽임을 당한다. 그의 부인 엘레나 페트로브나 역시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중앙아시아시아에서 살게 된다. 1952년 7월13일에 사망한 엘레나 페트로브나, 최재형의 부인은 키르기스탄 공화국 비쉬케크 묘지에 안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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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서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의 유패도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선생이 살던 유럽풍의 벽돌집은 지금 고려인사회와 영사관의 도움으로 리모델링이 한창이다. 그곳은 선생이 일본군에게 체포되기 전까지 1년 정도 살던 집으로서 선생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2014년 정의화 국회의장의 추천으로 고려인 연해주 이주 150주년 기념 모국 방문단 120명이 오게 됐다. 그의 후손들도 한국을 찾았다. 독립유공자 최재형 선생의 외증손자인 쇼루코프 알렉산드르(43)씨가 아들 샤샤 알렉산드르(12)와 함께 했다. 이날 열린 ‘국회의장 초청 만찬회’에서 알렉산드르는 정의화 국회의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시철 외증조부의 독립운동 지원에 대해 알렉산드르씨는 “자랑스럽다. 잘 하신 일이라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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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재형,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의병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펼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는 재무총장으로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책임진 재력가, 1909년 10월26일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한 최고의 공로자, 한국 식 이름은 최재형, 러시아 식 이름은 표트르 세메노비츠 최, 그의 애칭은 난로와 같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의 페치카! 페치카!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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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9 12:19 2018/09/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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