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은 이번 7.30 재보선에서 광주광역시 광산 을에서 출마를 꿈꿨었다.

그런데 난데 없는 전략공천이라는 이름으로 그 누구가 공천되는 바람에 나서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경선도 좋다는 의사를 피력했건만 천정배 전 장관의 의사는 묵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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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무례하고도 원칙도 기준도 없었다 사익을 탐하는 사람도 아니고, 국회의원 한 번 더 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니련만....

천정배 전 장관은 광주에 보선 자리가 났으니 국회의원 한 번 더하려고 달려가 나선 사람이 아니련만...

지난 2년 전에 서울에서 선거에 패배하고나서 하방을 하여 옛 민주당의 야성과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던 정신을 회복하려 수많은 고민을 하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의 지지를 무던히도 보내게 만든 분이다.

작년과 재작년 전당대회에서 그렇지 않아도 작은 얼굴이 더 반쪽, 얼굴 빛은 흙빛으로 변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랍고도 안타깝게 만든 분이다.

이번에 보니 지난 번처럼은 흙빛이 아니어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어서 재기하라고 응원을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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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7 10:03 2014/08/07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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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스님의 불심, 자비의 꽃으로 맺히다

                              -조계종 상담개발원장 도현스님의 대학원대학 설립과 교육관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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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스님, 그의 이름 앞에는 비구니 천사라는 이름이 뒤따른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스님이 부처님의 자비 정신을 이웃과 나누기 위해 민간 속으로 뛰어든 것이. 그러나 헤아려보니 35년이 넘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자주 병고에 시달렸다. “내 한 몸도 구제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구나.” 스님은 아픔 몸으로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버거웠기에 누구보다도 건강을 되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 과정에서 한 스님을 알게 됐다. 어려운 학생들을 거두면서 공부도 시키고 병자들에게 침도 놔주면서 사는 분이었다. 도현스님은 그 모습을 보면서 “건강해지면 나도 저 스님처럼 어려운 사람들과 벗하면서 살아야지.”하고 은연중에 발원을 하게 된다.

 

부처님에게 귀의하게 된 동기

도현스님은 절을 찾을 때마다 ‘부처님을 잘 모시면 병도 낫고 건강해진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한문으로 된 불경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지장경과 천수경부터 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어릴 적 인연이 떠올렸다. 친구로부터 불교서적 한권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흥미도 없었던 터라서 한쪽에 밀쳐놓고 쳐다보지도 않은 책이 있었다. 하지만 몸이 아파서 일도 못하게 되니까 어느 날 그 책을 집어 들게 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아픈 내 마음 내 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눈에 쏙쏙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몸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아픈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 자꾸 묻게 됐습니다.”

도현 스님은 절집을 찾는 횟수가 늘고 부처님에 귀의하고 싶은 마음이 점차 싹트기 시작했던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책상에 엎드려서 깜빡 잠이 들었다. “중이 되는 꿈을 꾼 거예요. 꿈속이었지만 전생에 중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달려가 불가에 귀의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스님은 선뜻 허락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우선 부모님께 허락을 맡고 와야 한다고 하셨죠.”

 

출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부친의 죽음과 유언

지금 스님이 돼계신 걸 보면 허락을 잘 맡으셨나 봐요.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깍은 지 1년이 지나서 스님이 집에 들렀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쟤 왜 저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스승 스님을 찾아가서 “병 고쳐 달랬더니 누구 맘대로 내 딸을 데려다가 중 만들었냐?”며 멱살을 잡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러나 스님은 말리는 가족의 손길을 뿌리치고 절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스님의 뒷모습에 대고 “저렇게 살줄 몰랐는데 중이 되다니.... 쟤는 중노릇 절대 못할 아이다.”하면서 엄포도 놓고 야유도 해댔다.

스님 부모님의 종교는 달랐나보죠? “아니에요. 불자였습니다. 기복신앙에 매달리는 정도였던 거죠.”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로는 부모님도 아무 말 없이 지켜봐주셨다. 도현스님은 해인사 약수암에서 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이곳에서 행자스님으로 2년 동안을 묵은 다음에 스승님의 배려로 중앙승가대에 입학을 하게 됐다. 지금은 김포로 옮겨간 승가대는 전에는 안암동에 있었다. 그 즈음 스님은 서울대 병원의 법당에서 일하고 있었고, 속가의 부친을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다. 간경화증에 걸린 부친이 입원을 하게 된 때문이다. 부친은 운명하기 직전에 “나 죽거든 우리 살던 곳에 절을 지어라!”고 스님에게 유언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스님의 아버지는 조각가였다. 필자는 스님의 아버지가 남긴 뿌리조각품들을 보면서 “스님의 아버지는 괴짜 조각가시네요.”하고 필자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거대한 규모의 뿌리조각품을 보면서 우리나라 산천에서 언제 다시 이렇게 큰 나무들을 뿌리 채 구해다가 그 누가 조형물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요. 정말 괴짜시죠? 하하하” 뿌리조각품들 만으로도 전문전시장을 만들어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을 유산으로 남긴 부친과의 인연이 뭐 그리 간단하겠는가. ‘소매 한 번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허공을 가르듯이 무념무상의 상태로 웃는 스님의 모습에서 측량할 길 없는 수행자의 포스가 묻어났다.

 

남양주시에 둥지를 튼 정혜사와 스님의 지난 날

정혜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156-2번지 도현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 주소다. 스님은 이곳에서 일정이 잡힐 때마다 힐링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매주말과 초하루와 보름날은 상설예불도 봉행한다. 주중엔 종로구 우정국로에 있는 조계사 부속 건물인 불교신도회관에서 불교상담개발원장으로서의 공무를 보고 이와 함께 ‘자비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스님의 과거를 더듬어보면 재밌고도 신기한 일이 많다. 학업에 정진할 때다. 상도동에 방 하나를 얻어 자취생활을 하면서 등하교를 하고 있었는데 계를 받은 승려의 몸이란 그가 몸을 의탁하는 곳이 곧 절집이고 포교원도 된다. 도현스님이 자리를 잡은 곳은 상도동의 한 산동네였는데 이때부터 스님과 일반 사대부중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상도동 산 말랭이, 그곳은 당시 부모가 일용직에 종사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마땅히 오갈 데도 없었던지 하나 둘 스님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 아이들을 거두면서 밥도 같이 먹고 숙제도 봐주고 말벗도 돼줬다. 누나 노릇도 하고 보모 노릇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상담공부를 하러 다니던 학우가 찾아왔다. 늘 침울한 표정이던 그녀는 그날따라 활짝 웃는 얼굴로 꽃을 한 아름 안고 들어왔다. 참고적으로 말하면 그녀는 남편이 2살과 3살 박이 얘들을 두고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통과 원망 속에서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불자가 돌아가고 난 자리를 보니 통장 하나와 도장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450만원이 들어 있었다. 스님은 그 즉시 통장 주인에게 “잃어버리고 놔두고 간 것 없냐?”고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대답은 “남편한테 들어온 부조금인데 안 쓰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에게 드리고 싶으니 불사(佛事)하는데 쓰라.”는 것이었다.

이틀이 지났다. 낯모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찾아와서 “저 건너 산동네에 사는 사람이거 자신을 소개하면서, 세준 거 제외하고 450이면 살 수 있는 집인데 너무 안 팔린다.”는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이 집을 사기로 결심을 했다. 만원이 생기면 만원만큼, 2만원이 생기면 2만원만큼 시멘트를 사고 슬레이트를 사서 벽을 고치고 지붕을 수리해나갔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 날엔 불상과 법당을 갖춘, 150여 평의 절집이 됐다. 스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다.

 

상담공부를 계속하며 사대부중과의 소통과 대화를 위한 학문적인 정진

스님은 이런 틈틈이 공부를 계속했다. 복지사 자격증과 보육교사자격증과 상담사 자격증을 따낸다. 돈 없고, 시간 없어서 걸림돌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 하지만 용케도 손이 딸리면 봉사자가 나서서 도와주고, 학비가 없으면 독지가가 나서서 어려운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는데 필요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칠 수가 있었다.

재밌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써 가꾼 절을 두고 이사하는 일이 생겼다. 재개발 붐이 분 탓에 집이 헐리게 생겼다. 스님은 약간의 보상비를 손에 쥐고 상도동의 또 다른 터전을 물색해야 했다. 옮겨 간 곳은 오랫동안 개를 키우던 장소였다. 십 수 년 동안 쓰레기 한번을 치우지 않은 곳이라서 스님이 치운 쓰레기만도 청소차 17대 분량이나 됐다. “삼년만 묵묵히 일하면 천일기도가 된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스님의 표정을 바라보미 그야말로 무념무상인 거다.

기도도량을 쌓듯이 묵언수행을 하면서 호미로 땅을 파고 다져서 목단도 심고 대나무도 심고 작약도 심었다. 세월이 지나 10년쯤 지나니 꽃동네가 됐다. 개 짓는 소리와 악취로 공해를 이루던 동네가 꽃동산으로 변하게 되지 그제야 구청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다.

그 때 상도동 산동네 신도들이 잊지 않고 이번 초파일에 스님을 찾아줬다. 160여 명, 팔당댐이 보이는 남양주 끝자락으로. 상도동에서 절집을 꾸리던 때가 1980년 대였으니, 버려진 아이를 데려다가 씻기고 재우고 어린이 법회를 열면서 돌보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장가가서 아이를 안고 온다. 이름도 지어주고 공부도 시키며 중매도 섰다. 그들은 이웃이자 친한 벗이었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후미진 곳에서 보낸 세월이 무려 35년이다.

9년간의 불교방송 프로그램 진행 후 개발원장에 임명되다

어느 날 불교방송에서 찾아왔다. ‘거룩한 만남’이라는 방송프로를 맡아달라는 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방송 콘셉트는, 아프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찾고 발굴하여 그 사연과 함께 독지가들을 찾아 연결해주기도 하고, 성금을 받아서 도와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한 번은 백혈병 환자가 있었다. 혈액카드를 다 써서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돈을 모아가니 이미 운명을 한 뒤였더라는 것이다. 영안실에 모실 돈이 없어서 하루만 있다가 화장실로 직행하는 죽음도 보았다. 스님은 봉사자들과 함께 협업하면서 이 프로그램을 9년 동안 방송했다.

스님은 올 초(1월 24) 종단으로부터 ‘불교상담개발원장’이라는 보직에 임명됐다. 상담개발원에서는 그동안 2년제 상담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담대학원대학을 설립하여 상담분야의 전문 인력 양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도현스님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13일 오후 6시30분 서울 장충동 앰배서더 호텔 2층 그랜드볼룸에서 ‘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후원의 밤’을 개최했다. 이에 따라서 조계종에서는 ‘(가칭)불교상담대학원대학교 설립 및 교육관 불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문단과 자문위원, 추진위원 등을 임명했다.

이날 사회는 코미디언 김병조 씨가 맡았고, 초대가수로 ‘찔레꽃’을 부른 가수 장사익 씨와 스님가수 삼진스님 바이올리니스트 강형진 씨가 특별출연을 해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개포동 금강선원의 ‘혜거 스님’이 즉석에서 1억 원을 약정해 주는 등 5억 원 성금 모집에 청신호가 켜지는 모습이었다. 이를 토대로 <마음과학의 시대, 불교 상담이 불교의 미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6년부터는 대학원대학교 설립에 본격 착수할 예정이다. 속세에 발을 담그며 중생들과 나란히 호흡하는 스님들의 분투정신이 바로 청정심이 아닌가 싶다.

불가에 귀의하여 마음 가득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이 풍진 세상을 극락세계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많은 스님들의 노고가 오늘도 눈부시다. 도현스님 이하 불교상담대학원대학의 설립에 뜻을 모은 사람들의 불사가 곧 현실로 이루어지길 빈다.

성금을 원하시는 불자는 국민은행계좌: 023501-04-211451,우리은행계좌:1005-902-49601 예금주: 대한불교조계종 불교 상담개발원(교육관) 문의전화 020 737-7378번 (불교상담개발원 교육관)으로 문의하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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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11:14 2014/07/27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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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신화섭 씨의 특별한 ‘약손봉사’

                           [인터뷰] 타인과 세상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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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나눌 것이 많은 사람은 좋겠다. IT 신화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된 빌게이츠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재산의 95%를 나누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내 인생의 후반부는 주로 의미 있게 돈을 쓰는 일에 바칠 것이다.”라고 했다. 그의 이런 인생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란 없을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그러니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당연하고도 지지받아 마땅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이란 인간이 생존을 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웃끼리 오가는 따뜻한 인정 속에 꽃피는 공동체 의식이나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바치는 선을 향한 봉사행위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간 본연의 실천행위이다.

‘약손봉사’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이는 듣기만 해도 힐링과 치유의 개념이 물신 풍기는 말이라서 언제 들어도 몸과 마음에 보탬이 되는 유익한 말이다. 신화섭 그녀는 ‘약손봉사’자다. 오로지 기공으로 단련된 손놀림으로 몸이 아프고 육신이 힘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위로와 치유를 건네는 사람이다. 신화섭씨를 만나서 그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

신화섭 씨는 도봉구 ‘국학평화봉사단’ 팀장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우리역사 강의를 비롯해서 ‘약손봉사’와 ‘환경교육’ 등이 주를 이룬다. 역사 강의는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또는 교사모임이나 어른모임 등을 찾아다니면서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이 수면위로 떠올라 우리 모두가 역사에 대한 자각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던 2002년경부터 시작됐다. 이에 비해서 ‘약손봉사’는 주로 문화센터와 노인정과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봉사인데 봉사경력 30여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 쉬지 않고 상시적으로 하고 있는 일에 속한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몸이 아파 단전호흡을 시작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제가 운동을 하게 된 동기는 제 아픈 몸을 고쳐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이 가난하여 시집을 가면 좀 괜찮을까 싶어서 22살의 이른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결혼생활은 더 심한 고생길이었어요.”신화섭 씨는 가난한 종가집의 맏며느리였던 것이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달프다 하지만 그중 가장 큰 시집살이는 가난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식솔 많은 가난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겪었을 고충이 여간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째 딸을 낳고서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됐을 때도 손쉽게 병원 한 번 못 갔던 설움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붙잡은 것이 국학기공이다. 허리가 아파 서있기도 힘든 처지에서 발걸음 떼어 간 곳이 구민회관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사무소나 구민회관에서 하는 운동프로그램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2~3회가 전부다. 신화섭씨는 국학기공을 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왕에 운동을 하려면 매일 같이 제대로 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단학선원을 찾았고 크고 작은 집중수련회에 참석하며 본격적으로 몸 살리기를 시작했다.

특히 자아수련프로그램은 그녀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수련원에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훨훨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부터 “국학강사는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는 말에 봉사자로 나설 용기를 내게 됐다.

하긴 신화섭 씨에게 있어 봉사의 DNA는 오래 전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첫 봉사는 동네 마을문고부터 시작됐다. 아이들이 훌쩍 큰 뒤로는 봉사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성인으로 옮겼을 뿐이다.

‘내 몸 살린 건강비법’을 남들과 나누자. 그녀는 이 결심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그해 가을날 드디어 A4 용지에 전화번호와 함께 ‘매일아침 10시에 국학기공 봉사를 시작합니다.’라고 쓴 전단지 10장을 만들어서 등나무그늘이 있는 동네 일대에 붙였다. 봉사 전단지를 붙이고 돌아와 ‘내일 한 사람도 안 오면 어쩌나?’하는 걱정에 잠을 설치기도 했지만 약속장소에 갔을 때는 10명쯤 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며 괜한 기우를 떨칠 수가 있었다.

국학기공봉사자로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배꼽 밑 단전치기 30번 하겠습니다! 자 그럼 하나, 둘, 셋...서른! 단전치기 다 했지요? 다음은, 음 다음은(?)”

처음에는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순서가 생각나지 않아서 숨 들여 마시고 내쉬고를 스무 번은 더 했을 것이다. 동작의 순서를 챙겨가며 구령 부르기가 쉽지 않았다. 휴우~ 40여 분을 겨우 채우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아하~ 머리서부터 시작해서 발끝으로 내려가면 순서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하는 깨달음이 번득 스쳐왔다. 한 번의 수업은 다음 시간을 위한 답을 제시해줬다. 요령과 지혜를 터득하는 재미도 좋고 국학기공봉사를 하며 사람들과 소통하는 시간도 보람을 더했다. 신화섭 씨의 삶은 그렇게 점차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신화섭씨의 구령에 맞춰 운동을 잘 따라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추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서 있었다. 그걸 본 신화섭 씨는 남자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공심空心으로 금소를 짚어 활공을 시도했지요.” 공심이란 잡념 없는 깨끗한 마음이고, 활공이란 십전혈(穴) 즉 손끝에 기를 모아 급소를 짚어가며 하는 경락마사지를 말한다. 신화섭씨의 급소를 찌르는 활공봉사가 서너 차례 반복되자 남자의 눈에서는 초점이 잡히고 입에서는 한숨이 터지기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단학선원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비해서 훨씬 대중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국학기공과 ‘약손봉사자’로서 일로매진하는 그녀의 꾸준함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륜과 실력을 겸비한 배테랑 봉사자의 위치에 서게 했다. 주민 센터에서의 강사 활동이나 구청과 학교 각종 복지기관에서 인기초청강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역사 강의에도 열심이시던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역사 공부는 저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저의 봉사경력 30여년 중 후반부는 주로 역사 강의가 차지 하고 있어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귀를 쫑긋하고 있는 아이들만 생각하면 힘이 절로 솟구칩니다.”초등생들 수업은 주로 독도이야기, 국경일이야기 같이 주제를 정해서 이루어진다. 우리 역사는 일제탄압을 비롯해서 해방 이후엔 서구사상문화의 우세로 인해서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유신과 군부독재가 득세하던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부터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 단학계열이 선도수련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또 역사복원을 위한 노력으로‘국학원’을 설립했다. 국학원은 그야말로 종교와 직업에 상관없이 기공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2002년에 설립한 역사연구 단체인데 이를 근간으로 전국의 3천여 군데에서 무료봉사로 첫 활동을 시작했다.

국학기공은 오늘 날 전국의 주민센터에서 생활체육의 몫을 담당하면서 몸 수련에 걸 맞는 이론적 토대로서 우리 민족 최고의 경전인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근간으로 신인합일(神人合一)을 비롯한 천지인(天地人)사상,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과 제세위화와 같은 철학적인 토대를 복원하기에 열심이다.

 

-신화섭 씨의 강의현장과 약손봉사 시범

지난 주 일요일 본 기자는 종로구에 있는 국학원 교육장에서 중.고생들을 상대로 봉사교육을 하는 현장을 참관했다. “어르신들의 약봉지는 중요한 정보일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버리면 안 된다. 개인적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를 잘못 옮기지 말아야한다. 우리 눈에는 낡은 것으로 보이지만 어르신이 지니고 있는 소지품들은 사랑하는 아들딸을 떠올릴 수 있는 추억의 보고일 수 있는 것이다.” 말벗봉사, 청소봉사, 약손봉사 등에서 필요한 실제요령도 뒤따랐다.

신화섭 씨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심기혈정(心氣血精)이란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에너지가 흐르고 에너지가 흐르면 생명의 변화를 일으켜 물질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그녀는 봉사를 하면서 전에는 누가 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국학(國學)을 알고 나서 달라졌다. 내 뿌리에 대해서 알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나니까 스스로 바뀐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렇다. 봉사는 그러니까 인간이 인간을 향해 건네는 따뜻한 햇살이자 싱싱한 바람이다. 그리고 봉사란 그냥 홍익이다. 신화섭 그녀에게서는 따뜻한 에너지 바로 그 치유의 기(氣)가 흐른다.

 

*인터뷰어(박정례 )/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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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7 10:56 2014/07/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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